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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5-01-03 (월)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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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체코슬로바키아 (두산)
체코슬로바키아 Czechoslovakia

유럽의 중앙내륙에 있던 연방제 사회주의 공화국.

I. 개관

공산주의 국가들 중 최고의 생활수준과 높은 문화를 유지한 공업국가였다. 문화·교육 등 여러 면에서 서유럽 수준에 달하였으나 1960년대에 들어와 관료기구의 확대와 노보트니 대통령의 전제정치로 경제파탄을 초래하였다. 국민들의 민주화·자유화 여망에 따라 두브체크 공산당 제1서기를 중심으로 이른바 ‘프라하의 봄’을 실현했지만, 1968년 8월 20일 소련을 비롯한 바르샤바동맹 5개국의 무력개입을 초래,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후 후사크를 중심으로 소련 공산주의 체제에 충실한 일원으로 복귀하였으며, 1969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제를 실현하였다. 1993년 1월 1일 체코슬로바키아는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되었다.

II. 역사

1. 슬라브족의 국가

이들 게르만족 사이에 점차 슬라브족이 침투하기 시작하여 5, 6세기에는 이 나라에서 가장 우세한 주민이 되었다. 서(西)슬라브에 의한 최초의 통일은 사 모왕국이 이룩하였으며, 623∼658년까지의 35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의 땅을 중심으로 삼았다.

9세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전파되었으며, 그와 동시에 동(東)프랑크 왕국의 압력이 강해지자 대모라비아제국의 대공(大公) 로스티슬라프는 프랑크 왕국이나 교황의 세력을 피하기 위하여 비잔틴제국(帝國)에 사자를 보내 슬라브어로 포교할 수 있는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비잔틴 황제 미카엘 3세는 모라비아에 키릴(콘스탄틴)과 ‘슬라브인의 사도(使徒)’라고 불리는 그의 동생 메토디우스를 보냈으며, 이들은 슬라브어(語)를 적을 수 있는 문자를 고안하였다.

이 키릴 문자에 의하여 복음서 등이 슬라브어로 번역되었으며, 이 문자는 오늘날에도 러시아인·불가리아인·세르비아인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래 계속되지 못하여 885년 메토디우스가 죽은 뒤 곧 라틴 전례(典禮)가 부활하였으며, 10세기 초에 헝가리인의 침입으로 대모라비아 왕국도 멸망하였다.

그 후 역사의 중심은 보헤미아로 옮겨졌고 프르셰미슬왕조가 형성되었으며, ‘보헤미아의 수호신’으로 불리는 바츨라프왕(王)이 나타났다. 14세기 초에 바츨라프 3세가 죽음으로써 프르셰미슬왕조의 지배가 끝나고 룩셈부르크왕조의 지배가 시작되었으며, 특히 1346년 제2대 왕 카를 4세는 신성(神聖)로마제국의 황제가 됨으로써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크게 번창했다. 1348년에는 프라하대학이 창립되어 프라하는 유럽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15세기 초 프라하대학의 총장이며 종교개혁자인 얀 후스가 교회제도를 비판하다가 화형(火刑)에 처해지자 1419년 후스전쟁이 일어났다. 후스전쟁은 종교·사회개혁과 함께 보헤미아의 독일화(獨逸化)에 대항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성격을 띤 전쟁이었다. 후스파는 교황이 파견한 지기스문트의 십자군(十字軍)을 5회에 걸쳐 격파하고 1436년 화약(和約)을 성립시켰다.

이 화약에서 공인된 후스주의는 문어(文語)로 확립된 체크어와 더불어 이 민족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1526년 합스부르크가(家)의 페르디난트 1세가 체코와 헝가리의 왕이 된 이후 독일인 제왕의 통치가 계속되어, 1918년까지 300여 년 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속령(屬領)이 되었다. 1617년 가톨릭의 지지를 배경으로 한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왕이 되면서 수적으로 우세한 프로테스탄트의 탄압을 시작, 이것이 원인이 되어 1618년에는 ‘30년전쟁’이 일어났다. 1468~1780년은 암흑시대로, 특히 1740∼1780년의 마리아테레지아 시대는 중앙집권적 절대주의(絶對主義) 시대였다.

짧은 기간 동안 계몽전제군주(啓蒙專制君主)인 요제프 2세의 통치시대를 거친 다음에는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으며, 1805년에는 남모라비아의 슬라프코프에서 아우슈테를리츠 전쟁이 일어났다. 뒤이어 메테르니히가 오스트리아의 재상(宰相)으로 등장, 경찰정치(警察政治)를 전개, 군주체제를 옹호하였으나 자유주의 운동이 점차 강화되어 1848년에는 혁명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끝내 실패하고 그 이후는 오스트리아의 재상 바흐에 의해 절대전제주의의 암흑시대가 재현되었다. 그 후 오스트리아가 약체화되고 체코인(체크인)들은 점차 자기의 권리를 되찾았으나 리게르가 지도하는 보수파의 노(老)체크당과 브리치 등을 중심으로 한 ‘청년체크당’으로 분열되었다.

