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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18 (목) 18:02
분 류 문화사
ㆍ조회: 6795      
[백제/남북국] 왕궁리 5층석탑과 감은사탑 (강우방)
강우방, 감은사 석탑의 수수께끼 익산 왕궁리 5층석탑과 경주 감은사지 3층석탑

참고 : 익산 왕궁리 석탑 앞에서

익산 왕궁리 5층석탑. 7세기 초 또는 10세기, 높이 8.5m, 국보 제289호. 국보(예경) 사진경주 감은사지 서3층석탑. 7세기 말, 높이 13.4m, 국보 제112호. 국보(예경) 사진

금년 11월 24일 감은사탑을 찾아갔었다. 갑자기 가게 된 이유는 나의 숙원인 관궁사탑(官宮寺塔)과 감은사탑과의 관계를 재확인하기 위해서였다(지금까지 익산 왕궁리오층석탑이라 불리워 왔는데 최근 발굴조사에서 관궁사(官宮寺)라고 새긴 명문(銘文)기와가 나왔으므로 관궁사라는 절이름을 쓰겠다).

경주에서 감은사 터를 가노라면 그 못미처에 기림사(祇林寺)가 있어서 잠깐 들르기로 했다.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버스를 내려 터덜터덜 한 시간 가량 걸어들어 가니 나지막한 함월산(含月山)의 품안에 기림사가 자리잡고 있다. 20년만에 다시 찾으니 감회가 어렸다. 대웅전 앞 진남루(鎭南樓)를 대하니 왜적에 대비하였던 승군(勝軍)의 요충지였음을 알겠다. 여수(麗水)나 충무(忠武) 등에는 임진란 때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진남관(鎭南館)을 세웠는데 이렇게 사찰의 경내에 진남루라는 명칭을 써서 전각의 성격을 삼은 것은 다른 사찰에서는 보지 못하던 것이다. 초석만 남아 있는 목탑지(木塔地)에 따스한 겨울빛을 받으며 걸터앉아 단청이 모두 바래거나 벗겨져서 목리(木理)가 그대로 보이는 고풍어린 건물들을 둘러보니 마음 편안하기 그지 없었다.

다시 걸어나와 버스를 타고 감은사 앞에서 내리니 산기슭 드높은 절터 위에 우뚝한 두 석탑의 모습이 기울어지는 붉은 석양빛에 환히 드러나 보였다. 해가 중천에 있을 때는 옥개석 때문에 그 밑부분의 층급 받침이 그늘져 버리기 마련인데 기우는 석양빛에 층급 받침이 훤히 다 보여서 탑이 더 커 보였다. 좁은 논길을 따라 탑에 다가가는 동안 역사의 현장이 주는 감회가 점점 더 깊어 갔다.

경주와 그 부근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지만 감은사탑에서처럼 마음을 울렁이게 하는 것도 없다. 그것이 단지 통일신라의 탑들 가운데서 사리장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라는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웅대한 맛을 지녔기 때문이다. 또 동해구에 자리잡은 깊은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문무왕이 호국룡으로 변신하여 이 감은사에 머물고, 동해로 드나들며 왜적으로부터 나라를 보호하여 왔던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통일신라를 삼국시대와 떼어서 신라와만 연결시키려 한다. 그래서 682년에 세워진 감은사탑의 형식이 신라시대의 전탑과 목탑의 절충에서 성립되었고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지붕의 곡선은 목탑에서, 지붕 밑의 계단식 층급 받침은 전탑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이 탑의 형식과 양식의 기원은 백제의 익산 관궁사탑에 있다고 늘 다짐하여 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관궁사탑을 고려시대의 것이라고 보고 감은사탑을 그 이전 신라의 전탑과 목탑의 혼합형식이라고 보아왔기 때문에 두 탑의 성격을 모두 잘못 밝혔고, 두 탑의 관계가 전혀 무시되어 왔다. 나는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된 두 탑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기 위해 틈만 있으면 찾아가 자세히 관찰하곤 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전탑에서 빌려왔다는 층급 받침의 성립이다. 그렇다면 목조건물을 충실히 따랐다는 익산 미륵사석탑의 역 계단식 삼단의 층급 받침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것은 백제 사람들이 지붕 밑의 복잡한 구조를 계단식 층급 받침으로 추상화하여 만든 것으로 가히 독창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통일신라 석탑의 층급 받침은 전탑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 이미 백제에서 성립된 익산 미륵사석탑이나 관궁사석탑의 층급 받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찍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일본의 훌륭한 고건축가 요네다 미요지는 이 탑이 통일신라시대 석탑보다 앞선 것이며 미륵사탑과 정림사탑 등의 백제탑과 통일신라 석탑의 중간형식을 취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도 백제탑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다. 그는 세키노 타다시의 설을 따라 만일 이 탑이 통일신라시대에 속한다고 하면 백제의 지역적`전통적 영향에 의하여 일반적인 신라 석탑과는 다르게 만들어졌던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결국 세키노와 요네다는 신라석탑의 성립을 신라 자체 내에서 찾으려 했고, 그 시각에서 관궁사탑을 고찰했던 것이다. 그런데 해방 후 우리나라 학자들은 이 탑을 백제시대의 탑을 모방한 고려시대의 탑이라고 보아 더욱 크게 오류를 범하였고, 모든 도록과 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다.

