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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31 (월) 15:41
분 류 사전2
ㆍ조회: 700      
[조선] 현종 행장 2 (실록)
현종 대왕 행장 2

(앞에서 이음)

계축 14년 정월에 경기 지방이 재해를 입었다 하여,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大同米)를 차등있게 감하라고 명하였다.

2월에 명을 내려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조적의 수를 뽑아내어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팔도의 감사와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 등의 유수(留守)에게 유시하기를, "내 생각건대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한다.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는 진실로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히 여기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옛날 제왕들은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알고 농사짓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의 빈풍(豳風)과 《서경(書經)》의 무일(無逸)이 어찌 후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종(祖宗)에서는 백성을 잘살게 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먼저 전제(田制)를 바르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농서(農書)를 번역하고 풀이하여 가르치고, 토지를 이미 시험해 본 방법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지어서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였으며, 또 농사를 권장하는 글을 반포하는 등 무릇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여러모로 심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때에 쌀이 붉게 썩고 돈꿰미가 썩어 셀 수 없는 것1147) 과 당(唐)나라 때에 쌀 한 말 값이 3전이었던 것1148) 도 그다지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었다. 그런데 과인에 이르러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수재와 한재가 없는 해가 없었고, 기근의 참혹함이 지난해에 와서 극도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노약자들은 구렁텅이에 죽어 뒹굴고 백골이 서로 잇따르고 있으나 이주시킬 만한 곳이 없고 구제할 만한 곡식도 없다. 내 이 때문에 잠자리가 편치 아니하고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으므로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하는 계책을 얻어 위급한 지경에 이른 백성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만 있게 되어 조종(祖宗)께서 3백 년 동안 길러온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지고, 뽕나무와 삼이 있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으니, 아,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연유를 구명해 보면 비록 연운(年運)이 좋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나 실로 사람이 한 일이 미진하여 그런 것이다. 만일 옛날처럼 3년을 농사지어 1년 먹을 것이 축적되고 9년을 농사지어 3년 먹을 것이 축적되었다면 떠돌거나 죽는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대체로 농사에서 힘써야 할 일은 때에 맞추어 하는 것과 힘을 써서 하는 것 이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미 제때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고 김매는 일에도 힘을 쓰지 않는가 하면, 제방을 쌓아 관개(灌漑)하는 이로움을 폐지한 채 수거(修擧)하지 않고, 거름을 주고 김매는 일도 대부분 소홀히 하여 힘쓰지 않고 있다. 아, 사농공상 가운데 오직 농민이 가장 괴로움을 겪고 있다. 추울 때에 밭갈이 하고 더울 때에 김매는 등 해가 다 가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데, 고을의 관리가 조세(租稅)의 상납을 독촉하는 정치가 소요를 일으키고, 장사꾼과 놀고 먹는 무리가 또 뒤따라 좀먹고 있으니, 어떻게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지금 봄날이 따뜻해져 토맥(土脈)이 처음으로 열리었으니, 보습을 손질하는 정월은 이미 멀어지고, 밭갈이하는 2월이 문득 박두하였으므로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 우역(牛疫)이 치성해지면서부터 백성들은 어깨가 붉게 문들어진다고 탄식하고 있다. 날카로운 보습을 제대로 쓸 수가 없으므로 흙을 일구는 밭갈이를 장차 폐지하게 되었다. 옛날 왕공(王公)이 경작하는 예를 몸소 행하여 천하의 백성을 거느렸다. 내가 경사 대부(卿士大夫)와 함께 옛날의 제도를 본받아서 사방의 주창이 되려 하였으나, 이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실로 불만스럽게 여긴다. 아, 큰 흉년을 치른 전지가 황폐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살아갈 대책이 막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마하는 도리는 급히 해야지 느슨히 해서는 안 되며 권장하는 방법은 서서히 해야지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와 함께 다스리는 자는 오직 방악(方岳)1149) 뿐이며, 백성과 가까운 직책은 수령만한 사람이 없다. 경들은 나의 명농(明農)1150) 의 뜻을 체득하여 수령들에게 포고하여, 밭두둑을 출입하되 여리(閭里)를 소요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전야(田野)를 살펴 보되 백성의 농사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라. 저수지 중에 관개(灌漑)할 만한 것은 수리하고, 도랑 중에 소통할 만한 것은 소통시키도록 하라. 백성의 힘이 넉넉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고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여, 갈고 씨앗 뿌리는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김매고 북돋우는 시기를 어기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여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가 모두 일구어지도록 힘쓰고 놀고 먹는 백성이 다 농사에 돌아가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백성이 본업을 즐거워하여 태만하지 않고 힘을 다해서 위로는 경상(經常)의 부세(賦稅)를 바치고 아래로는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소원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백성의 생업은 농사에서 안정되고 나라의 근본은 반석처럼 튼튼해질 것이다. 경들은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고 깊이 유념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작고한 참찬 송준길(宋浚吉)에게 의정(議政)의 직을 추증하라 명하고 문ㆍ무관 당상(堂上) 이상의 부모 중에 나이 70세 이상인 자에게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하고, 경평군(慶平君)ㆍ정명 공주(貞明公主) 및 종실 중에서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명하였다. 고려 공양왕의 능을 수호하도록 명하고 대신의 아내 및 친공신(親功臣)의 아내 중에 생존하고 있으나 살림이 궁핍한 자에게 음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3월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문ㆍ무 인사를 뽑았다.

