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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8 (화) 19:39
분 류 사전3
ㆍ조회: 436      
[선사] 과학-한국과학의 여명 (민족)
과학(科學)

세부항목

과학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과학(통일신라)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과학(광복 이후)
과학(참고문헌)

보편적인 진리나 법칙의 발견을 목적으로 한 체계적인 지식. 넓은 뜻으로는 학(學) 또는 학문을 이르고, 좁은 뜻으로는 자연과학을 이른다.

한국과학의 여명

1.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로

우리 나라의 과학문명의 시작은 1960년대 이후, 구석기시대의 존재가 완전히 밝혀짐으로써 30만∼50만년 전까지로 올라간다.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우리 나라 과학사의 연구가 아직 그 시기에까지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논의하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여기서는 편의상 신석기시대부터 논하기로 한다.

신석기시대의 과학문명은 농경문화의 시작과 토기 제조기술로 크게 특징지을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의 조상이라고 본다면, 그들이 창조한 과학기술은 우리 과학사 여명기의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활발한 연구가 있어야겠으나 그것도 아직 초보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시대의 토기를 대표하는 것은, 즐문토기(櫛文土器)라고 부르는 ‘빗살무늬(또는 幾何文)의 토기’이다. 그것은 적갈색 진흙에 모래를 섞어 빚어서 위가 트이고 웅덩이 같은 원시적인 가마에서, 소규모로 구운 것으로 생각된다.

토기에 나타난 검은 반점이나 붉은 색의 얼룩은 그 당시의 가마가 외기를 막는 시설이 없는, 그저 토기를 쌓아올려 구운 원초적 단계의 것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기벽은 비교적 얇은 것도 이따금 찾아볼 수 있다. 고운 진흙을 잘 이겨 기형(器形)을 만들어서 조심스럽게 굽는 기술이 차차 발전한 것 같다. 소성온도(燒成溫度)는 낮고, 열이 가마 안에 고르게 퍼지지 못한 상태였을 것이다. 토기의 종류와 크기는 비교적 여러 가지이다.

그런데 요동반도(遼東半島)와 서해안 일대에서는 태토(胎土)가 진흙과 모래만이 아닌, 즉 석면(石綿)과 활석(滑石) 또는 흑연과 운모가 섞인 것도 발견되고 있어, 그 일대의 주민은 어느 시기에, 그러한 것을 섞어 토기를 쉽게 만들어서 굽는 도중에 금이 가거나 터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 기술에 도달하였다고 생각된다.

빗살무늬토기가 출현한 연대는 대체로 기원전 5000년대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토기는 한반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동북지방과 시베리아지방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분포하여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과학문화가 여명기에는 그러한 지역과 같은 문화권에 속하여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시대 후기에 이르러 차차 민무늬토기로 바뀌어 갔다. 이 민무늬토기와 그것을 쓰던 사람들의 문화도 시베리아의 그것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 토기의 출현 연대는 아직 학자에 따라서 많은 견해차가 있다. 그 폭은 기원전 15세기경에서 기원전 7세기경까지 매우 넓다.

중국에서는 이 시기, 또는 그 이전에 흑도(黑陶)에서 백도(白陶)로의 발전이 있었다. 그것은 태토가 매우 정선된 순질의 도토(陶土), 또는 철분이 적은 고운 침전성의 진흙을, 산화염으로 1,000℃ 이상의 고온에서 구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가마는 이미 화문(火門)·화실(火室)·소성실(燒成室)의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단순히 도기를 쌓아올려 굽는 원초적 단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고 한다.

또, 토기의 소성온도는 회도(灰陶)·채도(彩陶)·흑도(黑陶) 등이 모두 거의 950∼1,050℃이고, 백도도 1,050∼1,150℃라는 매우 낮은 온도였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에서 발표되어 있다. 이 기술은 이보다 훨씬 뒤에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농경은 이 시기에 시작되었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에 비하여 매우 여러 가지 연장을 만들어서 생산의 분야를 넓혀 갔다. 마제석기(磨製石器)는 이 시대 연장의 형식을 대표한다. 그것은 처음의 석촉(石鏃)·석도(石刀)·골창(骨槍) 등의 수렵 및 어로용 연장에서 석리(石犁)·석서(石鋤)·석겸(石鎌) 등의 농경기구로 다양화하고, 발전하면서 제분용 맷돌까지 나왔다.

