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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1-20 (목)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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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500      
[조선] 조선시대의 음악 (민족)
음악(조선시대)

세부항목

음악
음악(상고시대)
음악(삼국시대)
음악(통일신라시대)
음악(고려시대)
음악(조선시대)
음악(1900년대 이후의 한국음악)
음악(참고문헌)

[전기]

조선 전기는 1392년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를 말한다. 이 기간 동안 있었던 음악사의 특색은, 첫째 불교억제정책으로 말미암아 연등회와 같은 불교관련 행사가 폐지되고, 둘째 숭유(崇儒)를 바탕으로 하여 예악(禮樂)이 숭상됨에 따라 아악이 크게 일신되었으며, 셋째 건국대업을 칭송하기 위하여 많은 신악(新樂)이 창작되었고, 넷째 이와 같은 조선 전기의 성대한 음악제도를 잘 보전하고 이의 결락(缺落)을 방지하기 위하여 ≪악학궤범≫과 같은 악서가 발간된 것 등을 꼽을 수 있다.

먼저, 아악이 일신되었다 함은 세종 때에 편경 이하 아악기 전반이 새로이 제작된 것, 악기 조율을 위하여 율관이 제작된 것, 와전된 재래 아악곡을 폐기하고 임우(林宇)의 ≪대성악보 大晟樂譜≫에 바탕을 둔 새로운 아악곡을 제정한 것 등을 일컫는다.

신악의 창작은 세종 때 〈용비어천가〉의 제작과 그 가사를 사용한 〈여민락〉·〈치화평〉·〈취풍형〉의 작곡, 그리고 〈보태평〉·〈정대업〉의 작곡을 말하며, 이러한 조선시대의 신곡을 후세에까지 전하기 위하여 창안된 정간보(井間譜)의 발명을 포함한다. 다음은 아악기의 제작 및 아악곡의 제정, 신악의 음악내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1) 아악기의 제작

조선 전기의 아악기 제작사업은 세종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즉, 고려로부터 완성하지 못한 제향아악을 이어받은 조선 초기에는 아악기의 음이 잘 맞지 않고 아악기의 종류가 부족하였으나, 아악의 실제적인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1425년(세종 7)에 기본음 황종율관의 길이(9寸)를 결정하는 데 필요한 거서(한 알이 1分에 해당)가 해주에서 생산되고, 1426년에는 편경의 재료인 경석(磬石)이 남양에서 발견되자 곧 율관과 편경의 제작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율관 제작사업은 몇 번의 시험을 거듭한 끝에 1427년에 완성되었다.

박연(朴堧)이 기장알을 이용하여 처음으로 완성한 황종율관은 해주에서 생산된 기장알을 이용한 것이었지만, 그 음이 명나라의 편경 황종음보다 높아 곧 폐기되었고, 이와 같은 난점을 보완하고자 다시금 중국의 편경 황종음에 맞추어 율관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1427년에는 이 율관의 음에 맞추어 우선 편경 한 틀 12장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단순히 중국 황종음에 맞추어 제작된 황종율관에 만족하지 못한 세종은 거서를 쌓아 율관을 구하는 방법〔累奏法〕 대신 후기법(候氣法)을 채용하였고, 그 밖에는 대나무 율관 대신 구리 율관을 제작하거나 또는 주척(周尺)을 사용하여 그 기본음의 높이를 결정하려고 하는 등 여러 모로 애를 썼다.

그러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종의 생각에 맞는 율관제작법은 성공하지 못한 채 결국 중국 황종음에 맞추어 만든 황종율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율관제작은 악기의 조율을 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종률법(鐘律法)의 연구를 유발시켰다. 그리고 율관 및 편경의 제작과 함께 편종·금·슬·생·소 등 조선 전기 아악기의 제작은 태종 6년(1406)의 경우에서 보듯 중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급자족할 수 있게 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2) 아악곡의 일신

조선 초기의 아악은 대개 고려시대의 아악을 답습하였지만, 1427년(세종 9) 12월에 제향의 아헌·종헌·송신에 연주되던 향악교주 전통이 폐기되고, 제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순전히 아악기 연주로 일관되도록 고쳐졌다. 뿐만 아니라 조선 전기에는 재래의 아악곡이 폐지되고 새 아악곡이 제정되어 아악 역사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아악 제정작업을 주관하고 있던 박연은 당시 봉상시(奉常寺)가 소장하고 있던 〈조선국 악장〉의 관보(管譜) 아악곡 중 등가(登歌)의 음악이 음려(陰呂)에 속하는 음을 중심음으로 하지 않고 헌가(軒架)의 음악과 같이 양률(陽律)의 음을 중심음으로 하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국 악장〉의 음악내용은 등가와 헌가의 음악이 각각 음려와 양률의 음을 중심음으로 하는 주례(周禮)의 음양합성(陰陽合聲)제도에 맞지 않을 뿐더러, 그 출처도 불분명하여 혹 악공이 잘못 베낀 것이 아닌가 의심을 하여, 그때까지 사용하던 악보는 마땅히 폐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신 참고할 수 있는 유일한 악보로 원나라 임우의 ≪대성악보≫를 들고, 이 악보에 전하는 아악 16곡 중에서 순수히 궁조(宮調)를 사용한 12곡(瓊洗曲 제외)을 각각 12조(調)로 이조(移調)한 144곡의 새로운 제사음악을 제정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위로 제정된 새로운 아악은 1430년 윤12월에 발간된 ≪아악보≫에 실렸다.

