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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7 (수) 00:39
분 류 문화사
ㆍ조회: 9902      
[고려] 도자기, 고려 도자기 (민족)
도자기(陶磁器)

관련 항목 : 청자, 조선도자기, 분청사기, 백자

토기와 도자기는 점력(粘力)을 갖춘 가소성(可塑性)이 있는 질〔胎土〕로 형태를 만들고 이것을 불에 구워낸 것이다. 토기를 만들려면 점력을 가진 흙이면 대체로 질로 사용할 수 있으며, 토기를 구워내는 화도(火度)는 600℃ 이상에서 800℃ 정도이고 경우에 따라서 1,000℃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인류가 처음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서기전 1만년에서 6000년경 사이이며, 우리 나라에서 토기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대략 서기전 6000∼5000년경이었다.

토기를 질로 만들어 불에 굽지 않고 햇볕에 말려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은 일시적이었고 뒤에도 매우 제한된 지방에서 사용되었다. 처음 토기를 만들었을 때는 질을 앙금짓기〔水飛:혼합된 점토와 원료를 물에 풀어서 가라앉혀 앙금만 걷어서 쓰는 것)하지 않고 그릇을 만들어 600℃ 정도의 낮은 화도에서 구워냈으며 가마도 없었다.

사람의 지혜가 점차 발달함에 따라 질을 앙금짓기를 하고 토기를 구워내는 화도를 높이고, 높은 화도에 견디어내는 질을 찾아내고, 가마를 만들고 가마도 높은 화도를 견디어내는 가마로 점차 바꾸어나가면서 저화도(低火度) 연질토기(軟質土器)에서 더욱 발전하여 1,100℃ 이상 1,200℃의 고화도(高火度) 경질토기(硬質土器:庠器)를 만들게 되었고,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따라서, 도자기는 넓은 의미의 토기·도기(陶器)·석기(庠器)·자기(磁器:瓷器)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도기는 900∼1,000℃ 내외의 화도에서 산화번조(酸化燔造:가마에 불을 땔 때 산소를 많이 들여보내는 방법. 결과, 토기는 황색·갈색·적색을 띠며, 청자와 백자는 황색이나 갈색을 머금게 됨. ) 위주로 구워내며 표면에 유약(釉藥)을 입히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간단한 도기의 개념이지만, 도기라는 것은 그 범위가 넓어 그 밖에도 일부 반환원상태(半還元狀態)의 토기를 도기라고도 하며, 1,000℃ 이상의 높은 화도에서 여러 가지 회유(灰釉:나뭇재나 석회로 만든 잿물)를 발라 산화번조한 토기를 지칭하기도 하며, 연유(鉛釉)를 입힌 모든 토기를 지칭하기도 한다.

석기는 1,100℃ 이상의 높은 화도에서 주로 환원번조(還元燔造:산화번조와 반대 방법으로, 가마의 온도가 1,100℃ 이상일 때, 땔감을 많이 넣고 산소를 막아 불완전연소가 되게 하는 방법. 결과, 토기는 회색·회청흑색이 되고, 백자는 담청색을 머금고, 청자는 아름다운 비색이 됨.)한 것을 말하는데, 자연유(自然釉)나 인공회유가 입혀진 것이 있으며, 토기 중에서 가장 경질의 것이다.

자기(瓷器는 중국식 표기)는 점력을 갖춘 순도 높은 백토(白土:高嶺土), 즉 질(胎土:陶土·陶石)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長石質)의 유약을 입혀 1,300∼1,350℃에서 번조(燔造)하여 그 조직이 치밀한 것을 말하며, 이를 백자라고도 한다.

치밀하다는 것은 번조할 때 가마 안에서 완전히 자화(磁化)되어 유약은 무색 투명하며, 순백의 태토 자체도 반투명질이 되고 태토와 유약이 일체가 되듯 밀착된 상태로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유약에 균열(빙열·식은 테)도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도기·석기의 단계까지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일찍이 도달할 수 있었지만, 자기를 만들 수 있는 단계에까지 도달한 나라는 별로 없었다. 우리 나라와 중국·베트남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앞서서 자기를 만들어냈으며, 그 중에서도 우리 나라와 중국은 그 조형이 독창적이고 양질의 자기를 생산하였지만, 베트남은 자질(磁質)에는 거의 도달하였으나 질과 조형이 모두 중국의 아류로 우수하지 못하였다.

