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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8 (목)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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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6030      
[조선] 조선 시대의 정치 3 (민족)
조선(2)(정치) 조선 시대의 정치 3

세부항목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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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의 개혁 정치]

1863년 고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생부 이하응(李昰應)이 대원군으로서 정치 실권을 장악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세도 정치의 폐단을 일소하고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최고정책 결정 기관이었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키고, 의정부와 삼군부(三軍府)를 부활시켜 정치ㆍ군사의 최고 기관으로 삼았다. 이러한 정치 제도의 개혁은 왕권을 강화하고 명령 계통의 일원화를 꾀한 것이었다. 또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한편,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삼정(三政)을 정비하였다. 이에 전세 징수 대상인 전지(田地)의 확보를 위해 양전사업을, 군포(軍布)의 증수를 위해 양반에게도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그리고 환곡(還穀)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사창제(社倉制)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쇄국 정책의 강행을 위한 군사비와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자금은 막대한 것이었다. 때문에 악화인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해 사용하게 하고, 또 청전(淸錢)을 수입해 통용하는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러한 화폐 정책은 경제의 혼란을 야기하였다.

특히 서원이 소유한 전지와 노비를 몰수하고 지방 양반 유생의 횡포를 막기 위해 과감하게 실시한 서원철폐 정책은 보수적인 양반 유생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쳐 흥선대원군이 하야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기존 양반 정치 체제의 부정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면서 척족들의 발호를 억제해 양반정치 체제를 보완, 유지하려는 ‘실용적 보수주의’ 노선이었다.

[민씨 척족 정권]

1866년에 왕비가 된 민비는 1873년 고종의 친정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점차 여흥 민씨(驪興閔氏) 척족으로 자파 세력을 형성,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될 때까지 조선의 대내 정치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민비의 친족들이 중앙 정계의 요직을 거의 다 독점한 이른바 민씨 척족들의 전횡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1880년 이후였다. 민비를 중심으로 한 척족 정권은 능력 본위의 인재 등용을 하지 않고 관직을 매매, 과거제도를 문란하게 하였다.

또 국가 경비의 염출을 위해 농민들로부터 조세를 증수하는 등 일반 국민에 대한 불법적 수탈을 강화하고 당오전(當五錢) 등 악화를 발행, 화폐 유통질서를 혼란하게 하였다. 그리고 1882년 이후에는 친청ㆍ자강노선을 택해 개화당의 급진 개화 운동에 반대하고 청에 의존하였다. 따라서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의거에 대해 청나라로부터의 군사 원조를 요청하기까지 하였다. 1880년대에 일련의 개화 운동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민씨 척족 정권에 가담한 온건 개화파들에 의해 추진된 것이었다.

[개화당의 개혁 운동]

개항 후부터 형성된 개화당은 부국강병을 이룩해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급진개화파라고도 알려진 이들은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쿠데타로서 정권을 장악한 뒤,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개혁의 모범으로 삼아 군주권을 제한하며 재정을 일원화하고 근대적 내각 제도를 수립하는 등 14개조 이상의 개혁 정강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이들 정변 주모자들은 청불전쟁(淸佛戰爭)으로 청군의 개입이 없을 것이라는 전략적 판단 하에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얻어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국민들의 지지 결여와 일본 정부 당국의 미온적 태도로 그들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 갑신정변의 의도는 갑오경장으로 계승되었다. 갑오경장의 추진 배경은 일본에 의해 마련되었으나 개혁의 주체는 조선의 개혁 관료였고, 개혁 내용은 그들이 구상한 것이었다.

동학 농민 의거와 청일 전쟁을 계기로 발단된 갑오경장은 왕실과 행정을 분리한 입헌 군주제의 실시, 양반 신분제의 타파, 능력 본위의 평등사회 건설 등을 지향한 근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면에서의 개혁은 부분적인 것에 그쳤고, 근본적인 토지 개혁의 주장이 없었다.

