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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7 (수) 00:44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1364      
[조선] 조선 도자기 (민족)
도자기(조선도자기)

관련 항목 : 분청사기, 백자, 도자기ㆍ고려도자기, 청자

1. 특징

조선 전기의 백자 반합. 높이 22.5cm . 입지름 15.5cm. 보물 제806호. 호림박물관 소장.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조선 도자기를 가리켜 소탈한 서민적 모습이 있다고 하고, 고려 청자를 가리켜 귀족적 풍모가 있다고 표현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고려 도자기와 조선 도자기를 비교해서 그러한 표현이 고려 청자와 조선 분청사기와 백자에 적절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전제주의 국가에서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 이르는 첫 번째 점진적 중간 단계가 우리 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이고 다음 조선 왕조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고려 시대에 백성들의 의지가 고대 국가보다는 더 반영될 수 있었고 조선 시대만큼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의미도 되고, 미술의 향유(문화 생활의 향유)가 삼국 시대의 국가 중심에서 고려 시대에 귀족 중심으로 바뀌고, 조선 시대에는 미술 창조의 중심이 대중으로 이행되면서 대중도 세련된 미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도 된다. 고대 전제주의 국가에서 왕권과 종교에 치우쳤던 권위주의 건축과 호화찬란한 공예도 통일신라 시대에 그 규모와 양식이 한국의 자연과 문화 환경에 맞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통일신라 시대까지도 미술은 국가를 중심으로 한 귀족과 종교에 머물러 있었고, 신라 후기에 이르러서야 일부 지방호족 등에 미쳤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종전의 국가권위를 위한 것으로부터 왕실과 귀족·지방호족·승려 등 국가를 영위하는 인간을 위한 것으로 이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 시대 공예는 삼국 시대의 호화찬란한 금관과 같은 것이 아니라 당시 최고로 세련된 문화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던 귀족·지방 호족들의 생활에 맞는 미적으로 세련된 공예품들이 많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려 시대 미술의 특징은 생활 공예의 세련이다.

백자상감모란문병. 조선 전기. 높이 29.6Cm. 보물 제807호. 호림박물관 소장.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한편, 조선 시대는 미술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향유라는 관점에서도 고려 시대보다는 현대에 성큼 다가선 시대였다. 고려 시대의 왕실·귀족·승려·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끊어지고 조선 시대에 새로운 무인 출신의 왕실, 새로운 양반 계층, 새로운 유학자의 등장으로 민중이 넓게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결과로 조선조의 문화가 고려에 비하여 보다 우리문화의 참모습에 가까워진 것이다.

조선조 미술의 특징 중 하나가 인위적인 기교가 나타나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민예적인 미에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대중이 널리 참여하여 그들의 소탈한 의지가 양반문인 계급의 미의식과 융화되어 표현된 것이며, 이것은 바로 한국인의 미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조 도자기의 특징 중의 하나도 이러한 인위적인 기교가 나타나지 않은, 마치 자연을 보는 듯한 아름다움이다.

[사옹원(司饔院)과 광주중앙관요(廣州中央官窯)]

조선 왕조는 태조 때로부터 성종 때까지 활기 있고 힘차고 빠른 발전을 이룩하였다. 이러한 발전은 도자문화에도 나타나 국초로부터 전국의 가마를 조사, 정비하였다. 도자기 번조를 맡은 중앙기관은 사옹원인데 1467년(세조 13) 이를 재정비하여 새롭게 그 체제를 갖추었다.

성종∼중종 연간에는 백자의 질이 가장 우수하였는데, 서울에서 가까운 경기도 광주지방에 사옹원의 분원을 두어 왕실용 자기번조를 전담하게 하여 조선조 백자 제조의 일대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이러한 성과의 기초는 세종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세종실록≫에 전국에 자기소 139곳, 도자소 185곳의 소재, 품질 등을 상세하게 조사 기록해놓은 것으로도 입증이 된다.

이와 같은 상황을 초기 법전인 ≪경국대전≫을 통하여 조금 더 상세히 살펴보면, 사옹원 사기장(沙器匠) 380인, 내수사(內需司) 사기장 6인, 외공장(外工匠) 99인으로 되어 있어 사옹원이 사기번조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광주가 중앙 관요로 등장하기 전까지 사옹원에서 운영하던 중앙관요가 국초에 어떤 형태로 어디에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타난 전국 자기소·도기소 가운데 상품자기(최우수질)를 번조한 곳은 3곳(광주·상주·고령)뿐이었으며,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곳으로는 경기도 광주의 자기소 가운데 한곳이 상품자기를 번조한 곳이었다. 그러나 이곳이 중앙 관요라는 기록은 물론 없다.