도자기(신라 말·고려 초의 도자기)

[회유토기(灰釉土器)와 중국 청자의 발생]

낮은 화도에서 산화번조로 구워낸 토기에서 고화도환원번조(高火度還元燔造)의 석기(庠器) 단계에 이르면 가마에서 자연히 생겨나는 재티가 고온의 토기표면에 내려앉아 규사질(硅砂質)과 합하여져 녹아붙어 자연유가 된다.

이러한 자연유의 성분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잿물 또는 회유(灰釉)라 한다. 이 잿물을 토기 표면에 바르고 고온으로 구워내면 회유토기(灰釉土器)·회유석기(灰釉庠器:일반적으로 회유토기라 함.)가 되는데, 이 회유토기가 청자발생의 시초이다.

중국에서는 이 회유토기의 시원이 은대(殷代)에 있었고, 한대(漢代)에 들어오면서 전시대보다 매끄럽게 되는데, 이러한 단계를 시원적 또는 초기적 청자라고 할 수 있다.

육조시대(六朝時代)에는 태토도 점차 양질이 되고 유약도 장석유(長石釉)에 가깝게 발전하여 질적으로 청자에 한 발 다가서고 초보적 백자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며, 당대(唐代)에 청자가 세련되기 시작하여 만당(晩唐)·오대(五代)에 질적으로 완벽한 청자가 되고 공예적인 높은 세련을 보였다.

화남(華南)과 화북(華北)지방에서 다같이 청자를 만들었지만, 화북지방의 것은 조질(粗質)이었으며, 오대까지 중국청자를 대표하는 것은 양쯔강(揚子江) 남쪽 하류에서 널리 생산되던 청자 중에서도 저장성(浙江省) 동북쪽 상린호반(上林湖畔)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퍼져 있던 가마에서 만들어낸 월주청자(越州靑磁)였다.

당말·오대의 월주청자는 태토에는 철분이 약간 섞였으며, 유약도 철분이 약간 섞인 장석유로 화도는 1,250℃ 정도에서 거의 자화(磁化)된 것으로 월주비색청자(越州翡色靑磁)로 널리 알려진 고전적 청자였다.

987년(太平戊寅, 成宗 6)에 월국(越國)이 멸망하면서 월주요는 쇠퇴하고, 그 기술이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 남북방으로 확산되어 곳곳에서 이와 비슷하거나 그 지방, 그 시대의 특징이 있는 새로운 청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중 대표적인 예가 이른바 북방청자라고도 불리는 요주요(耀州窯)계통 청자와 북송 여관요청자(汝官窯靑磁, 河南省寶豊縣淸凉寺), 용천청자(龍泉靑磁), 남송 관요청자(官窯靑磁) 등이다.

이 중에서도 중국 도자사상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11세기 북송대에 만들어진 여관요청자이며, 남송 관요와 용천요의 명품도 높이 평가된다.

[시유토기(施釉土器)와 우리 나라 청자의 발생]

우리 나라는 7,000∼8,000년 전경인 신석기시대로부터 흙을 빚어 번조한 토기(櫛目文土器)를 사용하였으며, 삼국시대는 고화도로 환원번조한 토기를 만들었다. 삼국토기 중에서도 신라·가야토기는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것이어서 1,200℃ 이상이나 올라가는 고화도 환원번조로 표면색은 회청흑색이고 무쇠같이 단단한 것이었다.

이 시대는 후장(厚葬:정성껏 장례를 치름.)하는 시대여서 많은 유물이 고분에서 출토되고 있으며, 특히 신라·가야고분에서는 토기제품이 매우 많아서, 상상을 능가할 만큼 대량 매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토기는 기형(器形)이 다양한데 바닥이 둥글거나 아니면 높은 받침이 있고, 표면에 오목새김의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문양이 있으며, 선의 흐름이 강하고 직선적이어서 제례적(祭禮的)이고 의례적(儀禮的)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이러한 삼국시대의 토기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토기에서 자기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었다.

