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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12-01 (수)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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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소련 2 (한메)
소련 2

(앞에서 이음)

[정치제도]

소련은 사회주의국가였고, 모든 권력은 인민에게 속하며, 인민은 인민대표소비에트를 통해 국가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최종헌법은 소련을 <발달한 사회주의사회>로 규정하고, 국가의 성격을 <사회주의적 전 인민국가>라고 하였다. 소련은 15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으로 헌법상 대통령이 국정전반에 걸쳐 강력하고 포괄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입법권은 연방최고회의, 사법권은 연방최고법원에 귀속되어 있었다.

<헌법>은 1918년 7월 10일 러시아사회주의연방소비에트공화국헌법이 최초헌법으로 제정되었다. 1923년 7월 6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헌법(레닌헌법), 1936년 12월 5일의 스탈린헌법, 1977년 브레주네프헌법에 이어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1988년 12월 1일, 90년 3월 14일, 1990년 12월 26일의 최종헌법까지 3차례 개정되었다.

이들 헌법의 주요 개정내용은 인민대표대회 창설, 생산수단의 사유화인정, 대통령제 도입, 공산당의 권력 독점 폐지 및 다당제 허용 특히 최종헌법은 대통령 권한강화와 연방정부 기구 개편, 각 공화국간의 관계조정을 내용으로 하였다. <연방>은 15개의 공화국으로 구성된 연방국가로서 러시아·우크라이나·백러시아·우즈베크·카자흐·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리투아니아·몰다비아·라트비아·키르기스·타지크·아르메니아·투르크멘·에스토니아가 있었다.

각 공화국은 연방헌법상 탈퇴의 권리를 보장받고 있었으나, 그 절차에 따른 법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1989년부터 분리·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면서 1890년 4월 3일 연방탈퇴법이 제정·확정되었다. 연방이탈을 추진하는 각 공화국과 연방정부 사이의 갈등으로 1991년 1월 리투아니아사태가 일어났다.

<대통령>은 1990년 3월 헌법개정으로 국가원수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간접선거방식으로 인민대표대회에서 고르바초프 당서기장이 선출되었는데, 2대부터는 국민의 직접투표로 선출되며 5년 단임제였다. 주요직책에 대한 임명권과 군통수권, 조약체결권, 선전포고권, 시민권 부여 및 박탈권, 법률안거부권, 비상사태 및 계엄선포권 등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부통령과 연방위원회를 두었다.

<인민대표대회>는 1988년 12월 창설된 국가최고의결기관이었다. 지역별선거구·민족별선거구·사회조직의 3분야에서 각각 750명씩 선출하여 2250명으로 구성되었다. 주요권한은 헌법개정과 채택, 연방 대내외정책의 기본방침결정, 최고회의의장 등 국가고위직의 선출, 국민투표시행에 관한 결의 채택 등이며, 1년에 1회 소집되고 휴회중 상설기구로 최고회의를 두었다. <최고회의>는 연방회의와 민족회의 양원제이며 각 271명씩으로 구성되었다.

인민대표대회 휴회중의 법안심의와 각료임면에 관한 사항을 다루며,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3∼4개월 개최되었다. <내각>은 소련의 집행관리기관으로서 대통령에게 종속하였다. 1990년 12월 연방정부기구 개편을 통해 종전의 실질적인 최고행정기관인 연방각료회의의 권한이 축소, 조정된 기구로서 총리를 중심으로 부총리·각료·연방기관지도자로 구성되며 각 공화국 총리는 의무적으로 참가하였다. 담당업무는 재정금융통화정책과 연방예산의 책정·집행, 국방과 외교정책에 관한 업무 등이었다.

소련에는 연방최고법원, 공화국최고법원, 자치공화국최고법원, 지방·주와 자치주·자치구법원, 지구(시)의 인민재판소, 군대 내의 군법회의 등이 있었다. 연방최고법원이 최고의 재판기관이며, 각급 법원의 재판활동을 감독하는데, 법률해석권은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에 속한다. 연방최고법원의 장관·장관대리·법관·인민참심원은 5년의 임기로 연방최고회의에서 선출되며, 공화국 최고법원장은 직무상 연방최고법원의 구성원이 되었다. 군법회의의 재판관은 5년의 임기로 연방최고회의 간부회에 의하여 선출되며, 인민참심원은 2년 반의 임기로 군인집회에서 선출되었다.

