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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1-24 (수)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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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042      
[국가] 인도사 (브리)
인도사 印度史 history of India

현재의 인도공화국과 1947년에 각각 분리·독립한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 공화국도 포함하는 인도아대륙(인도반도)의 역사.

개요

남쪽으로는 드넓은 대양이 감싸고 있고, 북쪽으로는 거대한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어 북극의 찬바람과 중앙 아시아의 건조한 기류를 차단시켜준다. 이와 같은 지형적 영향으로 인도아대륙은 최북단에 해당하는 잠무와 카슈미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아열대성 기후대를 이룬다. 육로로 접근이 용이한 곳은 북서쪽과 북동쪽뿐인데, 외부세계와의 접촉은 대부분 이 지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서쪽으로는 구릉들과 산들로 이루어진 인도-이란 국경이 있고, 동쪽으로는 인도-미얀마 국경이 있으며, 북쪽으로는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놓여 있다. 인도아대륙은 대체로 북부지역의 인더스·갠지스 강 유역과 남부지역의 인도반도로 구분된다. 인더스와 갠지스 강 유역은 광막한 충적평야가 펼쳐진 곳으로 위대한 두 도시문화, 즉 BC 3000년경의 인더스 강 유역 문명과 BC 1000년경의 갠지스 강 유역 문명을 낳은 중심지였다. 남쪽으로 이 지역을 반도와 분리시키는 구릉들과 산림지대에는 오늘날까지도 원주민이 살고 있다. 이 지대를 가로질러 서쪽으로 나르마다 강이 흐른다. 이 강은 오랫동안 북인도와 남인도의 상징적인 경계선이 되었다.

북부인도는 고유문화와 인종을 가진 여러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 고지대는 강우량이 낮은 지역으로, 주로 밀과 보리를 생산하는 곳인데, 인구밀도는 낮은 편이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란계의 이웃 종족들과 매우 유사하다. 인접해 있는 인도 평원도 강우량이 극히 적은 지역이지만, 해마다 범람하던 인더스 강과 근래에 들어서는 운하에 의한 관개수로에 힘입어 상대적으로 높은 농업생산성을 기록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상응하여 발루치스탄 지역보다 인구밀도도 높다. 인더스 강 유역은 북쪽의 펀자브 지역과 중앙의 신드 평원, 남쪽의 인더스 삼각지대로 이루어져 있다 (→ 색인:인더스 계곡). 이 삼각지대의 동쪽은 타르 사막 지역이며, 이곳은 다시 반도의 최북단인 아라발리 구릉지대와 접해 있다. 이 지역들을 벗어나면 라자스탄 구릉지대와 말와 고원이 펼쳐진다. 그 남쪽은 카티아와르 반도인데, 이 지역은 지형적·문화적으로 라자스탄의 연장선상 위에 놓여 있는 곳이다. 이 지역들은 앞서 언급한 지역들보다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곳이다. 그러나 지형적인 이유들 때문에 다소 고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도 없지 않다.

북부인도의 펀자브와 라자스탄 동쪽은 대개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여러 강줄기들과 북쪽의 히말라야 산 기슭을 따라 펼쳐져 있다. 그 남부지대는 언덕과 수많은 단층애로 길이 끊긴 산림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빈디아 산맥을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반드레르·레와·카이무르 평원 등이 속해 있다. 중앙 인도의 구릉지대와 히말라야 산맥 사이에 갠지스 강 본류가 흐르고 있는데, 이 지역은 높은 인구밀도와 적당한 강우량 및 고도의 농업생산성을 특징으로 하는 곳이다 (→ 색인:인도 갠지스 평원).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BC 1000년경부터 쌀이 이 지역의 주식으로서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록 서쪽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만큼 뚜렷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인도는 이 북동부 지방으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 최근 들어 밝혀지고 있다.

인도사의 발아기(BC 1750년 이전)에 관한 사실들은 오로지 고고학적 증거들과 그것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하는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우리는 고고학적 자료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그것의 종합적 검토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는 선사시대(BC 2300 이전)와 인더스 문명시대(BC 2300~1750)로 나누어 기술하는 것이 통례이다.

선사시대의 인도문명

초기 선사시대

인도아대륙에서 인류가 살았던 흔적은 멀리 신석기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늘날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여러 가지 고고학적 증거들로 미루어볼 때 이 시기의 수렵인들은 오랫동안 인도대륙에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정착농경사회와도 밀접한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석기시대의 유적들은 인도아대륙의 거의 전지역에서 발견되고 있다.

서부의 발루치스탄에서 동부의 벵골에 이르는 지역 및 북부의 서북 국경지대에서 남부의 스리랑카에 이르기까지, 실로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여기서 발굴되는 유물들은 아직 과학적으로 완전하게 규명된 것은 아니지만, 인도문명의 기원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차원의 지식을 제공해주고 있음에 틀림없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시기의 공동체의 삶은 주로 사냥과 채집에 의존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소·양·물소 등의 가축을 길렀던 흔적도 보인다. 당시의 수렵인들이 사용했던 도구는 활과 화살이 대부분인데, 날카로운 돌조각을 이용한 작살이나 도끼 등도 발견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사냥뿐만 아니라 원시적인 단계의 어로도 병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인도아대륙에서는 정착농경사회가 형성되기 이전에도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던 인류의 조상들이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지들로서는 케랄라 동쪽 산기슭의 마라이유르, 구자라트의 랑나지, 라자스탄의 바고르, 마디아프라데시 인근의 모샹가바드 등이 특히 유명하다.

인더스 문명

수렵과 채집생활의 신석기 단계를 거친 인도아대륙은 점차 인더스 강 유역을 중심으로 정착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이른바 도시문명이 움트게 되는 것이다. 인더스 문명이라고 불리는 이 시기의 도시문화는 세계 4대 문명발상지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인더스 문명은 BC 4000년경 발루치스탄 고원지대에서 발달하기 시작한 농경문화가 BC 3000년경 인더스 강 유역의 범람지로 확대·발전되면서 본격적으로 꽃피기 시작한 문화이다.

인더스 강 문화는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마셜 경과 그의 동료학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아대륙에서 가장 큰 규모로 시행된 유적발굴조사 결과 이 문명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이들 발굴자들도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어떤 문명일 것이라고 막연히 추정했었다.

그러나 얼마 뒤 그런 가정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이 두 문명은 서로 그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이 밝혀졌다. 물론 이 문명의 발달과정에서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받은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 문명 자체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고유한 것이었음이 고고학적 조사결과 입증되었다.

인더스 문명의 가장 큰 특징은 정연한 도시계획에 있다 (→ 색인:인도건축). 건물들 사이는 일정한 간격을 둔 바둑판 모양의 깔끔한 모습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골목길 상하 좌우로는 벽돌의 높낮이를 조절하여 사방으로 연결되는 수로를 판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북방향으로는 성채가 다른 지역보다 다소 높게 건설되었고, 그 아래로는 시가지가 격자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칼리방가 지역을 예로 들면 거리의 너비와 모양이 규칙적일 뿐만 아니라 주요도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다. 한편 작은 골목길들은 서로 분기점을 이루면서 각각 크고 작은 블록을 형성하고 있었다. 도시의 기능과 효율성을 이미 고려하고 있었던 것인데, 새삼 이들의 도시계획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시기의 가장 일반적인 건축재료는 벽돌이었다. 구운 벽돌과 진흙 벽돌을 건축물의 사용목적에 따라 각각 구별해서 썼다. 예를 들어 제방이나 대중집회소에는 진흙벽돌을 사용했고, 목욕탕·성벽·수로 등에는 구운 벽돌을 사용했다. 이때 벽돌을 쌓는 방법은 벽돌의 가로면과 세로면을 1번씩 겹치게 하는 이른바 영국식 쌓기를 주로 이용했다. 이 벽돌 외에도 필요에 따라 목재를 사용한 흔적도 발견되고 있다.

