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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6 (화) 09:12
분 류 문화사
ㆍ조회: 8939      
[미술] 고구려 고분 (민족)
고구려고분(高句麗古墳)

관련 항목 : 고분벽화, 벽화

고구려 시대 그 영역 내에서 만들어진 고분.

[분포]

고구려 고분은 고구려의 모든 지역에 걸쳐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압록강 유역과 대동강 유역에 밀집되어 있다. 이것은 고구려인들이 수도를 중심으로 고분을 축조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도읍지로 알려진 환인(桓仁)지방과 다음 도읍지인 통구(通溝)지방에는 수십·수백 기가 떼를 지어 있다. 특히, 통구에는 1만기나 되는 많은 고분이 모여 있다. 또한 후기의 도읍지인 평양 지방의 대동군 임원면을 중심으로 시족면, 강동군 만달면 등에도 수천 기에 달하는 고분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형태 분류]

고구려 고분은 형태상 두 가지로 나뉜다. 외형상 돌만으로 무덤을 만든 적석총(積石塚)과 내부 매장 주체 시설(埋葬主體施設)은 돌로 쌓되 외부 분구(墳丘)를 흙으로 만든 봉토분(封土墳)이다. 이들 고분의 평면은 대부분 방형(方形)이지만 규모가 작은 봉토분 중에는 원형도 있다.

(1) 적석총

적석총은 주로 환인현(桓仁縣)과 집안(集安) 통구(洞溝)에 밀집되어 있다. 구조형식에 의해 5가지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무기단 적석총(無基壇積石塚), ② 기단 적석총(基壇積石塚), ③ 기단 계단식곽 적석총(基壇階段式槨積石塚), ④ 기단 계단식 석실총(基壇階段式石室塚), ⑤ 봉석석실총(封石石室塚) 등이다.

적석총의 외형은 방대형(方臺形) 또는 절두방추형(截頭方錐形)이며 평면은 방형 또는 장방형이다. 재료(材料)는 계단식이 아닌 ①·②식은 냇돌이나 산의 막돌을 주로 사용하였고, 계단식은 막돌 또는 가공석(加工石)을 사용한 예가 많다. 계단은 보통 3∼5단(段)을 만들지만 장군총(將軍塚)과 같이 특별히 규모가 큰 고분은 7단이나 된다.

매장주체부는 정상부에 가까운 곳에 설치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다. 곽·실의 형태는 외형과는 달리, 모두 장방형이다. 단곽(單槨)이 보통이지만 쌍곽(雙槨) 또는 3개의 곽이 있는 경우도 흔히 있다. ①식의 경우 쌍곽이나 3곽으로 축조된 것은 2개 또는 3개의 무덤을 합쳐서 만든 것이다. 이 경우 적석(積石)의 평면이 장방형을 이룬다.

대표적인 고분으로 ①식은 시중군 심귀리 제75호분과 제92호분, ②식은 환인 고력묘자촌(高力墓子村) 제15호분, 자성군 서해리 제2고분군 제1호 및 제3호분, ③식은 시중군 노남리 남파동 제33호분, ④식은 고력묘자촌 제11호분, ⑤식은 고력묘자촌 제1호분 등을 들 수 있다. 환인 고력묘자촌과 집안의 고분들을 보면, 입지는 대체로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점차 높은 곳에서 낮은 지대로 내려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적석 주위에는 돌을 깔아서 묘역을 만들고 있으며, 어떤 경우는 돌담을 쌓기도 하였다.

무덤의 크기는 작은 것은 한 변의 길이 5m, 높이 2m 정도이고, 보통의 것은 한 변의 길이 15m 내외 높이 3∼5m 정도이며, 큰 것은 한 변의 길이 30∼60m 높이 20∼30m 정도 되는 것도 있다. 또한 특별히 적석부를 보호하기 위해 각 변 아래 단에 거대한 버팀석을 세워 박아서 적석의 유실을 방지하였다. 내부 구조의 차이에 의해 수혈식(竪穴式)과 횡혈식(橫穴式)으로도 나뉜다. 전자에는 심귀리 제75호분과 고력묘자촌 제15호분, 후자에는 남파동 제33호분과 제100호분, 장군총, 태왕능, 유감총(有龕塚), 고력묘자촌 제1호분 등이 속한다. 수혈식 적석총은 외형상 무기단식과 기단식으로 크게 나눌 수 있지만, 횡혈식은 거의 예외없이 기단식이다.

