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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1-10 (토)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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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655      
[근대/현대] 올림픽 (한메)
올림픽 Olympic Games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가 4년마다 개최하는 국제스포츠경기대회.

고대 그리스 제전경기의 하나인 올림피아제(祭)에 기원을 둔다. 이 스포츠제전을 근대에 부활시키기 위하여 프랑스의 P.쿠베르탱이 제창, 1896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하였다.

근대스포츠는 19세기 중엽부터 영국에서 조직되어 시설 개발에 힘쓴 미국의 육성으로 발전·보급되어 왔는데, 이러한 각종 스포츠를 종합적으로 겨루는 것이 올림픽이다. 프랑스의 귀족 쿠베르탱은 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71)에 패배한 조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교육개혁을 주장하던 중, 육체와 정신의 조화를 지향한 고대 그리스의 체육에 매혹되어 1894년 IOC를 창설하고, 전세계 청년의 평화의 전당(殿堂)으로서 올림픽을 4년마다 정기적으로 여는 데 성공하였다.

IOC는 모든 나라에 올림픽 참가를 권유하고, 또 종교·인종·정치에 의한 차별대우를 엄금하였다. 이에 대하여 일부 국가의 항의도 있었지만, 이것을 극복함으로써 올림픽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었다. 20세기 초부터 경기별로 각각의 국제경기연맹 (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IF)을 조직하였고,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경기규칙을 규정하였다.

근년에 와서 올림픽대회에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어 그 전통이 동요되었던 적이 있었다. 1980년의 모스크바대회에서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로 여러 나라가 불참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에 대항이라도 하듯 84년의 로스앤젤레스대회에도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불참가국이 나왔다.

또한 올림픽대회에 대해 국제경기연맹이나 각국의 국내올림픽위원회(National Olympic Commit-tee;NOC)의 발언도 강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서도 IOC가 공인하는 지역대회(아시아경기대회·팬아메리카경기대회 등)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경기대회가 올림픽을 유일한 본보기로 삼는 것은 변함이 없다.

더욱이 88년의 서울올림픽대회에는 동서 양진영에 속한 나라들 거의 모두가 참가함으로써 정치색채를 띤 절름발이 올림픽대회가 아닌 본연의 올림픽대회로 과거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

[고대 올림피아제(祭)]

일반적으로 고대 올림픽이라고 불리고 있는 것이 고대 그리스의 제전경기이며, 정설에 따르면 대략 1200년에 걸쳐 정기적으로 열렸다. BC13세기부터 시작되었던 인도―유럽어족 이동 제2진이 펠로폰네소스반도에 정착하던 무렵부터 올림포스산의 신들에 대한 봉납제전(奉納祭典)에 변화가 일어났다.

트로이전쟁을 거친 뒤에 영웅의 장례나 진중(陣中)의 위안을 위하여 군기경기(軍技競技)가 벌어졌으며, 이것이 제전의 행사에 덧붙여지게 되었다. 올림피아에서 주신(主神) 제우스를 모신 올림피아제는 BC776년에 부활되었다고 하는데, 그 기원은 오랫동안 도리스인이 올렸던 제의(祭儀)라는 것이 정설이다.

부활의 해에 대해서는 그 무렵 페니키아에서 문자가 전해져서 우승자의 이름이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 BC776년 대회이니 그것을 제1회로 하였다는 설과, BC 1580년, BC 1195년, BC 884년을 각 창시년으로 보는 여러 설이 있다. 그 뒤 델포이의 아폴로신전에서 지냈던 피티아제(BC582), 코린트의 바다신(神) 포세이돈을 모신 이스트미아제(地峽祭, BC582), 제우스를 위한 네메아제(BC573)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을 그리스의 4대제전경기라고 한다.

이들 가운데 올림피아는 반도의 북서부 변경에 있었으므로 내란이나 흥망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올림피아제는 AD393년 로마의 속주시대까지 계속되었다. 제전은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4년마다 벌어졌으며, 뒤에 시칠리아의 티마이오스(BC356?∼BC260?) 등이 이 4년을 1올림피아드라고 이름붙였다.

대회는 그 첫해에 열렸고, 기록이 있는 것으로는 293회가 계속되었다. 다만 A.J.토인비에 의하면 <숨은 올림피아제>가 9세기의 끝 무렵까지 다이나론곶에서 열렸다고 한다. 다른 그리스의 신역(神域)과 마찬가지로 올림피아도 좁았다(약 2만 5000m²).

그러므로 처음에는 단거리경주(1스타디온;올림피아에서는 192.27m) 1종목이었고, BC724년부터 중거리경주, 장거리경주, 5종경기(멀리뛰기·원반던지기·단거리경주·창던지기·레슬링), 레슬링, 복싱의 차례로 점차 늘어났으며, 영웅시대부터 성행하였던 전차경주나 경마는 BC7세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그 뒤 판크라티온(레슬링과 복싱을 합성한 것 같은 경기), 무장경주, 나팔수경기, 전령경기를 겨루었는데, 전차경주에는 2두(頭)·4두, 준마·노새 등의 종별이 있었고, 경마에도 종별이 있어 전대회를 통하여 벌어진 것이 약 19종목이었다. 그 밖에 만 18세 이하 소년의 경기가 BC7세기부터 시작되어, 단거리경주, 레슬링, 5종경기, 복싱, 판크라티온의 5종목을 겨루었다.

한 대회에서 모든 경기가 있은 것은 아니어서 전성기에도 대개 10여 경기를 하였다. 제전의 시기는 7∼9월(그 무렵의 그리스는 1∼3월)의 한여름에 열렸고, 22회 대회(BC 692)까지는 회기가 1일뿐이었으나, BC5세기 페르시아를 이기고 그리스의 전성기를 맞아서 불후의 예술작품이 만들어졌던 무렵에는 올림피아제의 회기도 5일간으로 성대해졌다.

5일 동안에는 선수의 선서식, 제의, 우승자를 위한 연회 등도 베풀어졌는데, 그 하루는 반드시 만월(滿月)에 해당되었다. 그 무렵 올림피아제는 매우 호화로워져 정치가·군인·문인의 선전장이 되었고, 참가한 도시들은 명예를 위하여 부정수단을 써서라도 이기는 데 열중하여 유망선수를 스카웃하고 심판원(처음엔 한 사람이었지만 최성기에는 12명이 되었다)이나 상대선수를 매수하는 등 내부적으로 부패하였다.

참가자격은 엄격하여 순혈(純血)의 그리스인으로 시민권을 가질 것, 형벌을 받은 일이 없을 것, 신에 대한 불경한 행위가 없을 것 등이다. 전성기에는 자기 도시에서 훈련을 받고, 제례 때까지 에리스에서 1개월의 강화 합숙을 하여 그 성적에 따라 참가가 결정되었고 여자는 참가할 수 없었다.

참가자는 전차나 말을 모는 선수 외에는 벌거벗고 경기를 하였다. 경기의 규칙도 정해져, 격투경기에서 상대를 죽이면 판정패가 되었고 벌금이 부과되었다. 눈 안에 손가락을 찔러넣거나 사타구니를 발로 차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우승자단을 결정하였고 그 밖의 순위는 인정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승자의 기록 공인 같은 것은 없었다. 우승자의 특권은 공식적으로는 올리브의 잎으로 만든 관과 대회의 마지막 날에 신역(神域)의 축연에 초대받을 뿐이었으나, 실제로는 자기 도시에 돌아가면 사회적인 지위와 거액의 상금이 주어졌다. 이러한 민습 때문에 다른 도시로 팔려 가는 집시선수가 생기기도 하여 대회를 오염시켰다.

또 제례를 높이 평가하였으므로 페르시아전쟁에 승리하였을 무렵까지는 제전의 전후 3개월 동안은 일체의 무력투쟁을 중지한다는 결정이 각 도시 사이에서 잘 지켜졌다. 그러나 이것도 제2차 아티카해상동맹(BC377) 무렵부터 무너져 회기중에도 올림피아가 전화(戰火)에 휩싸이기도 하였다(BC364).

그리스인들에게 체육보다 변설(辯說)을 존중하는 풍조가 일기 시작한 것도 빼놓을 수가 없다. 아테네의 체조장 등에서 젊은이들과 철학적 대화를 즐긴 소크라테스의 죄상(罪狀)이 젊은이를 육체적 단련으로부너 멀어지게 하여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것이었음은 이러한 풍조가 위정자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가 정복을 두려워하는 그리스인 관중의 곱지 않은 시선 속에서 경마에 우승(BC356)한 것은 비(非)그리스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대왕은 그리스 전부를 통치하게 되지만, 아버지와는 달리 경기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뒤 그리스는 로마에 정복당하여 어느 때에는 성년선수 전부가 로마로 가서 올림피아에서는 소년경기만이 열렸고(BC80), 네로의 참가를 위하여 제전이 2년 지연되는(AD67) 등 제전은 극도로 타락하였다.

육체를 단순한 영혼의 노예라고 경시한 초기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 안에서 착실히 기반을 닦아 4세기 말에 테오도시우스 1세는 그리스도교를 국교(國敎)로 정하고 다른 종교를 이단이라 하여 탄압하였다.