<정당>은 복수정당제로의 이행에 따라 소련공산당 이외에 90년 3월 창당된 소련 최초의 야당인 자유민주당, 공산당에서 탈당한 민주강령파 개혁주의자들이 결성한 러시아공화당, 그리고 러시아사회민주당, 입헌민주당, 국민자유당, 녹색당 등 많은 정당과 정파들이 조직되었다. 소련공산당은 1952년 10월 제19차당대회에서 전연방공산당(全聯邦共産黨)에서 <소비에트연방공산당>으로 개칭되었다.

당의 최고기관으로 <당대회>가 있었고 정기대회는 5년에 1회이상, 임시대회는 중앙위원회가 소집했다. 주요임무는 ① 중앙위·중앙감사위 등 중앙기관의 보고청취·확인 ② 당강령과 규약의 재검토·개정 ③ 내외문제에 대한 당노선 결정 ④ 중앙위·중앙감사위 선출 등이다. 당대회 폐회중 당의 모든 활동을 지도하는 <중앙위원회>를 두어 실질적인 권한 행사를 담당하며 6개월마다 1회 이상 전체회의를 개최했다. 당대회에서 선출된 400명으로 서기국과 정치국원을 선출했다.

<정치국>은 중앙위 전체회의 폐회기간 중 당의 활동을 지도하는 당의 최고정책결정기관으로 사실상 국가최고권력기관의 역할을 해왔으나 제28차 당대회의 결정에 따라 각 공화국 제1서기로 구성된 일종의 정치적 협의체로 격하되었다. <서기국>은 당업무를 관장하는 최고기관으로 당간부의 인사, 당결정의 이행 등 당활동 전반을 지도했으며, 11명으로 구성되었다.

제28차당대회는 1990년 2월 당중앙위 전체회의와 3월의 인민대표대회에서 결정된 인간적·민주적 사회주의로의 전환과 공산당 일당독재 및 지도적 역할의 폐지 등을 골자로 한 새로운 당강령을 확정할 예정이었으나 보수파와 급진개혁파의 내분으로 <공산당은 정권당으로서 소련사회에 대한 정치적·윤리적 책임을 진다>는 등 당초 의도에서 크게 후퇴한 당강령이 채택되었다. 이로 인한 당내 급진개혁파의 대의원들이 대거 탈당하는 사태가 빚어졌으며, 1991년 8월의 쿠데타실패 직후 고르바초프는 자신이 맡고 있던 공산당서기장직을 사임하고 소련공산당의 실질적 해체를 선언함으로써 74년에 걸친 일당독재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

소련에서의 선거는 연방최고회의로부터 공화국 최고회의, 자치공화국 최고회의, 지방(그라이), 주(州), 자치주, 자치구, 지구(地區), 시, 시내구(市內區), 읍·면의 인민대표 소비에트(회의)에 이르기까지 비밀투표에 의한 보통·평등·직접선거에 의해 시행되었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만 18세 이상의 소련 공민에게 주어졌는데, 연방최고회의대의원의 피선거권만은 만 21세 이상이었다. 선거구는 어느 선거에서도 정원 1명의 소선거구이며, 선거 때마다 결정되었다. 입후보자는 선거운동 과정에서 1명으로 압축되며, 신임투표로 선출되었다.

[지방행정]

지방행정단위는 공화국·자치공화국·지방(크라이)·주·자치주·자치구·지구·시·시내구·읍·면이었다. 공화국은 각기 주권이 있는 나라였고, 독자적 헌법과 최고회의 및 동 간부회·각료회의·최고법원을 가졌고, 외교권도 가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와 백러시아는 국제연합에 대표를 보내고 있다. 자치공화국도 독자적 헌법과 최고회의 및 동 간부회·각료회의·최고법원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화국으로부터의 분리권은 없었다.

