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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24 (일)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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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914      
[조선] 당쟁의 원인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이성무)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관련 문서

1. 당쟁을 어떻게 볼 것인가
1-1. 당쟁 때문에 나라가 망했는가?

1-2.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일본 학자들의 견해
1-3.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1-4.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
2-1.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1
2-2. 조선시대 정치사의 흐름과 당쟁 2
3-1. 선조조의 당쟁 1
3-2. 선조조의 당쟁 2
4-1. 광해조의 당쟁 1
4-2. 광해조의 당쟁 2

3) 당쟁은 왜 일어났는가 : 조선 실학자들의 견해

조선 후기 당쟁에 대한 한국인들의 견해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견해요, 다른 하나는 광복 이후 학자들의 견해이다. 당쟁의 원인에 대해 거론한 대표적인 실학자로는 이익(李瀷)ㆍ유수원(柳壽垣)ㆍ이중환(李重煥)ㆍ이건창(李建昌)ㆍ박제형(朴齊炯) 등을 들 수 있다.

이익의 견해

먼저 이익(李瀷)은 "관직 수는 적은데 관직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은 많은[官職小而應調多]" 것에 당쟁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붕당은 싸움에서 생기고, 싸움은 이해 관계에서 생긴다, 이해 관계가 절실하면 붕당이 깊어지고, 이해 관계가 오래될수록 붕당이 견고해지는 것은 당연한 사세이다. 무엇으로써 그 이유를 밝힐 것인가? 예를 들면 지금 열 사람이 굶주리고 있는데,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 까닭을 물어 보면 말이 순하지 않은 자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사람들은 모두 말이 순하지 않아서 싸움이 일어났다고 믿을 것이다. 다음날 또 한 그릇의 밥을 같이 먹게 되면 그 밥을 다 먹기도 전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그 까닭을 물어 보면 용모가 공손하지 못한 자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사람들은 모두 용모가 공손하지 못한 자가 있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믿을 것이다. 다른 날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어서 그 까닭을 물어 보면 행동이 나쁜 자가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마침내 한 사람이 선창하면 여러 사람이 호응해 처음에는 미세하지만 종국에는 크게 된다. 말할 때는 입에 거품을 물고, 화낼 때는 입이 찢어질 듯 흘겨보니, 어찌 그다지도 과격한가?" ([성호집(星湖集)] 권 45, 잡저 하, 붕당론)

관직을 차지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은 과거를 너무 자주 실시해 관직 후보자를 너무 많이 뽑고, 사람을 쓸 때에도 좋아하고 싫어하는 사람을 가리며, 사람을 진퇴시키는 데 기준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열 사람이 관직 하나를 같이 해도 모자랄 지경이 되고, 문벌(門閥) 자제들조차도 문과 급제증명서[홍패(紅牌)]를 끌어안고 한탄하니, 당쟁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의 사세라는 것이다. 이득이 하나인데 사람이 둘이면 두 당파가 생기고, 이득이 하나인데 사람이 넷이면 네 당파가 생기고, 한 번 권력을 잡으면 과거를 널리 실시해 자기 당파의 사람을 뽑아 당세를 굳히고자 하니, 당쟁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파가 다르면 당대는 물론 자손 대대로 서로 왕래하지도 않고 통혼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언동과 복식조차 달리하니, 심하기 그지 없다는 것이다.

이익은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과거를 줄이고, 고과(考課)를 엄정히 하며, 좋은 관직을 아무렇게나 주지 말고, 승진시키는 것을 신중히 하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ㅆ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이 근본적인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다. 놀고 먹는 양반이 있는 한 이러한 고식적인 방법만으로는 당쟁이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익 자신이 양반 체제에 속해 있는 인물로서, 체제 자체를 혁명적으로 개혁한다는 생각은 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그가 당쟁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당쟁을 근본적으로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그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수원의 견해

