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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14 (일) 19:58
분 류 문화사
ㆍ조회: 3894      
[백제/고려] 익산 왕궁리 5층석탑 (강우방)
익산(益山) 왕궁리(王宮里) 석탑(石塔) 앞에서

참고 : 감은사 석탑의 수수께끼

기사 제목 : 미술사(美術史) 산책 ⑦ 익산(益山) 왕궁리(王宮里) 석탑(石塔) 앞에서
백제미술양식론(百濟美術樣式論) 단상(斷想)
필자 : 강우방(姜友邦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익산 왕궁리석탑

   익산왕궁리오층석탑. 국보 제289호. 높이 8.5m. 국보(예경) 사진

학문(學問)은 이성적(理性的)이고 객관적(客觀的)으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미술사학(美術史學)의 대상은 대체로 감성적(感性的)이고 주관적(主觀的) 산물(産物)이라고 알고 있는 예술작품(藝術作品)이고 보니 모순과 갈등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필자가 이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느낀 것은 익산(益山) 왕궁리석탑(王宮里石塔) 앞에서였다.

사람들은 흔히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을 나누어 생각한다. 감성(感性)은 불확실하고 무질서하며 오류를 범하기 쉽고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며, 이에 비하면 이성(理性)은 초감성적(超感性的)이므로 확실하며 논리적이며 냉철하며 절대적이라고. 우리가 이때 어느 것에 더 신뢰를 둘 것인가는 자명하다. 그러나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을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왜 예술(藝術)은 감성적이며 과학(科學)은 이성적이라 간단히 단정하고 안심하는가.

그 두 가지는 사물의 인식작용의 과정에서 나누어 질 수 없다. 두 가지가 서로 조화(調和)를 이루어야 옳은 과학자(科學者), 옳은 예술가(藝術家)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또 역사적으로 과학자가 예술가를 겸한 위인(偉人)이 많았던 것도 양자 사이의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뗄 수 없는 것을 떼어서 상대(相對)하여 놓는 것은 뭔가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방편이다.

이성(理性)은 감성(感性)에 질서(秩序)를 주며, 감성(感性)은 이성(理性)에 창조력(創造力) 과 생명력(生命力)을 부여한다. 감성은 직관적(直觀的) 인식작용(認識作用)이므로 첫 인상(印象), 첫 발상(發想)이 중요하다. 그것은 비논리적(非論理的) 방법으로 사물을 통합적(統合的)으로 파악한다. 불교(佛敎)에서 말하는 돈오(頓悟)는 직관(直觀)과 통할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이성은 분석적(分析的) 인식작용(認識作用)이어서 치밀하고 단계적이므로 신비적(神秘的)이며 초월적(超越的)인 문제에 이르러서는 등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 점수(漸修)는 이성(理性)과 통할 것이다.

그런데 어떤 사물을 인식할 때 소위 주관(主觀)ㆍ객관(客觀) 이라든가, 감성(感性)ㆍ이성(理性)이라는 상대적(相對的)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상호작용(相互作用) 하여 서로를 보완(補完)하고 서로를 높일 때 좋은 작품(作品)이 나오고 좋은 실험(實驗)이 성공하게 되리라 믿는다. 경험(經驗)과 실험(實驗)에 기초를 둔 감각(感覺)보다 더 통합적(統合的)이고 정확한 것이 어디 있는가. 또 직관(直觀)을 무시하고 어떻게 과학(科學)에 획기적 발전이 있을 수 있는가. 예술(藝術)은 분명히 감각적(感覺的)이고 감수성(感受性)이 강한 인간이 이룩하는 것이지만 이성(理性)이 결핍되고는 그것은 결코 아름답지도 구체적이지도 영원하지도 못하다. 그러므로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거나 어느 한쪽이 빈약할 때 창조력(創造力)과 일관성(一貫性)을 상실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감성적(感性的)인 경향은 선천적(先天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요절(夭折)하는 시인(詩人)이, 화가(畵家)가, 작곡가(作曲家)가 가능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후천적으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필자가 왕궁리석탑(王宮里石塔)을 처음 본 것은 일구팔육년(一九八六年) 여름이었다. 두번째가 일구팔팔년(一九八八年) 봄, 세번째가 일구팔구년(一九八九年) 가을. 석탑(石塔)에 대한 논문을 대학시절에 읽은 것이 있을 뿐 전혀 문외한인 나에게 준 그 신선한 충격은 잊을 수 없다. 나는 다시금 나를 실험하기 시작하였다. 내가 선입견 없이 감각적(感覺的)으로 느낀 것이 어느 만큼 정확한가.

첫번째 보았을 때 나는 백제(百濟)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두번째 보았을 때 백제(百濟) 것임을 재확인하였고, 그때 그것이 학계에서 고려작(高麗作)이 통설이 되어있음을 처음 학생들로부터 들어 알았다. 세번째 보았을 때는 나의 감각적(感覺的) 파악을 실증(實證)하려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에게 엄습하여 온 것이 바로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의 문제였던 것이다.