적석총의 구조는 보통 시체를 적석부의 중심부에 안치하기 때문에 토광묘(土壙墓)와 봉토분같이 매장주체시설이 지하 또는 지면에 있는 무덤형태와는 많은 차이점이 있다. 적석총의 적석부는 무덤임을 알리는 표지인 동시에 매장주체시설에 대한 보강시설이기도 하다. 또한 직접 시체를 안치하는 시설의 구실을 겸함으로써 앞의 토광묘와 봉토분의 분구에 비해 훨씬 크다.

따라서 매장 주체 시설을 돌무지에 설치하려면 자연히 적석부의 규모와 높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매장 주체 시설의 위치는 규모가 작은 것은 묘대(墓臺)를 높이 1m 정도로 쌓은 다음에 그 위에 설치했으며, 규모가 큰 것은 묘대를 10여 m 정도로 높게 쌓아 올린 다음에 설치하였다.

적석총의 장법은 단장(單葬)과 합장(合葬)이 모두 나타나고 있지만, 합장이 많다. 어느 경우든 예외없이 신전장(伸展葬)을 하였다. 이 또한 적석총이 대형화되는 요인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의 적석총은 백제와 신라의 묘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서울 석촌동에 있는 적석총을 비롯한 한강유역의 적석총,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의 적석봉토분(적석목곽분) 등은 모두 고구려 적석총의 영향을 직접·간접으로 받은 묘제들이다.

(2) 봉토분

봉토분은 집안 국내성에 도읍했을 시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427년 대동강유역의 평양으로 천도한 후 압도적으로 많이 조영되었으며, 내부구조는 대부분 석실분이다. 이들 고분은 주로 산을 등지고 넓은 들을 앞에 낀 전망 좋은 낮은 구릉지대에 있다. 적은 곳은 3, 4기 정도, 많은 곳은 100여 기 이상이 밀집되어 분포하고 있다.

고분이 있는 구릉은 그 가까이에 하천이 흐르거나 큰 하천의 강구(江口) 또는 연안에서 멀지 않다. 이에 따라 고분 주위에는 평야지대가 펼쳐지기 마련이다. 이는 석실봉토분을 조영한 고구려인들의 농업이 상당 수준까지 발달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적석총의 경우와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적석총과 유사한 점도 있다. 외형이 방대형인 것이 많고, 봉토도 기단부는 적석을 하며, 주위에 냇돌 등을 다져 깔고 흙을 덮은 뒤에 잔디를 입혀 묘역시설을 한 점 등이다.

견고하게 축조한 분구는 묘실의 외부에 막돌을 쌓은 후, 그 위에 진흙을 덮고, 다시 숯이나 회를 깐 다음, 마지막으로 흙을 덮고 잔디를 입힘으로써 내부로의 침수를 방지하였다. 분구에서 기와조각이 나오는 예도 있다.

분구의 규모는 바닥 지름과 높이간의 비율이 대체로 4.4 : 1 또는 5.5 : 1이다. 신라고분(2 : 1∼4 또는 7 : 1)보다는 바닥 지름에 비해 봉토 높이가 비교적 낮은 편이며, 백제고분(10 : 1∼13.5 : 1)보다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처럼 고구려 후기의 고분이 이전의 적석총에 방대형의 봉토를 씌운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요동지방의 고분이나 낙랑고분을 통해 중국 묘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묘실의 축조재료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할석이나 다듬지 않은 거친 판석(板石)을 이용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규모있게 쌓거나 표면과 접석면(接石面)을 곱게 다듬은 판석을 이용한 것이다.

전자는 대부분 연도(羨道)와 현실(玄室)만으로 이루어진 소형의 단실분(單室墳)으로서 안에는 아무런 장식도 없다. 후자는 대규모의 단실분도 있지만, 대부분 묘실이 전·후실 등 3실로 나뉜다. 전실에는 다시 감실(龕室)이나 측실(側室)이 붙음으로써 석실구조가 복잡해진다. 일부는 할석만으로 쌓거나 할석과 전(塼)을 섞어서 쌓은 것도 있다. 이 때는 벽면을 회로 곱게 미장했으며 일부 무덤에는 석실에 벽화를 그렸다. 이 두 가지 종류는 피장자의 신분과 빈부의 차이를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묘실의 위치로 보면, 고구려고분에는 지하식은 거의 없고 지상식과 반지하식이 있을 뿐이다. 지상식보다는 반지하식이 더 많은 편이다. 지상식은 호남리(湖南里) 사신총을 비롯해 강서 중·대묘(江西中·大墓), 중화 진파리(眞坡里) 제1호분, 안악(安岳) 제2호분, 용강대총(龍岡大塚) 등이 대표적이다. 반지하식으로는 성총(星塚)과 감신총(龕神塚), 강서 태성리(台城里) 제1·2호분, 고산리(高山里) 제7호분, 용강 대안리(大安里) 제1호분, 쌍영총(雙楹塚) 등이 있다.