통일신라 시대 토기는 부장용(副葬用)보다는 주로 실생활용으로, 안정감이 있는 것이었다. 즉, 삼국시대의 높은 받침은 낮은 굽으로 변하고, 둥근 바닥은 편편한 바닥이 되고, 높은 목은 낮아져서 안정감 있는 토기로 이행(移行)된다.

또한, 이때는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토기 표면에 유약을 입힌 연유계(鉛釉系)인 녹유토기(綠釉土器)와 갈유토기(褐釉土器)가 발달하면서 토기가 세련미를 가지게 되고, 9세기경으로부터 회유토기가 발달하여 시유토기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고 있어서, 토기에서 자기(청자)로 이행되는 기반이 확립되고 있었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삼국시대로부터 육조청자(六朝靑磁)의 유입이 상당량에 달하고 있었으며(일부 백자·흑유자의 유입도 있음.), 9세기경으로부터 월주 지방의 만당도자기(주로 청자와 일부 백자)와 그 기술이 해로(海路)를 통하여 우리 나라 서해안과 일부 남해안에 많이 유입되어 초기 청자인 이른바 일훈문굽계청자(日暈文─系靑磁:해무리굽청자라고도 함.)를 만들기에 이르렀으며 녹청자(綠靑磁)도 만들었다. 일훈문굽계청자는 9세기말경 이미 신라에서 번조한 것 같다.

중국 저장성 월주청자의 영향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이 청자는 9세기말경부터 비롯되어 10세기까지 계속되었다고 생각된다. 일훈문굽계 청자요지는 주로 경주지방과 멀리 떨어진 우리 나라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데, 현재까지 발견된 곳만 하여도 8, 9곳에 이르고 있으며, 그중에서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와 계율리 일대에 집중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첫째 통일신라 말기가 되면, 수도인 경주의 왕권이 약화되고 지방호족들의 세력은 확장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 대표적 호족세력인 장보고(張保皐)에 의한 중국과의 해상무역을 통하여 서남해안 지역이 중국 도자문화의 영향을 가장 일찍 받게 되었으며, 또한 풍부한 이 지역 물산과 함께 무역을 통한 부의 축적 등으로 이 지방의 사회·경제적 요건이 경주 등 다른 지역보다 앞섰고, 따라서 새로운 도자기문화에 대한 이해와 수용태세가 갖추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9세기 전반 동북아 해상무역의 왕자였던 장보고 등의 해상활동에 의하여 중국청자(백자·흑유도돈학)가 수입되고 청자번조 기술이 도입 전파됨으로써, 이 일대는 이미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문화권에서 벗어나 자기를 사용하는 문화권으로 진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강진 일대는 이들 청자요 중에서도 장보고의 활동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아, 이 지역 청자요의 대표적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는 강진이 장보고 활동의 중심지였던 완도와 가깝고, 또 청자를 만들기에 적합한 조건, 즉 태토·물·나무 등이 풍부하고 수운(水運) 또한 편리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서남해안의 가마에서는 석기에서 청자로 이행되는 초기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환원번조가 잘 되고 갑발(匣鉢:도자기를 구울 때 재티 등이 자기 표면에 내려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자기를 넣는 개비)을 사용한 본격적인 청자를 번조하기 시작하였고 일부 백자도 번조하였다.

고려 건국 뒤 강진과 부안은 중앙인 개경과 연결되어 관요로 이어져서 이곳 가마가 집중적으로 운영되어 발전하게 되고, 중국 남북방요의 영향을 체계 있게 정리, 이용함으로써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청자와 녹청자]

전술한 바와 같이, 서남해안 일대의 이들 초기청자 중 그 질이 우수하고 발색이 이미 비색(翡色)에 가까운 상태의 청자는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용운리 등 가마에서 번조한 것으로 대표된다.

초기청자 중 그 질이 약간 떨어지며 발색이 비색에는 훨씬 못 미치는 청자는 옛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일부), 양주군 장흥면 청자요지와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청자로 대표된다.

강진의 용운리 청자는 치밀하게 자화(磁化)된 상태로서, 장석계의 발달된 청자유약이 시유되었는데 환원이 잘 되어 초기비색의 아름다운 청자가 있는가 하면, 환원번조를 목적으로 하였으나 환원과 산화번조 사이에서 암녹색·녹색·황갈색·녹갈색 등을 머금은 청자도 생산되었다.