유수원(柳壽垣)은 문벌의 폐해와 주론자(主論者, 일명 監主라고도 한다)의 여론 조작 때문에 당쟁이 생겼다고 보았다. 조선 후기에는 인재를 뽑아 쓸 때 문벌 자손을 우선으로 했다. 그리하여 문벌 자손들은 못났어도 관직을 쉽게 차지했고, 심지어는 같은 형제인데도 외가와 처가의 문지(門地)에 따라 출세에 현격한 차이가 났다. 따라서 양반 가문을 유지하자면 관직을 차지해야 하고 좋은 가문과 통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관직 수는 적고 관직을 바라는 사람은 많아졌기 때문에 당쟁이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서(迂書)] 권2, 門閥之弊)

관직 수는 적고 관직을 바라는 사람은 많기 때문에 당쟁이 심해졌다는 유수원의 견해는 이익의 주장과 흡사하다. 그러나 그 해결 방법으로 문벌을 타파하고 사ㆍ농ㆍ공ㆍ상의 사민(四民)이 각각 본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하여 신분제의 타파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색체를 띠고 있다. 과거를 줄이고 인사를 공정히 해야 한다는 정도에서 그친 이익의 개선 방안보다 한 걸음 앞선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유수원은 주론자 때문에 당쟁이 심해진다고도 했다. 주론자란 공론(公論, 淸論ㆍ士論ㆍ物論ㆍ公議ㆍ時論이라고도 한다)을 주도하는 대간(臺諫)의 대표를 말한다. 즉 여론을 주도하는 언론의 대표인 것이다. 주론자는 연소자 중에서 문학(文學)과 풍채(風采)가 있는 사람으로서, 공론을 일으켜 재상과 일반 관료들을 막론하고 잘못이 있으면 동료 대간을 시켜 논박하게 하기도 하고, 이조 낭관으로 하여금 뜻이 맞는 사람을 엘리트 관직인 청직과 요직(이를 합해 淸要職이라고 한다)에 추천하게 하기도 했다.

공론에 입각한 이러한 여론 정치는 조선 후기 사림정치의 한 특징이었다. 그러나 만일 주론자가 올곧지 못해 특정 당파에 좌우되는 인물이면 오히려 당쟁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수원은 주론자의 폐해를 없애려면 관제를 바로잡아 각 관청이 소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3사(三司) 가운데 홍문관(弘文館)을 제외하고는 본연의 업무에만 전념하도록 하고, 문서롤 상소하는 소주(疏奏, 문서로 올리는 上疏와 上奏)만 인정하도록 하고, 말로 의견을 개진하는 진계(陳啓)나 양사, 즉 사간원(司諫院)과 사헌부(司憲府)가 연대해 말로 의견을 내는 연계(連啓)는 못하게 해, 3사 언론이 지나치게 난무하는 일을 방지해야 한다고 했다. 유수원은 비록 사민평등(四民平等)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당쟁의 폐해를 제도 개선으로 해결하려는 데 그친 시대적 한계가 있다.

이중환의 견해

이중환(李重煥)은 이조전랑(吏朝銓郞)이 자기 후임을 추천할 수 있는 자대권(自代權)과 3품 이하의 엘리트 관료인 청요직의 후보자를 추천할 수 있는 당하통청권(堂下通淸權)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이조ㆍ병조 전랑에게는 자기의 후임을 선택하는 관례가 있었고, 특히 대간을 비롯한 당하낭관(堂下郎官, 정3품 당하관부터 6품까지의 관료)을 추천하는 통청권(通淸權)이 있었다.

이는 대신들이 인사권을 독점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해 조선 전기부터 시행되어 오던 관행이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의 사림정치시대에는 널리 일반화되어 있었다. 결국 이 제도는 연소기예의 관료들로 하여금 예의ㆍ염치ㆍ명분ㆍ절개를 중히 여기며 권세와 물욕에 연연하지 않게 하는 한편, 인사권을 위아래로 양분시켜 상호 견제하게 함으로써 정치를 건전하게 운영하자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제도이다. 동인과 서인의 갈림은 바로 이조전랑의 자대권 때문에 일어난 당쟁이었으며, 1741년(영조 17)에 이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전후 300여 년간 전랑직 다툼이 계속되었다.