소련에는 1985년 1월 1일 현재 자치공화국 20, 지방 6, 주 123, 자치주 8, 자치구 10, 지구 3211, 시 2152, 시내구 641, 읍 3968, 면 4만 2176개가 있었다. 지방 이하 행정단위의 국가권력 기관은 각각의 인민대표소비에트였다. 각 소비에트는 대표 가운데서 집행위원회를 선출했는데, 그 의장이 지사·시장·읍·면장에 해당한다. 1985년 2월에 실시된 통일지방선거에서는 15공화국 최고회의에서 6728명, 20자치공화국 최고회의에서 3460명, 지방 이하의 인민대표소비에트에서는 230만 4703명의 대표가 선출되었다.

지구(시)인민재판소의 인민재판관은 5년의 임기로 보통·평등·직접선거에 의해 비밀투표로 지구(시)의 공민에 의하여 선출되며, 인민참심원은 2년 반의 임기로, 취업지 또는 거주지의 시민집회에서 공개투표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자치구로부터 공화국에 이르는 법원 또는 최고법원의 법관과 인민참심원은 5년의 임기로 당해 소비에트 또는 당해 최고회의에 의해 선출되었다.

소련에는 국가계획 수행을 통제하며 국가규율 위반이나 관료주의와 싸우면서 국가기관의 활동을 개선하는 것을 돕는 인민통제라고 하는 제도가 있었다. 이 인민통제의 초급 조직은 모든 기업·시설·관청에서 활동하는 임기 2∼3년의 인민통제 그룹이며, 이 그룹에 속하는 인민통제원은 근로자 집단 총회에서 선출되었다.

인민통제원은 근무의 여가에 무보수로 이 일에 종사했다. 인민통제 그룹은 면·읍에서도 구성되었고, 시·구 이상에는 인민통제위원회가 설치되었다. 어느 것이나 당해 소비에트에 의하여 조직되며, 임기는 당해 소비에트와 동일했다. 인민통제의 최고지도기간은 연방최고회의 양원 합동회의에서 조직되는 연방인민통제위원회였다. 인민통제 기관의 활동은 경제·사회·문화·국가관리 등에 한정되며, 재판·수사·조정(調停) 등에는 그 힘이 미치지 않았다.

소련에서는 각 기업·기관·학교에 노동조합이 조직되어 있었고, 고등·중등 전문교육기관과 직업기술학교의 학생도 조합원이었다. 각 노조는 산업별·지역별로 결집하며, 전(全)소련의 최고기관은 5년에 1회 열리는 연방노조대회였다. 대회 동안의 지도기관으로는 전 연방노조중앙평의회가 있었다. 소련의 노조는 각 레벨에서 조합원의 임금, 노동조건 결정, 사회보장 실시 등에서 커다란 영향을 행사하였다. 그 밖에 소비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연방소비조합중앙연합과 같은 조직도 있었다.

소련에서는 모든 레벨에서 당이 정책의 기본을 결정하고, 국가기관이 그것을 구체화·법제화하여 실행해 간다는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의 정치국원이 연방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나 연방각료회의 의장을 담당하고 있었으며, 당기관원과 국가기관원은 밀접한 인적 관계에 있었다. 당으로서는 당기관이 국가기관으로 뒤바뀌는 일이 없이 정치지도기관으로 일관하도록 노력하였으나, 당기관과 국가기관의 기능적 유착경향이 두드러졌다. 당의 서기장이 당해 레벨 국가기관의 최고지도자보다도 상위에 있던 소련은 당 주도형 국가였다.