(3) 신악(新樂)

조선 전기의 신악은 세종이 창작한 〈봉래의〉·〈발상〉·〈보태평〉·〈정대업〉등을 가리킨다. 세종대에 이르러 크게 진작된 신악 제정의 직접적인 동기는 조선 초기의 악장인 〈수보록〉·〈몽금척〉·〈근천정〉·〈수명명〉 등의 내용이 모두 태조와 태종의 위업만을 담고 있어, 조종(祖宗)의 공덕과 조선건국의 간난을 두루 형용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좀더 포괄적인 조선건국 음악의 필요성이 요구됨에 따라 장대한 신악 제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제정된 신악의 음악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용비어천가〉의 가사를 가진 〈봉래의〉는 〈여민락〉·〈치화평〉·〈취풍형〉으로 이루어진 춤곡이다. 이 중에서 〈여민락〉은 〈용비어천가〉의 수장(首章)·2장·3장·4장·졸장(卒章)의 한문가사를 취하고 그것을 고취악에 붙인 것이며, 〈치화평〉은 만(慢)·중(中)·삭(數)의 3기(三機)로 이루어진 장가형식의 음악이다.

만·중·삭 3기로 된 〈치화평〉은 〈용비어천가〉 전 125장의 내용을 매 기(機)의 가사로 한다. 그러나 실제 연주 때에는 제3기의 수장 이하 16장까지와 졸장만을 사용하며(대악후보에서는 졸장마저 생략되었다), 〈치화평〉의 수장(海東章)과 2장(불휘장), 졸장(千世章)을 제외한 나머지 14장의 선율은 거의 대동소이하게 진행되어 〈용비어천가〉 전 125장의 가사를 노래하는 〈치화평〉은 장가형식 또는 가사형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취풍형〉도 〈치화평〉과 같이 〈용비어천가〉의 125장을 노래하나, 실제 연주 때에는 수장 이하 8장(太子章)까지와 졸장만을 택한다(대악후보에는 졸장도 생략되었다). 그리고 〈취풍형〉의 음악은 제3장부터 제8장까지 모두 6장의 음악이 반복되는 장가형식인 점에서 〈치화평〉과 같다. 그러나 〈치화평〉에 연이어 연주되는 〈취풍형〉은 그 선행곡보다 빠른 속도를 보인다.

〈발상〉은 조선시대 조상이 하늘에서 받았다는 상서(祥瑞)를 노래와 춤으로 나타낸 신악이다. 이 음악은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여러 곡의 신악들과 비교된다. 즉, 전체가 11장으로 된 〈발상〉은 전 125장으로 이루어진 〈용비어천가〉보다는 짧은 곡이지만, 그 사설의 내용에 있어서는 〈용비어천가〉와 비슷하다.

또, 〈발상〉의 가사가 4언 1구의 한시로 이루어진 점에서는 〈여민락〉과 비교되는데, 〈여민락〉이 4구 1장인 데 비하여 〈발상〉은 12구 1장으로 되어 있다. 〈발상〉은 4구 1장으로 된 〈여민락〉이 조종의 공덕을 기리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12구 1장의 긴 내용으로 보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발상〉의 음악내용은 〈여민락〉과 함께 고취악이다.

〈정대업〉과 함께 〈보태평〉은 각각 조종의 무공(武功)과 문덕(文德)을 기린 음악으로 〈정대업〉은 15곡, 〈보태평〉은 11곡으로 되어 있다. 이는 〈봉래의〉의 곡 구성과는 달리, 모음곡과 유사하다.

〈정대업〉과 〈보태평〉의 음악은 기존의 고취악과 고려 향악의 선율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 중 많은 곡이 고려 향악에서 파생되었으니, 〈정대업〉 중의 〈휴명〉은 〈청산별곡〉에서, 〈순응〉은 〈만전춘〉에서, 〈화태〉는 〈서경별곡〉에서 각각 선율을 채용하였으며, 〈보태평〉 중에서는 〈형광〉이 〈가시리〉(귀호곡)에서, 〈융화〉는 〈풍입송〉에서, 〈정명〉은 〈쌍화점〉에서 파생되었다. 특히, 〈보태평〉 중의 〈계우〉는 고취악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어 주목을 끈다.

한편, 〈정대업〉과 〈보태평〉의 가사는 무공을 형용한 〈정대업〉의 경우 3언 1구(예:濯靈), 4언 1구(예:休命), 5언 1구(예:昭武)로 된 한시로 되어 있으며, 문덕을 형용한 〈보태평〉은 4언 1구와 5언 1구의 한시로 되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신악은 일종의 창작작업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조선 전기의 신악 제정은 기존 음악에 바탕을 두고 새로이 요구되는 음악형태로 재구성된 것이고, 이 같은 재구성의 과정은 곧 일종의 창작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곡이 완성되기까지 사용된 창작작업의 예를 보면, 기존곡에 새로운 선율을 첨가시키거나(휴명―청산별곡, 화태―서경별곡, 형광―가시리의 관계), 기존곡의 선율 일부를 떼어내어 새 음악의 짧은 가사에 맞도록 압축시키는 형태(순응―만전춘, 융화―풍입송의 관계)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청산별곡〉과 〈휴명〉의 관계에서와 같이, 한시의 가사를 가진 신악은 향악의 첫 시작음을 궁(宮) 또는 하오(下五), 즉 중심음으로 고침으로써 본래 향악이었던 곡을 중국음악의 기조필곡(起調畢曲)의 체제로 만들었는가 하면, 〈쌍화점〉과 〈정명〉의 관계와 같이 한시의 가사를 가진 신악은 불규칙한 길이로 된 향악의 길고 짧은 음을 중국음악과 같이 규칙적 길이의 음으로 고친 예를 볼 수 있다.

한편, 세종 때의 신악인 〈보태평〉과 〈정대업〉은 여타의 곡과는 달리 특별한 변화를 겪는다. 본래 연향악에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무용을 곁들여 연행되어 온 이 음악은 세조 때인 1464년 종묘제향악으로 채택됨에 따라 제향음악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그 변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대업〉 15곡은 〈보태평〉과 같이 11곡으로 감소되었다. 둘째, 선율의 길이도 연향음악으로서의 〈정대업〉·〈보태평〉보다 짧아졌다. 셋째, 임종궁이었던 〈보태평〉과 남려궁이었던 〈정대업〉의 음악이 모두 청황종궁으로 통일되었다. 그리고 이 음악들은 모두 기존의 향당악 편성에 편종·편경·축·어의 아악편성이 첨가되었다.

