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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30 (화) 21:44
분 류 사전3
ㆍ조회: 493      
[종교] 천주교=가톨릭교회 (한메)
가톨릭교회 -敎會 Roman Catholic Church

로마교황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그리스도교회.

그리스도교회에서는 동방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와 구별하여 사용된다. 가톨릭이란 말은 <보편적> <공동적(公同的)> <일반적>이라는 의미로서, 스스로를 <유일하고, 성스럽고, 공변되며, 사도(使徒)로부터 전래(傳來)된 교회(니케아信經·콘스탄티노플信經>라고 믿고 있는 그리스도교회가 전 인류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기관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가톨릭교회(ekklesiakatholik겹)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10년경에 순교한 안티오키아의 주교 이그나티오스가 스미르나교회 앞으로 보낸 편지에서였다. 1984년 현재 가톨릭교회는 전세계 그리스도교도 약 10억 6000만 명 중 약 6억 2000만 명의 신도를 가진 최대의 교회이다.

[역사]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 즉 약속의 메시아, 구세주(救世主)라고 선교(宣敎)한 12사도와 바울의 활동으로 로마에 전파되었으며, 무서운 박해 뒤에 콘스탄티누스대제의 그리스도교 개종과 313년 밀라노칙령에 의해 로마제국에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 뒤 가톨릭교회는 동·서로마제국 안에서 각각 형태가 다른 발전을 이룩했다. 동방교회에서는 총대주교구(總大主敎區)가 된 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를 중심으로 서로 다른 전례(典禮;공적인 예배집행체계)를 가져, 어떤 의미에서 자율성과 독자성을 지닌 여러 교회가 생겨났다. 이와 같은 다양성을 지닌 동방교회의 발전과는 대조적으로, 서방교회에서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공통의 로마전례를 가진 교회조직이 구축되었다.

그러나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전례나 언어에 따른 표현의 차이는 있어도 5세기경까지는 똑같은 하나의 사도 전래의 가톨릭교회로서의 일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325년 니케아공의회(公義會) 및 381년 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 삼위일체(三位一體)의 교의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431년 에페수스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를 배척하고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그리스도교 단성론(單性論)을 배척함으로써 동방교회의 일부가 분리 탈락하기에 이르렀다.

그 사이에 교황 레오 1세는 로마의 주교가 전(全)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수위권(首位權)이 있다는 것을 <마태복음(16:18)> 등을 기초로 하여 분명히 하였다. 이것은 동방교회의 의식과는 다른 것으로, 동방교회에서는 로마의 주교를 동등한 주교들 중에서 제1위인 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화상파괴논쟁(聖畵像破壞論爭),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포시우스의 임면(任免)을 중심으로 한 논쟁, 삼위일체의 교의에서 성령(聖靈)은 성부(聖父)가 아니라 성자(聖子)를 통해서 온다는 단수발생론(單數發生論)의 동방교회를 무시하여, 서방교회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양쪽에서 나온다고 하는 복수발생론의 라틴어 <필리오케(Filioque)>라는 표현을 신경(信經)에 덧붙인 필리오케 논쟁 등이 겹쳐 1054년 동서의 교회는 분열되었다.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지 않는 동방교회는 스스로를 정교회(正敎會)라 부르게 되었다. 그뒤 동방교회의 전례를 유지한 채 로마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여 가톨릭이 된 교회도 있지만 동방교회의 대체적인 경향은 그대로였다.

한편 16세기의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가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원인이 되었던 것은 신학·전례·신앙생활·교회행정 등 여러 분야에 걸친 것이었으며, 특히 직집적인 계기는 1517년 M.루터가 제기한 면죄부논쟁(免罪符論爭)이었다.

당시의 정치적 상황과 함께 루터의 개혁운동은 독일과 스위스 지방을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 나가 그들 신봉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운동은 하나의 통일된 프로테스탄트교회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가지 못하고 많은 교회가 각각의 신앙에 따라 분립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여러 프로테스탄트교회와 가톨릭교회의 신앙내용의 차이를 명확하게 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나 구원(원죄를 포함하는 모든 죄로부터의 해방) 및 성서·성전(聖傳)·성사(聖事)·주교·교회 등에 관한 차이는 분명하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여러 근본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 가톨릭교회는 1545∼63년 트리엔트공의회를 개최하여 교의(敎義)와 조직 및 제도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소위 반종교개혁이라 불린 것이며 근대가톨릭주의의 출발점이 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의 통일이 무너지고 근대국가가 탄생하자 가톨릭교회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체결하였다. 1929년 이탈리아 정부와 라테란조약을 체결하였으며, 교황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탄생되었다.

제2차세계대전 때 교회는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종교나 인종 또는 국적에 관계없이 도와주었으며, 전후(戰後)에는 평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열어 교회의 현대화와 교회의 일치 등에 대해 토의했다.