그 뒤 국가에서 편찬한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이나 성현(成俔)의 ≪용재총화≫에 “해마다 사옹원 관원이 서리를 데리고 광주에 가서 어용지기(御用之器)를 감독 번조한다. ”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성종∼중종 연간에 광주의 자기소가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어 왕실에 필요한 자기를 만드는 중앙관요로서의 성격이 짙어지며, 다른 지방관요는 점차 중앙에 공상(貢上)하는 임무보다는 지방관아의 수요와 지방 수요에 응하는 가마로 변모하게 된 것 같다.

광주 관요는 점차 규모가 방대하여지고 이곳에서만 중앙의 어용(御用)·관수용(官需用) 도자기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중앙관요가 되었다. 광주관요는 다른 수공업들이 16세기경인 연산군·중종대를 전후하여 관공장(官工匠)들이 관영수공업체로부터 이탈하는 바람에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광주만은 왕실용 자기를 번조하는 곳으로 공장들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등, 우수한 공장을 확보할 수 있어서 오히려 팽창된 중앙관요로 남게 되었다. 더욱이, 임진왜란 이후 경향 각지의 가마들이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서 지방관요들이 재기하지 못하고 광주만이 제일 먼저 재건되고 확대되었을 것이다.

[분청사기(粉靑沙器)와 백자]

조선조 도자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분청사기 종류이고 또 하나는 백자 종류이다. 그 밖에 청자·흑유(黑釉:石間蘚)·철채·철유자기 등이 있으나, 그 수효는 훨씬 적었다. 청자·흑유는 어느 정도 쓰임새가 있었지만 그 밖의 것은 그리 사용되지 않았다. 세계 도자기의 발달을 크게 나누어 보면, 토기에서 도기·석기로, 도기·석기에서 청자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 발전되었다. 그 가운데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우리 나라에는 조선 전기에 분청사기라는 매우 특징 있고 공예적으로 우수한 도자기가 있어서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되는 과정을 한층 풍요롭고 여유 있게 하였다고 본다.

고려 말과 조선조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퇴화된 조질청자와 청자상감 기류를 생산하던 소규모의 가마들이 산재하였다. 특히, 이 중에서 상감청자 기류들은 점차 변모하여 문양(백토상감 등 각종의 백토화장 문양)이 기면 전체로 확산되고 유약이 투명한 담청색으로 변하였으며, 형태도 점차 변하여 새로운 모습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를 분청사기라 한다.

조선 초 15세기경까지는 이러한 분청사기 외에 수요는 적으나 조선조적으로 변모된 청자·청자상감과 고려백자의 여맥을 이은 백자가 있었는데, 이러한 종류들은 고려자기와 연관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때는 고려자기와는 다른 원·명 백자의 영향으로 치밀한 조선조 백자가 새롭게 번조되고 있었다.

이 두 계열, 즉 고려자기 계통의 도자기들과 새로운 조선조 자기 중에서 분청사기와 치밀한 조선조 백자가 16세기까지 조선왕조 도자기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분청사기와 백자는 각기 다른 특성과 외형을 지니고 있으나, 분청사기는 조질태토의 표면에 백토분장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특색이 나타나고, 백자는 처음부터 백토로 이루어지므로 백색을 지향하고 있어, 표면이 백색을 지향하는 공통성을 지니는데 이 두 가지 종류의 도자기만이 가장 세련되었다는 것은 고려와 조선조 도자 문화의 커다란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는 청자와 달리 표면과 내부가 모두 백색이다. 분청사기는 태토가 청자와 같이 회색이며(일부 회흑색의 거친 태토도 있다.), 유약은 색이 청자보다 훨씬 엷으나 질은 청자와 흡사하며, 담청색을 머금은 희백이거나 담청·담황갈색을 머금고 대체로 얇게 시유되어 투명한 백색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이러한 태토와 유약 사이에 상감과 인화·귀얄분장과 백토물에 담그는 담금분장 등 여러가지 백토분장으로 문양을 나타내는 방법이 있으며, 백토화장을 한 뒤에 다시 이를 어떻게 긁어내느냐에 따라 여러가지 종류의 문양이 탄생된다.

백토화장을 좀더 많이 하면서 특징을 살렸을 때가 그 발전의 절정기이며, 이후는 문양이 아닌 순수한 백토분장만으로 거의 전면을 채워 버린다. 다시 말하면, 분청사기의 발전은 백토분장이 더욱 많이 되어 표면색이 백색으로 이행되어가는 과정이었으며, 백자와 같이 표면이 희게 되었을 때는 백자와 같아서 더 이상 만들 필요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이미 16세기 후반에는 분청사기의 일부는 백자에 흡수되고 일부는 백자와 같은 질의 자기를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분청사기의 끝남은 반자질 분청사기에서 자질이며 치밀질인 백자로 발전 이행된 것에도 그 의의가 있다.