그리하여 수렵과 어로에 비하여 농업이 차차 그 중요성을 더하게 되었다. 구석기시대에 비하면 수렵과 어로의 방법도 발전하여 수렵에는 활과 화살이, 그리고 어로에는 그물이 쓰이게 되었다.

또, 가축의 사육도 신석기시대 말기에 시작된 듯하며, 이때는 물레〔紡錘車〕가 나왔다. 토제 또는 석제의 물레는 삼실〔麻絲〕을 뽑아서 옷을 만들고 그물을 만드는 데 쓰였다. 삼베〔麻布〕를 쓴 의생활로 바뀌어갔다.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주생활은 혈착주거(穴着住居)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의 주거지(住居址)는 물가와 가까운 언덕에 땅을 1m 정도 파서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얹은 형식의 것이었다. 그러니까 지붕의 추녀 끝이 땅에 닿은 이른바 수혈식주거(曼穴式住居)였다.

집의 넓이는 초기 원형의 경우 지름 6m 정도였고, 후기 사각형의 것은 한 변의 길이가 5, 6m 정도인 것이 지금까지의 주거지 발굴에 의해서 알려지고 있다. 집의 한가운데는 불을 피우는 화로가 꼭 있었다. 그것은 음식물을 만드는 데 필요하였으며, 난방용으로 가족생활의 중심지였다.

2. 토기와 청동기

청동기문화는 기원전 1000년 경 한반도의 동북단과 서북지역에 생겼다. 청동기시대 사람들은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분포하고 있었다. 그들은 예외 없이 민무늬토기를 썼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청동기시대 사람들을 민무늬토기시대 사람들이라고도 부른다.

그들이 만든 토기는 표면을 잘 갈아서 반들반들하게 한 갈색계통의 것으로, 토기를 굽기 전에 그 표면에 산화철이 많이 포함된 흙을 바르고 표면을 매끈하게 처리한 것이다. 이러한 토기는 태토도 고운 진흙을 썼다.

그것들은 빗살무늬토기보다 종류가 훨씬 많아서 크고 작은 항아리와 여러 가지 단지·대접·사발·잔·접시 등, 그리고 시루와 고배형(高杯形)의 토기에까지 이르는 것으로, 그 모양도 훨씬 세련되고 기벽은 아주 얇아졌다. 민무늬토기는 더욱 세련된 이른바 홍도(紅陶)로, 그리고 화북지방(華北地方)의 채도와 같은 것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민무늬토기는 처음에 북쪽에서 출현하여 차차 남쪽으로 퍼져나가 한반도 전역에서 쓰였다. 그리고 이것은 요하유역(遼河流域)·송화강유역(松花江流域)·시베리아지방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되어 있어, 우리 나라 청동기술이 북쪽 시베리아방면과 북유라시아에서부터, 그리고 북쪽 스키타이문화의 영향에 의하여 형성되었다는 설을 낳게 하였다.

특히 최근에 발견, 보고된 비파형청동검이 한반도 안에서 만들어진, 한반도 고유의 형식을 가진 것으로, 그 연대는 기원전 8,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나라 청동기문화 또는 청동기술의 기원과 연대 추정에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우리 나라의 초기 청동기는 중국 은나라 때의 청동기처럼 대형의 제기(祭器)와 병기(兵器)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 합금성분이 중국 청동기와 다르다는 점에서 중국계와는 뚜렷한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특징적 형태와 주형(鑄型)의 발견, 합금성분의 특징들은 우리 나라에서의 독자적 형성의 가능성도 보여 주고 있다. 예컨대, 형식상으로는 위에서 말한 비파형청동검과 세형청동검(細形靑銅劍), 그리고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 등이 그 보기이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에는 중국 것과 같이 제기가 거의 없는데, 대체로 의식용 또는 장식용 필수품들이다. 청동기시대에도 많은 석기가 계속 만들어졌다는 것은 청동제 칼이나 거울, 그리고 장식품들을 만드는 데 고도의 기술과 숙련이 얼마나 필요하였던가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나라 청동기는 다양한 종류와 그 제조 솜씨에서 수준급에 이르고 있었다. 청동기들과 다뉴세문경 또는 기하문경, 그리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동제 의기(靑銅製儀器:검파형동기)와 마형(馬形)·호형(虎形)의 대구(帶鉤)는 비록 그 규모가 작고 연대는 뒤진다고 하겠으나, 그 제작 솜씨와 세련된 기술은 결코 중국의 청동제기에 떨어지지 않는다.