[외교]

소비에트정권은 제1차세계대전중이던 1917년 11월 7일에 탄생하였다. 그것은 러시아 민중의 염전(厭戰)과 평화에 대한 소원을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소비에트정권은 발족 후 즉시 <평화포고>를 발표하고, 모든 교전국 정부와 국민에게 전쟁을 즉시 중지하고 무병합·무배상의 공정하고도 민주적인 강화를 맺자고 호소했으나, 영국·프랑스·미국·일본 등의 동맹국은 이런 호소를 무시하고 러시아를 전쟁에 머물러두게 하려고 반(反)소비에트정권파를 지지했으며 러시아에 군대를 보냈다.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등 교전상대국과 맺은 프레스토리토프스크의 강화조약은 러시아로부터 넓은 영토와 다량의 금을 빼앗는 것이었다. 소비에트정권은 내외의 적과 싸우기 위하여 전시공산주의 체제를 취하였다. 1921년 3월에 영국·소련 통상협정이 조인되고 영국이 소비에트정권을 실질적으로 승인하자, 1924년에는 이탈리아·중국·프랑스가, 1925년에는 일본도 소련을 승인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소련 승인은 1933년 11월에 가서야 이루어졌고,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이 승인된 것은 1934년 9월의 일이었다. 일본·독일은 1936년에 방공협정(防共協定)을 맺고, 1937년에는 이탈리아도 이 협정에 가담하였다. 소련은 이들 3개국에 의해 동서 양면에서 협공받는 형세가 되었는데, 1939년 8월에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그 위기에서는 벗어났다. 그러나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자, 제2차세계대전에 말려들었다.

소련은 미국·영국과 함께 일본·독일과 싸우게 되었고, 1945년 8월에 소련은 일본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전쟁은 단시일에 끝나고 제2차세계대전은 종결되었다. 소련은 소비에트정권 수립 이후부터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건설을 위한 국제적 지위확보정책을 펴 왔으나, 종전 후 공산주의 팽창정책을 표면화하면서 유럽과 아시아에서 영토를 확장시켰다.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대립하게 되어 세계는 냉전상태에 돌입하였다.

1956년 스탈린비판시기에 와서 소련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양 체제의 평화적 공존을 주장하는 평화공존정책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군사개입은 이러한 정책의 후퇴를 의미하였으며, 75년 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에서 국경에 관한 <헬싱키선언>으로 동유럽 공산주의국가들이 소련 세력권 하에 있음을 명백히 하였다. 소련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0년 폴란드의 자유노조를 중심으로 한 자유화운동에 개입했다.

이러한 소련의 세계적 힘의 전개는 또 하나의 세계적 초강대국인 미국과의 관계를 첨예하게 만들었다. 1980년대 전반에는 미국의 반소(反蘇) 십자군태세와 소련의 상시 임전 즉응태세가 서로 버티어서 미국과 소련의 핵전쟁 위험이 증대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985년 11월에 R.W.레이건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서기장 미·소 두 정상은 제네바에서 만나 미소부전(美蘇不戰)을 확인했으나,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1982년부터 계속되어온 미·소간의 전략핵무기삭감교섭(START)은 1991년 7월 모스크바에서 조인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외교정책에 있어, 군사면에서는 군비축소를 통한 동서냉전의 완화와 정치면에서는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신사고외교를 펼쳤다. 또 탈(脫)이데올로기를 추구하고, 군사보다는 경제를 우선시하는 외교정책을 추진함으로써 1991년부터는 대외원조도 대폭삭감(75%)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80년대 말부터 일어난 동유럽권의 민주화를 위한 시민혁명과 공산정권의 몰락, 연방구성공화국(발트 3국)의 독립 등과 경제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데다가 국내 보수강경파의 쿠데타 실패 사태까지 겹쳐 1991년 말에 11개 공화국으로구성된 소독립국가연합이 성립됨으로써 소련은 해체되고 말았다.

