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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4 (수)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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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994      
[국가] 인도사 (한메)
인도사

[역사]

인도라는 말은 힌두와 같은 어원으로, 알렉산드로스의 군대가 인더스강 연안에 도달하여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힌두(신두), 그 토지를 힌도(인도)라고 부른 데서 시작되었다. 당시의 인도인은 자기들이 살고 있는 지역을 바라트라고 하였다. 바라트란 북인도, 특히 갠지스강 중류지역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19∼20세기에는 오늘날의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3국을 포함한 인도아대륙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것은 영국식민지 지배시대에 영국인은 인도아대륙 전체를 인도라고 부르고, 인도인은 자신의 나라를 바라트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도에서는 바라트라는 국명을 사용하고 있다. 인도는 이집트·메소포타미아·중국과 함께 최고(最高)의 문명발생지로서 역사가 길고, 문화도 독자적이다.

<고고시대(考古時代)>

인도사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는 인더스문명이다. 인더스강 유역에서 BC 2500∼BC 1700년 무렵까지 번영했던 인더스문명의 특징은 도시유적이다. 정연하게 계획된 도시 내부에는 곡물창고·목욕탕 등 공공시설이 있었다. 그러나 신전(神殿)이나 왕궁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다른 문명과 구별되는 특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인더스문자는 아직 해독되고 있지 않다. 중심유적지는 모헨조다로·하라파·칼리방간·로탈 등이다.

인더스문명은 BC 1700년 무렵 급속히 쇠퇴했는데, 그 원인으로는 외래민족에 의한 파괴나 기후·지형적 조건의 변화를 들 수 있다. 인더스문명의 담당자는 현재 남인도에 거주하는 드라비다 여러 민족과 동일계통의 사람들이었으나 멸망한 뒤의 인더스문명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고대(古代)>

역사시대는 BC1000년 무렵 아리아인에 의해 갠지스강 상류지역에서 시작되었다. 아리아인은 갠지스강 유역에 농경촌락을 형성하고 철기(鐵器)와 회색칠무늬토기〔灰色彩文土器〕를 사용하였다.

⑴ 부족국가의 탄생과 통일국가

BC6세기 무렵 인도에는 16개국의 부족국가와 씨족국가가 있었다. 그 가운데 오늘날의 우타르프라데시에 있었던 코살라국과 비하르에 있었던 마가다국은 전제적 고대국가(專制的古代國家)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그 뒤 마가다국이 코살라국을 멸하고 갠지스강유역을 통일하였다. 이 마가다국의 뒤를 이은 난다왕조를 멸하고 최초의 고대제국을 형성한 왕조는 마우리아왕조이다.

⑵ 마우리아왕조

BC 317년 찬드라굽타가 세운 마우리아왕조는 BC300년 무렵에는 갠지스강유역뿐만 아니라 북인도 전역을 지배하였고 제3대 아소카왕 때는 인도반도 남단부를 제외한 인도 전역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갠지스강유역, 펀자브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서인도, 우자인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인도 일부와 데칸지방 일부 등 경제적 선진지대에 대한 지배와 그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관리·지배에 한정되어 있었다.

마우리아왕조는 이 지역을 중앙직할지역과 몇 개의 속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중앙직할지역에는 상급관료군(上級官僚群), 군사장관(軍事長官)의 지휘를 받는 군인 등이 있었다. 각 속주는 태수가 통치했으나 북서인도의 타크샤시라, 중부인도의 우자인 등 주요 속주는 왕자가 다스렸다. 마우리아시대의 농촌사회에서는 분업관계(分業關係)가 성립되어 농민촌락 이외에 목수촌(木手村)·철공촌(鐵工村)과 같은 각종 수공업촌이 있었다. 국가와 농민 사이에 중간적인 영주계층은 없었으며, 농민은 경작토지에 대해 많은 종류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중세>

⑴ 힌두시대

마우리아왕조는 아소카왕이 죽은 뒤 급속히 쇠퇴하여 BC2세기 무렵 멸망하였다. 그 뒤 강력한 통일국가가 형성되지 못한 채 각 지방을 대표하는 왕조가 일어나 흥망을 되풀이하였다. 먼저 세력을 확정한 것은 북서인도를 중심으로 하는 쿠샨왕조로서 AD2세기 전반 카니슈카왕시대에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 무렵 데칸지방에는 사타바하나왕조, 남인도에는 촐라·체라·판디아의 3왕국이 있었다. 그 후 4세기 초에는 북인도에 굽타왕조, 데칸지방에 찰루키아왕조, 남인도에 팔라바왕조가 있었다.

