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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15 (월) 14:16
분 류 사전3
ㆍ조회: 846      
[현대] 남북대화 (민족)
남북대화(南北對話)

무력 대결을 지양하고 대화로써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려는 남북한간의 노력.

[개요]

긴장완화, 평화정착, 교류협력 등을 통해서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궁극적으로는 정치·군사 문제를 해결, 민족자주의 노력으로 평화통일을 달성하려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한 노력으로는 1948년 정부 수립 이전, 김구(金九)·김규식(金奎植) 등이 추진한 남북정치협상과 휴전 이후 유엔감시하의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노력, 그리고 1970년 초 남북 이산가족찾기운동 제창 이후 추진된 일련의 남북대화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남북대화는 주로 1970년대 이후, 남북 쌍방 당국간에 추진된 평화통일 노력을 지칭한다.

[배경]

1960년대 10년 동안 한국은 ‘선건설 후통일’노선에 따라 경제건설에 치중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기간 중 북한은 경제건설보다는 군사력 강화에 더 중점을 두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당초 북한은 제1차 7개년계획을 발족, “고깃국에 이밥을 먹고 비단옷에 기와집에서 살도록 한다.”는 ‘인민경제’우선 정책을 추진했으나 중소분쟁으로 배후 지원세력 내부에 갈등이 생겨나고 남한에서 군사 정권이 등장, 반공을 국시로 삼는 대결정책을 본격화하게 되자 북한은 갑자기, ‘인민경제’계획을 3년 연장하면서 ‘4대 군사노선’을 강행, 무력통일을 위한 ‘결정적 시기 조성’을 서두르기 시작하였다.

전국토 요쇄화, 전인민 무장화, 전군 현대화 및 간부화 등을 골자로 하는 이 4대 군사노선 때문에 북한 국민총생산의 1/4 이상을 군비로 지출, 북한 전역을 ‘병영국가’로 변모시키게 되었다. 10만 이상의 대남침투용 무장 게릴라를 따로 양성하는 한편, 남한 지하공작을 위한 ‘통일혁명당’을 새로 창건하였다.

이에 따라 196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에는 북한 게릴라의 청와대 습격사건, 울진삼척지구 침투사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EC-121 격추사건 등이 연달아 일어나고, 군사적 긴장상태가 크게 고조되었다. 남북간의 이런 정책 차이에 따라 1960년대 10년 동안 한국은 경제건설 분야에서 북한을 따라잡고 앞지르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군사력 분야에서는 크게 뒤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1968년 월남 ‘구정공세’에 크게 놀란 미국은 월남전쟁 종결을 서두르면서 ‘아시아 문제의 아시아화’라는 ‘닉슨독트린’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대만과의 국교 단절, 중국과의 국교 정상화, 주한 미군 2개 사단 중 1개 사단 철수, 필리핀 해군기지 폐쇄 등이 그것이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한국은 대미 외교를 국가 생존의 근간으로 삼아 왔으며, 국가 안보도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주한 미군에게 크게 의존해 왔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무력도발이 격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이처럼 ‘한국화 정책’을 서두르면서 미군 철수를 본격화한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은 국가 생존을 더 이상 미국에게만 의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이때부터 자립경제, 자위국방, 자주외교를 강조하면서 1970년대 후반으로 미루었던 통일문제도 10년 정도 앞당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데올로기보다 국가 이익을 더 중시하는 새로운 국제 흐름 속에서 한국이 국가의 생존을 위한 자구책을 스스로 모색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한국이 직면했던 어려운 상황은 1970년 광복절에 발표된 ‘평화통일 구상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선언은 전쟁 방지와 평화정착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남북한간의 ‘군사적 대결’을 ‘선의의 경쟁’구조, 다시 말하면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제건설 경쟁’으로 전화해야 한다는 점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 1971년 8월 한국이 ‘남북으로 흩어진 1천만 이산가족찾기운동’을 제창하면서 남북대화를 제의한 것은, 곧 이 선언을 구체화하고 행동화한 것이었다.