당시의 유적지들 중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이다. 특히 모헨조다로에서는 대중 목욕탕이 발견되어 이 문명의 질적 수준과 함께 당시사람들의 일상생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해주었다. 이 목욕탕은 성채의 북쪽 중간지점에서 잘 보존된 형태로 발견되었는데, 약 83㎡ 크기의 벽돌 구조물이었다.

그 내부는 높낮이가 다른 2단의 바닥으로 설계되어 있어, 1단 높은 곳은 옷을 갈아입었던 탈의장으로 추정된다. 한편 목욕탕의 북쪽과 동쪽으로는 일단의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서쪽으로는 벽돌로 만든 약 1.5m 높이의 연단들이 보인다. 이러한 구조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지배자였던 정치권력자나 제사자들이 어떤 특수한 목적을 위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즉 이곳은 경건한 종교의식을 행하기 직전에 공동으로 몸을 닦는 일종의 성소(聖所)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색인:정화의식).

모헨조다로의 북서쪽 12km 지점에 위치한 하라파 지역 역시 모헨조다로와 거의 대동소이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하라파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유물들과 거의 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모신상(母神像)·동물상·장의(葬儀)의 풍습이 약간씩 다를 뿐이다. 특히 하라파의 유적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례와 죽음에 관한 종교적 사색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일정한 구역에 시신을 그대로 방치하여 들짐승이나 날짐승들의 먹이가 되게 한 다음, 유골만을 다시 추려 항아리 같은 용기에 담아 땅속에 매장했다 (→ 색인:묘지). 이른바 조장(鳥葬)의 풍습이다. 여기서 어렴풋이나마 생명의 환생에 대한 하라파인들의 기대심리를 엿볼 수 있다. 즉 그들은 시신을 다른 짐승들의 먹이로 베푸는 보시를 통해 영계(靈界)로의 여행을 돕는 음조(陰助)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인도인들의 종교 성향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꼽고 있는 윤회설의 원시적 형태로도 볼 수 있다. 이 두 지역 외에도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로는 칼리방가·로탈 등이 있다.

인더스 문명은 대개 BC 1750년 무렵을 전후하여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연대추정이 가능하게 된 것은 최근 과학의 발달로 방사성동위원소를 이용한 연대측정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이 방법에 따르면 인더스 문명은 BC 2300경~1750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 갑작스러운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홍수에 의한 자연재해설, 인구폭발에 따른 식량부족설, 외부의 공격에 의한 파괴설 등 여러 가지 학설이 가정 수준에서 논의되고 있을 따름이다. 그 멸망의 원인이 어디에 있든 이 인더스 문명이 그후의 인도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인도문명의 전개(BC 1750~AD 1200)

아리아인의 침입과 카스트의 정착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로 대표되던 인더스 강 유역의 문명이 몰락하면서 인도문명의 중심지는 갠지스 강 유역과 남인도의 해안지방으로 옮겨지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형태의 도시문화가 발달하게 되었다. 이 문화의 형성시기를 전후한 인도역사에서 특히 주목할 부분은 아리아인의 민족이동과 인도 정착이다. 원래 아리아인은 시베리아 남북부와 투르키스탄 등지에 살던 유목민이었다. 이들은 BC 18, 17세기경부터 서아시아와 중앙 아시아 열대를 가로지르면서 목초지를 따라 민족대이동을 시작했다. 점차 하나의 세력집단을 이루게 된 아리아인들이 인도아대륙에 이른 것은 대략 BC 15~13세기경이었다.

인도에 침입한 아리아인들은 처음에는 펀자브 지역에 정착했으나, 서서히 활동무대를 갠지스 강 유역으로 옮겼다.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정착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도에는 여러 부족의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드라비다인 등 몇몇 종족만이 확인될 뿐이다. 오늘날의 인도인들은 이 드라비다인과 아리아인의 혼혈이다. 침략자 아리아인들은 원주민과의 전쟁에서 비교적 쉽게 승리했다.

그 이유로는 첫째, 그들이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전쟁에 능했다는 점, 둘째, 문명발달 단계에 있어서 원주민들이 청동기문명 단계에 머물고 있었던 데 비해 이들은 이미 철기문명에 접어들었다는 점, 셋째, 월등한 체격조건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전쟁에서 이긴 정복민족으로서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아리아인들은 원주민을 노예화했다.

그 우월의식의 사회화가 바로 카스트 제도이다. 카스트 제도란 승려·사제 계급인 브라만(Brahman), 귀족·지배 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평민계급인 바이샤(Vaiya), 노예계급(원주민)인 수드라(Sdra)로 분류되는 신분계급이다. 이들 가운데 브라만과 크샤트리아 이외에는 거의 인격적 대우를 받을 수 없는 철저한 계급사회를 확립시켰다. 특히 수드라의 경우에는 사고팔거나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 사회통념이 형성되었다.

이러한 신분제도는 마누 법전에 명기된 이래 인도의 전통적 관습으로 굳어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도의 근대화를 가로막는 악습이 되고 있다. 브라만은 카스트의 최상위 계급으로서, 신에게 제사드리는 의식을 담당하던 사제 그룹이다. 이는 제정일치를 이상으로 삼던 고대사회에 있어서의 공통된 관습이기도 하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신의 세계를 상정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그 신의 권능에 의지하려는 습속은 아리아인들의 기본 종교관이었다. 그 신을 찬양하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법식을 집대성한 성전이 바로 〈리그베다 Rigveda〉이다.

아리아인들이 바로 오늘날 유럽 인종의 조상이다. 게르만, 앵글로색슨, 나아가 슬라브에 이르기까지 유럽을 활동무대로 삼고 있는 서양인들의 선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고 정형화시킨 사람은 비교종교학자인 막스 뮐러였다. 그는 고대의 인도언어인 산스크리트와 근대 영어를 언어학적으로 비교·분석하여 마침내 이와 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오늘날 이 학설은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고대 도시국가의 성립

펀자브 지역에서 갠지스 강 중류유역으로 진출한 아리아인들은 서서히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어가기 시작했다. BC 7세기 무렵에는 이미 상당한 세력을 가진 국가들이 나타났다. 이 시기의 국가형태는 정치학적으로 볼 때 부족연맹과 전제왕권의 중간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명목상 부족을 대표하는 왕이 있는 나라도 있었으나, 실권은 부족장회의에 있었으며, 왕은 거의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이때 번성한 나라들은 주로 갠지스 강의 동부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특히 코살라 등이 잘 알려져 있다. 그중에서도 마가다국은 5만여 부락을 지배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장 번성했던 나라로 추측된다. 또한 중부인도에 위치해 있던 비데하도 상당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특히 자나카 왕의 통치기에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다. 한편 카시 왕국은 BC 7세기까지 북부인도의 강자로 군림했으나, 그후 코살라국에 합병되었다. 따라서 북부에는 코살라, 중부에는 마가다, 남부에는 비데하 등이 BC 7세기를 전후한 인도역사의 주인공들이었다.

도시국가의 출현은 필연적으로 상호간의 정복전쟁을 야기시켰다. 이 약육강식의 쟁탈전은 BC 4세기경까지 이어진다. 이런 정복전쟁의 와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마가다 왕국의 왕 빔비사라(BC 582~554 재위)이다. 그는 한편으로는 부족장들을 누르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확장정책을 추구했다. 그는 내치의 공고화와 주변 소왕국들의 합병을 병행하면서 대제국 건설의 기반을 닦아놓았다.