[임진왜란과 도자기]

임진왜란은 조선왕조 도자기 발전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여 전국적으로 가마가 파괴되고 많은 사기장인이 일본으로 끌려감으로써 이때부터 일본도 비로소 자기를 생산하게 되어 일본도자기 발전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현재 규슈(九州)와 야마구치현(山口縣)의 도자기가 일대 성관(盛觀)을 보이고 있는 것은 임진왜란시에 주로 서일본의 여러 다이묘(大名)들에 의하여 끌려간 수많은 조선인 중 특히 사기장(沙器匠)의 공헌임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조선인 사기장인들은 좋은 도자기(茶碗 등)를 가지고 싶어한느 당시 일본인들의 오랜 소망을 매우 열심히, 그리고 성의 있는 노력으로 이룰 수 있도록 하였다고 본다. 일본학자들이 임진왜란을 가리켜 도자기전쟁이니 다완전쟁이니 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에게 환경과 생존권은 매우 중요한 것이어서, 조선인 사기장(일본에서는 보통 陶工이라고 통칭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고문헌에 보통 사기장이라고 쓰고 있으며, 자기장이라 쓰는 경우도 있다. 사기라고 하면 상품에서 하품까지 여러 가지 질의 백자를 통칭하고 넓은 의미로는 분청사기와 백자를 통칭하기도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백자를 이르는 말이다. 또한, 한국도자기의 주류는 치밀질 백자이기 때문에 도공·도예라는 표현보다는 사기장·자예·도자예라고 하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들은 다이묘들의 극진한 대우와 열의에 보답하고, 또 자기네의 실력을 자신들이 처하여 있는 현실에서 십분 발휘하였다고 본다.

가라쓰(唐津)·다카토리(高取)·우에노(上野)·아리타(有田) 등지의 고요지(古窯址)와 여기서 채집한 파편을 보면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조선인 사기장들이 처음 제품을 완성하고 얼마 안 있어 기형·번조기법·문양 등이 당시 일본의 생활환경에 맞게 급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백자계통은 청화문양의 도입·색회(色繪)·청유(靑釉) 등으로 표면의 모습이 일변하여 잘못하면 중국 경덕진(景德鎭)의 영향이 처음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도자기는 가마와 파편을 모르고는 학문이 되지 않는다.

도자기를 규슈와 야마구치 지방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한 것은 조선인 사기장들인데, 특히 이삼평(李參平)이 아리타의 이즈미야마(泉山)에서 백토를 처음 발견하여 백자를 만들기 시작함으로써 일본인들은 그를 도조(陶祖)라고 하였다. 조선인 사기장들은 백자뿐 아니라 분청사기 등 여러 가지 도자기 만드는 기술을 각지에서 발휘하기 시작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기형과 문양 등이 일본의 생활환경에 맞게 변해갔지만, 굽과 기형·태질·유약 등 어느 일부에 17세기 전반까지 조선조 자기의 모습이 상당기간 남아 있음을 본다.

일본은 임진왜란으로 도자기 발전에 큰 획을 그었지만, 우리 나라는 임진왜란 후 광해군 연간에 궁중에서 연례(宴禮) 때 사용할 청화백자항아리가 없어서 전국에 수배하여 이를 구하고자 한 것을 보면, 상당한 기간 청화안료의 확보와 가마의 운영이 어려운 상태였던 듯하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조 도자기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백자와 함께 전기 도자기의 양대 주류였던 분청사기의 소멸이다. 전란으로 모든 가마와 도공이 다 같이 큰 타격을 받고도 백자는 다시 생산되었으나 분청사기는 다시 생산되지 않았다는 것은, 분청사기가 어차피 표면이 백토화장으로 백자와 같이 되어가기도 하였지만, 전란이 계기가 되어 불교적인 고려청자 문화의 그림자가 도자기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백자문화 일색으이 되었기 때문이다. 도자문화가 백자로 이행하는 것은 보다 견고하고 실용적이며 청결한 기명으로 발전되는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2. 시대 구분

조선조 도자사의 시대구분은 임진왜란 이전까지 가장 성행한 분청사기와 조선조 전기간 중에 성행한 백자를 중심으로 하여야 하나, 우리 나라 도자기의 발전이 청자에서 분청사기와 백자로 이행되고 다시 백자로 귀일되는 것이기 때문에, 백자를 중심으로 전기·중기·후기로 구분한다.

조선조 전기에는 16세기초까지 오히려 분청사기가 제일 성행하였으나 분청사기가 백자로 이행되는 하나의 단계였으므로 그 중심은 백자라고 하겠다. 전기 백자는 제작수법과 기형 등이 전란 후에도 일정기간 15, 16세기와 흡사한 상태이므로 17세기 전반, 즉 1649년까지를 전기로 구분한다. 전기의 백자는 형태가 안정감이 있고 원만하면서 그 선의 흐름이 유연하여 기품이 있다.

