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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3 (일)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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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680      
[조선] 영조의 생애와 발자취 2 (이덕일)
화합·용서의 휴머니스트 영조 / 생애와 발자취

WIN / 통권 33호 1998년 2월호

(앞에서 계속)

사도세자와 영조가 생각하는 역적은 정반대

노론의 독주가 강화되자 소론이 반발했다. 1754년(영조 30) 발생한 「나주(羅州) 괘서(掛書) 사건」은 그 하나의 예다. 이는 소론 윤지(尹志)가 정국을 비방하는 글을 나주 객사에 붙였다가 발각돼 사형당한 사건이다. 이 사건 다음해 발표된 『천의소감』(闡義昭鑑)은 영조와 노론의 자기변명이었다.

영조는 『천의소감』에서 경종이 먹고 죽었다고 소문이 났던 게장(蟹醬)은 동궁에서 들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임인옥사」 때 사형당한 마지막 남은 노론 김용택(金龍澤) 등 5인을 신원했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노론 영수였던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문묘에 배향했다. 드디어 명분이나 실제에서 노론의 독주가 시작된 것이었다.

소론과 남인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정도가 됐다. 노론 영수 송시열과 송준길을 문묘에 종사한 것은 노론이 국시(國是)임을 공개리에 천명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를 소론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또한 사도세자도 노론에 반발했다. 1735년(영조 11) 출생한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와 달리 노론에 아무런 정치적 부채가 없었다. 사도세자는 노론을 부도덕한 정당이라고 보았다. 자신의 아버지인 영조 임금을 노론이 마음대로 선택했다는 이유였다.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사도세자의 주변 사람들의 역할도 컸다. 사도세자는 저승궁(儲承宮)에 거처하였는데 이곳의 내시와 궁녀들은 예전에 경종을 모셨던 인물들로 중간에 쫓겨났다가 다시 세자를 모시게 된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말했다. 사도세자는 이런 분위기에서 노론이 임금을 죽인 역적들이며 군부(君父)를 협박해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당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반면 영조는 자신을 모함한 소론이 역적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임금과 세자 사이의 정견의 차이가 두 사람의 갈등을 극대화화했으며, 이 갈등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소론에 대해 복수해 주기를 바랐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소론 영수인 유봉휘(柳鳳輝)와 조태구(趙泰耉)가 경종 때 한 일에 대해 설명하다가 『나는 비록 그들을 처단하지 못했지만 네가 아비의 원수를 갚아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한다. 영조 자신이 관계된 일이라 자신은 직접 소론을 처단하지 못하지만 세자는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았던 이들을 처단할 수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아들인 사도세자는 노론을 역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노론은 장차 임금이 될 세자가 자신들과 다른 정견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위험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조는 25세의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켰다. 사도세자는 여러번 집권당인 노론과 부딪쳤다. 이에 노론 김상로(金尙魯)는 영조를 찾아가 『동궁께서 선왕 때의 일에 대해 그릇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라고 알렸다. 영조가 세자를 불러 꾸짖자 세자는 『황숙(皇叔·경종)은 무슨 죄가 있습니까?』라고 항의했다 한다.

사도세자는 이처럼 노론에 대한 반감 때문에 대리청정 4년만인 28세 때(1762·영조 38년) 죽게 된 것이다.

사도세자의 묘는 경기도 화성에 있다. 사도세자의 묘 융릉(隆陵)에는 아직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채로 하얀 눈이 덮여 있었다. 밤새 내린 눈은 포근한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얀 솜이불처럼 따뜻하게 느껴졌다.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는 뒤늦게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며 「슬프게 생각한다」는 의미의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린다. 그리고 장례 때는 친히 나아가 정자각에서 곡을 하고 사도세자를 죽인 것은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렸다. 하지만 영조는 탕평책 이후 노론 중심의 정권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도세자의 죽음을 애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즉위년(1776) 존호가 장헌(莊獻)으로 추존됐다. 그리고 묘 이름도 수은묘(垂恩墓)에서 현륭원(顯隆園·정조 13)을 거쳐 융릉(1899년)으로 바뀌었다.

