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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16 (일) 17:46
분 류 사전1
ㆍ조회: 7022      
[조선] 조선 개화기의 사상과 종교 (민족)
조선(2)(사상ㆍ종교) 조선 개화기의 사상과 종교

세부항목

조선
조선(1)(정치) 1
조선(1)(정치) 2
조선(1)(경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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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정치)
조선(2)(사회경제)
조선(2)(사상ㆍ종교)
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유교]

위정척사론은 삼강오륜에 입각한 유교적 사회 질서를 고수하면서 주자학 이외의 학문이나 문화를 배척하는 사상이다. 18세기 후반 서학(천주교)의 전래와 서세동점의 물결을 유교 문화에 대한 일대 도전으로 간주한 보수주의적 유학자들은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서양을 이적시(夷狄視)해 서양과의 통상 내지 외교를 반대하는 척화양이론(斥和壤夷論)을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정통과 이단, 화(華)와 이(夷)를 엄격히 구분하는 주자학적 세계관 내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근거하였다. 이항로(李恒老)와 최익현이 그 대표적 인물로, 전자는 병인양요시 척양론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후자는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서양과 일본을 동일시하는 왜양일체론(倭洋一體論)을 전개해 다같이 외국과의 통교에 반대하였다. 이들은 서구 및 일본제국주의의 침투로 빚어질 경제적 악영향을 우려하였다. 이 사상은 최익현ㆍ유인석 등이 구한말에 조직, 지도한 의병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었다.

또, 19세기 말에 조선의 일부 개신 유학자들은 서양 문물의 우수성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전통 유학의 보수성과 배타성을 비판하면서 유교를 민족의 독립 보전이라는 과제 해결에 활용할 수 있도록 개신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것은 청말의 변법자강사상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인 개신 유학자였던 박은식(朴殷植)은 종래의 제왕 중심이었던 유교를 공자의 대동주의(大同主義)와 맹자의 인본주의에 입각해 민중적 유교로 개신하였다.

또, 학교 설립이나 서적 간행을 통해 유교를 민중에게 널리 포교하며, 지리한만한 주자학보다 간이직절한 양명학(陽明學)을 강조할 것을 주장하였다. 박은식과 장지연 등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1909년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개화사상]

19세기 후반 서구와 서양화된 일본의 중첩된 충격을 받은 뒤, 서구 문물에 대한 관심이 제고되면서 서양 문명의 요체를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하고 나아가 자주적인 근대 국민국가를 건설하려는 의식이 형성되었는데, 이를 개화사상이라고 한다.

개화사상은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와 역관 출신 오경석(吳慶錫) 등이 중국에서 간행된 위원(魏源)의 ≪해국도지 海國圖誌≫, 서계여(徐繼慕)의 ≪영환지략 瀛環志略≫ 등 서양소개 서적을 국내에 들여온 뒤 이를 독서층에 보급하여, 1870년대에 서울 북촌(北村)의 양반 자제들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초기의 개화사상은 1877년경부터 개화의 실현 방법에 대한 의견 차이로 온건론과 급진론으로 갈라졌다. 온건론은 중국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본받아 동양의 전통적인 사상 체계 내지 정신 유산, 즉 도(道)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 즉 기(器)만을 선별적으로 채용해 개화하자는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통적 유교사상과 사회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 외래의 기술을 도입하되 국민을 계몽하는 방법을 취하는 점진적 개혁론이었다. 이 온건론의 대표자는 민영익(閔泳翊)ㆍ김홍집ㆍ김윤식(金允植)ㆍ어윤중(魚允中) 등이었다. 이에 비해 급진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방, 서양의 기술뿐만 아니라 그 정치ㆍ경제ㆍ군사ㆍ교육은 물론 사회제도까지도 수용해 급진적으로 변혁시키고자 한 사상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수용을 긍정적으로 보고 기존 양반제를 철저하게 비판하였다.

따라서 온건론이 청나라 말기의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에 영향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급진론은 청나라 말기의 ‘변법자강론’과 일본의 ‘문명개화론’에 자극을 받은 것이었다. 온건론자들이 군권(君權) 혹은 국권(國權)을 강조한 데 비해, 급진론자들은 민권(民權)을 중시하였다. 박규수와 유대치(劉大致, 鴻基)의 훈도를 받은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徐光範) 등 급진개혁파는 결국 갑신정변을 주도하였다.

[동학]

동학은 1860년에 경주의 몰락 양반인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되어 농촌 사회에 뿌리내린 신흥종교이다. 최제우는 서학(西學), 즉 천주교의 침투에 대항, 동양의 유ㆍ불ㆍ선 삼교를 종합하고 아울러 전통 사회의 가치 체계를 원용해 외세의 침투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려는 목적에서 동학을 창도하였다. 1863년에 교조 최제우가 처형된 뒤, 제2대 교주인 최시형은 1880년대 초에 ≪동경대전 東經大全≫ㆍ≪용담유사 龍潭遺詞≫를 간행해 교리를 체계화하고, 포접제(包接制)를 실시, 교문의 조직을 강화하였다.