17세기 중엽 1650년부터 자기의 질과 기형, 굽의 정리, 굽받침 등에 변화를 가져오고 기형이 세장 준수하고 문양이 간결 단순화된 청화백자가 다시 생산되고 발전한 18세기 전반 1751년까지를 중기로 구분하며, 1752년부터 조선조 말까지를 후기로 구분한다.

3. 전기

전기는 1392년(태조 1)으로부터 1649년(인조 27)까지로 구분한다. 전기에는 분청사기와 백자가 주류였으며 15세기에는 분청사기가 더 많았으나 분청사기는 16세기 후반부터는 점차 백자화(白磁化)되어 줄어들기 시작하여 임진왜란 이전에 거의 사라져 가고 있었으며, 임진왜란 이후는 다시 만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분청사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임진왜란이 전기·중기를 구분할 수 있는 시대구분의 시점이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백자가 많아지기 시작하여 16세기 이후는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므로 백자를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한 것이다. 백자는 부분적으로 보면 15세기와 16세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임진왜란 이후 17세기는 조금 더 큰 차이를 보이지만, 큰 흐름으로 볼 때는 커다란 차이가 없으므로 인조연간까지를 전기로 본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과 인조 연간에 바로 여진족의 침입을 당하여 사상적으로 회의와 반성과 새로운 모색이 있었지만, 도자기의 경우 미처 새로운 경지를 모색하기에 어려운 시기였을 것이다.

[분청사기]

분청사기는 고려청자에서 발전하였기 때문에 기형도 고려청자에서 변형, 발전된 것이 많아 활달하고 익살스러운 중에 대담하지만 유려한 선의 흐름이 내재하고 있다. 문양은 상감·인화·박지·조화·철화·귀얄·담금분장의 7종류가 있으며, 상감과 인화와 박지와 조화 중 두 가지 또는 세 가지를 함께 시문하는 경우도 있다.

상감문은 조선조 초에 전국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것이나 힘차고 활력에 넘치며, 15세기 중엽 후반경의 면상감을 곁들인 작품은 신선하고 건실하다. 인화문도 전국적으로 분포되었으나 특히 영남지방에서 발달하여 시문이 치밀하고 조밀하여 백토와 담청색이 엮어내는 신선함이 있다.

그리고 박지문·조화문은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범한 공예의장의 극치를 이루면서 호남지방에서 발달하였으며, 철화문은 자유분방하고 활달 대담한 회화적 필선에 담긴 운치와 활력이 넘치는데, 충청도의 계룡산에 가마가 있다.

귀얄문〔刷毛目〕과 담금분장은 분청사기 후기의 현상이며 주로 호남지방에서 발달하고 영남지방의 서부 일대와 일부 충청도지방에서 보이고 있다. 분청사기는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점차 쇠퇴하여 백자로 흡수되기 시작하면서 16세기 말 임진왜란으로 그 맥이 끊기고 말았다.

[백자]

전기의 백자는 기형이 유연하며 너그러운 양감을 지니면서 높은 품격을 나타내고 있다. 색조는 상품의 경우 마치 함박눈이 내린 뒤 맑게 갠 새벽 햇살이 눈 위에 비친 듯 포근한 위에 청정한 담청이 깃들인 것과 같다. 전기 백자도 그 이후의 백자와 같이 아무 문양이 없는 청정무구한 순백자의 기품이 가장 드높은 아름다움이다.

백자에 코발트로 문양을 그린 청화백자가 세종 연간부터 수입되어 회회청(回回靑:페르시아지방에서 생산되어 중국을 통하여 수입되는 코발트 안료를 회회청 또는 회청이라 하였다. )으로 번조되기 시작하여 세조·예종 연간에는 토청(土靑:불순물이 많이 섞인 코발트 안료)도 개발되어 청화백자를 번조하였으나 그 수량은 극히 적었다. 15세기 전반기 청화백자의 문양은 주문양과 종속문양을 갖추었는데, 주문양은 명나라 초기의 문양과 유사하였으며, 종속문도 연판문계로 공예의장화된 도식적인 명나라 초기의 문양과 흡사하였다.

종속문양을 갖추기는 하였으나 주문양이 중국과 다른 회화적 문양으로 바뀌었으며, 다시 15세기 중엽부터는 점차 종속문이 사라지고 여백을 많이 살린 간결하고 소박한 회화적 주문양만이 있게 된다. 16세기는 이 상태가 지속되다가 변형 퇴보하였으며,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17세기초는 왜란으로 생산이 거의 중단상태에 있다가 전란 후 주로 부장용으로 재번조되지만 수량은 매우 적었다. 문양은 간결하나 종속문이 일부에 다시 나타나며 주문양도 사실에서 약간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백자에 산화철로 문양을 나타낸 백자철화문도 15세기 후반부터는 번조하기 시작하였으나, 15, 16세기는 생산량이 적으며 17세기 중엽에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간결하고 순수하며 대담하게 생략하고 재구성한 당시 도공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게 된다. 초화문과 죽문과 용문과 국화문 등이 간결하게 빚어내는 운치는 한국인만이 나타낼 수 있는 독특한 미의 경지이다.