전랑은 또한 대간의 추천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간을 통한 당쟁 격화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폐단이 있었다. 이중환은 전랑권(銓郞權)이 당쟁의 빌미를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는 했지만, 조선시대 양반정치ㆍ사림정리를 건강하게 유지시켜 준 훌륭한 관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러한 전랑권 때문에 당쟁이 격화되는 까닭은 전랑의 인사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특정 당파에 치우치게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고 했다. ([택리지(擇里志)] 人心)

박제형의 견해

박제형(朴齊炯)은 서원(書院) 때문에 당쟁이 생겼다고 했다. 서원은 유현(儒賢)을 제사 지내고 자제를 교육시킬 목적으로 세워진 사우(祠宇)로서, 왕으로부터 현판을 받은 사액서원(賜額書院)과 그렇지 못한 사립서원(私立書院)이 있었다. 처음에 서원은 도의(道義)를 강론하는 곳이었으나, 나중에는 조정의 정책을 비평하고 특정 당파를 지지하는 당쟁의 소굴로 바뀌었다고 했다. 서원의 유생들은 조정의 인사나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통문(通文)을 돌렸다(이를 儒通이라 한다). 그들은 때로는 천 명, 만 명이 연명으로 떼를 지어 들고 일어나 이른바 청의(淸議)를 일으키곤 했는데, 대신ㆍ왕실 외척이라도 이를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들의 청의는 반드시 공정하지만은 않았고 당론에 치우치게 마련이었다고 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기 위해 영조조에는 서원 유생의 상소를 금지시킨 적이 있었고, 드디어 대원군은 서원을 혁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朝鮮政鑑])

서원 때문에 당쟁이 일어났다는 박제형의 주장에 대해 시데하라는 이의를 제기한다. 서원이 처음 생긴 것은 1541년(중종 36)이고, 동인과 서인이 갈린 것은 1575년(선조 8)이다. 즉 서원이 당쟁보다 앞서 생겼으며 서원 설립기에는 유생들이 당론을 부추기는 폐해가 없었으므로, 서원 때문에 당쟁이 시작되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도 후대의 당쟁이 서원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에도 서원이 당쟁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당쟁이 서원의 조정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고 지적한다. 다만 우리는 박제형이 [조선정감]에서 논하고자 한 대상은 당쟁이 아니라 대원군의 정책이었고, 따라서 박제형의 주장은 서원 혁파와 관련시켜 당쟁의 원인을 포괄적으로 언급한 데 불과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이건창의 견해

이건창(李建昌)은 당쟁의 원인으로 도학태중(道學太重)ㆍ명의태엄(名義太嚴)ㆍ문사태번(文詞太繁)ㆍ형목태밀(刑獄太密)ㆍ대각태준(臺閣太峻)ㆍ관직태청(官職太淸)ㆍ벌열태성(閥閱太盛)ㆍ승평태구(承平太久)의 여덟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도학태중이란 도학을 지나치게 높이다 보니 작겨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도학을 핑계 삼아 사사로운 이익을 챙기려고 해서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요, 명의태엄이란 명의에 가탁해 상대방을 깔아뭉개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며, 문사태번이란 남의 글을 흠잡아 상대당을 타도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고, 형옥태밀이란 상대방을 난적(亂賊)으로 몰아 득세를 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다. 또 대각태준이란 대간의 언론이 지나치게 준엄해 당쟁이 심해 진다는것이요, 벌열태성이란 문벌 가문이 패거리를 지어 관직을 독차지하려 하니 당쟁이 심해진다는 것이며, 승평태구란 임진ㆍ병자란 이후에 200여 년간 밖으로 대규모의 외적이 쳐들어온 적이 없어 정신을 못 차리고 당쟁만 일삼았다는 것이다. ([黨議通略] 原論)