이즈음 훗날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 된 고타마 싯달타에 의해 불교가 일어난다. 빔비사라의 아들 아자타샤트루(BC 554~527 재위)는 부왕의 뒤를 이어 계속되는 정복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카시·코살라·비데하 등을 차례로 정복하여 명실공히 인도아대륙의 최강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전성기의 마가다국은 서쪽으로는 야무나 강에서, 동남쪽으로는 칼링가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지배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입(BC 327~326) 때에는 난다 왕조와 더불어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다.

마우리아 제국

알렉산드로스의 인도 침입은 인도의 정치·종교·문화·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우선 특기할 만한 사실은 동서문화와 사상이 서로 교류·융합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간다라 예술이라고 불리는 독특한 조각 양식과 〈밀린다팡하 Milinda-pañha〉 같은 불전이 당시의 대표적 교류 흔적들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알렉산드로스의 침입이 인도 국민의 자각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즉 외부의 침입에 무력했던 인도인들이 이를 계기로 새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민족정신의 고양에 힘입어 인도를 통일하게 된 왕이 바로 마우리아 제국의 찬드라 굽타(BC 327~297경 재위)이다. 우선 그는 마가다 지역의 난다 왕조를 무너뜨리고, 알렉산드로스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혼란에 빠진 서북인도를 평정했다. 계속하여 그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그리스 세력을 완전히 몰아냈다.

결과적으로 그는 오늘날의 카르나타가 남부지역과 아프가니스탄의 일부를 제외한 인도의 전지역을 통일한 셈이다. 이 통일은 인도 최초의 강대국으로서 오랫동안 부를 축적해온 마가다의 경제적 기반이 큰 역할을 했다. 한편 사이슈나가 왕조 이래의 마가다국의 팽창정책이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찬드라굽타의 인도통일은 인도인의 손에 의한 최초의 통일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마우리아 왕조는 이 찬드라굽타로부터 시작된다.

마우리아 왕조는 찬드라굽타의 손자인 제3대 아소카왕(BC 273~232 재위) 때 번영의 절정기를 맞는다. 그는 데칸 동부의 칼링가를 정복하는 등 남인도의 키스트나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또 서쪽으로는 아프가니스탄 동부까지, 북쪽으로는 카슈미르 및 네팔까지도 자기 영역으로 편입시켰다. 결과적으로 인도반도의 남단부인 타밀 지역을 제외한 전인도가 그의 손아귀에 들어왔다.

이 광대한 영역은 중앙의 직할지를 비롯해 지방 총독이 관할하는 4구역으로 분할·통치되었다. 각각의 행정부처를 담당하는 다수의 관리가 임명·배치되었으며, 지방관리를 감독·통제하는 순회감사관 제도도 시행되었다. 그 최정점에 있는 왕의 권력은 실로 엄청났다. 이 아소카 왕대에 비로소 제국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즉 완비된 행정조직과 잘 정비된 도로망을 통해 중앙과 지방을 효과적으로 관리·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소카 왕은 불교의 보호와 전파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살륙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무력전쟁에 회의를 느끼고, 스스로 불법에 귀의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의 가르침을 국가 통치의 기본이념으로 삼았다. 살생금지·비폭력이라는 불교정신에 기초하여 국가를 자비로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불교의 해외전파에도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노력들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비문 또는 석주(石柱)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불교에서는 그를 전륜성왕(轉輪聖王)으로 추앙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번성하던 마우리아 제국도 아소카 왕의 사후에는 분열과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특히 여러 왕자들이 각자의 영역을 분할 통치함으로써 중앙집권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던 점, 그리고 지방마다 서로 다른 화폐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사회적·경제적으로도 통일제국의 기능을 원활하게 발휘하지 못했던 점 등을 몰락의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점들은 유능하고 강력한 군주였던 아소카 왕의 재임시에는 그런 대로 잠재되어 있었으나, 그의 죽음을 계기로 표면화될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가 제국의 몰락에까지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마우리아 왕조의 분열과 쇠퇴로 인도대륙은 다시 수많은 군소왕국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굽타 왕조

마우리아 왕조의 인도 지배가 사실상 종언을 고한 뒤에도, 통일제국을 꿈꾸는 군소 왕국들의 부침(浮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마우리아와 같은 대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역사가들은 북인도에서 일어난 굽타 왕조(320~540)를 가리켜 불완전하나마 제국의 형태를 갖추었던 나라로 평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제국의 기본 골격인 중앙집권체제가 비록 완전하지 못했으나, 그 세력권이 인도 전역에 광범위하게 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식에서가 아니라 내용면에서 굽타 왕조는 인도아대륙의 실질적 강자 노릇을 했던 것이다.

굽타 왕조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마가다 지방의 부유한 지주 가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어떤 세력가 집안이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면서 서서히 왕조 형태를 갖추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왕조는 제3대 왕인 찬드라 굽타 1세의 등극을 계기로 비로소 인도역사의 전면에 나설 수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한낱 지방 공국에 불과했다.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는 한 방편으로 그는 바이살리의 명문 귀족 리차비가(家)의 공주 쿠마라데비와의 결혼을 추진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사건이다. 왜냐하면 정통적 왕가인 리차비 왕가를 혼인동맹의 상대로 삼음으로써 상대적으로 미미한 가문이었던 굽타 왕조가 그 계급적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찬드라굽타 1세의 등극시기가 320년경이기 때문에 굽타 왕조는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마가다와 우타르프라데시의 동부지역을 지배했다.

찬드라굽타 1세는 330년에 왕권을 그의 아들 사무드라 굽타에게 넘겨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알하바드 지역에 해당하는 프라야가에 세워졌던 석주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사무드라 굽타는 델리 주변과 우타르프라데시 서쪽에 있던 4개의 소왕국을 정복했으며, 동인도와 남인도의 군소 왕국들로부터도 충성을 맹세받았다고 한다. 이는 그의 영역이 현재의 마드라스 지역인 칸치푸람의 동해안까지 확장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갠지스 강 서쪽 유역인 아리아바르타 지역의 8명의 왕도 무력으로 평정했다. 결국 그는 북인도의 전역을 합병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합병하지 못한 지역들로부터는 조공을 받아냄으로써 인도아대륙의 실질적인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명실상부하게 인도 전역에 미쳤는지는 의문이다. 비록 세력이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쿠샨 왕조를 비롯한 일부 도서지방은 그들 나름의 일정한 세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들 찬드라 굽타 2세는 할아버지인 찬드라굽타 1세의 이름을 딴 군주로 굽타 왕조의 역대 왕들 중에서도 가장 용맹스럽고 영명한 군주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375~415년의 약 40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찬드라굽타 2세의 주된 적대세력은 샤카족이었다. 이들간의 세력다툼은 388년 이후 간헐적으로 벌어졌으나, 409년을 고비로 결국 샤카족은 굽타 왕조에 병합되었다. 이것은 서북인도가 완전히 굽타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 서북 지방의 항구도시들은 일찍부터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중해 연안의 알렉산드리아와 활발한 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리고 있었으므로, 이후 굽타 왕조는 서아시아와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들과도 문화적 교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과 혼인동맹을 맺음으로써 그 지배력을 강화시켰다. 한편 찬드라굽타 2세는 문학과 예술의 후원자로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구법승 법현(法顯)이 405~411년에 인도를 여행하고 남긴 〈불국기 佛國記〉에 의하면 당시의 굽타 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훌륭한 문화수준을 간직하고 있었던 나라로 묘사되고 있다.

