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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07:03
분 류 사전2
ㆍ조회: 352      
[조선] 신임사화 (민족)
신임사화 辛壬士禍

1721년(경종 1)부터 1722년에 걸쳐 일어난 사류(士類)들의 참변.

신축년(辛丑年)과 임인년(壬寅年)에 일어났으므로 신임사화라 한다. 임인년에 주로 일어났으므로 '임인옥'이라고도 한다. 이 사건은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싼 노론과 소론 사이의 당파 싸움에서 소론이 노론을 역모(逆謀)로 몰아 소론이 실권을 잡은 사화이다.

숙종 말년에 소론은 세자인 윤(昀 : 뒤의 경종)을 지지했으며, 노론은 연잉군(延礽君 : 뒤의 영조)을 지지하였다. 경종은 세자 때에 생모인 장희빈(張禧嬪)이 죽자 이상스러운 병의 징후가 나타났으므로 숙종은 이를 매우 걱정하였다. 한편 1716년(숙종 42) 병신처분(丙申處分 : 소론을 배척한 처분)으로 노론 정권이 실권을 잡은 이듬해 이이명(李頤命)을 불러 소위 정유독대(丁酉獨對 : 숙종 43년 왕이 세자 교체 문제를 이이명과 단독 대담을 통해 논의한 일)를 하였다.

이로써 소론은 경종 보호의 명분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반면 노론은 연잉군 추대의 의리로 맞서 이후 치열한 싸움이 벌어졌다. 숙종이 죽고 뒤를 이은 경종은 성격이 온유하였다. 그러나 자식이 없고 병이 많아 하루 속히 왕위 계승자를 정할 것을 건의한 정언 이정소(李廷聊)의 상소를 시발로,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등이 주장하였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1721년 8월에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되었다. 그러자 소론의 행사직(行司直) 유봉휘(柳鳳輝)는 시기상조론을 들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우의정 조태구(趙泰耉)도 그를 비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노론측에서는 왕세제를 정한 지 두 달 뒤인 10월에 집의 조성복(趙聖復)의 상소로 세제 청정(世弟聽政)을 요구하였다. 이에 경종은 세제의 대리청정을 명했다가 환수하기를 반복했고, 그에 따라 노론과 소론간의 논쟁도 치열하였다.

이와 같이 경종의 질환을 이유로 하여 경종 즉위년부터 세제 책봉과 세제 대리청정 문제를 서둘렀으므로 그것을 쟁점으로 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첨예화되었다. 이 때에 소론에 대한 경종의 비호가 표면화되자 1721년 12월에 소론의 과격파인 사직(司直) 김일경(金一鏡)을 우두머리로 한 7인이 세제 대리청정을 요구한 조성복과 청정명령을 받들어 행하고자 한 노론 4대신을 들어 '왕권 교체를 기도한 역모'라고 공격하는 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해 병신처분 이래 구축된 노론의 권력 기반은 무너지고, 대신 소론 정권으로 교체되는 환국(換局)이 단행되었다. 이에 노론 4대신은 파직되어 김창집은 거제부에, 이이명은 남해현에, 조태채는 진도군(珍島郡)에, 이건명은 나로도(羅老島)에 각각 안치되었다. 그리고 그 밖에 여러 노론들도 삭직, 문외출송(門外黜送) 또는 정배되었다.

한편 소론파에서 영의정에 조태구, 좌의정에 최규서(崔奎瑞), 우의정에 최석항(崔錫恒)이 임명됨으로써 소론 정권의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소론 측에서도 김일경의 인물됨을 경계해 노론 숙청에 온건적 입장을 취하는 조태구ㆍ최석항 일파는 완소(緩少), 강경론자인 김일경 일파를 준소(峻少)라 하였다.