(4) 정간보(井間譜)의 창안 및 그 기보법(記譜法)을 이용한 악보출간

정간보는 ≪세종실록≫ 악보에서와 같이 1행 32정간, 또는 ≪세조실록≫ 악보에서와 같이 1행 16정간으로 되었으며, 매 정간이 시간단위를 표시하는 유량악보(有量樂譜)이다. 정간보에서 나타내는 음의 길이는 음이 쓰여진 정간 다음에 이어 나오는 빈 정간 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그 음이 길고 짧다.

정간보에 의한 기보법은 등시가(等時價)의 4음 1구로 된 아악의 기보에는 별 필요가 없는 것이며, 실제로 ≪세종실록≫ 아악보에서는 정간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에 반하여 음의 길고 짧음을 나타낼 수 있는 정간보는 불규칙적인 시가를 가진 향악 기보에 절대 필요한 것으로, 세종 당시에 제정된 〈정대업〉·〈보태평〉·〈치화평〉·〈취풍형〉 등의 신악이 바로 이 기보법에 의하여 악보화되었다.

이와 같은 향악의 기보를 위한 세종의 정간보 발명은 우리말의 기록을 위한 세종의 한글창제에 버금가는 독창적인 업적으로 평가되며, 정간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세종실록≫ 악보는 우리 나라의 현전하는 악보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점에서도 음악사의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창제 당시 1행 32정간으로 만들어진 정간보는 세조에 의하여 1행이 16정간씩 둘로 나뉘었고, 그 16정간은 3·2·3·3·2·3정간의 6대강으로 구분되어 악보를 읽는 데 편리하게 되었다(≪세조실록≫ 권48 악보 참조).

1행 16정간 6대강으로 된 세조 때의 정간보는 15세기 말 또는 16세기 초의 것으로 보이는 ≪시용향악보≫와 세조 때의 향악을 수록하고 있는 ≪대악후보≫에 사용되었는데, 마침 이 악보들은 고려시대 향악의 장단을 명시하고 있어 음악사의 귀중한 단계를 알려주고 있다.

또 정간보는 ≪금합자보≫와 같이 합자보(合字譜)의 기보방법을 병용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금합자보≫의 〈여민락〉과 〈보허자〉에서는 6대강 대신 4대강보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은 4대강보는 조선 후기에 나온 ≪이수삼산재본금보≫·≪증보고금보≫·≪신증금보≫ 등의 금보(琴譜)에서도 발견된다.

(5) 악서찬집(樂書撰集)

조선 전기의 악서찬집 사업은 일찍이 세종 7년에 박연에 의하여 건의된 바 있으나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였고, 성종 24년에 이르러서야 ≪악학궤범≫ 9권 3책의 형태로 실현되었다.

≪악학궤범≫은 당시 장악원에 있던 의궤(儀軌)와 악보(樂譜)가 오래되어 파손되었거나 비록 잘 보존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소략하고 틀린 점이 많아 이의 증보 교정이 필요하다는 성종의 명으로 장악원제조 유자광(柳子光), 예조판서 성현(成俔), 장악원주부 신말평(申末平), 전악 박곤(朴棍)과 김복근(金福根)이 참여하여 완성하였다.

≪악학궤범≫은 ≪시악화성 詩樂和聲≫의 ‘악제원류(樂制原流)’나 ≪증보고금보≫의 ‘역대악제(歷代樂制)’와 같은 음악역사 서술을 일체 생략하고, 12율의 결정법, 등가악과 헌가악의 중심음 사용법, 악기 진설법, 춤의 진퇴작변(進退作變), 악기제조법과 조현법 등 음악의 실용성을 있는 그대로 광범위하고 상세하게 기술하는 데 치중하였다.

이와 같은 ≪악학궤범≫의 기술목적은 비록 악제와 악기가 소실되는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이 책만 있으면 원상대로 재현할 수 있게 하는 데 초점을 둔 것이었다. 실제로 광해군 때에는 임진왜란을 겪은 후 악기와 악제가 모두 흩어지고 결락된 것을 ≪악학궤범≫에 의하여 일무와 종묘악을 복구하는 데 공헌한 바 있으며, 이후로도 고악의 계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임진왜란 때 몇 권을 제외하고 산실된 ≪악학궤범≫은 1610년(광해군 2)에 복간되었고, 병자호란(1636) 후로는 1655년(효종 6)에, 그리고 아악 중수사업의 일환으로 1743년(영조 19)에 각각 복각되어 오늘날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이 밖에 조선 전기에는 세종대의 율관제작에 따른 악리(樂理) 연구, 세종의 정간보 창제와 세조의 개량, ≪악학궤범≫의 간행에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시대에서는 볼 수 없는 악학(樂學)의 발달을 보여준다.

(6) 당악

조선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당악, 즉 송악(宋樂)이 그대로 답습되었다. ≪고려사≫ 악지 당악정재의 〈헌선도〉·〈수연장〉·〈오양선〉·〈포구락〉·〈연화대〉는 조선시대의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계승되었고, 그 밖에 조선 전기에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서 창작된 〈금척〉·〈수보록〉·〈근천정〉·〈수명명〉·〈하황은〉·〈하성명〉·〈성택〉 등의 정재가 ≪악학궤범≫의 당악정재에 첨가되었다.

새로이 창작된 춤은 당악정재의 양식을 따랐을 뿐만 아니라, 〈금척〉을 제외하고 새로 지은 가사를 송악에 얹어 부름으로써 송악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수보록〉과 〈수명명〉에는 〈보허자〉가, 〈하황은〉에는 〈금전악〉이, 〈하성명〉과 〈성택〉에는 〈하성조〉가 각각 사용되었다.