그런데 나는 백제의 입장에서 관궁사탑과 감은사탑, 즉 백제탑과 통일신라 초기의 탑과의 관계를 고찰한 것이다. 그러면서 차츰 나는 추상적 형태의 석탑이 백제에서 성립되었고, 그것이 신라에 영향을 주어 감은사탑 같은 형식과 양식이 성립되었음을 점차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 감은사탑과 관궁사탑 사이에 어떤 점이 같고 어떤 점이 다른 것일까.

먼저 같은 점을 들어 보면 첫째, 두 탑에서 옥개석(屋蓋石)과 옥개의 층급 받침 등 옥개부(屋蓋部 ; 지붕부분)를 하나의 돌로 만들지 않고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결합하였다. 즉 옥개석과 층급 받침을 별개로 만들었으며 관궁사탑의 옥개석은 정림사탑처럼 여덟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감은사탑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결국 감은사탑과 관궁사탑은 여러 개로 분할된 옥개석을 결합시킨 구조를 보여준다. 이러한 방법은 통일신라시대에서는 처음 만들어진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에서만 보인다. 둘째, 옥신부(屋身部 ; 지붕 밑의 6면체의 돌)도 하나의 돌이 아니고 탱주와 면석들을 별개로 만들어 결합하였다. 감은사탑에서는 탱주 하나와 면석 하나를 하나의 돌로 하였으나 외관상의 결구상태에서 별개로 만든 효과를 보인다. 셋째, 두 탑은 3층이건 2층이건 옥개석들의 채감률이 매우 완만하다. 이러한 완만한 채감률로 인하여 가장 윗충의 옥개부도 상당히 커져서 탑 전체에 웅장한 맛을 준다.

이상과 같이 두 탑은 여러 부재의 결구방법과 웅장한 맛을 주는 구조와 양식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그러면 감은사탑이라는 통일신라 최초의 석탑에서는 관궁사탑과 어떻게 다른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첫째, 옥개석이 두터워지고 층급 받침의 수가 다섯층으로 늘어나서 지붕이 매우 두터워졌다. 따라서 백제의 일반적인 오층석탑이 삼층석탑으로 층수가 줄어들어서 신라시대의 일반적인 형식을 이루게 된다. 둘째, 옥개의 추녀가 백제의 것은 양 끝에서 반전되어 날렵한 곡선을 이루었지만 감은사 것은 직선으로 변하였다. 따라서 신라 석탑의 양식은 투박하고 직선적인 느낌을 준다. 셋째, 감은사탑에서는 옥신부가 높아졌다. 그런데 이것은 옥개부가 두터워졌으므로 필연적인 결과라 하겠다.