[교의와 전례]

그리스도교의 근본개념인 죄로부터의 해방, 즉 구원에 대하여, 프로테스탄트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속죄를 믿고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고 하는 것에 비하여, 가톨릭에서는 성사의 하나인 세례에 의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원죄로 인간본성이 파괴되고 자유의지를 잃었으며, 정욕 그 자체가 죄라고 규정한 종교개혁자측의 생각과, 원죄에 의해 잃은 것은 하느님이 부여한 특별한 초자연적인 은총뿐이며 자유의지를 포함한 인간 본성은 잃지 않았다고 하는 가톨릭교회의 사고방식에서 유래한다.

또한 <신앙만>을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신앙의 원천으로 성서를 유일시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성서와 더불어 사도 이래의 성스러운 전통을 신앙의 원천으로 보았으며, 교회 교도직(敎導職)은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를 갖고 해석한다. 이러한 차이는 교회의 조직, 신앙생활의 존재방식 전체에 영향을 준다.

가톨릭교회는 교회 자체를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실현하는 도구와 장소로 이해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느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행하는 구원이 교회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고 구원을 받는 사람들은 교회의 유기적 공동체에 속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

따라서 구원의 은총을 부여하는 7가지 성사를 중시한다. 즉 세례·전진(堅振)·성체(聖體)·고백(告白)·혼인(婚姻)·신품(神品)·병자(病者)성사가 그것으로, 이 7성사는 말과 행위로 이루어지는 의식이지만, 그와 같은 의식으로 신도는 구원을 베푸는 하느님을 만나 그 성사가 의미하는 은총을 받게 된다. 이러한 성사는 인생의 고비에 필요한 은총의 효과적인 표시가 되며, 특히 성체성사는 가톨릭 신도의 신앙생활의 중심이 되어 있다.

성체성사가 행하여지는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2부분으로 되어 있다. 말씀의 전례는 성서 낭독, 강론 및 기도이고, 성찬의 전례는 예수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성변화된 빵과 포도주를 신도들이 받아먹고 마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이러한 미사는 주일(主日)인 일요일에는 신도 전원이 참가한다.

[조직]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 즉 <하느님의 백성(제2차바티칸공의회)>이며 동시에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인 사회적·위계적 조직이다. 교회는 12사도와 바울 및 그 후계자들이 선교한 지방에 신자들의 공동체가 만들어짐으로써 시작되었다. 세례를 받음으로써 이 공동체에 속하게 된 신도들은 보편적인 사도직을 갖게 된다.

그러나 교회에서 전례(典禮)의 집행 등의 봉사는 성직자(主敎·司祭·副祭)에 의해 행하여진다. 주교는 그리스도에 의해 뽑힌 12사도의 후계자이며 사제와 부제는 주교를 돕는 자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는 독신남자로 한정된다.

동방정교회에서는 부인이 있는 자도 사제로 서품되지만 사제가 된 뒤의 결혼은 인정하지 않는다. 또한 주교는 독신사제만 등용된다. 주교는 지방교회인 교구의 장(長)이며 전세계의 교구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敎皇) 밑에 속해 있다. 가톨릭교회의 교황은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이며 교회의 최고권위자이다. 이것은 제1차바티칸공의회에서 교황의 무류성(無謬性)의 교의가 결정(1870년 7월 18일)됨에 따라서 교의적으로 확실해졌으며, 1917년의 교회법전에 의해 법제화되었다.

교황은 또한 바티칸시국의 주권자이기도 하다. 제2차바티칸공의회(1962∼65)는 교황과 일체가 되어 교회를 관장하는 주교의 단체성과 그 권한을 분명히 하였다. 이러한 권한이 가장 뚜렷한 형태로 행사되는 것이 공의회이다. 이 공의회는 제2차바티칸공의회까지 21회 개최되었는데 동방정교회는 제2차니케아공의회(7회 공의회)까지만 인정하고 있다.

공의회는 드물게 개최되므로, 전(全)주교단에 의한 교회 사목(司牧)의 기능을 행사하는 기구로서 각 지방교회에는 주교협의회가, 전(全)교회의 수준에서는 수년마다 세계대표주교회의(시노드)가 개최된다.

이와는 별도로 교회의 통치에서 교황의 고문으로 교회행정을 담당하며 교황선거권을 가지는 추기경(樞機卿)이 있다. 교황이 공석이 되었을때 후계자를 선정하는 교황선거비밀회의는 추기경들에 의해 구성된다. 전교회에 대한 교회행정의 중추는 로마 교황청(Curia Romana)이고, 중심이 되어 조정 역할을 하는 것은 국무성성(國務聖省)이다.