4월에 가뭄이 갈수록 혹심하다 하여 교서를 내려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5월에 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며 수라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지하였다. 정원에서 단오첩(端午帖)을 제진(製進)할 것에 대해 계사를 올리자, 왕이 이르기를, "한재가 이처럼 혹심하니, 이런 형식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신해년1151) 이전의 군병과 노비(奴婢) 중에 도망했거나 죽은 사람 및 임자년1152) 에 상납하지 아니한 신역(身役)과 계축년에 납입해야 할 군포(軍布)를 탕감해 주도록 명하고 신해년 기병(騎兵)과 보병 중에 도망한 사람은 연한에 구애하지 말고 그 대역(代役)할 사람을 정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효종의 능을 옮기는 일로, 경유하는 양주(楊州)ㆍ광주(廣州)ㆍ여주(驪州)ㆍ이천(利川)ㆍ양근(楊根) 등 5개 고을의 대동미 징수와, 경기 고을의 봄에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를 차등있게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경기ㆍ황해ㆍ전라ㆍ원양(原襄) 등 4도의 경술년1153) 조 전세(田稅) 중 미수된 것을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9월 29일에 계구릉 망곡례(啓舊陵望哭禮)를 거행하였다. 면례(緬禮)에는, 삼년복을 입지 않는 사람일 경우 시복(緦服)을 입는 예문(禮文)이 없는데, 왕이 예관(禮官)에게 특별히 명하기를, "기해년1154) 대상(大喪) 때에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기년(朞年)을 지난 뒤에 천담복(淺潭服) 차림으로 삼 년을 마쳤으니, 지금도 이 예에 의해 천담복 차림으로 3개월을 마치게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기해년 대상(大喪) 때에 궁중에서 실지로 삼년상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구영릉(舊寧陵)을 처음 모실 적에 능의 자리를 어디에다 잡을 것인지에 대한 의논이 빨리 정해지지 않아 기일이 촉박하였고 일을 감독하는 자가 다급하여 신중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봉축(封築)이 무너져서 빗물이 스며들었는데 누차 보수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봉심(奉審)한 신하들이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다만 그때마다 석회로 틈을 막았을 뿐이었다. 3월에 종실 영림령(靈林令) 이익수(李翼秀)란 이가 상소하여 그 사실을 말하니, 왕이 놀라고 슬퍼하면서 곧바로 익수를 불러 그 상황을 물어보았다. 익수가 능 위의 흙과 돌이 무너진 까닭을 낱낱이 말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 주 성왕(周成王)이 주공(周公)의 충성과 성스러움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바람과 천둥의 재이(災異)로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릉(先陵)에 변고가 있음을 모르고 계셨으니, 근년에 일어난 재이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익수에게 이르기를, "네가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바를 말하였으므로 내 아름답게 여긴다. 또 그릇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니, 매우 감격하였다." 하고, 드디어 옮겨 모시기로 뜻을 결정하였다. 대신ㆍ육경(六卿)ㆍ양사(兩司)에 명하여 능의 자리를 살펴보게 하고 또 익수로 하여금 대신을 따라가 같이 살펴보게 하였다.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민유중(閔維重) 등이 익수와 말다툼을 하여 함께 복명하지 않았다. 익수가 소를 올려 주달하고 또 아뢰기를, "구릉(舊陵)의 연월과 길흉(吉凶)에 구애받지 말고 속히 옮겨 모셔야 합니다." 하니, 왕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부수찬 조위봉(趙威鳳)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영릉(寧陵)을 봉심한 공경ㆍ대시(臺侍)가 돌아와서, 익수의 소가 헛말이 아니라고 아뢰고 주상은 '능 위 사면 팔방이 하나도 완전한 곳이 없다.'는 분부가 계셨다 합니다. 영릉을 봉안한 지 지금 15년이 되었는데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면 만세토록 전하는 교산(喬山)의 염려1155) 가 그지없습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을 영소릉(永昭陵)에 장사지낼 때에 황당(皇堂)의 기둥이 손상되었습니다. 여러 사자(使者)들이 그냥 덮어버리려 하자, 한기(韓琦)가 정색을 하며, '손상되었으면 바꾸어야 한다. 만일 장사의 날짜를 어겨 비용이 많이 날 경우 그래도 이 책임은 담당할 수 있지만 만일 구차히 이를 덮어버렸다가 뒤에 무너져서 임금의 의심을 초래할 경우 신하가 어떻게 그 책임을 담당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때 감독한 신하들이 무너지는 후환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일을 마치기에만 힘썼으니, 한기의 말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합니까? 역사(役事)를 감독한 관원도 물론 죄가 있습니다만, 흙을 덮은 데와 배치한 석물에 이상이 생겼다고 보고한 뒤로부터 전후로 봉심한 신하가 다만 회로 틈을 바르기만 하고 사방ㆍ팔면이 우려된 형세에 대해선 왕에게 아뢰지 않았습니다. 살펴보고도 몰랐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일 알고도 아뢰지 않았다면 그 죄가 실로 감독한 관원보다 더 큽니다. 능침(陵寢)을 봉심하는 것은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눈치만 살피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러한 습관이 그치지 않고 커진다면 비록 장릉(長陵)의 흙을 한 줌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1156) 전하께서 듣지 못하게 될까 신은 염려됩니다. 전하의 효성을 몸받지 아니하고 감히 기망을 자행함이 또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능의 일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나타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건만, 양사(兩司)에서는 침묵만 지킨 채 전후로 봉심을 성실하게 하지 않은 잘못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게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어리석은 신은 근심과 개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조위봉은 조경(趙絅)의 아들이다. 왕이 비답하기를, "네 소를 보니 개연(慨然)한 뜻과 충애(忠愛)의 정성이 말에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하였다. 지금 만세토록 계실 선왕 능침의 의물(儀物)에 완전한 곳이 없으므로 장차 부득이 옮겨 모셔야 하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전후 봉심한 신하가 만일 있는 것을 없다고 하였거나 큰 것을 작다고 하였다면 그 죄는 참으로 면하기 어렵다. 내가 실상을 조사해 내어 처리해야겠다. 근일 대각(臺閣)의 신하 중에 눈치를 슬슬 보는 자가 많은데, 누가 국가를 위해 분연히 이러한 말을 하는 자가 있겠는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대간이 모두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특별히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하교하기를, "전후 봉심하고 올린 문서를 상고해 보면 영릉의 석물에 틈이 생긴 뒤로 대신 이하가 봉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1157) 봄과 가을 두 번 봉심할 때에는 해조(該曺)가 별도의 의견을 내어, 다른 능의 예를 인용하여 본조의 당상이 나가 봉심하였을 뿐이었다. 이는 대신이 나가는 것은 중대한 일로 여기고 능의 사체는 도리어 가볍게 여긴 것이다. 또 영릉을 봉심하는 일이 어찌 다른 능과 비등할 수 있겠는가. 다른 능은 이와 같은 변고가 아직 없었다. 참으로 매우 놀랍다. 그때의 당상과 낭청(郞廳)을 아울러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에 전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참의 이준구(李俊耉), 정랑 이유원(李惟源), 좌랑 오시복(吳始復) 등이 모두 옥에 갇히었다. 또 하교하기를, "신해년1158) 에 봉심하고 올린 서계는 더욱 형편이 없다. 그때 봉심한 신하들을 아울러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라." 하였다. 그때의 대신 판부사 정치화(鄭致和), 선공감 제조 좌의정 김수항은 먼저 직을 파면한 다음 죄명을 기다리게 하고, 전 관상감 제조 남용익(南龍翼), 예조 좌랑 안한규(安漢珪) 등은 모두 옥에 가두고 관직을 삭탈하였다. 얼마 뒤에 한재로 인하여 심리를 청해 모두 석방되었다. 이에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하기를, "영릉 석물(石物)에 틈이 생긴 일은 국가의 큰 변고 중 이보다 더 큰 변고는 없습니다. 보충해 덮은 흙이 단단하지 않았거나 사람의 계획이 잘못되어 그러한 것입니까? 택조(宅兆)가 이롭지 못하고 신도(神道)가 편치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놀라고 두려워하셨을텐데 어떻게 마음을 안정하셨습니까? 처분이 어떻게 내릴지 귀를 기울이느라 밤낮으로 우울해 하던 중 전후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야 비로소 능의 일을 감독하였던 신하들과 봉심한 대신이 모두 죄를 받았으며 성상께서 능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하시어 분부를 내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불행 중 다행한 일로서 국가의 복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자, 심리하라는 명이 계시고 봉심한 대신의 불경하고 불충한 죄까지 모두 사면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대신을 극진히 대우한다고 할 만합니다만, 선왕을 섬기는 도리로 볼 때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심리한다는 것은, 죄가 크더라도 정상에 용서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만, 이번 봉심한 대신의 불경하고 불충한 죄에 대해 전하께서는 혹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불경ㆍ불충은 신하의 큰 죄로서 왕법(王法)에 있어서 용서하지 못할 바인데도 전하께서 이처럼 법을 굽혀 죄를 사면해 주시니, 신은 아마도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능침(陵寢)을 봉심하는 일은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두 대신이 성상의 뜻을 체득하지 아니하고 다만 인정에 얽매이어, 명을 받들어 봉심하고는 사실대로 아뢰지 않아 전하로 하여금 지금에 와서야 변고를 아시게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의 마음에 있어서 참으로 원수로 여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완전히 석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차라리 신하에게 제재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말지 감히 대신을 상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비록 이러한 생각이 계신다 하더라도 신릉(新陵)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곡진히 그들의 입장을 돌봐주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심리를 거행해서 마치 조위봉(趙威鳳)의 말에 색책(塞責)한 것처럼 하신단 말입니까. 아, 도로에서 전해 들은 바로는 탑전에서 다시 봉축(封築)하자는 말씀을 드린 자가 있다 하는데, 마음을 흉참(兇慘)하게 쓴 죄는 봉심한 신하보다 더 심합니다. 전하의 좌우에 모시는 대소의 신료가 이처럼 믿을 수 없으니 어찌 뒷날 능을 옮길 적에 영릉의 전일 근심이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재궁(梓宮)을 옮겨 모시는 일은 더욱 대신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신구(新舊)의 두 능에 직접 가시어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는 효도를 다하소서."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왕이 비답하기를, "네 소의 사연을 보니 나의 성효(誠孝)가 형편없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능의 일을 감독한 사람의 죄는 더없이 중대하다. 상소의 뜻도 또한 옳으나 그 밖의 일은 곡절이 각각 다르니, 뜬 소문은 사실과 틀리다." 라고 하였다.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아뢰기를, "의도가 음험하고 말에 조리가 없으며 위아래를 이간하고 있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으소서." 하고, 대사간 신정은 소를 올려 '장응일이 선왕의 능침에 일이 생긴 것을 빙자하여 간사한 계책을 부리려 한다.'고 배척하였다. 응교 이선(李選)이 또 소를 올려 논핵하였는데 그 내용에, "종통(宗統)ㆍ적통(嫡統)의 설은 당초에 화를 전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윤선도(尹善道)가 앞장서서 주동하고 조경이 뒤에서 응하였는데 능침의 일에는 또 얼굴을 바꾸어 나왔습니다. 그들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는 오로지 능의 구덩이에 물이 고이고 재궁(梓宮)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쩍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이끌고 일어나서 조정을 어지럽히고야 말려고 할 것입니다. 조위봉의 소가 익수의 뒤에 잇따라 나왔는데, 기회를 타서 교묘하게 중상하는 말이 도리어 칭찬의 비답을 받았습니다. 이번 장응일의 소가 또 천리에서 이르렀는데 10일 안에 이른 연왕(燕王)의 글과1159) 같은 바가 있습니다. 장응일의 죄를 어서 다스리어 간흉한 무리를 단속하소서." 하고, 장령 김수오(金粹五), 헌납 김석주(金錫胄)는 장응일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자고 청하였다. 왕이 경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선(李選)의 소는 말 뜻이 조리가 없다. 그가 장응일이 한 일에 노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능침에 저촉된 말을 하였다. 당초에는 처벌하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반드시 '장응일은 죄주지 않고 이선을 죄준다.'고 말할 것이므로 잠시 참고 있었다. 장응일이 올린 소의 사연도 올바르지 않으니 멀리 귀양보내고 이선은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9월에 구릉(舊陵)을 열어보니, 아무 탈이 없었다.