[1970년대의 남북대화]

(1) 남북적십자회담

1945년 국토분단 이후 남북한간에는 수많은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통상 1천만이라고 헤아리는 이들 이산가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비극은 역사상 그 어떤 외국의 경우와도 다르고 처절하다. 남북한간의 진정한 화해와 적대의식의 해소는 이 같은 이산가족 문제의 해결 없이는 불가능하며, 긴장완화와 평화정착도 기대하기 어렵다. 한국이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인도문제의 해결을 통해 평화통일의 디딤돌을 마련해 보려는 것이었다.

1970년대의 남북적십자회담은 1971년 8월부터 시작, 1978년 3월 북한의 거부로 완전 중단될 때까지 6년 7개월간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회담은 파견원 접촉 5회, 예비회담 25회, 실무회의 17회, 본회담 7회, 실무대표회의 7회, 실무회의 25회 등 총 86회나 열렸으며, 그 결과 ① 남북 직통전화 가설, ② 판문점 연락사무소 설치, ③ 본회담 의제 5개항 합의, ④ 쌍방 대표단 서울∼평양 왕래, ⑤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지원, ⑥ 남북조절위원회 탄생 등이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적십자 본연의 사명인 이산가족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북한이 이산가족 문제 해결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이른바 ‘남조선혁명’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도구로 이 회담을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실례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친우(親友) 문제

남북으로 흩어진 이산가족들의 총수는 1천만이 넘는다. 이는 남북을 합친 전체 인구의 1/6에 해당한다. 북한은 이산가족의 수가 이처럼 방대한데도 불구하고 그들 외의 친척과 친우들을 더 찾아 주어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만약 북한의 고집대로 한다면 이산가족찾기 사업은 사실 한반도의 전체 인구를 대상으로 ‘사람찾기 사업’을 벌이는 것과 같은 일이 된다. 이는 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혼란을 야기시킬 우려가 있다.

사업대상을 크게 확대할 경우, ‘이산가족 찾기’라는 본래의 사업 목적은 사라지고, 그 대신 ‘친우찾기’라는 엉뚱한 문제가 크게 부각되어 정치적 갈등과 분쟁을 야기시킬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친우 문제를 들고 나온 동기부터가 곧 남조선혁명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정치 혼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② 자유 왕래

북한은 1971년 10월 제6차 예비회담부터 이산가족의 자유 왕래를 강조하면서 정부 당국의 통제를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주장하는 자유 왕래란 ‘휴대품의 불가침’과 ‘어떤 행위도 법률적 사회적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정부 당국의 보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제적십자 활동의 많은 선례에서 보듯이, 심인사업(尋人事業)의 성공 여부는 최대한 정치성을 배제하는 데 달려 있다. 적십자는 ‘정치적 중립’의 원칙을 철저히 준수해야 하며, 그럼으로써 적십자의 순수성과 활동성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북한은 이산가족 문제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친우문제만 강조하고, 심지어는 그들의 정치활동 보장까지 요구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이 이산가족 심인사업을 핑계로 삼아 훈련된 공작원을 대량 남파하려는 기도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은 이와 같은 두 가지 문제 때문에 무려 15회의 공개회의와 13회의 비공개 실무회의를 열어야 했으며, 전체 예비회담의 2/3 기간인 8개월을 소비해야만 했다. 북한은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되고 남북조절위원회 개최가 결정된 뒤,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자진해서 철회하였다.

③ 조건환경(條件環境) 문제

북한은 1972년 10월 24일 제3차 본회담(평양)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려면 남한의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부터 먼저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73년 5월 제6차 본회담에서는 이를 더 구체화해서 반공법·국가보안법 철례, 반공단체 해산, 남북 왕래자에 대한 언론·출판·집회·통행의 자유 및 휴대품의 불가침 보장 등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전제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한 이산가족찾기 사업을 할 수 없다고까지 하였다.