청동제 비파형검과 세형검, 그리고 다뉴세문경 등은 그것을 만든 석제 거푸집들이 적지 않게 출토되어, 그것들이 사암(砂岩)과 활석제 주형을 써서 만들었음을 확인하게 하였다.

또, 후기 청동기시대에서 초기 철기시대에는 청동기의 주조에 납형에 의한 기술이 나타났다. 위에서 말한 칼자루형 동기와 마형·호형 대구는 납형 주조법을 써, 비로소 섬세한 조각적 미술작품이 가능하다.

그러한 주조기술은 아마도 기원전 4, 3세기 무렵에 시작하였을 것이다. 이 기술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중국기술보다는 북방문화의 전통을 이은 기술에 의해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우리의 청동기기술이 중국의 그것과 연결되지 않는다는 주목할만한 사실의 하나로, 청동기의 합금성분이 중국 것과 뚜렷이 구별된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청동은 구리와 주석의 비율에 따라서 그 합금의 빛깔이 달라진다. 주석을 30% 가량 섞으면 빛깔은 매우 희어져 이른바 백동질이 되고 그 경도 또한 가장 크지만, 더 많이 섞으면 빛깔은 오히려 회색을 띠고 물러지며, 더 적게 섞어 20% 이하로 줄이면 구리의 붉은 빛깔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고대 사람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사실을 알아냈고, 용도에 따라서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적절히 조절하는 계획적인 합금기술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얼마 뒤 구리와 주석의 합금에 다른 금속을 더 섞어 주면 합금의 성질이 또 달라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중국의 청동기는 구리·주석·납 등을 따로 정련하여 그것들을 녹여서 거푸집에 부어넣는 방법으로 만들어졌다. 은나라 때의 청동기에도 구리·주석·납 외의 다른 불순물이 아주 조금밖에 섞여 있지 않은 것을 보면, 그 당시 이들 세 금속의 정련기술은 매우 훌륭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중국 청동기의 주성분은 구리·주석·납 등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청동기는 중국의 것과 그 합금유형이 조금 다르다. 즉, 함경북도 초도(草島)에서 발굴된 ‘달아매는 치례거리’에는 구리 53.93%, 주석 22.30%, 납 5.11% 외에 아연이 13.70%나 들어 있고, 또한 황해도 봉산군에서 발굴된 세문경과 ‘주머니도끼’에도 각각 아연이 7.36%와 24.50%나 들어 있다.

청동기는 적당한 양의 아연을 섞어 주면 빛깔이 부드러운 금빛을 띠게 되고, 주조물의 성질도 좋아져서 장식품이나 의식용구를 만들기에 알맞은 합금이 된다. 그런데 아연은 420℃의 저온에서 녹고 900℃에서 끓어 증기로 달아나기 때문에, 1,000℃ 이상으로 가열해야 하는 청동의 주조과정에서 아연을 넣어 합금을 만드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17세기 초 중국의 유명한 기술서 ≪천공개물 天工開物≫에 보면, 아연은 고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고 근래에 와서 알려진 것이라고 하였다. 실제로 중국 청동기의 분석 결과를 보면, 지금까지 200여 종의 분석된 시료(試料) 중에서 한말까지의 청동기에는 아연이 포함된 것이 거의 없다.

그런데 낙랑군 유적에서 발굴된 청동경(靑銅鏡)에는 소량이지만 아연이 0.24%나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낙랑군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기들 가운데는 한반도 안에서 만든 청동기 원료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추론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한 예라고 생각된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술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의 야요이시대(彌生時代) 청동기의 원료 상당 부분이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것이라는 사실이 납의 동위체원소 분석결과로 증명되고 있다.

3. 본격적 농경문화와 철기의 출현

청동기시대에 이르러 농업은 한층 더 발전하였다. 수확용 농구인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와 경작용 농구인 부입(扶入)돌도끼 또는 유은(有殷)돌도끼와 대형석부(大形石斧)가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었다.

그것은 그러한 농기구의 보급을 말해 주는 것이며, 그것은 농작물 생산이 그만큼 늘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 주거지에서 발견된 기장과 수수, 곡물을 저장하였던 항아리 등은 농업이 주된 생업으로 발달하였음을 뜻한다.