10월 7일에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에 옮겨 모셨는데, 관과 구덩이에 부수되는 물품에서부터 의위(儀衛)와 상설(象設)에 이르기까지 신중히 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내탕(內帑)1160) 에서 가져다 마련하였고 백성에게 징수하지 않았다.

능을 파려 할 적에 왕이 친히 구덩이를 보려고 하자, 김수흥ㆍ장선징 등이 힘껏 말렸다. 처음 능을 팔 적에 봉축(封築)이 견고하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미 옮겨 모신 뒤에 왕이 또 중신ㆍ근신ㆍ내신(內臣) 등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구릉(舊陵)의 구덩이에 물이 스며들고 벌레와 뱀의 자취가 있었으며, 또 더러 나무와 돌을 뒤섞어 쌓은 것도 있었다. 왕이 뭇 신하들이 큰 일을 신중히 하지 않은 데에 노하여 하교하기를, "구릉(舊陵)의 능 위의 석물을 이미 철거하여 헐어버렸으나 그때 간심(看審)한 도감의 당상과 낭청 등의 죄에 대해 형률을 상고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모두 잡아다가 가두게 하였다. 도감 당상 정치화(鄭致和)는 신해년1161) 에 봉심한 대신으로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 하여 관작을 삭탈당했다. 왕이 또 명하여 잡아다가 신문한 다음 사형을 감면하고 유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낭관 신명규(申命圭)ㆍ이정기(李鼎基) 등은 일죄(一罪)1162) 로 논하게 하자, 대간이 이를 여러 달 동안 논쟁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뒤에 대신의 말에 의해 사형을 감면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당초 구영릉의 자리를 잡을 적에 우의정 송시열이 실로 주장하였다. 이때에 와서 상소하여 '개축(改築)해야지 옮겨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구릉의 신혈(神穴)은 매우 편안합니다. 당초 땅을 한 자쯤 파본 뒤에 이미 구덩이에 탈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일을 맡은 신하들이 망극(罔極)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감히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신릉(新陵)이 길지임은 비록 옛날부터 일컬어오던 바입니다만, 어찌 지극히 편안한 땅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또 표석(表石)에 관한 일은 전하께서 이미 사간원의 비답에서 '이와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다.' 하였고, 국구(國舅)의 말은 곧 신을 지척(指斥)한 말이었는데 정지하라는 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마음에 실로 이것을 그르게 여기고도 강행을 하신 것이니 아마도 성신(誠信)으로 하여 뉘우침이 없게 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조정의 신하에게 물으시어 옳고 그름을 자세히 살핀 다음에 시행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결정한 뒤에야 사리를 얻게 되고 명분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다시 어물어물 구차히 하여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소서. 신이 또 듣건대, 성명께서 김만중(金萬重)이 상신을 공박 배척한 것은 무슨 기대가 있어 한 것이라 하셨다는데 외간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김만중이 기대한 바는 곧 송시열이다'고 합니다. 아, 김만중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 하더라도 어찌 신의 오늘날 처지가 스스로를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신에게 기대하였겠습니까. 성명께서는 신의 실정을 양찰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김만중의 위인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매양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소중하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어찌 오늘날 이처럼 성명의 알아줌을 받지 못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니, 왕이 비답하기를, "경의 소를 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고 의아해 하였다. 경이 선조(先朝)에 은혜를 받은 것이 특별하였으므로 내 생각으로는, 선릉(先陵)의 일을 위해 경이 반드시 물불을 피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은 경에게 바라던 바에 크게 어긋났을 뿐만 아니다. 능 안에 빗물이 스며들어 고여있는 상황과 석물이 탈난 일은 경이 익히 보고 들었으며, 현궁(玄宮)에 흠이 없음은 외면으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어찌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한단 말인가. 이게 내가 의혹하는 바로서 경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금일 능을 옮기는 일은 풍수(風水)의 설에 미혹된 것이 아닌데, 경의 소에는 마치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더욱 놀랍고 의혹되어 경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 간원에 내린 비답에 있어서는, 최후상(崔後尙)을 체례(體例) 사이의 일로 책망한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경을 논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었겠는가. 하물며 김만중의 말은 매우 터무니없어서 내가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각해봐도 '경을 기대하였다.'는 말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경에게 전파한 것이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경의 사양하는 소는 불평스런 말이 아닌 것이 없는데, 도리어 내 말을 이처럼 극심하게 의심하니 실로 나의 성의가 서로 믿게 하지 못한 소치이므로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다.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 하였다. 송시열이 재차 소를 올려 그전의 설을 거듭 아뢰었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송시열이 선왕의 능에 표석(表石)을 세우자고 청하였는데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사간 최후상(崔後尙)이 김우명을 탄핵하였다. 왕이 비답하기를, "비록 대신이 건의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다. 만일 이를 핑계로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의 복이 아니다." 하였다. 또 교리 김만중이, 뵙기를 청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은 백관의 윗자리【정승.】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지척하니, 왕이 '대신을 망령되이 논하여 국가의 체통을 떨어뜨렸다.'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이처럼 말한 것이다.

이 해 9월에 청풍 부원군 김우명이 인대(引對)를 통하여 아뢰기를, "전 교관(敎官) 민업(閔嶪)의 손자인 민신(閔愼)의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그 아버지가 몹쓸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대신 복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민업과 민세익(閔世翼)이 모두 자식이 없는 셈이고 민세익 및 민세익의 아들도 모두 아버지가 없는 셈입니다. 성명의 세상에 이런 사람을 도성 안에 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부자 사이의 큰 윤기가 한 번 어긋나면 사람이 어찌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비록 위문하러 온 손님의 지시에 부딛껴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민신이 어떻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조사 신문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대개 민신의 일은 전 진선(進善) 박세채(朴世采)가 시킨 것이었는데, 박세채는 송시열의 논의를 따른 것이다. 논평하는 사람들은 '송시열의 이 논의는 윤리에 어긋나고 교화를 손상하는 것으로서 아버지를 무시한 데에 가깝다.' 하였고, 왕도 그를 그르게 여겼다. 송시열이 상소하여 '민씨(閔氏)의 집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복을 입은 것은 본디 선유(先儒)인 주자(朱子)의 설이다.'라고 하면서 논변해 마지않았다.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매양 고려의 일을 생각할 적마다 한심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 때에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심지어는 연산(燕山)1163) 에 참소하고 권세를 부린 자도 있었습니다. 비록 당시 임금이 앞에서 참소하여도 알지 못하고 뒤에 적이 있어도 보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때 신하의 죄야말로 머리털을 뽑아가며 책망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다 셀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신하가 강하다.'는 설이 갑자기 만 리의 밖에서 나오고,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 상신의 소에서 잇따라 나오니, 대소 신료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탄핵받은 말은 실로 저 정승과 같습니다. 비록 그 이름을 조금 바꾸었으나, 신이 전일에 남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던 것이 신이 당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경연의 신하가 탑전(榻前)에서 '민씨의 집 일은 조정에서 조사해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성명께서 '인륜에 관계된 일이므로 그냥 둘 수 없다.' 하셨다 합니다. 이는 경연의 신하가 마치 신을 위해 그 일을 저지시켜 신의 죄를 덮어주려는 것처럼 하였고 전하 역시 신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였는데 신은 의리로 보나 법으로 보나 두려워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이때에 연경(燕京)에서 '신하가 강하다'는 설로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사신이 돌아와서 주달하였고, 또 김우명이 뵙기를 청할 때에 송시열을 가리켜 논하면서 '사람들이 감히 그의 그름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이것을 스스로 혐의스럽게 여겨 이 말을 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경연의 신하란 김만중이다. 왕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내 뜻은 전에 올린 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라고 비답하였는데, 대개 불쾌하게 여긴 것이다. 당시 논평하는 자가 말하기를, "송시열이 주장한 기해년1164) 상복 제도는 사인(士人)과 서인(庶人)의 예로써 제왕가(帝王家)에 썼고, 민신(閔愼)이 아비를 대신해 복을 입은 것은 제왕가의 예로써 사인ㆍ서인에게 행한 것이다. 그 논설을 미루어 나가면 장차 임금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인데 송시열이 뉘우칠 줄을 모른다. 또 '서(庶)'란 글자는 이미 종묘 사직을 주관한 이에게 쓸 수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하였다.

갑인 15년 2월에 왕대비가 승하하였다.

6월 4일에 인선 왕후(仁宣王后)1165) 를 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이해 여름에 가뭄이 들자,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렸는데 비답하기를, "아,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었기에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수재ㆍ한재ㆍ풍재(風災)ㆍ상재(霜災)가 거르는 해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이처럼 망극한 재앙을 당하게 하였으니, 항상 이를 생각하면 먹는 것과 쉬는 것이 편치 않다. 금년 여름에 이르러 한발의 혹심함은 근고(近古)에도 드문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한밤중에도 놀라 일어나 하늘이 과인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창생으로 하여금 그 재앙을 대신 받게 함을 몹시 슬퍼하고 있다. 차라리 속히 죽어 민생의 곤궁함에 조금이라도 답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하였다.