도학은 사림들이 정치인으로서 갖추어야 하는 기본 덕목인 도덕적 수양을 말한다. 이는 스스로 도덕적 수양이 되어 있지 않으면 남을 다스릴 수 없다는, 공자 이후의 유교에서 주장하는 기본적인 정치철학이었다. 당쟁은 관료들간에 도덕적 수양을 갖춘 군자와 그렇지 못한 소인이 있다고 상정하고 군자는 들여 쓰고 소인은 내쫓아야 한다는 이른바 군자소인로(君子小人論)이 대두되면서 치열해진 것이다. 그런데 도학은 관료들만이 아니라 국왕에게도 요구되었다. 국왕이라도 도덕적 수양을 갖추고 있지 못할 경우에는 쫓아내도 된다는 논리였다. 도학이 왕권 위에 군림한 것이다. 이는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정국이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명의는 명분과 의리를 말한다. 주자학에서는 명분과 의리를 중요시 했다. 사림정치에서는 명분이 특히 중시되었다. 그리고 명분 중 가장 큰 명분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표방한 존명사대(尊明事大)였다. 명나라를 존경하고 천자의 나라로 대접하는 외교 관계를 천명하는 대의명분이었다. 인조반정(仁祖反政)도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이중 외교를 해 존명사대의 대의명분을 어긴 잘못을 응징할 목적에서 일어난 것이다. 송시열이 우왕의 명으로 명나라를 치러 가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태조와 명나라를 위해 청나라를 치려고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에게 시호(諡號)를 더 올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그 때문이다.

또한 사림들은 의리를 지나칠 정도로 중시했다. 영조를 지지한 노론들과 경종을 지지한 소론들이 충역의리(忠逆義理)를 놓고 심한 당쟁을 벌인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사림들은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의리야말로 좋건 나쁘건 조선 왕조를 지켜온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했다. 이 의리가 꺽이면 사림정치가 망할 뿐만 아니라 나라도 망하게 되는 것이다.

의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 나라는 지탱할 수 없다. 이러한 의리는 국가가 위기에 쳐했을 때 목숨을 바쳐 의병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다만 의리른 당쟁을 위한 자작의리(自作義理)가 되었을 때 폐단이 생긴다. 과도한 명분과 의리가 조선 후기의 당쟁을 부추긴 것은 마땅히 반성해야겠지만, 명분과 의리가 발붙일 데가 없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반성도 더불어 가졌으면 한다.

조선은 지식인 문신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문치주의 국가였다. 따라서 정치를 수행하는 도구는 글(文詞)이었는데, 상소문(上疏文)ㆍ서간문(書簡文)ㆍ시문(詩文)ㆍ통문(通文)ㆍ비문(碑文)ㆍ문집(文集)ㆍ서책(書冊) 등이 그것이다. 관료들은 자기의 의견을 말로도 표현하지만 글로써 표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시(詩)를 모르면 사대부 축에 낄 수 없었고, 글을 모르면 아예 정치에 나설 수 없었다. 기록이 중시되었고, 그래서 기록에 들어 있는 내용이 언제나 사건의 근거가 될 수 있었다.

정치인들은 권력 투쟁을 하되 글이나 이론으로 했으며 그 근거를 고전이나 다른 사람의 글 중에서 찾아냈다. 서인과 남인의 예론이 그랬고, [가례원류(家禮原流)]의 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노론과 소론의 시비가 그랬다. 글과 이론을 가지고 권력 투쟁을 하는 것 자체는 비판할 수 없다. 그러나 이해 관계가 아니라 글과 이론을 통한 의리와 신념의 대결로 당파가 갈릴 때, 당쟁의 골은 더 깊어지게 마련이다. 숙종조에 정적을 일망타진하려는 환국(換局) 사태가 일어난 것은 예론으로 인해 당쟁의 골이 더욱 깊어진 때문이었다.