필자가 세번에 걸쳐 왕궁리(王宮里)탑 앞에서 보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기탄없이 요약하여 보겠다.

① 기단(基壇)이 낮고 좁다. 기단의 상대석(上臺石)의 폭이 초층옥개석(初層屋蓋石)의 폭보다 좁다.

② 전체구도가 신라(新羅) 것과 판이하다. 신라 것은 기단부가 넓고 높아져서 전체구도가 삼각형(三角形)의 안정(安定)된 구도를 이루지만 왕궁리(王宮里)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신라 것은 예외없이 옥개석들의 모서리를 연결하여 연장하면 기단부와 만나지만, 왕궁리(王宮里) 것은 기단부에서 바깥으로 멀리 떨어진다.

③ 옥개석(屋蓋石)이 얇다. 이에 비하여 신라 것은 매우 두터워져서 층급(層級)받침도 5단으로 늘어난다. 한마디로 하나는 경쾌(輕快)하여 날렵하고 하나는 괴체적(塊體的)이어서 둔중하다.

④ 상대갑석(上臺甲石) 네 앙각에 단면이 반원형의 돌기 대(帶)가 있는데, 이런 것은 정림사탑(定林寺塔)의 옥개석 앙각이나 미륵사(彌勒寺) 석등(石燈) 대석에서도 보인다.

⑤ 옥개석(屋蓋石)의 체감율(遞減率)이 완만하다. 만일 백제인(百濟人)들이 이러한 체감 등을 어느 경우에고 고집하였다면 백제(百濟)에는 삼층(三層)의 석탑이 존재할 수 없다.

⑥ 미륵사탑(彌勒寺塔)과 견주어 보면 돌을 다듬은 솜씨가 같아서 표면구조(表面構造)(Texture)가 같다. 특히 3단의 층급받침의 모양새는 매우 비슷하다.

⑦ 전체구도에서 느껴지는 것은 기단이 낮고 좁아서 섬약하고 위태한 느낌을 주지만 탑신부(塔身部)가 기단부(基壇部)보다 훨씬 커서 우람하고 웅대(雄大)하여 위압감을 준다. 그러나 옥개석이 얇고 전각(轉角)이 들리어 경쾌(輕快)한 느낌도 준다. 이처럼 여러 극단적 대립적 요소들이 묘하게 공존하고 있다.

이러한 극적대비(劇的對比)로 위급한 느낌을 주되 미감(美感)을 일으키는 것으로는 이밖에 대통사석연지(大通寺石蓮池)(공주박물관(公州博物館)), 정림사오층석탑(定林寺五層石塔), 고려(高麗) 것이지만 백제적 요소가 강한 정토사홍법국사실상탑(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신라 것은 기단부(基壇部)가 훨씬 커서 안정감(安定感)을 주지만 심리적(心理的) 미감(美感)을 일으키지 않는다.(방점(傍點)ㆍ 필자(筆者))

이상의 것들을 기초로 나는 곧 세가지 결론에 도달하였다.

하나는 미륵사탑(彌勒寺塔)과 왕궁리석탑(王宮里石塔)이 거의 동시에 가능하리라는 것이다. 즉 그 두 탑의 건립은 선후(先後) 관계가 아니라 동시적(同時的)일 가능성도 있다. 대규모의 사찰에선 미륵사탑 같은 결구(結構)가 불가피하지만 소규모의 사찰에서는 왕궁리탑(王宮里塔) 같은 간략화(簡略化)된 추상적(抽象的) 구성이 불가피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 두 탑(塔) 차이는 규모에서 비롯된 것이지 목조탑(木造塔)의 충실한 모방의 과정에서 판단되는 선후(先後)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추상(抽象)과 사실(寫實)의 개념은 선후(先後)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언제나 사실(寫實)에서 추상(抽象)이 도출되는 것이 아니요, 사물의 다른 인식작용의 결과라 하겠다. 미륵사탑(彌勒寺塔)의 사실성(寫實性)에서 왕궁리탑(王宮里塔)의 추상성(抽象性)으로 전개되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도 일반적 사고방식이다. 고대인(古代人)들은 처음부터 기하학적(幾何學的)ㆍ 추상적 표현(抽象的 表現) 능력과 사실적(寫實的) 표현능력을 동시에 구비하였던 것이다.

만일 이러한 동시성(同時性)이 가능하다면 미륵사석탑(彌勒寺石塔)은 사찰(寺刹)의 초창기(初創期)보다는 그 중심부(中心部)인 일목탑(一木塔), 일금당(一金堂)의 중앙곽(中央廓)이 성립된 후 계속하여 좌우외곽(左右外廓)이 증축되어 갔을지도 모른다. 현재 노출된 대가람의 규모는 상당한 기간에 걸쳐 완성되었을 것이며, 단번에 되었다면 중앙(中央)에는 목탑(木塔), 좌우(左右)에 석탑(石塔)이 계획된 것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백제(百濟)에서의 석탑(石塔)의 발생(發生)은 재고(再考)를 요한다.