[국방 및 군사]

소련의 무장세력은 국방부에 속하는 전략로켓군·지상군·공군·방공군·해군의 5개군, 후방지원대, 민간방위대, 국가보안위원회(KGB)에 속하는 국경경비대, 내무부에 속하는 보안군으로 구성되었다. 소련 영토는 16개 군관구로 나뉘었으며, 해군은 북양·발트해·흑해·태평양의 4개 함대와 카스피 소함대, 레닌그라드해군구(海軍區)를 보유하였다. 소련군은 완전히 당의 지도하에 놓여 있었고, 군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군의 최고통수권은 소련최고회의 간부회가 조직하는 국방회의와 최고회의 간부회가 임명하는 최고사령부에 있었는데, 국방회의의장과 최고사령관은 대통령이 겸임하였다. 국방회의와 최고사령부 구성을 보면, 국방회의에는 대통령 외에 각료회의의장·국방장관·참모총장·국가안보위원회의장·국가계획위원회의장 및 그 밖의 관계요직으로 되어 있었고, 최고사령부는 국방장관·정치총국장·국방제일차관·5군총사령관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국방장관 이하 각급 지휘관은 당원이었으며, 그 밖에 당중앙위원회 군사부의 자격을 지니는 소비에트 육·해군 정치총국과 그 하부조직인 정치국·정치부가 군대 안에 설치되었고, 정치국장·정치부장이 정치담당 지휘관 대리로서 정치지도를 맡았다. 국방부에는 참여회(參與會), 5개 군과 군관구에는 군사위원회가 있었으며, 정치총국장·정치국장은 그 구성원이었다. 국방장관 이하 지휘관은 중요문제를 결정할 때에는 이들 구성체의 의견을 수렴해야 하였다.

소련에서는 1945년의 제2차세계대전 종결 후, 미국의 핵독점을 깨뜨리는 노력으로 기울어, 1949년에 최초의 원자폭탄 제조에 성공하였다. 1953년에는 세계 최초로 수소폭탄을 완성하였고, 1957년에는 미국보다 먼저 인공위성을 쏘아올렸고 대륙간탄도탄(ICBM) 발사 실험도 하였다. 핵미사일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소련의 군사 전략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서 1959년 12월에는 전략로켓군이 창설되었다.

1960년 1월의 소련최고회의에서 흐루시초프 당 제1서기 겸 수상은, 핵미사일무기의 출현으로 전쟁의 형태가 바뀜으로써 한 나라의 국방력은 군대의 숫자가 아니라 핵미사일무기의 수에 따라서 결정되며, 그런 점에서는 소련이 미국을 웃돌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련이 미국보다 뒤떨어져 있음이 1962년 10월의 쿠바위기 때에 명백해졌다. 소련은 1960년대 후반 이후 핵미사일무기 증산에 힘써, 1969년에는 ICBM수에서 미국을 따라 잡았다.

1972년 5월에 조인된 전략무기제한협정(SALTI)은 ICBM 보유수를 미국 1054, 소련 1618로 제한하였다. 미국의 질을 소련의 양으로써 보충하고 균형을 유지하자는 것이었다. 1979년 6월에 조인된 SALTⅡ는 ICBM·잠수함발사탄도탄(SLBM)·전략폭격기·공대지탄도탄총수를 미국·소련 쌍방 모두 2400으로 제한했으며, 1981년 1월 1일 이후는 이를 2250으로 삭감하자는 것이었다. SALTⅡ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소련의 군사 개입에 항의하여 미국이 비준하지 않았는데, SALTⅡ과 SALTⅡ는 미국·소련 쌍방이 힘의 균형을 인정하고, 그로써 평화를 유지하자는 견해를 갖고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2년부터 계속되던 미·소간의 전략핵무기삭감교섭은 1991년 7월 모스크바에서 조인하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계속 증가해 오던 국방비 지출을 감소시키는 등 군비축소정책을 실시하였다. 특히 1990년 6월 향후 10년에 걸쳐 소련군을 공격형에서 방위형으로 전환하고 양보다는 질을 우선시하는 근본적 계획을 천명하였다.