백자에 흑상감한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약간 연질이며 미세한 유빙렬이 있고 유약이 벗겨져 나가는 고려백자 계열의 백자가 15세기까지 경상도 일원에서 번조되며 여기 흑상감한 예가 있다. 경기도 광주에서 생산하는 치밀한 초기 백자에 흑상감이 있는 것이 있다.

전자는 그 문양이 사실적이면서 예리하고 간결하게 표현되었으며 형태를 변형하여 재구성한 것도 있다. 후자도 사실문양을 기본으로 하고 이를 대담하게 생략하고 익살스럽게 재구성한 특이한 세련을 보인 것이 있으며 면상감과 유사한 수법이 많다. 산화동의 환원 발색인 백자진사〔銅畵〕문도 15세기에 번조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청화백자보다 더욱 희소하였을 것이며, 백자진사문은 전기의 실례가 아직까지는 발견되지 않았다.

[기타]

백자 이외 흑유가 있으며, 백자와 같은 가마에서 번조되는 것과 분청사기와 같이 번조되는 경우가 있다. 전기 말부터 중기 초에 걸쳐서는 철유와 철채도 극히 일부지역(옛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밤갓가마 등, 현 고양시)에서 생산하나 그 수량은 얼마 되지 않는다.

조선조 전기는 고려의 문화유산의 흐름이 상당기간 남아 있어 조선조 청자가 17세기 중엽인 전기 말 중기 초까지 번조된다. 조선조 초기 청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려말 퇴락한 재래의 청자이며, 또 하나는 새로운 백자가마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청자이다.

재래식 청자는 고려청자가 퇴락한 상태인 말기적 조질청자에서 약간 변형되고 문양이 활달해진 것이며, 새로운 청자는 백자가마에서 같이 생산되며 백자태토에 청자유약을 입혔고 기형도 백자와 거의 같고 오목새김 문양이 있는 것도 있다.

광주 중앙관요 중 전기 초기의 가마는 퇴촌면 우산리와 도마치, 중부면 번천리, 오전리, 초월면 무갑리 등에 있으며, 전기 중엽의 가마는 퇴촌면 정지리와 관음리 등에 있고, 전기 말엽의 가마는 광주읍 탄벌리, 도척면 상림리, 초월면 선동리 등에 있다.

4. 중기

중기는 효종 연간(1651)으로부터 영조 27년(1751)까지로,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정묘호란을 겪은 뒤 사상적으로는 회의와 반성과 새로운 모색을 하였으므로, 이러한 새로운 모색이 구체화될 수 있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백자의 질이 바뀌고 기형과 문양이 바뀌어 새로운 조형이 나타나서 큰 흐름으로 보아도 전기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백자의 발색이 전기보다 더 희고 청순한 느낌이며, 각이 지고 면이 있는 형태의 비례는 세장(細長)하여 준수하며, 문양은 단순 간결하여 발색과 형태와 함께 잘 조화되어 매우 특이한 운치를 자아낸다. 이러한 특징 있는 자기의 재창조는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다음 새로운 사상체계에서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백자]

중기의 백자는 전기의 너그러운 양감과 유연함에서 기형이 세장하게 되어 준수한 형태로 이행되며, 풍만한 항아리도 구연부와 몸체에서 끊고 맺는 맛을 풍기며 면을 대담하게 쳐서 각이 진 형태가 많다. 순백의 태토 위에 전기보다 푸른 맛이 줄어든 맑고 투명한 유약이 입혀져 설백자(雪白磁)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기에도 전기와 마찬가지로 아주 문양이 없는 순수한 백자에 대한 당시인의 관심과 사랑은 대단하여 어떻게 하면 백자에 더 좋은 백색을 낼 수 있을까 하는 노력이 꾸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따라서, 광주 중앙관요산 백자 중에서도 발색이 아름다운 갑번(匣燔)백자의 수요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더욱이, 17세기 후반경부터 상업자본의 발달은 이를 더 부채질하여 왕실에서만 사용하게 되어 있는 갑번의 상품 백자를 사치스럽고 권세와 돈이 있는 양반과 부호들이 앞을 다투어 구하려 하기 때문에 광주 분원 운영에 커다란 문제로까지 등장하게 된다.