조선시대 사대부에게는 과도한 형벌을 주지 않게 되어 있었다. 사대부들이 주도하는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하의 국왕에 대한 불충죄, 자식의 부모에 대한 불효죄, 노비의 상전에 대한 거역죄는 극형으로 다스렸다. 사대부는 일반 범죄의 경우 죽이더라도 사약을 내려 죽이지, 목을 베어 죽이는 참형이나 목을 매달아 죽이는 교수형에 처하지 않았다. 단 불충ㆍ불효의 경우는 예외였다. 당쟁이 심해져 충역시비(忠逆是非)로 치달으면서, 상대 당이 불충을 저질렀다고 몰아세워 극형에 처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경종을 지지하는 소론과 영조를 지지하는 노론 사이의 충역의리 시비가 바로 그러했다.

사림정치에서 대간은 정치의 꽃이다. 대간의 사림의 여론을 등에 업고 정리를 주도해 가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대간은 군주의 눈과 귀로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군주에게 정확하게 알려 줌으로써 훌륭한 정치를 수행할 수 있도록 보좌하는 것이 주 임무였다.

그러나 군약신강의 정국에서 대간은 군주를 압박하고 당쟁의 압잡이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만큼 당쟁시대에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대간을 장악해야 하고, 대간의 언론을 통해 상대 당을 공격해야 했다. 상대 당을 일망타진하기 위해서는 공격이 준엄할 수밖에 없었고 형벌이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쟁은 더욱 격화되었던 것이다.

양반 가문 가운데 일찍부터 정계에 진출한 가문은 문벌을 형성했다. 당쟁시대에도 문벌은 매우 중요했다. 그러나 탕평정치가 실시되면서 왕권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자, 탕평당이 생겨 이들을 중심으로 벌열이 생겨 났다. 이들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외척으로서 정권을 독차지했다. 그리하여 척신들간에 권력 투쟁이 가열되고 당쟁도 치열해졌다. 특히 세도정치시대에는 안동 김씨ㆍ풍양 조씨ㆍ전의 이씨ㆍ여흥 민씨 등 몇몇 서울 노론 외척들간의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조선 왕조는 군사력보다는 외교를 통해 국가 안보를 지키는 방법을 택했다. 이른바 사대교린(事大交隣) 정책이었다. 이러한 외교 정책에 힘입어 조선 왕조는 임진ㆍ병자란 전후로 각각 200년 동안 대외적으로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외적의 침입이 듬하다 보니 안에서는 당쟁이 만연하게 되었다. 국란이 잦았다면 당쟁이나 하고 있을 틈이 없었을 것이다. 무치주의 하에서라면 군권을 가진 집권자를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뭉칠 수 있겠지만, 문치주의 하에서는 말이 많기 때문에 절대적 우위를 가진 권력자가 나타나기 어렵다. 중앙 집권 체제에서는 국왕이 그러한 역할을 해야 하는데, 군약신강의 정국에서 왕권은 신권에 제약되어 그러한 역할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신료 중에서 절대 권력자가 나오기도 어려웠다. 그러기에는 문벌 가문의 수가 너무 많았고, 그들의 이해 관계가 일치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좁은 국토에 단일 민족이다 보니 지방 세력이 직접 권력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기 어려웠다. 이러한 여러 이유 때문에 정쟁은 그칠 날이 없었다.

이와 같은 문제점들을 지적하기는 했지만, 이건창은 기본적으로 사림정치의 틀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다만 사림정치가 오래 지속되면서 생겨난 여러 부작용을 비판했던 것이다. 대체로 당론서는 자기 당의 이익을 변호하기 위해 쓰여지기 마련이다. 그의 [당의통략(黨議通略)]도 각론에 들어가서는 편파적인 서술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대체로 사실을 객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한 점이 인정된다. 그러므로 후대에 당쟁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

출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1], 동방미디어, 2001, pp.4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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