[동학 농민 운동]

동학 농민군은 1894년 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봉기하였다. 제1차 봉기는 삼정의 문란, 탐관오리의 가렴주구로 말미암은 농민의 부담 가중, 일본으로의 미곡 반출로 인한 농촌 경제의 피폐 등이 원인이었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동학 접주들은 5월에 동학교도와 농민들을 규합해 ‘축멸왜이(逐滅倭夷)’ㆍ‘진멸권귀(盡滅權貴)’의 구호를 내세우며 관아와 무기고를 습격하고 먼저 전라도에서 관군과 대결하면서 서울로 진공하던 중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이 제1차 봉기에는 최시형(崔時亨)이 지도하는 동학의 북접 세력(北接勢力)은 참여하지 않았고, 전봉준ㆍ김개남(金開南)ㆍ손화중(孫華中) 등 전라도의 남접 세력(南接勢力)이 주동이 되었다. 이들은 탐관오리의 징치(懲治), 일본 세력의 축출 등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 왕조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봉기를 계기로 청ㆍ일 양국 군대가 조선에 출동해 전주성까지 점령했던 동학 농민군은 자진 해산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군은 집강소(執綱所)를 통해 자신들의 폐정개혁 요구 조항을 실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해산 후에도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계속 주둔하면서 서울의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키는 등 침략적 행동을 자행하자 동학 농민군은 10월에 재기하였다. 이 제2차 봉기는 반외세ㆍ반침략의 의병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이 봉기에는 동학의 남접뿐만 아니라 북접도 가담하였다. 삼례역(參禮驛)에 집결한 10만의 동학농민군은 서울을 향해 진격하던 중 12월에 공주부근의 우금치 전투(牛金峙戰鬪) 등에서 대패, 결국 실패로 끝났다. 1894년 2월부터 1895년 초까지 계속된 동학 농민 봉기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이를 통해 농민들의 정치적ㆍ사회적 의식이 높아지고 1895년 이후에 가열된 반일 의병 운동의 선구가 된 점 등에서 그 역사적 의의가 큰 것이었다.

[대한 제국의 개혁 정치]

대한 제국은 1897년에 조선 국왕을 황제로 격상시키고 독자적인 연호를 채택하며 국호를 바꿈으로써 성립되었다. 대한 제국의 집권층은 친러파였다. 그들은 제정 러시아의 전제 황정을 모방해 〈대한국국제〉를 제정하였다. 따라서 이 국제는 전제 군주제를 재확인한 보수적인 것이었다. 대한 제국의 실권자였던 조병식(趙秉式) 등 친러수구파는 민권 신장과 입헌 군주제를 목표로 하고 외국에의 이권 양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벌인 독립협회를 탄압하였다.

대한 제국의 보수적 관리들은 경제권을 장악해 근대적 회사ㆍ기업ㆍ은행 등을 설립, 경영하였다. 또 국가 재정의 확충을 위해 양전지계 사업을 실시, 토지 및 지세 제도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이들에 의해 광무 연간에 추진된 농업 및 상공업상의 근대적 시책을 ‘광무개혁 (光武改革)’이라 한다.

[독립 협회 운동]

갑신정변 후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徐載弼)이 1895년 말에 귀국하여 결성한 독립협회는 고급관료주도기ㆍ민중진출기ㆍ민중주도기ㆍ민중투쟁기를 거치면서 정치ㆍ사회 단체로 성장, 1898년 말까지 구국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협회의 지도층은 서재필ㆍ윤치호(尹致昊)ㆍ이상재(李商在) 등 서구 시민사상 및 민주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수용한 인사들과 남궁 억(南宮檍)ㆍ정교(鄭喬)ㆍ장지연(張志淵) 등 개신 유학자들로 구성되었고, 서구식 개혁파 인사들이 협회를 주도하였다.

이들은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ㆍ독립공원ㆍ독립관을 건립하고 ≪독립신문≫ 이외에 협회의 기관지로 ≪대조선독립협회회보≫를 발간하였다. 협회는 또한 러시아 등 열강에의 이권 양여 반대운동, 서재필 추방 반대운동, 인권과 재산권 보호운동, 노륙법(謳戮法)ㆍ연좌법(連坐法) 부활 저지운동 등을 벌임과 동시에 내각 개편 운동ㆍ의회 설립 운동을 전개, 직접 정치에 참여하려 하였다.