둘째로 기단부(基壇部)와 탑신부(塔身部)의 비례(比例)관계를 고려한다면 그 전체적 구도와 구성은 미륵사탑(彌勒寺塔)보다는 오히려 왕궁리탑(王宮里塔)이 목탑(木塔)에 더 가깝다. 나는 늘 일본법륭사목조오층탑(日本法隆寺木造五層塔)(8세기)앞에서 정림사탑(定林寺塔)과의 양식적(樣式的) 친연성(親緣性)을 강하게 느끼곤 하였다.

법륭사탑(法隆寺塔)도 정림사탑(定林寺塔)이나 왕궁리탑(王宮里塔)처럼 기단이 낮고 좁으며 옥개(屋蓋)에 비하여 옥신(屋身)이 급격히 좁아 날렵하고 위급(危急)한 느낌을 준다. 미륵사탑(彌勒寺塔)은 목조(木造)건축을 충실히 모방하였다고 하나 부분적으로는 몰라도 전체구도는 오히려 거리가 멀다.

목조(木造)로 거대한 탑을 구축하기 위하여는 목조(木造)에서의 구도와 구성을 오히려 크게 변형시켜서 옥신부(屋身部)를 상당히 넓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정림사탑(定林寺塔)에서 왕궁리탑(王宮里塔)으로의 형식적(形式的) 이행(移行)은 가능하나 이 두 소규모의 탑과 미륵사탑(彌勒寺塔)과의 관계는 불분명해진다.

셋째로 왕궁리탑(王宮里塔)에서 곧바로 감은사탑(感恩寺塔)으로 곧바로 이행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기단부와 탑신부의 비례관계를 보면 왕궁리탑(王宮里塔)과 감은사탑(感恩寺塔)이 가장 가까울 것이고 또 이것이 가장 중요한 구성요소가 될 것이다. 통일 신라 석탑(統一新羅石塔)에서 기단부보다 탑신부가 월등이 큰 것은 감은사탑(感恩寺塔)이 가장 심하고 그 다음으로 고선사탑(高仙寺塔)이 있을 뿐이다. 말하자면 옥개석 부분만이 백제(百濟)의 왕궁리탑(王宮里塔) 것이 신라(新羅) 지역에서 신라 양식으로 변한 것이다. 즉 왕궁리탑(王宮里塔)은 그 나름의 백제양식(百濟樣式)의 완성이다. 신라석탑(新羅石塔)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것이지 하나의 과도현상(過渡現像)으로 볼 수 없다. 그 과도기적(過渡期的)인 것이란 개념은 통일신라초(統一新羅初) 것을 전형(典型)으로 삼았을 때의 상대적 성격의 것이다. 오히려 통일신라중엽기(統一新羅中葉期)의 것, 가령 불국사석가탑(佛國寺釋迦塔)을 전형(典型)으로 삼았을 때 통일초기 것이 과도기(過渡期)양식에 속한다고 하겠다.

대충 이렇게 느꼈던 것들을 정리하고 달리는 차창(車窓)밖으로 내다보니 충청도 지방의 붉은 흙은 석양(夕陽)빛에 엇 비추어 더욱 더 붉다 못해 타오르는 듯 하였다.

돌아와서 책을 몇가지 뒤져보니 왕궁리탑(王宮里塔)의 연대에 대하여 백제설(百濟說), 통일신라초기설(統一新羅初期說), 고려시대설(高麗時代說) 세가지가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백제설(百濟說)의 경우 백제(百濟) 것과 신라(新羅) 것 사이에 과도기적인 것으로 의성 탑리석탑(義城塔里石塔)을 둔 것도 알았다. 여러 사람의 의견 가운데 나는 다시금 고유섭(高裕燮)의 혜안(慧眼)에 탄복하였다.

그러나 나에겐 의성 탑리석탑(義城塔里石塔)이야말로 전탑(塼塔)과 목탑(木塔) 두형식의 혼합(混合)이요, 감은사탑(感恩寺塔)이 의성(義城) 것보다는 왕궁리(王宮里) 것과 더 친연성이 있다는 느낌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백제탑(百濟塔)의 완성(完成)이며, 신라탑(新羅塔)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것이 통일초(統一初) 혹은 고려탑(高麗塔)이라 한다면 미술사 연구에 있어 이 무슨 엄청난 손실인가.

백제 예술(百濟藝術)은 참으로 경쾌(輕快)하고 아름다우며 섬세하고 때로는 극적(劇的)이어서 모짜르트의 음악(音樂)같다. 백제미술은 요절(夭折)한 나라의 미술이다.

출전 : 박물관신문 1989년 11월호, 강우방, [미의 순례], 예경, 1993, pp.117∼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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