묘실의 방향은 압록강유역의 적석총이 대부분 서향 또는 서남향인데 반해, 석실봉토분은 거의 남향이어서 서향에서 남향으로 점차 바뀌어간 것을 알 수 있다. 후기에 와서 남향으로 된 것은 사신사상(四神思想)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내부 구조는 석실의 수에 의해 ① 단실묘, ② 2실묘, ③ 유감측실묘(有龕側室墓), ④ 3실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①은 하나의 연도와 하나의 현실만으로 구성된 것으로 고구려의 방대형분구의 석실묘 중 가장 많다. 이 유형은 매산리(梅山里) 사신총·개마총(鎧馬塚)·내리(內里) 제1호분·안악 제1호분·성총·중화 진파리 제1호분 등이 있다.

②는 전실과 후실이 있어 연도-전실-통로-후실(현실) 등으로 이어지는 유형이다. 쌍영총·천왕지신총(天王地神塚)·대동 팔청리 벽화고분(八淸里壁畵古墳)·용강 대안리 제1호분·증산 가장리(加長里) 벽화고분 등이 속한다. 전실의 평면은 장방형과 방형이 있다. 장방형 전실은 다시 천장이 하나로 된 것과 천장이 세 부분으로 나뉜 것으로 구분된다.

③은 기본적으로는 ②와 같은 형태이지만 훨씬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것을 감실 또는 측실의 위치에 따라 분류하면, 첫째 감·측실이 전실의 좌우에 있는 것, 둘째 감·측실이 전실과 후실 사이의 통로 양벽에 있는 것, 셋째 감·측실이 후실의 좌우에 만들어진 것 등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첫째는 안악 제3호분(측실)·감신총(감실), 둘째는 용강대총(감실), 셋째는 태성리 제2호분(감실)과 안악 제2호분(감실) 등이 있다. 첫째와 둘째는 기본적으로 2실묘이지만 셋째는 단실묘의 형태이다.

④는 집안의 삼실총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특이한 형태이다. 현실 3개가 통로를 사이에 두고 ‘ㄷ’자모양으로 이어져 있으며 2실묘 유형에 넣기도 한다. 고구려의 석실봉토분은 대체로 3세기에 출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내부 구조 분류]

고구려 고분의 적석총과 봉토분의 내부구조는 거의 대부분이 횡혈식석실을 이루고 있다. 천장가구법(天障架構法) 기준으로 형식분류하면, ① 평천장식(平天障式), ② 궁륭식(穹綠式), ③ 말각조정식(抹角藻井式) 등으로 나뉜다. ①은 방형 또는 장방형 석실의 네 벽을 막돌이나 큰 판석으로 만든 뒤, 그 위에 1매 내지 수매의 큰 판석을 얹어 천장을 만든 것으로, 세 형식 중 가장 오랜 형식이다. 적석총의 석실은 대부분이 여기에 속하며, 태왕릉·장군총 등이 대표적이다. 통구평야에 있는 수천의 봉토분과 적석총의 약 4분의 3 가량이 여기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②는 기저(基底)가 방형인 석실에 많다. 네 벽을 막돌 등으로 쌓되 위로 올라가면서 내경시켜 맨 위에 하나의 큰 돌을 올려놓음으로써 천장을 만든 것이다. 집안의 마선구 제1호분·안악 복사리 벽화고분 등과 같이 주로 봉토분에 나타나며, 전체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이른바 방형 절상식(方形折上式)도 이 형식에 속한다. ③은 우삼각지송식천장(隅三角持送式天障) 또는 삼각굄천장으로도 불린다. 네 벽의 상부 중앙에서 인접벽의 상부 중앙으로 연결되는 삼각형의 평면 공간을 커다란 판석 등으로 덮어 네 모서리를 줄이면 덮어야 할 면적이 반으로 줄게 된다. 이 방법을 반복해 최후 공간을 1개의 판석으로 덮은 것이다.

