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16 (일) 17:38
분 류 사전1
ㆍ조회: 5276      
[조선] 조선 개화기의 국제 관계 (민족)
조선(2)(국제관계)

세부항목

조선
조선(1)(정치) 1
조선(1)(정치) 2
조선(1)(경제) 1
조선(1)(경제) 2
조선(1)(사회)
조선(1)(문화)
조선(1)(대외관계)
조선(1)(연구사)
조선(2)(1864년∼1910년대의 조선)
조선(2)(국제관계)
조선(2)(정치)
조선(2)(사회경제)
조선(2)(사상ㆍ종교)
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흥선대원군의 쇄국 외교]

19세기 후반기는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의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동양에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에 잦아진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양이(洋夷)에 대한 위기 의식으로 흥선대원군 치하의 조선 정부는 중국 및 일본과 전통적인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을 고수하는 한편, 서양에 대해서는 쇄국양이 정책을 취하였다.

서양과의 통상ㆍ외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은 서양의 무력 침략은 물론 유교 질서를 부정하는 서학(西學: 주로 천주교)의 침투를 막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원군은 1860년대에 조선과 접경하게 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왔을 때, 천주교 신자 남종삼(南鍾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국 및 프랑스의 세력을 동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정부 내의 보수주의자와 유학자들의 위정척사론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에 대해 문호를 폐쇄하고 국내의 천주교도들을 탄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이러한 쇄국 및 천주교 박해정책은 ‘은둔국 조선’에 대한 프랑스 및 미국이 무력 행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로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도전을 받았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

이후 대원군은 양이쇄국 정책에 박차를 가해, 변방 수비를 강화하고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강한 쇄국 의지를 내외에 보여주었다. 한편, 1868년 메이지유신 후, 근대적 외교ㆍ통상 관계의 수립을 요망해온 일본의 협상 요구도 서계문제(書契問題)를 구실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1873년 말에 고종이 친정(親政)을 개시하면서 지양되었다.

[고종 치하의 국제 관계]

대원군 하야 이후 고종 치하의 조선 정부는 일본과의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1876년에 일본과 처음으로 근대적 조약(강화도조약)을 맺었다. 그 뒤 점차 서양에 대해서도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그 결과 조선이 일본에게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까지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 이외에 미국(1882)ㆍ영국(1883)ㆍ독일(1883)ㆍ러시아(1884)ㆍ이탈리아(1884)ㆍ프랑스(1887)ㆍ오스트리아(1892)ㆍ벨기에(1902)ㆍ덴마크(1902) 등 9개국과 차례로 외교ㆍ통상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시기에 맺어진 열국과의 조약은 형식상 자주독립국간에 체결된 조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조선에게 불리한 치외법권(治外法權)ㆍ고정관세(固定關稅, 혹은 협정관세)ㆍ최혜국조관(最惠國條款) 등 요소가 포함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 시기 조선의 외교는 주로 국내에 주재한 외국 공사를 상대로 하는 소극적인 외교였다. 조선은 1887년과 이듬해에 일본과 미국에 각각 공사관을 개설하고 외교 사절을 상주시켰고, 1890년대 이후 유럽 각국에도 공사관을 설치했지만 이들 해외 공관은 적극적인 외교ㆍ통상을 추진하지 못하였다.

조선과 청나라는 1894년까지 전통적인 사대조공 관계를 지속하였다. 청나라는 1879년 일본이 유구(琉球)를 병탄하기 전까지 조선 문제에 무관심해 조선에 종주권을 강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1860년 이후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 가능성과 일본의 조선 침략을 예방하기 위해 조선이 서양제국과 조약을 체결, 이들을 견제하도록 권도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880년대 초 청나라의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은 “조선은 원래 중국의 속방이나 내치ㆍ외교는 자주”라고 하면서 미국과의 조약을 알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82년에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군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병자호란 이래 처음으로 조선에 군사 개입을 하였다. 군란 진압 후 청나라는 군란의 주모자로 알려진 대원군을 청국으로 구치하고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였다. 또, 조선에 고문관과 군사교관을 파견하는 등 고압적인 간섭 정책을 폈다. 1885∼1894년 간에는 위안스카이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로 임명, 파견해 조선의 내외 정치를 노골적으로 간섭, 종주권을 더욱 강화하였다.