한편, 조선시대의 송악은 원가사 대신 본래의 선율에 새로운 가사를 얹어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태종·중종 때에는 ≪시경 詩經≫의 가사를 송악의 선율에 얹어 연향악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녹명 鹿鳴〉의 가사를 〈중강조〉에, 〈사모 四牡〉를 〈금전악〉에, 〈황황자화 皇皇者華〉를 〈전화지조〉에 붙여 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송사(宋詞)의 원가사를 사용하지 않고 송악의 선율에 다른 가사를 담았던 이유는 ≪성호사설≫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송사의 내용 중 ‘풍정(風情)’·‘비단옷(綺羅)’·‘분단장한 얼굴〔粉面〕’·‘푸른 눈썹〔翠黛〕’과 같은 표현들이 아악의 뜻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7) 고취악

조선시대의 고취악은 조종의 공덕을 칭송한 〈수보록〉·〈몽금척〉·〈근천정〉·〈수명명〉을 포함하지만 그 악보가 전래되지 않는다. 단지 세종 때에 제정된 신악(新樂) 중에서 〈정대업〉 중 〈독경〉, 〈보태평〉 중 〈계우〉, 〈발상〉, 〈봉래의〉 중 〈여민락〉 등의 고취악은 악보로 전하고 있어, 이로써 고취악의 음악내용을 알 수 있다.

고취악의 가사는 4언 1구의 한시로 되었고(몽금척은 예외), 그 음악은 1자 2·3음 (一字 二音 또는 三音)의 체제를 가졌다. 그리고 고취악은 4언 1구의 끝에 박이 한번씩 들어가며, 박 넷이 모여 장구형 하나를 이루는데, 장구형 하나의 음악은 곧 4구 1장의 가사에 해당된다.

또, 가사 1구 끝자에 붙는 음의 시가는 선행자(字)에 붙는 음의 시가와 같다. 이 점은 가사 1구의 끝이 2배로 늘어나는 송사와 다르며 오히려 아악과 유사하다. 다만 아악에서와 같이 엄격히 1자 1음식이 아니고, 1자 수음(數音)인 점에서는 아악과 다르다.

(8) 향악

조선 전기의 향악은 대부분 고려시대의 향악을 계승하였고, ≪대악후보≫·≪시용향악보≫ 및 ≪금합자보≫에 기보되었다. 조선 전기 향악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금합자보≫의 첫머리에 실린 평조의 〈만대엽〉이다.

〈만대엽〉은 고려시대 음악에는 보이지 않고 ≪금합자보≫에 처음 나타나는 음악으로서, 이 음악의 형성시기는 대략 조선시대 전기 말로 추측된다(세조 때의 음악을 실었다는 대악후보에도 만대엽이 포함되었지만, 그 만대엽은 금합자보에 비추어 가사가 없고, 음악이 6대강의 제4대강에서 시작하는 것은 다른 데에 그 예가 없는 점으로 비추어 세조대의 음악이 아님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평조만대엽이 고려시대의 향악이 거의 다 사라진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평조·우조·평조계면조·우조계면조의 〈중대엽〉과 〈삭대엽〉을 파생시켰고, 평조만대엽은 직업음악인이 아닌 선비들 간에 애탄(愛彈)되었던 금곡으로 조선시대의 신곡이기 때문이다.

[후기]

조선 후기는 광해군대로부터 고종 말(1910)까지를 가리킨다. 이 시대 음악사의 가장 큰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임진왜란·병자호란 등으로 인하여 국력이 피폐하게 되자 국가의 여러 의식에 수반되는 음악의 규모가 축소되었다.

둘째, 〈종묘제례악〉을 비롯하여 고취악 〈여민락령〉(특히 해령), 당악 〈낙양춘〉, 향악인 〈정읍〉 등의 곡에서와 같이, 음악의 템포가 완서(緩舒)하여짐과 동시에 무박자화(無拍子化)되었다.

셋째, 당악정재와 향악정재가 그 고풍(古風)의 당악과 향악을 상실하고 향악교주(鄕樂交奏)에 의하여 연행되었으며, 그 결과 ≪악학궤범≫에 기록된 조선 전기의 정재와 내용이 많이 달라졌다.

넷째, 정악(正樂) 〈영산회상〉과 〈가곡〉 또는 〈자진한닢〉이 많은 변주곡의 추가로 인해 모음곡 또는 대곡(大曲)으로 형성되었다.

다섯째, 서민층에서는 긴 이야기를 말과 소리로 엮어 부르는 판소리와 기악독주곡의 형식인 가야금 산조가 출현하였다.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조선 후기는 외래음악 수용이 거의 없이 전통음악이 창작, 발전되었던 시기였다. 다음은 음악의 갈래별로 조선 후기 음악의 변천과정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아악

조선 후기 아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단절과 복구의 격동을 겪었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조선 전기의 아악전통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병자호란(1636)에서 인조 25년(1647)까지 약 10년간이나 단절되었던 사직(社稷)·문묘(文廟) 등의 제향아악은 매우 축소된 규모로 복구되어 그 명맥을 이었던 것이다.

복구된 아악의 규모는 ≪악학궤범≫에 62인으로 규정되어 있는 등가 악생의 수가 20인으로, 헌가의 경우는 124인에서 22인으로 감소되었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등가에서 악장을 부르는 가자(歌者)의 수가 ≪악학궤범≫의 24인에서 4인으로 격감된 점이다.