최후로 열린 대회의 다음해인 394년에는 올림피아제가 금지되어 얼마 후 신전은 파괴되고 페이디아스의 작품인 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상이 실려감으로써 완전히 폐허가 되었고, 대지진과 홍수로 오랫동안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19세기 초까지 올림피아의 소재가 불분명했던 것은 그 주변의 지명이 이주한 사람들의 언어인 슬라브어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유명한 경기자로는 레오니다스(경주)·피롬프로토스(5종경기)·키오니스(경주)·히포스테네스(레슬링)·미론(레슬링)·티산드로스(복싱)·드리에우스(판크라티온)·테아게네스(레슬링)·에우튜메네스(레슬링), 카이론(레슬링) 등을 들 수 있다.

그들 중에는 올림피아제전뿐 아니라 피티아제 등 다른 제전경기에서 우승한 사람도 있다. 또 수많은 관람자 가운데는 피타고라스·헤로도토스·투키디데스·플라톤·디오게네스 등 저명인사가 많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근대 올림픽의 태동]

근대 올림픽의 연원은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다. 르네상스에 의하여 고대 체육은 재평가되었고, 계몽주의가 이것에 박차를 가하였다. 또 17·18세기 고전주의 사조(思潮)는 고대 그리스·로마 문화에 대한 관심을 고무시켰다. 그 초기의 고취자 J.J.빙켈만은 실제로 올림피아의 발굴에 뜻을 두었지만 이루지 못하였다.

그가 죽기 2년 전인 1766년에는 영국인 R.챈들러가 올림피아 폐허를 발견하였지만 터키 정부의 국외퇴거명령으로 발굴을 단념해야만 하였다. 이와 같은 그리스에 대한 유럽인의 뜨거운 열정은 1814∼29년의 그리스 독립전쟁에 대한 G.G.바이런 등의 개인적 지원뿐 아니라 영국·프랑스 등의 국가적 군사원조의 원동력의 하나가 되었다.

터키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 후 그리스 국왕이 된 오토 1세(재위1832∼62)는 프랑스군에 의한 올림피아 발굴(1827∼29), 체육사가(體育史家) 클라우제의 저서 《올림피아(1838)》의 발간, 베를린에서 있은 E.쿠르티우스의 펠로폰네소스반도 여행보고(1852) 등에 자극을 받아 올림픽의 부활을 계획하고 1859년에 제1회 대회를 열었다.

그러나 근대 스포츠에 대한 지식 부족으로 실패하였고, 제2회는 70년에 열렸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제3회는 독일 황제가 후원한 쿠르티우스의 지휘 아래 올림피아 발굴대가 그리스에 도착한 1875년에 개최되었으나, 참가자가 겨우 24명이었고, 경주·멀리뛰기·세단뛰기·창던지기·원반던지기·레슬링·창대기어오르기 등을 하였지만 성공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이어 제4회는 1889년 국왕 게오르그 1세의 축하식전과 때를 맞추어 열렸으나, 이 4회로 그리스 독립기념 부활 올림픽으로 불린 대회는 종지부를 찍었다. 그 뒤 그리스의 유적 발굴로 고대 올림피아제의 윤곽이 뚜렷해지자, 체육에 의한 문교정책을 실행하려던 쿠베르탱은 1892년 11월에 이것을 부흥시키기 위하여 올림픽경기대회를 처음으로 제창하였지만 거의 반응이 없었다.

1894년 6월 아마추어문제를 주요 의제로 하여 소르본대학강당에 모인 12개국 대표 앞에서 같은 달 23일에 쿠베르탱은 올림픽경기 부활을 재차 제안하였다. 이번에는 대회장에서 전년에 델포이에서 발견된 아폴론 찬가에 멜로디를 붙여 노래하게 하는 등의 무드를 조성한 것이 주효하였는지, 만장일치로 대회의 실시를 결의하고, 운영을 맡는 IOC를 조직하여 위원 선임을 쿠베르탱에게 일임하였다.

쿠베르탱은 페리클레스(BC495?∼BC429)시대 고대 올림피아제의 운영을 참고로 하여 순서나 선임을 정하였다. 그는 세계 각국의 정치가·군인을 추천하고 13개국 15명을 선출하여 대회를 추진하였다. 이 6월 23일을 기념한 것이 <올림픽데이>이다.

[근대 올림픽]

<제1회 대회(1896, 아테네)>

회기 그리스력 4월 6일(태양력 3월 25일)∼15일. 참가국 13, 선수수 295. 그리스 국민은 1896년에 올림픽대회를 아테네에서 개최한다는 쿠베르탱 등의 결정을 환영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파산상태에 가까운 재정 등을 고려하여 냉담한 태도를 취했는데, 그러므로 쿠베르탱은 콘스탄틴황태자(1960년 로마대회 요트 부문의 우승자 콘스탄틴황태자의 조부)를 통해 게오르그 국왕을 설득하여 개최를 결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황태자를 장(長)으로 하는 위원회를 만들어 자금 등의 대책을 세우게 하였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에 사는 그리스인 부호 아베로프가 92만 드라크마를 기부하여 주경기장을 건설하게 되었다. 이 주경기장은 고대 경기장터에 대리석으로 건조된 5만 명 수용 규모의 호화로운 경기장으로, 주로(走路)는 현재와 반대인 오른쪽으로 도는, 급커브이기는 하지만 한 바퀴가 400m인 훌륭한 것이었다.

실내경기는 루마니아에 살던 자파스형제가 1887년에 기증한 실내체육관 자페이온에서 거행되었다. 개회식에는 회장 안팍에 8만 명이 몰려들었고 국왕의 개회선언이 있은 뒤 C.팔라마스 작사, S.사라마스 작곡의 <올림픽의 노래>가 불렸다.

경기는 육상경기·체조·역도·펜싱·조정·수영·사이클·레슬링·테니스·사격의 10경기, 43종목이라고 발표되었다. 그 밖에 예정되었던 수구·마술·크리켓은 취소되었고 조정도 악천후로 중지되었다. 이러한 경기종목의 내용에 관해서는 고대 그리스보다 오히려 쿠베르탱이 열심히 연구한 영국 스포츠의 영향이 컸다.

이 대회에서는 우승자와 2위인 사람만이 상을 받았는데, 우승자에게는 상장·은메달·올리브관, 2위자에게는 상장·청동메달·월계관을 수여하였다. 그리스인이 전통적 경기로 믿던 원반던지기를 비롯하여 수(水)·육(陸) 경기의 우승을 미국인과 그 밖의 외국인이 차지하였으므로 그들의 낙담은 컸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영광을 기리며 추가된 마라톤(프랑스인이며 프랑스 학사원의 브레알이 제안한 것으로, 고대 그리스에서는 이처럼 장거리의 경주는 없었다)에서 그리스의 양치기인 S.루이스가 역주하여 우승함으로써 그리스 전국을 열광시켰다. 아테네는 근대 올림픽의 출발을 멋지게 장식했던 것이다. 우승수 ① 미국 11 ② 그리스 10 ③ 독일 7.

<제2회 대회(1900, 파리)>

회기 7월 2일∼10월 28일. 참가국 20, 선수수 1107. 이해에 파리에서 열리는 세계박람회와 공동주최로 개최한다는 것이 쿠베르탱의 의향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육상협회와의 반목, 박람회 당국의 몰이해, 올림픽 지식의 결여 등으로 혼란에서 시작되어 혼란으로 끝난 대회였다.

IOC는 운영비가 모자라서 마지막에는 불로뉴숲의 프랑스레이싱 클럽의 그래스 코트를 빌려 육상경기만 치렀을 정도였다. 다른 경기는 세계박람회의 부속경기회 명목으로 15프랑부터 최고 4000프랑까지의 상금이 걸렸다. 경기기록에도 불명확한 점이 있고 올림픽대회의 진의에도 어긋나는 부진한 대회였다.

영국의 S.쿠퍼가 여자테니스의 단식에서 올림픽 사상 최초의 여성 우승자가 되었다. 또 이 대회부터 초대 회장인 D.비켈라스(그리스)를 대신하여 쿠베르탱이 IOC 제2대회장이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19 ② 프랑스 13 ③ 영국 11. 그러나 이 숫자는 명확하다고 할 수는 없다.

<제3회 대회(1904, 세인트루이스)>

회기 7월1일∼10월 15일. 개회식은 육상경기 개시일인 8월 29일에 있었다. 참가국 10, 선수수 532. 제2회 대회에서 크게 활약한 미국에 보답하기 위하여 대회는 대서양을 건넜다. 시카고와 세인트루이스가 유치를 다루었는데, 신임 대통령인 T.루스벨트의 결정으로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다. 프랑스는 파견비를 조달할 수 없다는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다.