그 밖에 신앙·교리성성을 비롯하여 주교, 동방교회, 성사·경신(敬神), 성직자, 수도자·재속수도회, 인류복음화, 시성(諡聖)·시복(諡福), 가톨릭교육의 9개 성성(聖省)이 있다. 또한 내사원(內赦院)·항소원(抗訴院)·대심원(大審院)의 3개 법원(法院)과, 그리스도 일치사무국, 비그리스도교도사무국, 무종교자사무국이 있다. 이 3개 사무국은 각각 제2차바티칸공의회 후에 설치되었는데, 이는 가톨릭교회가 문화적·종교적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극히 한정된 것, 즉 <개별적>인 것이 되어 버린 현상을 여러 가지 면에서 검토하여 참다운 의미에서 보편적인 가톨릭교회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의 표현이다.

교황청에는 이 밖에도 평신도평의회, 정의·평화위원회 등 많은 위원회가 있다. 주교 밑에 있는 교구의 조직과는 별도로 수도회, 재속(在俗)수도회가 있는 것도 가톨릭교회의 특색이다. 수도회는 청빈·순결·순종의 3개 복음적 권고에 따라 살겠다는 서원(誓願)을 하고 장상(長上)의 지도 아래 공동생활을 하면서 주어진 사명을 통해서 교회에 공헌한다.

수도회는 기도와 노동을 설립이념으로 하는 관상(觀想)수도회(가르멘會·트라피스트會 등)와 활동수도회(프란체스코會·도미니코會·살레지오會 등)로 나누어진다. 3가지 서원을 하지만 일반 사회생활을 하는 재속수도회가 최근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의 가톨릭]

16세기 중엽 가톨릭은 중국과 일본에 전파되어 큰 발전을 보이고 있었다. 1593년 12월 일본에 진출해 있던 예수회는 임진왜란 때 동원되었던 왜군을 교화하기 위해 에스파냐의 신부 G. 세스페데스를 조선에 파견하였는데, 그는 물론 조선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려 했을 것이지만 적대관계에 있던 당시 상황에서는 불가능하였다.

한편 증국에 진출한 예수회의 선교사들도 베이징[北京]에 내왕하는 조선 사신들과 볼모로 잡혀 왔던 소현제자(昭顯世子)를 통하여 간접적인 조선전도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선교사들이 한문으로 저술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만은 계속 조선에 도입되어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 등이 조선 사신들을 통해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이수광은 1614년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지어 가톨릭 및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학(實學)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뒤 실학은 주로 남인 학자들 사이에서 크게 발전하였는데, 특히 이익(李翼)과 그의 제자 안정복(安鼎福)은 천주교를 깊이 연구하였다.

이 두 학자 사이에서는 천주교를 천학(天學) 또는 서학(西學)이라고 불러 다만 학문적으로 연구될 뿐이었으나 안정복의 문인이던 권철신(權哲身)·정약전(丁若銓)·이벽(李蘗) 등에 이르러서는 교리를 연구하는 종교운동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들은 주어사(走魚寺)·천진암(天眞庵)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서학을 연구하는 가운데 신앙이 싹트기 시작하여, 기도와 재계 등으로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정약전의 매부 이승훈(李承薰)은 그의 부친을 따라 베이징에 건너가 1784년(정조 18) 봄 북천주당(北天主堂)의 신부 J.J.그라몽[梁棟材]에게 세례를 받고 돌아와 한국 최초의 세례신자가 되었다. 그는 귀국 후 곧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친지와 친척들에게 전도하여 그 해 9월부터는 입교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성세성사(聖洗聖事)를 베풀기 시작하였다.

또한 중인(中人) 역관(譯官) 김범우(金範禹)의 집에 모여 주일행사를 지냄으로써 평신도만으로 구성된 교회가 창설되었다. 이 때부터 이승훈 등은 오직 하느님만을 믿음으로써 재래의 온갖 미신행위를 물리치고, 서로 교우라고 부름으로써 당시의 엄격한 봉건적 계급제도를 타파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밖으로부터 성직자가 들어와 전교(傳敎)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교회를 창설한 것은 세계 교회사상 한국 교회만이 갖고 있는 특징이다.

그러나 한국의 천주교는 수용 직후부터 조정(朝廷)의 탄압 대상이 되어 교회 창설 이듬해인 1785년부터 한국―프랑스수호통상조약이 비준된 1887년까지 100여 년 간에 걸쳐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1785년에는 84년에 창설한 조선교회가 발각되어 김범우가 유배당하였고, 91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고발로 이른바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였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에도 굽히지 않고 베이징교회뿐만 아니라 로마교황에게까지 거듭 편지를 보내어 성직자의 파견을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교회창설 11주년이 되던 95년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처음으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그의 밀입국을 신고한 자가 있어 피신해야만 하였고 관헌의 수색 때문에 사목활동은 극히 제한되었다.

