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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0 (목)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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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049      
[고려] 고려시대의 음악 (민족)
음악(고려시대)

세부항목

음악
음악(상고시대)
음악(삼국시대)
음악(통일신라시대)
음악(고려시대)
음악(조선시대)
음악(1900년대 이후의 한국음악)
음악(참고문헌)

고려시대의 음악사는 의종 말년(1170)을 분기점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진다. 고려시대의 그러한 시대구분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다음과 같다.

[전기]

고려 전기는 신라의 사뇌와 화랑신분을 계승하였다는 점에서 고려 후기와 구분된다. 전기의 음악적 특색은 한국음악사에서는 최초로 송나라의 국가 제사용 아악 (雅樂)이 수용된 점과, 송나라로부터 연향용 속악이 새로이 채용되며 당나라의 속악이 폐용된 점이다.

(1) 아악

아악은 종묘·사직 등 국가의 중요한 제사에 사용된 중국 고대의 의식음악이다. 아악은 금석팔음(金石八音) 중 편종·편경·금(琴)·슬(瑟)·축(祝)·어(雯) 등이 포함된 특별한 악기편성과, 당상악(堂上樂:登歌)·당하악(堂下樂: 軒架)의 악기배치 및 등가·헌가의 교대연주(迭奏) 등의 특색을 갖추고 있다.

이와 같은 아악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고려 예종 11년(1116)의 일로서, 예종이 송나라의 휘종에게 주청하여 실현되었다.

송나라에서 보내온 아악은 숭녕(崇寧) 4년(1105)에 황종의 음높이를 새로 결정하고, 편경과 관악기에 각각 정성(正聲)과 정성보다 1율(一律)이 높은 중성(中聲)이 한 쌍을 이루고 있으며, 악장(樂章)에도 정성과 중성의 구분이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금의 종류에 1현금·3현금·5현금·7현금·9현금의 5등금(五等琴)제도가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고려에 들어온 대성아악기는 중성·정성의 편종과 편경, 5등금과 슬 및 중성·정성의 지(炎)·적(笛)·소(簫)·소생(巢笙)·화생(和笙)·우생(炳笙)·훈(塤)·박부(搏鸞)·진고(晉鼓)·입고(立鼓:일명 建鼓. 건고와 비고, 응고 셋이 한 틀을 이룸)·축·어의 20종에 달하고, 수량으로 말하면 등가악기 30점, 헌가악기 374점, 합계 422점으로, 560개의 편종·편경의 무게만 하여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처럼 대규모의 아악기가 수용된 것은 한국음악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다. 송나라에 아악을 청하러 간 고려 사절단은 단지 아악기만을 받아 온 것이 아니라, 송나라에 머물면서 아악을 교습받고, 대성부(大晟府)에서 펴낸 악보를 받아 옴으로써 고려에서의 아악연주 전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2) 당악

고려시대의 당악은 엄밀히 말하여 당나라의 음악이 아니고 송나라의 음악이다. 11세기에는 문종의 주청으로 송나라의 악공이 고려에 파견되어 고려 음악인들에게 송나라의 음악을 가르쳤고, 예종대에는 예종의 주청으로 1114년 송나라의 연향악인 〈대성신악 大晟新樂〉이 들어왔다.

이 밖에 12세기 초에는 고려의 여자가 송나라의 명주(明州)에 가서 대무(隊舞)를 배워 귀국함으로써 송나라의 춤이 고려에 전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11, 12세기에는 송나라의 속악이 고려에 수용됨으로써, 이전에 연행되던 당나라의 속악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송나라의 악무(樂舞)가 고려에 소개되어 연행된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073년 연등회에서는 교방여제자 13인이 추는 〈답사행가무〉가 처음으로 소개되었고, 같은 해 팔관회에서는 〈포구락〉과 〈구장기별기〉가, 1077년에는 궁중의 연향에서 〈왕모대가무〉가 각각 선보였다. 이 춤들은 대개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열을 지어 추는 대무의 성격을 띤 것들이다.

