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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8 (일)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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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아프리카 2 (한메)
아프리카 2

(앞에서 이음)

[정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서 분할, 식민지화되어 서양 열강의 지배 아래 들어간 아프리카는 제2차세계대전 뒤에 일어난 식민지체제 붕괴를 배경으로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에 독립의 시대를 맞았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아프리카의 독립국은 이집트·에티오피아·라이베리아·남아프리카공화국 등 4개국에 지나지 않았지만, 17개의 식민지가 일제히 독립하여 <아프리카 독립의 해>로 불린 60년을 거쳐 83년까지 총 52개국이 독립하였다. 이 가운데서 제2차세계대전 뒤에 독립한 47개국을 분류하면, 옛 프랑스령이 21개국, 옛 영국령이 16개국, 옛 포르투갈령이 5개국, 옛 벨기에령이 3개국, 옛 에스파냐령과 옛 이탈리아령이 각각 1개국이다.

<국가 건설의 과제>

독립한 신흥 아프리카 각국의 공통된 과제는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이었다. 그 이유는 아프리카는 부족국가 단계에서 열강의 침략을 받아, 식민지주의 아래 근대적인 민족국가 형성을 저지당한 채 독립의 시대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민지주의가 만들어낸, 아프리카 실정에 맞지 않는 행정구획을 거의 그대로 이어받아 독립했던 것도 문제였다. 즉 아프리카의 독립한 국가단위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식민지였지 이미 있던 민족이 아니었다.

그래서 현재 아프리카의 신흥 각국은 다부족국가이기 때문에 통일성이 없고, 부족간 대립이 격심해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1960∼63년의 콩고동란과 67∼70년의 나이지리아에서 발생한 비아프라내전 등은 모두 부족대립이 그 원인이었다. 따라서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은 독립기 이후 아프리카내셔널리즘의 최대과제가 되었다. <우리들의 목적은 식민지주의자가 이 대륙을 분할해 만든 볼품없는 가공품에서 진정한 근대적 민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라고 한 잠비아 대통령 K.카운다의 말은 아프리카지도자들의 공통된 인식을 표현한 것이다.

<정체(政體)>

1991년 현재, 아프리카 53개국 중에서 군주제를 채택한 나라는 스와질란드·모로코·모리셔스·레소토 등 4개국뿐이며, 나머지 국가는 공화제를 채택하고 있다. 군주제의 4개국 중 모로코·스와질란드·레소토는 입헌군주제이며, 모리셔스는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와 같이 국가원수는 영국여왕이고 행정상의 실질적 권한은 총리가 가지고 있어 특징적이다. 이들 4개 군주국을 제외한 나머지 49개국은 모두 공화제국가로, 대부분 대통령제를 채택하고 있다.

단, 리비아만은 예외로, 대통령이나 총리와 같은 행정적 지위가 없는 대신 국가원수로서 <최고지도자>라는 독특한 지위체제를 갖추고 있다. 현재 리비아의 최고지도자는 M.카다피이다. 또한 행정상 최고책임과 권한이 대통령이 아닌 총리에게 있는 국가도 있다.

<일당제와 복수정당제>

현재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공통된 정치적 특징 가운데 하나는 권력집중형의 정치체제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다. 그 현상이 일당제로 나타나는데, 1991년 현재 일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기니비사우·앙골라·소말리아 등 27개국에 이른다. 나머지 국가 가운데에는 현재 군사정권하에 있어서 정당활동이 금지되어 있는 나라와 모리타니·리비아와 같이 정당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도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일당제국가의 비율이 더욱 높다고 볼 수 있다.

이들 일당제국가 가운데에는 알제리(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앙골라(앙골라인민해방운동;MPLA)·기니(기니민주당;PDG)·탄자니아(탄자니아혁명당)·모잠비크(모잠비크해방전선;FRELIMO) 등과 같이 일당제를 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국가(법제상의 일당제 국가)도 있고, 세이셸(세이셸인민진보전선;SPPF)·가봉(가봉민주당)·코트디부아르(코트디부아르민주당) 등과 같이 사실상의 일당제국가도 있다.

이처럼 일당제국가가 아프리카에 많은 이유는 근대적 민족국가의 건설이 늦어진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거의 대부분의 국가가 복잡한 부족구성을 가졌으며, 그것이 분열의 강력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아프리카 신흥 각국의 경우, 일당제를 중심으로 한 강력한 집권 정치체제는 국민적 통합을 추진하는 데에 가장 효과적인 정치적 수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급속한 경제발전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일당제에 의한 동원체제가 효과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당제에서는 유일당을 견제할 세력이 제도적으로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잠재적인 정치적 불만이 누적되어 정치적 불안정을 조장하는 경향도 있다. 이것이 현재 아프리카 각국에서 쿠데타가 자주 발생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한편, 복수정당제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는 수단·이집트·감비아·시에라리온·나미비아·짐바브웨·세네갈·나이지리아·보츠오나·마다가스카르·남아프리카공화국·콩고·모로코·모리셔스·스와질란드·중앙아프리카공화국·카보베르데·르완다 등 18개국에 불과하다. 이 가운데 이집트·감비아·시에라리온·세네갈·보츠와나·마다가스카르 등 6개국은 여당이 압도적으로 강해 실질적으로는 일당제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군사정권과 군부주도형정권>

다른 개발도상지역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에서도 군부의 정치적 개입이 현저하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대 중반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해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계속되고 있다. 군부주도형정권이란, 일찍이 쿠데타에 의해서 성립된 군사정권이 그 뒤 문민(文民)의 협력을 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정치적 주도권을 계속 확보하는 정권을 말한다.