따라서, 전기 후반부터 점차 상품·중품의 구분이 없어지기 시작하고, 중기부터는 상품·하품의 구분이 없어져 모두가 상품화(上品化)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백자질의 평준화라는 데 또 다른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청화백자는 수효는 적으나 간결하고 기품이 있는 난초계의 초화문이 기면의 국한된 일부에 시문되어 청정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우리 나라 청화백자는 15세기 중엽과 후반에 단순화된 회화적 구성의 주문양만이 있어 독특한 아름다움을 발산하였으나, 그때의 문양인 산수·인물·송·매·조(鳥)·죽문 등이 중국 명대 북종화계의 준법이나 수지법과 유사하였다. 18세기 전반기의 중기 청화백자는 문양이 간결·독특할 뿐 아니라, 주제나 표현수법 등이 전적으로 독창적인 것이어서 우리 나라 청화백자사상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이라고 하겠다.

철화문은 전기 말에 이어 중기 초까지 운룡문·초화문 등이 있었으나 점차 줄어들고 간결하게 도식화된 국화문계를 주로 한 문양이 등장하고, 중기 후반은 매우 희귀하나 철화운룡문·철화죽문 등이 있으며,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로 이어져서는 철화의 사용은 청화백자에 곁들여지는 경우가 있고 독자적으로 사용한 예는 매우 드물다.

백자진사문은 중기 초 무렵에 하나의 실례가 있을 뿐이며, 중기 후반에 만들어진 양각·청화·철화·동화를 같이 사용한 병이 있고, 중기 후반과 후기 전반에 걸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 예가 비교적 많다. 동정색(銅呈色)인 붉은색으로만 대나무·포도·송학·연화·국화문 등을 매우 자유분방한 필치로 대담하게 그린 각병·항아리 등이 있으며, 19세기에 들어오면 각이 진 항아리, 키가 큰 작은 항아리 등에도 치졸하고 간결한 진사문양이 있는 예가 많으며, 이들은 광주 관요산이 아닌 경기도 어느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 밖에 매우 드물지만 백자에 청화와 철화로 또는 철화와 진사로 문양을 나타낸 것이 있으며, 더욱 희귀하게는 백자에 청화와 철화와 진사로 문양을 나타낸 것도 있다. 백자에 물감으로 무늬를 나타낸 것 이외에 양인각(陽印刻)으로 문양을 나타낸 경우와 투각으로 문양을 나타낸 경우가 매우 희귀하지만 이 시대의 말기부터 발생하기 시작하여 후기에 가면 그 수효가 많아지고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기타]

청자는 중기초에 광주관요의 백자가마에서 수량은 적고 조질이지만 번조하였다. 청색보다는 갈색에 가까운 것으로 경질도 있지만 연질청자도 있는데 중기초의 청자가 우리 나라 최후의 청자였다. 석간주자기〔黑釉磁器〕·철채자기·철유자기 중 석간주(흑유)는 유약 속에 산화철분이 8% 내외 들어가 유약의 발색이 갈색 내지는 흑갈색인 것을 말한다. 철채자기는 백자태토로 그릇을 만들고 그릇 표면 전면에 철분을 바른 다음 그 위에 다시 백자 유약을 입혀 구워낸 것이며, 철유자기는 백자태토로 그릇을 만들고 그 위에 산화철분이 15% 이상 함유된 유약을 입혀 구워낸다.

철채의 경우는 표면이 쇠녹색〔鐵呈色〕이 나는데 겉이 반짝이고 윤이 나며, 철유는 표면이 쇠녹색인데 표면은 유리질 유약 성분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서 광택이 없다. 석간주는 철화를 지칭하기도 하나 보통 암갈색의 흑유가 입혀진 항아리나 병들을 석간주 항아리, 석간주 병이라고 한다. 각이 진 것이 대부분이고 중기 말 무렵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후기에 많이 사용된다. 철채와 철유자기도 중기 로부터 전기보다 다른 기형과 기법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후기에 독특한 세련을 보인다. 중기 전반의 광주관요는 실촌면 유사리와 신대리 등에 있고, 중기 후반의 가마는 도척면 궁평리와 퇴촌면 관음리, 실촌면 오향리, 남종면 금사리 등에 있었다.

5. 후기

후기는 1752년(영조 28)부터 19세기말의 조선조 말까지이다. 분원 자체는 1883년(고종 20)에 중앙관요로서의 임무를 끝내고 도서원(都署員)에 의해서 책임 운영되는 민영의 왕실용 사기 공급 도급업체로 전환하였으며 이러한 체계가 조선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일본의 사실상 침략과 일본 도자기의 대량 유입, 일본 자본에 의한 대규모 도자기공장의 국내 설립 등으로 분원은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도자기는 조선조 후기에는 종전에 없었던 매우 다종다양한 종류와 기형과 문양의 발전이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국면은 중기 후반부터 그 싹이 터서 후기에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중기는 종전에 없었던 각이 지거나 면을 이용한 도자기와 접시·대접 등의 평범한 기형에 높은 받침이 있는 제기(祭器)의 등장, 새로운 형태의 문방구류의 제작과 기타 일반 기형의 다양화, 전혀 새롭고 간결한 청화문양·철화문양 등의 시문으로 도자기에 다양하고 새롭고 신선한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새 바람이 후기인 분원기에 대담하게 확산 정착되고 세련되었다.