기형과 굽의 형태, 도자기와 그릇 사이에 놓는 내화토목(耐火土目:높은 화도에서 잘 견디어내는 내화토를 공기돌만하게 빚어 그릇 밑에 받치는 눈. 굽고 난 뒤에 그릇이 잘 떨어지게 됨.) 등에 처음에는 월주요의 영향이 가장 컸으나, 이후 기형·문양 등에는 요주요·임여(臨汝:汝官窯에 대한 窯) 등과 교류한 자취가 나타나 있으며, 점차 환원번조가 더욱 잘 이루어지고 화도는 1,250℃를 넘는 우수한 질의 청자를 생산하였다.

경기도 고양과 양주군의 청자는 자화는 이루어지고 있으나 환원번조도 잘 안되어 대체로 갈색을 띠고 있으며 일찍이 단절되었고, 고창 용계리 청자는 자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지고 있으나, 강진 청자보다 치밀하지 못하고 환원번조가 잘 이루어지지 못하여 황색·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태토와 유약도 정선되지 못하였고, 오목새김과 돋을새김이 나오는 단계에서 단절되고 말았다.

해무리굽청자는 양질이었기 때문에 생산비가 높아서 그 생산과 소비도 지방호족 등 부유한 계층이나 상류계층의 몫이었을 것이다.

이미 9세기 서남해안 일대는 해무리굽 양질 청자의 수요가 늘어나서 이제까지 발견된 가마만 보아도 북쪽으로부터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주촌, 옛 경기도 고양군 원당면 원흥리,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 전라북도 진안군 성수면 도통리,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용계리,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일대와 칠양면, 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 등에 있다. 이들 가마는 모두 규모가 방대하고 갑발을 사용하여 값이 비싼 양질의 청자를 생산하려고 노력한 가마들이다.

청자문화가 이와 같이 급속히 퍼져나가게 되자 자연히 질은 이만 못하지만 거친 품질의 값싼 청자가 역시 서남해안 일대에서 생산되어 일반 백성들의 수요에 충당하게 되었다. 이 조질(粗質)청자는 태토에 모래 등 잡물이 섞이고 번조한 뒤에도 기공(器孔)이 많은 등 치밀하지 못하고, 유약도 회유와 흡사하여 그 색이 녹갈색을 머금고 있으며, 유면(釉面)도 고르지 못하다.

이러한 청자를 녹청자라고 하는데, 이 녹청자 요지는 인천시 경서동, 충청남도 서산시 성연면 오사리,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사오리, 전라남도 해남군 산이면 일대 등지에 있으며, 해남군 산이면 요지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만도 50개를 넘는 방대한 가마로, 이 시기 청자문화의 급속한 발달을 엿볼 수 있다.

녹청자의 발생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현재로서는 해무리굽 청자가 발달 보급되는 시점에서 발생한 것으로, 그 발생을 좀더 올려 잡으면 신라 회유토기와의 관련도 추측해볼 수 있으나, 아직까지는 더 확실한 자료가 없다.

도자기(고려도자기)

1. 시대 구분

앞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신라 말기에 청자를 만들고 일부 백자도 만들기 시작하였는데, 고려에 와서 청자가 더욱 발전, 세련되어 고려청자의 이름이 높다. 고려자기의 주류는 청자이며 그 밖에 백자·철유·흑유 등은 청자에 부수되는 것이므로 고려자기의 시대구분도 청자를 중심으로 한다.

고려 초기 강진의 해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확산되고 다른 해무리굽청자가마는 점차 없어지거나 지방의 조질 청자가마가 되고 녹청자가마도 생겨나게 된다. 강진가마에서는 청자의 질과 형태와 문양이 안정되고, 중국의 여러 양식과 번조수법이 고려적으로 변모해 나가 16대 예종 연간까지는 그 질과 양식에서 중국적인 것을 거의 청산한 단계에 이른다. 그러므로 고려 초에서 16대 예종(1122)까지를 전기로 한다.

