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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8 (화) 19:52
분 류 사전3
ㆍ조회: 428      
[고대] 한국 과학 전통의 형성 (민족)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세부항목

과학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과학(통일신라)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과학(광복 이후)
과학(참고문헌)

1. 김해문화

기원전 108년 우리 나라 서북지역에 설치된 낙랑군에는 한나라 때의 금속문화가 중국 본토에서 직접 이식되었다. 그로 인한 본격적이고 집중적인 철기문화의 유입은 중국의 우수한 금속공예기술을 한반도 전역으로 퍼지게 하였다.

이 무렵 멀리 낙동강 하류에서는 새로운 토착문화가 다른 지역보다 빨리 일어나고 있었는데, 김해문화라고 불리는 이 문화는 철의 생산을 기반으로 하고 일어난 것이지만 청동의 주조기술과 토기의 제조기술은 특히 우수하여 우리 나라 토착기술 발전의 새로운 기틀을 이룩하였다.

김해 사람들은 청동의 주조기술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의 청동합금 기술은 그 시기 청동기 조각의 합금조직이 아주 드물게 훌륭한 균정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도 그 우수성을 짐작하게 한다.

그 기술은 청동기시대 사람의 합금기술을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새로 들어온 중국사람의 기술을 더하여 상승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철의 제련기술도 당시의 어느 지역보다 우수하였고 생산량도 풍부하여, 낙랑과 일본에서도 김해 사람들로부터 철을 사갔다.

김해문화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는 그 토기 제조기술에서 나타난다. 김해식 토기는 남쪽 재래의 민무늬토기에 새로 철기와 함께 들어온 중국식 회도(中國式灰陶)의 기술이 더해진 것이다. 이 토기에서는 그때까지의 태토는 더욱 정선되고, 처음으로 물레가 쓰이게 된다. 또, 노천요(露天窯)에서 화력을 올릴 수 있는 등요(登窯)가 쓰였다.

이러한 기술적 발전은 중국기술이 도입되어 그것이 우리의 기술로 형성, 발전하는 주요 단계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실제로 우리 나라에 있어서 외형상의 변형은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는데, 그것은 기술적 변형으로의 첫 단계로 이해되는 것이다. 또한, 과학기술 발전에서 창조적 변형이라는 중요한 특징은 김해문화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김해식 토기는 그 후기, 즉 200년 무렵에 이르러 전형적인 회청색의 신라토기로 발전해갔다. 김해패총(金海貝塚)에서는 물레〔紡錘車〕와 유리구슬이 채집되었다. 이 유리구슬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랜 것이다. 그것은 현지에서 제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김해패총에서는 또한 많은 철도자(鐵刀子)가 나왔다. 그것은 이때 이미 철기가 일상용 연장으로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또, 현재까지 알려진 유물로서의 우리 나라 최고(最古)의 쌀은 이 시기의 것이다.

2. 한국적 과학의 형성

삼국시대의 과학기술은 광복 후의 발굴 및 연구에 의하여 그 윤곽이 훨씬 뚜렷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그 시기의 과학기술을 불완전하게나마 체계화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만으로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시기에 우리 나라 과학기술은 한국적 과학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과학의 수용과 모방에서 새로운 개량과 창조적 변형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에 만들어 낸 한국적 과학기술을 일본에 퍼뜨리는 위치에까지 도달하였다. 그렇다고 중국에서의 과학기술의 수용이 끝난 것은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더 진취적인 태도로 새로운 과학기술의 도입에 힘썼다.

낙랑을 통한 중국 기술의 영향은 고구려의 고분과 신라·백제의 순금 공예기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인과 신라·백제인은 각각 독특한 형식을 가진 분묘를 만들어 냈고, 신라의 공장(工匠)은 고유의 형식을 가진 공예품을 만들어 냈다.