한 예로 찬드라굽타 2세는 산스크리트 극작가인 칼리다사를 궁정시인으로 둘 정도로 예술을 사랑하고 아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비크라마디티아(Vikramditya:'용맹의 태양')라는 칭호로 불리던 그의 또다른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번영을 누리던 굽타 왕조도 제6대 왕인 쿠마라 굽타(415~454) 때부터, 서북 변경지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헤프탈족 등의 잦은 침입으로 서서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쿠마라굽타는 이들 이민족의 침입을 성공적으로 격퇴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나, 그의 뒤를 이은 역대의 왕들은 더이상 이들의 위협으로부터 자신들의 왕국을 제대로 수호하지 못했다. 더욱이 이런 혼란을 틈타 지역 영주들이 이탈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위기도 가중되어 마침내 굽타 왕조는 역사의 뒷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후 인도아대륙은 또 다시 대규모의 민족적 이동과 정치적 혼란을 거듭하면서 여러 군소왕국들이 난립하는 시기로 접어든다. 이 때 일어난 나라들이 마우카리·푸시아부티·마이트라카 등이다. 이들간의 각축장에서 푸시아부티가(家) 하르샤 왕이 일정 기간 인도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하기도 했다. 한편 남부 인도에서는 900년경 촐라 왕조가 주도권을 잡게 되어 그후 300여 년 동안 이 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주변 소왕국들의 압박으로 그 세력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했다.

굽타 왕조는 인도 고전문화의 부흥기로 불릴만큼 문학과 예술 등 다방면에 걸쳐 많은 공헌을 했다. 특히 산스크리트로 씌어진 시와 산문이 왕실의 후원에 힘입어 활발하게 저술되었다. 이때 활약했던 칼리다사 등은 오늘날에도 자주 입에 오르내리는 당대의 최고 극작가였다. 뿐만 아니라 조각과 건축물 등의 조형물에서도 최고도의 수준에 달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나, 불행히도 당시의 건축물은 현재까지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불교의 승원(僧院 vihara)과 예배소(chaitya) 등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 이유는 8세기에 인도를 침입한 이슬람 세력의 철저한 파괴행위 때문이다. 불교와 힌두교도 이 시기에 널리 장려되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힌두교는 그 세력을 점차 인도 전역으로 확대시켜 나가지만, 불교는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슬람 시대(1200~1680)

델리 술탄국

10세기말에 접어들면서 인도대륙은 투르크와 아랍계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에 시달리다가 마침내 그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 인도를 침입하여 유린한 대표적 세력이 가즈나의 마흐무드와 그의 사후 혼란기를 틈타 가즈나를 타도, 지배하게 된 구르 왕조의 무하마드 등이다. 이들은 인도를 공격하여 단순히 경제적 이익을 탈취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다기보다는 인도대륙 전체를 그들의 지배하에 놓으려는 원대한 야망을 품었다.

이의 한 방편으로 투르크와 아랍계 아프가니스탄인들은 델리에 그들의 왕국을 건설하고, 인도인들을 그 지배하에 두었다. 델리는 갠지스 강 유역과 중부·서부 인도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이자 아프가니스탄으로 통하는 길목이기도 했다. 이때문에 투르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세력들은 번갈아가면서 델리에 왕국을 세우고 술탄(sultan:이슬람의 왕)임을 자처했는데, 이들 왕조를 델리 술탄국이라고 부른다. 이 왕조는 13세기부터 16세기 무굴제국이 들어서기까지 북인도의 역사를 주도했다.

쿠트브 웃 딘 아이바크는 이슬람교도 지배자로서는 최초로 델리에 웅대한 궁전과 모스크(이슬람 사원) 및 거대한 탑(minar)을 세웠다. 그는 북인도를 더이상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확장으로 보지 않고 델리를 수도로 하여 인도에 본격적인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이 왕조는 그 후계자들이 쿠트브 웃 딘과 마찬가지로 투르크계 궁정 노예 출신이거나 그 직계 자손들이므로 노예왕조(1206~90)라고도 불린다.

그의 아들 일투트미시는 술탄의 위치를 더욱 강화하고 불만세력이던 투르크계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대외적으로는 1220년에 인더스 강 유역의 북부 변경지방을 병합하고, 그 지역의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았다. 나아가 그는 1225년에는 벵골을, 1228년에는 신드 지방을 각각 점령했으며, 1229년에는 마침내 바그다드의 칼리프로부터 정식으로 술탄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그러나 이 왕조는 1229년부터 몽골군의 침입에 시달리다가 1241년 서부 펀자브 지방을 잃게 되자 그 위세가 꺾였다.

노예왕조에 이어 1290년경부터 인도역사에 등장하는 또다른 투르크계 세력집단이 할지 왕조이다. 이 왕조는 알라 웃 딘 치세에 이르러 세력팽창의 절정기를 맞았다. 그는 동인도와 데칸을 성공적으로 정복했을 뿐만 아니라, 1292년에는 야다바가 지배하고 있던 데바기리까지 공략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그는 남인도까지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1306년 국내문제로 몽골 세력이 북인도에서 물러나자 구자라트와 말와를 수중에 넣었다. 나아가 그는 1310년 마침내 남인도를 원정하여 여러 지역을 성공리에 공략했다. 이제 알라 웃 딘의 영향력은 지배영역에 있어서나 그 세력에 있어서 어느 술탄국 지배자들보다도 강력했다. 그러나 알라 웃 딘의 야망은 북인도의 반란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북인도의 구자라트·치투르·데바기리 등이 술탄국의 지배를 벗어나 독립을 선포했는데, 그도 1316년 죽음을 맞게 되었다.

알라 웃 딘의 사후 몇 년 동안은 계속 왕이 바뀌어 할지 왕조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때 두각을 나타낸 사람이 기야스 웃 딘 투글루크이다. 그는 1320년 술탄의 자리에 올라 투글루크 왕조를 열었다. 이 왕조도 역대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통일제국을 꿈꾸었으나, 1398년 중앙 아시아의 몽골군이 티무르의 지휘하에 인도를 다시 침입하기 시작하자 그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후 인도에서는 티무르의 위임을 받은 사이이드 왕조와 그 뒤를 이은 로디 왕조 등이 명멸을 거듭하게 되고, 각 지역의 군소왕국들이 술탄국의 세력 약화를 틈타 난립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바마니 왕조와 비자야나가르 왕조

한편 남인도에서는 그들을 정복하려는 술탄국의 원정을 여러 차례에 걸쳐 성공적으로 격퇴하는 과정에서 나름의 세력기반을 갖춘 왕조들이 나타났다. 우선 13세기말 후부터 200여 년 동안 북부 데칸을 지배한 바마니(1347~1527) 왕조가 있다. 또한 이 바마니 왕조보다 10여 년 먼저 한때 호이살라가 지배했던 남부데칸의 인도 남부에서는 비자야나가르(1336~1646) 왕국이 독립했다. 비자야나가르는 힌두 왕국으로, 1565년 1월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할 때까지 남인도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바마니와 비자야나가르의 경계선은 크리슈나 강이었다. 거의 전통이 되다시피 한 데칸과 남인도의 상호 정복전쟁은 14세기에 재개되었다. 이 영토쟁탈전은 비옥하고 광물자원이 풍부한 라이추르도아브 지역을 서로 차지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필연적인 결과였다. 거기에다 골콘다의 다이아몬드 광산도 서로 탐내는 지역이었다. 14~16세기초에 남인도 역사는 실로 이러한 투쟁과 여러 군소왕국들의 정치적 변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고려해볼 때 비자야나가르와 바마니 사이의 대립과 반목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1358년부터 시작된 라이추르도아브 쟁탈전은 그후 양국의 세력 판도에 따라 정복함으로써 남부 변경지역을 평정했으나, 동쪽의 해안국들과 오리사·와랑갈 등에 대한 지배력은 전보다 약화되었다. 나아가 비자야나가르가 고아 지방을 정복한 것은 무역을 통한 이익증대를 떠나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끝내 동부 해안지역을 장악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이 지역의 절대 강자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이유는 급변하는 남인도의 정세와 바마니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이었다.