학계에서는 백제 것은 옥신부가 낮아져서 옥개부들이 밀착되어 중첩된 형식이어서 밀첨식이라 하고, 신라 것은 옥신부들이 높아서 누각식이라 부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백제탑의 옥신부의 높이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옥신부의 존재는 엄연히 존재하며, 그러한 낮은 옥신부로 변형시킨 것은 백제 나름의 조형감각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므로 밀첨식과 누각식이란 절대적 용어를 써서 구분하는 것은 재고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두 형식의 차이는 백제인의 비례감각에 기인하는 미감과 신라인의 미감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넷째, 또 하나의 큰 변화는 기단부에서 일어난다. 정림사탑이나 미륵사탑 등 백제 탑에서는 기단부가 낮은 한단으로 되어 있는데 비하여 감은사탑에서는 이중기단되어 기단이 매우 높아졌다. 따라서 비록 삼층탑이지만 오층탑과 같은 높이를 지니게 되는데 이러한 신라탑에서의 기단부의 변화는 둔중하고 높은 탑신부를 받치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다. 그리하여 감은사탑은 비건축적인 구조로 변하여 공예적 요소를 띠게 되었다. 왜냐하면 탑이 건축물이라면 기단부가 이렇게 높아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관궁사탑의 기단부이다. 애초에 이 기단부는 흙에 묻혀 있었는데 1965년에 이 탑을 해체 복원하였을 때 기단부를 현재와 같은 신라식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어떤 근거로 이렇게 복원하였는지 모르지만 원래의 모습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기단부의 구조가 관궁사탑의 제작국과 양식 편년에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이미 요네다 미요지가 지적한 바이고 그는 그것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결론을 보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관궁사탑 기단부의 복원적 고찰이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남아있는 셈이다. 만일 지금의 기단부가 어떤 확실한 근거를 바탕으로 이중기단으로 복원되었다면 통일신라에서의 전형적인 이중기단의 발생을 관궁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관궁사탑과 감은사탑의 공통점과 차이점들을 지적해 보았다. 물론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다른 점들이 많기 때문에 신라식 석탑을 독자적인 것으로 취급해 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는 먼저 살펴 보았던 공통된 점들을 중요시한다면 우리는 감은사탑의 양식이 관궁사탑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관궁사탑을 기준으로 해서 감은사탑에서 간취된 변화들은 다른 모든 분야에서도 일어나는 현상으로, 백제적 요소를 지니면서 신라의 독창적 요소가 가미된 것이다. 말하자면 통일신라는 우리 나라 통일의 새 왕조로서 새로운 지평을 보이려는 의지에서 선진의 백제미술을 받아들이되 새로운 구성의 양식을 시도했던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기와의 연화문이나 불상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부분적으로 보이는데 통일 초에 백제양식이 부분적으로 계승된 점은 매우 중요한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감은사탑 같은 구조는 규모가 작아지면서 옥개부와 옥신부가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지고, 기단부가 더 커져서 건축적인 요소보다 더욱더 공예적인 형태로 변하면서 통일신라 석탑의 형식과 양식을 정립하게 된다. 황복사탑이나 나원리탑, 불국사 석가탑이 그러한 예들이며, 그이후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그 형식이 계속된다. 따라서 우리 나라 석탑의 변천사를 총괄하여 볼 때 감은사탑이나 고선사탑은 하나의 과도기적 형식이라 볼 수 있다.

나는 석탑 전공자가 아니다. 그러나 많은 탑들을 보아 오면서, 또 불상연구의 방법론을 빌어 내 나름으로 간취된 몇 가지를 지적해 보았다. 지난번에는 익산 관궁사탑 앞에서 감은사탑을 상기하여 그 둘을 비교하여 고찰해 보았는데 이번에는 감은사탑 앞에서 관궁사탑을 떠올리게 되었다. 나는 두 탑의 양식을 체험하면서 그 많은 다른 점에도 불구하고 깊은 동질성을 느꼈다. 그 다른 점이란 형식의 차이점에서 오는 것이고, 같은 점이란 양식의 동질성에서 느껴진 것이다.

나는 산 넘어 기우는 석양의 붉은 빛에 젖어드는 감은사탑 앞에 서서 미술사에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양식임을 다시금 확신하였으며, 그리고 그 양식이란 결코 시대적인 차이를 두고 모방될 수 없는 것임도 확신하였다. 감은사탑에서 관궁사탑과의 양식적 동질성을 느낀 것은 이 감은사탑의 건립에 백제의 장인이 참여하였거나 관궁사탑의 건립과 그리 큰 시대적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생각한다. 이처럼 관궁사탑과 감은사탑, 두 탑의 관계의 해명은 우리 나라 탑파 연구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두 탑의 관계가 아직 한 번도 거론되지 못한 것은 적지 않은 유감이라 하겠다.

마침 국민학교 학생 둘이 두 탑 사이를 지나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답게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그들이 태어났을 때부터 있었을 두 탑 사이를 마치 거대한 소나무 사이를 지나듯 무심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저 탑들도 나무처럼 끊임없이 자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전 : 강우방, [미의 순례], 예경, 1993, pp.124∼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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