전대회(파리대회)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 대회도 루이지애나 구입 100주년기념 박람회의 여흥적 경기대회로 치러졌으며, F.체펠린의 비행선과 무선전신이 인기를 끌었다. 더욱이 때마침 열렸던 미국 육상경기 선수권대회에 관심이 집중되어, 쓸쓸한 대회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앞선 스포츠 시설과 용구는 유럽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경기는 미국의 독무대가 되었다. 한편, 마라톤에서 웃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는데, 미국의 로츠가 스타디움에 유유히 도착하여 환호성 속에 골인하고 우승자로 발표된 뒤 대통령 딸과 기념촬영까지 했으나 실은 로츠가 5㎞ 지점에서 더위로 낙오하여 옆에서 달려오던 자동차에 수용되어 원기를 회복한 후 고장으로 자동차가 정지해 있는 사이에 다시 달려 우승했다는 것이 판명된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한 우승자인 힉스에게 금메달이 수여되었다. 이것이 지금도 전해 오는 <부정승차 마라톤>으로 유명한 일화이다. 대회장은 주로 워싱턴대학을 사용했으며, 다이빙은 독일 선수의 지도로 미시시피강을 사용하였다. 대학의 동쪽에 접해 있는 프레스트공원이 박람회장이었고, 그곳에는 급조한 호텔이 있었다. 일부의 경기자도 숙박하였으므로 올림픽촌의 원조라고 일컬어진다. 우승수 ① 미국 70 ② 쿠바 5 ③ 독일 4.

[아테네 국제경기대회(1906)]

제2차세계대전전까지는 올림픽 중간대회라고 불렸던 것으로, 전쟁 후에는 정식대회에서 제외되고 있다. 제1회 대회 후, 그 뒤의 대회도 그리스에서 개최되어야 한다는 그리스인의 열광적인 분위기 때문에 쿠베르탱은 다음 대회의 개최지를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는 여론의 완화책으로서 4년마다의 중간년에 아테네에서 특별대회를 개최한다는 약속을 그리스 황태자와 맺고 그 뜻을 받들어 열린 것이다. 전회(前回)의 대회가 거리가 먼 미국이었기 때문에 불참했던 많은 유럽국가들이 대거 참가함으로써 훌륭한 대회가 되었다. 참가국 22, 선수수 883.

<제4회 대회(1908, 런던)>

회기 5월 6일∼10월 29일. 참가국 22, 선수수 2034. 이 대회도 영국―프랑스박람회와 동시에 개최되었으나, 박람회측으로부터는 자금만 빌렸을 뿐이었다. 더욱이 근대 스포츠 발상지의 명예를 지닌 영국은 경기운영을 관계 경기단체에 맡겨 진행하여 경기 규칙도 상당히 정비되었고, 다음 대회인 스톡흘름대회와 더불어 이후의 대회 운영의 기초를 만든 대회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의 자유롭던 참가 신청 방식을 폐지하고, 각국 각 경기의 국내 통괄단체인 NOC를 조직하고 이를 통한 신청만을 인정하도록 하였다. 개회식에는 각국의 국기를 선두로 입장행진이 있었다. 한편, 처음으로 대회조직위원회(Olympic Organizing Commit-tee, OOC)가 대회 운영을 위하여 조직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양대 스포츠국인 영국과 미국이 독립전쟁 이래 감정적 알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로 아마추어 자격문제, 경기규칙 문제 등으로 많은 대립이 일어났다. 이것을 지켜본 세인트 폴 성당의 펜실베이니아주교가 일요 미사에 모인 각국 선수에게 <올림픽에서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참가하는 것이다>라고 설교했는데, 이 말에 감동한 쿠베르탱은 후에 이 말을 올림픽의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고 올림픽의 모토인 <보다 빠르게 Citius, 보다 높게 Altius, 보다 힘차게 Fortius>는 도미니크 교단 소속 H.M.디동 신부가 제안한 것으로, 쿠베르탱이 1897년부터 채용하였는데, IOC에서 공인받은 것은 1926년의 일이었다. 또한 마라톤은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42.195㎞ 코스를 달렸는데, 또다시 <도란도의 비극>이라고 불린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장에 도착한 이탈리아의 P.도란도가 쓰러져 임원들의 도움을 받으며 골인하였는데, 이것이 반칙이 되어 우승이 취소되었다. 영국의 알렉산드라 황후가 이를 동정하여 그에게 금컵을 수여함으로써 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고 한다. 이때의 마라톤 거리가 제8회 이후 정규 거리가 되었다. 동계 경기에 피겨 스케이팅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도 하나의 화제이다. 우승수 ① 영국 56 ② 미국 23 ③ 스웨덴 7.

<제5회 대회(1912, 스톡홀름)>

회기 5월 5일∼7월 23일. 참가국 28, 선수수 2504. IOC와 협력해오던 스웨덴 왕실이 앞장섰고, 주경기장신설 등에도 정부와 시의 협력이 있었으며, 육상경기에서는 전기시계에 의한 기록 계측과 결승의 사진판정기(寫眞判定器) 채용 등도 있어서 올림픽도 본격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다.

전대회에 이어 유럽의 황제·왕실·귀족들로부터 각종 상품도 수여되었다. 이 대회부터 육상경기에 5종과 10종의 혼성경기, 근대5종경기와 마술, 여자 종목으로서의 수영, 고대 올림피아제를 본떠 예술경기가 추가되었다. 복싱은 스웨덴의 국내법에 따른 금지 규정으로 거행되지 않았다.

장거리 육상경기에서 제정 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핀란드의 코레마이넨이 5000m경주·1만m 경주·8000m 크로스컨트리의 3종목에 우승하여 주목을 끌었다. 수영에서는 하와이출신의 카하나모크가 크롤 스트로크(자유형)를 소개하면서 100m에 우승하였고, 아메리칸 인디언 J.소프가 혼성경기 중 2종목에서 우승하는 등 유색인종의 활약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도 이 대회부터였다.

그러나 소프는 그 전에 야구에서 프로선수로 활약하였다고 인정되어 다음해인 1913년의 IOC 총회에서 아마추어 자격의 박탈, 금메달의 반환을 명령받았다. 메달반환의 제1호였는데, 1982년 10월에 그의 자매와 당시의 G.R.포드 미국대통령의 복권운동이 결실을 맺어 실격이 취소되었다. 우승수 ① 스웨덴 24 ② 미국 24 ③ 영국 10.

<제6회 대회(1916, 베를린)>

1914년 6월 13일부터 파리에서 IOC 창설 20주년 기념식이 열렸을 때, 쿠베르탱은 <올림픽기>를 고안하였으나 그해 6월 28일에 사라예보사건이 돌발하자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베를린대회는 열리지 않게 되었다. 1915년 IOC는 스위스의 로잔으로 옮겨져 항구적인 본부가 설치되었다.

<제7회 대회(1920, 안트베르펜)>

회기 4월 23일∼9월 29일. 참가국 29, 선수수 2591. 전쟁의 상처를 입어 황폐해진 벨기에의 청년들에게 마음의 양식으로 보내진 대회였다. 준비기간은 짧았지만, 뒤에 IOC 회장이 된 B.라투르를 조직위원장으로 하여 3만 명 수용의 주경기장과 늪을 구획한 풀의 축조, 앙투카 코트를 채용한 테니스코트 등 최대의 노력이 기울여졌다.

전쟁 책임을 묻는 의미에서 독일·오스트리아·불가리아·터키의 참가는 허용되지 않았고 제1차세계대전의 결과 독립한 발트 3국, 체코슬로바키아 등이 참가하였다. 핀란드도 완전한 독립국으로서는 처음으로 참가하였다. 메인폴에는 새로 창안된 올림픽기가 나부꼈고, 고대 올림피아제와 같이 선수선서도 있었으며, 이후 선수선서는 세계적 유행이 되었다.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날아다니는 핀란드인>이라는 말을 들은 P.누르미가 1만m경주·1만m크로스컨트리에 가볍게 우승하자, 건각(健脚)은 아직도 살아 있다는 듯이 제5회 대회의 우승자 코레마이넨이 마라톤을 제패한 일이다. 우승수 ① 미국 41 ② 스웨덴 17 ③ 핀란드 14.

<제8회 대회(1924, 파리)>

회기 3월 15일∼7월 27일. 참가국 44, 선수수 3075, 파리 교외 콜롱브의 신설 경기장에는 처음으로 마이크로폰이 설비되었고, 근처에 올림픽촌이 가설되었다. 1호에 4인 수용인 목조 판자집이었지만, 소수 팀에는 편리한 시설이었다.

대회에 앞서서 1월 25일부터 2월 5일까지 남프랑스의 샤모니 몽블랑에서 이 대회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동계대회가 개최되었고, 나중에 공인되어 제1회 동계대회가 되었다. 경기는 어느것이나 열기를 띠어 축구에서는 우루과이가, 폴로에서는 아르헨티나가 유럽팀을 격파하는 등 예기치 않은 나라의 활약이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그러나 각 경기의 왕좌는 여전히 미국이 확보하였다. 기록할 만한 것은 핀란드의 누르미로, 1500m에서 우승한 30분 뒤에 5000m에 출장하여 우승해서 대회의 꽃이 되었고, 가히 초인적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훗날 영화배우가 되어 타잔역으로 이름을 날린 J.와이즈뮬러가 수영에서 활약했던 것도 이 대회 때였다.

이 대회부터 마라톤의 거리가 42. 195㎞로 결정되었고, 테니스가 올림픽 종목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다음해인 1925년, IOC는 올림픽헌장을 정식으로 공포, 이를 계기로 쿠베르탱은 은퇴하여 종신 명예회장이 되고 벨기에의 라투르가 제3대 회장이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45 ② 프랑스 14, 핀란드 14.

<제9회 대회(1928, 암스테르담)>

회기 5월 17일∼8월 17일. 참가국 46, 선수수 2971. 개최국 네덜란드는 준비 도중에 올림픽이 비그리스도교적이라는 반대 의견으로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없게 되어 자금난으로 한때 개최가 위태로웠으나 인도네시아 등 식민지 거주의 네덜란드인의 원조를 계기로 시설이 완비되었다.

