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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05 (금) 23:42
분 류 문화사
ㆍ조회: 9538      
[미술] 우리 나라 불상 양식의 변천 (민족)
불상 (우리 나라 불상 양식의 변천)

앞의 불상에서 계속.

[삼국 시대]

불교가 처음 우리 나라에 전해진 것은 삼국시대이다. 고구려의 소수림왕 2년(372년)에 중국의 오호십육국의 하나인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이 승려 순도(順道)와 불상·경문(經文)을 보냄으로써 비롯되었다. 이어서 백제에도 384년(침류왕 1년)에 중국 동진(東晉)에서 마라난타(摩羅難陀)라는 승려에 의하여 불교가 전래되었다.

새로운 종교의 전파와 함께 전해졌을 불상은 절에 안치되거나 승려들에 의하여 예배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곧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며 초기에는 대체로 중국식 불상 양식을 모방하거나 그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서울 근교 뚝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은 현존하는 초기의 불상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중국의 북위 초인 5세기 초나 중엽경의 불상 양식과 유사하여 중국의 전래품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이 뚝섬상과 같이 네모난 대좌 위에 두 손을 앞에 모은 선정인(禪定印)의 모습을 한 불좌상은 우리 나라에서 제작된 불상 중 가장 초기의 형식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옛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 원오리(元五里) 절터에서 나온 소조(塑造) 불좌상이나, 옛 백제의 도읍인 부여의 규암면 신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좌상 그리고 역시 부여 군수리사지(軍守里寺址)에서 출토된 납석제(蠟石製) 불좌상들은 대체로 6세기의 삼국시대 초기 불상을 대표하는 예들이다. 앞서 언급된 뚝섬 불상 형식을 계승하거나 혹은 약간 발전시킨 것이다. 이들 불상들의 양식적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며 다시 서역을 거슬러서 인도의 불상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우리 나라에 불교가 4세기 말에 전래는 되었으나 현존하는 삼국의 불상 중에서 6세기 이전으로 올라간다고 보이는 확실한 예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명문이 있는 불상 중에는 “연가7년(延嘉七年) 기미년의 고(구)려국……”의 기록이 있는 금동불입상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연가’라는 연호는 역사 기록상에 발견되지는 않으나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된다. 또한 ‘기미년’이라는 간지(干支)는 불상의 양식에서 그 연대를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이 상의 가늘고 긴 얼굴형이나 법의의 주름이 양옆으로 뻗쳐 약간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등이 북위시대의 6세기 초 불상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서 대체로 539년에 해당되는 기미년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이 상은 현존하는 삼국시대 불상 중에 명문으로써 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또한 출토지는 경상남도 의령이었으나 명문 내용으로 고구려의 상임이 밝혀진 중요한 예이다. 신라에서도 불교에 관한 기록이 이미 5세기 초부터 나타나나 528년(법흥왕 15년)에 불교가 공인된 이후 기록상에 나타나는 최초의 절은 흥륜사(興輪寺)로서 544년에 완성되었다. 당시 이 절에는 예배 대상으로서 불상이 안치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절터만 겨우 알 수 있으며 불상의 자취는 흔적조차 없어졌다.

그 뒤 황룡사(皇龍寺)라는 거대한 사찰이 지어져서 566년에 완성되었다. 지금도 이 절터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듯이 인도에서 보내진 모형에 따라 주조되었다는 장륙(丈六)의 금동삼존불상의 커다란 석조대좌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러한 유적을 통하여 이미 6세기 후반에는 신라에서도 대규모의 불상 조성이 이루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6세기 후반의 삼국시대의 불상 중에는 삼존 형식이 많으며 그중에는 명문이 있는 작품도 여럿 포함되고 있다. 즉,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의 금동계미명삼존불(金銅癸未銘三尊佛, 국보 제72호)과 김동현(金東鉉) 소장의 황해도 곡산(谷山) 출토 금동신묘명삼존불(金銅辛卯銘三尊佛, 국보 제85호)을 들 수 있다.

그 표현 양식이 중국의 북위 말기 및 동위시대의 조각 양식을 반영하고 있어 각기 564년 및 571년에 해당되는 일광삼존상(一光三尊像)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불·보살상의 세부 표현이나 광배의 화염문 혹은 연화대좌의 표현 양식에서 보면 중국의 상들보다 좀더 단순화되었다. 그리고 기법 면에서도 세부 묘사가 생략되고 투박한 감이 있다. 이러한 요소는 우리 나라 불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운 조형성의 한 특징이 아닌가 생각된다.