④ 요해해설인원(了解解說人員) 문제

북한은 같은 제3차 본회담에서 “이산가족사업 실시에 앞서, 상대방 지역 리(里)·동(洞) 단위에 1명씩의 요해해설인원을 먼저 파견토록 하자.”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이 주장이 그대로 실행된다면 북측에서는 4만 3000여 명, 남측에서는 3만 6000여 명의 요원들이 이산가족들보다 먼저 상대방 지역을 왕래하면서 ‘요해해설(정치적 선전선동과 정찰행위 등)’을 하게 된다. 북한은 이들에 대한 모든 ‘활동의 자유’와 ‘휴대품 불가침’을 요구하였다.

이것은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 아니라 정치공작을 더 우선하려는 북한의 속셈을 노골적으로 들어내 놓은 것이다.

(2) 남북조절위원회

남북적십자 예비회담을 진행하는 동안 한국은 두 가지 이유로 별도의 ‘정치적 대화 통로’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첫째, 적십자회담은 앞에서 본 대로 북한의 정치적인 요구조건들 때문에 그 진행이 매우 지지부진했다. 따라서 인도적 차원의 순수한 적십자회담을 진행하여 이산가족 문제를 빨리 해결하려면 정치적 대화 통로를 별도로 마련하여 정치문제가 더 이상 적십자회담에서 논의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둘째, 1960년대 후반 이래 한반도에는 북한의 무력도발 강화로 인하여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한국은 남북간의 정치·군사적 대결구조를 경제건설 경쟁구조로 전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한국은 적십자회담과는 다른 정치적 대화 통로를 따로 마련, 북한 지도층과 대화의 길을 트고 평화정착의 계기를 포착하려 했던 것이다.

남북의 고위층이 비밀리에 서울∼평양을 왕래하고,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며, 남북조절위원회가 적십자 예비회담의 막후접촉에서 탄생한 것은, 곧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평화를 정착시키고 교류협력을 활성화하여 남북관계를 선의의 경쟁관계로 전화시키려는 것은 한국의 기본 입장이다.

이 기본 입장은 남북공동성명 작성과정에서, 그리고 남북조절위원회 회의나 그 밖의 회의 등을 통해서 꾸준히 견지되고 주장되어 왔으며 오늘까지도 일관성 있게 지켜지고 있다. 인도문제의 우선 해결과 교류협력의 활성화로 남북한간의 사회개방을 촉진하고 어려운 정치·군사 문제까지도 대화로써 해결하여, 끝내는 민족자결의 정신과 남북당사자 해결 원칙적으로 평화통일을 이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통일접근방법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북한은 남북공동성명의 ‘통일3원칙’을 일방적으로 해석,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공산화 통일을 위해서 이를 이용하려 하였다. ‘자주의 원칙’에 따라 주한 미군을 먼저 철수시키고, ‘평화의 원칙’에 따라 쌍방 군대를 10만 이하로 감군하며, ‘민족대단결의 원칙’에 따라 반공법·국가보안법을 철폐하고 반공단체를 해산하며 친북 인사들을 모두 석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곧 그것이다.

1960년대 10년 동안 북한이 이른바 4대 군사노선으로 대남 우위의 군사력을 확보해 놓은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조건에서 미군 철수, 10만 이하 감군, 반공법 철폐 등을 북한이 주장한 것은 한국의 일방적 무장해제를 강요하는 것밖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당시 진행중이던 월남전쟁과 보조를 맞추어 북한이 대화를 통해 남한의 반공태세와 국방력을 약화시키고 ‘제2의 월남화’를 유도해 보려고 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북한 자신은 내부적으로 4대 군사노선을 한층 강화하고 ‘남침용 땅굴’을 파내려 오는 한편, 대화면에서는 이른바 ‘상층 통일전선’으로 무력남침을 위한 여건을 조성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 동안 북한이 교류 협력과 사회 개방을 거부하고 신뢰 조성과 평화 정착 조치를 끝내 외면한 것 등은 모두 이러한 재남침 기도와 연결된 것이었다.