예를 들면, 경주의 고분과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허리에 차는 과대(敬帶)에 매단 금·은의 수식(垂飾), 즉 요패(腰佩)의 형식은 우리 나라에서 발달한 독특한 것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부장품은 그 양은 말할 것도 없고, 질적 수준에 있어서도 신라문화를 능가하는 우수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구려인의 기술은 그들이 만든 벽화고분으로 말미암아 일찍부터 토목·건축 및 미술사적 관점에서 주목을 끌어왔다. 그 중에서 석성(石城)의 축조기술은 고구려의 한 형식을 이루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성곽은 한마디로 조선 초까지는 거의 그대로, 그리고 조선 후기까지 우리 나라 성곽의 주류로서 계승되었다.

평양에 있는 장안성(長安城)과 대성산성(大城山城), 그리고 집안(輯安) 국내성의 유적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꼽을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국내성의 성곽은 현재까지 비교적 완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어서, 우리 나라 성곽 축조양식의 기원을 규명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다.

국내성은 성벽 높이 약 6m이고, 일정한 간격을 두고 치(雉)가 쌓여 있으며, 성벽 위에는 성가퀴〔女墻〕가 마련된 형식을 갖춘 석성이다. 석재는 자연석을 거의 그대로 썼으나, 견고하고 안정성 있게 쌓여 있다. 그리고 아래는 큰 석재를 놓고 위로 올라갈수록 차차 작아지며, 성벽 표면은 아래쪽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고 위로 올라가면서 차차 곡선을 줄이는 축조법을 썼다.

이것은 지금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 때의 성곽 축조법과 똑같다. 이 형식은 중국의 석성 축조양식과 아주 다르다. 중국의 성곽은 기원전 3세기에 벌써, 거의 같은 크기로 잘 다듬은 석재를 거의 수직으로 쌓아올리는 완전한 모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에 비하면 고구려의 성곽은 오히려 원시적인 모습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견고함과 성곽으로서의 기능이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비용과 시간을 훨씬 줄여서 공사할 수 있다는 큰 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성곽은 그 자연미에 있어서 중국의 인공미에 뒤지지 않는다.

고구려인은 실생활에 과학의 원리를 잘 이용하였다. 357년에 만든 안악(安岳) 제3호분 또는 동수묘(冬壽墓)라고 불리는 고분 동쪽 측실에 그 당시의 생활주변의 일면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특히, 디딜방아는 조선시대의 것과 똑같고, 우물물을 푸는 두레박은 지레의 원리를 이용하여 한쪽 끝에 추를 매달아 힘을 덜어 주도록 장치하였다. 이 시설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기구들이 4세기 중엽 이전에 쓰이고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며, 이런 장치의 그림으로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또, 무용총(舞踊塚)의 우거벽화(牛車壁怜)는 우리에게 가장 완전한 옛 수레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고구려인은 4세기 무렵 도성의 지도를 그릴 줄 알았다. 평안남도 순천군에 있는 고분에는 요동성의 지도가 그려져 있어 요동성총이라고 부른다. 그 지도는 요동성 내외의 지형, 성시(城市)의 시설·구조·도로·성벽 및 주요 건물 등을 충실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곽과 그 시설, 그리고 건물은 기와집·누각·민가 등이 모두 유행을 따라 그려져 있고, 하천과 개울, 산과 도로 등이 회화적 수법으로 묘사되었다. 그 솜씨는 조선시대 여러 도읍들의 회화적 지도를 연상하게 한다.

백제의 금속공예 기술은 일본 덴리시(天理市) 이시카미신궁(石上神宮)에 있는 칠지도(七支刀)가 대표적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369년에 만든 것으로 믿어지고 있는 여섯 개의 가지가 달린 길이 약 75㎝의 이 철검은 검신(劍身)의 양면에 금상감(金象嵌)으로 61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고대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4세기의 금속공예 기술로 이만큼 복잡하고 큰 칼을 쇠로 만든다는 일도 기술적으로 높이 평가할 일이지만, 무엇보다 금속공예에 상감기술이 이때 이미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칠지도는 현존하는 금상감 공예물로는 가장 오랜 것이다. 그것은 낙랑장인(樂浪匠人)의 기술을 능가하는 것이다. 무령왕릉의 출토품들은 이 사실들을 다시 한번 입증하였다.

