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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9-15 (일) 22:20
분 류 문화사
ㆍ조회: 1051      
우리나라 고대의 그릇받침
그릇받침(器臺) 이란?

Ⅰ. 우리나라 고대의 그릇받침(器臺)

1. 그릇받침(器臺)이란?

우리나라 고대의 토기 가운데 모양과 쓰임새가 독특한 것으로는 그릇받침을 들 수 있다. 그릇받침은 둥근바닥의 그릇을 받쳐두기 위한 용도로 만든 것이다. 그릇받침의 대부분은 그릇을 받쳐두는 부분과 이를 지탱하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두 부분을 구분할 수 없는 똬리 모양도 있다.

납작바닥 토기가 널리 쓰인 고구려에서는 찾아 볼 수 없으며, 삼한시기부터 둥근바닥 항아리가 유행한 백제 신라 가야에서 주로 발견된다. 아울러 그릇받침을 만든 지역에서는 그릇이 똑바로 세워질 수 있도록 굽다리를 붙인 토기도 함께 만들었다.

삼한시기의 그릇받침은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 해남 군곡리 조개더미에서 똬리 모양의 그릇받침이 발견되었으나, 영남지방의 유적에서는 아직까지 발견된 것이 없다. 같은 시기의 왕광묘(王光墓) 정백동(貞栢洞)127호묘 등과 같은 낙랑의 무덤에서는 나무에 둥근 홈을 파서 만든 받침이 발견된다. 그러므로 삼한시기에는 똬리 모양의 혹은 나무로 만든 받침이 발견된다.

기능과 실용성에서 보다 효율적인 납작바닥 토기를 만들지 않고 둥근바닥 항아리 그릇받침 굽다리 토기를 만들어 쓴 점은, 지역마다 토기의 제작에 있어 고유한 전통이 있었음을 나타내준다.

백제 신라 가야는 삼한(마한 진한 변한)이라는 공통의 문화기반 위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서로 비슷한 토기제작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문화적 공통성을 기반으로 하지만, 대체로 소백산맥을 경계로 나누어진 백제와 신라 가야의 그릇받침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형태가 사뭇 다른 지역성을 보여준다.

바리모양 부위명칭

원통모양 부위명칭

신라와 가야의 그릇받침은 대체로 공통점이 많지만 형태와 활용에서 조금 차이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삼국시대의 문화권역은 그릇받침의 형태 및 활용에 있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서 설정해 볼 수도 있다. 즉 한 정치집단의 고유 형태로 확립된 그릇받침은 하나의 정치권역 및 정치집단 상호간의 교류관계를 추론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기도 한다.

2. 그릇받침의 종류

그릇받침의 종류는 요즈음의 화로와 비슷한 모양(화로모양 그릇받침), 굽다리 접시를 크게 확대한 모양(바리모양 그릇받침), 긴 원통을 세워 둔 모양(원통모양 그릇받침), 둥근 고리 모양(고리모양 그릇받침)으로 나누어진다.

화로모양 그릇받침은 영남지방에서 삼한 후기부터 널리 쓰인 화로모양 토기에서 발전한 것으로 신라와 가야영역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백제 영역에서는 천안 두정동 3호 집자리와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출토된 화로모양 그릇받침이 알려져 있으나, 신라 가야 영역에 비해 절대적으로 양이 적어 널리 쓰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백제 신라 가야의 유적에서 모두 발견된다. 신라와 가야의 것은 형태로 보아 대체로 화로모양 그릇받침을 계승하여 발전시킨 것이다. 그러나 금관가야에서는 두 종류를 짧은 기간 동안 함께 쓰기도 한다. 즉 손잡이가 달린 화로모양 그릇받침은 금관가야에서 바리모양 그릇받침이 처음 만들어질 때 함께 쓰였을 뿐만 아니라 형태도 바리모양 그릇받침으로 그대로 계승되지는 않는다. 백제의 것은 알려진 수량이 적어 그 기원을 명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신라 가야에 비해 늦은 시기에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크기에 따라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큰 것은 백제 신라 가야 영역에 모두 있으며,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즉 정치집단마다 각자 고유한 형태로 만들었다는 점이 큰 원통모양 그릇받침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작은 것은 주로 입 큰 단지의 받침으로 이용되며, 가야 영역에서 많이 발견된다. 중간 크기의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주로 대가야에서 만들어졌으며, 소가야에서도 대가야 토기가 들어오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고리모양 그릇받침은 대가야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군곡리 조개더미의 삼한시기 문화층에서도 이와 유사한 것이 출토되었으나, 시 공간적으로 대가야의 것과 바로 연결짓기는 어렵다. 단 둥근바닥의 토기를 가장 간단히 받쳐두는 똬리로써, 비록 토기는 아닐지라도 다른 재질로 만든 유사한 형태의 그릇받침은 널리 쓰였을 것이다.