주경기장은 앙투카 트랙으로 포장(鋪裝)되었지만, 대회기간 동안 다우저온(多雨低溫)으로 애를 먹었으며, 개회식에 맞추어 급조한 것이어서 빈약하였다. 그러나 대회는 16년 만에 패전국인 독일·오스트리아 등이 참가하고, 육상경기에서 최초로 여자경기도 있었다.

주경기장에 세운 마라톤탑에는 회기중 올림픽 성화가 계속 타올랐다. 이 대회부터 개회식 행진의 선두에 그리스가 서게 되었다. 인도가 하키에서 처음으로 우승(제16회 대회까지 연속 우승하게 된다)하였고, 축구에서는 우루과이가 전회에 이어 연속 우승하였다. 우승수 ① 미국 22 ② 독일 11 ③ 프랑스 7.

<제10회 대회(1932, 로스앤젤레스)>

개회식 7월 30일∼폐회식 8월 14일. 참가국 38, 선수수 1331. 개최가 결정되고 9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 대회 3년 전에 완성되었던 올림픽 공원을 비롯하여 10만 5000명 수용의 대경기장(1984년의 제23회 대회도 여기가 주경기장임), 수영장, 그리고 미술관·오디토리엄 등의 부속 시설이 사상 최대의 것이었으며, 민간의 손으로 호화로운 대회를 운영한 최초의 대회라고 할 수 있다.

또 코티지풍의 올림픽촌은 남자임원·선수를 전원 숙박시킬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드는 자금 때문에 유럽의 참가국이 적었다.

이 대회는 한국인이 처음으로 참가(남자선수 3명이 육상과 복싱에 참가)한 대회였다. 비록 일제강점기하에서 일본 선수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지만 한국인의 올림픽대회 첫 참가라는 데 의의가 있었다. 우승수 ① 미국 44 ② 이탈리아 12 ③ 프랑스 11.

<제11회 대회(1936, 베를린)>

개회식 8월 1일∼폐회식 8월 16일. 참가국 49, 선수수 3980. 나치스 총통 A.히틀러가 국위 선양을 염두에 두고 준비한 이 대회는 올림픽역사상 처음으로 모든 면에서 군대의 강력한 협조가 있었고, 제10회 대회를 능가하는 호화롭고 웅장한 설비를 갖춘 대제전이 되었다.

반면, 나치당기(旗)인 하켄크로이츠를 처음으로 독일 국기로 사용하였고, 회장 내외에 넘쳐 흐르게 하는 등 정치색이 짙은 대회였다. 고대 그리스를 회상하듯이 우승자에게는 금메달 이외에 올리브와 떡갈나무의 묘목을 주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성화봉송이 있었다.

그리스의 신전 유적에서 태양광선으로 채화된 성화가 청년들에 의해서 회장인 베를린까지 릴레이되었다. 이 성화봉송이 이 대회에서는 독일군 참모본부의 군사용 조사에 악용되었다고 하지만, 올림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상징적인 의식이 되었다.

경기 내용도 충실하여 세계 올림픽 신기록이 150개 이상이 나와, <세계기록의 대회>라고 불렸다. 많은 올림픽의 영웅이 나왔는데, 단거리·허들·멀리뛰기에 3개의 세계기록을 세우며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한 미국의 J.오언스가 대표적인 선수였다. 경비를 아끼지 않고 제작한 리펜슈탈여사의 《민족의 제전》과 《미(美)의 제전》은 사상 최고의 올림픽 기록영화로 꼽히고 있다.

이 대회에도 한국인 남자선수가 육상·복싱·농구·축구에 7명 참가하였는데, 육상의 마라톤에서 손기정(孫基禎) 선수가 금메달, 남승룡(南昇龍)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1937년 쿠베르탱이 제네바에서 사망하였다. 우승수 ① 독일 38 ② 미국 24 ③ 헝가리 10.

<제12회 대회(1940, 도쿄·헬싱키)>

도쿄[東京] 대회는 1938년 7월 15일, 중·일전쟁을 이유로 일본 각의에서 반납하기로 결정함에 따라 헬싱키로 변경되었으나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열리지 못했다. 동계대회도 일본 삿포로[札幌]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중지되었다. IOC 회장 라투르가 1942년에 죽고, 스톡홀름대회에서 운영에 힘쓴 J.S.에드스트룀이 부회장 자격으로 실권을 쥐었으며, 1946년 정식으로 제4대 IOC회장이 되었다.

<제13회 대회(1944, 런던)> 제2차세계대전으로 인해 열리지 못했다.

<제14회 대회(1948, 런던)>

개회식 7월 29일∼폐회식 8월 14일. 참가국 58, 선수수 4062. 독일의 폭격으로 큰 피해를 입은 런던의 대회 개최는 운영이나 설비 면에서 상당히 힘들었지만, 각국의 협력과 신흥국의 참가로 제11회 베를린 대회보다 훨씬 많은 선수가 모였다. 그러나 독일과 일본은 참가하지 못했으며, 일찍 항복했던 이탈리아는 참가하였다.

또 성화봉송은 나치스의 모방이라 하여 반대하는 등 올림픽 무용론까지 나왔으나, 경기가 진행됨에 따라 이러한 논의는 어느 사이에 자취를 감추었다. 경기 내용은 저조하였지만 화제가 된 사람은 네덜란드의 쿤과 체코슬로바키아의 C.E.자토펙이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쿤이 100m경주·200m경주·80m허들의 3종목에 우승하였고, 400m릴레이의 앵커(마지막 주자)로도 뛰어 세 사람을 앞질러 골인함으로써 4개의 금메달을 땄다. 자토펙은 고통스런 표정으로 달려 1만m에서 우승하였고, 5000m에서는 은메달을 따 주목을 받았다.

1947년에 IOC에 가입한 한국은 이 대회부터 태극기를 앞세우고 정식으로 참가하게 되었다. 임원 17명과 복싱·역도·육상·농구·축구·사이클·레슬링에 남자 49명, 여자 1명의 선수가 참가하여, 복싱에서 동메달 1개, 역도에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1951년의 IOC 총회에서 소련의 NOC가 승인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38 ② 스웨덴 17 ③ 핀란드 10.

<제15회 대회(1952, 헬싱키)>

개회식 7월 14일∼폐회식 8월 3일. 참가국 69, 선수수 5867. 핀란드는 북유럽의 작은 국가인데다가 소련과의 전쟁에 패배하여 카렐리야지방 등을 잃고, 배상금을 물면서도 10여 년 전부터의 열망이 결실을 이루어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였다. 오랫동안 준비해 온 시설, 진실한 국민성 등이 조화를 이루어 잘 조직된 대회를 개최하였다.

독일과 일본도 다시 대회의 초청을 받았고, 이 대회부터 소련이 혁명 이래 처음으로 참가하였는데, 체조를 비롯하여 우수한 경기를 보여줌으로써 미국의 좋은 적수가 되었다. 대망의 올림픽을 개최한 핀란드가 경기에서 왕년의 명예를 잃었던 것은 패전국의 비극일 것이다. 또 IOC에 가입하지 않았던 중국은 단 1명의 선수만 수영에 출장할 것을 허용받았다. 중국은 다음해인 1953년에 IOC에 가입하였으나, 1957년에 탈퇴하였다.

올림픽의 영웅 누르미가, 성화봉송의 최종 주자가 되어 대회 분위기를 고조시켰으며, 경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자토펙이 5000m·1만m·마라톤에서 우승함으로써 <인간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한국은 임원 20명과 남자선수 20명, 여자선수 1명이 복싱·역도·사이클·승마·레슬링 종목에 참가, 복싱과 역도에서 각각 1개씩의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예술경기는 이 대회부터 예술전시로 바뀌어 우열을 다투지 않게 되었다. 또 이해부터 A.브런디지가 제5대 IOC 회장이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40 ② 소련 22 ③ 헝가리 16.

<제16회 대회(1956, 멜버른, 승마는 스톡홀름)>

개회식 11월 22일∼폐회식 12월 6일. 참가국 67, 선수수 3342. 남반구에서의 첫 대회로, IOC는 이때의 결정에서 중대한 실수를 범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법률에서는 말의 국내 유입·수입에 6개월의 검역기간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 때문에 승마경기는 29개국이 참가, 6월 10∼17일 스톡홀름에서 열림으로써 1도시 개최를 규정한 헌장에 위반되는 변칙적인 대회가 되어버렸다.

멜버른의 준비도 한때 포기할 단계에 왔다고 생각될 만큼 진척되지 않았으며, 대회가 시작되고도 통신관계의 연락이 원활하지 못하여 각국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대회 직전 수에즈와 헝가리에 동란이 일어나서, 대회 출장중이던 헝가리 선수의 미국망명 사건과, 수구 경기에서는 헝가리·소련 경기에서 난투 사건이 일어났다. 경기는 소련과 미국의 각축전으로 시종되었지만, 수영에서 개최국인 오스트레일리아가 남녀 13종목중 8종목에 우승함으로써 남반구 스포츠계에 좋은 자극이 되었다.