이 밖에 예종대에는 〈연화대〉가, 의종대에는 〈헌선도〉가 연행되었다. 당무(唐舞) 또는 당악정재는 방향·비파·생·당적·피리·장구·박 등의 당악기 반주 및 순한문으로 된 송사(宋詞)를 동반한다.

송사의 형태는 〈청평악〉과 같은 사(詞) 음악합주로 춤을 반주하는 것, 춤을 추는 중간에 춤동작을 멈추고 서서 〈헌천수〉와 같은 사를 관현반주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 〈보허자〉처럼 무반주로 사를 노래하는 것으로 구분된다.

춤의 절차에 있어서는 입장과 퇴장시에 죽간자(竹竿子)를 든 2인의 여기가 한문으로 된 진구호(進口號)와 퇴구호(退口號)를 읊으며 무인(舞人)을 인도하는 것이 향악정재에 비하여 특징적이다.

이와 같은 당무는 고려의 궁중연향에서 좌방악이라 하여 서쪽에 배치되었고 이와 상반되는 향무(鄕舞), 즉 향악기 반주에 우리말 노래를 수반하는 향악정재는 우방악이라 하여 동쪽에 배치되었다.

≪고려사≫ 악지에는 〈억취소 憶吹簫〉 이하 40수의 사가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낙양춘 洛陽春〉은 구양수(歐陽脩)의 작품이고, 〈하운봉 夏雲峯〉 외 7곡은 유영(柳永)의 작품임이 확인되어, 이하 40여 수의 사가 송대의 것임이 밝혀졌다.

사는 가사의 자수에 따라 영(令)과 만(慢)으로 구분된다. 즉, 영은 전체 가사의 자수가 58자 이내로 된 짧은 노래이며, 만은 91자 이상의 가사를 가진 긴 노래이다.

사의 형식은 미전사(尾前詞, 또는 前段)와 미후사(尾後詞, 또는 後段)로 되어 있으며, 각 단은 길이가 불규칙한 4개의 구(句)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낙양춘〉의 전단은 7·5·7·6자의 길고 짧은 4구로, 〈억취소〉의 전단은 14·10·13·11자의 길고 짧은 4구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처럼 구의 길이가 길고 짧은 사는 일명 장단시(長短詩)라고 불린다.

한편, 사의 음악도 그 가사의 형식과 같이 미전사와 미후사 2단이 각각 4개의 악구를 가지고 있는데, 사의 구 길이가 불규칙하였던 것과는 달리, 각 악구의 길이는 규칙적이다. 즉, 〈낙양춘〉의 예에서와 같이 영의 음악은 모두 8소절(또는 8박자) 8구로 되어 있어, 제4소절과 제8소절에 박이 한번씩 들어가며, 만의 음악은 모두 16소절(16박)의 8악구로 되어 있어, 제8소절과 제16소절에 박이 한번씩 들어간다.

여기에서 4소절·8소절에 박이 들어가는 영은 4균박(四均拍)에 해당하고, 8소절과 16소절에 박이 들어가는 만은 8균박에 해당한다. 이와 같이 불규칙한 길이를 가진 가사를 규칙적인 길이의 악구에 붙이는 것은 ≪대악후보≫와 ≪속악원보≫의 〈낙양춘〉 정간보에 의하여 확인된다.
이상에서 살핀 고려시대의 당악 중에서 〈포구락〉과 같은 당악정재 및 〈낙양춘〉·〈보허자〉와 같은 사의 음악은 비록 여러 차례의 변모를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그 밖의 당악은 그 자취가 보이지 않는다.

