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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02 (목)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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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42      
[근대] 윌슨 (브리)
윌슨 (Thomas) Woodrow Wilson 1856. 12. 28 미국 버지니아 스톤턴~1924. 2. 3 워싱턴 D. C..

미국의 정치가.

고답적이고 융통성 없는 이상주의자로 잘 알려졌으며, 미국의 제28대 대통령(1913~21)으로 재임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가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파리 평화회의에서 국제연맹의 설립을 주창했다. 베르사유 조약(1919. 10~11)에 대한 미국 국민의 지지를 호소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신경쇠약과 반신불수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했다.

유년시절·교육배경·주지사시절

월슨은 위로 매리언과 앤이라는 두 누이를 두었고 아래로는 남동생 조지프를 두었다. 윌슨의 아버지 조지프 러글스 윌슨은 굽힐 줄 모르는 성품과 해박한 신학지식을 지닌 엄격한 장로교 목사였는데 미래의 대통령이 될 윌슨의 성격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윌슨은 유년시절을 조지아 주와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서 보내면서 남북전쟁의 전화(戰禍)와 전후 남부재건시대에 남부지역이 겪은 고통을 직접 보고 크게 영향을 받았다.

노스캐롤라이나의 데이비드슨대학에 잠시 재학하다가 1875년 지금의 프린스턴대학교에 입학했다. 이 대학교에서 토론회, 문학활동, 학생체육행사의 주관 등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졸업성적은 중간이었다. 학부시절에 이룩한 성과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미국의회의 위원회 제도를 예리하게 분석한 논문을 들 수 있는데, 그의 원숙한 정치철학을 예고해주는 것이었다. 프린스턴대학교를 졸업한 후 버지니아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중퇴했다. 조지아 주의 애틀랜타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려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자, 존스 홉킨스대학교에서 행정학과 역사학의 박사과정을 밟아 1886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윌슨의 박사논문 〈의회정부 Congressional Government〉는 미의회의 위원회 제도를 공격한 것이었다. 1886년 조지아 주 서배너 출신의 엘렌 루이스 액슨과 결혼했고 브린마대학에서 역사학·정치경제학 부교수로 교편을 잡기 시작했다. 1888년 코네티컷 주의 웨슬리언대학교의 정교수가 되었고 2년 뒤 프린스턴대학교의 법학·정치경제학 교수가 되었다. 1902년에는 그 대학의 총장으로 선임되었다. 프린스턴대학교 시절 윌슨은 그당시 정치문제에 대하여 많은 강연과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되었다.

1910년 9월 그는 민주당으로부터 뉴저지 주지사 선거에 민주당후보로 출마해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당시 윌슨은 자신이 프린스턴대학교 당국에 내놓은 정책이 받아들여질 전망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출마 제의를 즉각 받아들였다. 그는 정력적이며 과감한 선거유세전을 펼쳐 뉴저지 주 전역의 진보파 인사들의 지지를 얻어내면서 당선되었다.

뉴저지 주지사직을 과감하게 잘 수행해냈기 때문에 전국을 상대로 한 정치무대에 뛰어들게 되었고, 1912년 6월 대통령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렸을 때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이어 벌어진 대통령 선거 유세전에서 윌슨이 내놓은 분명하고 적극적인 국내정책으로 인해 민주당은 미국 전역에서 진보파들의 지지를 받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대통령으로서의 첫번째 임기

백악관의 주인이 되자 윌슨은 선거유세시에 공약했던 몇 가지 주요법안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아주 의욕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는 의회에 보내는 첫번째 메시지를 직접 의회에 나가 읽음으로써 존 애덤스 대통령 이래 사라졌던 관습을 다시 부활시켰다. 이 회기뿐만 아니라 그 뒤에 열린 회기에서도 그는 끊임없이 하원의원을 개별적으로 접촉하여 자신의 정책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임기중 첫 2년 동안에 윌슨이 거둔 법안통과 실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가 거둔 첫번째 승리는 언더우드 관세법안(Underwood Tariff)을 통과시킨 것이었는데, 이는 다수의 산업 이익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세를 인하시킨 조치였다. 관세에 의한 수익이 하향조정(下向調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 법안은 개정된 헌법수정안 16조에 근거하여 연방소득세를 부과할 수 있도록 했다 (→ 색인:조세). 새로운 관세법에 이어 대규모 통화개혁법안이 도입되었는데 1913년 12월 23일에 서명된 연방준비법(Federal Reserve Act)이 그것이다. 개인금융기관의 횡포를 방지할 목적으로 도입된 이 법은 미국연방준비위원회(Federal Reserve Board)를 창설하여 미국 금융구조의 틀을 잡는 지주가 되었다.