이 대회에 한국은 임원 22명과 선수 35명(전원 남자)이 참가, 복싱·역도·레슬링·육상·사이클·사격·농구에 출전하여, 복싱에서 은메달 1개, 역도에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스톡홀름에서의 승마경기는 유럽왕실을 한자리에 모아 중세 기사도시대를 재현한 듯한 대회가 되었다(승마만의 우승수 ① 스웨덴 3 ② 독일 2 ③ 영국 1). 우승수 ① 소련 37 ② 미국 32 ③ 오스트레일리아 13.

<제17회 대회(1960, 로마)>

개회식 8월 25일∼폐회식 9월 11일. 참가국 84, 선수수 5396. 로마는 올림픽이 시작된 뒤로 제4회 대회에도 개최 신청을 하였지만 국내 사정으로 사퇴하였고, 제12회 대회는 도쿄〔東京〕에 양보하는 등 헬레니즘세계의 중심도시로서는 불운한 입장에 있었다. 바라던 기회가 왔으므로 로마는 시설에 힘을 기울였다.

경기장은 제2차세계대전 전에 B.무솔리니가 구상했던 대로 신구 시가로 분산하여, 고대 로마의 유적인 카라칼라욕장·로마시장 등을 이용하고, 대리석을 많이 쓴 주경기장과 근대식 원형체육관 등을 신설하였다. 성화는 일찍이 J.카이사르가 개선한 포석도로(鋪石道路) 아피아가도를 달렸고, 마라톤코스는 캄피돌리오언덕에 있는 시청사 앞에서 아피아가도를 달려 콘스탄티누스황제 개선문을 결승점으로 하는 등, 역사적 무대장치에 아쉬운 것이 없었다.

이 대회에서 수영을 먼저 하고 육상을 뒤로 돌리는 프로그램의 교환이 있었는데, 이것은 대회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육상경기로 막바지의 분위기를 고조해 보려는 개최도시의 발상이었다. 마라톤에서는 에티오피아의 무명 신인 B.아베베가 맨발로 아피아가도를 역주하여 신기록으로 우승함으로써 지난날의 종주국 이탈리아와 식민지 에티오피아의 역사적 관계를 역전시켰다. 이것은 아프리카의 스포츠계에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한국은 임원 40명에 선수는 36명(남자 34, 여자 2)이 육상·복싱·역도·레슬링·사격·사이클·체조·수영·승마에 출전하였으나 메달은 하나도 획득하지 못하는 부진을 겪었다. 우승수 ① 소련 43 ② 미국 34 ③ 이탈리아 13.

<제18회 대회(1964, 도쿄)>

개회식 10월 10일∼폐회식 10월 24일. 참가국 94, 선수수 5586. 제12회 대회를 반납한 도쿄는 제17회 대회 개최를 신청했으나 실패, 1959년 뮌헨에서 열린 제55회 IOC 총회에서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아시아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대회가 되었다.

많은 비용을 들인 각 시설은 훌륭하여 IOC와 각국으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경기의 운영도 과학시설이나 종전의 용구를 개량하여 채용하였으며, 경기의 진행이나 심판의 정확성 등이 높이 평가되었다. 경기종목은 새로 배구와 유도가 더해져 20개가 되었다.

참가국 중 유색인종의 참가국이 52개국인데, 새로 참가하는 16개국은 이해에 독립한 탄자니아를 포함하여 모두 유색인종이었다. 또 북한과 인도네시아가 대회에 참가하기 위하여 와 있었으나, 신흥국국제경기대회(GANEFO;가네포)에서 국제경기연맹으로부터 출장정지를 당한 선수가 있었으므로 양국은 개회식 전에 귀국하였다.

북한의 육상선수 신금단(辛金丹) 선수가 한국에서 온 아버지와 잠시 눈물의 재회를 한 것도 이때였다. 경기 내용도 충실하여 세계신기록 47, 올림픽신기록 111개가 나왔다. 특히 수영에서 10대 선수가 크게 활약한 것이 특징이다. 에디오피아의 아베베가 마라톤을 2연패하였고, 오스트레일리아의 돈 프레저가 여자수영 100m 자유형에서 올림픽 3연패를 하였으며, 여자체조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차슬라프스카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은 임원 59명, 선수 156명(남자 130, 여자 26)이 레슬링·복싱·유도·마라톤·배구·승마·수영·사이클·체조·육상·펜싱·역도·근대5종·축구·사격·농구에 참가하여, 레슬링과 복싱에서 은메달을 각각 1개씩, 유도에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우승수 ① 미국 36 ② 소련 39 ③ 일본 16.

<제19회 대회(1968, 멕시코시티)>

개회식 10월 12일∼폐회식 10월 27일. 참가국 113, 선수수 6629. 멕시코시티는 해발고도 2240m의 고지이므로 많은 스포츠관계 의사들로부터 대회장소로서 부적합하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IOC는 강화합숙 제한일수를 2주간 연기하여 6주간으로 연장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그러나 육상경기에서는 20명, 수영에서는 15명이 세계신기록을 세웠고, 세계타이기록 19, 올림픽신기록 114개가 수립되는 등 의외로 좋은 결과가 나왔다. 특히 멀리뛰기의 비몬이 8m90의 경이적인 기록을 세움으로써 고지의 희박한 대기와의 관계가 논의되었다. 시내에서 가까운 곳에 올림픽촌이 있었고 주경기장은 최초의 전천후 트랙이었으며, 기존의 아스테카축구장은 10만 명을 수용하였다.

대회 직전에는 국제학생운동에서 불이 붙은 격렬한 학생운동과 이에 대한 군대의 가혹한 탄압이 있었다. 시내에는 총탄의 자국이 남아 있었고, 삼엄한 경계가 있었으나 대회의 운영에는 지장이 없었다. 또 이 대회에는 인종차별문제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초대되지 않았다.

북한 등의 정식국명 호칭문제로 IOC 총회에서 격론이 있었고, 육상경기의 표창식에서는 미국 흑인 입상자 2명이 흑인차별에 항의하는 뜻을 나타냄으로써 올림픽촌에서 추방되었다. 또 하계대회에서 성화봉송의 최종 주자가 현역여자선수였던 것도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편, 경기에서는 아프리카국가들이 눈부신 활약을 하여 케냐·에티오피아·튀니지·우간다·카메룬의 선수들이 16개의 메달을 획득하였다. 지난 대회에 이어 체조에서 4개의 금메달을 딴 체코슬로바키아의 차슬라프스카의 아름다움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에서는 임원 21명과 55명의 선수(남자 41, 여자 14)가 복싱·육상·배구·레슬링·역도·사이클·체조·수영·사격·농구에 참가하여 복싱에서만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우승수 ① 미국 45 ② 소련 29 ③ 일본 11.

<제20회 대회(1972, 뮌헨)>

개회식 9월 26일∼폐회식 10월 11일. 참가국 122, 선수수 7894. 나치스 치하의 제11회 베를린대회가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는 비판을 의식하여 평화와 자유를 강조하는 대회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10월 5일 이른 아침, 올림픽촌의 이스라엘 숙사에서 <검은 9월단>이라고 칭하는 게릴라 조직이 테러를 자행하여 11명의 이스라엘 대표단원이 희생되었다.

올림픽사상 최대의 참극이었으며, 이로 인하여 대회를 속행할 것인가 중지할 것인가가 논의되었는데, 1일의 애도일을 두고 경기는 재개되어 예정보다 하루 늦은 11일에 폐회되었다. 마침내 올림픽을 둘러싸고 정치·인종·종교의 대립이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경기에서 동독·서독 양국의 건투가 눈에 띄었고, 미국은 지금까지 무패였던 농구와 장대높이뛰기의 우승을 빼앗겼으나, M.스피츠가 수영 13종목에 참가하여 금메달과 세계신기록 7개를 획득하였다. <바르디>라는 애칭의 닥스훈트가 올림픽의 마스코트로서 처음 등장하였다.

한국은 19명의 임원과 47명의 선수(남자 35, 여자 12)가 유도·육상·복싱·레슬링·배구·역도·수영·사격에 참가하여 유도에서 은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그때까지 IOC 규약에 규정되어 조직위원회의 권한이던 2종목의 전시경기는 1973년의 규약개정으로 삭제되었다. 다만, IOC와는 관계없이 개최도시의 판단으로 전시를 할 수 있으나, 그것은 공식적으로는 올림픽과 무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50 ② 미국 33 ③ 동독 20.

<제21회 대회(1976년, 몬트리올)>

개회식 7월17일∼폐회식 8월 1일. 참가국 88, 선수수 6189. 제1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예산이 당초보다 4배나 폭등하고 정치적 문제도 얽혀 몇번이나 중지를 고려하면서도 개최되었다. 뮌헨대회의 교훈으로 경비(警備)는 올림픽사상 최대규모였다. 개최 직전에 중화민국(타이완)·남아프리카공화국 문제로 혼란상태에 빠져 또다시 올림픽에 정치문제가 나오는 결과를 낳았다.

성화는 시대를 반영하여 그리스로부터 위성중계에 의한 레이저광선으로 오타와에서 점화되어 그곳으로부터 몬트리올의 대회장으로 봉송되었다. 육상경기에는 카리브 선풍이 불었고, 또 소련의 사네예프가 세단뛰기에서 올림픽 3연패를 이룩하는 등 미국의 독무대에서 메달의 분산 시대로 옮겨가는 감이 들었다.