삼국시대의 석조 불상으로서 환조(丸彫 : 한 덩어리의 재료에서 물체의 모양 전부를 조각해 내는 일)로 된 예는 별로 많지 않으며, 대부분 암벽에 부조(浮彫 : 돋을새김)로 표현된 조각이 많다. 그중에서도 옛 백제 지역인 충청남도 태안군 태안읍의 태안마애삼존불(泰安磨崖三尊佛, 보물 제432호)은 보살상을 중심으로 양쪽에 불상이 표현된 특이한 형태이다.

서산시 운산면의 서산마애삼존불상(瑞山磨崖三尊佛像, 국보 제84호)은 조각 수법이 우수할 뿐 아니라 얼굴 표정에 보이는 밝고 티 없이 웃는 자비의 미소는 ‘백제의 미소’라 불릴 만큼 특징적이다. 이 서산마애불은 불상의 왼편에 반가사유보살상(半跏思惟菩薩像)을, 오른편에는 보주(寶珠)를 두 손에 마주 잡은 보살입상을 협시로 거느린 삼존불로서 두 보살상 모두 삼국시대에 유행했던 보살상 형식이다.

또한 삼존불 형식으로서 보살입상과 반가사유상을 양협시로 거느린 도상(圖像) 역시 특이한 배치로서 한국적인 수용 현상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보주를 양쪽 손에 마주 들고 있는 오른쪽의 보살협시상과 같은 형식은 백제 지역에서 많이 나타난다. 중국에서도 북조의 북위시대 불상보다는 오히려 남조 지역 출토의 불비상(佛碑像)에서 발견되고 있어 백제와 중국 남조의 문화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면은 이미 백제의 전축분(塼築墳)이나 연화문전(蓮花文塼)의 표현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불교 미술과도 관련이 깊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백제의 불상은 대체로 부드럽고 온화한 조형성으로 특징지어지며 일본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보주를 든 보살상 형식이 일본 초기 불상 조각으로 대표적인 호류사(法隆寺)의 몽전관음상(夢殿觀音像)이나 금동48체불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 외에도 기록상으로나 유물상으로 많은 연관성이 발견된다.

이러한 현상은 백제의 성왕 때인 552년에 불교를 전해 준 이래 많은 불상과 경전이 보내어지고, 승려의 왕복뿐만 아니라 많은 공장(工匠)과 와공(瓦工)·화공(畵工) 등이 건너가 일본의 아스카시대(飛鳥時代) 불교 문화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일본의 호류사에 있는 백제관음상(百濟觀音像)은 같은 절에 있는 몽전관음상에 비하여 매우 이국적인 특색을 보여 준다. 이 점이 바로 한국적인, 아마도 백제적인 특징으로 지목될 수 있다.

삼국 시대의 불상 중에는 특히 반가사유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반가사유상이란 반가좌(半跏坐) 형태로 앉아 오른손을 뺨에 살짝 대고 사색하는 자세의 보살상을 일컫는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흔히 미륵보살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시초는 싯타르타 태자가 출가하여 중생 구제의 큰 뜻을 품고 사색하는 태자사유상에서 점차 발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한 서산마애삼존불의 좌측 협시는 백제의 반가상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경주 근교의 단석산 신선사에 있는 마애불상군(磨崖佛像群) 중의 반가사유보살상은 신라 초기에 속하는 중요한 예이다. 고구려시대의 반가사유보살상으로는 평양의 평천리 출토 금동반가보살상이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2구의 거대한 금동반가사유보살상(국보 제78호 및 제83호)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금동불 20여 구가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경상북도 봉화 출토의 석조반가사유보살상은 현재 하반부만 남아 있는데도 크기가 1.6m이다. 만약 완전하였더라면 현존하는 반가사유상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석조상으로, 그 형태는 국보 제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같은 양식 계보임을 알 수 있다.