1914년에는 연방거래위원회(Federal Trade Commission)가 창설되었는데 이 기구는 무역에서의 경쟁적 조건을 유도하기 위해 연방정부의 힘을 행사하는 수단이 되었다. 1914년 클레이턴 독점금지법이 통과되어 노사분규시 정부가 강제금지 명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고(다만 복구불능의 파괴행위가 예견될 때는 금지명령을 내릴 수 있음), 또 파업과 보이콧 행위를 합법화함으로써 노동기구의 위상이 크게 강화되었다 (→ 색인:노동조합) . 이 네 분야에서의 업적은 새로운 사회·경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바지했다.

윌슨의 외교정책은 약소국가에게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고 약소국가의 권리와 이해를 존중해주는 것을 그 특징으로 했다. 필리핀 국민들에게 자치(自治) 체제를 갖추도록 준비시키는 조치를 취한 것을 그 한 예로 들 수 있다. 윌슨의 간곡한 요청을 받아들여, 미 의회는 미국선박에 대한 파나마 운하통행료의 면제 법률을 폐기했는데, 이로 인해 영국과의 긴장관계가 크게 완화되었다. 카리브 해의 소요사태에 직면해 미국은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1915년 9월 16일에 체결된 조약에 의해 미국은 아이티에 대한 사실상의 보호권을 장악했다. 미국 순양함이 산토도밍고를 사전 답사했고 이어 1916년 여름 미해병대가 이곳에 상륙하여 11월에는 미국 감시하에 새로운 군사정부가 수립되었다 (→ 색인:도미니카 공화국). 멕시코 혁명은 윌슨에게 아주 혼란스런 상황을 가져왔다.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을 독재자의 권좌에서 끌어내리지 못하게 되자 윌슨은 '관망하며 기다리는'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미국과 유럽의 상사(商社)들이 요구하는 공식적인 개입에는 반대했다.

1914년 4월 미국 해병에게 모욕을 가하고도 아무런 사과를 해오지 않는 사태에 이어 독일 군함이 멕시코에 군수물자를 하역(荷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해군은 베라크루스의 항만시설을 무력으로 점거했다. 우에르타 장군 정부가 전복되어도 멕시코 내전은 종식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미국 상사들은 계속 위협을 받았다.

윌슨이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는데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1916년 3월 게릴라 지도자 판초 비야가 이끄는 군대가 미국 영토 내로 침입해 들어오자 윌슨은 존 J. 퍼싱 장군이 지휘하는 보복원정대의 출정을 허가했다. 멕시코 혁명은 윌슨의 행정부가 끝날 때까지 윌슨을 괴롭힌 문제가 되었다.

1914년 7월 이후 미국의 외교는 제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중립국 상태를 유지하고자 한 윌슨의 노력이 그 주된 내용이다. 공식적인 중립선언에 이어 생각이나 행동에 있어서 중립국 국민답게 처신하라는 미국인에 대한 윌슨의 개인적 호소가 더해져서 중립선언의 내용이 강화되었다. 한편 중재자 역할을 자원하고 나선 그의 제의는 호의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고, 비밀 평화협상을 추진하려던 노력은 실패했다.

1915년 2월 4일 베를린 정부는 영국 제도(諸島) 주위의 수역(水域)을 전쟁지역으로 선포하고 이 지역 내의 모든 교전국 함정을 격침시킬 것이며 중립국의 선박 또한 마찬가지라고 위협을 가했다. 1915년 2월 10일 윌슨은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여 독일 잠수함의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독일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상선의 파괴나 미국 인명의 살상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중립권 침해"로 간주될 것이라고 윌슨은 말했다.

그러나 독일은 그들의 입장을 고수하여 5월 7일 영국 정기선(定期船) '루시타니아호'를 사전 경고 없이 잠수함의 어뢰공격으로 격침시켰다. 1,000명 이상의 인원이 익사했고 이중에 128명의 미국인이 끼어 있었다. 윌슨은 전쟁을 피할 목적으로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그뒤 몇 주 동안에 걸친 협상에 임했다. 특히 독일이 순양함 전투의 규칙을 반드시 지키게 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한 것이었다. 독일에 대한 윌슨의 항의문은 너무나 강한 어조여서 국무장관 윌리엄 제닝스 브라이언은 그 항의문에 서명하기보다는 사임하는 쪽을 택했다.

1915년 8월 '아라빅호'가 격침된 후 독일정부는 앞으로 정기선은 사전 경고 없이 격침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1916년 봄 증기선 '서식스호'에 대한 어뢰공격 때문에 독일과의 교전이 임박하게 되자 윌슨은 최후통첩에 가까운 어조로 항의문을 발표했고 마침내 독일정부로부터 잠수함 전략을 전면 폐기하겠다는 포괄적인 약속을 얻어냈다 (→ 색인:독일사). 그후 7개월 동안 독일과의 긴장된 관계는 다소 완화되었다 (→ 색인:서식스호 폭파사건).