굽타왕조가 쇠퇴한 뒤 하르샤왕조의 통일기를 거친 북인도에서는 라지푸트계의 여러 왕조가 난립했는데, 특히 벵골지방에서는 팔라왕조가 벵골문화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이 굽타왕조 이후 12세기 무렵까지의 인도사회는 동판문서(銅板文書)를 통해 알 수 있다. 동판문서는 왕이나 현지의 유력자들이 사원과 토지를 하사한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다. 남인도에서는 대신 석조사원의 벽면에 석각문(石刻文)을 새겨 토지의 기증을 나타냈다. 이와 같은 사료를 통해 당시 국왕 밑에 영주층이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⑵ 무슬림시대

12세기 이슬람교도 세력이 인도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아프가니스탄 고르왕조의 무장이었던 쿠트브 웃딘 아이바크는 델리를 함락하고, 1206년 인도 최초의 무슬림왕조인 노예왕조(1206∼90)를 창시하였다. 노예왕조의 뒤를 이은 할지왕조(1290∼1320)의 알라웃딘 힐지는 서인도의 데칸지방을 침략하고 남인도의 카카티야왕조·판디아왕조·호이살라왕조 등을 점령하였다.

할지왕조를 대신한 투글루크왕조의 무하마드 이븐 투글루크는 데칸 북부로 도읍을 옮기는 등 남하정책(南下政策)을 중시하고 남인도로 여러 차례 원정군을 보냈다. 이들 두 왕의 활동을 통해 이슬람의 영향이 북인도에서 남인도까지 미쳤다. 투글루크왕조의 데칸원정은 굴바르가에 데칸지방 최초의 이슬람정권 바만왕조를 수립하였다. 바만왕조는 15세기 말 5왕국으로 분립되었다. 데칸 이남의 힌두세력들은 비자야나가르왕국을 세워서 여러 무슬림왕국의 연합군에게 대항하였으나 패하여 쇠퇴하였다.

⑶ 무굴제국

북인도에서는 델리의 여러 왕조에 이어 1526년 바부르가 무굴왕조를 수립했다. 제3대 황제 악바르 이후, 자항기르·샤자한·아우랑제브의 약 150년간은 무굴제국의 전성시대였다. 이 동안 무굴제국은 북인도 일대의 펀자브·아프가니스탄 지방뿐 아니라 구자라트·신드·벵골 등을 정복했으나, 아우랑제브시대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델리·펀자브지방에서는 시크교도가 활동하고 있었다. 무굴제국은 시크교를 탄압했으나 세력을 근절시키지는 못했다.

데칸지방에서는 마라타세력이 시바지의 지휘아래 17세기 중엽부터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우랑제브는 데칸에 있는 군영(軍營)에 몇십 년간 체재하면서 마라타세력을 몰아냈다. 1680년에는 시바지의 아들이며 제2대 왕인 산부지를 학살하여 마라타세력이 한때 후퇴하였으나, 제3대 왕 라자람은 남인도에서 저항을 계속했다. 그 뒤 17세기 말 세력을 회복한 마라타세력은 데칸에서 무굴세력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자 무굴제국은 급속히 와해되기 시작했고, 18세기 말에는 무굴궁정의 실권을 마라타의 신데가(家)가 장악하게 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지배>

18세기 영국은 인도를 식민지화하기 위해 진출했다. 영국이 먼저 발판으로 삼은 곳은 벵골지방으로, 1700년 오늘날의 캘커타를 거점으로 삼았다. 18세기 전반은 통상을 주로 하고 있었으나, 중반 이후는 정치문제에 관여했다. 1757년 프랑스를 인도에서 축출한 영국은 64년 바크사르싸움에서 벵골태수·아우드태수·무굴황제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벵골의 징세행정권(徵稅行政權)을 탈취했다. 이 결과 벵골지방은 실질적인 영국식민지가 되었다.

