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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7-11-24 (토)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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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1872      
[지역] 중앙아시아 (두산)
중앙아시아 Central Asia 中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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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대륙 중앙부의 광대한 지역.

I. 개관

범위는 일정하지 않으나 작게는 파미르고원을 중심으로 동(東)투르키스탄으로 불리는 중국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와 서(西)투르키스탄으로 불리는 투르크메니스탄ㆍ우즈베키스탄ㆍ타지키스탄ㆍ키르기스스탄의 4개 공화국 및 카자흐스탄 남부를 합친 지역을 가리키며, 넓게는 내외몽골(몽골과 중국의 네이멍구자치구), 중국 칭하이성[靑海省], 티베트고원(高原), 아프가니스탄까지를 포함한다. 이는 강물이 외양으로 흘러나가지 않는 내륙 아시아와도 거의 일치한다.

II. 자연

해발고도 4,000m의 파미르고원(高原)을 중심으로 동쪽으로는 빙하와 만년설에 뒤덮인 세계 최고의 히말라야ㆍ카라코람ㆍ쿤룬[崑崙]ㆍ톈산[天山]ㆍ알타이 등의 4,000∼8,000m에 이르는 산맥이 달리고 그 사이에는 티베트고원과 몽골고원, 저평한 타림분지(盆地)ㆍ차이담분지ㆍ중가리아분지와 해면하 154m의 투루판분지 등이 있다. 파미르고원 서쪽에는 힌두쿠시산맥(山脈)과 코페트산맥이 달리고, 그 북쪽으로는 저평한 투란평원(平原)이 전개된다.

카스피해(海)의 북동쪽 연안에는 흑해의 해면하 132m나 되는 곳도 있다. 극심한 건조기후가 특색으로, 타클라마칸ㆍ키질ㆍ카라 등의 모래사막, 고비사막과 같은 자갈로 이루어진 사막, 카자흐스탄초원(草原)이나 몽골초원과 같은 대초원도 있다. 아무르강(江)ㆍ시르강ㆍ일리강 등 큰 강의 수원은 주로 높은 산의 빙하나 융설수(融雪水)이다. 이 지역의 하천은 해양으로 흘러내리지 않고 말단 부분이 담수호나 함수호로 흘러들거나 사막 속에서 소실된다. 타림강(江)의 경우 사막으로 소실되지만 그 물길은 이동하는 호수로 알려진 뤄부포호[羅布泊湖:로프노르호]로 유입된다.

주민들은 주위의 여러 산지에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산기슭에 이르러 사막으로 흡수되는 지점에 살면서 이들 강물이나 지하수를 이용하여 보리나 채소를 재배하고 과수원을 운영한다. 사막 속의 섬, 즉 오아시스를 형성하며 산 중턱이나 골짜기 사이에 펼쳐진 스텝 지역에서는 유목이 생활의 기반이 된다. 이 지역의 역사는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오아시스의 주민들은 대상(隊商)에 의한 중계무역을 통하여 고립된 환경과 생산 부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목생활 역시 대상활동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III. 역사

이란에 페르시아 제국이 성립된 BC 6세기에 이미 박트리아ㆍ소그디아나코라즈미아 왕국 등이 있었으며 시르다리야 방면에는 샤카족(이란계 유목민)이 진출해 있었다. 오아시스의 주민도 이란계였는데 이들은 대상으로 활약하여 문화적으로는 이란의 유파(流派)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 인도와의 교섭으로 바라문교나 불교를 받아들여 서역 문화의 기본이 형성되었고, 점차 파미르고원 동쪽으로 파급되었다. 그 때문에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정복되어 헬레니즘 세계가 성립되자 서(西)투르키스탄뿐만 아니라 동(東)투르키스탄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동서 아시아의 교섭은 일찍이 BC 400년 무렵부터 비롯되어 그 흔적을 남겼다. BC 2세기에 이르러 한(漢) 왕조는 이 지역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무제(武帝)는 장건(張騫)을 특파하여 서쪽 지방을 시찰하게(BC 139∼BC 126) 한 뒤 적극적으로 서역무역에 진출하였다. 한나라의 관심은 시장확보를 위해 페르가나분지(大宛國)를 원정(BC 104∼BC 102)할 정도로 높아져 타림분지의 시장이나 상로(商路)를 독점할 목적으로 경쟁자인 흉노(匈奴)와 자주 싸움을 벌인 끝에 드디어 서역도호부(西域都護府)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카라샤르[焉耆]ㆍ쿠처[庫車]ㆍ카슈가르ㆍ호탄 등의 오아시스가 중국인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로프노르 지구의 누란(樓蘭:크로라이나)이나 미란은 직접 둔황[敦煌]과 연결되어 비단무역의 체제가 갖추어졌다. 이 무역로를 이어받은 소그디아나나 박트리아는 동서통상뿐만 아니라 남쪽의 아프가니스탄이나 북인도 혹은 시르다리야 이북의 유목지역에까지 대상을 왕래시켰기 때문에,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서투르키스탄에는 아시아의 십자로가 형성되었다.