아프리카에 군사정권이나 군부주도형정권이 많은 이유는 일당제국가로 대표되는 권력집중형 정치체제를 가진 나라가 많고, 그러한 곳에서의 정권교체는 쿠데타라는 비합법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군부의 정치개입이 당연시된 데에도 있다. 또한 아프리카에서는 군부가 근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집단으로 다른 사회집단을 능가하며, 그 결과 독자적인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정치영역에 뛰어드는 조건을 갖추기 쉽다는 것도 군사정권이나 군부주도형정권을 배출시키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군사정권이나 군부주도형정권은 잠정형정권(暫定型政權)과 개혁형정권(改革型政權)으로 나누어진다. 잠정형정권이란 문민정치의 부패시정, 정치적 혼란상태의 구제, 무력에 의한 일당지배의 타도, 부족주의적 분리주의 극복 등 제한된 목적을 위해 잠정적으로 정권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개혁형정권이란 장기적계획을 세워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개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정권을 가리킨다. 1960년대에는 잠정형정권이 많았으나, 70년대 이후에는 개혁형정권이 많았다. 74년에 성립된 에티오피아의 군사정권은 반봉건혁명을 추진해 왔다는 점에서 개혁형정권의 전형이 되었으며, 콩고·자이르·마다가스카르 등의 군부주도형정권은 잠정형에서 개혁형으로 전환한 대표적인 국가이다. 그러나 1966·71·81년에 잠정형군사정권이 반복 등장했던 가나와 같은 유형도 있다.

<사회주의>

아프리카에서도 다른 개발도상지역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가 널리 제창되었다. 그것은 <사회적 공정함을 수반하는 급속한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주의가 최상의 이데올로기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해서 매우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아프리카적 사회주의로 통칭되는 <아프리카성(性)>을 짙게 반영한 독특한 사회주의로, 공통점은 <식민지화되기 이전의 아프리카의 공동체사회에 존재하고 있던 사회주의적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하여 새로운 사회주의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의 공동체사회에 그러한 사회주의적 전통이 존재하였는지는 의문이지만, 문제는 각국이 이러한 아프리카적 사회주의에 의해 근대화를 추진하려고 한다는 점에 있는 것으로, 이러한 사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여기에는 식민지시대에 부정되었던 <아프리카성>을 회복하려는 아프리카 각국의 강한 의욕과 역사적 복권(復權)이라는 강한 지향이 반영되어 있다. 80년대 말 이후 동구권의 자유화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잇따른 개방 등은 아프리카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범아프리카주의와 OAU>

현대 아프리카 정치를 대륙적 규모로 규정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는 범아프리카주의이다. 범아프리카주의는 19세기 말 미국과 서인도제도의 아프리카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운동이지만, 제 2 차세계대전중 아프리카에 도입되고부터는 <아프리카대륙의 통일과 단결>을 목표로한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이 통일운동은 당시 가나의 은크루마등의 지도 아래 <아프리카합중국> 창설을 꾀하다가 좌절된 뒤, 독립한 아프리카 각국의 연대를 촉구하는 운동으로 변하였다. 1963년 창설된 아프리카통일기구(OAU)가 그 구체적 조직으로, 91년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모로코를 제외한 51개국이 가맹되어 있다.

[경제·산업]

<개관·특징>

아프리카인의 경제활동을 보면, 11세기부터 원거리교역을 한 말리 등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비교적 원시적 생산기술과 조직을 바탕으로 자연에 밀착한 생산·소비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다. 그러던 것이 15세기 무렵 유럽인과의 접촉에 의해 변화되기 시작하여, 17∼18세기에는 <노예무역>의 악영향을 받았다. 19세기에는 산업혁명에 의해 진보된 유럽 각국의 원료획득장소·제품판매시장으로 전락하여 19세기 말에는 거의 전지역이 식민지화되었다. 식민지시대에 유럽인의 토지 수탈·투자·무역활동에 의해 아프리카 각국의 경제는 완전히 세계 자본주의체제 속으로 흡수되었다.

아프리카 각국의 경제발전 유형은 ① 유럽인 입식형(入植型;알제리·남아프리카공화국·케냐·짐바브웨) ② 광산자원개발형(잠비아·자이르) ③ 아프리카인소동생산·열대농산품수출형(가나·나이지리아·우간다·세네갈) 등으로 분류된다. ① ② 의 경우 경제발전지역이 극히 한정되어 있으며 유럽 자본에 의해 지배되고 있고, ③ 의 경우도 농산품의 매입·반출·수출의 유통구조는 유럽인에 의해 지배되었다. 이러한 유형은 모두 한정된 종류의 수출품에 의존하고 일반소비물자·생활필수품은 수입한다는 모노컬처(단일경작)형 식민지경제였다.

아프리카 각국이 독립한 뒤인 1960∼8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경제개발도 다른 개발도상국(아시아·라틴아메리카)에 비해 낮은 수준이었다. 세계은행의 《세계개발보고(1982)》에서는 1인당국민총생산(GNP)이 410달러 이하를 저소득국, 4500달러 이하를 중소득국으로 분류하고 있는데, 아프리카의 39개국(인구 100만 명 이하인 국가는 제외) 가운데 20개국은 저소득국에 속하며, 고소득수출국으로 분류된 리비아를 제외하면 모두 중소득국으로 분류되었다. 전세계적으로 저소득국은 총 33개국으로 그 가운데 약 2/3를 아프리카 각국이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1960∼80년 1인당 GNP의 성장도 전반적으로 매우 낮으며,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고 있는 나라(앙골라·우간다·차드·가나 등)도 있었다. 또한 독립 후 각국이 공업과 농업 개발 촉진을 위해 장기개발계획을 책정·실시하고 있지만, 농업생산(특히 식량작물의 생산)이 정체되어 1인당식량생산도 대부분의 국가에서 떨어지고 있다.