융릉에 세워진 무인석은 다소곳한 자세로 살풋하게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느 문·무인석이나 찡그리고 있지는 않지만 이처럼 확실하게 미소를 띠고 있는 것도 흔치는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무덤의 무인석도 어깨를 활짝 펴고 있는 경우는 없다. 이는 아마도 조선 양반들의 지향점을 말해 주는 것 같다. 이들은 자신을 뻣뻣하게 내세우면서 오만을 부리거나 인권을 강조하기 전에 인격의 완성을 도달해야 할 목표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끝없는 인격도야를 통해 사회적 보편성을 획득하려 했던 지고한 자세를 볼 수 있다. 이 점에서는 아마 영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성을 위한 사서(四書) 한글로 편찬

영조는 그 자신의 결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조선의 그 어느 임금보다도 자신을 수양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그는 조선의 역대 임금 중 가장 많은 경연(經筵)을 실시했다. 경연이란 당초 국왕에게 제왕학을 논하는 자리였으나 차츰 국정 현안을 논하는 자리가 되어갔다. 김영삼 대통령이 조선의 경연제도를 원용해 많은 전문가들과 국정 현안을 논의했으면 최소한 「자질」 운운하는 비판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환락에 빠진 연산군은 경연 자체를 폐지했을 정도로 경연은 괴로운 작업이었다. 이런 경연을 영조는 재위기간 동안 무려 3천5백여회나 실시했다.

영조는 민생·민심의 안정을 위한 전반적인 정책을 많이 실행했다. 서얼들의 사회참여 불균등을 해소하기 위해 서자도 관리로 등용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또 붕당의 폐해가 대를 이어가지 못하도록 동색(당파)끼리의 혼인을 금지했다. 사형수에 대해 3번 심의를 하게 해 신중을 기하게 했으며, 가혹한 형벌을 폐기해 인권 존중을 기했다. 신문고 제도를 부활시킨 점도 그러한 취지에서다.

영조는 또 자신이 학자였기 때문에 스스로 『어제경세문답』(御製經書問答) 등의 서적을 저술하기도 했으며, 『속대전』(續大典) 등의 법전을 편찬해 흔들리는 조선 후기 사회의 법적 기틀을 바로잡기도 하였다. 또한 『동국문헌비고』 같은 백과사전도 이 시기에 편찬되는 등 문예부흥의 기운도 일으켰다. 특히 여성들을 위해 『여사서』(女四書)를 한글로 번역·편찬하도록 했다. 인쇄술이 발달했음은 물론이다.

실학자 안정복이 『동사강목』(東史綱目)을 편찬해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도 특기할 만하다. 자신의 것을 잊고 무분별한 세계화를 주창하다 IMF에 종속된 오늘의 현실에 영조 시기의 국학진흥은 강력한 시사가 될 것이다.

애민사상(愛民思想)이 투철했음은 균역법의 시행과 그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1750년(영조 26)에 친히 홍화문(弘化門)에 나가 부역(賦役)에 대한 백성들의 호소를 직접 들은 후, 『지금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으나 구제할 수 없으니 장차 무슨 낯으로 지하에서 조종(祖宗·역대 임금)을 뵈올 것인가. 이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절로 난다』면서 양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역을 2필에서 1필로 감해 주기도 했다.

조선의 임금들이 대체로 술에 관대했던 데 비해 그는 술에 대해 엄격했다. 그는 여러 차례 금주령을 내려 술을 금했으며 위반자는 유배 보내기도 하고 노비나 수군(水軍)으로 충원하는 등 강력하게 대처했다. 심지어 제사에도 술 대신 식혜를 사용하도록 지시할 정도였다. 이는 술로 인해 일어나는 폐단을 금지하려는 의도였다.

흉년이 들 경우 영조는 술 뿐만 아니라 사치를 강력히 규제하였다. 잠옷도 비단이 아닌 목면으로 만든 것 하나만을 사용했으며 침구도 명주 이불과 요 하나가 전부였다. 침실에 병풍이나 기완(器玩·완상하기 위한 물건) 등 장식품도 못놓게 하였다. 반찬 가짓수도 적게 하고 소박한 식사를 했다. 『영조실록』은 영조의 소비생활이 여항의 웬만한 부잣집만 못했다고 적고 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지는 대목이다.