여자체조에서는 하얀 요정인 14세의 코마네치(루마니아)가 10점 만점을 7번이나 받아 화제에 올랐으며, 여자 수영에서는 동독의 엔다 선수가 독주하였다. 복싱에서는 쿠바의 스테벤손이 KO의 연속으로 헤비급 최초의 2연패를 하였다.

한국은 이 대회에서 대망의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레슬링에서 양정모(梁正模) 선수가 올림픽대회 참가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획득하는 감격을 연출해 내어 국민의 숙원을 풀어 주었다. 이 대회에는 임원 22명과 선수 50명(남자 38, 여자 12)이 참가하여 레슬링에서 금메달 1개, 동메달 1개, 유도에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 단체경기인 여자배구에서 처음으로 동메달을 획득하는 등 참가 종목 중 복싱과 사격에서만 메달이 없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이것은 <소수 정예선수 참가>를 택한 성과이기도 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47 ② 동독 40 ③ 미국 34.

<제22회 대회(1980, 모스크바)>

개회식 7월 19일∼폐회식 8월 3일. 참가국은 81, 선수수 5923. 사회주의국가에서의 최초의 올림픽 대회였으므로 참가국·참가인원이 사상 최고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1979년 말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서독·일본 등의 보이콧이 있었기 때문에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고 신흥국의 참가가 두드러진 대회였다. 한국도 이 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이 대회는 시설·운영면에서 사회주의국가의 종주국을 자임하는 소련이 위신을 걸고 준비한 것이었으므로 훌륭한 것이었으나, 모스크바의 거리에서 어린이와 학생의 모습이 사라지고, 대회 관계자와 여행자만이 눈에 띄어, 시민과 선수가 어울리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없었던 올림픽 풍경이 특이하였다.

또한 주요국의 보이콧에도 불구하고 세계신기록 39, 올림픽신기록 95개라는 숫자는 지난 대회에 못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소련과 동독의 메달 경쟁이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미국이 불참한 수영의 경우, 남자 1500m 자유형에서 사상 최초로 14분대의 세계신기록을 세운 사르니코프가 이 대회 최대의 영웅이었다. 폐회식 때 마스코트인 곰 <미샤>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승수 ① 소련 80 ② 동독 47 ③ 이탈리아·불가리아·캐나다·쿠바 각 8.

<제23회 대회(1984, 로스앤젤레스)>

개회식 7월 28일∼폐회식 8월 12일. 참가국 140, 선수수 7055. 로스앤젤레스에서의 개최는 52년 만에 2번째이다. 개회 직전 5월 8일에 소련이 선수의 안전 확보를 이유로 불참을 표명하였다. 동독·폴란드 등의 동유럽국가와 쿠바·북한 등의 14개국도 참가를 취소함으로써 80년의 모스크바대회에 이어 이른바 절름발이의 반쪽 대회가 되었다.

그러나 참가국 및 참가 선수수로는 사상 최고를 기록하였다. 메달의 획득수는 주최국 미국이 압도적으로 많아서 루마니아·서독을 크게 앞질렀다. 그리고 처음으로 참가한 중국이 금메달 15개를 포함하여 합계 52개를 획득하는 활약을 보였다.

미국의 K.루이스가 육상 100m·200m·멀리뛰기·400m릴레이의 4종목에서 4관왕이 되었다.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여자마라톤에서는 미국의 27세 주부인 J.베노이트가 우승하였고, 스위스의 안데르센은 긴 레이스로 체력이 쇠진하여 비틀거리면서도 완주하여 관중으로부터 큰 성원과 박수를 받았다.

한국은 77명의 임원과 230명(남자 138, 여자 92)의 선수가 레슬링·유도·복싱·농구·핸드볼·육상·사격·역도·수영·조정·펜싱·사이클·체조·근대5종·요트·카누·승마·배구·테니스·야구에 참가하여, 레슬링의 김원기(金元基)·유인탁(柳寅卓), 유도의 하형주(河亨柱)·안병근(安柄根), 복싱의 신준섭(申俊燮), 양궁의 서향순(徐香順)이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은메달 6개(레슬링 1, 유도 2, 복싱 1, 농구·핸드볼)와 동메달 7개를 획득함으로써 참가국 140개국 중 10위가 되어, 스포츠 선진국으로 도약하였다.

이 대회는 세금을 사용하지 않은 이른바 민영대회로서 총액 5억 달러의 예산으로 운영되었다. 그 특색은 52년 전의 콜로세움 등 기존 시설의 이용, 스폰서·서플라이어의 협찬금, 자원봉사자의 대동원에 의한 인건비의 절약 등으로, 1억 5000만 달러의 흑자 결산이 되었다.

개회식에는 하늘을 나는 인간과 할리우드쇼, 폐회식에는 UFO와 <우주인>이 나타나는 등 관중을 비롯하여 전세계의 텔레비전 시청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화려한 연출로 스포츠와 축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한 대회였다.

올림픽은 종목·인원·시설의 확대로 거대화함에 따라 안전확보 등을 위한 경비가 막대해짐으로써 도시나 국가의 부담 한도를 넘기 시작하였고, 경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업주의의 지원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우승수 ① 미국 83 ② 루마니아 20 ③ 서독 17.

<제24회 대회(1988, 서울)>

개회식 9월 17일∼폐회식 10월 2일. 참가국 160, 선수수 9417. 1981년 9월 30일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개최된 IOC 총회는 제24회 올림픽대회를 한국의 서울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한국은 체육관계인사를 중심으로 경제계 유력인사, 정부관계인사, 언론인 등 107명의 대규모 올림픽 유치대표단을 파견함으로써 치열한 경합을 벌인 일본의 나고야[名古屋]를 52:27로 누르고 올림픽대회 유치에 성공하였다.

도쿄에 이어 아시아에서 2번째의 올림픽대회인 서울올림픽대회의 경기종목은 정식종목 23(육상·양궁·농구·복싱·카누·사이클·승마·펜싱·축구·체조·핸드볼·하키·유도·근대 5 종·조정·사격·수영·탁구·테니스·배구·역도·레슬링·요트)에 시범종목 2개(야구·태권도), 전시종목 2개(배드민턴·볼링)였다.

이 대회에서 세계신기록은 모두 33개가 수립되었는데, 터키의 역도선수 나임 슐레이마눌루는 한자리에서 모두 6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웠다. 같은 역도종목에서 소련의 유리 자하레비치가 3개, 불가리아의 세브달린 마라노프도 2개의 세계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하였다.

육상에서는 캐나다의 B. 존슨이 약물 복용을 하지 않았더라면 육상 100m트랙경기에서 세운 9초 79라는 기록이 이 대회를 빛내줄 화려한 세계신기록이 될 뻔했지만, IOC에서 복용을 금지한 약물(아나볼릭스테로이드)을 먹은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기록과 함께 금메달을 박탈당하였다. 그러므로 육상경기에서는 미국의 F.G. 조이너가 여자 200m에서 세운 세계신기록(21초 34)이 가장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10개 동메달 11개를 획득하여 참가국 160개국 중 종합순위 4위를 차지하는 금자탑을 세웠다. 양궁의 김수녕(金水寧)이 여자개인전과 여자단체전에서 1위를 하여 최초의 2관왕이 되었고, 단체구기종목에서는 최초로 여자 핸드볼팀이 우승하여 값진 금메달을 차지하는 감격을 누렸다.

개회식과 폐회식도 여느 대회 못지 않게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 대회의 엠블렘은 한민족 전래의 문양인 3태극에서 착상되어, 3태극을 원심운동과 구심운동의 2가지 형태로 형상화하였는데, 구심은 온세계인이 서울에 모이는 세계적인 <화합>을 나타내고, 원심은 인류의 영원한 행복과 번영을 향한 <전진>을 상징하였다. 마스코트인 <호돌이>는 전통적으로 한민족에게 친근감을 주고 위엄과 용맹을 갖춘 호랑이를 아기호랑이로 단순·형상화하여 만들어졌다.

이 대회는 스포츠행사로서는 완벽에 가까운 성공을 거두었고, 동서의 이념분쟁과 인종차별로 인한 갈등과 불화를 해소시키면서 세계평화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했으며, 무엇보다도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크게 향상시킨 대회로 평가되었다. 또 자원봉사자 2만 7221명의 활동도 대회의 성공적 거행의 밑거름이 되었다. 우승수 ① 소련 55 ② 동독 37 ③ 미국 36.

<제25회 대회(1992, 바르셀로나)>

개회식 7월 25일~폐회식 8월 9일. 참가국 172, 선수수 1만 5000. 에스파냐로부터 카탈루냐 분리·독립요구와 바스크분리주의자(ETA)의 테러위협 등으로 위험이 예상됐으나 별다른 문제없이 치러졌다. 1972년 뮌헨대회 이후 처음 서유럽에서 개최된 대회였으며,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 이후 올림픽에 불참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은 흑인·백인이 한데 어울린 단일팀으로 참가했다.