7월에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복제(服制)에 대해 논하기를, "대왕 대비(大王大妃)1166) 께서 마땅히 맏며느리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국가의 복제는 도리어 중서부(衆庶婦)1167) 의 복을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였으니, 나라의 법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윤기를 전도시킴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정원이 여러 차례 기각하였는데 오래 있다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에 수일만에 왕이 대신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기해년1168) 의 복제는 대개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지금 9개월의 복제[大功服]가 기해년의 복제와 같은지의 여부를 아울러 상고해 내되 '원임 대신, 육경(六卿), 정부의 동ㆍ서벽(東西壁),1169) 판윤(判尹), 삼사의 장관이 모여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드디어 빈청(賓廳)에서 회의하여, 기해년에 수렴한 의논을 상고해 내어 들였다. 왕이 이르기를, "만일 등록(謄錄)만 상고해 내고 말려고 하였다면 하필 대신ㆍ육조ㆍ삼사의 장관에게 회의하도록 하였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형조 판서 이은상(李殷相), 한성 판윤 김우형(金宇亨),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耉), 예조 참의 이규령(李奎齡), 부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洪萬宗)이 같은 사연으로 대답하기를, "옛날 기해년에 신하들이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해 기년복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전(大典)》의 복제를 다시 상고해 보니, 다만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라고 말하였을 뿐이고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지금 복제를 의논해 정하는 날에 해조에서 바로 부표(付標)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다시 하교하기를, "계사(啓辭)가 분명하지 못하다. 대왕 대비께서 오늘날 기년복과 9월복에 어느 복을 입어야 하는지 왜 귀결처가 없단 말인가?" 하자, 영의정 김수흥이 대답하기를, "오늘은 다만 기해년의 복제를 의논하였을 뿐이고, 대왕 대비께서 대비에게 어떤 복을 입어야 될지에 대해서는 감히 가벼이 먼저 의논해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또 탑전에 불러들여,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의도를 힐문하니, 김수흥이 황공하여 사죄하고 글로 써서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드디어 나가 빈청(賓廳)의 신하들과 재차 계사를 올리기를, "《대전(大典)》에서 복제를 상고해 보니. 장자(長子)의 아내에게 기년복을 입어주고 중자(衆子)의 아내에게는 대공복을 입어준다고 하였을 뿐 승중(承重)의 여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대왕 대비의 복제는 대공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사체가 중대하므로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상에서와1170) , 소혜 왕후(昭惠王后)가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상에서1171) 반드시 이미 행한 제도가 있을 것이니,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실록》이 강도(江都)에 있어 상고해 내기 쉽지 않다 하여 다시 모여 의논을 드린 뒤에 《실록》을 상고해 내게 하였다. 김수항ㆍ김수흥 등이 또 '《대전(大典)》에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복은 모두 기년으로 되어 있다.'라고 대답하면서 아뢰기를, "만일 차례로 논한다면 저절로 장자ㆍ중자의 구별이 있습니다만, 중자가 왕통을 계승할 경우 장자가 될 수 있다는 조문은 국가의 법전에 뚜렷이 나타난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복제는 국가의 법전 이외에는 억견(臆見)으로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기해년 복제를 의논해 정할 때에 장자ㆍ중자에 대한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감히 대공의 설을 말한단 말인가? 《대전》의 오복조(五服條)에 왕통 계승에 관한 조항이 없는 것은, 비록 시왕(時王)이 제정한 예라 할지라도 이게 곧 미비한 점이다. 시왕이 제정한 예라고 핑계대고 《예경(禮經)》을 참고하지 않으니 오늘 회의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재차 계사를 올려, 《의례(儀禮)》 주소(註疏)의 4종 중에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니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體而不正不爲三年]'는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법전이 《예경(禮經)》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왕이 승지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여 《의례(儀禮)》 경전(經傳)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父爲長子]'는 조목의 주소(注疏)를 문단마다 해석하여 들이게 하였다. 이튿날 재차 올린 계사에 답하기를, "계사가 터무니없어 나도 모르게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와서 감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설로 오늘날의 예율을 삼고 있다. 《예경(禮經)》 주석 중의 '서자(庶子)라고 한 것은 장자와 엄격히 구별한 것이다.'는 설은, '4 종(種)은 삼년복이 될 수가 없다.'는 문귀와 관통되지 않는다.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이미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우는데 이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 하였으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이처럼 이치에 가깝지 않은 어긋난 말을 예율로 정하여 선왕을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지목하였으니 임금을 박하게 대우하였다고 하겠는데, 누구에게 후하게 하려고 한 것인가? 막중한 예를 의탁한 논의를 가지고 정제(定制)라고 결단할 수 없으니 당초에 마련한 국가의 제도에 따라 정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정원에 전교하여, 기년으로 고쳐 표지를 붙이게 하고, 예관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조형(趙珩), 예조 참판 김익경(金益炅), 예조 참의 홍주국(洪柱國) 등을 모두 하옥하고 대공(大功)의 복제를 고쳐 기년으로 정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신의 직책은 문서를 봉행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큰 일에 임하여 지조를 변하지 않아야만 곧 임금을 보좌하여 나랏일을 해 나갈 수 있다. 영의정 김수흥이 오늘날 복제에 관해 회의할 때 감히 수많은 어지러운 논설로 아뢰었으나 끝내 귀결처가 없었다. 혹은 인용해서는 안 될 고례(古例)를 인용하기도 하고, 혹은 국가의 법전 몇 마디 말로 책임이나 때웠는가 하면 마침내 두서도 없고 이치에 가깝지도 않은 말로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말을 주창하였으니, 선왕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논의에 빌붙은 그의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중도 부처(中途付處)하라." 하였다. 승지 이단석(李端錫), 사헌부의 이광적(李光迪)ㆍ유지발(柳之發)ㆍ송창(宋昌)ㆍ정창도(丁昌道)ㆍ김빈(金), 사간원의 이혜(李嵇)ㆍ송창(宋昌), 옥당의 조근(趙根)ㆍ권유(權愈) 등이, 예관을 나국하라는 것과 김수흥(金壽興)을 부처(付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다. 왕이 승정원에게는 '번독(煩瀆)하게 한다.'고 꾸짖고, 대관(臺官)에게는 '규핵(糾劾)하지 못하고 직무를 거행하지 못한 데다 사정을 따르고 공론을 멸시한다.'는 것으로 지척하고, 옥당에게는 '터무니없다.'는 것으로 지척하고, 이광적ㆍ유지발 등은 관작을 삭탈하여 내쫓았다.

정원과 삼사가 또 그를 구원하였으나 왕은 모두 듣지 않았다. 좌참찬 이상진(李尙眞)이 또 소를 올려 구원하니, 왕이 '임금을 섬기는 데 의리가 없다.'고 지척하였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가 또 차자를 올려 논하니, 왕은 '임금을 성실하게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이 또 소를 올려 논변하니, 전교하기를, "남이성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여 앞장서서 분노를 부리고 대신에게 아부하면서 감히 '반드시 오늘 빈청에서 의논해 올린 계사와 같이 해야만 국가의 전례(典禮)가 털끝만큼도 미진하다는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말하고 또 '각각 소견을 지키고 각각 그 논설을 펼 뿐이니, 여러 사람의 말이 어지러우므로 성인에게서 절충돼야 한다.' 하였다. 어지러운 말이 성인에게서 절충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의 임금을 위해 후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옳은가, 반드시 4종의 조목 중 한 조항에 의거해 박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신하로서 바꿀 수 없는 의리인가? 또 감히 박한 쪽을 따라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따라야만 '털끝만큼도 미진한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도인가? 이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자의 말이다. 전후로 아부한 말과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멀리 외딴 섬에다 귀양보내라." 하였다. 승지 이합, 장령 안후태, 부교리 조근 등이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조근을 강서 현령(江西縣令)으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8월에 왕이 병이 들자, 승지를 급히 보내어 충주에 있는 영의정 허적(許積)을 불렀다. 왕의 병이 매우 위독하자, 허적을 침소로 불러들여 떠나갈 만한 의리가 없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의 마음을 내가 아는 바이고, 나의 뜻을 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氣)가 부족하여 국가의 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다." 하였다. 또 좌의정 김수항을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는 애써 유시하였다. 이날 저녁에 승하하니 18일 기유(己酉)였다. 대개 인조 대왕이 즉위하여 소현(昭顯)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므로 효종 대왕은 차적(次嫡)이 되었다. 소현 세자가 죽자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가 죄를 지어 폐위되고 그의 아들도 불초하였다. 인조가 이르기를, "소현의 자식은 결코 왕업(王業)을 짊어질 사람이 못 된다. 나라에 장성한 대군이 있으니 사직의 복이다." 하고, 효종을 대신 세자로 책봉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송시열ㆍ송준길ㆍ유계 등이 복제를 의논해 정하면서 '대왕 대비가 효종을 위해 입는 복은 서자(庶子)를 위해 입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니, 외부의 의논이 자못 시끄러웠는데 그 의논에, "대왕 대비가 대행 대왕(大行大王)1172) 에게는 왕통을 계승한 지존(至尊)의 복을 입어 주어야지 최복(衰服)으로만 제정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의논을 수렴하게 되자, 송시열이 또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국제(國制)의 설을 빌어다가 논설을 세웠으므로 기년의 복제가 드디어 행해졌다. 그러나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제도는 《대명률(大明律)》과 국조의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실로 사서인에 대한 제도의 법이고 왕조에 대한 전례(典禮)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뭇 의논이 더욱 불평하였다.