남북조절위원회는 북한의 대화 중단 선언이 있을 때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모두 6차례 개최되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상호 입장의 차이와 대립으로 말미암아 실질적인 성과는 아무것도 거둔 것이 없었다.

(3) 대화의 중단

1973년 8월 28일 북한은 ‘김대중 납치사건’을 구실로 갑자기 대화 중단을 선언하였다. 이것은 북한이 ‘남조선혁명’추진 전선을 ‘상층 통일전선’에서 ‘하층 통일전선’으로 전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이때부터 ‘남한 당국과의 대화’를 전면 거부, 남한 정부를 고립 타도하는 방향으로 선전선동하는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남북조절위원회는 소멸되었다.”, “남북정치협상회의를 소집하자.”, “전민족대회를 소집하여 남조선 당국을 규탄하자.”는 등의 주장들이 바로 그것을 말해 준다.

북한의 의도는 김대중 사건 때문에 국내외의 비난을 받고 있는 한국 정부를 ‘대화중단’이라는 충격적인 조치로 더욱 고립시키고, 하층 통일전선을 통해 집중적인 비난 포화를 퍼부어대려는 것이었다.

한편, 북한은 대화 중단 이면에서 무력 남침 준비를 은밀하게 진행시켰다. 10여 개가 넘는 대규모 남침 땅굴의 굴착, 1975년 4월 월남 종전의 임박, 급히 중국을 방문한 김일성이 ‘잃을 것은 군사분계선이요, 얻을 것은 조국통일’ 운운하면서 중국의 전쟁 물자 지원을 요청한 것이 그것이다.

이런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북한은 남북대화를 화해를 위한 수단으로 쓰려 한 것이 아니라 공산화통일의 여건 조성을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려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남조선혁명과 공산화통일을 강행하려는 북한의 이런 속셈은 1983년 10월 버마 폭탄테러사건에서 더욱 뚜렷이 드러났다.

1970년대의 남북대화는 결국 남북관계를 ‘선의의 경쟁’으로 전환시키려는 남한측과 공산화통일을 위한 남조선혁명 여건을 조성하려는 북한측 입장이 서로 격렬하게 맞섰던 ‘승부의 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80년대의 남북대화]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있다. 1980년대는 남북이 주로 체육문제를 놓고 대결을 벌였던 10년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올림픽을 확정한 1981년 바덴바덴 IOC총회는 북한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해였다. 만약 서울올림픽이 성공적으로 개최된다면 중·소 등 공산국가들이 대거 서울대회에 참가하게 되어 한국의 국위가 크게 선양되는 반면, 북한에게는 정치·외교적으로 큰 타격을 안겨 주기 때문이다.

김일성은 서울올림픽 개최문제를 두고 “그것은 단순한 스포츠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심각한 정치문제이다.”라고 했다. 이는 북한이 서울올림픽 때문에 얼마나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가를 잘 나타내는 말이다. 서울올림픽을 반대하는 북한의 외교활동은 1981년 IOC총회 직후부터 노골화되었다. 버마사건은 북한의 서울올림픽 반대활동이 무모한 폭력테러사건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반사적으로 북한에게 오히려 국제적 비난과 고립을 자초하는 큰 역효과를 가져왔다. 북한에 대한 버마의 국교 단절, 일본의 경제 제재, 중소의 반(反)테러선언과 불쾌감 표시, 비동맹국들의 강력한 비난 등이 그것이다. 사면초가에 직면한 북한은 크게 당황하여 외교적으로 저자세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사건 직후, 북한은 대남공작 책임자인 김중린(金仲麟)을 해임하고 허담(許錟)으로 교체하였다. 1985년 7월에는 ‘통일혁명당’을 ‘한국민족민주전선’으로 개편하였다. 북한의 대남공작이 지하당공작에 의한 강경투쟁에서 통일전선에 의한 합작노선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었다.