한편 슬로바키아는 헝가리 왕국의 역사 및 투르크의 진출과 연관되어 있다. 17세기에는 투르크가 이 지역에서 활약하면서 슬로바키아의 광산을 획득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1683년에 투르크가 빈에서 패하여 밖으로부터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16세기 이후 여러 가지 원인이 누적되어 폭동·반란이 잇따라 일어났다. 19세기까지도 불안상태는 계속되었으나 곧 민족적으로 자각하여 19세기의 중엽에는 여러 차례 시도된 슬로바키아 문어(文語)의 제정이 루드비르 슈틀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2. 19~20세기

슬로바키아의 산업발전이 늦어진 데에 비하여 체코의 경제는 크게 발전하여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공업이 두드러지게 진전하였다. 정치·사회·민족의 세 가지가 뒤얽혀 복잡한 정세 속에서도 힘을 길러온 청년체크당은 불평등하기는 하지만 보통선거(普通選擧)를 실시하였으며, 1896년에는 선거가 인정되어 몇 개의 정당이 생겼다. 20세기에 이르러 파업이 계속되고 그 결과 정부의 양보로 1907년에는 평등한 보통선거가 실시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체코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전을 바라면서도 참전해야 하는 불운을 겪었으며, 마사리크·베네시를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자 헝가리에서 분리된 슬로바키아와 더불어 단일국가를 형성하였다. 1918~1938년까지의 기간은 제1공화국시대인데, 1918년 10월 28일 독립이 선언되고, 1920년에는 헌법이 채택되어 마사리크가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으며, 1927년, 1934년에는 재선되었다. 그 결과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두 민족 외에 독일인 ·헝가리인을 포함한 다민족 국가로 의회민주주의를 채택하는 국가가 되었다.

이 제1공화국이 안고 있는 중요한 문제점은 독일 소수민족 문제와 슬로바키아 문제였다. 독일인 문제는 곧 수데텐 문제에서 비롯되어 히틀러의 대두와 관계되며, 이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독일인의 이주, 서독 문제로 연결되었다. 슬로바키아 문제는 연방화에 의하여 일단 해결되었다.

3. 뮌헨회담과 그 이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에 성공한 히틀러는 그 해 9월 독일계 주민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수데텐 지방의 할양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9월 29일 영국의 체임벌린, 프랑스의 달라디에,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뮌헨에서 회담, 영국과 프랑스 등 대국은 ‘순간적인 평화’를 얻기 위하여 약소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를 희생, 수데텐 지방을 독일에 할양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때문에 체코슬로바키아는 영토의 1/3, 100만 명의 체코인, 40%의 공업설비를 상실하였으며 마사리크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베네시는 이것을 거부하고 사임하였다. 다음해인 1939년에 독일은 다시 슬로바키아를 독립시켜 보호국으로 하였으며, 같은 해 3월에는 보헤미아의 모라비아를 합병하였다. 이로써 제1공화국은 붕괴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독일에 대한 저항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1942년 봄부터는 게릴라 활동이 계속되었으며, 1944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났다. 같은 해 10월에는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국경을 넘었고 1945년 5월 소련군은 프라하에 진주하는 데 성공하였다.

4.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종전 후 런던에 있던 베네시는 모스크바를 거쳐 1945년 4월 귀국, 사회민주당의 피를링거를 수상으로 하는 내각(內閣)을 구성하였다. 이 정부는 뒤에 헌법의 기초가 된 이른바 ‘코시체강령’을 작성하였다. 1946년 5월에는 총선거가 실시되어 공산당이 38%, 사회민주당이 12%의 지지율을 획득하였으며, 대통령에 재선된 베네시는 클레멘트 고트발트를 수상에 임명하고, 고트발트는 연립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1947년 7월 소련의 간섭으로 마샬계획 참여가 좌절되고 1948년 2월 대통령직에서 물러날 것을 강요당하였다. 이어 공산당 제1서기 고트발트가 대통령이 되어 자포토츠키 내각이 발족되면서 수 년간 암흑시대가 계속되었다.

1953년 9월 고트발트가 사망하고 자포토츠키가 대통령에 오르고 1957년 11월에는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와 대통령직을 1967년 말까지 겸하였다. 1960년에는 공산주의 체제 안정에 따른 신헌법 채택과, 1964년 노보트니의 재선이 있었다. 1968년 1월에는 A.둡체크가 노보트니의 후임으로 선출된 데 이어 3월에는 루트비크 스보보다가 대통령이 되었다. 둡체크 제1서기는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슬로건 아래 자유화를 추진, 언론의 완전자유, 비밀경찰의 권한 축소, 슬로바키아 지방의 자주권 확대 등을 꾀하였으나 8월 20일 소련·동독·폴란드·헝가리·불가리아 등 5개 바르샤바조약기구 군대의 침입으로 민주화 계획은 좌절되었다.

1969년 4월에는 민주화의 상징인 둡체크 제1서기가 사임하고 보수파 지도자이며 친소련파인 후사크가 제1서기로 취임, 이른바 정상화 노선을 추진함으로써 소련형 체제가 굳혀졌다. 그러나 1977년에 들어와 지식인 241명이 민주화·자유화를 위한 투쟁을 다짐하는 지하선언문(地下宣言文) ‘77헌장’을 작성하고 정부에 대해 헬싱키 유럽안보 협력협정의 준수와 인권존중을 촉구하였으나 당국의 철저한 탄압으로 빛을 보지 못하였다. 또한 이듬해 5월에는 브레주네프의 체코 방문을 계기로 반체제 인사가 대거 투옥되었으며, 1979년 5월에는 ‘77헌장’에 서명한 하벨 등의 저항주의 작가 10여 명을 구속함으로써 자유화운동이 정체되었다.

1988년 가을, 소련의 개혁 바람이 동구권에 미치자,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도 민주세력인 ‘시민포럼’을 중심으로 민주화 시위가 대규모로 발생함에 따라 12월 공산정권이 퇴진하고, ‘시민 포럼’의 지도자 하벨이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1990년 3월에는 국명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공화국’으로 변경하였으며, 1990년 6월에는 자유총선을 통한 민주정부를 구성하였다. 그 후 1993년 1월 1일 체코와 슬로바키아, 2개의 공화국으로 분리, 독립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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