효종 상이 기년이 되자, 전 장령 허목(許穆)이 소를 올려 '기년복은 옳은 복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 중 '둘째 아들을 장자로 세운 경우 삼년복을 입는다.'는 조문을 인용하여 송시열의 설을 깨뜨렸다. 이때 조정에서 허목의 말을 옳게 여긴 이가 많이 있었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차자를 올려, 당초 기년의 복제를 따른 것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나열하고, 대신ㆍ유신(儒臣)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마침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기년복제의 잘못에 대해 소를 올려 논하면서 심지어 '종사를 편히 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하라.'고 말하고 또 송시열이 어질지 않다고 지척하였다. 이에 조정 의논이 발칵 뒤집혀 서로 편당을 지어 배척하였다.

이때 승지 이유태(李惟泰)가 마침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와서 '윤선도가 예를 논한다고 빙자하여 사림(士林)에게 화를 전가하려 한다.'고 말하고, 송시열도 의논 수렴에서 허목의 설이 옳지 아니함을 크게 지척하고, 또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입고1173)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1174) 는 말을 인용하여 그 뜻을 거듭 밝혔다. 이에 허목의 설이 드디어 행해지지 못하고 윤선도는 귀양갔다. 우윤(右尹) 권시 또한 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다가 죄를 얻었다.

얼마 뒤에 원두표가 또 차자를 올려 '제후(諸侯)가 종통을 빼앗는 의리'에 대해 진달하고 또 다시 복제에 대해 이유태ㆍ윤선거(尹宣擧)ㆍ심광수(沈光洙)ㆍ허후(許厚)ㆍ윤휴(尹鑴) 등에게 물어보자고 청하였다. 윤선거는 외방에 있었고, 허후의 의논은 가부가 없었고, 이유태는 기년복제의 의논을 따랐고, 심광수는 종통의 의논을 따랐으며, 윤휴는 '오직 그 인심에 의거하면 대강(大綱)에 관계되고 선왕(先王)에게 어그러짐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으며,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은 국가의 전례로 말하였다. 왕이 다수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게 하니 기년의 복제가 마침내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판부사 조경, 수찬 홍우원(洪宇遠), 전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모두 소를 올려 윤선도와 권시를 구원하고 또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논하니, 대간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 혹은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혹은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뒤에 무릇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에 참여한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간사한 사람과 편당을 짓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였다.'고 지목하였으므로 벼슬에 제수되지 않은 지가 거의 10여 년이나 되었다.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게 되자, 예관이 처음에는 기년으로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복제를 정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唐)ㆍ송(宋) 때 적부(嫡婦)에게 입어주는 상복의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외부의 의논은 '효종 대왕이 이미 서자(庶子)가 되었으니 인선 왕후가 적부(嫡婦)가 될 수가 없다." 하면서 비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송시열에게 편당하는 자가 또 앞뒤1175) 의 복제가 다르다 하여, 예관 조형(趙珩) 등에게 부탁하여 대공(大功)으로 고쳐 표지를 붙여 들였는데, 대개 서부(庶婦)에게 입어주는 상복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왕이 앞뒤가 전도되었다 하여 예관을 가두고 치죄하였다. 그러나 대공의 복제가 또한 시행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빈청(賓廳)에서 모여 의논하는 일이 있었는데, 7월 13일이었다. 왕이 깨닫고 뜻이 불끈 솟구쳐 친히 《예경(禮經)》을 고증하여, 《예경(禮經)》 주소(注疏)의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워도 또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는 문구로 주장을 삼아, 대왕 대비의 복제를 대공에서 기년으로 고쳐 입게 하였다. 이에 적통(嫡統)이 밝아지고 나라의 예가 엄해지는 동시에 인심도 흡족히 여기었다. 왕의 뜻을 여쭈어 보지 않고 마음대로 복제를 고쳤다 하여 예관을 죄주고, 《예경(禮經)》을 따르지 않고 다른 논의에 의탁하였다 하여 수상을 죄주었는데, 빌붙은 여러 사람은 모두 차례로 벌을 받았다. 또 장차 내치고 들어쓰는 일을 크게 밝혀 국시(國是)를 바르게 하고 종묘를 존중되게 하려 하였는데,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8월 7일에 다시 재신(宰臣)을 불러 빈청에 모이게 하고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2일이 지나 창덕궁(昌德宮)의 재려(齎廬)1176) 에서 승하하니 춘추 겨우 34세였고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아, 슬프도다!

왕이 어려서부터 숙성함을 타고나 어려서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춘궁(春宮)에 있을 적에 효도를 다하여 증자(曾子)ㆍ민자(閔子)의 덕행이 있었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쓰고 조상의 사업과 뜻을 잇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대비 및 대왕 대비에게 효성을 다해 섬겨 비평하는 말이 없었고, 기쁘고 화락한 얼굴빛과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양전(兩殿)이 기뻐하고 궁중에 화기가 넘쳐 흘렀다.

대왕 대비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과도하게 슬퍼하다가 병이 위급하자, 왕이 뜨락의 한데에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을 묻고, 손수 약물을 가지고 들어가서 올리니, 이 말을 듣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 통명전(通明殿)에서 거처하였는데, 왕의 거처와 조금 사이가 떨어졌었다. 왕이 왕대비를 위해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 모시려 하였다. 집상전이 완성되기 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옮겨 거처하기를 청하고 자신은 부근의 별실(別室)에 거처하여 봉양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비가 묵은 병이 있었는데 왕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그 마음을 위로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말하기를, "왕이 매양 곁에 있으니 병이 몸에서 떠나가는 것 같다." 하였다.

일찍이 대왕 대비를 모시고 남군(南郡)1177) 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여 효과를 보았는데, 왕이 도내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크게 베풀었다. 환궁하여 또 조정과 종친에게 은전을 베풀고 제도(諸道)에까지 일체로 행하였다. 이는 대개 내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노인을 존경하는 은혜[老老之恩]를 미루어 시행한 것이다.

세시(歲時)에 항상 부로(父老)들을 위문하고 혹은 달마다 늠료(廩料)를 주기도 하였으며 재신에게는 달마다 쌀과 고기를 계속 보내 주었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어머니에게 효도하였는데 그가 먼저 죽자, 왕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종신토록 늠료를 주게 하였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중에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면 왕은 윤허하지 않고 쌀ㆍ고기ㆍ옷감들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하였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주군(州郡)의 수령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곧 허락해 주고, 혹 그 사람이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이 아까우면 특별히 쌀과 베를 주었는데, 그 효도로 다스림이 이와 같았다.

왕에게 다섯 자매가 있었는데, 매우 사랑하였고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좋은 음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나누어 먹고,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고 근심하여 문병으로 보내는 사람과 약을 가지고 가게 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며 죽었을 경우에는 비통해 마지않았다. 신하들의 상소에 죄없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형제를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였다.

소현 세자의 딸이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출가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사랑이 여러 부마(駙馬)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여 선왕께서 시종 한결같이 하신 뜻을 보존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족과 매우 화목하여 곡진한 은혜의 뜻이 있었고, 친분을 헤아려 돌보아 주어 끊임이 없었다. 왕이 귀척(貴戚)에게 대우를 융숭히 하였으나 사정에 흔들려 공사를 해친 적이 없었다. 여러 궁가(宮家)의 하인들이 한 번이라도 법을 범하여 방종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법으로 통렬히 다스렸다.