(2) 종묘제례악

〈종묘제례악〉도 아악의 경우와 같이 병자호란 후 10년 동안 정지되었다가 다시 복구되어 그 맥을 이었다. 연주 규모는 감소되어 ≪악학궤범≫에서 36인이었던 등가의 악공은 20인으로, 72인이었던 헌가의 악공은 22인으로, 등가에서 노래를 담당하였던 가자의 수는 인조 때의 6인에서 2인으로 각각 감소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의 〈종묘제례악〉은 점차 향악적인 색채를 상실하게 되는데 그 결과 〈종묘제례악〉은 향악도 아니고 아악도 아닌 독특한 음악으로 변모하였다.

즉, 조선 전기의 〈종묘제례악〉은 등가 및 헌가에 향비파·가야금·거문고 등의 향악기들이 함께 편성되었으나, 이 향악기들은 숙종대 이후에 일차 헌가에서 빠졌고, 그 뒤로는 헌가에서마저 생략되어 악기편성의 면에서 향악의 요소가 거의 배제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음악의 내용에 있어서도 종래에는 길고 짧은 음의 결합으로 연주되던 〈종묘제례악〉이 거의 등시가의 음길이로 변함으로써 향악으로부터 멀어진 모습을 보여준다.

(3) 전정헌가(殿庭軒架)

전정헌가의 규모도 역시 인조 이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 의하면 59인이 연주하던 전정헌가 악공의 수가 40인으로 줄었다(≪증보문헌비고≫·≪춘관통고≫).

그리고 인조 이후의 전정헌가는 ≪악학궤범≫의 거문고·가야금·향비파·월금·대쟁·아쟁 등의 많은 현악기를 편성에서 제외시키고 관악기의 연주를 부상시켰다는 점이 주목을 끈다.

전정헌가에서 연주된 음악은 고취악 〈여민락령〉(朝賀 및 임금의 출입 때)과 당악 〈낙양춘〉(군신배례 때)이다. 이 곡들은 조선 초기에는 16정간 1행의 악보에서 4행마다 박이 들어가는 규칙적인 리듬이지만, 조선 후기에는 〈종묘제례악〉과 같이 박자가 없는 음악으로 변하였다.

(4) 전정고취(殿庭鼓吹)

전정고취는 전정헌가에서 편종·편경·삭고·응고·건고·축·어 등의 악기를 뺀 작은 규모의 연주편성이다. 전정고취의 규모도 역시 인조 이후 축소되어 ≪악학궤범≫에 의하면 50인이 연주하던 전정고취 악공의 수가 26인으로 줄었다. 전정고취는 전정헌가와 같이 고취악 〈여민락령〉과 당악 〈낙양춘〉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순조 기축년(己丑年) ≪진찬의궤≫에 의하면, 전정고취가 왕세자의 입전(入殿) 때에 〈정읍 만기〉를 연주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본래 〈정읍〉은 〈무고〉의 반주에 사용된 음악으로 장단이 있는 음악이었으나, 이 음악이 전정고취에 연주됨에 따라 현행 〈정읍〉과 같이 장단이 없는 위엄 있는 곡으로 변하였다.

(5) 전후부고취(前後部鼓吹)

임금의 행악(行樂)으로 연주된 전후부고취의 음악은 ≪악학궤범≫에 당시 50인의 악공이 맡고 있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악공의 수가 40인으로 줄었다. 그 악기편성에 있어서는 전정고취와 거의 다르지 않다. 전후부고취에서는 〈여민락령〉을 연주하였는데 이 음악은 현행 〈해령〉과 같이 박자 없는 화려한 관악으로 현악 〈여민락〉과 다른 느낌을 준다.

(6) 연향악(宴享樂)

조선 후기 연향악의 변천과정에 나타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전기까지만 하더라도 향악과 당악이 좌우로 배치되어 교대로 연주하는 연주전통이 지켜졌으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당악기와 향악기가 한데 섞여 연주〔鄕唐交奏〕하게 됨으로써, 향악과 당악의 구별이 없어졌다.

둘째, 외진연(外進宴)과 내진연(內進宴)에 사용되는 춤의 내용이 각각 구별되어 고정되었다. 영조 19년(1743)에는 외진연 정재에서 무동(舞童)이 춤을 추고 제1작(酌) 초무(初舞)에 〈보허자령〉, 제2작 〈아박〉에 〈정읍〉, 제3작 〈향발무〉에 〈보허자령〉, 제4작 〈무고〉에 〈향당교주〉, 제5작 〈광수무〉에 〈향당교주〉를 쓰기로 정하였다.

내진연 정재에서는 여기(女妓)가 춤을 추고 〈헌선도〉·〈수연장〉·〈포구락〉·〈오양선〉·〈연화대〉 등의 당악정재와 〈아박무〉·〈향발무〉·〈무고〉 등의 향악정재를 쓰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이 춤은 모두 향당교주로 반주하였다.

이로써 조선 후기에는 여기에 의한 송나라의 대무(隊舞)가 외진연에서 사라졌고 내진연에서만 연행되었으며, 이때 연주되는 음악은 ≪악학궤범≫ 당시까지의 송악(宋樂)이 아닌 〈향당교주〉로 단일화되었다.

셋째, 향악정재 중 〈아박〉과 〈무고〉에 수반된 우리말 창사가 각각 칠언절구 및 오언율시의 한시로 바뀌었다.

이상에서와 같이 조선 후기의 연향악, 특히 향악정재와 당악정재는 조선 전기까지 엄격하게 지켜지던 구별이 거의 없어짐에 따라 ≪악학궤범≫ 소재의 향악·당악정재와는 매우 다르게 변화하였다.

(7) 정악(正樂)

정악이라는 용어의 뜻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된다. 먼저, 정악은 아정한 음악, 또는 담박하고 복잡하지 않은 음악을 가리킨다. 따라서, 정악은 전문음악이 아닌 선비들의 음악이라는 점에서 ‘금가(琴歌)’와 통하는 점이 있다.