1단계로(1990∼94년)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몽골·독일 등에 주둔한 소련군을 완전 철수시키고, 2단계로(1994∼95년) 새로운 전략배치군을 편성하고 중앙사령부 구조개편, 3단계로(1996년∼2000년) 전략공격무기를 50% 감축하고 병력을 300만∼320만으로 줄이는 등의 3단계 10개년개혁안을 발표하였는데, 1991년 말에 소독립국가연합이 성립됨으로써 해체된 소련의 국방 및 군사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소련의 군사체제는 의무병역제로 징병기간은 지상군·방공군·공군이 2년, 해군·국경경비대는 3년이었다. 전체에 대한 군통수권은 대통령권한이었다. 총병력은 398만 8000명, 예비군 560만 2000명이었다(1990). 이 밖에 KGB 소속 국경경비대 23만 명, 내무부보안군 병력 25만 명 등 48만 명과 건설·철도대원 49만 명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990년 1월까지 ICBM 1398기, SLBM 924기 등 1만 발의 탄두와 전략폭격기 162대 등의 핵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국방비는 군축협상과 냉전완화 등으로 1990년도 국방비가 1989년보다 8.17%가 줄어든 1224억 5000만 달러로 편성된 데 이어 1991년 국방비도 1990년도보다 8%가 적게 편성되었다.

[경제·산업]

1990년 3월의 헌법개정으로 생산수단의 사유화를 인정하기 이전까지는 국유화를 기초로 한 중앙집권적 성격의 계획경제를 영위하여 왔다. 러시아혁명 후 토지와 중요산업을 국유화하였으며, 1920년대와 네프(NEP;신경제정책)로 대폭적 시장경제 방임 후 1930년대에는 사회주의체제의 계획경제를 체계화·제도화하는 이른바 5개년계획을 진행해 왔다. 소련의 국민경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것은 1935∼36년경이며, 그 이전의 과도기상태는 막을 내리고, 소련의 국민경제는 사회주의화하였다.

1928년부터 시작된 5개년계획은 실질적으로 1980년까지 실시되었으며, 생산·건설·운수·통신·상업·재정·금융·무역 등 경제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었다. 이러한 계획경제는 중요관리자 인사의 임명제, 재정·금융의 완전한 일체화, 기계·자재 등 생산수단의 비시장화(배급제)·통제가격 등 행정적 가격결정제, 화폐경제보다도 현물경제를 중요시하는 점 및 기업장단독책임제와 노동조합 복지활동에 대한 제한, 직종별 임금 제도화 등을 특징으로 하였다.

이에 대해 인사면의 민주주의의 결핍, 기업의 독창성 결여, 가격의 비탄력성에 따른 수급불균형, 특히 고급소비재 부족, 개발투자에 대한 자극 부족, 직종계층화·학력화 등의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1985년 이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에 따라 경제체제도 시장경제로의 이행을 추진하여 이전의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무너졌다.

1989년 4월 농업개혁의 핵심이 되는 <토지임대법>을 확정·실시하게 되었으며, 1990년 2월에는 토지의 종신보유 및 상속을 허용하는 개정안이 통과되었고, 3월에는 사실상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인정하는 <소유권법>을 채택하였다. 6월에는 국영·집단·협동조합식 기업, 개인기업이 모두 동등한 조건하에서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기업법>이 제정되었고, 8월부터는 종업원 200명 이하 소기업의 설립이 자유화되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만성적인 소비재부족과 생산성저하 등으로 소련의 경제사정은 더욱 악화되었고, 1985년 이후 지속되어 온 저유가 등으로 재정적자(1990년현재 1030억 달러)와 그에 따른 부채(유럽공동체, 480억 달러)도 엄청났다. 이에 1989년 12월 유럽공동체(EC)와 경제협력협정을 체결하고, 1990년 4월 미국과 무역관계 정상화에 합의함으로써 외국으로부터의 원조와 차관으로 경제위기를 극복하려 했으나, 동유럽권의 민주화와 연방구성 공화국의 독립 등으로 1991년 말 11개공화국으로 소독립국가연합이 구성됨으로써 소연방은 해체되었다.