이러한 석기의 존재는 농경기술이 곡물과 함께 화북·화남지방에서 전해져 오고 있다는 것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즉, 청동기시대에 화남이나 화북지방에서 본격적인 농경문화가 들어와 이때 처음으로 쌀이 우리 나라에 소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화남지방에는 이미 벼농사가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벼농사는 기원전 6∼4세기 무렵에 화중(華中)이나 화남지방에서 남한지역으로 전해 왔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전해진 벼농사기술은 파종과 수확만의 원시적인 것으로, 화북지방의 선진적 농경기술이 벼농사에 응용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아무튼, 새로운 농기구의 출현과 쌀의 전래는 한반도 농업의 성격을 벼농사 중심의 농경으로 바뀌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데서 의의가 크다.

농경과 함께 가축의 사육도 활발해졌다. 돼지의 사육이 더욱 늘어났고, 소와 말이 식용뿐 아니라 사역에도 쓰이게 되었다. 이러한 농업생산의 발전은 주거의 양식에도 변화를 일으켰다. 청동기시대 사람의 주거는 신석기시대 사람의 수혈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지만, 움〔竪穴〕이 훨씬 얕아져서 지상생활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원형은 없어지고 주로 방형으로 바뀌었다.

기원전 5, 4세기 무렵 청동기문화가 번영하고 있을 때 철기가 출현하였다. 그것은 중국에서 시작하여 요동반도를 거쳐서 우리 나라 서북부에 이르는 지역에 나타나서, 차차 중부와 남부로 퍼져 나갔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그래서 우리 나라의 초기 철기시대의 제철기술은 화북계였을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한편으로는 다른 계통 또는 자생적 기술로 보는 견해도 있다.

철은 초기에 쇠도끼·쇠창 등의 일부 무기류와 반월형철도·쇠가재·쇠쟁기 등의 농기구를 만드는 데도 쓰였다. 그러나 그 양은 극히 적어 여전히 많은 청동기에 끼워 사용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미친 사회적·경제적 영향은 결코 크지 못했다. 이 시기에 또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수레가 출현하였다.

철기는 상당히 오랫동안 청동기와 함께 쓰였으나, 차차 그 비중이 높아져 마침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전환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바뀌는 시기는 지역에 따라 달라서 북쪽지역이 일찍 들어서고, 남쪽지역은 서기를 전후해서 철기시대에 이른 것으로 생각된다.

철기는 처음부터 주조가 행하여졌다. 토광묘(土壙墓)에서 출토된 쇠도끼 주형의 존재가 그것을 밑받침한다. 그리고 무쇠〔銑鐵〕와 함께 단철(鍛鐵)도 생산되었다. 단철로 만든 칼은 상당히 단단한 것이어서 청동검을 제압하기에 충분하였고, 농기구도 그러하였다. 그래서 단철기는 무쇠기구보다 더 많이 만들어졌다.

처음에 철은 자연통풍을 이용하여 제련하였는데, 뒤에는 풀무와 같은 송풍장치가 만들어지면서 기원전 2세기 내에 강철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시기의 쇠도끼 중 4% 가량의 탄소가 함유된 무쇠도끼 외에 0.6∼1.5% 가량의 탄소가 함유된 강철질의 도끼들이 있다. 아마 이러한 도끼들은 단철을 여러 번 단련하여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의 야요이시대 전기에 한반도에서 전해졌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제철기술은 사철(砂鐵)을 원료로 한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화남지역에서 행하여지고 있던, 적철광·갈철광·사철 등을 중심광석으로 한 제철법과 같은 계열이다. 이런 광석들은 자철광보다 낮은 온도에서 환원, 제련하기 쉽고, 원시적 상형(床型)이거나 수로(曼爐)에 의해서도 충분히 환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수로나 상(床)의 재료가 그대로 매용제로 이용된 것이다. 그렇다면 농경문화의 루트와 같이, 화남지방에서의 이러한 제철기술은 남쪽지역에서 발전하여 그것이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추론이 가능하게 된다. 이런 방법에 의하여 생산되는 철은 무쇠가 아니고 처음부터 단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철판을 만들었다가 여러 가지 필요에 따라 칼이나 농기구를 만들 수 있고, 그러한 칼이나 농기구들은 거푸집에 부어 만든 것보다 단단해서 실용성이 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추론은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로서는 아직 입증할 수 없고, 앞으로의 연구와 발굴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전상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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