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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1 (목) 15:09
분 류 문화사
ㆍ조회: 7616      
[가야] 가야 문화
가야의 문화

지산동 고분 출토 사람얼굴무늬 말방울가야(伽耶)는 삼한 중 변한(弁韓)이 모태가 되어 성립된 세력 집단을 일컫는데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소국들의 연맹 형태로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가야 연맹체, 또는 연맹왕국"가야"로 파악되고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가야의 영역을 동은 황산강(낙동강 하류), 서남은 창해(남해안), 서북은 지리산, 동북은 가야산의 남쪽이라고 했는데, 이는 대체로 낙동강 서안의 영남지역으로 멸망 직전의 사정이며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 성과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가야는 낙동강을 둘러싼 동, 서안에 폭넓게 자리잡고 있었다.

가야 연맹은 금관국을 중심으로 한 전기가야와 금관국이 신라의 영향권 내로 편입됨에 따라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이 재편되는 후기가야로 나눌 수 있는데 전기가야 단계의 가야는 괄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을 이루게 된다. 즉 전기 가야의 맹주인 금관가야는 강력한 군사 집단으로서 풍부한 철을 매개로 중국, 왜 등 주변 제국과 활발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다양한 문화를 섭취함으로써 성장, 발전하였다.

고대의 제철

가야 덩이쇠자연 상태의 철광을 탄소를 이용하여 환원시켜 불순물을 제거하고 철기로 만드는 과정을 제철(製鐵) 또는 야철(冶鐵)이라고 한다. 철은 용융온도가 섭씨 1,537도 이지만 숯(炭素)과 함께 가열하면 용융온도가 1,146도로 낮아지기 때문에 야철에서는 반드시 숯을 필요로 한다. 철광석을 숯(炭素)과 함께 섞어 높은 온도에서 가열하면 용융 온도의 차이에 의해 철과 불순물(슬래그)이 분리되는데 이 과정을 제련(製鍊)이라고 한다. 제련로에서 꺼낸 철은 해면질의 상태를 유지하며 내부에는 아직 불순물이 남아있는데, 이것을 두드리면 철과 불순물이 쉽게 분리된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면서 순철을 만드는 과정을 정련(精練)이라 한다. 정련해서 뽑아낸 순철 중에서 저탄소 철은 불에 달구어 두드리고 담금질하여 철기로 만드는데 이 공정을 단조(鍛造)라 한다. 그리고 고탄소 철은 완전히 용해시켜 틀에 부어 기물을 만드는데 이것은 주조(鑄造)라 한다. 이러한 제련이나 용해과정에서는 온도를 높이기 위해 바람을 보내는 송풍관이 반드시 필요하며, 부산물로서는 다량의 철찌꺼기(슬래그)가 배출된다. 그리고 단조에서는 달구어진 철을 꺼내고 집어서 두드리는데 망치와 집게, 모루가 사용되고, 형태가 만들어진 철기를 숯돌에 갈아 날을 세움으로써 하나의 철기가 완성된다.

가야와 철

가야 도끼들가야가 성장할 수 있었던 주요 배경의 하나로 풍부한 철과 생산체계의 장악을 들 수 있다. 삼한시대 이래 가야인들의 교역 활동에는 항상 철(鐵)이 매개체였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유적의 발굴 성과를 통해서도 가야인들이 풍부하게 철을 소유하였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있는 데 특히 금관가야의 중심고분군에 다량 부장되어 있는 덩이쇠가 대표적인 예이다.

덩이쇠는 철기 제작의 중간 소재임과 동시에 화폐 대용품의 역할도 겸한 것으로 생각되며, 단조품을 제작하는데 사용한 철집게, 망치, 끌, 숫돌 등도 모두 대형분에서만 확인된다는 점이 주목된다. 이러한 사실은 철 생산이 경제력과 군사력을 포함한 국력의 상징으로 간주할 수 있음을 보여주며 아울러 소수의 유력 계층이 장악하여 가야사회를 움직여 나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가야의 철과 철 생산 기술은 주변 여러 지역, 특히 왜(倭)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야인의 정신 세계

가야의 수장급 무덤에는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다량의 유물들이 부장되어 있다. 이들 유물은 현실적인 권력을 상징하는 것과 정신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구분될 수 있다. 전자가풍부한 무기, 무구류, 농공구류 등의 존재로 상징되어 진다면 후자는 이보다는 무속적인 성격이 강한 유물의 부장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동래 복천동 22호분 출토 청동제 칠두령(방울)이 그 대표적 인 예이다.