아프리카경제는 대체로 낮은 수준의 기술에 의지해 자급자족적인 농업을 영위하며, 중요한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으나 자원개발은 외국자본과 기술에 의존하고 있다. 더욱이 공업도 낮은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 지금까지도 세계경제의 변동에 대응하는데 매우 취약한 경제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농업>

다른 대륙에 비해 인구밀도는 낮지만, 농경에 적합한 땅은 강수량·토질에 따라 한정되어 있다. 비옥한 지역은 카메룬산록과 동부의 고원지역 정도이다. 강수량은 작황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1969∼74년에 있었던 <사헬 대가뭄(사헬은 사하라사막의 남단을 동서로 횡단하는 지대로 총면적이 300만㎞橈에 이르고, 말리·부르키나파소·니제르·세네갈·차드·수단의 일부를 포함한다)>은 농경·목축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농경은 비교적 원시적인 농업기술에 의해 행하여져,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괭이와 작은 칼이 유일한 농기구로 사용되고 있다. 목축이 가능한 지역도 한정되어 있고, 거름주기나 트랙터의 사용도 제한되어 있는 등, 대부분의 지역이 화전(火田)에 의존하는 농사를 짓고 있다. 아프리카 각국에서 생산되는 코코아·커피·팜유·땅콩·고무·사이잘삼(麻)·설탕·잎담배·면화 등의 열대·아열대 농산품은 아프리카농민들의 현금수입원인 동시에 각국의 중요한 수출품이다.

이 밖에도 감자·카사바·플랜틴바나나·쌀·기장·수수 등의 식량작물을 생산한다. 특히 코코아는 전세계생산량의 2/3가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며, 70년대 말까지는 코트디부아르가 세계 제1의 생산국이었다. 커피도 세계의 약 1/4을 아프리카에서 생산하며, 코트디부아르가 가장 많이 수출하고 있다. 우간다의 커피수출액은 자국수출액의 90%를 차지하며, 에티오피아의 경우에는 약 70%에 이른다.

땅콩생산도 아프리카가 전세계의 1/4을 차지하여, 수단과 세네갈이 대량수출국이다. 그러나 과거 주요수출국이었던 나이지리아는 가뭄으로 인해 생산량이 격감하여 1970년대 후반에는 반대로 수입을 하게 되었다. 또한 마가린·비누·세제의 원료인 팜유 역시 전세계생산량의 1/4이 아프리카에서 생산되며, 나이지리아·자이르·코트디부아르가 주요생산국이다. 사이잘삼은 아프리카에서 세계의 약 2/5를 생산하며, 그 가운데 절반 정도를 탄자니아에서 생산하고 있다.

아프리카인구의 약 5%는 유목민으로, 이들은 사헬지대 일대에서 생활한다. 1970년대 2차례 발생한 가뭄은 이들 유목민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가뭄으로 인한 사막화는 그 뒤에도 계속되어 본래의 생태계 질서를 무너뜨리고 있으며 유목민들의 이주를 가속화시켰다.

<광업>

아프리카에는 다이아몬드·금·우라늄·크롬·망간·구리·코발트·석유 등 주요광물이 매장되어 있으며, 철광석·인광석·주석·보크사이트 등의 매장·채굴량도 많다. 특히 금은 전세계생산량(옛 소련과 중국 제외)의 약 74%가 산출되는데, 그 대부분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며, 짐바브웨·가나에서도 일부 산출된다. 다이아몬드도 세계의 3/4을 차지하며 자이르·남아프리카공화국·보츠와나 등에서 산출된다.

세계의 약 1/5을 산출하는 구리는 잠비아·자이르·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에서 채굴된다. 코발트는 자이르에서 세계의 약 1/2을 산출하고, 우라늄은 세계의 약 1/3이 아프리카에서 나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나미비아가 주요 산출국이다. 이러한 광물자원의 개발은 식민지시대에는 식민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해 진행되었고, 독립 후에는 아프리카 각국 정부와 외국의 자본 및 기술 협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공업>

공업개발은 백인들이 정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지리적으로 유럽과 가까우며 교역에 유리한 북아프리카지역(특히 이집트·알제리) 이외에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사하라 이남지역의 주요 공업은 수입대체와 결부된 소비재공업과 농산물·광산물 등의 1차가공업이다. 식민지시대에는 공업개발이 등한시되었고 독립 후에야 비로소 공업화정책이 추진되었는데, 국내시장의 수요가 매우 적었기 때문에 설립된 공장도 전반적으로 소규모였다.

코트디부아르·나이지리아·가나·세네갈 등지에서는 의류·섬유·음료·담배·시멘트 등을 생산하고, 자동차·전기제품의 조립생산도 시작되었다. 아프리카의 여러 도시에는 조직화된 근대공업부문과 함께 매우 영세한 수공업·잡제품생산 등이 공존하고 있었다. 공업개발과 관련해서 각국 모두 외국의 자본·기술·용역 등의 원조를 받아들임과 동시에 기업의 국유화 및 아프리카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주의정책을 펴고 있는 탄자니아와 에티오피아에서는 전면적인 국유화정책이, 잠비아·자이르·가나·기니에서는 대규모 광업의 국유화가 진행되고 있다. 또한 자유주의정책을 취하던 나이지리아에서도 1971년 나이지리아 국립석유회사(NNPC) 설립을 계기로 석유의 국유화정책을 펴며 나이지리아인화정책을 취하고 있다.