반면 바마니 왕국은 15세기 후반부터 보다 적극적인 자세로 국내외적 정치상황에 대처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총리 마흐무드 가반이다. 그는 우선 구자라트의 도움을 받아 북부 변경지대에서 말와 세력을 축출했다. 이를 바탕으로 가반은 비자야나가르로부터 고아를 재탈환함으로써 무역활동을 통한 세입을 더욱 늘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가반이 반대파의 암살로 제거되면서, 왕국의 힘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바마니의 국력은 비자야나가르의 잦은 침입으로 더욱 약화되었다.

1538년 바마니 왕국은 마침내 비자푸르·골콘다·아메드나가르·비다르·베라르 등의 5개 나라로 분열되었다. 가반의 죽음을 계기로 바마니 왕국이 쇠잔해져 갈 즈음 비자야나가르는 상대적으로 남인도에서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특히 크리슈나 데바 라야(1509~30)의 재위시에는 그 위력이 대단했다. 그러나 이 비자야나가르도 1565년 탈리코타 전투에서 북부 데칸의 이슬람 연합군에게 패함으로써 종말을 고했다.

이후 남인도의 힌두 왕국들은 끝내 세력을 회복하지 못한 채, 남인도를 침식해 들어온 이슬람 왕들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슬람교도 세력이 제국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 바로 무굴 제국이다. 이 기간 동안 인도아대륙에서는 이슬람 문화와 힌두 문화가 서로 융합하는 현상이 일어났다. 탄생과 결혼, 그리고 죽음에 관련되는 여러 종교의식이 서로 혼합된 것은 그 한 예이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인도의 역대 왕조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무굴 제국(1526~1761)

무굴 제국의 성립과 악바르 대제

무굴 제국의 기원은 1398년 인도를 침입한 티무르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간다. 왜냐하면 그의 후예 바부르(1483~1530)가 훗날 무굴 제국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티무르가 그때부터 이미 인도아대륙을 지배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는 사이이드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 인도아대륙에 그의 영향력을 심어 놓았을 따름이다. 무굴 제국은 이 티무르의 5대손인 바부르가 여러 해 동안의 시련과 도전을 거친 끝에 비로소 그 기틀을 마련하게 된(1526) 왕조이다.

무굴 혹은 투르크계 몽골 족장인 바부르가 인도의 역사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517년 무렵이다. 그러나 바부르는 어릴 때부터 한때 그의 선조들의 땅이었던 북부인도를 회복하려는 집념에 불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야망은 사마르칸트 지역을 되찾으려는 노력들로 나타난다. 하지만 1491, 1503년 2차례에 걸친 전쟁에서 모두 패함으로써 그의 꿈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영토회복에 자신을 갖게 된 것은 1504년 아프가니스탄의 중심지 카불과 간다라를 점령하고 나서부터이다. 이를 계기로 그는 산을 가로지르는 이들 두 지역과 바다흐샨을 연결하는 지역을 그의 지배하에 두게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확보를 그 옛날 티무르의 영토였던 사마르칸트를 회복한 것에 비유할 만큼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다.

한편 바부르는 1526년 4월 로디의 마지막 술탄이었던 이브라힘과 델리 근교의 파니파트에서 접전을 벌여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던 이브라힘의 군대를 격파하고, 이들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몰아냈다 (→ 색인:파니파트 전투). 바부르는 이 승리를 발판으로 델리에서 아그라로 곧바로 진격, 스스로 인도의 파드샤(역대 무굴 왕들의 칭호)임을 내외에 선포했다.

그러나 오랜 전투와 무더위에 지친 병사들은 그들의 고향 아프가니스탄으로 되돌아 가기를 원했다. 이때가 바부르에게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나 그는 특유의 호소력으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었을 뿐만 아니라, 무굴에의 충성을 간절히 설득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지도력으로 이 위기의 순간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자 이번에는 메와르의 라나 상가가 라지푸트군을 이끌고 쳐들어왔다 (→ 색인 : 카누아 전쟁).

이때도 그는 군사력에 있어서의 열세를 결연한 의지로 극복하고, 라지푸트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의 종족분열과 무굴 기병대의 신속한 전술이 승리의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바부르는 파트나 근교의 고굴 지역에서 아프가니스탄군을 패퇴시키고 비하르 지방을 직할령으로 삼았다. 또한 벵골의 이슬람 술탄으로부터도 충성을 확인받았다. 이제 그는 서쪽의 야무나 강으로부터 바다흐샨과 카불을 거쳐 동쪽은 벵골, 남쪽은 나르마다 강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는 대제국 무굴의 초석을 닦은 동시에 그 시조가 되었다.

무굴 제국의 발판을 마련한 사람이 바부르였다면 이 왕조를 명실상부한 대제국의 위치로 끌어올린 사람은 악바르(1542~1605)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군사 책략가였다. 악바르는 자신에게 주의를 집중시키는 인간적 흡인력을 지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전략을 수립하고 결정하는 상황판단이 뛰어났으며, 나폴레옹에 버금가는 신속한 기동력도 보유하고 있었다.

그의 이런 지도력에 힘입어 무굴 제국은 1605년 그가 죽을 때까지 북인도의 전지역을 지배하게 됨으로써 데칸과 벵골 만 및 아라비아 해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한편 그는 현명하게도 여러 민족으로 구성된 제국의 백성들을 위협하여 복종하게 하기보다는 결혼정책이나 종족간의 타협을 통해 힌두의 여러 세력들을 무굴 제국의 실질적 동반자로 흡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점에서 악바르는 무굴 제국의 전성기를 연 위대한 황제이자 힌두 문화와 이슬람 문화의 실질적 융합에도 공헌한 훌륭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무굴제국의 쇠퇴

악바르 대제가 주변 세력들을 적절히 제어하고 제국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던 것은 당시의 국제정치 역학상 일종의 힘의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페르시아 세력은 중앙 아시아로부터 들어오는 유목민의 침입을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었으므로 무굴이 남인도를 제압하는데 안정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무굴은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프가니스탄 세력을 견제함으로써 페르시아가 서쪽의 오스만 투르크와 접촉하는 데 있어서의 불안요소를 상당부분 해소했다.

그러나 악바르의 사후, 무굴 제국은 자한기르(1605~27)·샤자한(1628~58)·아우랑제브(1658~1707) 등의 치세를 거치는 동안 대외적으로는 힘의 균형이 깨졌고, 대내적으로는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간의 반목이 재연되면서 분열의 조짐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마라타족의 흥기는 무굴에게 큰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이들은 마하라슈트라 지방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강인한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마라타인들은 매우 지적이고 배타적인 소수의 브라만과 다수의 농노 계층인 수드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마라타인들은 그들의 영웅 시바지(1627~80)를 중심으로 일치 단결하여 무굴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을 뿐만 아니라 세력을 고츠 산맥을 따라 서서히 남북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이후 더욱 세력을 키운 마라타족은 1738년 드디어 무굴 제국의 심장부인 델리 근교를 공격하기에 이르렀고, 말와 지방을 점령했다.

이로써 마라타 세력은 인도대륙의 한 부족국가의 위치에서 벗어나 전인도 대륙을 넘볼 수 있는 위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이렇듯 강성해진 마라타도 1761년 7월 파니파트 대평원에서 마주친 아프가니스탄 군대에 대패함으로써 더이상의 세력 확장에 제동이 걸렸다 (→ 색인:파니파트 전투). 이후 북인도는 아프가니스탄과 마라타 및 쇠퇴일로를 걷고 있던 무굴 제국 등이 일종의 힘의 공백기를 맞으면서 혼란과 분열을 거듭했다. 이 혼란의 와중에서 인도대륙을 넘보기 시작한 세력이 유럽 열강들이었다.