학문에 마음을 두어 의리를 강구하고, 질병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경연에 나갔다. 또 전대의 역사를 강구하기를 좋아하여, 그 임금의 수덕(修德) 여부와 정치의 득실, 민생의 고락에 대해 부지런히 토론하여 거울로 삼았다. 견해가 고명하여 항상 강관(講官)의 견해보다 뛰어났다.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이미 심리학에 뜻을 두어 선유(先儒)의 인심 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서 들이게 하여 살피고 음미하는 자료에 대비하였다. 일찍이 《대학(大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몸을 닦는 데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이르기까지 경(敬) 자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하고, 《중용(中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사람이 도(道)를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어떤 것이 비근(卑近)한 것이고 어떤 것이 고원(高遠)한 것인가?" 하니, 강관이 아뢰기를, "사람의 일이 비근한 것이고 불씨(佛氏)와 노자(老子)의 교리(校理)가 곧 고원한 것입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반드시 불씨와 노자(老子)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곧 고원한 것이다." 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격물ㆍ치지(格物致知)하는 방법이 이 책에 모두 구비되어 있다. 비록 격물ㆍ치지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의(誠意)를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다 공력을 쓸 수 있겠는가. 또 반드시 성의의 공부가 있어야만 격물ㆍ치지한 바가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서경(書經)》을 강할 적에 익직편(益稷篇)의 '제(帝)여, 제위(帝位)에 계심을 삼가소서.'라는 대목에 이르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도리는 삼간다는 신(愼)의 한 글자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기미를 생각하여 편안함을 생각한다.[惟幾惟康]'는 것은 대개 공부하는 데 매우 요긴한 곳을 말한 것이다. 기미[幾]란 생각하는 시초이고 편안함[康]이란 안락한 즈음이니, 더욱 삼가해야 한다." 하였다. 역대의 일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자질이 높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배운 바가 다만 황제(黃帝)ㆍ노자(老子)의 도(道)였으므로 몸소 현묵(玄默)을 행하느라 옛날 성왕(聖王)의 정치를 회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1178) 하였는데, '겨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한 무제가 제 양공(齊襄公)이 복수한 말을 인용한 것1179) 을 살펴보면 규모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력을 함부로 남용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지 않은 것은 윤대(輪對)의 뉘우침1180) 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무력을 함부로 남용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한 고제(漢高帝)가 평성(平城)의 근심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질이 이와 같았으므로 말년에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윤대를 버리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또한 신선 구하는 일을 파할 수 있었던 것1181) 이다." 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이 군사를 일으킬 때의 일에 이르러서 장관으로 하여금 범엽(范曄)이 논단한 사평(史評)을 읽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아버지를 협제(脅制)하고, 오랑캐를 신하로 삼았다1182) 는 설은 더욱 준절(峻截)하다." 하였다. 건성(建成)의 일1183) 을 논하기를, "명나라 태종조(太宗朝)에 한왕(漢王) 고후(高煦)는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였으나, 인종(仁宗)이 태자가 되어 은혜와 사랑으로 대우하니, 인종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였다. 가령, 건성이 태종을 이와 같이 대우하였더라면 어찌 피를 흘리는 변고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1184) 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모 술수에 가깝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이것은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것이다." 하였다. 송 진종(宋眞宗)이 천서(天書)로써 태묘(太廟)에 고한 것1185) 에 이르러 이르기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을 속일 수 있겠는가. 진종의 초기 정사는 또한 볼 만하였는데, 간사한 소인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 그 마지막을 잘 끝내지 못하였으니 심히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왕이 경연에 임하여 강논한 말씀 중에 아름다운 말이 매우 많았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강을 정지하던 날에는 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기를 고열(考閱)하여 정치하는 데에 절실한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써서 올린 바의 고사가 볼 만할 뿐만 아니라, 또 풍자하고 깨우치는 뜻이 많으니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밤에 측근의 신하를 불러 보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마하고 백성의 일에까지 물으니, 정의가 서로 부합되어 마치 가정의 부자 사이와도 같았다. 왕이 눈병이 있었으나 촛불에 책을 보았다. 신료들이 더 덧칠까 두려워하자, 왕이 이르기를, "겨울밤이 매우 길고 또 내가 잠이 없어 삼경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 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눈병이 심해지자, 옥당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써서 올리게 하되 그 글자를 크게 써서 열람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비록 병환 중에 있었으나 학문에 항상 이와 같이 힘썼다. 대신을 예우하여, 말을 하면 의견을 굽혀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이 들면 의원과 약을 보내 문병하고 죽었을 경우에는 상(喪)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그대로 주고 혹은 제수(祭需)까지 주었으며, 혹은 안석[几]과 지팡이를 특별히 하사한 적도 있었다. 유학(儒學)을 중시하는 선왕의 뜻을 왕이 이어받아 송시열ㆍ송준길 등을 대접함에 있어 은우(恩遇)가 매우 융숭하였으며, 이유태ㆍ이상(李翔) 등 여러 사람도 초빙하여 아울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마침내 의정(議政)에 제수되고, 송준길은 지위가 삼재(三宰)1186) 에 이르렀다. 송시열ㆍ송준길 등이 예를 그르친 일이 발각되게 되자, 사당(私黨)을 지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마음을 갖고서 효종의 능을 옮긴 뒤에 소를 올려 뒤늦게 지난 일을 탓하니, 왕이 그의 편벽됨을 미워하여 대우가 약해졌다.

처음 왕이 송시열 등을 대우할 적에 정성과 예의가 아주 지극하여 전고보다 특출하자 조정과 재야에서 그들의 풍채를 사모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잘 받들지 못하고 도와주는 바가 없어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좌우의 두세 명 신하에 이르러서도 그들이 이끄는 대로 행동만 한 채 국사를 담당하고 보필하여 공적을 이룬 게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임금은 있으나 신하는 없다.'고 탄식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를 매우 너그럽고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임금 노릇하는 도리는 아랫사람에게 시기와 의심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이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므로 오직 성의를 미루어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써 비록 남을 공격하고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정직한 체하는 자일지라도 반드시 받아들여 너그러이 용납하고 혹은 포상하여 장려하기도 하였다. 비록 초야의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택하여 기록하게 하고 혹은 벼슬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화재로 집을 잃은 측근의 신하가 있었는데 특별히 호조에 명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들이 죽었을 때 노고한 행의(行誼)가 있거나 혹은 청렴 근신(謹愼)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관례로 보내는 부의(賻儀) 이외에 별도로 관재(棺材)를 하사하고 혹은 상수(喪需)ㆍ제수(祭需) 및 일꾼을 보내 도와주고 아울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의 굶주림과 추위를 구제해 주었으며, 작고한 훈신(勳臣)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임인년1187) 에 청나라에서 사사(査使)1188) 를 보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본부의 사람이 강을 건너가 나무를 베게 허락하였다 하여 사형으로 단안을 내렸다. 왕이 반복하여 굳이 변론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특별히 이시술에게 금 5백 근을 주어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화를 해결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사관(査官)을 특별하게 접대하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구하였는데, 이시술이 이에 힘입어 완전히 모면하였다. 신하를 자신의 몸처럼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조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을 고민하여 매양 서로 삼가고 협력하는 도리로 책려(策勵)하고, 방백과 수령이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적에는 병이 있지 아니하면 곧 불러보고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물어본 다음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방도를 거듭 일러주었다. 또 전임(前任) 때의 폐막을 묻고는 아뢴 바에 따라 곧 변통하게 하였다.

인재를 수용(收用)하되 먼 지방의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서북(西北) 양도(兩道) 지방은 길이 멀고 제주(濟州)는 바다 속에 있다 하여 특별히 중신과 근신(近臣)을 보내어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게 하니, 먼 지방 사람이 모두 고무되었다. 향천(鄕薦)1189) 의 법을 거듭 밝히고 또 재신(宰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인재를 별도로 천거하게 한 다음 재능이 특이한 자가 있으면 평상의 격례에 구애하지 않고 발탁해 썼다.

또 항상 이조에 신칙하여 전사한 사람 및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혼조(昏朝) 때 원통하게 죽은 사람에 있어서도 증직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충신ㆍ현사(賢士) 중에 특출한 자는 모두 기록하여 혹은 사당을 세우거나 관작을 추증하기도 하고 혹은 비를 세우거나 무덤을 표지(表識)하기도 하고 그 후예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그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기도 하는 등 표창하는 은전이 거의 빠뜨림이 없었다. 효자나 열녀 중에 행실이 드러난 자에게는 곧바로 정문을 세워서 표창하였는데, 서민과 노비에게도 두루 미치었다. 한번은 경연의 신하와 세조 때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의논하게 되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삼문 등은명나라 방효유(方孝孺)1190) 등과 같은 사람이다." 하였으니, 충의(忠義)를 포상하고 높이는 뜻이 이와 같았다.

백성의 일은 지성으로 근심하고 노고하였다. 만일 상위(象緯)1191)의 변고나 수재ㆍ한재를 만나면 곧바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자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는데, 전후로 내린 애통한 교서가 신민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비가 내리기를 빌 적마다 친히 제사지내지 않더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재계한 다음 밤새도록 한데 서서 묵묵히 기도하고 기우제를 파할 때가 되어서야 편히 쉬었다.