<투자·원조>

1960∼70년대 아프리카에 대한 외국민간투자를 산업부문별로 보면, 석유가 약 40%, 광업·제련업이 약 20%의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국가별로는 석유산출국인 나이지리아·알제리·리비아에 대한 투자가 전체의 1/3을 차지한다. 이들 투자의 대부분은 옛 식민국자본이 식민지에 그대로 유입된 형태로, 옛 식민국과 아프리카 각국과의 경제적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1970년대에 2차례 발생한 석유파동의 여파로 선진자본주의 각국이 경기침체에 빠지자 아프리카 각국의 국제수지도 악화되고, 대외부채도 증가하여 상품·서비스수출액에 대한 채무변제비율이 20%를 넘는 나라가 증가하였다. 외국의 공적 개발원조액은 1979년 사하라 이남지역이 평균 1인당 17.1달러이지만 100달러를 넘는 나라(보츠와나·모리타니)도 있어, 공적 원조 없이는 원활한 경제운영이 어려운 경제적 취약국이 많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역>

아프리카의 수출총액은 전세계 수출총액의 4.2%에 지나지 않으며, 또한 수출의 82%는 선진국에 편향되어 있고 아시아나 중동으로의 수출은 1% 정도이다. 아프리카 무역의 특징은 ① 1차생산품(농산품·광산품)을 유럽·미국·일본 등 일부 선진국에 수출하고, 이들 나라로부터 기계·수송기기·전기기기·섬유제품·화학제품을 수입하는 개발도상형이며 ② 무역상대국은 수출·수입 모두 옛 식민국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③ 수출품 교역조건의 악화·정체, 수입원유가격의 상승 등에 따른 무역수지는 만성적인 적자를 나타내며 ④ 지역 내 무역의 비율이 매우 낮다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아프리카 각국의 수출은 거의 모든 나라가 소수의 상품에 한정되어 있어 국제수지변동에 대응하는 능력이 매우 취약하고, 식민지시대에는 정부·정부기관이 매입가격을 통제하는 가격안정화정책이 취해졌다. 1960∼70년대에도 대부분의 1차생산품 가격이 낮았으나, 1975년 유럽공동체(EC)와 아프리카 각국간에 체결된 로메협정에 의해 특정생산품을 수출할 때 수입이 감소하는 경우에는 EC가 보상·융자하는 제도(스타벡스)가 만들어졌다.

<교통>

아프리카의 교통체계는 식민지시대에 식민국의 전략적 의도와 경제적 필요에 따라 광산·농업·임산자원의 개발·반출에 적합하도록 정비되었다. 각국의 식민지정부는 개별적으로 자국 식민지에 철도망을 건설하였으나, 이웃 여러 나라와의 연관성은 고려되지 않았다. 철도는 화물수송을 위주로 하며 현재에도 총수송량의 약 3/4은 수출용화물이다. 아프리카의 철도 총연장은 약 7만 5000㎞로 약 30%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철도수입의 절반 이상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차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외 지역의 철도는 각 영역마다 궤도가 틀리고 정합성(整合性)이나 제휴성(提携性)이 약했지만, 독립 뒤에는 일부 지역에서 기존 노선의 연장과 새로운 노선이 건설되었다. 특히 내륙국인 잠비아와 탄자니아의 다레스살람을 연결한 탄자니아―잠비아철도는 중국의 원조와 기술협력에 의해 완성되었다.

한편, 철도와 수운(水運)의 이용이 한정된 아프리카에서는 도로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산품의 집하·운송과 소비물자 및 승객의 수송에 편리한 소형트럭을 많이 이용하고 있지만, 도로포장률이 낮고 도로의 유지·보수 등이 완전하지 못하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UN의 아프리카경제위원회는 몸바사와 라고스를 잇는 사하라횡단고속도로와 서아프리카의 라고스에서 다카르를 잇는 고속도로의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지역경제통합>

1970년대 아프리카의 지역 내 무역비율은 약 4.2%로, 같은 개발도상지역인 아시아나 라틴아메리카의 20%에 비해 매우 낮다. 아프리카는 독립 후 각 지역마다 통합계획이 추진되어 동부에서는 동아프리카공동체(EAC, 1977년에 사실상 해체), 북부에서는 마그레브상설위원회(CPCM), 서부에서는 서아프리카제국경제체(ECOWAS), 중부에서는 중앙아프리카관세경제동맹(UDEAC)이 각각 조직되어 지역 내 관세의 인하, 노동·자본이동의 자유, 공동개발계획 등이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적인 효과는 거의 없다. 현재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제외한 각국은 UN아프리카경제위원회(ECA)와 아프리카개발은행(AFDB) 회원국으로서 지역간 협력을 추진하고 있다.

[사회]

아프리카대륙은 워낙 넓고 자연조건·인종·언어·역사 등이 다양하기 때문에, 포괄적으로 사회구조의 특징을 말하기는 쉽지 않다. 이론(異論)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 아프리카사회가 부족단계에서 민족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식민지시대에서 독립의 시대를 거쳐 국가건설시대로 들어간 1960년대 이후에 있어서, 이러한 사회구조의 변동은 자연스럽게 진행되지는 못하고 정부 주도 아래 추진되고 있다.

아프리카의 경우, 민족자결이라는 근대적 원리에 의해 식민지에서 독립국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민족국가의 내실을 구축하는 것, 즉 민족의 형성은 국가건설기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서 현재도 계속 추구하고 있다.

