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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2-04 (수) 20:35
분 류 사전3
ㆍ조회: 1035      
[삼국] 화랑도 (한메)
화랑도 花郞徒

신라시대 화랑을 중심으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 국선(國仙)·선랑(仙郞)·풍월주(風月主)·화판(花判)이라고도 한다.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집단으로서 교육적·군사적·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기원]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등에 의하면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이미 마을 청소년들이 그들 고유의 집회소를 가지고 있었으며 견디기 힘든 시련행사를 즐겁게 받았다고 한다.

신라는 4세기 중엽 급속히 국가체제를 정비해갔고, 6세기에 들어오면서 우경(牛耕)의 보급에 따라 경작능력에 차이가 생겨 촌락공동체간의 균형이 파괴되고 또 군현제(郡縣制)의 실시로, 종전의 촌락 중심의 청소년조직도 쇠퇴하게 되었다.

이런 상태에서 중앙정부는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여러 청소년들을 떼지어 놀게 하여 그 행실을 보아서 등용하려던 제도가 화랑도의 전신인 원화제도(源花制度)였다. 처음 원화 두령으로 뽑힌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은 무리를 300여 명이나 모았으나, 얼마 뒤 서로 시기하는 일이 생겨 이 단체는 화목을 잃어 해산되었다.

화랑도가 국가에 의하여 정식으로 제정된 것은 진흥왕 때부터이다. 당시 신라가 화랑도 제정을 서두른 것은 군대를 보충할 수단으로서 필요하였을 뿐 아니라 장기적으로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였다. 화랑도는 이처럼 교육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제도였으나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으며, 종전의 촌락공동체적인 청소년조직의 전통과 중국 율령(律令)의 도입을 통한 관청조직의 원리가 결합된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조직체였다.

[조직]

기록에 의하면 신라의 화랑은 전 역사를 통하여 모두 200여 명 정도였다고 한다. 화랑도는 시대에 따라 몇 개의 단체가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였다. 화랑집단은 각기 화랑 1명과 승려 약간명, 그리고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으며, 낭도의 수는 일정하지 않으나 많을 때는 1000명이 되기도 하였다.

화랑은 용모가 단정하고 믿음직하며 사교성이 풍부한 진골귀족 가운데서 낭도의 추대를 받아 뽑혔다. 승려는 주로 지적·정신적인 면에서 화랑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으며, 낭도들은 수도 경주에 사는 6부민(六部民) 출신 자제들이 주축을 이루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즉 화랑도는 신라 고유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와 같은 혈연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아니라 혈연을 초월하여 자신들의 의사에 의하여 결성된 일종의 결사체로 일정한 기간을 정해 놓고 단체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구성원들은 경주 부근의 남산이나 금강산·지리산 등 명승지를 찾아다니면서 국토에 대한 애착심을 기르는 한편 도의를 연마하였다.

화랑도는 이러한 조직과 수양을 통하여 독특한 기질과 기풍을 지녔다. 즉 위로는 국가를 위하고 아래로는 벗을 위하여 죽으며, 대의(大義)를 존중하여 의에 어긋나는 일은 죽음으로써 항거하고,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전사함을 찬양하며, 오직 앞으로 나갈 뿐 뒤로 물러섬을 부끄럽게 여겨 적에 패하면 자결할 망정 포로됨을 수치로 아는 등 장렬한 기백과 씩씩한 기상을 함양하였다.

[성격·역할]

화랑도는 그 독특한 무사도로 유명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시기에는 화랑뿐 아니라 낭도나 일반 명사들까지 국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는 무사도 정신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화랑 출신의 장군들이 모범을 보였다.

660년 김유신(金庾信)장군 인솔 아래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인 화랑 관창(官昌)·반굴(盤屈)의 용맹과 672년 김유신의 아들인 화랑 원술(元述)이 석문전투(石門戰鬪)에서 당(唐)나라 군사와의 싸움에서 보여준 용맹함은 널리 알려져 있다.

진평왕 때 원광법사(圓光法師)가 제정한 세속오계(世俗五戒)는 신라 화랑의 지도이념을 대표하고 있다. 충(忠;事君以忠)·효(孝;事親以孝)·신(信;交友以信)·용(勇;臨戰無退)·인(仁;殺生有擇)의 5계 가운데 그들이 특히 소중하게 여긴 덕목은 충과 신으로서, 이것은 시대적으로 화랑도의 제정부터 삼국통일까지가 신라 역사상 국난기였던 것과 관련이 깊다.

화랑도는 삼국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기 시작한 진흥왕 때 제정되어 삼국통일을 이룩할 때가지 크게 활기를 띠었다. 김유신·김흠춘(金欽春)·죽지(竹旨)·사다함(斯多含)·관창·원술·비령자(丕寧子) 등은 이 시기 유명한 화랑들로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하여 뀤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뀥고 한 바 있다.

화랑도는 국가적 위기 때는 전사단으로서 군부대에 배속되어 작전에 동원되었으며, 수련기간이 끝난 뒤에는 정규부대에 편입되어 정식 군인으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화랑도의 수련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래와 춤은 화랑도의 인격 형성, 나아가 세계관 형성에 놀이가 큰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崔致遠)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는 풍류도라는 신라 고유의 가르침이 있어 화랑도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한다고 하여, 자유스러움과 호방함을 보여주는 선풍(仙風)과 유교·불교·도교의 3교를 포괄하여 이루어진 풍류도가 화랑의 기풍과 정신세계의 한 바탕이 되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화랑도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점차 쇠퇴하였다. 수련은 군사적 목표를 상실한 채 놀이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신라 말기에는 귀족들의 문객(門客) 또는 사병적인 성격을 띠는 집단으로 변질되었고 신라의 멸망과 함께 화랑도는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화랑도의 정신은 한민족 고유의 전통과 이념의 발로로서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면면히 계승되어 국가 유사시에는 독립·애국정신의 상징으로서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존속되어 왔다.

출전 : [한메파스칼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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