중국에서의 서역무역은 한나라 이후의 동요기에도 단절되지 않았다. 오히려 둔황ㆍ량저우[凉州:武威] 등의 변경도시에서 서역무역이 성행하여 때로는 중앙정부가 무력을 행사하면서 서쪽으로 진출한 적도 있었고, 한편으로는 칭하이를 차지하였던 강(羌)이나 토욕혼(吐谷渾)의 중계무역도 뚜렷하였다.

그러나 북위(北魏)왕조가 세력을 떨쳤을 때나 남북왕조(南北王朝)를 통일한 수(隋)나라 시대, 당(唐)의 전반기에는 국력이 팽창함에 따라 정부 중심의 서역무역이 이루어졌고 실크로드(비단길)의 역사에 황금시대가 찾아들었다. 당의 서역경영은 종종 투르크 제국(돌궐)이나 신흥 티베트왕국[吐蕃]의 방해를 받기도 하였다. 특히 안사(安史)의 난 이후에는 타림분지와 단절되고 위구르탄구트ㆍ티베트의 중계에 의해 간접적으로 서역무역을 유지하는 데 불과하였다.

1. 이슬람 지배 시대

이란에 사산왕조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날 무렵부터 서투르키스탄에 에프탈족(族)이 웅비한 데 이어 이 지역은 터키 제국의 지배에 들어갔다. 여러 오아시스 국가는 그들의 정치적 지배를 받으면서도 비단무역에 열중하였다. 7세기에 들어서자 이슬람 세력이 발전하여 80년 만에 그 동쪽 경계는 파미르까지 이르렀다. 712년에는 서투르키스탄의 모든 오아시스가 그들의 지배 아래 들어갔고 사마르칸트나 부하라에도 모스크가 세워졌다.

이슬람군(軍)은 751년 탈라스강(江) 연안에서 당군(唐軍)을 격퇴한 후, 톈산 북쪽의 터키계(系) 유목세력과 대항하면서 서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를 추진하였다. 서투르키스탄에서는 사만왕조(874~999)가 강성해짐에 따라 칼리프 정권에 대하여 반발을 나타냈으나, 이 왕조가 터키계의 카라한왕조에게 멸망된 후에는 이슬람화뿐만 아니라 터키화까지 한층 더 격심해졌다.

이슬람 세력은 터키인 사이에도 침투하여 터키인이 이슬람 정권의 고용무사(雇傭武士:맘루크)가 되는 현상도 뚜렷해졌다. 이와 같이 이슬람의 종교력과 터키의 무력이 결합하여 서로 보완작용을 함으로써 터키-이슬람으로 굳어져 인도나 이란 방면으로 번져갔다. 동투르키스탄도 터키-이슬람화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이곳은 당의 세력이 물러나면서 티베트군이 장악하였으나 몽골의 위구르국(國)이 톈산 북쪽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이에 대항하였다.

그러나 840년에 위구르의 본국이 붕괴했기 때문에 그 중 일부는 톈산 지구로 이동하고 점차 유목생활을 버리고 오아시스 농경으로 전환하거나 대상으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문에 본래의 아리아계 주민은 이들에게 압도되어 동화되거나 쫓겨났고 이에 호응하듯이 이슬람화도 진행되었다.