반가사유보살상의 제작 역시 일본 불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국보 제83호의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는 거의 같은 형태의 목조반가사유상이 일본의 고류사(廣隆寺)에 있어 흥미롭다. 이 상은 우리 나라에 많은 적송(赤松)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절의 창건 연혁이나 불교 교류의 기록으로 보아 우리 나라, 아마도 신라에서 가져간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시되던 화랑 제도는 불교의 미륵 신앙과 관련지어져 불교사상적·역사적인 면에서 반가사유보살상의 신앙 및 그 의미에 한국적인 독특한 수용태세를 찾아볼 수 있다. 삼국 시대의 말기, 즉 7세기 중엽에 가까워지면 불상의 표현에는 얼굴이나 불신의 묘사에 입체감이 강조되고 법의 표현도 자연스러워진다. 그리고 상의 전면뿐 아니라 측면이나 뒷면의 묘사에도 관심을 두는 그야말로 입체 조각으로서의 형태를 갖추게 된다.

7세기의 석조상으로서는 경주배리석불입상(慶州拜里石佛立像, 보물 제63호)이나 경주남산삼화령석조삼존불상(慶州南山三花嶺石造三尊佛像)·경주서악리마애석불상(慶州西岳里磨崖石佛像, 보물 제62호)을 비롯하여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慶州南山佛谷石佛坐像, 보물 제198호)·경주인왕동석불좌상(慶州仁旺洞石佛坐像) 등이 이 시대 양식을 잘 전하고 있다.

현존하는 7세기의 석조 불상들은 대체로 신라 지역에 많이 남아 있어 비록 삼국 중 불교가 뒤늦게 공인되긴 하였으나 그 조상 활동은 7세기 전반경부터 활발히 성행한 것을 알 수 있다. 7세기에 제작된 우수한 금동불상 중에 특히 관음상이 많이 전하고 있다. 백제 규암리사지에서 나온 2구의 금동보살입상을 비롯하여 공주 근교인 의당면 송정리 출토의 금동관음보살입상, 삼양동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7호) 그리고 경상북도 선산(지금의 구미) 출토의 관음보살입상 2구(국보 제183호 및 제184호) 등은 모두 이 시대를 대표하는 우수한 상들이다. 보관 중앙에 아미타불이 있어 관음상임을 도상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당시의 관음 신앙의 유행을 아울러 추측할 수 있다.

이들 금동관음보살상에서 보듯이 7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보살상 표현에서는 신체의 비례가 균형이 잡히고 세부 묘사가 구체적이다. 그리고 서 있는 자세와 늘어진 천의의 자연스러운 표현은 조형적으로 균형 잡힌 불상으로 발전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규암리 출토의 보살상과 약간 시대가 늦은 선산 출토의 보살상과 비교하여 보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조형상의 변화는 석조상보다는 소규모의 금동상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며 주조 기술적인 면에서도 많은 진전을 볼 수 있다. 삼국시대 말기의 불·보살상의 표현에 있어서는 중국의 수나라에서 당나라 초기에 이르는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불상 표현 원칙에 있어서도 점차로 신체의 균형 잡힌 비례감, 날씬한 몸매에 조화되는 영락 장식 그리고 정면뿐 아니라 측면·뒷면의 입체적인 표현에 더욱 관심을 둠으로써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불·보살상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으로서 이상적 형태의 예배 대상을 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중국에서는 당나라 때 두드러지고 우리 나라에서는 통일 신라 시대의 불상 표현에서 현저히 나타나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

통일 신라 시대는 우리 나라 불교 문화의 전성기라 부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숭상되어 오던 불교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정신적인 기틀이 되었다. 그리고 국가적인 차원의 사원 건축이나 불상 조성 등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통일신라의 불상 조성의 배경에는 우선 토착적인 고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이 기반이 되었으며 그 위에 백제와 고구려와의 통합에 따른 새로운 자극과 변화가 불교 미술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통일을 전후하여 빈번해진 당과의 정치적·문화적 교류와 승려들의 대당 유학(對唐留學)에 따라 새로운 불교 경전의 전래와 교리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져서 율종(律宗)·화엄종(華嚴宗)·법상종(法相宗) 등의 종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불상의 종류나 표현도 다양하게 발전되었다. 나아가서 중국을 넘어 서역과 인도로 이어지는 불교 문화의 국제적인 요소 또한 신라의 불교 미술에도 반영되어 신라의 불교 미술은 다양한 외래 양식의 수용과 새로운 변형 그리고 토착적인 요소가 합하여져 독특한 통일 신라의 불상 양식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현존하는 통일 신라의 불상들 중에는 역사 기록과 부합되거나, 명문에 의하여 연대를 알 수 있는 예가 많은 편이다. 따라서 불상 양식의 시대 구분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대체로 통일 초부터 670년대까지는 보수적 경향이 짙은 전대의 양식 계승 및 새로운 요소의 모색기, 680년 이후 8세기 후반 초인 석굴암의 완성기(751∼774년)까지는 중국의 당 양식의 수용 및 신라의 이상적인 불상형의 완성기, 8세기 말 이후로는 불상 양식의 토착화와 쇠퇴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대체로 통일 신라 시대의 불상 표현의 형식을 보면 입상에는 여원인과 시무외인의 통인(通印)을 보여 주는 불상이 많고 약함(藥函)을 든 경우도 많이 눈에 뜨인다. 법의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경주구황리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과 같이 법의가 양어깨를 덮은 통견으로, 주름이 가슴 앞으로 여러 겹의 U자형의 곡선을 형성하면서 늘어져 있다.