1801년 순조 즉위 뒤부터는 조직적이고 전반적인 박해가 시작되어, 득세한 노론벽파(老論僻派)가 종교를 빙자하여 남인에게 정치적 보복을 가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신유박해(辛酉迫害)이다. 이로 인해 주문모와 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거의 순교하고 성서도 대부분 압수되었다.

그러나 이렇듯 비참한 상황에서도 신도들의 노력으로 교회는 10년 만에 재기하였고 다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이에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가 1831년 9월 베이징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는 동시에 초대교구장에 B.브뤼기에르를 임명하였으나 그는 조선 입국을 눈앞에 두고 중국에서 병사하였다.

그 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은 토착인(土着人) 성직자 양성을 위해 최양업(崔良業)·최(崔)프란체스코·김대건(金大建) 등을 마카오로 유학하게 하였다. 1837년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주교 L.M.J.앵베르가 입국함으로써 조선교구는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천주교는 다시금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1839년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조씨와 안동김씨의 세력다툼으로 인해 다시 박해가 시작되었는데 이것이 기해박해(己亥迫害)이다. 이로 인해 당시 입국해 있던 3명의 선교사와 유진길(劉進吉)·정하상(丁夏祥) 등이 모두 순교하였다. 특히 정하상은 체포될 것을 예측하고 미리 우의정 이지연(李止淵)에게 제출할 《상재상서(上宰相書)》를 작성하여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함을 비판하였다.

1845년 마카오로 유학했던 김대건이 신부가 되어 귀국하여 교우의 수가 갑자기 늘기 시작하였으나 1846년 그의 체포를 발단으로 병오박해(丙午迫害)가 일어나 김대건과 교우 9명이 순교하였다. 철종 때에 이르러 천주교는 조정의 탄압이 완화되어 교세를 크게 떨쳤으며 베르뇌신부를 비롯한 10여명의 신부가 입국하였고 최양업도 신부가 되어 귀국하였다.

그리나 고종이 즉위하여 대원군이 집정하면서 l866년(고종 3) 병인박해(丙寅迫害)가 시작되었고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전교중이던 선교사 12명 중 9명과 교회의 지도급 신도들이 모두 처형되었다.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 중 리델신부는 탈출에 성공, 톈진[天津]에 있는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제독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여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초래하였다.

병인양요와 1868년 E.J. 오페르트에 의한 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등을 계기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 때의 박해는 그 규모나 기간 등에 있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대박해로 이 기간 동안 8000∼2만여 명의 신도가 처형당하였다.

1886년 한국―프랑스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천주교는 불완전하나마 포교의 자유를 얻게 되어 종현성당(鐘峴聖堂;현재의 명동성당)·약현(藥峴)성당 등의 건축, 용산신학교의 개설 등이 이루어졌다.

개화기에는 《경향신문》의 창간을 비롯하여 언론과 교육을 통해 개화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창씨개명·신사참배 등의 강요, 미국인 선교사 추방, 외국인 선교사 구금 등의 종교탄압이 자행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발전을 계속하여 여러 교구가 창설되었고 서울교구장직이 노기남(盧基南) 신부에게 넘겨짐으로써 처음으로 한국인 교구장이 탄생하였다.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 천주교는 개신교와 함께 우대를 받으며 교세를 더욱 확장하였고, 6·25동란으로 인한 성당·학교 등의 파괴, 성직자·수도자 납치 등의 시련 속에서도 발전을 계속하였다. 1962년 한국천주교회에 교계제도가 설정되어 자립교회로 승격함으로써 많은 교구가 증설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제2차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어 한국교회의 발전과 쇄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68년에는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 중 24위를 복자위(福者位)에 올리는 시복식(諡福式)이 로마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거행되었고, 69년 서울대교구의 김수환(金壽煥)교구장이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981년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을 맞이하였고, 1984년에는 한국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내한하여 순교자 103인에 대한 시성식(諡聖式)을 집전하였다.

1989년에는 10월 4∼8일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를 주제로 제44차 세계성체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1989년 현재 한국천주교회는 247만여 명의 신자가 있으며 교구수는 서울·대구·광주 3개의 대교구를 포함하여 14개 교구이다. 본당은 765개, 공소(公所)는 1578개이고, 성직자는 대주교 3명(한국인), 주교 14명(외국인 3명 포함), 한국인 신부 1298명, 외국인 219명, 수도자는 수사(修士)가 한국인 288명, 외국인 32명이고, 수녀는 한국인 4869명, 외국인 198명이다.

또한 천주교유지재단에서 경영하는 교육기관으로 국민학교 6개교, 중학교 26개교, 고등학교 35개교, 대학교 9개교가 있으며, 그 밖에 농아학교, 정신장애자학교 등 특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의료사업으로 30개소의 병원을 경영하며, 사회사업으로 양로원·나환자정착마을·결핵요양원·부랑인의 집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동삼>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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