2번째 임기

이같은 외교적 승리는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연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1916년의 대통령 선거에서 윌슨이 재선되는 데 기여했다. 이 승리는 윌슨이 미국의 중립국적 권리를 성공적으로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인을 전쟁 참가로부터 지켜냈다"라는 주장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주장은 미국인의 강력한 지지를 이끌어냈는데, 특히 미시시피 이서(以西) 지역에서 높은 호응을 얻었다. 찰스 에번스 휴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한 공화당은 대(對)독일 문제나 대멕시코 문제를 처리하는 데 있어서 윌슨이 우유부단하며 비겁했다고 매도했다.

공화당원들은 그의 법제개혁(法制改革)이 대중선동적이라고 비판했고, 특히 애덤슨 법을 문제 삼았다. 이 법은 윌슨이 철도파업을 피하기 위해 의회에 통과를 강요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노조에 대한 때아닌 굴복이라는 것이었다. 동부의 해안지방과 중서부의 공업지대 대부분에서는 단합된 공화당이 성공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미시시피 서쪽의 농업지대와 태평양 연안지역은 윌슨의 강세였다. 윌슨은 진보파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는데 이들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신봉하여 공화당 진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거부한 세력이었다. 선거의 결과는 너무나 백중세여서 수시간 동안 공화당의 승리가 인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서부지역의 집계가 시작되면서 전세는 역전되어 윌슨의 재선이 확정되었다.

1917년 1월 9일 독일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재개함에 따라 윌슨의 평화협상 노력은 좌절되었다. 윌슨은 상선과 여객선을 예고 없이 격침시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협상할 용의가 있었으나 독일은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독일이 잠수함 공격의 재개를 선언하고 그결과 미국 항구 내에 화물이 적체되기 시작하자 미국 내의 여론은 악화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독일-멕시코-일본의 3국이 동맹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고, 멕시코가 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 등지를 재정복할 것이라고 암시하는 치머만 전보(電報)가 공표(公表)되었으며, '라코니아호'의 피격으로 미국인의 인명손상 사건이 또 터지게 되자 미국인의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여론의 압박과 사태악화를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윌슨은 그해 4월 2일 의회에 전쟁선포를 요청했고, 그 요청은 압도적 다수로 가결되었다.

미국은 전쟁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았는데 윌슨의 책임이 아주 컸다. 그러나 일단 참전하게 되자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1918년 1월 8일의 연설에서 정의롭고 지속적인 평화의 요체(要諦)라고 판단되는 14개조를 제안했고, 그뒤 8개월 동안 그 조항의 구체적인 내용을 준비했다. 독일이 1918년 10월초 패전에 직면하게 되자 윌슨에게 강화의 조건으로 14개조와 그뒤의 연설내용들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안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강화를 받아들일 준비가 전연 되어 있지 않았지만 연합군 사령관과 독일정부는 향후 협상의 바탕으로 14개조(일부 조항은 제외하고)를 받아들였다. 윌슨은 향후의 평화회담에서 전략적 우위를 점유하고 있었으나, 1918년 11월의 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패배하여 새로 구성된 의회에서 공화당이 상원을 장악하게 되자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또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상원외교분과위원회가 정적들에 의해 장악된 것이었다.

윌슨은 직접 파리 평화회의에 참가하여 자신의 원칙들이 실현될 수 있도록 그 회의를 주도할 작정이었다. 이 원칙들은 ① 인민을 해방시키고, ② 적과 동지에게 정의(正義)롭게 대하고, ③ 국제연맹의 설립을 통한 평화보장의 3대원칙으로 압축되는 것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1918년 12월 13일 프랑스의 브레스트에 도착했다. 그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나 각 나라 국민들의 민족주의적 열망과 충돌하게 되자 명예가 다소 실추되었다.

윌슨 대통령은 국제연맹의 설립이 평화조약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각국 대표들에게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으나 승전국의 영토 분할과 배상금 요구에 어쩔 수 없이 양보함으로써 국제연맹 설립 안도 그 빛이 바래졌다. 1919년 6월 28일 독일과의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고 이튿날 윌슨은 귀국 항해길에 올랐다. 파리 평화회의를 주재하면서 느낀 긴장감 때문에 윌슨 대통령은 육체적·정신적으로 피곤한 상태였다.