17대 인종 때부터 고려자기가 고려적으로 아름답게 세련되어 독특한 비색(翡色) 청자를 완성하고, 18대 의종 때는 상감기법과 문양구성이 가장 뛰어났으며, 청자·철채(鐵彩)·청자상감(靑磁象嵌)·진사채(辰砂彩, 또는 銅彩)·연리문(揀理文)·철채상감·철유(鐵釉)·흑유(黑釉)·백자(白磁)·백자상감·화금자기(畵金磁器) 등 다종다양한 자기가 매우 세련되었으며 청자기와도 만들었다.

인종대에 이미 귀족 간의 알력이 심화되다가 의종 때 무신의 난이 일어나고 이어 무신이 집권한 시대의 고려자기는 질과 양식이 퇴보하였지만, 몽고군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고려자기의 모습에 커다란 변화는 없었다. 그러나 몽고군이 침입하면서부터 급격히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1123년(인종 1)부터 몽고가 대군으로 침입하기 직전인 1230년(고종 17)까지를 중기로 한다.

몽고 침입 이후 원종대와 충렬왕 초까지는 소수의 상품(上品)을 제외하고는 고려자기는 많이 퇴보하였으나 중기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 때이고, 충렬왕 10년 이후부터 화금과 진사설채가 다시 나타나고 새로운 기형과 문양이 생기고 청자의 질이 좋아지는 등 일시적 성황을 보이다가 다시 퇴보하여 고려말에 이르므로, 1231년 몽고침입부터 고려 말까지를 후기로 잡는다.

2. 전기―발전기

9, 10세기는 청자가 발생하고 백자도 일부 만들고 그 질이 자질(磁質)로서 완성되는 시기이다. 엄격히 말하면, 이때의 청자와 백자는 현대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기는 아니며, 완전한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이때 청자·백자 이외에 흑유도 일부 특수한 지역(전라남도 고흥군 두원면 운대리)에서 약간 만드는 등 고려도자기가 점차 다양화되고 있었다.

청자에는 청자의 기면(器面)을 파내어 상대적으로 파내지 않은 면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대담하고 큰 이형연판무늬가 등장하고, 오목새김문양(거친 국당초문 등)과 철화문(鐵畵文)과 퇴화문(堆花文)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초기청자와 같은 일훈문굽백자를 생산한 백자요지로서는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와 반곡마을에 있는 가마자리가 매우 주목할 만하다. 필자가 1960년대에 발견한 이 가마는 청자도 생산하였지만 초기 백자가마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청자 이외에 백자도 이미 9, 10세기에 생산되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또한, 이 가마에서는 최근의 발굴조사에서 해무리굽 밑층에서 청자와 백자가 나오고 있는데, 청자는 유약이 안정되지 않았으나 기형과 태토 등이 안정된 양질의 것이며, 백자는 기벽이 얇고 기형과 유약 태토가 좀더 안정된 양질이다. 아직 단정할 수는 없어도 우리 나라 최초의 청자와 백자를 연구하는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때까지(20세기 중엽) 일인학자들이 초기청자 또는 원시청자라 부르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순화4년명항아리〔淳化四年銘壺〕도 백자를 번조하려다 담갈색이 약간 비낀 조질 백자가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11세기말∼12세기초까지는 중국의 산시성(陝西省) 요주요, 광저우(廣州) 서촌요·정요·자주요·수무요 등과도 교류가 있어 철화문과 퇴화문이 발전하는 등 청자의 종류도 다양해지고 백자·흑유 등 여러 가지 도자기가 발전되며,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이 고려적으로 세련되어갔다.

강진의 가마는 점점 확대되어 대구면의 용운리·계율리 일부, 사당리와 칠량면 삼흥리 일대에서 사당리 전면과 수동리 일대로 퍼지며, 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과 진서면 일대에도 청자가마가 생기고, 그 뒤 가마도 관요 형태의 대규모의 청자요로 발전하였다.

3. 중기―최성기

[청자의 세련]

12세기 전반기는 고려청자 중에서도 순청자가 가장 세련되게 되는 시기였다. 청자의 색은 처음부터 환원번조로 시작되었으며, 이미 11세기에는 완벽한 환원번조로 독특한 청자색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12세기 전반기는 그 절정기로서, 이때 청자의 모습은 17대 인종왕릉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자과형화병(靑磁瓜形花甁) 등 일괄유물로 대표된다.