주문을 외우거나 부적을 사용하는 등 전통적인 무속신앙의 요소를 띠고 있는 동학은 그 당시 정신적 지주가 필요했던 민중에 쉽게 침투, 보급되었다. 그 결과 삼남 지방에 동학의 교세가 확장되었다. 동학사상의 요체는 인내천(人乃天)으로 상징되는 평등주의이다. 인내천은 제3대 교주 손병희(孫秉熙)가 최제우의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ㆍ‘천인여일(天人如一)’과 최시형의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상을 집약한 표현이었다. 동학의 평등주의 사상은 조선조의 봉건적 신분제도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또한 동학 창도 이전의 시대는 하늘〔天〕의 대리자인 성현이 다스리는 선천시대(先天時代)이지만, 동학창도 이후의 후천시대(後天時代)에는 하늘이 모든 사람에게 강령해 하늘과 사람이 일체가 되어 지상천국이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러한 후천개벽사상(後天開闢思想)은 현실을 부정하는 혁명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당시 민간에 유행하던 ≪정감록 鄭鑑錄≫의 운수론과도 관련된 것이었다. 동학에 내포된 반외세ㆍ반침략의 민족주의, 신분제를 부정하는 평등주의, 후천개벽사상에 나타난 현실부정적 혁명사상 등은 1894년 동학농민 봉기의 사상적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동학의 교단 조직은 동학농민 의거에서 크게 활용되었다. 동학은 1905년 손병희에 의해 천도교(天道敎)로 개칭되었으며, 이에 반대한 이용구(李容九)가 1906년 시천교(侍天敎)를 창건, 두 파로 분파되었다.

[기독교]

18세기 말에 전래된 카톨릭은 대원군 치하 때 철저한 탄압으로 그 선교 활동이 한때 둔화되었다. 그러다가 1880년대 국내에 개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개신교가 전래되고, 구미와 외교ㆍ통상 관계가 수립된 뒤로는 기독교의 국내 선교가 묵인되었다. 그 뒤 주로 미국ㆍ캐나다 등에서 파견된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사업 외에 근대적 교육ㆍ의료 사업 및 자선 사업 등을 병행하면서 개화를 추구하는 청년지식인ㆍ중소지주ㆍ상인들에 영향을 주었다. 개신교는 자립적 중산층의 형성이 비교적 빨랐던 관서 지방에서 가장 왕성하게 수용되었다.

개신교가 한말 사상계에 준 가장 큰 공헌은 개인의 발견에 있다. 가족 윤리와 충군애국사상을 강조하는 유교와는 달리 개신교는 신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개인주의를 강조하였다. 이로써, 인간의 주체적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한 자유주의ㆍ평등주의 등 근대적 정치 이념의 정립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또, 개신교 선교사가 주동이 되어 설립한 교회나 학교에서 영향을 받은 한국인들은 교회 또는 학교 내 활동 경험과 서구 지식을 바탕으로 민주적 국민국가 건설 내지 독립을 실현하기 위한 각종 정치ㆍ사회 운동에 가담하였다. 서재필의 독립협회와 안창호의 신민회는 그 좋은 예이다. 그리고 개신교의 청교도 정신과 직업소명 의식은 자립적 중산층의 직업 윤리를 강화해주는 효과를 낳았다.

[불교ㆍ대종교]

조선 시대에 불교는 억불숭유 정책 때문에 신장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880년대에는 개화승 이동인(李東仁)ㆍ탁정식(卓廷植) 등이 대외 활동을 벌이고, 또 일본 불교가 전래, 1896년에 이르러서는 승려의 입성금지령(入城禁止令)이 철폐되었다. 이 시기의 불교는 현실 문제에 초연했기 때문에 괄목할만한 교세 확장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반면 일제의 보호를 받는 일본 불교는 계속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일제에 의해 국권이 위태롭게 되자 1909년에 나철(羅喆)에 의해 우리 민족의 원시 신앙을 체계화한 민족 종교인 대종교(大倧敎)가 창건되었다. 환인(桓因)ㆍ환웅(桓雄)ㆍ단군(檀君)의 삼신(三神)을 섬기는 대종교는 일제 강점 뒤 만주 및 중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의 신앙 체계로서 성장하였다.

[교육ㆍ언론ㆍ학문ㆍ기타]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설립된 근대적 교육기관은 원산에 민간인이 설립한 원산학사(元山學舍)와 통역관 양성을 위해 외아문(外衙門)에 부설된 동문학(同文學)이었다. 정부는 1886년에 본격적인 서양식 교육 보급을 위해 미국인 교사를 초빙해 육영공원(育英公院)을 개설하였다. 또 같은 해 선교사들에 의해 배재학당ㆍ이화학당도 설립되었다. 갑오경장 이후에는 새로운 학제가 실시되면서 소학교ㆍ중학교ㆍ사범학교ㆍ외국어학교 등 관립학교가 많이 생겨 근대적 교육이 보편화되었다.

