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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20 (화) 16:49
분 류 사전3
ㆍ조회: 1453      
[근대] 개화기의 문학 (민족)
문학(1860년 이후의 문학)

세부항목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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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국문학 연구사)
문학(참고문헌)

최제우(崔濟愚)가 1860년 동학을 창건하자 문학사에서도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졌다. 최제우는 동학을 일반 민중에게 널리 펴고자 국문가사를 지어 ≪용담유사 龍潭遺詞≫를 펴내었는데, 거기 수록된 작품이 모두 8편이고 따로 전하는 가사가 또 한 편 있다.

서양의 침략이 눈앞에까지 닥쳐와 오래지 않아 변란이 일어날 조짐인데 내부적인 파탄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경고하고, 유학이나 불교가 이미 운수를 다하였으므로 동학으로 위기를 극복하자고 하였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구체적인 표현을 얻은 위기의식과 구국의지는 한 시기 문학의 기본적인 주제를 이루었다.

병인양요로 서양의 침략이 시작되자, 신재효가 〈괘씸한 서양 되놈〉(1866)이라는 가사를 지은 것도 새 시대의 과제를 이해하는 데 긴요한 자료이다. 한문학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두고 진지하게 고민하였으며, 침략을 규탄하고 나라를 구하자는 작품을 계속 내놓았다.

서양의 위협이 닥치고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자,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상소문이 빗발치더니 그 뒤에 벌어진 상황에서는 다각도의 대응책이 작품으로 표현되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 梅泉野錄≫을 지어서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으로 그 시대를 증언하였고, 1910년 망국이 닥치자 〈절명시 絶命詩〉를 남기고 자살을 택하였다.

김택영(金澤榮)은 중국으로 망명을 하여서까지 민족적 영웅을 찾으며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는 시를 짓는 데 힘썼다. 항일의병장들도 싸움터에서 애국시를 지었으니, 유인석(柳麟錫)의 작품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한문의 구실이 전과 같을 수 없었다.

깊은 사상을 담은 글이나 정부에서 사용하는 공식적인 문서라도 한문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한문에다 국문을 섞어서 쓰는 국한혼용문을 택하게 되어서 한문과 국문의 비중이 역전되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문체의 좋은 예를 유길준(兪吉濬)의 〈서유견문 西遊見聞〉(1895)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해인 1896년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순국문을 택해서 국문운동이 더욱 철저하게 전개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국문을 정리하고 문법을 서술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게 일어나서, 이봉운(李鳳雲)의 ≪국문정리≫(1897), 지석영(池錫永)의 ≪신정국문 新訂國文≫(1905) 같은 것들이 이루어졌고, 그 성과가 주시경(周時經)의 ≪국어문법 國語文法≫(1910)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움직임이 문학작품의 문체를 바꾸어놓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자극이 되었다.

신문·잡지·출판을 통해서 전개되던 애국계몽운동에서는 우선 전기(傳記)를 중요시하였다. 박은식(朴殷植)의 〈서사건국지 瑞士建國誌〉(1907)와 장지연(張志淵)의 〈애국부인전 愛國婦人傳〉(1907)은 번안전기이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데 상당한 구실을 하였다.

신채호(申采浩)는 국사상 영웅의 전기를 더욱 중요시해서 〈을지문덕 乙支文德〉(1908)·〈이순신실기 李舜臣實記〉(1908) 같은 것을 내놓으며 구국의 웅변을 토로하였다. 전대의 전통을 빌린 몽유록 또한 널리 이용되며, 상상을 통해서 주장을 펼 수 있게 하였다. 유원표(劉元杓)의 〈몽견제갈량 夢見諸葛亮〉(1908)에서는 제갈량을, 박은식의 〈몽배금태조 夢拜金太祖〉(1911)에서는 금태조를, 신채호의 〈꿈하늘〉(1915)에서는 을지문덕을 등장시켜, 그러한 인물들과 국난극복의 방안을 논의한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작품은 처음에 국한혼용문을 사용하다가 순전한 국문을 택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에 문체의 변화를 살피는 데도 소중한 자료이다.

창가(唱歌)가 나타나고 가사의 형식이 달라진 것도 함께 주목할 일이다. ≪독립신문≫은 창간된 해인 1896년부터 애국심을 고취하는 짤막한 노래 〈애국가〉·〈독립가〉 같은 것들을 독자투고로 실었는데, 그러한 것들이 바로 창가이다.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에서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매국노를 규탄하고 구국의 길을 찾자는 가사를 계속 실었는데, 과거의 가사와는 다르게 연을 나누고 반복구를 두어 긴박해진 상황과 합치되도록 하였다. 창가는 그 뒤에 널리 유행해서 학교창가로 쓰이는 한편, 최남선(崔南善)의 〈경부철도가 京釜鐵道歌〉(1908) 같은 것들에 이르러서는 장편을 이루었다.

항일적인 창가는 탄압의 대상이 되고 유행가와 상통하는 창가가 오히려 많아졌다. 일본 시가의 율격인 7·5조가 창가를 통해서 수입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인 가사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의병들이 지어 부른 것만 해도 적지 않았으며, 일본군이 탈취해서 일역해놓은 자료를 찾을 수 있다.