백제인들은 소규모로나마 수도시설을 하고 있었다. 익산군 오금산(五金山) 계곡에서 출토된 10여 개의 토관들과 그밖의 지역에서의 같은 종류의 토관들은 상수도용으로 쓰인 것이었다. 이 토관들은 한쪽이 약간 홀쪽하여 다른 토관에 끼워서 이어 나가면 우물에서 석조(石槽)까지 지하에 묻어 물을 끌 수 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의 유적에서 상수도용 토관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은 관의 입지름〔口經〕이 똑같아서 끝부분을 서로 잇는 이음새의 처리가 불완전할 위험성이 큰 것이었다. 백제인들은 한쪽 구경을 크게 해서 끼워 나가게 함으로써 그 문제를 쉽게 해결하였다.

백제인들은 5세기 무렵 농업기술에서 핵심적 개량을 완성하였다. 5세기에 있어서의 농업혁명이라고 불리는 이 발전은 새로운 벼농사 기술이 백제인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즉, 화중·화남 지역의 후진적 벼농사가 화북지역의 선진적 조〔栗〕농업을 보고 일대변화를 일으켰다. 그 기술이 한반도로 들어와서 남쪽지역, 특히 백제 땅에서 벼농사에 적용, 풍토에 알맞게 개량된 철제농구와 가축에 의한 경작으로 발전하였다.

이것은 또 관개·수리의 토목기술 개발로 더욱 효율적으로 전개하여 단위 면적당 수확량이 3배나 되는 혁신을 가져왔다. 이 새 기술은 곧 일본에 도입되어, 그것을 진취적으로 받아들인 가와치왕조(河內王朝)가 기술도입에서 보수적이었던 미와왕조(三輪王朝)를 제패하게 한 권력교체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한다.

신라기술에서 구옥(句玉, 또는 曲玉)과 유리공예는 종래 그 제조가 일본에서 시작된 것이라는 설이 일본학계의 통설이었다. 그러나 최근에 이르러 신라고분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석기시대 유적에서 구옥의 조형(祖型)이라고 볼 수 있는 유공패옥(有孔佩玉) 등이 출토됨으로써, 그러한 생각은 시정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것은 유리제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하겠다. 유리는 종래 중국을 통하여 서방에서 건너온 것으로 생각되어 왔다. 그러나 최근 많은 유리제품, 특히 다량의 유리구슬의 출토는 그것이 현지에서 제조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때 많은 납〔鉛〕유리를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특징은 바륨이 뚜렷하게 많이 함유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여러 고분에서 출토되는 유리구슬은 성분 분석결과 거의가 소다(Na)유리라는 것이 밝혀져, 그것들은 모두 이집트에서 시작된 소다유리의 계통으로 수입품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에서 출토되는 유리를 분석해 보면 그 기원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신라에서 그들 나름의 기술을 가지고 발전시킨 것에는 또 하나 신라토기가 있다. 굽 높은 잔과 같은 특색 있는 기형(器形)이 4세기 이전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토기 제조기술에서의 창조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신라토기는 정선한 태토를 써서 1,000℃가 넘는 고열로 등요에서 환원염으로 구워 냈다고 생각된다.

그것들은 물레를 써서 대량생산의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그 기술은 요성(窯成)·요색(窯色)·경도에 있어서 가장 앞선 것이었다. 토기와 관련하여 요업기술 중에서 와당(瓦當)을 뺄 수가 없다. 막새기와는 그 무늬를 목형(木型)으로 찍어, 같은 것을 다량으로 만들어낸다는 기법의 아이디어가 목판인쇄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기술이 다른 기술로 전이되는 한 보기가 된다. 목판인쇄가 통일신라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때, 그 기술의 상호연관을 결코 등한시할 수는 없다.

삼국시대는 전체적으로 금속공예가 선사시대부터 한국화하기 시작한 전통적 기법에, 중국의 기술을 도입하여 새로운 발전이 계속되었다. 금·은 세공과 도금기술의 발전 및 양식상에서 중국의 그것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면서, 그들 나름의 기술을 개발하였다는 것은 새로운 한국적 전통의 정착을 뜻한다.

<전상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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