또한, 이때는 종전의 순수한 백자만을 드높이고 숭상하던 풍조에 비판을 가하여 오히려 이와 같은 백자 숭상이 국가의 검약을 위주로 하는 정책과 일치하여 다양한 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었다. 누구나 순수한 백자를 제일 좋아하였지만, 특히 분원 후기는 백자에 수없이 많은 종류의 청화문양이 종전에 비하면 훨씬 많아지고 종전에 없었던 여러 가지 청화채백자와 동화·동채백자도 등장하며 압형성형한 것도 다양하게 나온다. 기형의 종류와 그 다양함도 종전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되었더라면 우리 나라 도자기가 매우 다양한 내용의 새로운 모습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나 일제의 침략으로 불행하게도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19세기 말 무렵부터 주로 일본의 규슈지방에서 기계로 대량 생산되는 무미건조하고, 선의 변화가 전혀 없으나 두껍고 견고하며, 매끈하게 생긴 백자류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또한, 일본인들이 우리 나라에 대자본을 투입하여 대규모의 공장을 세워서 이와같은 기계생산 제품을 대량 시중에 내놓아 등요(登窯)에서 나무로 불을 때서 사기를 번조하고 물레를 발로 돌리며 손으로 빚는 애정 어린 창작품과 같던 우리 도자기들은 독깨그릇과 질그릇을 제외하고는 모두 없어지고 말았다.

[사옹원(司饔院)과 분원(分院:分廚院·廚院)]

조선조의 왕실용 사기(沙器)번조는 서울의 사옹원에서 관장하였으나, 경기도 광주가 중앙관요로 되면서 광주 현지에 사옹원의 분원을 두어 제반실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처음은 사옹원에서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사기번조를 감독하고 완성된 것을 왕실로 가지고 갔다.

그러나 16세기부터는 분원이 설치되어 분원에서 현지의 일을 전담하게 하였으나 그 확실한 설치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1570년(선조 3) 광주에 사옹분감관(司饔分監官)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승정원일기≫ 인조 3년(1625)조에 이미 분원이 광주에 설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후부터는 분원에 관한 풍부한 기록이 있다.

광주 일대 중에서도 분원의 입지적 조건은 서울에서 가깝고 수목이 풍부하며, 양질의 백토가 인근에서 산출되거나 다른 지방에서 산출되는 백토 등 제반 자료를 운반하여오는 데 수운(당시는 육로운송이 발달하지 못하였다.)이 편리한 곳이어야 하였다.

그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갖추었더라도 가마에서 가장 큰 문제는 대량으로 필요한 땔감의 조달이었다. 광주일대에 설치하였던 분원은 시목(柴木:燔木) 조달을 위하여 수목이 울창한 곳을 택하여 10년에 한 번씩 광주 내에서 번소를 이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처음부터 번목의 조달과 수운이 좀더 편리한 곳을 택하여 지금의 광주군 남종면 분원리로 가마를 옮겼기 때문에 이후는 조선조 말까지 이곳에서만 주로 강〔漢江〕상 무목(貿木:뗏목으로 내려오는 것)에서 수세(收稅)한 세목(稅木)과 무용(貿用)한 번목(사들인 나무)으로 질서정연한 직제와 분업화된 공정 등으로 계속 한곳에서 도자기를 대규모로 번조하였다.

따라서, 중기까지는 분원이 대체로 10년에 한 번씩 이동 설치되어 분원이라는 곳이 한곳에 머무르지 않아서 지역 명칭도 고정되지 않았으나, 1752년(영조 28) 이후 계속 한 곳에서 머무르게 되어 그곳의 명칭이 분원리가 되었으며, 광주군 남종면 지금의 분원리를 가리키게 되었고, 분원사기하면 후기의 사기를 지칭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광주는 전기·중기·후기에 걸쳐 조선왕조 도자기의 중심지역으로서의 구실을 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수백의 가마를 인도해 나가게 된 것이다.

[백자]

백자에 대한 높은 기호는 전기로부터 중기를 거쳐 후기까지 변함이 없으나, 후기에 오면 일부 지식인 사이에 국가가 시책으로 사치풍조를 엄금하고 검약한 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국령으로 규정한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이를 통렬하게 비판한 예도 있다.