또한 1980년 모스크바대회 이후 올림픽 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쿠바와 북한 등이 모두 참가했고 보스니아공화국 팀도 유엔의 호송으로 무사히 도착해 처음으로 보이콧이 없는 올림픽을 기록해 동서냉전의 해소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했다. 이 대회는 경기종목면에서도 최대 규모인 25개 정식종목과 3개 시범종목으로 <영원한 친구들>이라는 슬로건 아래 모두 257개의 메달을 놓고 조국과 개인의 명예를 건 선의의 경쟁을 벌였다.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몬주익언덕 주경기장에서 3시간 동안 펼쳐진 개막식은 F. 도밍고, J. 카레라스 등 세계적인 성악가들의 격조높은 음악과, 에스파냐의 옛 영화를 재현하면서도 카탈루냐 고유의 문화와 독립의지를 표출한 무용으로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다짐했다.

경기면에서도 독립국가연합(CIS)의 체조스타 V. 셰르보가 안마·링·뜀틀·평행봉·개인종합 등 5개 종목을 휩쓸고 남자단체전에서 2연패를 하는 데 크게 기여해 체조사상 최초로 금메달 6관왕에 올랐다. Y. 사도비도 단거리·중거리를 동시에 제패해 수영 3 관왕이 되었다. 또한 미국의 육상스타 K. 영이 남자 400m허들에서 9년 만에 신기록을 수립하는 등, 모두 21개 세계신기록이 나와 대회를 빛냈다.

헝가리의 수영선수 T. 다르니는 왼쪽 눈의 실명이라는 불운 속에서도 올림픽 2관왕 2연패를 이룩하였고, 미국의 G. 디버스도 2개 발가락을 절단하는 역경을 딛고 여자 100m에서 금메달을 따냈다. 장대높이뛰기 부문에서 세계신기록을 30차례나 경신해 <인간새(鳥人)>로 불리는 S. 부브카(CIS)가 최하위에 머물러 큰 이변을 일으켰다.

한국은 야구와 농구를 제외한 전 종목과 시범종목인 태권도 등 24개종목에 걸쳐 임원 97명, 선수 247명이 참가했다. 사격에서 여갑순(呂甲順)이 바르셀로나 금메달 1호로 우승과녁을 명중시킨 데 이어 이은철(李銀徹)이 남자소구경복사에서 금메달을 획득해 초반에 2개 금메달을 따냈다.

마라톤에서 황영조(黃永祚)는 2시간 13분 23초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해 손기정(孫基禎)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베를린올림픽 이래 한국 마라톤의 올림픽 제패라는 신화를 창조했다. 여자핸드볼팀은 서울올림픽에 이어 한국구기종목 사상 최초로 올림픽 2연패를 이루었다. 한국은 금메달 12개, 은메달 5개, 동메달 12개로 종합 7위의 성적을 올렸다. 우승수 ① CIS 45 ② 미국 37 ④ 독일 33.

<제26회 대회(1996, 애틀랜타)>

개회식 7월 19일~폐회식 8월 4일. 참가국 197, 선수수 1만 700. 사상 최초로 IOC 전 회원국이 참가한 대회였으나 불합리한 수송체계에서 비롯된 교통혼란과 잦은 컴퓨터 고장은 지나친 상업주의와 더불어 참가국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다. 특히 7월 28일 발생한 폭파사건으로 현장에서 2명이 사망해 <안전 올림픽>이라는 구호를 무색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 참가선수들이 불태운 스포츠를 향한 열정만은 올림픽의 순수한 정신에 어긋나지 않았다.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등에 업은 미국이 육상과 수영에서 강세를 보이며 종합 1위를 차지했고, 러시아·독일·중국이 그 뒤를 이었으며, 2000년 올림픽대회 개최국인 오스트레일리아가 7위로 부상해 스포츠 강국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이 대회에서는 특히 10위권 내의 다툼이 치열했는데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자력으로 10위권을 지키며 저력을 과시했고, 한국은 금메달 7개, 은메달 15개, 동메달 5개 등 총 메달수 27개로 10위를 차지해 올림픽대회 4회 연속 10위권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최소한 1개 이상의 메달을 따낸 나라는 79개국에 이르렀고 이중 53개국은 1개 이상의 금메달(5개국은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1997년 중국에 환수되는 홍콩은 올림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금메달을 차지하는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이 대회에는 또 여자축구를 비롯, 비치발리볼, 경량급 조정경기, 여자 소프트볼, 산악자전거 경기 등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어 치러졌다.

애틀랜타 올림픽대회 역시 잊지 못할 스타들을 숱하게 배출해냈다. 육상에서 9번째 금메달을 목에 건 미국의 K. 루이스, 올림픽대회에 연속 4회 출전해서 4번째 금메달을 획득한 영국의 조정선수 S. 레드그레이브, 1992년 올림픽대회 다이빙 플랫폼에서 금메달을 딴 데 이어 애틀랜타 올림픽대회에서 스프링보드와 플랫폼 양 종목을 석권한 중국의 푸밍샤 등이 그들이다.

미국의 육상선수 M. 존슨은 200m와 400m 동시 우승으로 가장 주목을 받았는데, 이는 여자 200m와 400m를 석권한 프랑스의 마리 M.G. 페레크와, 800m, 1500m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러시아의 S. 마스테르코바와 견줄 만한 대기록이었다.

러시아의 A. 네모프는 체조에서 금메달 6개를 따내 대회 최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으며, 아일랜드에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바친 여자수영선수 M. 스미스는 대회 내내 약물복용 여부로 언론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우승수 ① 미국 43 ② 러시아 25 ③ 독일 18.

[동계올림픽]

겨울철 경기가 올림픽대회에 첨가된 것은 제 4 회 대회(1908, 런던)의 피겨 스케이팅이 처음이었다. 이때 제정 러시아가 본국으로서는 최대의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제 1 차세계대전 후의 제7회 대회(1920, 안트베르펜)에서는 피겨 스케이팅 이외에 아이스하키가 더해졌다.

그 이듬해인 1921년의 IOC 회의에서는 본격적인 동계대회를 개최하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북유럽 3개국이 반대하였다. 동계대회는 북유럽과 같은 지리적 이점이 있는 곳이 아니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이미 그들이 하고 있던 대회, 특히 노르웨이의 홀멘코렌 대회로 충분하다는 것이 속셈이었다. 그러나 결국 IOC의 공식 승인이 나 시험적으로 프랑스에서 열기로 하였다.

<제1 회 대회(1924, 샤모니 몽블랑)>

개회식 1월 25일~폐회식 2월 4일. 참가국 16, 선수수 294. 알프스 등산의 기지였던 프랑스의 변경 샤모니는 당시 벽촌이었으나, 온 마을이 준비에 나서, 선진 스포츠도시에 대해서도 참고로 조사하는 등 훌륭한 대회를 개최하였다.

스포츠의 자연조건이 좋아, 반대하던 북유럽 3국도 참가하여 선진국다운 멋진 경기를 보여주었다. 같은 해에 국제스키연맹(FIS)이 결성되었다. 2년 뒤의 IOC 총회에서는 이 대회를 제 1 회 동계올림픽대회로 호칭하게 되었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4, 핀란드 4 ② 오스트리아 2.

<제2 회 대회(1928, 장크트모리츠)>

개회식 2월 11일~폐회식 2월 19일. 참가국 25, 선수수 464. 하계올림픽대회를 개최한 네덜란드는 평탄한 국토에다 동계경기장도 없었으므로 스위스에서 열었다. 경기 중 기온이 25℃ 정도까지 올라 1만m경기는 중지되었다. 북유럽 3국의 독무대였다. 이후 제10회 대회까지 동계올림픽은 기후로 골치를 앓았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6 ② 핀란드·스웨덴·미국 각 2.

<제3 회 대회(1932, 레이크플래시드)>

개회식 2월 4일~폐회식 2월 13일. 참가국 17, 선수수 252. 대회장은 뉴욕주(州)의 교통이 불편한 벽촌이었는데, 미국이 거액을 투자하여 시설을 갖추었다. 그러나 50년대의 이상난동(異常暖冬) 때문에 스키 코스 등은 레이스 전에 80㎞나 떨어진 곳으로 변경, 캐나다로부터 눈을 실어오기까지 했다.

스케이트는 미국 규칙의 오픈 레이스제로 실시했으므로 유럽 선수와의 사이에서 큰 트러블이 생겼다. 그 때문에 스피드 스케이팅은 미국이 대승했으나, 스키는 정예주의로 참가한 북유럽이 우승을 거두었다. 우승수 ① 미국 6 ② 노르웨이 3 ③ 핀란드·스웨덴·오스트리아·프랑스 각 1.

<제4회 대회(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개회식 2월 6일∼폐회식 2월 16일. 참가국 28, 선수수 669. 이 대회 때도 기온이 높았으나, 스키장·스케이트장 모두 나치스 독일의 위력으로 커다란 가설 스탠드를 만들었다. 대회장 주변에까지 반(反)유대인 슬로건이 붙어 있었으므로 IOC 회장 라투르가 히틀러에게 엄중 항의하여 철거시킨 일도 있었다.

오늘날에 와서는 주요 종목으로 되어 있는 스키의 알파인경기가 시작된 것도 이 대회 때의 일이다. 여자 종목에서도 처음으로 알파인 1종목이 실시되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 소니아 헤니는 제1회 대회에 13세로 처음 참가한 뒤, 이 대회까지 3회 우승하여 은반의 여왕으로 불렸다.

이 대회에는 한국인 김정연(金正淵)·이성덕(李聖德)·장우식(張佑植)의 3명도 일본 선수단 34명에 끼어 처음으로 출전하였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7 ② 독일 3 ③ 스웨덴 2.