또 김해 대성동 14호분 출토 거울조각 펜던트, 23호분 출토 방격규구사신경(方格規矩 四神鏡)등 동경을 귀히 여기고, 또 부장한 점 등 에서도 신앙적인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경우가 매우 드물기는 하지만 이 고분들이 그 지역의 최고 수장급 무덤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볼 때, 가야 사회의 지배 논리는 군사적 강제력에 의한 권위와 아울러 종교적 권위도 중시되고 있는 사회였음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야의 무기

대가야 출토 화살촉과 화살통 부속구전투시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도구를 일괄하여" 무기(武器)"라 하며 신체 방어를 위해 착장하는 모든 장구를 일괄하여" 무구(武具)"라 한다. 따라서 무기란 상대를 찌르고, 베고, 쏘는데 사용되는 모든 유물이 포함되며 창, (대)도, 칼, 활과 화살 등으로 대표된다. 이중 도(刀)는 환두대도(環頭大刀)가 가장 대표적인데, 몸에 착장함으로써 무기로서의 기능을 하는 한편, 신분을 상징하는 위신구(威身具)로서 의 역할도 매우 큰 성격의 유물이다. 즉, 손잡이 장식의 종류에 따라 용봉문환두대도(龍鳳文環頭大刀), 삼루환두대도(三累環頭大刀), 삼엽문환두대도(三葉文環頭大刀), 소환두대도(素環頭大刀)등으로 구분되는데, 신분 서열에 따라 어떤 종류의 환두대도를 소유할 수 있는가가 결정될 뿐 아니라, 나아가 금, 은, 금동장식 등 귀금속에 의한 장식의 차이에서도 보다 명확하게 구분된다. 이처럼 가야 무덤의 부장품 중 무기의 비율이 높은 점에서도 가야에서 군사적 활동이 활발했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가야의 마구

가야 마구가야에는 이미 4세기 때부터 다양한 유형의 실용 마구들이 등장한다. 재갈, 안교, 등자 등 기마를 위한 필수 품목 이외에 말의 보호 장구(裝具)인 마주(馬胄), 마갑(馬甲), 장식용인 행엽(杏葉), 운주(雲珠), 말방울(馬鈴), 혁금구(革金具). 사행상철기(蛇行狀鐵器) 등이 그것인데, 종류나 형태가 다양한 반면 철제가 대부분이고, 금, 은, 금동 등 귀금속으로 장식된 마구가 소수라는 점과 안장의 구조가 말을 탈 때 신체의 움직임을 편하게 해주는 구조라는 점은 가야 마구의 실용적 성격을 잘 반영하고있다.

이와 같은 가야 마구의 실용성은 기마용 철갑주 및 풍부한 철제무기류의 존재와 연계하여 중무장 상태로 기마전을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용도를 더욱 짐작케 하며 말을 탄 상태에서 전투를 벌이거나 사냥을 하는 모습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당시의 기마풍속을 잘 엿볼 수 있다.