<근대화의 여러 측면>

부족국가에서 민족국가로의 전환 및 발전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의 이행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근대화의 사회적 측면은 종종 도시화의 정도와 문자해득률·취학률 등 계량가능한 요소에 의해서 부분적으로 측정된다. 아프리카의 도시인구는 1960년에 4950만 6000명이었던 것이 70년에는 8037만 3000명, 80년에는 1억 3295만 1000명으로 20년 사이에 약 2.7배가 늘었지만, 이 사이 아프리카의 총인구도 2배 이상 팽창하여 실질적인 도시인구의 비율은 그다지 증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1980년에 29%였던 도시인구비율이 2000년에는 42%로 상승할 것이라는 의견도 있으므로, 도시화의 측면에서 본 아프리카의 근대화는 이제부터 진행속도가 훨씬 빠르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아프리카 도시화의 정도는 일정하지 않다. 대체로 북아프리카 각국에서는 도시화의 비율이 높고, 동아프리카에서는 낮다. 도시인구비율이 높은 나라는 알제리(61%, 1981년 현재)·튀니지(51%)·이집트(45%)·모로코(41%)·자이르(40%)·고트디아르(38%)·잠비아(38%)·가나(36%) 등이며, 낮은 나라는 부르키나파소(8%)·모잠비크(9%)·탄자니아(12%)·우간다(12%) 등이다.

이와 관련하여 백인지배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도시인구비율은 50%이다. 즉 도시라고 해도 전부 일정한 정도로 근대화된 도시라고 할 수는 없으며, 또한 도시 주민이 한결같이 탈부족화(脫部族化)하였다는 의미도 아니다. 오히려 농촌에서 도시로의 인구이동에 의해 도시로 전통적·전근대적 생활방식을 부분적으로 들여오는 경향도 없지 않으며, 반대로 도시로 돈벌러 나간 노동자가 농촌으로 근대적 생활방식을 가지고 돌아와 농촌의 전통적 생활방식이 변화되는 경우도 있다.

한편, 전체적으로 아프리카 각국의 문자해득률은 상당히 낮은 수준이다. 취학률에 관해서는 상세한 자료를 얻을 수 없지만, 1960년과 1975년을 비교하면 아프리카 전체에서 초등교육수준의 학생수의 비율은 24%, 중등교육수준 학생수의 비율은 9%가 각각 증가하였다.

초등교육에 관해서 나라별로 보기를 들면, 취학률이 급상승한 나라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32% → 79%)·마다가스카르(52% → 80%)·소말리아(9% → 58%)·알제리(46% → 89%)·앙골라(21% → 79%)·고트디부아르(46% → 86%)·라이베리아(31% → 62%)·잠비아(48% → 96%)·세네갈(27% → 53%)·케냐(47% → 109%:100%를 넘는 이유는 초등교육의 취학연령인구보다도 실제취학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같은 보기로는 레소토 → 102%·카메룬 → 111%·콩고 → 153% 등이 있다) 등이다.

한편, 짐바브웨와 같이 1960년부터 취학률이 98%를 보인 경우도 있지만, 에티오피아(23%)·말리(22%)·니제르(17%)·부르키나파소(14%)·모리타니(17%) 등 극히 낮은 나라도 많다. 중등교육수준의 취학률은 콩고(46%)·이집트(40%)·가나(35%)가 높은 수준이며 그 밖에 튀니지(20%)를 제외하면 모두 20% 미만의 취학률을 나타내고 있다. 나아가 고등교육수준(20∼24세 인구에 대한 비율)의 취학률은 이집트의 14%를 제외하면, 대부분 5% 미만이고 1% 이하인 나라도 적지 않다.

<종교>

아프리카의 종교는 크게 이슬람교·그리스도교·전통종교로 나뉜다. 이슬람교는 7세기에 아라비아반도에서 아프리카로 전해져 지중해 연안지역으로 퍼졌다. 이슬람교가 사하라사막을 넘어 블랙아프리카까지 퍼지기 시작한 것은 11세기 무렵으로, 평화적인 포교활동과 지하드(聖戰), 그리고 북아프리카와 블랙아프리카와의 교역활동에 힘입어 널리 전파되었다. 이슬람교의 블랙아프리카로의 확대과정은 19세기 말에 시작된 열강의 아프리카 식민지분할기에도 계속되었다.

오늘날 아프리카의 이슬람권은 북부와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하며, 동부에서는 수단·소말리아·에티오피아, 그리고 케냐에서 탄자니아를 거쳐 모잠비크 북부에 이르는 연안부에도 띠모양으로 이슬람권이 형성되어 있다. 중앙아프리카에도 차드(인구의 50%)와 카메룬(20%) 등의 국가에 많은 이슬람교도가 있다. 아프리카의 이슬람교도의 총수는 1981년 추계로 1억 4574만 명으로, 그 가운데 반수가 북아프리카, 1/4이 서아프리카, 나머지 1/4이 동부 및 중앙아프리카에 각각 거주하고 있다.

그리스도교는 1세기 이후 지중해 연안에서 북아프리카로 전래되었는데, 블랙아프리카에 전파된 시기는 15세기 말 포르투갈의 이 지역 진출에 따른 것으로, 그 뒤 현재의 자이르나 앙골라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블랙아프리카에서 그리스도교의 대대적인 포교활동이 시작된 것은 18세기 이후이며,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식민지주의의 본격적 진출과 함께 포교활동도 절정에 달했다. 1981년의 추계에 따르면, 아프리카의 그리스도교도는 총 1억 3091만으로, 프로테스탄트가 약 6978만, 가톨릭이 약 4802만, 그리스정교회계 및 기타가 약 1310만 명이다.