또한 여성들의 사치를 금하기 위해 고려 이래 부잣집 여성들의 중요한 치장이었던 가발(가체·加笙)를 금지시키고 대신 족두리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던 족두리는 사치를 금하려는 영조의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IMF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성찰을 요구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52년의 재위, 그러나 비운의 일가

영조는 27명의 조선 군주 중 가장 오래 재위했던 임금이나 그 일가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첫 부인 정성왕후 서씨는 자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조카 서덕수가 역적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66세 때 얻은 둘째 부인 정순왕후 김씨 또한 자식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사사건건 사도세자를 모함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정빈 이씨에게서 26세 때 바라던 첫 아들을 낳았으나 열살의 어린 나이로 죽는 슬픔을 겪기도 하였다. 42세의 늦은 나이에 영빈 이씨에게서 낳은 둘째 아들 사도세자는 그 자신이 직접 뒤주에 넣어 죽이기도 하였다.

그는 총 7명의 딸을 낳았다. 모두 후궁의 몸에서 낳았으므로 옹주다. 그중 정빈 이씨가 낳은 화순옹주(和順翁主)는 조선시대 왕가 여인 중 유일한 열녀다. 그녀는 현재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김한신(金漢藎)에서 출가했는데 월성위(月城尉) 김한신은 바로 명필로 이름난 추사 김정희의 증조부다. 성품이 어질고 정숙한 화순옹주는 부군 월성위가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38세라는 젊은 나이로 죽자, 일절 곡기를 끊고 물 한방울도 입에 대지 않고 통곡하다가 결국 10여일만에 남편을 따라 죽고 말았다.

영조는 누차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일렀지만 끝내 자신의 명을 거부한 채 죽어간 화순옹주에게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다. 지금 추사고택에 남아 있는 열녀문은 영조의 손자인 정조(正祖)가 내린 것이다.

1776년 3월 그는 영욕과 회한으로 얽힌 83년의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구리시의 원릉에는 영조와 함께 정순왕후 김씨가 묻혀 있다. 영조의 세제시절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며 마음 졸였던 정성왕후 서씨가 곁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순왕후 김씨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노론가의 여인이다. 영조가 죽을 당시는 노론의 세상이었던 것이다.

사도세자는 정신병자인가 당쟁의 희생양인가

이덕일 <月刊중앙 WIN 기획위원>

사도세자가 비참하게 죽은 이유를 많은 사람들은 그의 정신병 때문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방영되었던 TV 드라마 사극들은 그렇게 표현해 왔다. 이런 시각을 지닌 TV 사극들이 주요 재료로 삼은 책은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다. 혜경궁 홍씨가 바로 사도세자의 부인이었던 점이 『한중록』을 별다른 자료 검증 없이 믿게 해 왔다. 『한중록』은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영조의 괴퍅한 성격과 사도세자의 정신병으로 돌리고 있다. 영조에 대한 기술을 보자.

「사형수 심리하시는 일 등 대궐에서 말하는 불길한 일에는 자주 세자를 곁에 앉으라 하시고 … 밖에서 정사하시고 돌아오실 때 입으신 채로 오셔서 동궁을 부르시면서, 「밥 먹었느냐?」하고, 물으셔 대답하오시면, 그 대답을 들으신 후에 그 자리에서 귀를 씻으시고, 씻으신 물을 화협옹주 있는 집 광창을 통해 대궐 담 너머로 버리시더라」

영조에 대한 『한중록』의 기술은 편집증 환자 그것에 다름아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기록은 더 심하다.