한편, 정악의 또 다른 뜻은 그 명칭이 음률로 지칭되었던 예와 같이 노래를 수반하지 않는 기악곡을 가리키며, 〈영산회상〉·〈여민락〉·〈보허자〉 등이 이 음률의 대표적인 곡에 든다. 여기에서는 정악이라는 용어를 금가가 아닌 음률이라는 뜻으로 한정하여 사용하기로 한다.

〈여민락〉은 〈영산회상〉에 비하여 금보에 기록된 것이 적다. 조선 후기에 처음으로 〈여민락〉을 수록한 ≪신증금보≫는 가사까지 병기(倂記)한 〈여민락〉의 전 10장의 음악을 완전하게 담고 있다.

그러나 ≪어은보≫ 이래로 〈여민락〉은 가사 없이 제1장부터 제7장까지만 연주하도록 되어 있으며(어은보에서 처음으로 장별 구분을 하였다), ≪삼죽금보≫에서는 〈여민락〉 제1장에서 제4장까지는 20박 한 장단의 음악형식을 지키고 있으나 4장 이하에서는 10박 한 장단으로 변화하였다.

〈보허자〉 또는 〈보허사〉(이 명칭은 어은보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다)는 ≪이수삼산재본금보≫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이 악보에서는 미후사의 제1구, 즉 환두(換頭) 부분까지 싣고 있으며, 그 가사도 병기하였다.

그러나 ≪한금신보≫ 이후의 악보에서는 가사가 없어지고 장별 구분이 생기게 되는데, ≪유예지≫부터는 현행같이 제5장부터 제8장까지의 음악이 20박 1장단에서 10박 1장단으로 변화하였다.

또한 〈보허자〉는 몇 가지의 파생곡을 만들어냈다. 즉, 〈보허자〉의 환입(換入, 또는 도드리) 부분을 20박에서 6박으로 변형시켜 파생된 곡이 〈밑도드리〉이며, 거문고 4괘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밑도드리〉를 다시 거문고 7괘를 중심으로 연주하는 곡이 〈잔도드리〉이다.

이 음악들이 처음으로 출현하는 것은 ≪한금신보≫인데, 여기에서는 장별 구분이 채 되지 않은 상태로 기보되어 있다. 또한 ≪삼죽금보≫ 이후에는 〈보허사〉에서 파생된 또 다른 곡인 〈양청도드리〉와 〈우조가락도드리〉가 출현하였다.

〈영산회상〉은 현행 〈상영산〉에 해당하는 곡이 ≪이수삼산재본금보≫에 맨 처음으로 보이는데, 이 악보에서는 ‘영산회상불후신’이라는 가사를 병기하였다. 그 뒤 ≪한금신보≫부터 가사가 없어졌고, ≪유예지≫에 이르러서는 곡 전체가 4장으로 구분되었다.

한편, ≪어은보≫ 이후로는 〈상영산〉의 파생곡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하여 현행 〈중영산〉에 해당하는 곡이 ≪어은보≫에서는 ‘영산회상 갑탄’이라는 명칭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곡은 다시 ≪유예지≫에 이르러 10박 한 장단을 가진 〈세영산〉·〈가락덜이〉를 파생함으로써 연곡(連曲)의 성격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또, ≪유예지≫에서는 오늘날 〈영산회상〉의 한 곡인 〈삼현도드리〉·〈하현도드리〉·〈염불〉·〈타령〉·〈군악〉 등의 곡이 보이는데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곡은 서로 독립되어 있었고, 이 곡들이 오늘날과 같이 거대한 모음곡으로 형성된 것은 ≪삼죽금보≫ 이후의 일이다.

이상에서와 같은 〈영산회상〉의 변모과정은 단순한 곡의 전승에 그치지 않고 변주, 즉 창작에 의한 전통의 발전을 보여주는 모범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악보를 중심으로 살펴본 〈여민락〉·〈보허자〉·〈영산회상〉에서 보여주는 공통적인 변천은 ≪이수삼산재본금보≫의 16정간 4대강으로 기보된 음악들이 ≪신증금보≫에서는 20정간 4대강의 음악으로 변하고, ≪유예지≫에서는 20정간 4대강 한 장단이 두 장단으로 확대되는 변천이다.

즉, 이러한 변천은 음악의 속도가 촉급(促急)하여지는 것을 막고 완서(緩舒)를 강조하는 경향으로 변천하였던 것인데, 이와 같은 음악의 변화는 정악의 본분을 고수하려는 뜻으로 해석된다.

(8) 가곡(歌曲)

가곡은 거문고 반주를 필수로 하는 점에서 금가와 통한다. 금가는 ≪양금신보≫ 시대만 하더라도 〈만대엽〉·〈북전〉·〈중대엽〉·〈감군은〉 등의 곡이 있었다. 그러나 〈감군은〉은 ≪신증금보≫에서부터 보이지 않고, 〈만대엽〉은 ≪어은보≫ 이후로, 〈북전〉은 ≪유예지≫ 이후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중대엽〉은 ≪삼죽금보≫에서 장단이 “의거하기 어렵게” 되어 실제 연주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후 오늘날까지는 오직 〈삭대엽〉만이 많은 변천을 거쳐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삭대엽〉, 즉 가곡은 〈만대엽〉·〈중대엽〉과 같이 5장과 중여음(간주곡)·대여음(후주곡)으로 이루어진 단형의 노래로 거문고에 의하여 반주되는 음악이다.

〈삭대엽〉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양금신보≫에서이다. ≪증보고금보≫의 〈삭대엽〉은 우조·계면조(우조계면조)·평조·계면조평조(평조계면조) 등 4개의 조를 완전히 갖추고 있으며, 〈우조삭대엽〉 2곡과 나머지 3조에 속하는 삭대엽이 1곡씩 수록되어 있다.