3. 그릇받침의 활용

그릇받침의 활용은 그 종류에 따라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우선 화로모양 및 바리모양의 그릇받침은 굽다리 위에 물질 밀 물건을 담을 수 있는 넓고 깊은 부위 즉 수발부(受鉢部)를 지니고 있다. 수발부가 "저장 효용성"을 지니고 있는 점에서 일반용기를 그릇받침의 용도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대체로 화로모양 그릇받침에 비해 굽다리가 점차 높아지면서 정형화된다.

특정 물질 및 물건을 높이 올려놓기 위한 기능이 특별히 강조되는 변화의 방향은 일반 용기로서의 의미 약화와 의례용기(儀禮容器)로의 기능 강화로도 해석된다. 가야 영역의 여러 묘사유구(墓祀遺構)와 백제 영역의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바리모양 그릇받침이 다수 발굴된 점은 의례용으로 쓰였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이밖에 바리모양 그릇받침은 신라에서 굽다리를 떼어내고 솥뚜껑으로 쓴 예와 대가야에서 늦은 시기에 그릇받침 용도만으로 얕게 만든 퇴화된 예도 있다. 따라서 이 두 종류의 그릇받침은 일반 용기와 그릇받침의 기능이 복합된 것이며, 활용의 측면에서 일반용기→일반용기와 그릇받침→의례용기로서의 기능 강화의 방향으로 변화된 듯하다.

다음으로 원통모양 및 고리모양의 그릇받침은 처음부터 받침의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다. 고리모양 그릇받침은 둥근 띠 모양이므로 단순히 똬리의 기능을 한 것이다. 중간 크기의 원통모양 그릇받침도 역시 본체와 분리된 굽다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어 받침의 기능만이 강화된 것이다.

작은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굽다리 모양과 큰 것을 그대로 축소한 형태가 잇지만, 작은 크기 때문에 활용의 상징성을 따로 찾아낸다는 것이 어렵다. 이에 비해 큰 원통모양 그릇받침은 외형적으로 항아리를 받치는 것보다 오히려 높이 올려두는 기능이 강조된 토기이다.

4세기대에는 집자리 및 조개더미와 같은 생활유적에서 종종 발견되지만, 일상생활에 부적합할 정도의 높이 솟은 형태로 보아 그릇받침의 단순기능을 넘어서서 처음부터 의례용 토기로 만들었다고 추정할 수 밖에 없다.

특히 5세기 이후의 것은 제사유적 혹은 무덤의 특정지점에서 주로 발견된다는 점에서 의례용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대가야의 여러 묘사유구와 백제의 공주 정지산 빈소유적 및 부안 죽막동 제사유적에서 의례용으로 사용된 것이 발굴되었다. 한편 정치집단들 사이에 활용방식에서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신라 영역의 무덤에서는 대체로 묘실의 한쪽 모서리에 돋보이게 세워두는 공통성이 많이 관찰되며, 대가야에서는 무덤 주위 및 봉토에서 지냈던 묘사들이 많이 쓰인 점들이 이를 나타내주고 있다.  

즉 친연관계(親緣關係)에 있는 집단들끼리 형태뿐만 아니라 활용까지도 공유하고 있음이 큰 원통모양 그릇받침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출전 : 전양훈의 가야마을 http://myhome.dreamx.net/HL5PKG/stand.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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