(3) 고취악(鼓吹樂)

고취악은 거둥 때 임금이 탄 수레〔大駕〕의 앞과 뒤에서 의장과 함께 행진하며 고취(악대)가 연주하는 음악이다. 여러 관련기록에서 “고취를 진설(陳設)”하고 “고취악을 시작(始作)·종지(終止)한다.”라고 쓴 용례로 보아, 고취와 고취악(음악)은 구별되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취가 동반하는 취각군사(吹角軍士)와 취라군사(吹螺軍士)는 그 음악을 가리키는 용어 ‘고취’와 다르다. 즉, 각(角)이나 나(螺)가 내는 단일음의 군호(軍號)는 여러 음으로 된 음악인 고취악과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고취는 임금이 태묘·원구 등의 제사를 마치고 환궁할 때에 태악령(太樂令)에 의하여 진설되고 대기된다. 고취를 일명 악부(樂部)라고 지칭하는 것처럼 고취음악은 당악기로 구성된 교방악과 별로 다르지 않으며, 그 연주인의 수는 100인을 정수(定數)로 한다. 고취악은 행진곡이라기보다는 여러 의장과 함께 성대한 위의를 보이는 행렬음악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의 고취악은 ≪고려사≫ 악지의 〈환궁악〉과 ≪시용향악보≫에 보이는 〈생가요량〉의 예에서와 같이, 송사와 별로 다르지 않다. 그리고, 고려시대의 고취악제도는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임금이 종묘제향을 마치고 환궁할 때 전악이 대기시켰던 악부에 의하여 연주되었고, 그 악부는 전부고취 50인과 후부고취 50인의 모두 100인으로 편성되었다.

(4) 향악

전기의 향악은 향악기 및 사뇌·삼국악·양부악(兩部樂)의 전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거의 통일신라의 향악을 계승하였다. 고려 향악에 사용된 악기를 보면 신라의 향악과 같이 거문고·가야금·향비파·대금·중금·소금·대고·박의 편성을 보이고 있으며, 이 밖에 당악연주에 사용된 장구가 새로이 곁들여졌다.

즉, 장구를 제외한 고려 전기의 향악은 신라의 향악과 같았는데, 장구가 고려에서 연주되기 시작한 것은 문종 때부터이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당악과 향악 연주에 다같이 사용되었다.

또한, ≪고려사≫ 악지에 의하면 백제악 5곡, 신라악 5곡, 고구려악 5곡 등 삼국악이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에 전하여졌음을 알 수 있으며, 이 밖에 고려의 궁중연향에서 당악과 향악이 각각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어 교대로 연주하는 전통도 역시 통일신라로부터 이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것은 고려 전기까지 계승된 신라 사뇌의 전통이다. 균여대사(均如大師)의 〈보현십원가 普賢十願歌〉는 가사의 전구(前句)와 후구(後句) 사이에 ‘아야’라는 차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처럼 불교 포교를 위하여 직접 만들어지고 노래로 불린 사뇌가 차사양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려의 민간에서는 10세기 중엽까지도 신라의 차사사뇌 양식이 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뇌가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던 것과는 달리, 고려 중엽에는 〈정과정 鄭瓜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금곡(琴曲)이 출현한다. 〈정과정〉은 정서(鄭羚)의 작품으로, 동래에 귀양살이를 하던 중 거문고를 어루만지며〔撫琴〕 노래하였다는 곡인데, 고려 말 이제현(李齊賢)에 의하여 칠언절구의 한문으로 번역되었다.

이 노래의 내용은 우리말 가사를 가진 〈진작 眞勺〉의 전반부와 같아서 〈정과정〉의 음악내용을 알 수 있게 하는데, 여기에서는 〈진작〉의 대엽 이전 부분을 〈정과정〉의 가사로 간주하여, 〈정과정〉의 음악형식을 살펴보기로 한다.

≪악학궤범≫의 〈진작〉 전반 가사는 전강·중강·후강·부엽으로 구분되었고, ≪대악후보≫에서는 일·이·삼·부(一·二·三·附)로 구분되었다. 그리고 음악은 삼(三)의 끝에 달린 ‘아으’라는 차사에서의 완전종지와 부엽 끝에서의 완전종지에 의하여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이와 같은 음악형식을 종합하면, 〈정과정〉은 차사사뇌를 가졌다는 점에서는 신라 사뇌의 양식과 같고, 전체가 3구와 부엽으로 되었다는 점에서는 전체가 4구와 후구(後句)로 된 사뇌와 다르다. 즉, 〈정과정〉은 사뇌의 감소형(癎少形)으로서 그 변모과정을 보이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정과정〉은 고려에서는 물론 조선 전기까지 전하였고, ≪양금신보≫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의 〈만대엽〉·〈중대엽〉·〈삭대엽〉이 모두 〈정과정〉 삼기(三機)에서 나왔다.