<제5회 대회(1948, 장크트모리츠)>

개회식 1월 30일∼폐회식 2월 8일. 참가국 28, 선수수 878. 제2차세계대전 후의 첫 대회로 독일·일본은 초대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날씨도 경기하기에 좋지 않았다. 아이스하키에서 미국의 두 팀이 참가하는 진기한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이 대회에서였다.

한 팀은 국제아이스하키연맹에 가입해 있던 미국의 아마추어하키협회 추천팀이었는데, 미국 NOC가 인정하지 않아 독자적인 팀을 편성했지만 국제연맹이 승인하지 않았다. 입장료 수입을 노리고 두 팀을 인정한 조직위원회가 비난을 받았고, 국제아이스하키연맹은 제명되었다.

곧 연맹측이 IOC에 사과함으로써 아이스하키는 정식경기로 추인되었다. 이 대회부터 한국팀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참가하였다(임원 2, 선수 3). 우승수 ① 스웨덴 4, 노르웨이 4 ② 스위스 3.

<제6회 대회(1952, 오슬로)>

개회식 2월 14일∼폐회식 2월 25일. 참가국 30, 선수수 694.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의 옛이름 크리스티아니아가 스키의 기술·명칭에 있듯이, 처음으로 동계경기의 발상지에서 개최되었다. 근대스키 창시자의 한 사람인 S.노르헤임(1825∼97)의 출생지 몰게다르에서 오슬로까지 동계대회 최초의 성화봉송이 거행되었다.

수도를 개최지로 한 것은 동계대회로서는 처음이다. 독일과 일본이 다시 초대되었다. 역시 북유럽 3국이 명예를 걸고 활약하였다. 스피드 스케이팅이 실내 링크를 사용한 것도 처음이다. 한국은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았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7 ② 미국 4 ③ 핀란드 3, 독일 3.

<제7회 대회(1956, 콜티나단페초)>

개회식 1월 26일∼폐회식 2월 5일. 참가국 32, 선수수 820. 이탈리아 북부의 동계경기 중심지였으므로 조건이 양호하였다. 소련이 처음으로 참가하여 각 경기에 뛰어난 성적을 거두었다. 오스트리아의 A.자일러가 스키경기에서 알파인 3관왕이 되었다.

점프경기에서는 핀란드 선수가 손을 허리에 대는 드롭 스타일로 금·은메달을 독점하였다. 종래는 양손을 머리의 앞쪽으로 뻗어서 점프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한국은 임원 3명과 선수 4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6 ② 오스트리아 11, 스웨덴 11.

<제8회 대회(1960, 스쿼밸리)>

개회식 2월 18일∼폐회식 2월 28일. 참가국 30, 선수수 666. 미국의 한 기업가가 눈사태로 유명한 <죽음의 골짜기> 근처에 거액을 들여 시설을 함으로써 개최되었다. 스케이트 링크는 파이핑 링크를 채용하여 대회를 성공시켰다. 경기에서는 소련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였다.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이 처음으로 정식 종목이 되었다. 한국은 임원 3명, 선수 7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21 ② 미국 10 ③ 독일 8.

<제9회 대회(1964, 인스브루크)>

개회식 1월 29일∼폐회식 2월 9일. 참가국 36, 선수수 933. 오스트리아가 자랑한 대회장도 대회 전의 심한 눈 부족으로 연습하던 선수 2명이 사고로 죽었다. 소련이 전대회에 이어 또 압도적인 강세를 보였다. 한국은 임원 6명, 선수 7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1 ② 오스트리아 4 ③ 핀란드·스웨덴·노르웨이·프랑스 각 3.

<제10회 대회(1968, 그르노블)>

개회식 2월 6일~폐회식 2월 18일. 참가국 37, 선수수 1293. 프랑스의 오랜 역사와 신흥공업화에 성공한 도시가 대회장이었다. C.A.J.M. 드골 대통령도 큰 힘을 기울였다. 개회식이 경기장이 아닌 큰 가설 스타디움에서 거행되고, 식전음악에 근대음악을 연주하는 등, 연출의 참신함이 돋보였다. 이 대회부터 합동으로 참가했던 독일이 동·서 양국으로 갈라져 참가하였다. 또 성별검사와 도핑테스트도 실시되었다.

입상자가 메이커의 상표를 뚜렷이 알 수 있는 스키를 들고 사진 찰영에 응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경기에서 프랑스의 퀴리가 제 7 회 대회의 자일러에 이어 사상 2번째로 스키 알파인 3관왕이 되었다. 한국은 임원 7명과 선수 8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노르웨이 6 ② 소련 5 ③ 프랑스 4, 이탈리아 4.

<제11회 대회(1972, 삿포로)>

개회식 2월 3일~폐회식 2월 13일. 참가국 35, 선수수 1128. 1940년에 개최가 내정되었으나, 제 2 차세계대전으로 취소되었던 삿포로가 조건·성적 모두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동계대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조건인데, 이 대회는 꽤 좋은 기후 속에서 진행되었다.

동계대회에서는 처음으로 오스트리아의 슈랑츠가 아마추어 규정 위반으로 출장을 거부당하였다. 또 도핑테스트로 실격한 선수가 나왔으며, 동계경기의 비(非)아마추어화는 IOC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한국은 임원 2명, 선수 5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8 ② 동독·스위스·네덜란드 각 4.

<제12회 대회(1976, 인스브루크)>

개회식 2월 4일~폐회식 2월 15일. 참가국 37, 선수수 1261. 당초에는 미국의 덴버로 결정되었으나, 환경파괴의 우려가 있다 하여 시민투표에서 부결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인스브루크가 대신 대회 개최지가 되었다. 되도록이면 지난 대회의 시설을 이용·개선하여 간소한 대회로 치를 것을 표방하였다.

경기에서는 소련이 압도적인 강세를 보여 13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동독이 7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우세를 보였다. 한국은 임원·선수 각 3명씩 6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3 ② 동독 7 ③ 미국 3, 노르웨이 3.

<제13회 대회(1980, 레이크플래시드)>

개회식 2월 13일~폐회식 2월 24일. 참가국 37, 선수수 1283. 제 3 회 동계올림픽을 개최함으로써 미국에서 겨울 스포츠의 메카가 된 레이크플래시드에서 다시 열렸다. 메달경쟁은 예상대로 소련이 우세했으며, 2위는 동독이 차지했다.

개최국인 미국의 E. 하이덴이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5개의 금메달을 휩쓸고, 아이스하키에서 미국이 소련을 누르고 우승하는 등 화제가 많았던 대회였다. 한국은 임원 9명과 선수 10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0 ② 동독 9 ③ 미국 6.

<제14회 대회(1984, 사라예보)>

개회식 2월 7일~폐회식 2월 19일. 참가국 49, 선수수 1490. 처음으로 비동맹국 유고슬라비아에서 개최된 대회였다. 대회 전에는 눈이 적었으나, 대회중에는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동독이 엥케 등의 활약으로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4종목(500m·1000m·1500m·3000m) 모두에서 금·은메달을 독식하였다.

피겨 스케이팅 페어부문에서는 소련이 6연승을 장식하였으며, 아이스하키에서는 지난 대회에 우승했던 미국이 초반전에 캐나다에게 패배함으로써 소련이 우승하였다. 스키의 노르딕에서는 핀란드의 하말라이넨이 5㎞·10㎞·20㎞의 여자 3종목에서 모두 우승하였다. 한국은 임원 17명에 선수는 15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동독 9 ② 소련 6 ③ 미국·핀란드·스웨덴 각 4.

<제15회 대회(1988, 캘거리)>

개회식 2월 14일~폐회식 2월 29일. 참가국 57, 선수수 1759. 10개 경기종목에서 각축을 벌였다. 캘거리 시민 남녀노소가 참가한 개회식·폐회식이 인상적이었다. 아이스하키의 남·북한 대결에서 한국이 북한을 이겼다. 한국은 임원 16명과 선수 30명이 참가하였다. 우승수 ① 소련 11 ② 동독 9 ③ 스위스 5.

<제16회 대회(1992, 알베르빌)>

개회식 2월 9일~폐회식 2월 24일. 참가국 65, 선수수 2031. 많은 선수들이 참가하였으나, 프랑스 알베르빌경기장의 낡은 시설과 좋지 않은 기후로 진행에 무리가 있었다. 제 5 회 대회부터 참가했으나 메달을 따지 못했던 한국은 스피드 스케이팅과 쇼트트랙에서 금메달 2개, 은·동메달 각 1개로 종합성적 세계10위를 차지하였다. 우승수 ① 독일 10 ② 독립국가연합·노르웨이 각 9. 한편, 동계대회는 1992년 제16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하계대회와 2년 간격으로 나뉘어 개최되기 때문에 제17회 대회는 94년(제26회 하계올림픽대회는 96년에 개최)에 개최하게 되었다.

<제17회 대회(1994, 릴레함메르)>

개회식 2월 13일~폐회식 3월 1일. 참가국 67, 선수수 3793. 1952년 오슬로대회에 이어 노르웨이에서 두 번째로 열린 이 대회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에 강세를 보여 금메달 4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로 종합 6위에 올랐다. 우승수 ① 러시아 11 ② 노르웨이 10 ③ 독일 9.

<이재현>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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