1984년 1월 북한은 ‘3자회담’을 제의, 한미 양국에게 화해의 뜻을 비추었다. 1984년 9월에는 ‘합영법’을 발표, ‘중국식 개방정책’을 추진할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서먹했던 중국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하였다. 북한은 때마침 일어난 남한 수재와 관련하여 쌀 5만 석, 천 50만m, 시멘트 10만t, 기타 의약품 등 무려 1천500만 달러 상당의 물자를 보내는 파격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수재지원 물자치고는 너무 큰 규모의 것이었다.

북한은 결국 버마사건으로 자초한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몸부림을 친 결과가 되었다. 1980년대의 남북대화는 이런 배경하에서 점차 재개의 분위기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1) 적십자회담

수재물자 인수인도를 계기로 1973년 이래 중단되었던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만 12년 만에 다시 시작되었다. 회담은 1985년 서울에서 2회, 평양에서 1회 개최되었다. 이산가족의 본질문제를 해결하는 데서는 북한의 ‘자유 왕래’ 주장이 수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아무런 진전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상 최초로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상호교환이 실현되어 앞으로 민간 차원에서의 남북한 인적 교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 경제회담

물자교류와 경협문제를 다루기 위한 남북경제회담이 사상 처음으로 성립되었다. 회담은 1984년 말부터 1985년 말 사이에 5차례 판문점에서 열렸다. 회담에서는 우선 실현 가능한 물자교류부터 실시하자는 남측 주장과 물자교류 보장 경제합작과 부총리급 정치회담부터 실현시키자는 북측 주장간에 의견 차이가 있었으나, 1985년 9월 제4차 회담에서는 쌍방 의견을 종합한 합의서 초안이 각각 제시되어 문안 조성 단계까지 진전을 보였었다.

(3) 국회회담

1985년중 남북 국회회담을 열기 위한 예비회담이 판문점에서 2차례 개최되었다. 본회담 의제로서 남측은 통일헌법 제정 문제를, 북측은 불가침선언 문제를 각각 주장하다가 끝내 결론을 내지 못하였다.

(4) 체육회담

1985년 7월 북한은 남북대화 재개를 계기로 과거의 ‘서울올림픽 절대 반대’ 태도를 수정하여 ‘공동 주최’ 주장으로 전환하였다.

북한의 이런 태도 변화는 ① 비동맹국을 비롯한 중소 등 공산국가들까지 전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서울대회 참가 의사를 밝히고 있어 더 이상 반대활동을 전개할 수가 없고, ② 사마란치 IOC위원장도 1985년 2월 ‘3자 체육회담(남북한과 IOC)’을 제의, 서울올림픽의 원만한 개최를 희망하면서 남북한간의 타협을 이끌어내려고 하고 있어 더 이상 기회를 놓칠 수 없게 되었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남북한 및 IOC 3자간의 체육회담이 1985년 10월부터 1987년 7월까지 스위스 로잔에서 4차례 개최되었다. 회담은 IOC측이 내놓은 1986년 6월 제1차 중재안(IOC헌장 및 결의 준수, 탁구·양궁·축구예선 1개 조 및 사이클 남북 연결경기 등 4종목을 북한측에 할애)과 1987년 7월 제2차 중재안(탁구·양궁·여자배구·축구예선 1개 조 및 사이클 남자 개인도로경기 등의 북한 개최)을 중심으로 토의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올림픽경기 총 23개 종목 중 6개 종목의 배정을 요구하고, 또 남북한 동등한 자격하의 공동 주체라는 무리한 주장을 고집하다가 끝내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다.