유럽의 팽창과 인도(1500~1858)

유럽 제국의 인도 진출(1498~1760경)

유럽은 인도에 대해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유럽이 필요로 하는 향료와 직물 및 그외의 진기한 동양상품들이 인도에서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 색인:국제무역). 즉 상업적 이익 때문에 인도는 유럽의 주요 관심대상이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향료는 특히 중요한 상품이었다. 향료는 고기의 부패를 막아주는 작용이 있어, 육류를 즐기는 유럽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와 유럽 간의 무역은 중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2가지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몽골과 투르크의 침입으로 인도와 유럽을 연결하고 있던 육로가 차단되었고, 나아가 이집트를 통과하는 해로까지 위협받게 되었던 것이다. 이당시의 국제적 긴장관계는 이슬람 세력의 타도를 위한 십자군의 원정과 향료를 독점하려는 상업적 열망을 더욱 부채질했고, 마침내 1498년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 색인:탐험의 역사). 포르투갈인들은 월등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곧 아랍 상인들을 제압하고 향료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그후 포르투갈의 천재적 영웅 아포노 알부케르케는 비자푸르의 술탄으로부터 인도의 서안지방인 고아를 탈취하여(1510) 이곳을 동방 포르투갈령의 수도로 삼았다. 결과적으로 인도대륙에 최초로 발을 들여 놓은 유럽 세력은 포르투갈인 셈이다. 하지만 얼마 뒤 포르투갈은 1세기 동안이나 대립관계에 있던 스페인에게 점령당함으로써(1580) 스페인이 포르투갈에 이어 인도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열강들이 차례로 인도에 들어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무역독점 경쟁에 나섰다. 특히 세계무역을 지배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간의 각축전은 치열했다. 그러나 7년전쟁에서의 패배에 이어 카르나티크 전쟁(1744~48, 1750~54, 1758~63) 및 플라시 전쟁(1757)에서도 프랑스가 영국군에게 대패함으로써 제국간의 식민지쟁탈전에서 약자의 위치로 전락했다.

식민지 지배의 확대

카르나티크와 벵골의 지배권 확보에 성공한 영국은 이를 발판으로 점차 인도아대륙 전체를 집어삼키려는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각 지역 세력집단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중에서도 남부인도의 마이소르는 인도의 장래에 미칠 영국의 위협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감지하고, 이에 대비한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들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꾀하는 한편, 국내외의 여러 나라와 연락을 취해 우방 확보에도 힘을 쏟았다.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군대의 근대화와 함께 내정개혁도 단행했다. 이러한 일련의 조치들은 당시의 어수선한 인도 정치상황을 고려해볼 때 극히 이례적인 참신한 개혁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이소르의 노력도 주변 국가들의 외면과 영국군의 침입(1799)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영국은 하이데라바드와 마라타와의 동맹관계로 인해 고립무원의 처지에 있던 마이소르를 간단하게 격파해버렸던 것이다 (→ 색인:마이소르 전쟁).

이때 그들의 영웅 티푸(1782~99 재위)도 세링가파탐 전투에서 진두 지휘를 하다가 전사했다. 전쟁 후 마이소르의 옛 영토는 대부분 영국과 하이데라바드 및 마라타에 분할 병합되었다. 이 보다 앞서 1798년에는 마라타의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하이데라바드도 영국과 군사보호조약을 맺음으로써 이 나라 또한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었다.

한편 북인도에서는 마라타 동맹과 시크 세력이 영국에 대항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인도 총독이었던 워런 헤이스팅스는 마라타의 위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그는 오우드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 비대해진 마라타 세력을 견제하려고 했다. 그의 이런 정책이 가시화된 것이 이른바 로힐라 전쟁(1774)이다. 1774년 영국군의 원조하에 오우드군은 로힐칸드를 무력 침공하여 이를 병합했다. 이를 계기로 오우드는 마라타와 영국 세력 사이의 완충지대 역할을 담당하면서 동시에 영국의 세력하에 놓였다.

영국이 오우드를 강화함과 동시에 이를 속국화하려 하고 있을 때, 마라타 동맹은 내부적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1772년 이후의 페슈와(Peshwa:총리) 계승문제를 둘러싼 내분은 매우 심각한 양상으로 비화되었고, 마침내 영국과 프랑스 등 외부세력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른바 제1차 마라타 전쟁(1775~82)이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은 그 성격상 유럽 열강과 토착세력 간의 충돌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시작되고 있던 마라타 동맹의 내분에 외국세력이 가세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호시탐탐 인도 국내문제에 개입할 빌미를 찾고 있던 영국측으로서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대가로 영국은 전략 요충지 살세트 섬을 얻을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라타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을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그후에도 마라타 동맹은 페슈와 후계 문제를 둘러싼 각 세력집단간의 갈등으로 또다시 영국의 개입을 불러들였고(제2차 마라타 전쟁:1802~05), 마침내 1818년 마지막 남은 홀카르가도 영국과의 군사보호조약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라타 동맹은 사실상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인더스 강 유역의 카슈미르·펀자브·신드 등도 19세기 전반에 이르러 모두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신드 병합(1843. 8)이 이루어질 때까지만 해도 유일한 독립국의 체면을 유지하고 있던 시크 왕국도 란지트 싱의 죽음을 계기로 야기된 후계자 다툼의 와중에서 영국의 재물이 되었다. 1·2차 시크 전쟁(1845~46, 1848~49)에서 내부 분열 끝에 영국군에게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인도의 거의 전지역이 영국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부터 100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영국은 거대한 인도대륙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다.

영국의 지배와 인도사회(1858~1920)

폭동과 반란(1857~59)

영국의 인도 지배가 점차 확대되어가면서 그들에 대한 반감이나 분노도 이와 비례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 색인:인도반란). 우선 종래의 기득권을 상실하게 된 왕가(王家)나 지방 세력가들의 불만이 조직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영국식 합리주의의 도입은 인도의 전통적인 관습이나 생활양식을 전근대적인 것으로 몰아붙여 인도인들의 민족적 자존심을 상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이 인도 사회 전반에 스며든 반영(反英) 분위기는 자연 발생적으로 다양한 성격의 폭동이나 반란을 야기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반란이 끊이지 않았으나 1850년대에 들어와서는 그 횟수가 더욱 빈번해지기 시작했고, 무엇인가 커다란 파국을 예고하는 듯했다. 이런 긴장된 분위기에 드디어 불을 당기는 사건이 일어났다. 용병 세포이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들은 평소 민족적 자존심이 강했을 뿐만 아니라 대우 문제 등을 둘러싸고 영국인과 충돌이 잦았었다. 1857년 5월 마침내 메루트의 세포이가 폭동을 일으켜 이 지역의 영국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로 진격했다.

델리에서는 성 안의 세포이와 시민이 성문을 열고 이들을 맞이함으로써 순식간에 반란군은 이 도시를 점령해버렸다. 그들은 명목뿐이던 무굴 황제를 다시 옹립하고 그의 통치 부활을 안팎에 선언했으며, 그의 이름으로 전국 각지에 반란 동참을 호소했다. 이렇게 하여 델리에서 독립의 횃불이 솟아오르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반란은 인도의 전지역으로 확산되어갔다.

이제 반란은 단순한 세포이의 폭동 수준을 훨씬 넘어서서 농민과 일반 시민 등 전사회계층이 참여하는 형태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특히 오우드의 러크나우와 칸푸르가 그 중심지였는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반란은 북부·중부 인도뿐만 아니라 그밖의 여러 지역으로 비화되어, 영국의 인도 지배는 바야흐로 붕괴에 직면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반란군측에도 많은 약점이 있었다. 우선 반란군은 뚜렷한 구심점이 없었고, 효과적인 전략이나 지휘체계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단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각자의 불만과 분노 때문에 모여든 감정적 집단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들을 하나의 목표 아래 결속시킬 만한 지도력이나 서로간의 유대감도 희박했었다. 이에 반해 영국측은 1857년 여름에 접어들면서 초기의 낭패감에서 벗어나 전력을 재정비하고, 이들을 진압할 구체적 행동에 들어갔다.