그러나 1894에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또는 馬關條約)으로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모두 상실하였다. 그 뒤 청나라는 조선과 통상적인 외교ㆍ무역 관계를 유지하였다. 메이지유신 뒤 일본은 제국주의 열강의 수법을 모방해 조선 침략을 획책하였다. 일본의 조선침략 정책은 황국사관(皇國史觀)에 입각한 일본의 국수적 민족주의, 러시아의 남하를 예방해야 한다는 전략적 동기, 메이지 정부에 대한 반대파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려는 정치적 동기, 그리고 통상을 통한 경제적 이익 추구와 과잉 인구의 해외 유출이라는 식민주의적 고려 등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형성되었다.

일본의 대한정책은 일본 내의 상황과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우선 순위 내지 실현 방법이 바뀌었지만, 끈질기게 추구되어 마침내 1910년에는 조선을 병탄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일본은 1876년에 조선과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체결해 부산 이외의 2개 항구 개항, 조계설치권ㆍ무관세무역권ㆍ일본화폐유통권 등을 획득, 1883년까지 조선 시장에 독점적으로 침투하였다. 1880년 이후 일본은 조선에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조선의 중견 관료들을 자기 나라에 초청, 일본의 근대 문물을 견학하게 하여 조선이 일본의 문명개화상을 모방하도록 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제물포조약으로 군대 주둔권을 획득한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나라 세력의 확대에 불안을 느끼고 1884년 말 친일개화당의 갑신정변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3일 만에 실패함으로써 오히려 청나라의 대한간섭 정책을 조장시켜준 결과가 되었다. 그 뒤 일본은 1885년 톈진조약을 체결, 한반도에서 청국과의 세력 균형을 꾀했으나, 조선에 대한 정치적ㆍ경제적 영향력은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동안 군사력을 키워온 일본은 1894년의 동학농민의거를 계기로 청일전쟁을 도발하고, 승리함으로써 한반도에서 청국 세력을 축출하는 한편, 조선에 대해 서구 열강과 본격적인 제국주의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청일전쟁 중에 일본은 조선에 친일 정권을 수립해 보호국화 하려는 적극간섭 정책을 추진하였다. 일본의 지나치게 고압적인 간섭 정책은 도리어 조선 정부 내에서의 반일친러파를 형성시켰다. 이에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친러파의 거두인 민비를 시해해 상황을 호전시키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이듬해에는 아관파천이 이루어져 일본 세력은 조선에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일본은 일본 다음으로 조선에 가장 예민한 관심을 보인 러시아와 협상을 벌이면서 조선에서의 이권 확충에 주력하였다. 1898년 니시―로젠협정으로 러시아로부터 조선에서의 상공업상의 우월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1900년 이후에는 ‘만한교환조건(滿韓交換條件)’의 협상을 러시아에 제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협상이 여의치 않자 삼국간섭 이래 계속 군비를 증강해온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고 결국 1904년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서 구축하는 데 성공하였다. 포츠머스조약ㆍ태프트―가쓰라밀약ㆍ영일조약 갱신 등으로 러시아ㆍ미국ㆍ영국 등 조선에 이해 관계가 있는 나라들로부터 한국 지배를 승인 받은 일본은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 보호국화 하더니 1910년에는 이를 병합하였다.

미국은 조선이 외교 관계를 맺은 최초의 서양 국가였다. 1882년에 청나라 이홍장의 알선으로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은 거중조정(居中調停) 조항을 포함하고 있고, 또 협정관세율이 비교적 높게 책정되었다는 점 등으로 조선이 다른 나라와 맺은 조약에 비해 비교적 관대한 것이었다. 조선의 국왕과 외교담당자는 미국의 거중조정과 그 부력(富力)에 기대를 걸고 미국에 의존하는 정책을 택해, 미국으로부터 고문관ㆍ기술자ㆍ교사 등을 초빙함은 물론 미국인 선교사도 받아들였다. 1883년에는 미국에 보빙사를 파견하고, 1888년에는 워싱턴에 공사관을 개설하였다.

조선에 대해 내정불간섭 정책을 견지한 미국은 전략적 동기보다는 경제적ㆍ문화적 동기로 조선에 접근하였다. 미국은 처음에는 조선을 중시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가치에 회의를 느끼고 1885년에 주한공사의 직위를 격하시키는 등 소극ㆍ퇴영 정책을 택하였다. 미국은 내정불간섭 정책을 표방하면서 청일전쟁과 을사보호조약 체결시 조선측의 거중조정 요청을 무시하더니, 1905년에는 일본과 태프트―가쓰라밀약을 체결,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미국 정부가 주장한 내정불간섭 정책과는 달리 알렌을 비롯한 미국 외교관과 선교사들은 개화 세력과 제휴해 조선의 근대화를 도왔다. 그리고 1895년 이후 조선에 진출한 미국의 자본가는 운산금광 채굴권ㆍ철도 및 전철 부설권 등 알찬 경제적 이권을 획득하였다.