그리스도교도의 분포지역은 대체로 이슬람교도의 분포지역에서 벗어난 블랙아프리카가 중심이다. 이 밖에 힌두교도가 약 138만을 헤아리나 분포지역은 인도계 사람이 많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이나 케냐 등 동아프리카 일부에 한정되어 있다. 나머지 아프리카인들은 대부분이 애니미즘으로 분류되는 여러 가지 전통종교를 가지고 있는데, 사회의 근대화에 따라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를 받아들이는 경향도 보인다.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의 수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

<인구문제와 기아·난민문제>

아프리카의 인구는 독립의 절정기였던 1960년에 약 2억 7500만이었지만, 70년에 3억 5500만, 80년에 4억 7000만(UN 추계)에 달했다. 이 사이의 연평균인구증가율도 60∼65년 2.48%에서 75∼80년 2.9%로 상승해 세계적인 추세와 반대현상을 보이고 있다. 아프리카는 원래 인구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현재의 인구가 적정규모를 초과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경제성장이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사회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심각한 것은 기아문제이다. 기아문제는 단순히 인구증가로 인해 발생하는 것은 아니며, 보다 직접적으로는 가뭄에 의한 농업부진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다. 81년에 국제연합아동기금(UNICEF)은 에티오피아·소말리아·수단·지부티·자이르·짐바브웨·우간다·앙골라·중앙아프리카공화국·차드·말리·부르키나파소·세네갈·모리타니의 14개국을 긴급원조국으로 지정하고, 이들 국가가 안고 있는 난민을 구제하기 위해 대량의 식량·의약품·식수 등을 보냈다.

난민 가운데에는 내전에 의한 전쟁난민도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가뭄에 의한 기아난민으로, 아프리카의 전체난민합계는 3972만(절반은 15세 이하)에 달한다. 특히 사헬지역을 중심으로 70년대 2차례에 걸쳐 계속된 가뭄은 80년대로 들어서면서 점점 광역화되고 있으며, 차드나 동부 아프리카지역의 내전도 완전히 종식되지 않아 아프리카의 기아·난민문제는 쉽사리 해결될 것 같지 않다.

[아프리카 여러 민족의 생활상]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에서는 원주민의 생활형태, 특히 기술과 생업(生業) 측면에서 현저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사하라 이남에서는 기본적 동일성과 그 속에서의 다양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고대 이집트나 악숨왕국에서부터 로마나 아랍문화의 마그레브지방(대륙의 북서부)까지, 북아프리카는 서아시아나 지중해세계와 연계성을 보이며 돌[石]의 문화를 발달시켰다. 사하라 이남의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특징짓는 재료는 흙과 짚·나무 등이다.

그것의 좋은 보기로서 하우사족(나이지리아)의 토벽(土壁) 건축물과, 바밀레케족(카메룬)의 짚과 나무로 만든 집, 그리고 서아프리카와 중부아프리카 여러 부족(말리의 도곤족, 코트디부아르의 세누포족·바울족, 카메룬의 바문족 등)의 옛날부터 이어져 온 의례용 나무가면이나 조령상(祖靈像) 등을 들 수 있다.

사하라사막을 넘나드는 오랜 교류에도 불구하고,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사회는 북아프리카에서 사용된 문자·바퀴(그 밖에 회전원리나 지렛대원리를 응용한 도구)·쟁기·유약 등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광범위한 공통성이 있는 한편, 다양한 자연환경에 대응하여 채집·수렵·어로(漁撈)·근엽농경(根葉農耕)·곡물재배·목축이 행해졌으며, 장거리교역을 전문으로 하는 상업집단도 형성되었다. 또한 벼나 타로토란 등의 농경과 소의 목축을 주된 생업으로 삼는 마다가스카르는 부족의 기원과 언어, 문화면에서 동남아시아와 공통점이 많고, 아프리카대륙과는 다른 생활상을 가지고 있다.

<채집·수렵>

채집·수렵을 하는 대표적 부족은 중부아프리카의 산지에서 생활하는 피그미족과 남부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의 부시먼이다. 두 부족은 모두 간단한 나뭇가지로 작은 집을 짓고 소집단을 이루어 이동성이 많은 생활을 하며, 금속도구는 만들지 않고 이웃의 흑인농경민과의 교환으로 입수한다. 이들은 활이나 창을 이용한 수렵 외에 어로작업에 그물을 이용하기도 하며, 남자는 수렵을, 여자는 나무나 풀의 열매 또는 도마뱀 등 작은 동물이나 벌레를 채집한다. 또한 개 이외의 다른 가축을 키우지 않는 것이 두 부족의 공통점이다.

이 밖에 동아프리카의 소말리아·케냐·탄자니아의 일부지역에서 도로보족 등 수렵을 생업으로 삼는 흑인 소부족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수렵민들은 물품의 교환 등에 의해서 이웃의 정착농경민과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수렵은 근래 야생동물이 멸종의 위기에 이르기 전까지는 농경사회에서도 식량획득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채집도 아프리카 농경민에게는 야생의 나무나 야생초의 잎과 열매가 식생활에서 매우 큰 부분을 차지해 왔다.

채집·수렵은 사하라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서 다른 생업과 함께 중요한 식량획득수단이었다. 한편 바다에서의 어업이 최근까지 극히 한정되었던 것에 비해, 내륙수계가 많은 아프리카대륙에서는 호수·강·늪 등에서 그물·어량(魚梁)·작살 등을 이용하는 어로활동이 활발하였다. 특히 서아프리카 내륙의 니제르강에는 나무판자를 엮은 배를 이용해 반(半)수상생활을 하는 부족들도 있다.