상대적으로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반란군은 곧 전투의 주도권을 영국군에 넘겨주지 않을 수 없었고, 9월에 들어 델리를 다시 빼앗겼다. 이때 자행된 영국군의 파괴와 학살 행위는 그 참혹함으로 유명하다. 델리에 이어 영국군은 칸푸르를 함락시켰고, 얼마 동안의 소강상태를 이용해 네팔 왕조에 원군을 요청했다. 반면 반란군측은 차츰 내부 분열에 휩싸여 내적 통일성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마침내 반란군은 1858년 3월 캠벨이 지휘하는 7만명의 영국·네팔 연합군에 속수무책으로 격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반란군의 마지막 거점이었던 러크나우마저 함락되었다.

이 반란은 식민지 지배에 의해 초래된 많은 문제점들이 이른바 연쇄반응적으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궁극적으로는 방향을 상실했고, 시대착오적인 왕정복고를 꿈꾼 측면도 없지 않았으나, 적어도 식민지 지배에 대항할 민족주의적 반항의 씨앗이 여기서부터 싹트기 시작했다는 점에서만 보더라도 이 사건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녔다.

이 반란이 수습된 후 이른바 '인도 통치법'(1858. 8)이 발효되었다. 일종의 유화정책을 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법의 시행에 따라 인도인들도 관공서의 주요직책을 맡을 수 있는 길이 열렸고, 또한 인도의 전통적인 제도나 관습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으로는 그간 악명을 떨치던 동인도회사가 문을 닫았고, 영국 국왕에 의한 직접 통치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내각에는 인도 담당 국무장관이 새로 임명되었고, 그 하부기관으로 15명으로 이루어진 인도 참사회가 구성되었다.

민족주의 운동의 대두

영국인들의 지배가 확대되고 견고해질수록, 다른 한편으로 인도인들의 민족의식도 깨어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인도인들의 국정 참여 범위를 확대시켜달라는 정도의 소박한 요구에 지나지 않았으나, 점차 종교와 사회 전반의 개혁운동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최초의 종교·사회 개혁 운동은 벵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브라마 사마지(Brahmo Samaj)이다. 일종의 종교적 결사체인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은 람모한 로이이다.

그는 벵골의 비슈누파 브라만가에서 태어난 정통 힌두교도였으나 이슬람 및 서구 사상도 공부했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아 힌두교에 일신교적 색채를 부여한 흔적이 보인다. 그는 이 운동을 통해 힌두교도의 전통적 관습 및 종교의례 등에 대해서도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유아혼(幼兒婚)의 폐지와 교육의 기회 균등, 이혼의 자유, 과부의 지위 개선 등 불합리한 사회제도 및 관습 전반에 대해 비판하고 나아가 철폐를 요구했다.

이와 함께 그는 카스트 제도의 철폐도 강력하게 주장했다. 브라마 사마지는 이후 데벤드라나트 타고르(1817~1905)와 케샤브 찬드라 센(1838~84) 등을 지도자로 받아들여 교육의 기회 개방, 병원 등 후생시설의 건립 및 그밖의 사회봉사 사업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 활동은 오늘날까지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을 정도이다. 이와 유사한 사회 개혁단체로 구자라트 출신의 다야난다 사라스바티(1824~83)가 주도한 아리아 사마지(Arya Samaj)가 있다.

그는 브라마 사마지가 그리스도교적 영향을 받았던 데 비해 고유의 힌두교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고, 각 지역을 순회하면서 인도인들의 종교 순화에 힘썼다. 아리아 사마지도 종교개혁뿐만 아니라 사회개혁, 특히 교육수준의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운동은 인도 고대문화에로의 복고적 성향 때문에 민족주의적 저항을 뒷받침하는 사상으로서 훗날 인도의 정치·사회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도 같은 경향의 운동단체로서 베단타 철학을 기초로,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사상을 접목한 라마크리슈나 선교회, 미국에서 설립되었으나 인도의 사회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신지학협회 등이 있다. 이들의 개혁운동은 종교적 배경과 그 추구하는 이념이 같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모두 종래의 화석화된 힌두교 교의와 전근대적인 사회 관습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실천되었다는 점에서 동일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들은 대부분 인도 고전사상의 재인식과 부활을 강조함으로써 인도의 일체화를 꿈꾸고 있던 도시의 중간계층이나 지식인들의 민족의식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점에서도 이들의 활동은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러한 인도인들의 각성은 그뒤 마하트마 간디(1869~1948)를 그들의 민족지도자로 맞이하게 되면서 새로운 활력과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오늘날 인도 독립의 아버지이며 국부(國父)로 전세계적인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비폭력무저항주의(ahims)는 인간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혼란기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였던 간디의 사상은 그 후계자인 네루의 평화사상으로 계승되었다.

사회적·문화적 변화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유럽열강들의 인도 진출은 경제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사회의 전분야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초래했다. 특히 그후 인도의 실질적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는 영국인들의 직접적·간접적 영향은 실로 지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인도인들의 언어나 생활관습의 변화까지도 초래할 만큼 본질적인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영국인들의 진출 거점이었던 캘커타·봄베이·마드라스 등을 중심으로 영어를 배우고 서구식 사고를 겸비한 신중간계층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교육·종교·저널리즘 및 사상에 있어서도 영국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다. 이들은 영국식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교 사상에도 접할 수 있었던 만큼 비교적 합리적인 사고를 지니고 있었다. 한편 사회제도가 근대화되고 각종 관공서·재판소·학교 등이 생겨나면서 이에 필요한 인력의 양성도 시급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다시 말해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현지 인도인들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결과 변호사·의사·교사 등의 직업에 서구식 교육을 받은 젊은 계층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물론 사회조직의 최상층부는 영국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각종 특권과 사회적 혜택을 누렸다. 차츰 인도인들도 자신들의 한계와 민족적 일체감의 필요성에 눈을 뜨게 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분명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 민족운동의 저변에는 이러한 신교육세대 및 새로운 직업계층의 인도인들 사이에 싹트기 시작한 민족적 동류의식이 크게 작용했던 것이다. 영국식 교육을 받은 이 신교육세대가 중심이 되어 훗날 반영 민족주의운동이 태동하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또한 이들 중에서 장래의 인도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실이다. 간디·네루 등의 예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인도인들은 영국으로부터 받은 사회적·문화적인 영향이 적지 않았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고유문화와 사상을 간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인도가 현대와 고대를 함께 간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도 이와 같은 인도인들의 가치관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도의 독립

영국인들은 제1차 세계대전(1914~18)에 협력하는 대가로 인도인들에게 자치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이에 자극받은 인도인들은 범국민적인 반영운동을 전개해나갔다. 그 선두에는 간디가 서 있었다. 영국제품 불매운동, 물레의 장려 등으로 상징되는 그의 무저항비폭력주의는 전인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인도인들은 조국애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색인: 아힝사, 보이콧).