1986년 초 북한은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군사훈련을 구실로 다시금 대화를 중단하였다. 적십자, 경제, 국회 등 1970년대보다 훨씬 더 많아진 회담 진행으로 빈번했던 남북간의 접촉과 왕래는 모두 끊어지고, 다시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대화를 중단한 것은 ① 버마사건으로 인한 국제적 비난이 그 동안의 남북대화 진행으로 어느 정도 진정되었고, ② ‘절대 반대’를 고집하다가 오히려 국제적 고립만을 자초했던 서울올림픽 문제도 공동 주체로 선회, 외교적으로 어느 정도 운신의 폭을 넓혔으며, ③ 반면 남북간의 접촉과 인적·물적 교류를 북한체제가 갖는 한계성 때문에 더 이상 활성화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는 것 등의 이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었다.

남북대화가 한창 진행중이던 1985년 7월 북한이 갑자기 ‘서울올림픽 공동 주체’를 주장, 1985년 10월 로잔 체육회담이 성립되자마자 불과 3개월 만에 대화 중단을 선언해 버린 것은, 곧 북한의 이런 속사정을 잘 설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서울올림픽 공동 주최 교섭에 실패하자 1987년 11월 KAL기 격추사건(김현희 사건)을 일으키면서 마지막까지 서울대회 방해공작을 벌이는 한편, 이른바 1989년 ‘평양축전’을 강행하면서 서울올림픽에 맞먹을 정도로 기세를 크게 만회해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너무 무리한 비용 지출로 경제적인 낭패만을 자초했으며, 서울대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공산국가들도 와해되기 시작하여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1980년대 10년 동안 남북 대결은 주로 86아시안게임, 88서울올림픽, 89평축대회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나, 결국 그것은 경제력을 배경으로 남과 북이 총체적인 ‘국력 경쟁’을 벌인 결과 체제경재에서 승패가 나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대의 남북대화]

남북간의 국력 격차가 확연해지고 공산권의 붕괴로 동서 냉전이 종식되자 한반도 문제는 결국, 평화 공존으로 해결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이 더욱 확연해졌다. 86, 88대회의 성공을 배경으로 한국은 ‘북방정책’을 전개, 대공산권 진출을 본격화하면서 교차 승인과 유엔 동시가입 기반을 구축해 나갔다.

반면에 북한은 ‘89평축’ 이후 사회주의 시장의 붕괴로 경제적 타격과 함께 외교적 기반까지 잃게 되어, 북한 주도하의 통일이나 ‘남조선 혁명’을 더 이상 추진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북한이 평화 공존을 수락, 남북 고위급회담에 호응하면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은 이런 정세 변화의 배경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기본합의서는 남북간의 평화공존 합의서이다.

평화공존은 ① 영토 보전과 주권 존중, ② 상호불침략, ③ 내정불간섭, ④ 호혜평등, ⑤ 평화적 공존 등을 5개 기본 원칙(1954년 4월 중인조약 참조)으로 삼고 있다. 남북기본합의서에는 그 전문(前文)에 ‘잠정적 특수관계’가 명시되어 있고, 각 조문에도 이 5개 원칙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에도 불구하고 실제의 남북한 관계는 여전히 평화공존이 정착되지 못한 채, ‘대결관계’가 지속되는 상태에 있다. 왜 그럴까? 남북관계의 극적인 변화에는 반드시 내부 진통이 따르게 되어 있다. 특히 북한의 경우, ‘대결정책’에서 ‘공존정책’으로 전환할 때는 큰 반사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우선, 남북한간에 문호 개방이 이루어지고 교류 협력이 활성화되면 북한 경제가 좋아지고, 인민생활의 향상을 기대할 수 있다는 등의 좋은 점이 있다. 그러나 반면에, 휴전선 일대에서 긴장상태가 완화되면 병력 감축과 무기 축소 가능성이 커지게 되고, 4대 군사노선으로 그간 기세 등등하던 북한 군부의 힘은 꺾이게 된다. 무장간첩을 내려보내던 북한의 대남공작기관들도 남북간의 평화공존 정착과 함께 무용지물이 되며, 해체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말하자면, 남북관계가 개선되고 평화공존이 이루어지면, 그것은 북한 주민에게 좋은 선물을 가져다 줄 것이지만, 대결정책으로 이득을 보던 대남공작기관이나 군부 강경세력들에게는 권한 축소와 기득권 상실 같은 달갑지 않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인민경제를 담당하는 북한의 정무원이 당이나 군부보다 훨씬 허약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바로 이런 권력구조 때문에 북한에서는 항상 ‘경제건설’과 ‘개혁개방’이 무시당하고, 대남공작이나 ‘핵미사일개발’이 높은 우선 순위를 받게 되는 것이다.