1905년을 전후한 애국계몽운동을 통해 독지가의 사재(私財), 국민의 성금, 종교 단체의 재정적 후원 등으로 운영되는 사립학교, 즉 사학(私學)이 크게 일어났다. 특히 1905∼1910년 간에는 개신교 계통의 학교 설립이 활발해 미션계 학교는 그 당시 전체 학교수의 3분의 1이 되었다. 그 결과 1910년에는 전국의 학교수가 2, 000 여 개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가1908년에 〈사립학교령〉, 〈교과용도서검정규정〉 등을 발표, 사학을 규제해 교육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모색했던 애국계몽운동은 많은 제약을 받았다.

1883년에 최초의 근대적 신문 ≪한성순보 漢城旬報≫가 창간되었다. 이것은 1886년에 ≪한성주보 漢城周報≫로 개칭되었는데, 주로 한문으로 쓰여진 관보적 성격의 신문이었다. 또 1896년에 이르러 최초의 순한글 민간지인 ≪독립신문≫이 서재필에 의해 발간되어 민권ㆍ법치주의ㆍ주권 수호 등 독립 의식을 각성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1898년에 이르러 양홍묵 (梁弘默)의 ≪매일신문≫, 남궁 억ㆍ유근(柳瑾) 등의 ≪황성신문 皇城新聞≫, 이종면(李鍾冕)의 ≪제국신문≫ 등이 발행되었다. 러일전쟁 후인 1904년에 영국인 배델(裵說, Bethell, E.)과 양기탁(梁起鐸)이 ≪대한매일신보≫를, 1906년 오세창(吳世昌)이 ≪만세보≫를 발간하였다.

그 중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고 정부의 실정(失政)을 비판하면서 국권회복운동에 앞장선, 그 당시 발행 부수가 가장 많은 민족언론지였다. 그 뒤 일제통감부에서 1907년 〈신문지법〉, 1909년〈출판법〉 등으로 한국인에 의한 언론 활동을 제한하고 검열을 강화하자 민족 언론은 쇠퇴하였다.

국어연구 분야에서는 주시경(周時經)이 ≪독립신문≫을 통해 한글표기법의 통일 작업을 모색하다가 1906년 ≪국어문법≫, 1908년 ≪국어문전음학≫ 등을 저술하였다. 또 유길준은 1890년대에 작성한 ≪조선문전≫을 개고해 1909년에 ≪대한문전≫을, 지석영(池錫永)은 1905년에 한글의 문자 체계를 확립한 〈대한국문설〉을 발표하였다. 이능화(李能和)는 1906년 학부에 국문법에 대한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이와 같은 국문에 대한 민간 학자들의 관심 제고로 정부에서는 1907년 학부에 ‘국문연구소’를 설치하였다. 이 연구소에서는 1909년 국문의 연원, 자체(字體)와 발음의 연혁, 철자법 등 11항목에 대해 통일된 의견을 정부에 제출하였다.

한말에는 국사 연구도 활발하였다. 박은식ㆍ장지연ㆍ신채호(申采浩) 등은 신문ㆍ잡지 등을 통해 국사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 역사상의 영웅들을 소개, 민족 정신을 고취하였다. 김택영(金澤榮)은 ≪역사집략≫ 등 국사교과서를 저술했고, 현채(玄采)는 저술ㆍ번역 활동을 통해 근대적인 역사서술 방법론 도입에 기여하였다. 또 최남선(崔南善)은 1910년에 조선광문회를 조직해 고전, 특히 실학자들의 저술을 발굴, 간행하였다.

1900년 이후 서양의 문학 작품이 번역, 소개되면서 전통적 소설체를 탈피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한글 문장을 사용한 신소설이 나타났다. 신소설은 미신 타파ㆍ신교육ㆍ신사상ㆍ독립의식 고취 등 계몽적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주제면에서 구태의연한 권선징악적 범주를 탈피하지 못하였다. 이인직(李人稙)의 〈혈의 누〉, 이해조(李海朝)의 〈자유종〉이 신소설의 대표작이다.

음악ㆍ미술 등 예술면에서는 양반들 사이에서는 시조, 서민들 사이에서는 〈춘향가〉ㆍ〈심청전〉 같은 판소리가 계속 유행되었고, 미술에서도 전통적 동양화가 계승되는 가운데 서민들이 개발한 민화가 새로이 등장하였다. 또, 한말 개신교의 찬송가에서 영향을 받은 서양식의 악곡에 맞추어 부르는 신식 노래, 즉 창가(唱歌)가 유행했는데 이들은 독립ㆍ애국ㆍ신교육ㆍ신문화를 주제로 하였다.

<유영익>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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