1123년(인종 1) 북송 휘종(徽宗)의 사행의 일원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선화봉사고려도경 宣化奉使高麗圖經≫에서 “근년 이래 제작이 공교(工巧)하며 색택(色澤)이 더욱 아름답다. ”라고 한 것이나, 북송 말 무렵으로 생각되는 태평노인(太平老人)의 기록인 ≪수중금 袖中錦≫에 “고려청자의 비색이 천하제일”이라고 지적한 바와 같이, 반실투성(半失透性)의 빙렬(氷裂)이 거의 없는 우수한 비색유약을 완성하였다(1차비색 완성).

비색유약의 완성과 더불어 기형·문양·번조수법 등에 남아 있던 중국의 영향이 거의 사라지고 자연에서 소재를 받은 독창적 형태와 문양으로 고려적으로 변형 발전되며 독특한 세련을 보인 것이다.

이와 같은 청자의 세련은 12세기 중엽까지는 또다른 의미의 진전을 보여 유약은 반실투성에서 조금씩 더 밝아지고(2차비색 완성), 새롭게 구상된 음각·양각·투각문양 등이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고려사≫ 세가 의종 11년(1157)조에 보이는 청자와(靑磁瓦)의 기록과,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에 흩어져 있는 청자와편(靑磁瓦片)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증명이 된다.

이 당전마을의 청자와편을 반출하는 요지에서 출토되는 파편의 유약은 인종릉에서 출토되는 일괄유물인 1차비색완성기(12세기 전반)의 것보다 유색이 조금 더 밝아졌으며, 문양이 고려적으로 보다 완숙한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발전이 있는 한편에서는 획기적인 시문 방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고려자기에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새로운 기법이 등장하였으며, 상감을 여러 가지로 응용한 것 또는 상감기법 외의 다른 여러 방법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철채상감·철채백퇴화·철유·철유상감·철유백퇴화문 등)이 싹텄을 뿐 아니라, 이러한 여러 가지 기법이 완숙한 상태에 도달하였다.

1159년에 죽은 문공유(文公裕)의 지석(誌石)과 함께 출토된 청자상감보상당초문대접(靑磁象嵌寶相唐草文大桑)은 유약이 맑고 투명하며, 상감의 기법과 문양의 포치(布置) 등이 매우 발달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문공유묘 출토 대접을 만든 시기는 유약(유약은 1차비색 완성시기보다 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상감문양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유약의 색이 밝은 쪽으로 이행된 것이다.)·기형·문양과 문양의 포치·번조수법 등이 가장 아름답고, 고려자기의 기준이 되는 그릇들을 만든 때였다.

먼저 청자유약은 기포가 적고 비색이 밝아져서 문양이 잘 보이게 되고 빙렬이 있는 것이 많아진다. 기형은 그 선이 더욱 유려해지면서도 유연하여 그 시대양식을 확실하게 지니게 된다. 문양은 사실적 문양을 도식화(圖式化)하고 양식화(樣式化)하였지만, 자연의 향기를 지녔으며 역시 시대양식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있으며, 부위마다 적합한 문양을 개발하였다.

각 문양의 포치·구성은 먼저 주문양(主文樣)과 종속문양(從屬文樣)이 있어, 그릇의 넓은 주면에 주문양을 배치하고 구연부(口緣部)나 굽언저리 등 주문양 상하에 종속문양을 배치한다. 주문양은 사실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공예의장의 성격으로 양식화되지만, 회화적이고 여백을 많이 살려 자연이 지니는 맛을 잃지 않는다.

종속문양은 동일 패턴이 반복되는 공예의장이지만, 주문양에 비하여 매우 좁은 한정된 공간에 시문되어 주문양의 상하 여백을 마무리하여 주는, 또는 공간에 안정감을 주는 구실을 하고 있어, 전반적 문양은 회화성을 갖춘 공예의장이나 그릇과 일체가 되어 상호 보완하는 입장에 있다.