<농경>

비가 많이 내리는 지중해성기후의 북아프리카에서는 밀을 주요 작물로, 대규모의 관개(灌漑)와 가축에 쟁기를 이용하는 생산성 높은 농경이 행해지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하라 이남에서는 서아프리카 내륙이 원산인 벼과(科)식물을 뿌려두고 결실 뒤 이삭을 따거나 두드려서 바구니 속에 떨어뜨려 거두어들이는 원시적인 조방농업과 이동성이 큰 화전농업이 주를 이룬다. 경작용·거름용 가축의 사육과 농경이 결부되어 있지 않으며, 손잡이가 짧은 괭이로 철분이 많은 라테라이트층 위의 부식토층을 얕게 갈아서 경작한다.

화전농경으로 재배되는 곡물은 사바나지대에서도 수수·옥수수 등 키가 큰 벼과작물과 콩과작물의 혼작(混作)도 자주 행해진다. 이 밖에 동아프리카에서는 향모(香茅;피의 일종), 에티오피아에서는 그령이라는 키가 작고 열매가 모래처럼 작은 곡물이 재배되어 왔다. 벼처럼 알맹이를 그대로 조리하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곡물은 모두 가루로 만들어 먹는다.

삼림지대에서는 나무가 밀생하지 않는 토지를 골라 화전이 행해지며, 재배되는 곡물은 동남아시아계의 벼와 옥수수가 주종을 이루고, 타로토란 등의 근채류(根菜類)도 재배된다. 그 밖에 조금씩 재배되는 채소로는 오크라·참깨 등이 있으며, 근래에는 땅콩도 급속히 퍼져 상품작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식용으로 쓰이지는 않지만 용기(容器)로 널리 사용되는 각종 호리병박도 재배되고 있다.

한편, 재배라기보다는 자생하는 것을 보호하면서 이용하는 수목도 사하라 이남지역 주민들의 생활에는 중요하다. 삼림지대에서는 아프리카가 원산인 기름야자의 열매에서 유지(油脂)를 얻고, 수액을 자연발효시켜서 술을 만들며 잎으로는 지붕을 덮는 데 이용한다. 또한 동남아시아 원산의 바나나 중에 특히 단맛이 적은 플랜틴바나나를 삶아서 떡모양으로 빚은 것이 주식으로 선호되고 있다.

이 밖에 많은 종류의 야자나무들이 식량·주정(酒精)·건축재료로서 이용되어 왔다. 특히 서아프리카 삼림지대가 원산인 콜라의 열매는 기호품으로 널리 애용되며, 사바나지대와의 교역품으로서 중요하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백인이 들어오기 전까지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일체의 토지소유 개념이 없고(이동성이 큰 화전농경과 취락 자체가 정착성이 낮은 것과 관계가 있다), 노동력에 부응하는 토지이용권(토지를 오래 소유하면 실질적으로 소유에 가까운 성격을 띠지만, 임대·매각은 불가능하다)이 문제였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 농업생산력은 동원할 수 있는 노동력에 의해 결정된다.

<목축>

아프리카의 목축은 낙타·소 등 큰 가축을 중심으로 한 유목(遊牧)과, 양·염소·당나귀·말·돼지·집오리·색시닭 등의 사육을 들 수 있다. 유목민으로는 사하라사막의 투아레그족과, 에티오피아 북동부에서 소말리아·케냐 일부에 걸친 지방의 베자·암하라·소말리 등의 여러 부족이 있다.

사하라사막의 아랍화한 베르베르족은 오아시스농경과 함께 낙타·말·양·염소 등의 목축도 하였으며, 특히 낙타를 이용하여 사하라사막의 장거리교역에서 중심적 역할을 해왔다. 투아레그족에게 있어서 낙타는 전쟁용이었지만, 다른 사회에서는 주로 짐을 운반하는 데에 사용하였고 젖도 식량으로 이용하였다. 소도 몇몇 종족에서 사육되었다.

동아프리카 반투계의 많은 사회에서도 소는 중요하며, 남아프리카의 부시먼과 인종적·언어적으로 가까운 호텐토트족도 유목을 해왔다. 그 밖에 서아프리카의 사바나 남부에서도 작고 뿔이 짧은 소가 일부 곡물농경민(부르키나파소의 로비족 등)에 의해 결혼시 남편이 부인의 집에 지불하는 자산으로 사육되었다. 어느 사회에서나 소는 귀중한 재산이고 우유도 다양한 식품으로 이용되었지만, 의례상 특별한 기회가 아니면 잡아먹지 않았던 사회가 많았다.

그러나 동아프리카의 나일계 부족들 사이에서는 소의 목에 화살을 꽂아서 피를 마시는 관습도 있었다. 서아시아에서 사하라를 거쳐 도입된 말은 서아프리카 사바나의 사회에서 왕후나 전사의 기마용으로 중요시되었고, 신속히 이동하여 적을 제압하는 데에 유효한 군사수단으로서 국가형성이나 지배의 확대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나 말이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사회에서 운반용이나 농경용으로 거의 이용되지 않았던 것은, 이들 사회의 기술·경제상의 성격을 이해하고 판단하는 데에 중요하다. 예로부터 짐의 운반은 북아프리카를 포함한 아프리카 전역에서 나귀가 이용되어 왔으며, 양이나 염소의 사육으로 고기와 가죽을 얻었다. 양·염소 등의 작은 가축이나 닭, 그리고 서아프리카가 원산인 색시닭 등의 가금(家禽)은, 조상의 제사나 기우제(祈雨祭)에 제물로 자주 사용되었다.