1799년에는 남인도의 마이소르왕국을 정복하고, 1804∼1805년에는 마라타세력을 격파함으로써 북인도 일대를 획득하였다. 18년에는 마라타의 재상정부가 영국에게 멸망하여 영국은 데칸고원 서부를 중심으로 하는 마라타령을 획득하였다. 1820년에 펀자브의 시크왕국을 제외한 인도 전역은 영국지배 아래 들어가거나 영국과 조약을 맺은 토후국(土侯國)이 되었는데 1894년 시크왕국마저 멸망시키고 영국은 인도식민지화를 완료하였다. 그 뒤 1850년대는 직계자손이 없는 경우 양자상속을 인정하지 않는 <실권(失權)의 원리>에 의해 많은 인도토후국이 무너졌다. 1856년 아우드왕국의 멸망은 세포이의 항쟁의 한 계기가 되었다.

⑴ 인도사회의 변질

영국의 인도지배는 인도사회에 큰 혼란을 가져왔다. 그것은 영국이 영국이념에 맞추어 인도 사회를 지배하면서 인도사회에 내재된 논리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토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토지소유자를 확정하고 그들로부터 지세를 징수했다. 그러나 그것은 종래의 직책에서 오는 이익에 의해 중층적으로 형성되어 있던 토지권익체제(土地權益體制)를 변경시켰다.

이처럼 사회에 대해 배타적·근대법적 토지소유권관념을 강요하는 것은 인도의 사회관계를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인도사회에서는 관습법적으로 판차야트집회에서 분쟁을 재결(裁決)하였다. 하급심(下級審) → 상급심(上級審)의 서열관계(序列關係) 및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적용되지는 않았지만 재결의 결과는 사회관습의 구속력에 의해 강제적이었다.

그러나 영국은 이러한 법관행을 무시하고 근대적 법과 재판제도를 도입한 인도법전을 편찬했다. 한편 경제적인 면에서도 인도는 촌락이나 지역사회를 단위로 한 경제구조에서 국제적인 상업관계로 편입되는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변동 속에서 인도 고유의 문화체계는 해체되었다.

<제국주의시대>

세포이의 항쟁 뒤 인도는 정치적·경제적 변동기를 맞이했다. 제국주의시대가 개막된 1870년대부터 인도는 제국주의지배를 직접 당하게 되었으며, 인도는 반제국주의운동을 전개하였다. 전인도를 대표하는 정당 <인도국민회의파>가 발족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1858년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산되면서 인도는 인도정청을 통해 영국의 지배를 직접 받게 되었다. 세포이의 항쟁 뒤 영국은 토후국의 병합방침을 버리고, 그것을 온존(溫存)시키는 방침을 내세웠다.

그 결과 식민지 인도는 영국령의 주(州)와 토후국으로 구성되는 모자이크형의 변칙적인 통치형태를 갖게 되었다. 이 형태는 인도가 독립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경제적 측면에서 인도는 종래의 상품·원료시장의 기능과 함께 자본투하시장의 성격도 갖기 시작했다. 자본수출의 대상은 철도건설로 세기 말에 주요 철도망이 완성되었으며 이 밖에도 황마·석탄·면공업 등에 자본이 투하되었다.

면공업은 조로아스터교도가 1854년 면방적공장을 설립한 이후 급속히 발전했는데, 이와 함께 조로아스터교도계의 타타재벌은 면공업과 제철업에 자본을 투자해 성공했다. 또한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인도자본은 차츰 경제적인 기반을 강화하고 있었다. 1885년 12월 상공업도시 봄베이에서 인도국민회의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자리에는 벵골정치가 S.바네르지와 봄베이 출신 정치가 D.나오로지가 참가했는데, 신당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영국·인도 사이의 우호관계 촉진이었다. 동시에 대회결의를 통해 행정제도의 민주적인 개혁과 군사비의 삭감 및 수입목화관세(輸入木花關稅)의 재실시를 요구했다. 신당의 이러한 온건노선은 인도 지식계급에 의한 제국주의 비판의 초기형태로서 각 주의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인도정치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1905∼1908년에는 국민회의파의 지도 아래 벵골분할반대운동이 전개되었다. 1905년 당시의 인도 총독 G.N.커즌이 벵골을 동·서로 분할한다고 발표했는데, 그것은 인도 선진지대 중 하나인 벵골지방의 벵골민족주의 운동을 힌두와 무슬림으로 분열시켜 약체화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벵골분할의 강행은 인도 여론의 반발과 저항을 초래하였다.