만일 재난과 흉년을 만나면 신료들을 불러들여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계책을 강구하고 진구하는 정사를 크게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고 포흠진 것을 감면하며 혹은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기도 하고 혹은 죽을 쑤어 그들을 먹였다. 돌림병이 나돌면 양의(良醫)를 나누어 파견하여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였다. 또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여제(厲祭)를 지내고 국상(國殤)에게 제사지냈다. 그리고 조석으로 공급하는 어주(御廚)의 물품을 절약하고 초하루와 명절에 올리는 외방의 공물 헌납을 정지하고, 주방(酒房)을 파하고, 어구(御廐)의 말을 방출하였으며, 공상(供上)하는 일용의 물품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재량하여 줄였다. 또 내장(內藏)1192) 과 각 아문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진휼에 돕게 하였는데, 곤궁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나, 오래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먹는 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만일 한 가지라도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아까운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진휼을 파한 뒤에 또 어사를 보내어 제도(諸道)의 수령이 진휼의 정사를 잘 거행했는지의 여부를 염탐하게 한 다음 승진시키거나 벌을 주었다. 경술ㆍ신해 두 해에 이르러서는 팔도가 크게 기근이 들고 이어서 큰 돌림병이 떠돌았다. 왕이 밤낮으로 애태우며 성의를 다해 구제하되 더욱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다.

임자년1193) 봄에 국내에 선유(宣諭)하여 여러 해 동안 포탈된 부세(賦稅)를 모두 탕감하게 하고 이어서 죄수 및 폐고(廢錮)된 사람을 모두 처결하여 방면하고 서용(叙用)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크게 흉년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나 포악한 백성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외(中外)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서 죽거나 맹수에 해독을 입은 자가 있다고 아뢰면 또한 반드시 돌보아주게 하였다. 겨울철에 호위하는 병사가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동옷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한번은 능침(陵寢)을 참배하는데 벼를 수확하기 전의 절기였다. 왕이 영을 내려 이르기를, "나를 수행하는 신하들과 상장(廂將)1194) 이 경유하는 곳에 만일 풀 한 포기라도 손상하였을 경우 금령을 범한 견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행차가 지날 적에 또 점검해 보게 하였다.

온천에 거둥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도로를 정비하되 가마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정비하고 혹시라도 도로를 넓게 확장하여 백성의 전지에 손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온천 근처의 백성이 집을 비워 수행한 관원을 거처하게 하고 스스로는 한데에 거처한 것을 보고는 매우 불쌍히 여겨, 쌀과 콩을 주어 호구(糊口)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온천에서 돌아오는 측근의 신하가 있었다. 왕이 그에게 벼가 손상된 곳이 있던가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의장(儀仗)을 설치하였던 근처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습니다." 하자, 왕이 댓가를 넉넉하게 보상하라고 명하였다. 그 불쌍하게 여기고 근심하고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팔도의 군안(軍案)을 조사하여 어린아이 및 죽은 사람 2만 명이 납부해야 할 군포(軍布)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베를 내리고, 또 상평창(常平倉)의 은ㆍ베와 감영ㆍ병영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내외(內外)의 비용에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본디 호구의 부세(賦稅)가 없고 다만 군졸이 납부한 베로 경상의 비용으로 써 왔는데 백성들이 오랫동안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왕은 폐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줄을 알고 갑인년1195) 에 대간의 말을 채용하여 바야흐로 크게 변통해 영원한 제도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 일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각사(各司) 노비들의 공포(貢布)가 다른데 비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왔다. 왕이 특별히 내수사의 공부(貢賦)를 감하되 아울러 고루 감해주게 하였다. 내수사의 재물 용도가 이로 인하여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나 왕은 상관하지 않았다.

선조(先朝)에서 호남ㆍ호서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부세를 고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호남의 산간 고을에서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 공적의 뒤를 이어서 더욱 구별 획정(劃定)하여 두루 시행하게 하니,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왕가(王家)의 법도가 매우 엄하여 궁중이 엄숙하였고 안팎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재신(宰臣)과 간신(諫臣)이 일찍이 왕가의 일가붙이와 궁중의 일을 말하였는데, 사실과 틀린 것이 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면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그런 일이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비록 한 말이 사실과 틀렸다 하더라도 들은 바를 다 아뢰었을 뿐이니, 혐의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장번 내관(長番內官)1196) 이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갈 때에 외방에 폐해를 끼쳤는데, 내관을 꾸짖어 파면하고, 이를 알고서 아뢰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그 도의 감사를 추고하였다.

왕의 성품이 독실함을 좋아하고 명예에 가까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좋은 일을 행하였을 때 혹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면 마음에 매우 싫어하므로 시종의 신하가 그 뜻을 알고 감히 외부에 퍼뜨리지 않았다. 검소하기를 더욱 좋아하여 겉옷을 제외하고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한번은 병이 들어 신료를 대내(大內)에서 접견하였는데 방안에 깔아놓은 자리가 매우 낡았으나 바꾸지 않았다. 신료들이 물러나와서 감탄하였다.

왕이 정대한 학문에 마음을 두고 이단(異端)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미 두 이원(尼院)1197) 을 철거하고 사찰에 있는 모든 선왕의 어판(御板)도 달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일찍이 이르기를, "음사(淫祀)1198) 가 도움은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어리석은 여염의 지아비와 아낙네는 본디 책망할 것조차 없지만 사대부의 집안도 이러한 일이 있으니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어판(御板)이란 승가(僧家)에서 부처에게 물건ㆍ음식 등을 공양할 때에 어좌(御坐)를 죽 써 놓은 것인데 이것은 부처를 모시고 같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전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왕은 학교를 독실히 숭상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경서(經書)를 찍어 중외에 반포하였으며, 또 성균관(成均館)에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의 잘못된 자획(字劃)과 음의(音義)를 일체 모두 바로잡아 사방의 학자에게 혜택을 주었다.

뜻하지 않은 일에 경계심을 가져 군정(軍政)을 닦게 하고 장신(將臣)을 접견하여 이야기할 적에 피곤함을 잊었다. 혹은 원유(苑囿)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기도 하고, 혹은 거둥을 인하여 군사를 사열하기도 하였는데, 행진(行陣)하는 법과 병갑(兵甲)의 제도를 강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중국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및 《연병실기(練兵實紀)》 등의 서적을 올리자. 왕은 즉시 반포하여 연습하게 하였다.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새로 설치하고 또 정초군(精抄軍)을 설치하여 병조 판서가 대장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예롭고 용맹한 군사를 양성하고 양식과 기계를 비축하여 위급할 때에 대비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또 어사를 파견하여 호남ㆍ호서ㆍ영남 3도 및 제주를 순무(巡撫)하고, 해안의 방비를 자세히 살피고 수군(水軍)을 정돈하려 하였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평상시에 군사(軍事)를 수치(修治)하는 데에 뜻을 두고 무비(武備)를 잊지 않았는데 이는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려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신기(神機)1199) 를 묵묵히 운용하여 천하의 변천을 조용히 살펴보면서 선왕의 뜻을 소술(紹述)하려는 것1200) 이었다.

대신(臺臣)이 일찍이 필요치 않은 군사를 혁파하지 않는다고 간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깊이 생각해 본다면, 내 뜻이 국가를 위망(危亡)의 형세에 두고 다만 군사를 일삼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측근의 신하들과 같이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일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고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사세가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이 어리고 덕은 없지만 조종(祖宗)과 부형의 백대 원수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북쪽 변방의 수령들은 무관이었으므로 탐욕하고 방종하였다. 다시 병마 평사(兵馬評事)의 제도를 설치하고 반드시 이조의 낭관(郞官)과 옥당의 관원을 임명해 보내어 그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작고한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임진란을 당하여 북방에서 공로가 있었는데, 도신(道臣)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품계를 올려 좌찬성을 추증하게 하고 같은 시대 남ㆍ북도(南北道)의 의사(義士) 20명에게 모두 포상하라고 명하니, 함경도 한 지방이 격려되었다.

왜국 사신이 올 적에도 반드시 측근의 신하를 엄선하여 국경에서 맞아 위로하게 하되 그들의 환심을 잃지 않게 하였다. 왜국 사신이 웅천(熊川)에다 왜관(倭館)을 옮기겠다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내지(內地)에 옮김으로써 후일의 근심을 끼칠까 염려한 것이었다.

왕은 옥사를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처결하였다. 매양 큰 추위와 심한 더위에는 곧 승지로 하여금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일찍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긴급한 죄수를 곧바로 처결하게 하되, 비록 하루에 재차 복심(覆審)하게 되더라도 상규(常規)에 구애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일찍이 이르기를, "사형수를 세 차례 복심하게 하는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죽이려 하고 마땅히 죽지 않아야 할 자는 반드시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 곧 그 본의이다." 하였다. 또 추운 철에 오래 갇혀 있는 것을 염려하여 양식과 동옷을 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평소 병환이 있었으나 정사의 처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병이 조금 나으면 항상 승지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내직과 외직에 결원이 생기면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곧바로 차임하여 충원하게 하고 며칠을 지체한 적이 없었는데, 대개 직무가 폐지되어 백성에게 폐단이 미칠까 염려한 것이다.