[후기]

고려 후기는 신라의 차사사뇌와 화랑 신분이 거의 사라진 명종대(1171)에서 고려 말(1392)까지의 약 200년을 가리킨다. 고려 후기의 음악적인 특징은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하여 궁중의 의식음악이 위축되고 민간음악이 확장되었다는 점으로 요약할 수 있다.

궁중의 의식음악은 몽고군의 침입으로 38년(1232∼1270) 동안이나 조정이 수도를 떠나 있었고, 얼마 뒤에 합단(哈丹)의 침입으로 강화로 조정을 옮기는 등 몇 차례의 병란을 겪으면서, 악공(樂工)이 이산(離散)되고 음악이 폐실될 위기를 맞게 되는데, 이로 인하여 궁중의 제향의식 및 정조(正朝)와 동짓날의 하표(賀表)에 따르는 음악, 행행(行幸) 때의 법가위장과 고취 및 팔관회·연등회 등이 미미하게 전승되거나 거의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와 반대로 1292년 강화도에서 환도한 이후 병화(兵火)가 없던 70년 동안, 충렬왕은 당나라 현종의 예를 따라서 야연(夜宴)을 즐기고, 가무를 잘 하는 성중(城中)의 관비(官婢)와 무당을 뽑아 궁중에 둠으로써, 민간의 속악이 궁중에까지 확장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 말기의 속악은 조선시대 초기에 남녀의 사랑을 담은 가사〔男女相悅之詞〕라 하여 음란한 소리(陪淫之聲)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궁중과 민간을 막론하고 널리 유행하였다.

(1) 향 악≪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고려의 속악은 곡명만 전하는 것과 그 음악이 조선시대까지 전하여 악보로 전하는 것으로 크게 구분된다. 이 중에서 백제악의 〈방등산〉과 연대미상의 곡 〈금강성〉, 이제현의 한시 번역을 가진 〈정과정〉·〈오관산〉·〈거사련〉 등은 비록 악보로 전하지는 않지만, 그 음악이 조선 태종, 혹은 세종 때까지 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의 악보로 알 수 있는 고려 후기의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별곡(別曲)’의 출현이다. 별곡은 8장으로 된 〈한림별곡〉이나 13장으로 된 〈청산별곡〉의 경우에서와 같이, 여러 장으로 된 긴 가사가 1장의 음악으로 반복되는 유절형식의 장가(長歌)이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속요는 〈만전춘〉·〈이상곡〉 등의 곡처럼, ‘아소 님하’라는 짧은 결구를 끝에 단 긴 노래〔長歌〕이다.

이 밖에 고려의 속요 중 독특하고도 이색적인 곡은 〈쌍화점〉이다. ≪대악후보≫의 〈쌍화점〉은 ‘쌍화점’·‘삼장사’·‘드레우물〔蛇龍〕’의 3장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 〈삼장〉과 〈사룡〉은 충렬왕 때인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곡임이 ≪고려사≫ 악지에 밝혀져 있어 고려 후기의 노래임이 분명하다.

〈쌍화점〉은, 첫째 초장에 서역인을 뜻하는 ‘휘휘(回回) 아비’라는 가사를 가졌고, 둘째 향악의 대부분이 5박()과 3박()의 결합인 8박인 점에 비하여, 〈쌍화점〉만이 특별히 그 5박과 3박의 각 끝음을 꾹꾹 눌러서 ({{IMG}})라고 표현하는 도약적 효과를 가지며, 셋째로 그 5박과 3박 중 3박의 매(每)박에 장구점이 들어가({{IMG}}) 빠른 효과를 낸다는 점에서 이색적이다. 이렇게 특이한 〈쌍화점〉이 향악인지 또는 호악(胡樂)인지는 의문이다.