또 다른 형식은 경상북도 선산에서 출토된 금동불입상이나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石造阿彌陀佛立像, 국보 제82호)과 같이 통견의 법의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내려오다가 허리 밑에서 Y자형으로 갈라져서 각기 양다리 위에서 U자형의 주름을 형성하면서 좌우 대칭을 이루는 형식으로 특징지어진다.

이들 두 가지 불입상의 직접적인 모형은 중국에서 찾을 수 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역이나 인도에서 원류를 발견할 수 있을 만큼 불상 양식은 넓은 지역과 긴 시간에 걸쳐 발전하며 변천하였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이 두 가지 형식이 주류를 이룰 만큼 대다수를 차지하며, 상의를 입는 방식에 따라 각기 몇 종류의 유형을 형성하여 토착적인 양식으로 발전하였다.

통일 신라 시대의 불좌상 형식은 대부분 결가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수인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한 금동삼존판불(金銅三尊板佛)과 같이 설법인을 하거나 경주구황리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같이 시무외인과 촉지인이 결합된 손 모양을 한 예도 있다.

7세기 말부터 나타나서 유행하기 시작한 불상 중에는 촉지인의 예가 많이 보인다. 경상북도 군위 팔공산(八公山)에 있는 군위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국보 제109호)의 본존불이나 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慶州南山七佛庵磨崖石佛, 보물 제200호)의 본존상 그리고 석굴암의 본존불상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원래 촉지인은 싯다르타가 해탈하여 성도한 순간을 상징하는 수인이다. 원칙적으로는 석가모니불을 의미하나 후대에 와서는 널리 수용되어 아미타불이나 약사불에서도 표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통일 신라 시대에는 석굴암의 조성 이후의 불좌상에 이 촉지인이 널리 유행하였다. 대체로 촉지인의 불상에는 석굴암의 본존과 같이 편단 우견의 상이 많다. 그러나 군위삼존불이나 경주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과 같이 통견의 법의가 약간씩 변형된 형태의 상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통일 신라 시대의 보살상은 삼국 시대 말기의 양식에서 좀더 화려한 영락 장식을 하고 몸의 자세도 정면성 위주에서 탈피하고 있다. 허리를 약간 비틀면서 한쪽 다리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서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동적인 자세로 바뀐다. 이러한 변화는 경주 안압지 출토의 삼존판불의 협시보살이나 경주 남산 칠불암의 협시에서 현저히 보인다. 또한 천의도 가슴에서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걸쳐 있고 영락 장식도 화려하게 변한다. 719년명이 있는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국보 제81호)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신라의 보살상 표현은 전체적인 양식의 흐름에서 보면 중국 당의 7세기 말과 8세기 초의 보살상 표현과 공통된 요소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넓적하고 부드러운 얼굴 모습이나 약간 투박한 감이 있는 조형성은 역시 한국적인 특성이 반영되었다고 하겠다. 이와 같이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양식은 형식이나 도상적인 면에서는 국제적인 흐름과 연관이 되고 그 표현이나 기법에서는 한국적인 요소가 가미되어 신라 양식이 형성되어 갔다.