「그 유월부터 화증이 더하셔서 사람 죽이기를 시작하시어 … 사람을 죽이고야 마음이 조금 풀리시는지, 그때 나인 여럿이 상하게 되니… 」

「소조(小朝·사도세자) 하시는 일이 극도에 달하여 여지없이 망극하신지라. 웃대궐을 수구(水口·하수구)로 가신다 하시다가 못 가시고 도로 오시니 그때가 윤 오월(사도세자가 죽던 달) 열하루 이틀 사이라… 정신을 못차리실 적은 열(火)에 뜨이어 하시는 말씀이, 칼을 차고 가 죽이고 싶다 하시니… 」

혜경궁 홍씨가 그린 사도세자는 편집증을 넘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살인마적 정신병자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사도세자에 대한 다음 기록을 보면 『한중록』의 진실성에 의심이 간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正祖)의 명에 의해 기록한 사도세자의 공식 기록인 「현릉원(顯陵櫚)행장」이다.

「이때 (사도세자가 죽기 2년 전) 사도세자가 오래 묵은 병이 있어 영조께서 더운 물로 목욕하라고 명하여… 세자는 산성(山城)에서는 무기를 검열하였다. 연(輦·어가)이 지나는 곳마다 부로(父老)들이 얼굴을 가리며 다투어 지켜 보았다.

사도세자는 수레를 멈추게 하고 농촌의 괴로운 일을 묻더니 세금을 감면하라고 명하자 길가에서는 크게 기뻐하였다. 한 호위무사의 말이 콩밭으로 달려들어가 콩을 짓밟고 콩잎을 뜯어 먹자 지방관을 불러 주인에게 후히 보상해 주도록 하고… 읍내의 연로한 노인들을 위로하면서 지방의 선비들을 초대하였다」 행장은 사도세자에게 병이 있었던 사실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외 모든 기록은 살인마에 가까운 정신병자가 아니라 애민사상에 투철한 성군(聖君)의 자질을 갖춘 한 세자의 모습이다. 두 기綏?중 어느 것이 진실에 가까울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閑中錄)은 다른 말로 『한중록』(恨中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글자 그대로 「한 속에서 기록한 글」이란 뜻이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을 기록한 가장 큰 목적은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하자는 것이 아니다. 혜경궁 홍씨는 물론 사도세자의 비참한 죽음도 한스럽게 여겼지만 그보다는 친정인 풍산 홍씨가 자신의 아들인 정조에 의해 멸문의 화를 입은 것을 더욱 한스럽게 여겼다. 정조는 즉위한 후 대간의 청을 받아들여 자신의 외할아버지, 즉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를 유배보내 죽게 했으며 자신의 외삼촌들, 즉 혜경궁 홍씨의 형제들을 죽여 버렸다. 정조가 외가를 도륙낸 이유는 외할아버지 홍봉한을 비롯해 작은 외조부 홍인한 등 풍산 홍씨가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데 일조를 한 노론 영수 집안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친정을 초토화한 후 혜경궁 홍씨에게 그녀가 7순이 되는 해에 외가를 신원시켜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4년 전에 죽고 말았다. 이에 혜경궁 홍씨는 자신의 친정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아무 관련이 없으며 친정의 신원은 선왕인 정조가 약속한 사항임을 순조(純祖)에게 호소하기 위해 쓴 것이다.

결국 사도세자는 노론에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지녔던 까닭에 아버지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부인으로부터도 버림을 당한 조선 역사상 가장 비운의 세자다. 소현세자 또한 인조와 반대되는 정치적 입장을 지녔다가 아버지로부터 독살당한 비운의 세자이다. 다만 소현세자는 아들들마저 비참한 죽음을 당했는데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가 임금이 된 점이 다르다면 다르다 할 것이다.

■ 사진설명

① 소론 출신 이인좌는 1728년 난을 일으켜 청주성을 점령하고 목천·청안을 거쳐 안성·죽산에 이르렀으나 관군에 의해 진압됐다.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영조는 적극적인 탕평책을 실시한다. 사진은 청주 읍성.

② 아산시 온양호텔 내에 있는 靈槐臺. 영괴대는 영조와 사도세자가 온양에 요양을 오면서 사도세자가 무술을 연마하던 화살터다. 정조 19년(1795)에 건립됐으며, 영괴대 글씨는 정조의 친필이다.

출전 : WIN 1998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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