가야의 갑옷과 투구

가야 판갑옷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신체를 방어하는 장구가 바로" 무구"이며 무구는 갑옷(甲)과 투구(胄), 즉 갑주(甲胄)로 대표되어진다. 투구는 형태가 길다란 철판을 가죽끈이나 못으로 엮어 만든 종장판혁철주(縱長板革綴胄)가 일반적이다. 반면, 갑옷은 비교적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는데, 크게 판갑옷(板甲)과 비늘갑옷(札甲)으로 나누어지며 여기에 목갑옷, 허리갑옷. 다리갑옷 등 신체 각 부위별 부속 갑옷들이 딸려 있다. 먼저 판갑옷은 비교적 큰 철판을 가죽끈으로 묶거나(革綴), 못으로 고정(釘結)해서 만드는데, 활동이 불편하기 때문에 기마용으로는 적합하지 않으므로 주로 보병용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비늘갑옷은 작은 철판을 가죽끈으로 비늘 모양으로 엮어 만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몸을 움직이기 편하므로 기마용 갑옷으로 적합하다. 실제 고구려 고분벽화에 판갑옷을 입고 행열에 참가한 보병의 모습, 마구와 갑주를 완전하게 갖춰 입은 중무장한 기마무사가 격렬하게 싸우는 모습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 이들 갑옷의 용도를 잘 알 수 있다. 이들 갑옷은 비늘갑옷이 비교적 정형화되어 있는 반면 판갑옷은 가야 내에서도 지역 차가 보이는데, 각지의 대형 무덤에 주로 부장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이들 갑옷과 투구도 권위의 상징물 중 하나임을 잘 알 수 있다.

가야의 토기

여러 가지 가야 토기3세기 후엽에는 토기 생산 기술에 또 한번의 혁신이 일어나게 된다. 섭씨 1000도 이상의 고온에서 환원염(還元焰)으로 소성하여 만든 흡수성이 거의 없는 도질토기(陶質土器)의 출현이 그것이다. 삼한의 토기문화가 와질토기 중심이었다면, 가야의 토기문화는 바로 이 도질토기 중심의 토기문화라고 말할 수 있다. 도질토기는 처음에는 둥근밑 항아리(圓底短頸壺), 귀달린 항아리(兩耳附短頸壺) 등의 호류만 제작되다가 4세기대 이후부터 점차 모든 기종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면서 세련된 곡선미를 특징으로 하는 가야 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5세기 이후 낙동강 동안(東岸)의 가야지역에는 특히 신라 세력의 영향이 여러 부분에서 눈에 띄는데 토기문화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상하 엇갈림의 2단투창 고배의 출현과 장경호를 비롯한 모든 종류의 토기에 등장하는 직선적 요소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신라적 요소는 신라 세력권의 확장과 병행하여 점차 가야의 전지역으로 확산해 가게 되는데, 6세기대가 되면 신라 토기 중심의 이른바 통일양식 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게 된다. 한편 가야토기의 제작 기술은 일본에 전해져 일본 고분시대 토기인 쓰에키(須惠器)의 발생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야의 대외 교류

철을 둘러싸고 가야는 주변 여러 나라들과 활발하게 교섭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가야의 유적에서는 외래계 요소가 강한 유물들이 많이 눈에 띄고 있다. 그중 특히 주목되는 것이 북방계 및 왜계 유물들이다. 북방계 유물로는 김해 대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동복이나 동물형 대구(帶鉤)가 있으며, 통나무로 목곽묘를 축조하는 습속도 북방계 요소이다. 왜계 유물로는 김해 대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파형동기(巴形銅器), 벽옥제석촉(碧玉製石촉), 석제품 이외 각 유적에서 출토되는 하지끼(土師器)계 토기 등이 있다.

가야의 유적에서 출토된 외래계 유물 중에는 왜계 유물의 출토빈도가 가장 높은데, 이를 통해 왜와 매우 활발하게 교류했음을 알 수 있는 한편, 가야에서 출토되는 왜계 유물 대부분이 보기(寶器)적 성향이 강한 유물에 치중되어 있는 점에서 볼 때, 가야의 철을 입수하기 위해 이러한 유물들을 가야 지배층에게 바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외에 중국제 동경들도 가끔 출토되고 있는데, 이를 귀히 여겨 오랜 기간 대를 물려 사용하다가 무덤에 넣었다. 이 역시 철의 교역과 관련된 유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가야의 여러 나라