이러한 간디의 민족주의운동은 본격적인 독립운동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후 영국은 강압정책을 병행하면서도 차츰 인도의 자치를 허용하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어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전인도의 연방화를 논의한 원탁회의(1930~32)와 뒤이어 공표된 1935년법 등이다. 이 법은 전인도의 연방제 지방자치의 허용 등을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연방제의 구상에 대해 인도 국민회의측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 이유는 시민적 자유와 각 지역을 대표할 책임정부 및 연방입법부의 선거방법도 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의 일방적 영토 편입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외교와 국방에 대한 권한도 주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실질적인 자치권의 확보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이 법의 시행을 둘러싸고 인도 전역에서는 소요가 끊이지 않았고, 각 정파간에도 알력이 심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국내외적 여건은 인도의 독립에 밝은 빛을 던져주기 시작했다. 우선 영국의 정권 교체와 이에 따른 정책 변화를 들 수 있다. 영국은 1945년의 선거에서 보수당이 퇴진하고 노동당이 새로 정권을 잡았다. 노동당은 여러 가지 개혁정책을 펴기 시작했고, 그 연장선상에서 인도의 독립문제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냈다. 또한 국내적으로는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족주의운동 단체들이 인도 국민회의를 중심으로 영국측에 더욱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들이 인도의 독립을 점점 재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영국의 애틀리 정부는 1947년 2월, '1948년 6월 이전에 책임 있는 인도인 단체에게 권력을 이양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이슬람교도들은 파키스탄 독립국을 요구함으로써 그들을 제외한 국민회의파 중심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 수반은 네루가 맡았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하는 이슬람교도들은 전국 각지에서 폭동을 일으켰고, 힌두교도들과의 충돌은 날이 갈수록 격화되었다. 사상자도 7,000여 명에 달했다.

결국 1947년 8월 15일 인도에는 2개의 공화국, 즉 인도공화국과 파키스탄 공화국이 동시에 탄생하게 되었다. 비록 과도기적 임시정부 형태였지만 3년후인 1950년 인도는 완전 독립했다. 한편 파키스탄은 1956년 이슬람 공화국을 선언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까지 이 두 나라는 민족적인 갈등과 종교문제로 끊임없는 분쟁에 휩싸여왔다.

1950년 1월 인도는 신헌법을 시행해 주권재민의 연방제공화국을 출범시켰다. 연이어 제1회 총선거가 소선거구제로 실시되어 국민회의파는 여당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굳혔다. 1951년 4월에는 제1차 5개년계획이 시작되어 토지개혁의 추진과 함께 공업화계획이 본격화되었다 (→ 색인:산업화). 제1차 5개년계획은 농업 면에서 큰 성과를 얻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내정 면에서 주목받는 것은 1955년 1월에 시작된 국민회의파대회에서 인도가 달성해야 할 목표로서 '사회주의형 사회'가 설정된 점이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엄밀히 논의되어야 하겠지만 사회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네루 정권은 대외적으로 비동맹외교정책을 내걸었고 중국과의 관계에서는 평화5원칙을 고수했다. 1955년 4월에 인도네시아의 반둥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회의에서 네루는 이집트의 나세르와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등과 지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독립 인도의 국가건설은,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1956)로 공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언어별 주(州) 재편성의 도입(1956)으로 하나의 전기를 맞이했다. 인도가 많은 언어와 민족으로 구성된 이상 언어별 주행정구역의 확정은 인도의 발전에 불가결한 요소였다.

독립 인도의 정치사는 1957년 제2단계를 맞이했다. 즉 제2회 총선거로 신설된 게랄라 주에서 인도공산당이 제일당이 되어 몇몇의 다른 좌익정당과 연합해 주 정부를 장악한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좌익성향의 게랄라 주정부는 1959년에 대통령중심제가 도입될 때까지 정권을 유지했으며, 국민회의파 중앙정부가 내건 정책의 혁신적 부분을 실행하려고 했다.

그러나 네루를 선두로 하는 국민회의파는 이 '좌익정권'의 타도에 전력을 기울였고 대외적으로도 티베트 문제에 대해 내정불간섭원칙을 버렸다. 1962년에 인도와 중국 국경에서 발생한 군인간 무력충돌 결과 인도군의 패배는 네루의 정치적 위신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인도의 제2차 5개년계획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 색인:중국-인도 국경분쟁). 1964년 네루의 사망은 인도의 한 시대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1967년 인도정치는 전독립 인도사에서 전환점을 맞이햇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해 제4회 총선거의 결과 종래의 연방과 여러 주를 장악한 국민회의파의 일원적 지배체제가 무너지면서 연방은 네루의 딸인 인디라 간디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주는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정부가 서벵골과 게랄라의 두 주에서 정권을 장악했다. 또한 타밀나두 주에서는 드라비다 진보연맹이 국민회의파를 누르고 주정부를 장악했다.

이에 대해 인디라 간디 총리는 강권정치를 도입함으로써 위기를 타개하고자 모색했다. 즉 인권탄압과 주 자치의 핵심을 제거하는 것이 그녀의 기본전략이며 관리의 부정부패, 인플레이션, 생활불안이 만성화하는 가운데 1975~77년 비상사태선포를 강화해 인도의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1977년 제6회 총선거 결과 독립 후 만년 여당이던 인디라 간디 총리가 이끄는 국민회의파가 처음으로 패배하고 대신 자나타(인민)당이 정권을 잡았다. 자나타당에 거는 민중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자나타당은 비상사태 이전으로 정치를 되돌린다는 의지가 약했다. 자니타당은 애초부터 당내의 권력투쟁에 시간을 허비하며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침내 1978년 인디라 간디가 정계로 복귀했고, 1980년 제7회 총선거에서 재집권했다. 기적적으로 정계로 복귀한 인디라 간디 총리는 이전처럼 강권정치를 속행했다. 1980년대 펀자브 주의 시크교도는 일제히 국민회의파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운동을 강화하고 있었다. 녹색혁명의 모범적인 주로 간주된 펀자브 주가 농업 중심의 주로 고정되어 공업투자가 보류되자 시크교도들 사이에는 카스트 신분제도의 고하를 막론하고 불만과 분노가 쌓여 있었다.

1984년 6월 시크교도 가운데 일부 과격파가 굳게 버티고 있는 시크교도 총본산에 대한 정부군의 무력진압은 같은 해 10월에 발생한 인디라 간디 총리 암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새 총리에는 그녀의 맏아들인 라지브 간디가 취임했다. 국민회의파 정권은 외국자본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내의 독점 부르주아 계급과 지주계급을 기본적인 지지세력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또다른 혁신정책이 마련되지 않아 이들은 국민회의파에서 유능한 인재가 배출되는 것을 견제하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국민회의파가 펼친 정치적 현실이 인도의 모든 정치적 현실은 아니다. 1967년 이래 인도정치의 다원적 지도와 민주화의 진행은 서벵골 주에 나타난 바와 같이 좌파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전선정부의 지속적인 정치활동으로도 확인된다. 서 벵골 주 민중의 생활향상과 민주화에 대한 확대된 요구는 인도정치에 발전과 활성화를 가져다준 계기가 되어 전인도인에게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89년에 네루 일가(인디라 간디와 그 아들 라지브 간디)의 권력독점을 종식시키고 출범한 비스와나스 싱 정권은 1990년 종교 분쟁과 계급갈등으로 인한 집권 국민전선의 붕괴로 정권을 유지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의 지지로 셰카르가 정권을 승계했으나 1991년 3월 국민회의파의 간섭과 비협조를 이유로 사임했다.

그 결과 벤카타라만 대통령이 하원을 해산했고 같은 해 5월에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총선의 선거 유세 과정에서 라지브 간디 전 총리가 남부에 갔다가 테러리스트의 총격에 의해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국민회의파는 동정표가 급증하여 과반수 의석확보에는 실패했지만 제1당의 위치를 확보했고, 1991년 6월 21일 제9대 총리에 라오 국민회의파 총재가 취임했다 (→ 색인:인도 국민회의당).

그러나 1992년 12월 6일 과격 힌두교도의 아요디아 시 소재 바브라 회교사원 파괴로 종교분쟁이 확산되었다. 이 분쟁으로 1,000여 명 이상이 사망하고 분쟁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 인접 이슬람교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S.A. Wolpert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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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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