독립협회의 활동 목표는 민권에 기초한 입헌 대의 군주제를 채택하고 외세의 경제적 침투를 방지하며 나아가 국권이 확립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침투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도 미국ㆍ일본 등의 대한 접근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인 외교 노선을 취하기도 하였다. 독립 협회 운동은 결국 실패했지만, 독립 협회에 관여했던 인사들이 1905년 이후에 활발히 전개된 애국 계몽 운동과 독립 운동에 참여해 그 이상은 계속 추구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

1904년부터 1910년까지의 국망기(國亡期)에 국민의 각성과 국권 옹호를 위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언론ㆍ교육 등 다방면에 걸친 애국 계몽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독립 협회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었으며, 중국의 변법 자강 사상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러일 전쟁 중 보안회ㆍ헌정연구회 등의 정치 단체는 열강의 이권 침탈 방지와 입헌 정치의 실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 활동은 보호 조약 체결 이후 한국인의 정치 활동이 금지되자, 사회ㆍ문화 운동으로 그 방향을 바꾸고 산업과 교육 진흥을 민족의 급선무로 강조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의 대표적 단체는 장지연 등이 헌정연구회 후신으로 1906년에 조직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였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의 압력으로 대한자강회가 해체되자 그 사업은 1907년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계승되었다. 일제는 이들 애국 계몽 운동이 국권 회복 운동의 성격을 띠자 탄압하였다. 이러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은 신민회(新民會)라는 비밀결사 단체를 조직하였다.

애국 계몽 단체들은 신문 발간ㆍ학회 조직ㆍ잡지 간행을 통해 국민을 계몽하는 한편 회사를 설립, 운영해 민족 자본을 형성하려고 하였다. 당시 이들에 의해 발간된 신문 중에는 ≪황성신문≫ㆍ≪대한매일신보≫ㆍ≪만세보≫ 등이 있었다. 서북학회ㆍ기호흥학회ㆍ호남학회ㆍ관동학회ㆍ대한흥학회ㆍ교남교육회 등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학회도 결성되었다. 이들 학회는 잡지를 발행해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이 거둔 가장 효과적인 성과는 2,000여 개에 달하는 학교 설립을 통한 국민 교육이었다. 또, 운동 기간 중에 전개된 국채 보상 운동은 경제적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한편,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같은 시기에 전개되고 있던 의병 투쟁에 대해서는 대체로 소극적이었다.

[의병 활동]

청일 전쟁과 러일 전쟁 이후 국권이 위기에 처했을 때, 자발적으로 궐기한 의병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과 맥을 같이 하며, 주자학적 위정 척사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한말의 의병 운동은 3기로 나뉜다. 제1기는 1895년 민비 시해 사건과 단발령의 실시로 일어난 지방 유생 중심의 의병이다. 이것은 보수적 위정 척사 사상에 뿌리를 둔 반일ㆍ반개화의 구국 척사 운동이며 왕조와 왕권의 회복 및 유지를 목표로 하였다. 유인석(柳麟錫)ㆍ이강년(李康咎) 등이 그 대표적 지도자였다.

제2기는 1905년에 국권이 상실된 뒤 국권 회복을 목표로 지방 유림들이 농민을 규합해 일어난 것이다. 최익현(崔益鉉)ㆍ민종식(閔宗植)ㆍ이은찬(李殷瓚) 등이 그 대표적 의병장이었고, 신돌석(申乭石) 같은 평민 의병장도 이 때 출현하였다.

제3기는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자극받아 일어난 의병 운동이다. 이 때는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에 의병의 조직과 장비가 강화되어 한때 전국 의병의 연합 전선도 형성되었다. 1907년에는 이인영(李麟榮)을 13도총대장, 허위(許蔿)를 군사장으로 추대한 13도창의군의 서울 진공 작전이 계획되었다. 여기에는 전국의 유명한 의병장들이 총망라되었다. 그러나 총대장 이인영의 이탈과 그의 뒤를 이은 군사장 허위의 패배로 서울 진공 작전은 실패하였다.

일제는 조직적으로 의병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 중 1909년의 이른바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의병들은 국내의 활동 거점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후 잔존한 의병들은 국외로 망명, 해외 무장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다. 의병 운동은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줄기차게 전개된 무장 독립 운동의 중요한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유영익>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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