이 시대가 문화적으로 매우 세련된 시기여서, 전술한 비색·기형·문양뿐 아니고 그릇의 굽다리를 어떻게 깎느냐, 또 구울 때 그 굽다리에 어떻게 하여 눈자국이 작게 남느냐 하는 문제 등이 예의 검토 실험되고 있다.

따라서, 굽다리는 대체로 작게 하고 매병류 등 큰 그릇은 안다리굽이 많고 보통 병류나 주전자 등 그릇은 굽이 조그마하고 낮으며, 큰 것은 내화토(耐火土) 모래비짐눈으로 번조하고 일반 그릇(작은 것)은 규사(硅砂)눈을 받쳐 구워 굽이 작고 예쁘며, 규사눈 자국이 작고 희게 보여 그릇의 바닥까지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제작하고 있음을 본다.

[청자와 상감문양]

12세기 전반 상감발생기의 청자요지(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 당전마을의 청자기와를 반출하는 요지)에서의 상감문양은 기명(器皿)의 일부에만 사실적인 문양으로 나타나며, 상감시문된 위치는 11세기 후반경이나 12세기 초 무렵의 기명에 음·양각으로 시문하던 자리의 일부 또는 전면(처음 일부에 점차 그 자리 전면에 나타남. )에 나타난다. 이 경우 내외면 중 일면시문으로 문양도 음·양각문과 흡사한 경우가 많다. 이러한 초기 상감 상태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면 12세기 중엽인 상감 최성기에 이른다.

전술한 것처럼 처음의 상감문양은 기명의 내측이나 외측의 일면 가운데 처음 일부에, 점차 전면에 나타나다가 좀더 발전되면 내외면에까지 시문이 확대된다.

문양은 상감 발생 초기의 사실적인 문양에서 도식화되기 시작한다. 그릇의 면을 분할하여 구도를 잡아 주문(主文)과 종속문(從屬文)을 구분 시문하여 상감되는 부위에 따라 여러 가지 문양이 새롭게 고안되고 이들 문양이 적절히 포치되어, 하나의 일정하고 통일된 구성과 조화를 이루게 된다.

문공유의 묘에서 출토된 보상당초문대접은 바로 상감 최성기의 작품으로, 이러한 완숙한 경지까지 도달하려면 상감 발생기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경과하였을 것이며, 따라서 상감의 발생시기는 12세기 전반인 것이다.

여기에 언급하는 상감 발생기는 상감이 여러 가마에서 고안되어 일반화되는 처음 시기를 말하는 것이다. 특수한 지역 또는 특정한 기형에 예외적 또는 우발적으로 상감이 시문된 예는 12세기초는 물론이고 11세기 또는 10세기에도 가능할 수 있다.

실제로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의 백자·청자가마 발굴에서는 10세기를 내려오지 않는 층위에서 서툴지만 특이한 상감을 한 파편이 발견되었고, 전라남도 함평군 손불면 양지리에서도 10세기경 청자가마에서 흑상감파편이 발견되었다. 그밖에 11세기로 추정되는 청자에 상감이 들어간 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타 청자문양]

상감기법과 문양이 가장 세련된 12세기 중엽에는, 그 수효가 상감청자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10세기경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화청자·퇴화문청자와 그밖에 철채·철채백퇴화·철채백상감·철유·철유백상감·백자·백자상감·백자철화문·화금청자·청자진사〔銅畵〕설채·연리문〔絞胎〕자기 등이 함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다.

특히, 산화동 안료로 환원번조 상태에서 선홍의 발색을 성공시킨 진사설채는 중국보다도 2세기 이상 앞선 세계 최초인데, 붉은색을 자기 표면에 절대로 남용하지 않았다.

4. 후기―쇠퇴기

17대 인종, 18대 의종대를 정점으로 아름답게 세련된 고려자기 문화는 귀족사회의 혼란과 정치질서의 변이(變異) 중에서도 계속 모습을 이어갔으나, 13세기 초 몽고의 침입으로 커다란 타격을 받고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무신집권 이후 점차 그 폐단이 쌓여 가자 13세기 초부터는 고려자기에도 변화를 보여, 기형이 조금 둔해지고 굽도 조금씩 커졌으며 밝은 유약의 비색이 다소 어두워지면서 문양도 조금씩 퇴보해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몽고의 침입으로 가속화되어 원종대와 충렬왕초에 매우 타락한 청자로 전락된다. 이때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는 자료는 1269년(원종 10)으로부터 1287년(충렬왕 13)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간기(干記:己巳·庚午·壬申·癸酉·甲戌·壬午·丁亥)가 들어 있는 청자상감그릇들이다.