예를 들어 경주 안압지 출토의 삼존판불과 같은 상은 도상적으로나 양식적으로 당의 불상 양식의 영향을 받고 있다. 특히 돈황 천불동의 벽화와도 비교되며 또 한편으로는 일본의 호류사 소장의 아미타 압출불좌상(押出佛坐像) 혹은 금당벽화(金堂壁畵)의 아미타정토변(阿彌陀淨土變)과도 비교되며 한편 신라인 특유의 불안(佛顔)과 조각 기법을 보여 주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 불상 조각 중 가장 우수하며 또한 대표적인 예는 경주 토함산 위에 위치한 석굴암의 조상들이라 하겠다. 마치 불국토를 재현하듯 본존과 보살·천(天)·나한 등 여러 권속들이 모두 모여 있으며 여러 개의 다듬어진 돌로 쌓아서 축조한 궁륭 천정의 석굴 사원은 중국에서도 그 유례가 드물다. 특히 개개의 조상 표현의 조각 기술의 세련도나 상의 알맞은 비례, 부드러운 조형성 위에 불상 전체에 흐르는 숭고한 종교성이 조화되어 종교 예술로서의 아름다움과 신성함이 돋보인다. 1995년 말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보존해야 하는 세계 문화 유산의 하나로 유네스코에 의해 지정되었다.

석굴암이 조성된 신라의 경덕왕 때는 불교 문화의 전성기로서 ≪삼국유사≫의 기록에 보이는 분황사의 거대한 금동불이나 봉덕사의 동종(銅鐘) 등이 만들어지는 등 국가 사업으로서 이루어지는 대규모의 불사(佛事)가 가장 활발하였던 때로 생각된다.

통일 신라 시대의 후기, 즉 8세기 말에서 9세기에 이르면 불상 조성에 있어서는 금동상이 많이 줄어드는 반면 석조상이나 철불상이 많이 등장한다. 특히 이 시기에는 지권인(智拳印)을 한 비로자나불좌상(毘盧遮那佛坐像)이 많이 만들어진다. 9세기 중엽경의 명문이 있는 철원의 도피안사(到彼岸寺)나 장흥 보림사(寶林寺)의 철조비로자나불좌상 등은 신라 말기 불상 양식을 대표하는 중요한 예이다.

이 불상은 원래 밀교 종파에 있어 금강계(金剛界)의 법신불로 숭상되는 보살형 대일여래상(大日如來像)과 같은 성격이다. 그러나 통일신라 후기에는 이와 관련되는 다른 밀교 조상은 별로 등장하지 않고 지권인의 비로자나불만이 선종 사찰(禪宗寺刹)에 많이 봉안되어 있다. 이는 통일신라 후기의 선종계의 불교가 화엄 사상 교리의 영향을 받아 화엄의 주존인 비로자나불을 예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및 조선 시대]

고려 시대에는 대체로 통일 신라 말기에서부터 유행하던 촉지인의 불좌상이 계속 조성되었다. 그리고 우견 편단이나 통견의 법의는 약간씩의 변형을 이루면서 고려적인 독특한 불상 양식을 이루어 나갔다. 대체로 고려시대 전기에는 지방에 따라 몇 가지의 특징 있는 불상군이 제작되었다. 그중에는 강원도 강릉 주변의 월정사·한송사지·신복사지의 석조나 대리석 보살상을 들 수 있다. 이 상들은 신라 말기의 불상 양식을 이어 주는 것 같으면서도 통통하고 풍만한 조형성은 중국의 송이나 요시대의 불상 양식이 어느 정도 반영된 듯하다.

또한 다른 한 유형은 강원도 원주나 경기도 광주, 충청남도 충주 지역에서 출토된 거대한 철불들로 신라 말기의 양식이 부분적으로 이어지면서도 지방색이 강한 특이한 불상 양식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은 고려 초 이 지역에서 활약하던 호족들의 적극적인 불사의 후원과도 관련지을 수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유형은 충청남도의 석조불·보살상, 전라북도 지역에 많이 보이는 기둥같이 큰 몸체에 관을 쓴 관촉사석조미륵보살입상(灌燭寺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8호)·대조사석조미륵보살입상(大鳥寺石造彌勒菩薩立像, 보물 제218호)·개태사지석불입상(開泰寺址石佛立像, 보물 제219호)이다. 이들은 토착적인 혹은 지방색이 강한 불상 형태가 많이 보인다.