1860년 북경조약(北京條約)의 체결을 계기로 러시아가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하게 되자 조선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1860년대 초 러시아는 조선에 경흥부(慶興府)를 통해 여러 차례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측의 협상 거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갑신정변 후 청ㆍ일간의 대립이 격화되자, 조선 정부는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1884년에 한로수호통상조약(韓露修好通商條約)을 체결하였다. 그 뒤 청국이 조선에 노골적인 간섭 정책을 펴자 조선 국왕은 ‘친아거청책(親俄拒淸策)’의 일환으로서 2차에 걸쳐 한로밀약체결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청ㆍ일과 충돌을 원하지 않는 러시아는 조선의 보호 요청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1888년에 한로육로통상장정을 맺어 상권을 확장하는 데 그쳤다. 그 뒤 1891년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기공한 러시아는 청일전쟁 중에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고, 삼국 간섭으로써 일본의 요동반도 진출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1896년에 조선의 친러파와 주한러시아공사 베베르(Veber, K.)가 후원한 아관파천이 성공하자, 러시아는 조선에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파견하는 등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확대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1898년에 여순(旅順)ㆍ대련(大連)을 조차한 러시아는 요동반도 경략에 치중하는 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진출을 잠시 등한시하였다. 이는 1898년 일본과 체결한 니시―로젠협정에서 만주는 러시아가, 한국은 일본이 주도 장악한다는 만한교환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1900년 중국의 의화단사건(義和團事件)을 계기로 만주를 장악한 러시아는 그 해에 여순ㆍ대련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마산항을 점령, 그 조차를 요구하였다. 또 1903년에는 압록강 하류의 용암포(龍巖浦)를 점령, 그 조차를 조선 정부에 요구하는 등 적극침투 정책을 택함으로써 일본과 대립하더니 드디어 1904년에 러일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러일전쟁의 패배로 제정러시아의 침투는 중지되었다.

영국은 1830년대 이래 한반도에 관심을 나타냈으나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태도를 견지하면서 직접적인 접근을 보류해왔다. 그 뒤 1883년에야 치외법권과 낮은 관세율을 특징으로 하는 한영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이후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고 조선에 경제적으로 침투하는 데 치중하였다. 갑신정변 후 러시아의 한반도 침투 가능성이 높아지자 영국은 1885∼1887년간 거문도를 점령해 러시아 해군을 견제하였다. 그리고 1902년에는 일본과 동맹을 맺어 일본을 앞세워서 러시아를 견제하려 하였다. 그 뒤 1905년에 영국은 영일동맹을 갱신함으로써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였다.

1834년이래 카톨릭 선교사를 파견함으로써 조선에 관심을 보인 프랑스는 병인양요로 조선과 대결하다가 1887년에 조불수호통상조약(朝佛修好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카톨릭 선교사의 포교권을 인정받았다. 영국ㆍ프랑스ㆍ독일 등은 조선의 내정에 간여하지 않았으며, 조선에 진출한 다른 열강들과 경쟁하면서 각종 경제적 이권을 얻는데 주력하였다.

<유영익>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조선] 조선 개화기의 사상과 종교 (민족)
아래글 [조선] 조선 개화기 역사 개관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00 사전1 [알림] 이후의 내용은 '한국사 사전 2'에 이어집니다. 이창호 2010-07-05 1307
2999 사전1 [조선] 김우명의 졸기 (숙종실록) 이창호 2002-11-03 1638
2998 사전1 [조선] 김우명 (한메) 이창호 2002-11-03 1305
2997 사전1 [조선] 김우명 (두산) 이창호 2002-11-03 1214
2996 사전1 [조선] 김우명 (민족) 이창호 2002-11-03 1276
2995 사전1 [조선] 김육의 졸기 (효종실록) 이창호 2002-11-03 1316
2994 사전1 [조선] 김육 (한메) 이창호 2002-11-03 1245
2993 사전1 [조선] 김육 (두산) 이창호 2002-11-03 1411
2992 사전1 [조선] 김육 (민족) 이창호 2002-11-03 1809
2991 사전1 [조선] 회니시비-송시열과 윤증 (김갑동) 이창호 2002-11-03 2301
1234567891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