이들 청자기명들은 암녹색이 비낀 흐린 유약과 간혹 밝은 유약이 있으나, 그 빛이 뿌옇고 그릇의 유려한 곡선이 둔해지고 문양도 12세기 이래의 상감문양이 계속되고 있지만 퇴화된 상태로 거칠고 생략되었으며, 굽도 둔하고 모래받침이 조금씩 나타난다.

≪고려사≫ 세가 충렬왕조와 ≪고려사≫ 열전 조인규(趙仁規)전에는 고려에서 원나라 세조에게 화금청자(畵金靑磁)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화금청자는 12세기 전반부터 극소수 만들어졌으며, 충렬왕 때도 특별히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데, 양식적으로 보아 충렬왕 때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것(청자상감화금원숭이토끼당초문편호·청자상감화금당초모란문대접)을 통하여 상감청자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충렬왕 즉위 중반 이후 일시적인 안정으로 청자의 유약이 약간 불투명하지만 비색유약이 그전보다 아름다워졌고, 문양도 그 이전부터 시문하던 문양을 그대로 사용한 예와 새로운 문양이 등장한 예가 있다.

그전부터 사용하던 문양도 그 문양이 곱고 원형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상태였으며, 새로운 문양은 사실적으로 안정되고, 주문양에 조그만 이파리가 많이 달린 새로운 당초문과 봉황문이 등장하며, 용문양도 간혹 보이고, 종속문양이 여러 단으로 구성되기도 하며, 기형에도 항아리〔扁壺〕 등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충렬왕 중반 이후 원나라를 통한 중동지방과 서방 문화의 유입으로 일부 기형과 문양·번조수법 등에 조금씩 나타난 변화의 일부분이다. 그 밖에 번조할 때 변화가 있어 상품은 환원번조하였으나, 하품에는 산화번조가 있으며, 시대가 내려갈수록 점차 환원이 보장되지 않아 청자의 색에 황색과 갈색을 머금게 되었다.

충렬왕·충선왕 이후 잠시의 안정이 다시 끊어지고 사회가 불안해져서, 14세기 초를 조금 지나서부터는 12세기 중엽경에 많은 종류의 도자기가 화려한 꽃을 피웠던 상태에서 주로 청자상감과 순청자기류만이 생산되었고, 14세기 중엽부터 질과 기형·문양·번조수법이 극도로 타락하고 퇴보된 상태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상품 청자가 일시 그 질이 향상되었으나 다시 타락하여, 이러한 타락한 상태가 조선왕조로 넘어와 분청사기의 모체가 된다.

고려자기는 단군숭배, 전통적인 토속신앙과 불교·노장·풍수도참사상 등을 배경으로 청자를 주로 생산하고 세련시켜 12세기 전반에 비색순청자로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 특색을 나타내었고, 12세기 중엽 유약을 맑고 밝게 발전시켜 청자상감으로서 다시 한번 꽃을 피웠다.

고려자기 중에서는 청자가 특히 많이 생산되고 세련되었다. 토기에서 청자로의 발전이행은 인류문화 발전의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으나, 고려시대의 청자는 그 자연과 시대적 배경으로 더욱 많이 생산되고 가장 세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고려청자는 은은하면서 맑고 명랑한 비색, 유려한 선의 흐름과 탄력이 있는 생동감 있는 형태, 조각도의 힘찬 선을 지니고 기물과 일체가 된 회화적이며 시적인 운치가 있는 상감문양, 세계에서 최초로 자기에 붉은색을 내는 구리의 발색기법을 창안해 냈으면서 한두 점 악센트로 강한 색〔銅彩發色〕을 쓰는 것 이외에는 모든 색을 담담하게 구사하며 언제나 같이 호흡하고 일체가 되려 하는 것 등이 그 특색이며 아름다움이다.

참고 문헌

靑磁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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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모>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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