민간 신앙적인 면과도 밀착되어 신앙된 것으로 생각된다. 거대한 불상의 조성은 또한 고려 왕실의 지방적 기반을 강화하는 의미도 반영되었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불상 조성의 의욕은 크나 기술면에서 뒤떨어진 조형 감각을 보여 주고 있다.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 황실과의 관계에 따라 라마 불교가 전해져서 현존하는 불상 중에는 티베트·네팔 계통의 이국적인 요소가 보이는 특이한 불상 양식이 혼재하고는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고려 초기에 형성된 조각 양식이 좀더 큰 영향력을 지니면서 부드럽고 온화한 조상 양식으로 발전해 나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장곡사금동약사여래좌상(長谷寺金銅藥師如來坐像, 보물 제337호)과 문수사금동아미타여래좌상(文殊寺金銅阿彌陀如來坐像)을 들 수 있다. 더욱이, 이 두 상은 1346년에 조성되었음을 알려 주는 명문이 있어 고려 후기 불교 조각의 편년 설정에도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되는 예이다. 또한 고려 후기에 만들어진 금동불감(金銅佛龕) 몇 예가 전해지고 있다. 이는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소형의 전각(殿閣) 내부 벽에 불상을 부조(浮彫)하고 또 금동불을 안치하여 개인의 원불(願佛)로서 혹은 여행하면서 예배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억불 숭유(抑佛崇儒)의 정책에 따라 조선시대의 불교는 중앙 집권층의 관심에서 떠나 쇠퇴의 길을 걷게 되며 고려 말까지 형성된 조각 양식의 답습과 형식화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후 수용, 발전되어오던 불교 조상은 표현의 창의성과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성이 감퇴하고 실제 제작 기술에서도 퇴보를 가져왔다.

조선 시대의 불상은 아직 연구 조사의 단계로서 그 체계를 잡기가 매우 어려우나 대체로 임진왜란을 계기로 전후기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기는 아직도 고려적인 요소가 남아 있는 반면 후기는 불신의 비례나 조각 수법에서 형식에 흐르고 답습적이어서 불상에서 풍기는 정신성이 결여되었다. 그리고 중국 등지에서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 않는 독자적인 형태로 발전되었다. 또한 제작 과정의 편의를 위하여서 그 형태가 거의 비슷한 개성이 없는 불상으로 표현되었다.

조선 시대 전기의 상 중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목조아미타불좌상에는 성화 18년(1482년)명의 복장(腹藏) 기록이 있는 우수한 상이 있다. 또 경기도 수종사탑(水鍾寺塔)에서 나온 불감(佛龕) 및 금동불좌상에는 복장 주서(腹藏朱書)로 1493년 명에 해당되는 기록이 있어 왕실의 빈(嬪)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기림사건칠보살좌상(祇林寺乾漆菩薩坐像, 보물 제415호) 역시 대좌에 1501년 명이 있다.

후기에 해당되는 불상 중에는 역시 수종사의 탑에서 나온 20여 구의 소형 금동불상들 중에 1628년에 봉안된 상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무량사(無量寺) 극락전의 아미타삼존불좌상의 복장에도 1633년에 해당되는 명문이 있어 17세기 전반기 불상 양식의 대체적인 흐름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양식적 특징은 대부분 불신의 비례에서 머리 부분이 크고 신체의 묘사도 형식적이다. 그리고 조각 기법도 뒤떨어져 투박한 조형성을 보여 주고 있다.

이밖에 우수한 목각불탱(木刻佛幀)도 몇 예가 남아 있어 불전(佛殿)의 불화 대신 벽에 걸고 예배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남장사보광전목각탱(南長寺普光殿木刻幀, 보물 제922호)과 남장사관음선원목각탱(南長寺觀音禪院木刻幀, 보물 제923호)·대승사목각탱(大乘寺木刻幀, 보물 제575호)을 들 수 있다. 용문사목각탱(龍門寺木刻幀, 1682년)과 실상사약수암목조탱화(實相寺藥水庵木彫幀畵, 1782년, 보물 제421호)는 제작 연대가 밝혀진 예로서 주목된다.

조선 시대는 불상의 양식이 전대에 비하여 조형적인 아름다움, 종교적 정신성의 표현 등이 훨씬 뒤떨어져 예술성에서는 퇴보되었다. 하지만 그 나름대로 특징 있는 조선 시대의 불상 양식이 형성되어서 현대에까지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韓國佛像의 硏究(黃壽永, 三和出版社, 1973), 韓國의 佛像(秦弘燮, 一志社, 1976), 韓國彫刻史(文明大, 悅話堂, 1980), 佛像硏究(崔完秀, 知識産業社, 1984), 韓國古代佛敎彫刻史硏究(金理那, 一潮閣, 1989), 高麗·朝鮮時代의 彫刻(文明大, 韓國美術史의 現況, 一志社, 1992).

<김리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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