1905년 말 개최된 국민회의파대회는 영국제품의 배척을 결정하고, 1906년 12월 캘커타대회에서는 국산품애용, 독립과 민족교육의 달성을 결정했다. 이 반대운동의 주요 지도자는 펀자브 출신의 L.라지파트 라이, 벵골 출신의 B.C.팔, 봄베이의 B.G.틸라크 등 3명의 혁명적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지도이념을 달리하는 온건파의 방해와 영국측의 탄압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틸라크는 미얀마로 추방되었고 라지파트 라이는 미국으로 도망갔다.

그 뒤 영국은 1909년 무슬림 중간층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 몰리―민토개혁안을 채택하고 개혁을 시도하였다. 또 1906년 전인도무슬림연맹이 영국의 주선으로 발족되었고, 11년 벵골분할령이 철회되었으며 수도는 캘커타에서 델리로 옮겨졌다.

<제1·2차세계대전>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을 포함하는 30여 년의 시기를 인도에서는 <간디단계의 인도민족운동기>라고 한다. 이 단계는 인도민중이 독립을 이룩하기 위하여 정치투쟁을 제기한 시기였고, 인도 부르주아계급도 독립인도의 경제개발구상을 내세우는 단계까지 발전하고 있었다. 즉 이 시기는 영국지배의 후퇴기에 해당하며, 제2차세계대전기에 인도는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하였다.

제1차세계대전과 제2차세계대전시 영국은 인도의 인력과 자원을 동원했으며, 그 결과 인도는 희생을 치렀다. 그 희생의 대가는 적었으며, 인도의 정치적·경제적 위기는 급속하게 깊어졌다. 제1차세계대전시 영국은 대전 후의 자치실현을 약속하고 인도의 전쟁지지를 얻었으나, 몬터규―쳄스퍼드개혁은 인도민중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1919년 국민회의파와 M.K.간디의 제1차 비폭력저항운동이 시작되었다. 인도의 저항형태는 반제(反帝)·반봉건(反封建)의 두 형태로 나타났으며, 도시 소부르주아계급·노동자·농민이 참여한 피압박민족의 계급투쟁이었으나, 1922년 정지되었다. 1920년에는 전인도노동조합회의가 결성되었고, 북인도 각지에 개별적인 농민조합이 탄생하였다.

1925년에는 칸푸르에서 인도공산당창립대회가 개최되었고, 각지에서 노동당 활동을 벌였다. 30년 초 국민회의파가 지도하는 반제민족운동이 다시 고양되어 34년까지 지속되었다. 세계공황은 인도의 도시생활자와 농민을 생활고에 빠뜨렸다. 국민회의파는 1929년 대회에서 완전독립을 결의하고, 30년 1월 26일을 독립요구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인도의 노동운동은 영국의 탄압으로 좌절되었으며, 전인도노동당은 반제민족운동에 협력하지 않았다.

인도농민을 결집하는 전인도농민조합은 1936년에 창립되었다. 한편 영국은 1935년 인도통치법을 마련하고 국민회의파에 뿌리를 둔 인도의 중간충을 통치기구 내부로 끌어들였다. 이 통치법으로 국민회의파의 저항·타협이라는 양면성과 M.A.진나가 이끄는 무슬림연맹을 인지(認知)할 수 있게 되었다. 무슬림연맹은 펀자브와 벵골 두 주에서 제1당이 되었다.