가야는 통합된 결집체로서의 단일 국가가 아니라 여러 소국들의 연맹체였기 때문에 각 소국마다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적인 성격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토기문화에 있어 이러한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기 때문에 각 지역권별 토기양식(樣式)의 규명은 해당지역 집단의 규모, 존속 기간, 영향력 뿐만 아니라 가야 연맹의 전반적인 성격과 규모를 가늠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살펴보면 대체로 부산, 김해를 중심으로 한 금관(金官)가야권, 함안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라(阿羅)가야권, 고령 및 서부 경남의 산악 지역을 중심으로 한 대가야권, 일찍부터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창녕 중심의 비화(非火)가야권, 경북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한 성산(星山)가야권 등 중추적인 대지역권과 여기서 다시 복잡하게 갈라지는 소지역권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지역색의 해명은 가야 지역 각 소국끼리의 개별적인 변천상은 물론 집단 상호간의 연관성 및 주변 고대 국가들과의 교섭 관계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연구 기반이 된다.

가야의 무덤

고령 지산동 고분군삼한 시대 후기 후반대에 등장한 목곽묘는 가야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주묘제로 사용되는데, 일반적으로 대형분의 경우는 별도로 부곽이 딸린다. 여기에는 다종다양한 유물이 풍부하게 부장되고 무엇보다 순장(殉葬)도 행해져 강력한 지배권의 출현을 느낄 수 있다. 5세기대에는 수혈식 석곽묘가 채용되는데 석곽의 규모나 구조 등에 목곽묘의 전통이 남아 있으며 여전히 유물의 다량 부장과 순장의 습속도 지속된다.



가야 고분 발굴 모습5세기 후엽 차츰 부곽이 사라지고 길어지는데 주곽 내에 부곽을 포함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때부터 가야 지역에도 고총(高塚)의 원분(圓墳)이 영조되기 시작한다. 신라 세력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5세기말 이후 가야의 묘제는 출입구를 마련하여 여러번 추가장이 가능한 횡구(橫口), 횡혈식 석실묘(橫穴式石室墓)로 이행되게 된다.

우리 조상의 형질

우리 나라는 토양의 특질때문에 고인골(古人骨)이 거의 남아 있지 않으므로 우리 조상의 형질인류학적인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우리 박물관에서 발굴한 김해 예안리유적, 삼천포 늑도유적에서 잔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고인골이 많이 출토되어 이 분야 연구에 상당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예안리 출토 고인골의 연구를 통해 가야인의 형질적 특징이 차츰 밝혀지고 있는데, 이에 의하면 예안리인의 평균 신장은 남성이 164.7cm, 여성이 150.8cm이며, 12세 이하의 사망자가 전체의 1/3이상이나 되어 당시의 유아 사망률이 높았음을 알게 해 준다.

또한 4세기 전반이라는 일정한 시기에 묻힌 예안리 여성의 30% 정도가 편두(初頭)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는데, 편두는 신생아 때부터 나무 또는 돌로써 눌러 이마 쪽을 납작하게 만드는 일종의 두개골 변형 풍습으로,삼국지위서동이전 한전(韓傳), 변진조(弁辰條)의 "어린아이가 출생하면 돌로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하기 때문에 지금도 진한 사람은 모두 편두이다. (兒生 便以石壓其頭 欲其編 今辰韓人皆初頭)"라는 기사와 부합되어, 이것이 변, 진한의 특징적인 습속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장신구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금동관고대의 장신구는 소유자의 신분 규정의 척도가 되는 산물이다. 종류로는 관모(冠帽), 허리띠장식(帶金具), 신발(飾履), 귀걸이, 목걸이, 팔지, 반지 등이 있으며, 재질은 주로 금, 은, 금동 등 금속과 유리, 수정, 마노, 호박 등 보석 광물들을 사용하였다. 재질, 또는 세공 수준에 따른 장신구의 질과 양은 소속 계층의 성격에 따라 소유의 정도가 결정되어지므로 주로 상위지배계층의 무덤에 화려한 장신구류가 풍부하게 부장되어 있다. 가야의 장신구는 대체로 5세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 삼한 시대부터 4세기 대까지에는 수정, 마노, 비취, 유리 등으로 만든 주옥(珠玉)류를 선호한 반면 금, 은, 금동 등 소위 귀금속에 대한 관념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사실은 중국 역사서인 삼국지위서 동이전 한전(韓傳)의 기록에서도 일부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다가 5세기 대에 들어서면서 소위 귀금속으로 만든 금속 공예품이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변화의 직접적인 요인은 신라로부터의 영향에서 찾을 수 있다. 즉 4세기 후엽 이후 신라는 고구려와의 적극적인 교섭에 의해 국력이 급성장하였고 그 영향은 영남 전지역에 확산되기 시작한다. 가야 지역의 귀금속제 장신구 출현도 이러한 당시 국제 정세 변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가야인의 주거 생활