윌슨은 베르사유 조약의 비준을 놓고 전개해야 하는 상원의 정적들과의 싸움을 이끌어나갈 여력이 별로 없었다. 상원을 압도할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에의 지지를 호소하는 유세에 나섰다. 그는 1919년 9월 25일까지 34번의 연설과 수십 번의 인터뷰, 행진, 객차승강구 연설회를 끝냈다. 그러나 그뒤 전국 순회여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탈진된 상태로 워싱턴 D. C.로 돌아왔고 그 직후에 혈전증을 앓아 반신불수(왼쪽)가 되었다.

윌슨 이외에는 아무도 조약의 비준을 위해 투쟁을 이끌어나갈 지도자가 없었다. 타협을 이루려는 노력도 수포로 돌아갔다. 신체의 건강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정신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였음) 정치적 안건은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윌슨은 조약 비준 문제를 '대국민투표'라는 특별선거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제출하려는 현실성 없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상원의 양당 합동회의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은 공화당 내 비타협파의 끈질긴 반대로 무산되고 말았다. 1920년 3월 19일 비준 해결안을 결정하는 최종투표가 벌어졌으나 이 해결안은 여전히 제10조(집단안보의 설정)에 대하여 대단히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윌슨은 이에 격노하여 그의 지지세력들에게 비준 해결안을 부결시키라고 강권했고 그중 23명이 부결표를 던졌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국제연맹의 창설을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온 사람의 강권으로 인해 국제연맹에 가입하지 않게 되었으니 참으로 역설적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20년의 선거

윌슨은 신체적으로 허약하여 1920년의 대통령 선거전에서는 큰 역할을 할 수 없었다. 민주당은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를 대통령후보로 지명했다. 윌슨은 이 선거가 자기 자신과 국제연맹안에 반대하는 세력의 영수인 헨리 캐벗 로지 상원의원 사이의 신임투표라고 생각했으나 그 결과는 윌슨의 소원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실제로 국제연맹안을 지지했던 많은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공화당 후보 워런 G. 하딩을 지지했고 선거는 공화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윌슨은 선거결과에 크게 실망했으나 1920년 12월 자신에게 수여된 1919년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함으로써 어느 정도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그가 의회에 보낸 연두 메시지에는 그 자신이 늘 소중하게 여겼던 국제연맹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언급도 없었다. 그는 1921년 3월 4일 자신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 외교문제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윌슨은 남은 여생 3년 동안을 워싱턴 D. C.에서 살면서 정치적 논평을 피했고 정치인들과의 교제도 멀리했다.

그가 퇴임 후에 하고 싶어했던 법률 및 문학활동은 날로 악화되는 건강 때문에 불가능했으며 1924년 죽었다. 그가 1915년 12월 18일에 재혼한 2번째 부인 에디스 볼링 골트 윌슨은 1961년 12월 28일까지 살았다. 백악관시절 그의 건강이 최악의 상태에 달했을 때 그녀는 그의 정치적 번민을 덜어주려고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직에 속하는 책임의 상당부분을 그녀 자신이 떠맡았다.

평가

우드로 윌슨은 개인적인 자질과 공공복지에 대한 탁월한 책임감으로 인해 최고위 공직을 수행해낼 자격이 충분한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이나 부하들에게는 관대한 태도로 대했다. 또한 온화하고, 유머스럽고, 사려 깊고, 폭넓은 문화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부하들로부터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으나 자신이 싫어하거나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과 대할 때는 잔인했던 적도 있었다.

깊은 이상주의적 신념으로 인해 그의 정치적 지도력은 강화되었고 뛰어난 웅변술이 그 지도력을 한층 뒷받침해주었다. 그러나 이상주의적 신념이 너무 강해서 효과적인 타협을 이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당파적 반대는 못마땅하게 여겼고, 자신이 신(神)의 계시에 따라 추구하는 노선은 절대로 이탈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나섰는데, 그 주장에는 완고한 칼뱅주의자 같은 기풍이 있었다.

그는 고귀한 이상은 정치 현실을 타파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국제정책은 파산의 길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였으나 정치적 직관과 수완은 부족한 편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프린스턴대학교 총장직도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고, 평화회의에 더욱 크게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며, 미국을 국제연맹에 가입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C. Seymour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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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대통령의 혁신주의운동에 관한 소고 〈미국학연구〉 6 : 최웅, 전남대학교 출판부, 1979
우드로 윌슨의 "신자유"와 자유주의의 수정 〈역사학보〉 64 : 이주영, 역사학회,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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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row Wilson and Far Eastern Policy 1913-1921 : Roy W. Curry, Bookman Associates,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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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row Wilson:Life and Letters, 8 vol. : Ray Stannard Baker, 1927-39 (reprinted 1968)
The Public Papers of Woodrow Wilson, 3 vol. : Ray Stannard Baker·William E. Dodd (eds.), 1925-27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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