약수리(藥水里) 벽화고분, 온천 매산리 사신총·산련화총·쌍영총·삼실총 등 벽화고분을 비롯한 고구려 대다수 석실봉토분이 여기에 속한다. 이 형식은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지중해에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으며, 고구려는 중국을 통해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벽화고분]

고구려 고분의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인 벽화고분은 지금까지 통구지방에서 20기, 평양지방에서 43기로 총 63기가 보고되었다. 이 중 집안현 우산(禹山)에 있는 통구 제41호분만이 적석총이며, 나머지는 모두 봉토분이다.

벽화는 연도·전실·측실·감실·현실, 그리고 천장 입구·통로벽에 이르기까지 묘실 전체에 그려져 있다. 어떤 경우는 직접 돌벽에 그리기도 하지만, 대개는 회를 바른 뒤 그것이 채 마르기 전에 그린 프레스코법을 채용한 것도 있다.

벽화에 사용된 색은 흑색·백색·황색·적색·자색·청색·녹색 등 다양하며, 때로는 진파리 제4호분처럼 금가루 또는 금동같은 금속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원형과 직선 등을 그릴 때는 자와 콤파스를 사용한 흔적도 있다.

벽화의 내용은 인물풍속도·장식무늬·사신도(四神圖)·천체도(天體圖) 등 매우 풍부하다. 벽의 경계부분과 천장에는 괴운문(怪雲文)·당초문(唐草文)·연화문(蓮花文) 등을 그렸다. 벽화의 내용과 화법에 따라 전기·중기·후기 등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기는 인물풍속도를, 중기는 인물풍속도 및 사신도, 후기는 사신도를 주로 그렸다. 안악 제2·3호분과 대안 덕흥리(德興里) 벽화고분을 비롯해 평양역전 벽화고분·강서 태성리 제1·2호분·평양 고산리 제2호분·통구 제12호분 등이 있다.

중기에는 조잡한 당초띠무늬와 3엽인동당초(三葉忍冬唐草)무늬가 새로 출현하며 전기에 비해 불교사상이 크게 반영된다. 무용총·귀갑총(龜甲塚)·각저총(角抵塚)·안악 제1호분 등이 있다.

후기에는 보다 사실적이고 화려한 색채를 특색으로 하는 벽화들이 그려진다. 중화 진파리 제1호분·집안 사신총·통구 제17호분·호남리 사신총·평양 내리 제1호분 등이 있다.

[유물]

고구려 고분은 대부분 발굴 전에 도굴을 당해 부장품이 남아 있는 예는 거의 없다. 또한 ≪수서 隋書≫ 고구려전에 나오는 “장례를 치를 때는 북을 치고 춤을 추며 음악을 하여 죽은 사람을 보낸다. 매장이 끝나고 죽은 자가 살아 있을 때 입던 의복, 아끼던 물건, 거마(車馬) 등을 모두 모아 무덤 옆에 둔다.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은 이를 다투어 가지고 간다(葬則鼓舞作樂以送之 埋訖 悉取死者生時服翫車馬 置於墓側 會葬者 爭取而去).”라는 기사로 보아 원래부터 부장품을 적게 넣은 듯하다.

중화 진파리 제7호분 출토 금동관과 청암리토성(淸巖里土城)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금동관은 모두 전면에 불꽃 비슷한 구름무늬를 투각(透刻)하였고, 특히 옆면 한 가운데는 삼족오(三足烏)를 배치하였다. 강서 약수리 벽화고분과 대동군에서 보고된 순금제귀고리 등을 비롯한 고구려의 귀고리 중에는 귓불고리가 가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한편, 중공구형(中空球形) 장식에 심엽형(心葉形) 끝장식을 단 귀고리도 있어 신라의 것과 통한다. 또한 진파리 제1호분에서는 왕의 베갯모로 추정되는 2개의 금동장식이 발견되었다. 여기에는 비단벌레 날개를 깔고 해를 상징하는 삼족오를 중앙에 새김으로써 진파리 제7호분 출토 금동관과 동일한 문양과 기법을 보이고 있다.

토기는 신라토기 보다 약한 도질(陶質)이 많다. 같은 시대의 백제와 신라의 부장품과 비교해 볼 때, 기교면에서 다소 앞선 것들이 많다. 또한 전체적인 문화수준도 가장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韓國壁畵古墳(金元龍, 一志社, 1980), 고고학으로 본 한국고대사(姜仁求, 학연문화사, 1997), 裝身具-高句麗-(尹世英, 韓國史論 15, 國史編纂委員會, 1985), 韓國考古學槪說(金元龍, 一志社, 1986), 朝鮮の建築と藝術(關野貞, 岩波書店, 1931).

<강인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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