1992년 말 이래 남한에서는 대선 때문에 정국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도 북한에게 적대적이던 공화당 정권에 대신해서 민주당 정권이 새로 등장하였다.

1992년 2월 남북기본합의서 체결 당시, 너무 빠른 정세 변화 때문에 전혀 대응수단을 강구하지 못했던 북한의 강경세력들은 호기를 놓치지 않고 반격을 시작하였다. 1993년 초에 들어서면서 팀스피리트 훈련 중지를 핑계삼아 남북고위급회담을 유산시킨 것은 그 시발점이었다.

김영삼 신정권은 이인모 송환 등으로 대북유화정책을 폈으나 오히려 북한의 강경세력들은 이를 역이용하여 NPT(핵확산방지조약) 탈퇴선언, 휴전선 무효화선언 등으로 역습을 가하고, 한국을 배제한 대미 접근, 즉 ‘통미봉남(通美封南)’ 정책을 전개하였다. 한때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에 호응, 남북관계 개선과 평화 공존으로 방향을 잡으려 한 일도 있었으나, 김일성 사망 후 이런 움직임은 한꺼번에 무산되고 북한 강경세력들은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북한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핵카드를 사용, ‘미북 기본합의문(1994.10.21., 제네바)’을 채택하기까지 하였다. 한편, 남북관계에서는 ‘조문 불허’를 문제삼아 노골적인 적대감을 표시하면서 ‘서울불바다’ 발언, 쌀 15만t 수송 선박의 인공기 계양 및 억류사건, 판문점 무장병력 투입사건, 강릉지역 잠수함 및 무장병력 침투사건 등으로 ‘적대적 대결정책’을 본격화하였다.

북한 군부 강경세력들이 주도하는 이러한 대남 적대정책과 대결정책은 ‘국민의 정부’ 등장 이후에도 그대로 지속되고 있다. 남한 신정부는 ‘햇빛정책’을 펴면서 인도적 지원과 함께 민간 교류를 활성화하려 하고 있으나, 북한은 오히려 잠수함을 침투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이 언제쯤 평화 공존과 남북관계 개선에 호응해 올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예측할 수가 없다. 다만 그것이 가능해지려면 적어도 북한의 권력구조에 상당한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인민생활의 향상을 중시하고, 국제활동에 적극 참여하며,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경제건설을 추진하려는 합리적인 인물이나 평화주의자들이 북한 집권세력으로 등장하고, 대남공작이나 군사적 긴장 고조를 선호하는 북한의 강경세력들이 하루빨리 퇴진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공존’이나 ‘혁명’이냐는 오늘날 북한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어려운 선택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만약, 북한의 집권세력들이 가까운 시일 내에 중국 정도만큼의 유연한 인물들로만 교체된다고 해도 북한 자신이 ‘개혁개방’은 물론, 남북관계 개선과 동북아시아 전체의 발전에도 큰 변화와 진전을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참고문헌≫

南北對話白書(國土統一院, 1982), 統一白書(통일원, 1997), 南北高位級會談會議錄(남북회담사무국, 1989.2.∼1992.12).

<김달술>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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