1722년 3월 강경론자들이 노론의 과격한 처단을 요구하고 있을 때에 목호룡(睦虎龍)은 노론측에서 경종을 시해하고자 모의했다는 소위 삼급수설(三急手說), 즉 대급수(大急手 : 칼로써 살해)ㆍ소급수(小急手 : 약으로 살해)ㆍ평지수(平地手 : 모해해 폐출함)를 들어 고변하였다. 이 음모에 관련자들은 정인중(鄭麟重)ㆍ김용택(金龍澤)ㆍ이기지(李器之)ㆍ이희지(李喜之)ㆍ심상길(沈尙吉)ㆍ홍의인(洪義人)ㆍ김민택(金民澤)ㆍ백망(白望)ㆍ김성행(金省行)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노론 4대신의 자질(子姪)과 그들의 추종자들이었다.

이 고변은 숙종의 죽음 전후에 당시 세자였던 경종을 해치려고 모의했다는 것인데, 이 때에 와서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목호룡이 남인 서얼(庶椧)로서 정치에 야심을 품고, 풍수술(風水術)을 이용해 노론에 접근했으나 시세의 변화에 따라 고변함으로써 노론에 타격을 준 사건이었다.

이 고변에 의해 국청(鞫廳)이 설치되고 역모에 관련된 자들이 잡혀서 처단되는 대옥사가 일어났다. 이 옥사에서 노론 4대신은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그리고 국청에서 처단된 자 중에 정법(正法)으로 처리된 자가 20여 인이고 장형(杖形)으로 죽은 자가 30여 인이었으며, 그 밖에 그들의 가족으로 체포되어 교살된 자가 13인, 유배된 자가 114인,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부녀자가 9명, 연좌된 자가 연인원 173명에 달하였다.

반면에 권력을 잡은 소론파에서는 윤선거(尹宣擧)와 윤증(尹拯)을 복관시키고 남구만(南九萬)ㆍ박세채(朴世采)ㆍ윤지완(尹趾完)ㆍ최석정(崔錫鼎) 등을 숙종묘(肅宗廟)에 배향하였다. 그리고 목호룡에게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직이 제수되고, 동성군(東城君)의 훈작(勳爵)이 수여되었다. 그러나 경종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세제인 영조가 즉위하자, 임인옥사에 대한 책임을 물어 김일경과 목호룡은 처단되었고, 임인옥안(壬寅獄案)은 번안(飜案 : 안건을 뒤집어 놓음)되었다.

요컨대, 신임사화는 노론과 소론간에 각각 경종 보호와 영조 추대의 대의명분을 내세워 대결한 옥사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당인(黨人)들이 정권을 획득해 부귀를 누리고자 국왕을 선택하고, 음모로써 반대당을 축출해 자당(自黨)의 세력 기반을 확보하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영조의 탕평책도 그 자신이 신임사화의 참상을 몸소 겪은 데서 비롯되었으나 당쟁은 근절되지 못한 채 점차 노론의 기반이 확고해졌다.

≪참고문헌≫

景宗實錄, 承政院日記, 國朝寶鑑, 大事編年, 辛壬紀年提要, 黨議通略, 韓國黨爭史(成樂熏, 韓國文化史大系Ⅱ, 1965), 朝鮮後期黨爭史硏究(李銀順, 一潮閣, 1988), 景宗朝에 있어서의 老少對立(吳甲均, 淸州敎大論文集 8, 1972), 辛壬士禍에 對하여(吳甲均, 淸州敎大論文集 9, 1973), 景宗朝 辛壬士禍의 發生原因에 대한 再檢討(鄭善會, 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1987), 景宗朝 辛丑換局의 展開와 金一鏡(鄭善會, 全北史學 11ㆍ12合集, 1989), 景宗代의 辛丑換局과 辛壬獄事(李熙煥, 全北史學 15, 1992), 朝鮮朝 老少黨論의 對立과 그 政論(李銀順, 朝鮮後期 黨爭의 綜合的 檢討, 韓國精神文化硏究員, 1992).

<오갑균>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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