<교역>

채집수렵민·어로민·목축민 등은 대부분 지방에서 인접한 농경민과 물물교환을 하여 공생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농경민 상호간에도 정기적으로 열리는 시장을 통해 생산물을 교환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지방적인 성격의 소규모 교환이 아닌, 전문적인 상업집단이 장거리를 이동하면서 상품을 운반하는 교역도 몇몇 지역에서 행해졌다. 그 가운데 가장 대규모적인 것은, 아랍의 북아프리카 진출 뒤 8세기 무렵에 시작되어 14∼16세기에 최성기를 누린, 북아프리카와 사하라 이남의 흑인사회와의 교역일 것이다.

북아프리카로부터는 말·장신구·의상·구리 등이 도입되었고, 남부로부터는 노예와 금이 운반되었다. 이러한 교역을 기반으로 하여 사하라 이남에서는 가나·말리·송하이 등 넓은 지역을 지배하는 흑인제국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배체제의 흥망(興亡)이나 북아프리카의 상황에 따라 사하라의 주요한 교역로도 초기에는 서쪽 끝의 모로코와 가나왕국(지금의 모리타니 남동부)을 연결한 선에서, 오스만투르크제국의 리비아·튀니지와 차드호수 주변을 연결한 곳까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특히 사하라의 암염(岩鹽)과 블랙아프리카의 금(砂金) 교역은 아프리카지역에서만 한정되었던 교역의 범위를 넓혔다. 소금을 얻을 수 없었던 서아프리카의 흑인사회에 있어서 암염은, 금과 같은 중량으로 맞바꾸어졌다고 전해질 정도로 귀중한 것이었다. 이 교역을 담당한 것은 베르베르인이었으며, 운반수단으로서는 낙타가 사용되었다. 한편, 블랙아프리카에서 북아프리카로 대량 유입된 금으로 인해 말리는 <황금의 나라>라는 소문이 지중해세계로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이슬람·아랍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해로(海路)로 말리에 가고자 하였던 유럽인들의 염원은 15세기의 포르투갈항해 왕자 N.엔리케를 후원자로 한 서아프리카탐험항해로 나타났으며, 이것은 얼마 안가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희망봉을 경유, 인도로 가는 항해 개척으로 발전해 나갔다.

당시 사하라종단교역에서 흑인쪽 부분을 담당하고, 동쪽과 남쪽의 사바나에서부터 삼림지대로까지의 장거리교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만데계(系) 상업집단이었다. 이들은 이슬람화되어 있었으며, 베짜기 등의 기술도 가지고 있어서 혈연의 유대에 바탕을 둔 교역망을 서아프리카내륙으로 돌리고, 대상(隊商)을 조직하여 면직물·암염·노예 등을 팔았다.

만데계 상인보다는 활동범위가 넓지는 않지만, 나이지리아의 하우사족과 요루바족도 다른 지역을 잇는 상업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들의 상업활동에 의하여 수많은 도시가 생겨났다. 니제르강 대만곡부의 톰북투, 하우사지방의 카노와 소코토, 요루바지방의 이바단과 아베오쿠타 등이 그 도시이다.

한편, 동아프리카의 해안으로는 아랍상인들이 배를 이용해 도래하였으며, 12∼16세기까지 환인도양교역이 최성기를 누렸다. 당시 아프리카로부터는 금·상아·노예가, 인도나 동남아시아로부터는 진주·장신구·향신료가 도입되었으며, 교역의 거점인 몸바사·킬와·잔지바르 등의 항구도 번성하였다. 아랍인과의 오랜 기간에 걸친 직접교류의 결과로, 동아프리카의 해안지방에서 흑인문화와 아랍문화가 결합한 스와힐리문화가 형성되었다.

<공예>

그 밖의 중요한 생산활동으로는 공예를 들 수 있다. 북아프리카에서 발달한 모직물·가죽공예·금속세공·장신구·도기(陶器) 등과는 대조적으로, 블랙아프리카에는 나무·흙·짚을 소재로 한 목조품, 유약을 칠하지 않은 토기, 기법과 형태가 다양한 바구니 등이 있다. 금속에서는 정교한 구리나 은의 세공이 발달한 북아프리카에 비해, 사하라 이남에서는 산화철을 지표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에 실용적인 철제품(괭이의 날이나 창·화살촉, 작은칼 등)이 널리 만들어졌다.

이에 반해 자이르 일부 등 한정된 지역에서밖에 산출되지 않아 원료를 북아프리카로부터 수입해야만 했던 구리를 중심으로 한 보다 가공하기 쉬운 금속의 세공(청동·놋쇠의 팔찌, 발찌 등의 장신구와, 나이지리아 베냉왕국의 것으로 유명한 왕의 기념상과 금의 무게를 다는 추 등)은 발달이 뒤떨어졌고, 게다가 일부 지역에서밖에 행해지지 않았다.

철은 단조(鍛造)만 이루어졌고 주조기술(鑄造技術)이 없어 북아프리카에서 도입된 것으로 추측되는 실랍법(失臘法)으로 청동이나 놋쇠를 가공하였다. 이러한 공예의 대부분은 특수한 공인집단(工人集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특히 철을 가공하는 대장장이는 공인집단에서 내혼(內婚)을 하였고,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켰다. 한편, 사회적 특권이나 특수한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많았다.

<박홍>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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