규방가사로 유포되던 것들 중에도 시대를 비판한 것이 있다. 사공수(司空留)가 지은 〈한양오백년가 漢陽五百年歌〉(1913)는 오랫동안 국사교과서 노릇을 하였다. 의병장 신태식(申泰植)은 잡혀서 옥고를 치른 다음 의병전쟁을 회고하고, 애국심을 나타낸 〈창의가 倡義歌〉(1920)를 지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은밀히 보관되었다.

신소설은 새로운 소설이라는 뜻으로 그러한 이름이 붙었으나, 소설이 이미 광범위한 인기를 모으고 있는 데 힘입어 기존의 전개방식을 적지 않게 받아들이며 개화사상을 나타낸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대한매일신보≫에 발표된 단편 〈소경과 앉은뱅이의 문답〉(1905)·〈거부오해 車夫誤解〉(1906) 같은 것들이 처음으로 나타난 예인데, 작자의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고 풍자적인 수법으로 매국노를 규탄한 것을 특징으로 삼는다.

그 뒤를 이어서 이인직(李人稙)은 〈혈(血)의 누(淚)〉(1906)·〈치악산 雉岳山〉(1908) 같은 장편을 신문에 연재하였고, 이해조(李海朝)와 최찬식(崔瓚植)의 작품도 흥미본위의 전개에다 의존적인 개화사상을 내세우며 함께 인기를 얻었다.

안국선(安國善)의 〈금수회의록 禽獸會議錄〉(1908), 이해조의 〈자유종 自由鐘〉(1910)은 신소설이라고 하지만 토론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고 친일적인 성향을 띠지 않은 점에서 특이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소설의 친일적 성향과 흥미본위의 풍조는 그 뒤에 더욱 확대되어서, 마침내 신소설이 문학사적 의의를 잃고 저급한 통속문학으로 떨어지는 데 이르렀다.

신소설과 함께 나타난 새로운 갈래에 신체시(新體詩)가 있다. 신체시는 노래부르기 위한 시가 아니다. 전통적인 율격에서 벗어나 자유시로의 길을 택하였다는 점에서 창가와 구별되나 아직 교훈적인 내용을 적지 않게 지니고 있었다.

최남선의 〈해(海)에게서 소년에게〉(1908)가 그 첫 작품이고, 〈구작삼편 舊作三篇〉(1909)이 이어서 나왔다. 이러한 작품들은 새로운 문학을 이루려는 의욕은 나타나 있다 하겠으나, 표현이 따르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이광수의 〈우리 영웅〉(1910), 현상윤(玄相允)의 〈친구야 아느냐〉(1914) 같은 것들이 추가되자 현대시에 좀더 접근할 수 있었다.

창극(唱劇)과 신파극(新派劇)이 나타나면서 연극이 달라졌다. 창극은 판소리를 고쳐서 배역을 나누어서 하는 연극으로 만든 것인데, 이인직이 〈은세계 銀世界〉(1908)를 연극으로 공연할 때 처음으로 그러한 방식을 택하였다. 그 뒤 창극이 신파극과 함께 인기를 끌더니, 판소리가 지닌 가치를 새롭게 계승하지 못하고 통속적인 공연물로 처져서 마침내 자취를 감추었다.

신파극은 신소설·신체시와 나란히 일컬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일본 신파극을 수입해온 형태이기에 더욱 두드러진 한계를 가졌다. 임성구(林聖九)가 혁신단(革新團)이라는 극단을 조직해서 〈불효천죄 不孝天罪〉(1911) 같은 작품을 공연한 것이 그 처음이고, 대강 설정된 줄거리에 따라서 즉흥적인 대사를 구사하며 격정적인 수법으로 눈물을 자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하여 생긴 신파조는 소설로까지 영역을 확대해서 커다란 역기능을 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조중환(趙重桓)의 〈병자삼인 病者三人〉(1912)은 희곡이 풍자적인 희극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신소설보다 한 걸음 더 발전된 소설은 현상윤이 이룩하였다. 〈한(恨)의 일생〉(1914)부터 신소설의 관습을 따르지 않았으며, 〈핍박 逼迫〉(1917) 같은 작품에 이르러서는 식민지 상황에서 지식인의 내면적인 고민을 아주 절실하게 나타내었다.

이광수의 단편 〈소년의 비애(悲哀)〉(1917)도 내면적인 정신의 세계를 개척하는 데 기여를 하면서 그 시대의 문제를 다루었다. 장편 〈무정 無情〉(1917)은 더욱 문제작이며 대단한 의의를 가진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구사회를 암흑으로 규정하고 새로운 문명을 식민지통치에 의한 변모와 구별하지 않았다. 이 시기의 문학론은 두 가지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신채호는 친일적이며 흥미본위의 문학이 대두하는 것을 극력 경계하고, 민중을 일깨우며 민족광복운동에 기여하는 문학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였으며, 망명지 중국에 가서는 그러한 주장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한편, 이해조는 신소설 〈화(花)의 혈(血)〉(1911)의 서두와 결말에서 소설은 현실을 다루어야 하며, 허구로 이루어지지만 진실된 표현을 하여야 한다고 해서, 표현 방법을 바꾸는 데 관심을 두었다.

이광수는 그러한 주장을 이으면서 문학이 구시대의 가치관을 버리고 새로운 사상을 구어체의 문장으로 표현하되 감정을 중요시해야 한다고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문학의 개념과 성격을 서양의 전례에 따라서 다시 설정하여야 한다는 것이었기에 적지 않은 부작용을 남겼다.

<조동일>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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