위에서 살핀 〈서경별곡〉·〈만전춘〉·〈이상곡〉·〈쌍화점〉 등의 속악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 가사가 남녀상열지사라는 이유에서 잡스러운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 음절은 조선 초기의 궁중음악에 차용되어 그 음악적 내용을 전하였다. 즉, 〈서경별곡〉은 〈정대업〉의 〈화태〉에, 〈만전춘〉은 〈정대업〉의 〈순응〉에, 〈쌍화점〉은 〈보태평〉의 〈정명〉에 각각 차용되었음이 악보 분석 결과 밝혀졌다.

한편, 고려 후기의 음악이 남녀상열지사의 속악을 그 특징으로 한다는 점은 그런 남녀의 사랑 노래인 〈서경별곡〉·〈만전춘〉·〈이상곡〉 같은 장가가 고려 후기의 새로운 음악이라는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장가, 즉 유절형식의 별곡과 ‘아소 님하’라는 결구를 가진 음악이 고려 후기 음악의 특징이라 하겠다.

(2) 당 악 고려 전기에 들어온 당악, 정확히 말해서 송악(宋樂)은 여러 차례의 외침(外侵)에도 불구하고 고려 후기에도 여전히 연향에서 향악과 대비를 이루며 좌방악·우방악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존속하였다. 송나라의 교방여악인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가 ≪고려사≫ 악지에 서술되어 있어 고려 후기에 존속하였음이 분명하다.

또 한편, 〈태평년〉·〈수룡음〉·〈억취소〉와 같은 산사 (散詞)가 제향음악에 채용됨에 따라 변화를 보았다. 즉, 장단시로 되었던 이 음악들은 공민왕 16년(1367)에 공주의 혼전(魂殿)에서 제향의 초헌악·아헌악·종헌악으로 사용되면서 4언 1구의 신찬(新撰) 가사를 노래하였던 것이다.

고려 후기의 당악은 악기편성에 있어서도 몇 가지 변화를 보인다. 즉, 고려 전기의 당악에서 사용된 쟁이 대쟁과 아쟁으로 바뀌었고, 대고 대신 교방고가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여기에 퉁소가 새로이 채용되었다.

(3) 몽고음악

몽고(元)는 100여 년간 고려를 지배하였지만 몽고음악 또는 호악은 그 기록을 남길 만큼 영향력이 크지는 않았다. 몽고음악이 고려에서 연주되었으리라는 가능성은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고려의 공민왕 때 몽고의 음악인인 양제(梁濟)와 그 일행이 도당(都堂)에서 몽고음악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남아 있고, 또한 조선 태종 11년(1411)에는 중국과의 교린을 위하여 사역원(司譯院)에서는 몽고어를 가르치고 또 관습도감에서 사라져 가려는 몽고음악을 연습하게 하여 달라는 계(啓)를 올린 바 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몽고 또는 조선 악공이 연주하는 몽고음악이 몽고인을 위하여 제한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몽고음악은 끝내 이 땅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라졌다.

(4) 아악

고려 후기의 아악은 의종이 무신(武臣)들에 의하여 시해(1173)된 사건을 계기로 악공들이 다른 관서로 도망하였고, 그 뒤 여러 차례의 외침과 장기간의 천도로 말미암아 악공이 뿔뿔이 흩어지고 아악기가 손실되는 등 그 전승에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그 결과, 금·슬·훈의 악기가 아악편성에서 빠졌고, 결국에는 공민왕 19년(1370)에 명나라에서 편종·편경·생·소·금·슬·배소를 들여오지 않으면 안될 지경에 이르렀다.

또 명종 때부터는 제향의 아헌악과 종헌악에 순전한 아악기 연주 대신 아악기와 향악기의 합주〔鄕樂交奏〕가 끼여들어 아악의 정통성을 어지럽히게 되었다. 1371년에 아악의 부흥을 위하여 아악 전담부서인 아악서(雅樂署)가 새로 생겼지만, 아헌과 종헌의 향악교주는 교정되지 못한 채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순아악으로 개정되었다.

<이혜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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