이후 〈삭대엽〉은 여러 가지의 파생곡을 갖게 되는데, ≪신증금보≫에 이르러서는 위의 4조의 〈삭대엽〉이 각각 일·이·삼(一·二·三)의 세 가지 곡으로 확대되었으며, 이 음악은 일(一)에서 이·삼(二·三)으로 진행됨에 따라 노래의 시작음이 점점 높아지는 경향을 보인다(예:〈우조삭대엽〉에서 一은 낙질로 인하여 확인할 수 없고, 二는 유현 7괘의 음, 三은 유현 10괘의 음으로 시작한다). 〈삭대엽〉 1과 그 변주곡인 2와 3이 그 숫자의 순서대로 연주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뒤 ≪한금신보≫에 이르러서는 4조의 〈삭대엽〉 중에서 우조와 우조계면조의 〈삭대엽〉이 삼(三)에서 사(四)로 늘어난다. 이 음악을 후대의 가곡과 비교, 분석한 결과 〈삭대엽〉 일(一)은 현행 〈초수대엽〉에 해당하고, 이(二)는 〈두거〉에, 삼(三)은 〈삼수대엽〉에, 대현 5괘음으로 시작하는 그 사(四)는 〈이수대엽〉에 해당함이 밝혀졌다.

≪한금신보≫에서 주목되는 점은 〈삭대엽〉 사(四, 현행 이수대엽)가 오히려 이(二, 현행 두거)의 초장만 변주한 곡이라는 사실이다. 그 뒤 ≪유예지≫에 이르러 〈초엽〉(초수대엽)·〈이엽〉·〈삼엽〉(삼수대엽)에 이어 〈농엽 弄葉〉(계면조)·〈우락〉·〈계락〉·〈편수대엽〉이 처음으로 추가된다.

그 다음 ≪삼죽금보≫에 이르러서 〈이수대엽〉과 〈삼수대엽〉 사이에는 〈조림 調臨〉(조은 자진한입, 두거)이 끼어들고 〈삼수대엽〉 다음에 그보다도 더 높은 음을 내는 〈소이 騷耳〉와 〈소용 騷聳〉이 추가된다. 그리고 이 곡들이 〈우조 소용이〉에서 〈계면 초수대엽〉으로 연속진행할 때 다리구실을 하는 〈우롱〉 또는 〈반엽〉이 생겼으며, ‘농’·‘락’·‘편’을 높이 질러내는 〈언농〉·〈언락〉·〈편락〉이 더 추가되었다.

한편, ≪삼죽금보≫에서는 평조와 평조계면조 〈삭대엽〉은 없어지고 우조와 (우조)계면조만 남았다. 그 뒤 ≪현금오음통론≫에 이르러서는 〈이수대엽〉 다음에 〈중거〉와 〈평거〉가 새로이 추가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대곡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가곡의 변천과정은 〈영산회상〉의 형성과정과 마찬가지로 변주라고 하는 창작활동을 통하여 전통의 발전을 꾀한 좋은 예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9) 가사(歌詞)

가사는 별곡과 함께 장가에 속하는 노래로 단가(短歌)인 가곡과 대조를 이룬다. 그리고 가곡이 음악 중심인 데 비하여 가사는 음악보다는 사설이 중심이 되는 노래이다.

조선 후기 ≪삼죽금보≫에 이르러 가사는 일반 금보에 실리기 시작하는데, 가사와 금보에 실려 있다고 하여 거문고 반주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즉, 가사는 보통 장구와 젓대 반주로 노래하며, 그 반주의 선율은 노래의 가락을 그대로 따르는〔隨聲〕 것이 보통이다.

오늘날 전하고 있는 가사는 〈죽지사〉·〈어부사〉·〈춘면곡〉·〈상사별곡〉·〈권주가〉·〈백구사〉·〈길군악〉·〈처사가〉·〈매화가〉·〈양양가〉·〈황계사〉·〈수양산가〉 등 12곡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곡수와 가사의 사설을 조선 후기에 간행된 노래모음집과 비교하면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청구영언≫과 현행의 가사를 예로 들어 살펴보면, ≪청구영언≫에서는 〈춘면곡〉·〈권주가〉·〈백구사〉·〈군악〉(길군악)·〈관등가〉·〈중양가〉·〈귀거래〉·〈어부사〉·〈환산별곡〉·〈처사가〉·〈낙빈가〉·〈강촌별곡〉·〈관동별곡〉·〈양양가〉·〈매화가〉(매화타령)·〈황계가〉(황계타령) 등이 실려 있다.

이 중에서 〈백구사〉와 〈양양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곡이 그 사설을 조금씩 달리하고 있다. 한편, 〈상사별곡〉과 〈춘면곡〉은 가사 끝부분의 사설이 생략되어 있는데, 이 점은 가사가 유절형식의 음악인지 통절형식의 음악인지를 결정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그리고 ≪삼죽금보≫의 〈상사별곡〉을 예로 들어 곡의 변화를 살펴보면, ≪삼죽금보≫의 〈상사별곡〉은 매 24점이 가사 1곡에 맞아 5박자 1장단(3점)의 8장단(24점)이 1장을 이룬다.

그러나 현행 〈상사별곡〉 12장 중 8장은 8장단이 아니라 12장단이 1장을 이루고, 특히 종장에서는 8장단이 아닌 6장단이 1장을 이루고 있다. 현행 〈상사별곡〉은 사설면에서는 ≪청구영언≫과 다르고, 그 음악은 ≪삼죽금보≫와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상사별곡〉은 가사변천의 일면을 보여주는 한 예이기는 하나, 이와 같은 가사의 사설과 음악의 변화, 그리고 악보의 결핍은 가곡에 비하여 조선 후기 가사의 변천과정을 불분명하게 하고 있다.

