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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10-10 (수) 20:47
분 류 사전1
ㆍ조회: 295      
[조선] 조공 (한메)
조공 朝貢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서 중국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정기적으로 중국에 사절을 보내 예물을 바친 행위.

조공은 일종의 정치적인 지배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는 방물(方物;지역 특산물)을 휴대하고 정기적으로 천자(天子)를 배알하여 군신지의(君臣之義)와 신례행위(臣禮行爲)를 행하였고, 천자는 이를 통하여 여러 제후들을 통제하고 지배하였다. 그 뒤 이 제도는 한족(漢族) 중심의 중화 사상을 기초로 주변 이민족을 위무·포섭하는 외교 정책이 되었다. 주나라 이후 제후국들 사이에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事大),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사랑해 주는(字小) 예가 있었는데 이러한 사대·자소는 결국 대소국간에 우의와 친선을 통한 상호 공존의 교린의 예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춘추 전국 시대(春秋戰國時代)로 접어들자 큰 나라는 약소국에 대하여 무력적 시위로 일방적인 사대의 예를 강요하였고 이러한 사대의 예에는 많은 헌상물을 수반하는 조빙 사대(朝聘事大)가 나타났다. 계속된 전쟁으로 인하여 힘의 강약에 의한 지배, 종속관계 대신 헌상물을 전제로 한 조빙 사대가 되었으며 이러한 행위는 한(漢)나라 이후 중국과 주변 국가 사이에 제도화되어 조공과 책봉이라는 독특한 동아시아의 외교 형태로 나타났다. 따라서 조공·책봉 관계는 약소국인 주변국에게는 자국의 안전을 위해 공식적인 교류를 통하여 중국의 침략을 둔화시키고 상호 불가침의 공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었다.

한편 중국으로부터 받은 책봉은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되고 국제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서, 중국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동아시아 국제 관계의 규범으로 정착되었다. 19세기 이전 만주·몽고·티베트·안남 및 중앙 아시아 모든 나라는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중국에 조공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영국·프랑스 등 유럽의 나라가 중국에 통상을 요구할 때도 이 형식을 따랐다.

한국의 대중국 관계도 국제 관계의 보편적인 외교 규범을 지키면서 동아시아 외교 체제에 편입된 것으로, 이러한 외교 행위를 통하여 국가의 생존권을 보존하고 공식적인 무역 및 기타 문화교류를 하였던 것이다.

[한·중 관계에서의 조공]

한국과 중국과의 조공관계는 4세기 후 삼국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32년(고구려 대무신왕 15) 후한(後漢)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기록이 나오는데 백제와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전형적인 조공 관계는 고구려가 243년 전연(前燕)에 대하여 칭신(稱臣)한 때부터라고 볼 수 있다. 그 뒤 통일 신라와 당(唐)나라의 관계는 문화 교류가 빈번하여 유학생도 많았고, 906년 김문위(金文蔚)는 중국 과거에 급제하여 책봉사로서 귀국하기도 하였다. 고려와 송(宋)나라와의 관계도 신라와 당나라 관계의 연장이었으나 원(元)시대에 들어서면 압제에 의한 지배성이 강한 종속적 성격으로 변질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조공 관계가 제도적으로 정비되어 전형적인 조공 관계가 성립되었다. 그러나 중국과의 관계가 모두 조공의 성격은 아니었다. 양국 관계는 청병(請兵)·출병, 연호·역(曆)의 채용, 내정간섭·인질, 공물과 회사(回賜)의 경제적 관계, 봉전을 비롯한 의례적·형식적인 관계 등의 전형적인 조공 관계와 월경(越境)·범경(犯境)·교역·문화 교류 등 비조공적인 관계로 구분하여야 한다.

조공 사행에는 동지(冬至)·정조(正朝)·성절(聖節)·천추(千秋)의 정기적인 사행과 사은(謝恩)·주청(奏請)·진하(進賀)·진위(陳慰)·진향(進香)과 압마(押馬)·주문(奏聞) 등의 임시 사행이 있었다. 사행의 임무는 봉전·애례(哀禮)·진하·진위·문안·절사(節使)·진주(陳奏)·청구(請求)·석뢰(錫賚)·견폐·칙유(飭諭)·역서(曆書)·교역·강계(疆界)·범월(犯越)·범금(犯禁)·쇄환(刷還)·표민(漂民)·추징(推徵)·군무(軍務)·왜정(倭情)·양박정형(洋舶情形) 등 매우 다양하였다.

사행의 인원은 사(使) 2명, 서장관 1명, 대통관 3명, 압물관 24명 등 정관 30명으로 이루어졌다. 조공물은 세폐(歲幣)와 방물이 있는데 세폐의 품목은 황금(黃金)·백은(白銀)·수우각(水牛角)·호대지(好大紙)·호소지(好小紙)·표피(豹皮)·수달피(水獺皮)·녹피(鹿皮)·청서피(靑黍皮)·다(茶)·호숙(胡叔)·소목(蘇木)·호요도(好腰刀)·순도(順刀)·오과용문염석(五瓜龍文簾席)·잡채화석(雜彩花席)·백저포(白苧布)·백면주(白綿紬)·홍면주(紅綿紬)·녹면주(緣綿紬)·각색 세목면(細木綿)·각색 세마포(細麻布)·마포(麻布)·쌀 등이었고, 방물은 황세저포(黃細苧布)·백세저포(白細苧布)·황세면주·백세면주·용문염석·황화석(黃花席)·만화방석(滿花方席)·잡채화석·백면지(白綿紙) 등이었다.

중국은 이에 대한 회사 품목으로 채단(綵緞)·초피(貂皮)·내장단(內粧緞)·운단(雲緞)·안마(鞍馬) 등을 보내왔다. 행로는 육로를 이용하였으며 한양(漢陽)을 출발하여 북경까지 40일의 여정과 북경 체류기일을 합쳐 대략 5개월이 걸렸다. 준비해 간 조공품은 예부를 통하여 황제에게 헌상하였으며 황제는 국왕에 대한 회사와 사행의 정관 전원과 수행원 30명에게 하사품을 주었다. 사행원은 사적으로 중국 학자들과 접촉하여 학술 교류와 문화 교류를 갖기도 하였다. 사행이 귀국하면 국왕은 삼사(三使;정사·부사·서장관)를 소견하였고, 서장관은 사행 중의 보고 들은 사실을, 역관 중 상위자는 문안(文案)을 작성하여 중국의 정정(政情)을 보고하였다.

한편 중국은 조선 사절을 통하여 자국의 의사전달을 하였고 칙사를 직접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점에서 볼 때 한·중 조공 관계는 조공 행위 자체가 종속적·예속적 굴복이 아니었고 중국과의 정치·경제·문화 교류를 위한 형식과 절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윤내현>

출전 : [한메파스칼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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