신통치법(新統治法)은 한정적 주자치(限定的州自治)를 도입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개시와 함께 인도는 참전국이 되었지만 국민회의파는 비협력 방침을 취했다. 1941년 독일·소련의 전쟁개시와 함께 전쟁은 제국주의전쟁에서 반파시스트인민전쟁으로 변했다. 이러한 국제적인 상황변동 속에서 국민회의파는 인도가 즉시 독립되는 것이 세계의 진보진영을 강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한편, 무슬림연맹은 영국협력방침을 채택했다. 그리고 1942년 8월에는 국민회의파가 인도퇴거요구투쟁으로 탄압받고 비합법화되자 파키스탄 독립요구를 확대시켜 나갔다. 반파시스트인민전쟁의 지지와 대영협력방침(對英協力方針)을 내세운 인도공산당은 1942년 7월 합법화되었다. 공산당은 국민회의파와 인도퇴거요구투쟁을 적전자살(敵前自殺)이라고 규정하고 국민회의파의 민족주의를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회의파는 공산당을 영국제국주의의 대리인이라고 반론했다. 전쟁기(戰爭期)의 인도정치는 국민회의파·무슬림연맹·공산당의 3당이 충돌하는 가운데 공동으로 대처할 터전을 상실한 것이다. 인도의 장래에 대해서도 무슬림연맹은 무슬림국가 파키스탄을 내세웠고, 공산당은 다민족통일을 기초로 하는 연방국가 구상을 제기했으나, 국민회의파는 힌두·무슬림통일을 기초로 하는 연방제를 내세웠다. 그 사태는 독립 후의 국가구상 분쟁으로 나아갔다.

<독립 후의 국가건설>

1945년 8월 제2차세계대전 종결부터 47년 8월 인도·파키스탄 분리, 독립까지를 <권력의 이양단계>라고 한다. 47년 8월 15일 인도는 독립국가가 되었다. 또한 파키스탄은 같은 해 8월 14일 독립했다. 신생인도의 여당은 인도국민회의파, 총리는 P.J.네루, 대통령은 R. 프라사드가 되었다. 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新憲法)을 시행하고,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연방제공화국을 탄생시켰다. 이어서 소선거구제의 제1차 총선거를 실시했으며, 국민회의파는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1951년 4월에는 제1차 5개년계획을 세워 토지개혁과 공업화를 추진했다. 1955년 1월에는 국민회의파대회에서 인도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형 사회>를 설정했다. 대외적으로는 비동맹정책외교를 내세우고 중국과 평화5원칙을 확인했다. 1956년 제2차 5개년계획에서는 공업화계획을 강화하고, 언어별로 주를 재편성했다. 독립인도의 정치사(政治史)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즉, 인도공산당이 제2차총선거에서 케랄라의 제1당이 되어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 정부는 1959년 대통령지배가 도입될 때까지 국민회의파 중앙정부가 내세운 혁명을 부분적으로 실행하려 하였으나 국민회의파는 이 <붉은 정권>의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다. 대외적으로 국민회의파는 내정불간섭원칙을 포기하였다. 1967년 제4차 총선거에서는 국민회의파의 일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고, 연방에서는 I.P.간디 총리가 주도하는 국민회의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서벵골과 케랄라에서는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정부가 실현되었다. 또한, 타밀나두에서는 드라비다진보연맹이 국민회의파를 대신하여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대해 간디총리는 1975∼77년 비상사태를 선언하여 인도민주주의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1977년 제 6차 총선거에서는 국민회의파가 패배하고 인민당(人民黨)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1980년 제7차 총선거에서 다시 간디가 총리가 되어 강권정치를 계속하였다. 1980년대 펀자브의 시크교도들은 모두 반회의파·반중앙정부 입장에 있었다. 정부군은 1984년 6월 시크교의 총본산에 무력을 행사했으며, 시크교도들은 10월에 간디총리를 암살하였다. 신임총리에는 장남 R. 간디가 취임하였으나, 1989년 실시된 총선에서 간디총리의 국민회의당이 과반수를 확보하지 못함으로써 40여 년간 인도를 통치해 온 네루일가의 권력독점이 종식되고, 자나타달당을 중심으로 5개 야당연합의 국민전선 지도자인 W.싱내각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싱총리는 집권 11개월 만에 사임하고, 1990년 C.셰카르총리가 새 내각을 구성했다. 1991년 3월 국민회의당의 간섭과 비협조를 이유로 사임하고, 1991년 6월에 P.V.N.라오 국민희의당 총재가 취임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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