그러나 국가에서 금령(禁令)으로 문양이 있는 화사한 자기를 만들지 못하게 하고 갑번(匣燔)은 왕실 이외는 못쓰게 하였으나, 화사한 도자기보다는 좋은 흰색인 갑번의 수요가 계속 늘어서 가장 아름다운 흰색을 선호하는 풍조는 이때까지 거의 변함이 없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전기 이래도 청화백자의 선호는 순백자 다음으로 높았으며, 후기에 와서는 청화백자의 생산이 백자에 비하면 얼마 되지 않지만, 전기·중기에 비하면 큰 폭으로 늘어났음을 알 수 있고, 기형과 문양이 매우 다양다종해져서 자기에 대한 선호도도 어느 정도 바뀌고 있고, 엄한 금령이 융통성 있게 운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후기 백자는 그 특색이 18세기 말 무렵에 확립되었으며, 그 질은 전기·중기보다 더 치밀하다. 순백의 태토에 담청을 머금은 유약이 입혀져 중기보다는 물론이고 전기보다도 더 푸른 빛을 발산하는 백자로, 표면발색은 청백자와 비슷하다. 대체로, 기형은 풍만한 중에 단정하고 구연부를 제외하고는 기벽이 두껍고 굽의 지름이 넓어 안정감이 있다.

일상생활에 널리 쓰이는 기물 이외에 문방구와 제기·화장용기 등 특수한 용도의 기물들은 중기 후반부터 독특하게 세련되기 시작하여 이 시기에 그 특색이 나타나며, 그 종류와 각기의 기형도 매우 다양하며 대량 생산되었는데, 단정 단아하면서 기품있고, 그러면서도 친근감 있는 아름다운 것이었다. 순백자 자체만으로도 각이 지거나 면을 만드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형태를 다양하게 한 것이 많으며, 다양한 문양의 양인각과 투각(透刻)이 많아졌으며 간혹 음각문양도 있다.

청화백자는 매우 다양하여 청화에 철화 또는 진사를 곁들인 것, 세 가지 안료를 사용한 것 등이 있다. 문양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그 종류가 많으며 여러 가지 특징을 보인다. 화원의 그림과 분원 장인의 그림, 문인의 그림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주문양만 있는 것, 여기 종속문양을 갖춘 것과 회화적인 것, 이를 도식화한 것 등이 있으며, 그 종류는 산수·인물·초목·일월·성신·화조·초충 등 모든 삼라만상이 문양의 대상이 된다.

또한, 이를 대담하게 생략하거나 변형 재구성하여 전·중기에 비하면 훨씬 대담하게 변형된 회화적이면서 공예의장의 특질을 나타내는 유머와 위트에 가득찬 문양이 많다. 청화로 그린 것 이외에 청화채(靑華彩)도 있으며 청화채음각문양이 말기에 많이 등장한다.

진사〔銅畵〕문양은 경기도지방 민요에서 성황을 보이고 있는데, 후반에 들어오면서 문양이 공예의장화하였으나 치졸하고 단순화되었다. 이보다는 광주관요에서 진사의 사용이 늘어나서 청화와 철화를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진사채에 양인각을 곁들이거나 진사채양인각에 청화나 철화를 곁들이고 형태도 특이하게 한 것이 있어 단정단아한 중에 화사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철화문은 단독으로 사용한 예는 아주 드물고 청화·진사와 같이 사용한 예가 있으며, 철채 수효는 적으나 설채를 귀얄로 하여 활달하고 힘찬 멋을 풍기며, 철유도 청화와 같이 사용되기도 하면서 단정한 모습을 보였다.

흑유는 색이 진한 갈색이거나 암갈색이며, 지방가마에서 각이 진 항아리가 특히 많이 만들어졌으며, 거칠게 음각문양을 한 예가 있다. 이와 같이, 청화·진사·철화와 철채·철유 등이 매우 다양하게 이용되었으며, 여기에 양인각과 때로 음각까지 곁들여 사용하기도 하고, 투각도 이용되었다.

조선 왕조 도자기는 전기에 분청사기와 백자로 대표되며, 중기와 후기는 백자만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자기의 자취인 유려한 선의 흐름이 외형에 소탈하게 남아 있으나, 그 기형은 풍만 대담하고 익살스러우며, 문양은 새로운 사실적 문양을 대담하게 생략 변형하고 단순화시켜 재구성하여 표현하는 깊고 드높은 조형적 역량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결국 표면의 색이 백자와 같이 되면서 백자로 흡수되었다.

한국의 도자기는 자질(磁質)을 위주로 하여 그 질이 정치(精緻)하고 그 모습은 건강하고 발랄하다. 언제나 자연과 같이 깊게 호흡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기능미를 위주로 하였으므로 번잡한 기교와 다양한 색채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시간과 노력과 경비를 들여가면서 단순한 색조와 기형, 대범한 조형 등에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정양모>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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