갑인년1201) 에 대비(大妃)1202) 가 승하하였다. 왕이 항상 부왕(父王)을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다가 또 모비(母妃)를 오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거친 밥을 들고 맹물을 마시며 슬퍼함이 예절에 지나쳤다. 신하들의 굳이 간하며 권도를 따르시라는 청을 억지로 부응하기는 하였으나, 음식을 대할 적마다 울먹이며 스스로 감내하지 못하였다. 무릇 장사나 제사에 드는 물품과 예로 섬기는 절차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었는데, 이때 와서 창경궁(昌慶宮)에 반우(返虞)1203) 하고 왕도 옛 거처로 돌아갔다. 사물이 눈에 부딪힐 적마다 감회가 복받쳐 슬픔이 더욱 간절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잠시도 슬픔을 잊지 못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되어 슬퍼하였다.

혼전(魂殿)을 받들어 모시기를 일체 평소처럼 하였고 철따라 나는 음식물을 올리는 것이 산릉(山陵)에 잇따랐는데, 전(奠)을 드릴 적에는 반드시 친히 점검하고 감독하여 올렸다. 기일 하루 전에 친히 살펴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 정결 여부에 대해 물어보고 이틀날 아침에 또 연달아 물어 보았다. 왕의 병이 위독할 적에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곡식을 해치는 바람이 아닌가. 내가 어찌 또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임종 전까지 이처럼 열렬하였다. 염습(斂襲)에 필요한 유갑(襦匣)ㆍ의복 등을 모두 궁내에서 준비하고 호조로 하여금 시장 백성에게 한 자, 한 치도 거두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우리 중궁(中宮)1204) 및 사왕(嗣王)1205) 이, 평일 백성을 걱정하고 검소를 숭상하는 왕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행한 것이었다.

중궁(中宮)은 김씨(金氏)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이고 중종조의 현신(賢臣)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의 6대손이다. 1남 3녀를 낳으셨는데, 아들은 우리 사왕(嗣王)1206) 전하이다. 큰 따님은 명선 공주(明善公主)이고, 다음 따님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인데, 모두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막내 따님은 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출가하지 않았다.

사왕(嗣王)의 비(妃)는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신해년1207) 봄에 책봉을 받아 빈(嬪)이 되었고, 지금 중궁의 자리에 올랐다.

변변치 못한 신이 지식이 없는데, 이미 사왕(嗣王)의 명을 받아 왕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기년(紀年)을 위와 같이 대략 차례대로 서술한 다음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굳세고 침착한 자질을 가진데다가 너그럽고 따스한 덕이 있고 넓고 큰 도량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자애로운 심성은 아래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재위한 지 16년 동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애쓴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다. 몸을 검속(檢束)하되 부족한 것처럼 하고 선(善)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하루 이틀 사이 번거로운 정무에 경계를 다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언제나 가졌다.

비록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수재ㆍ한재ㆍ풍재(風災)ㆍ상재(霜災)가 없는 해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으나, 왕은 근심하고 노고하며 가다듬음으로써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충애(忠愛)함으로써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였다. 안으로는 음악이나 여색(女色)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놀이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릇 전대 제왕이 욕심껏 방종하고 사정(私情)을 행하며, 법도를 패하고 덕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마음이나 행동에 파고들지 못하였다.

진하(陳夏)를 아울러 썼으나 경력(慶曆)의 치세(治世)에 해가 되지 않았고1208) , 왕려(王呂)가 권세를 부렸으나 실로 중조(中朝)의 탄식이 나오게 하여 원우(元祐)의 태평을 이루었다.1209) 전례(典禮)가 밝혀지자 인륜이 펴고 사설(邪說)이 사라짐에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 속으로 말할 적마다 '우리 왕의 덕은 한 문제(漢文帝)와 송 인종(宋仁宗)도 앞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임금도 무시하고 아버지도 무시하는[無君無父] 논설을 물리쳐서1210) 온 세상에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기가 나타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또 사도(斯道)1211) 에 큰 공로가 있었다. 비록 신민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장수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 자애로운 마음과 자애롭다는 소문이 사람에게 깊이 감명되어 실로 영구히 잊지 못하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우뚝이 동방에 성덕(盛德)의 임금이 되었다. 아, 아름답도다.

옛날 주(周)나라의 왕계(王季)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사랑을 쌓아 문왕(文王)의 빛난 덕과 무왕(武王)의 큰 공렬(功烈)을 이룩하게 해 주었고1212) ,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몸소 공손과 검소를 행하여 건원(建元)의 성대한 정벌의 공을 이루도록 터전을 만들어 주었으며1213) ,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지극한 정성과 깊은 자애로 한결같은 덕을 지녔는데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오래 지속되어 마침내 반드시 힘입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으로 말하면,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는 덕1214) 과 백성을 화하게 하고 빨리 덕을 공경하는[諴小民疾敬德] 도1215) 는 진실로 옛날 명철하고 올바른 임금과 비해 볼 때 손색이 없다. 내가 적은 기년(紀年)의 글을 한번 보았으면 한다. 첫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고, 둘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여 하나의 생각도 백성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이 깊어서 교화가 믿음을 받게 되고, 백성이 감화됨에 하늘이 감응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장차 우리 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1216) 을 크게 인도해 주어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국운을 길이 누리게 하며,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어 우리 국가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할 것이다.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臣) 윤휴(尹鑴)는 지어 올림.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37책 81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註 1077] 신사년 : 1641 인조 19년.
[註 1078] 그 지방 : 심양.
[註 1079] 증선지(曾先之) : 원(元)나라 여릉(廬陵) 사람인데, 자(字)는 종야(從野)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지었다.
[註 1080] 천경(踐更) : 징발된 수졸의 복무 기간.
[註 1081]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1082]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1083] 가례(嘉禮) : 국조 《오례의(五禮儀)》에 규정한 오례(五禮) 중의 한 가지로 경사스러운 의례(儀禮)라는 뜻. 임금의 성혼(成婚)ㆍ즉위(卽位) 또는 왕세자ㆍ왕세손의 책봉ㆍ성혼 등의 예식. 여기서는 성혼(成婚)을 말함.
[註 1084]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1085] 선성(先聖) : 공자를 말함.
[註 1086]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1087] 대왕 대비(大王大妃) : 현종의 조비(祖妃)로 곧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 장열 왕후(慈懿莊烈王后) 조씨(趙氏).
[註 1088] 대행 대왕(大行大王) : 임금이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여기서는 효종을 가리킴.
[註 1089] 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사흘이나 닷새 뒤에 처음으로 상복(喪服)을 입는 일.
[註 1090] 예(禮)에 '임금을 위해 참최(斬衰)를 입고 내종(內宗)ㆍ외종(外宗)이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爲君斬內外宗皆斬] :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외종(外宗)이 군부인(君夫人)을 위해 입는 복제(服制)도 내종(內宗)과 같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임금의 내종(內宗)이 임금을 위해 다 참최(斬衰)를 입고 부인을 위해 자최(齊衰)를 입으니 임금의 외종(外宗)의 딸도 임금 및 임금 부인을 위해 입는 복제가 내종과 같다.'라고 하였다. 내종은 임금의 동성의 딸로 관작이 있는 사람, 외종은 임금의 고모ㆍ누이의 딸로 관작이 있는 사람. 《주례(周禮)》 춘관(春官) 서관(序官).
[註 1091] 네 가지 설[四種說] : 《의례(儀禮)》 부위장자(父爲長子) 조의 소(疏)에 '비록 승중(承重)하였다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체(正體)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것이니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의 주사(主祀)를 감당하지 못함을 말함이고, 둘째는 전중(傳重)하였으나 정체(正體)가 아닌 것이니,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세째는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닌 것이니,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네째는 정통이기는 하나 체(體)가 아닌 것이니 적손(適孫)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註 1092] 선왕조(先王朝) : 효종.
[註 1093]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으니 : 효종이 북벌(北伐)하여 병자 호란의 수치를 씻고자 한 것을 말한다.
[註 1094] 서명(叙命) : 서용하라는 왕의 명.
[註 1095] 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註 1096] 삼세(三稅) : 전세(田稅)ㆍ공포(貢布)ㆍ군포(軍布).
[註 1097] 수미(收米) : 세수 미곡.
[註 1098] 정희 왕후(貞熹王后) : 세조 비(妃) 윤씨(尹氏).
[註 1099] 태상황(太上皇) : 자리를 내주고 생존한 황제를 높여 부르는 말.
[註 1100] 사군(嗣君) : 왕통을 이은 임금.

(계속)

출전 : 현종실록 부록 현종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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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