지금까지 가야의 주거 형태를 해명할 만한 자료는 아직 충분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거창 대야리와 김해 봉황대 유적의 조사 예를 통하여 그 일단(-端)을 엿볼 수 있다. 가야 초기에 속하는 거창 대야리 주거지는 평면 타원형으로 수혈 바깥에 기둥을 배치, 실내 공간을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난방용의 화덕과 별개로 취사용의 부뚜막 시설을 같이 갖추고 있어 앞 시기보다는 한층 발전된 가옥 구조를 보이고 있다.

가야 거의 전 기간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봉황대 유적에서는 대, 소형의 주거지와 공방지(工房址) 또는 창고 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그 중 바닥(床面)을 흙으로 다진 후 불로 구워 단단하게 만들고, 수혈 내부에 넓은 도랑(周溝)을 돌린 후 그 안쪽에 별개의 벽을 설치하여 실내 공간을 구분하는 시설을 갖춘 큰 수혈주거지가 확인됨으로써, 금관가야의 중심 지역에 걸맞는 대형 가옥이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또, 지상 가옥의 것으로 보이는 정연하게 배열된 기둥구멍(柱穴)도 확인되어 이 지역의 가옥 형태가 점차 지상식(地上式)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골각기 제작

동물 뼈로 인간이 도구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는 구석기시대부터이며 이미 이 때 다양한 형태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동물의 뼈는 간단하게 조작하기만 해도 쉽게 날카로운 도구가 되며, 가까이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이용된 동물은 사슴이며 그 중에서도 사슴의 중수골(中手骨), 중족골(中足骨), 뿔(鹿角)이다. 사슴 중수골, 중족골은 어느 동물의 어떤 부위의 뼈보다도 단단하고 곧기 때문에 도구 제작이 용이하여, 작살, 바늘, 칼, 화살촉 등을 만들었고, 장신구들은 대체로 녹각(鹿角)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사슴 중수골을 이용한 골각기의 제작도 시기와 장소에 따라 차이가 있는데, 삼한 시대 전기 유적인 늑도 출토품은 먼저 크게 깨뜨려 원하는 모양을 만든 후 정밀하게 마연하여 제작하였음에 비해, 봉황대 출토품 중 삼국시대에 속하는 것은 뼈를 도구의 크기만큼 잘라서 만들었다. 분묘에서도 양은 많지 않지만 화살촉, 칼 손잡이 등의 골각기가 출토된다. 목기(木器)와 마찬가지로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원래는 다양한 골각기가 매납되었을 것이다.

가야의 몰락

고구려와의 교류에 힘입어 급성장하게 된 신라는 5세기 대에 들어서면서 낙동강유역의 가야세력을 신라 영향권 내로 편입시키기 시작한다. 그 결과 금관가야 뿐 아니라 낙동강 동안의 가야권 전반에 걸쳐 세력재편이 이루어짐에 따라 금관가야 중심의 가야 연맹(前期 伽耶)은 사실상 와해되고 위기 의식을 느낀 낙동강 서안의 가야세력은 고령을 중심으로 대가야 연맹(後期 伽耶)을 형성한다. 5세기 후반대 이후 후기 가야는 크게 번성하여 479년 중국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낼 만큼 국력을 갖추게 된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했던 가야는 신라에 의해 차츰 잠식되어 결국 병합되고야 마는 비운을 맞게 되지만 가야가 보유하고 있던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고, 이후 신라 사회 내에서도 지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출전 : http://oneness.pe.kr/study/history/가야의%20문화.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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