(10) 시조(時調)

시조는 일명 시절가(時節歌)라고도 한다. 시조는 가곡의 사설을 차용하지만 음악의 형식에 있어서는 가곡처럼 5장이 아닌 3장으로 되어 있고, 1장의 박자수도 가곡보다 적어서 가곡을 단순화한 것이 바로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시조의 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대체로 영조대의 가객(歌客) 이세춘(李世春)이 일반 시조에 장단을 붙였다는 기록에 의거하여, 이 무렵부터 시조가 음악으로 널리 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시조가 처음으로 악보에 기록된 것은 이규경(李圭景)의 ≪구라철사금자보≫에서이다. 이 악보에서는 시조의 장별 구분이나 장구점이 표기되어 있지 않고, 다만 모두 60점이라는 주(註)가 곡의 끝에 붙어 있다. 그 뒤 ≪삼죽금보≫에는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나오는데, 이 노래는 모두 5장으로 이루어졌다.

연대 미상의 ≪장금신보≫에도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나온다. ≪장금신보≫에서도 역시 장별 구분은 5장으로 되어 있고, 시조장단 그림은 1장·2장·3장을 분명히 보이고 있으며, 장구점은 ≪방산한씨금보≫와 비슷하나 여음이 매 장단 끝에 있지 않고 3장 끝에만 붙어 있는 점이 다르다.
한편, ≪서금보≫에서는 평시조와 지름시조가 각각 3장으로 나누어졌고 여창의 평시조와 지름시조도 3장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방산한씨금보≫에서는 시조의 3장형식과 장구점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11) 판소리

‘타령’ 또는 ‘잡가’라고 불렸던 판소리는 광대 한 사람이 소리와 말(아니리)로 〈춘향가〉와 같은 긴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극음악이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에 발생한 것으로, 그 하나인 〈춘향가〉는 일찍이 18세기 중엽에 한문시로 소개되었다(유진한의 만화집).

19세기 중엽에는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타령〉·〈적벽가〉·〈배비장전〉·〈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의 판소리곡(송만재의 관우희)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12마당의 판소리는 점점 후대로 내려오면서 곡의 수는 줄어들고, 지속적으로 전승되어 온 각 곡의 분량은 확대되면서 오늘과 같은 5마당으로 정착되는데, 간단히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세기 후반에 이유원의 ≪가오고략 嘉梧藁略≫에 이르면, 앞서 말한 12마당 중에서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다고 여겨진 〈강릉매화타령〉·〈옹고집전〉·〈변강쇠타령〉·〈장끼타령〉·〈무숙이타령〉·〈가짜신선타령〉 등이 빠지게 되며,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집≫에서는 이 중에서 〈배비장전〉과 〈장끼타령〉을 제외한 6마당만을 실었다.

그리고 1933년 이선유의 판소리를 정리한 ≪오가전집≫에서는 신재효의 6마당 중 내용이 상스러운 〈변강쇠타령〉을 빼고, 현재와 같은 5마당의 소리만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판소리의 곡수가 점차 줄어드는 동안 판소리의 사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틀린 이면은 고치고, 판소리의 청중이었던 지식층에 의하여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는 양상을 보였다.

틀린 이면을 고쳤다 함은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가 이별말을 듣고 면경·체경을 쳐부셨다 하나 온갖 예의를 아는 춘향으로 그랬을 리도 없으려니와……”라는 아니리가 다른 사설로 고쳐지는 과정을 뜻하며, 유식한 내용이 새로이 첨가되었다 함은 판소리의 여러 대목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한시와 고사(故事) 등을 인용한 새로운 대목이 첨가된 경우를 말한다.

예를 들면, 〈경판 춘향전〉과 〈고대본 춘향전〉에는 〈적성가〉가 없으나 〈열녀춘향수절가〉에는 왕발(王勃)의 임고대(臨高臺) 편의 시구를 인용한 〈적성가〉가 첨가된 경우이다. 따라서 12마당의 판소리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춘향가〉의 대본이 유식한 문자를 가장 많이 담고 있어 곡의 분량이 가장 많고, 따라서 이본(異本)도 가장 많다.

〈춘향가〉의 이본이 많다는 것은 판소리의 사설이 여러 가객의 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판소리의 음악도 역시 사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즉, 판소리의 음악은 여러 명창들이 각기 고유한 더늠(창작)을 첨가해 나감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극음악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더늠의 대표적인 예를 들면, 〈박타령〉 중 권삼득의 더늠인 ‘제비 후리러 가는 대목’과 〈춘향가〉 중 고수관의 더늠인 ‘사랑가’ 등이다. 판소리의 이러한 더늠 대목은 비록 악보로 기록된 것은 아니나 구전(口傳)에 의하여 그 창작자와 음악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12) 가야금산조

가야금산조는 간단히 말해서 판소리의 기악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음악의 내용이 유사하다. 즉, 산조의 선율은 남도판소리의 선율과 같고, 산조에 사용되는 장단의 종류에 있어서도 판소리와 같다.

그러나 기악독주곡인 산조는 판소리와 달리 느린 템포에서 빠른 템포로 진행되는 틀(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일정한 순서)을 가짐으로써, 극적인 내용전개에 따라 다른 장단을 가지는 판소리와는 구분된다.

가야금산조는 19세기 말 전라남도 광주의 아전 김창조(金昌祖)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그의 제자 한성기 등에 의하여 계승되었다고 하며, 근세 이후 오늘날까지 가장 활발하게 연주되는 곡이다. 뿐만 아니라 가야금으로부터 출발한 산조 양식은 하나의 기악독주곡 양식으로 정착하여 거문고산조·대금산조·해금산조 등으로 확산되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한국음악사는 여러 차례의 외침과 그에 따른 악기의 파괴, 악보의 산실, 음악인의 사산(死散)에도 굴하지 않고 강한 생명력을 유지하며 이어졌다.

그리고 한국음악사는 마치 우리말과 한문과의 관계와 같이, 전통음악이 외래음악과의 접촉과 그의 섭취로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전통의 뿌리를 상실하지 않고 매 시대마다 풍요한 음악을 창작하여 온 음악창작의 역사라 하겠다.

<이혜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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