14세기에는 카슈가르야르칸드호탄 등 분지 서부의 이슬람화가 끝나고, 그 움직임이 동쪽으로 확산되었다. 반면 동부 톈산의 남쪽 기슭에서 위구르인의 기지 구실을 하였던 투루판분지에서는 이슬람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6세기까지도 서역문화의 본래 모습이 남아 있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쳐 유행한 터키-이슬람의 대세 속에 동쪽에서 무력개입을 시작한 것은 몽골제국이었다. 위구르국(國)은 1209년에 굴복하고 타림분지는 18년에 침략당했으며, 다음해인 19년에는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정복당했다. 그 결과 중앙 아시아에는 차가타이한국(汗國)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이 몽골계의 한국(汗國)도 터키-이슬람의 대세에는 버티지 못하고 100년도 못 되어 이슬람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터키인의 대두를 누르지 못한 채 그들의 지배 밑에서 터키 문학까지 꽃피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터키-이슬람의 실력을 누르고 몽골제국의 무력을 간판으로 삼아 일어난 것이 티무르이다. 그는 1370년에 사마르칸트에 도읍을 둔 이래 타림분지를 종속시키고 서아시아 일대를 거쳐 아시아의 서반부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구축하였다. 그가 죽은 뒤에도 제국의 세력이 약화되기는 하였으나 약 100년 동안 자손들이 서투르키스탄을 통치하였다. 이 시대에 사마르칸트는 번영의 절정에 다다라 상공업과 문예의 중심지로서 명성을 떨쳤다.

2. 중앙아시아 제국의 쇠퇴

바스쿠 다 가마를 비롯한 유럽인들이 바다를 이용하여 아시아로 진출, 해상권을 장악함으로써 중앙아시아는 점차 국제관계에서 멀어지고 이러한 상황이 정치경제문화면에 반영되었다. 1500년에 티무르국(國)을 빼앗은 터키계의 우즈베크족(族)은 사마르칸트에 우즈베키스탄을 세워 시르다리야의 북쪽에 나타난 같은 계열의 카자흐스탄이나 키르키스스탄의 유목민과 맞섰다.

그러나 중앙 아시아의 국제적 지위는 이미 예전과 같지 않았으며 이웃 나라 이란에서 부흥한 페르시아 제국의 변경에 불과한 처지였다. 결국 히바부하라의 두 한국(汗國)으로 나누어지고 1710년에는 역시 같은 계열의 코칸드한국이 독립함으로써 3개 한국 시대를 맞이하였다. 파미르 동쪽의 동(東)차가타이 한국도 독립은 회복하였으나 서쪽보다 더 심하게 세력이 약화되었다.

카슈가르를 도읍으로 한 이 나라는 이 후 카슈가르한국이라 불렸으나 톈산 북쪽에서 유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유목민 오이라트족(후의 중가르왕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끊임없이 종교적 파벌싸움을 벌이는 상태였다. 그 뒤 청(淸)의 건륭제(乾隆帝)는 전성기를 맞아 중가르왕국(天山北路)과 카슈가르한국(天山南路)을 정복하였고, 1882년 이곳에 신장성[新疆省]을 설치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1821년 키르기스족을 제압한 데 이어 1875년 코칸드한국을 정복하기까지 일련의 중앙아시아 책략을 진행하였으며 그 결과 1897년에는 투르키스탄성(省)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중앙아시아는 동서 양 세력의 분할 대상으로서 식민정책 앞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말 러시아 혁명 결과 소련 정권이 성립되자 민족자치에 대한 주장이 일어나 투르키스탄에는 각각의 공화국이 모두 성립되었다.

이후 소련의 신(新)경제정책하에서 이루어진 관개운하의 조성에 따라 사막의 경지화가 추진되었다. 한편 동쪽의 신장성에서는 청조의 지배가 안정을 잃은 데다 이슬람교도의 독립운동이 잇달아 일어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으나 1949년에 중국 공산당 정부가 출현한 뒤 55년 신장웨이우얼자치구가 되었다. 91년 소련의 붕괴로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카자흐스탄이 각각 독립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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