<자원·에너지>

소련의 잠재적 에너지 자원량은 표준연료로 환산하여 6조 2010억t에 이르렀다. 소련의 주요 에너지자원이던 석탄의 총매장량은 8조 7000억t에 달하며, 주요 탄전으로는 서쪽의 도네츠와 모스크바 주변, 동쪽의 쿠즈네츠크 등이 있었다. 석유와 가스를 함유하는 것으로 보이는 토지면적은 1100만 ㎞橈로 영토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였으며, 주요 유전지대로는 소련 원유생산량의 약 60%를 차지하는 볼가우랄유전지대, 서시베리아 저지유전지대 등이 산재하며, 천연가스는 북부 카프카스·우크라이나·볼가유역 등에 집중되어 있었다.

소련의 수력자원은 3조 7000억 ㎾·h로서 세계의 11%를 차지하며, 원자력발전 설비용량은 세계 제3위였다. 하지만 이 거대한 에너지자원의 지리적 분포가 불균등하여, 잠재적 에너지 자원량의 90%는 우랄 동쪽의 여러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 중에서도 시베리아에 60%가 집중되어 있었는 데 반하여 대도시가 있는 우랄 서쪽지역이 연료·전력의 80%를 소비하고 있었다. 대도시의 에너지 소비를 위해 파이프라인·송전선을 설치하여 우랄 서쪽으로 공급함으로써 부족난을 해결했었다.

그 밖에 철광석·망간·크롬·티탄·알루미늄원료·구리·납·아연·니켈 등 광물자원의 매장량도 세계적이다. 소련의 동부지역들, 특히 시베리아와 극동에 다양한 광물자원이 매장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자연조건이 나쁜 미개발 지역이었다.

<공업>

에너지·연료공업 등에서의 소련의 생산력 수준은 미국에 비해 약간만 뒤질 뿐이었고, 다른 선진공업국에 비한다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있었다. 이 에너지에 뒷받침된 소련의 공업생산량도 엄청난 규모로 성장하였다. 강철 생산량은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위이었으며, 철광석은 동부 의존도가 높았으나 단연 우세한 형편이었다. 화학비료·시멘트·목재·트랙터 등에서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근래에 와서는 특히 기계·금속가공 등에서의 자동화 추진, 공작기계제작기 개선, 대형 덤프카 등 생산재 부문의 발전은 뚜렷하게 나타났었다.

화학섬유·면직물·피혁과 같은 소비재 생산량도 통계적으로 본다면 세계적 수준이었지만, 그 수요를 감안한다면 매우 부족한 상태였다. 대체로 생산재에 강하고 소비재에 약한 소련공업이었지만, 근래에는 이러한 불균형을 메우려고 서방측 기술도입이 진행되었고, 최근에는 개혁과 개방정책을 통해 해결하려 하였으나 91년 말 소련이 해체됨으로써 그러한 과제는 러시아연방을 중심으로 한 소독립국가연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기술>

마르크스·레닌 이후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이념으로 한 소련은 과학·기술 발전에 힘을 쏟아왔다. 매년 나왔던 《소비에트연방 국민경제통계집》도 <과학·기술진보>에는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였으며, 1940년에 1만 명도 채 되지 않던 <과학노동자>가 84년에는 150만 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세계의 전체 과학노동자의 1/4에 해당했던 것이다. 원자력·우주개발·물리·수학·생화학 등에서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이러한 과학발전을 위한 재정투자도 연간 150억 루블(1971∼75평균)에서 250억 루블(1981∼84평균)로 급증하였다.

기계화와 자동화·로봇화·컴퓨터화도 함께 추진되었다. 원자력발전소와 유인우주비행 분야에서 소련은 세계에서 선두주자였고, 군사기술과 산업분야의 대형·중기계에 관한 기술도 세계적 수준이었다. 그러나 최근의 세계적인 <경(輕)·박(薄)·단(短)·소(小)>화와 <첨단기술>면에서는 서방측에 수년 또는 십수년의 차이로 뒤져 있었다. 산업에서도 경공업이나 소비재공업에서의 기술에 관해서는 소련도 그 낙후성을 의식하고 있었다.

기술개발은 원칙적으로 중앙집권적이며 전문화되어 있었으므로 나름대로 장점도 있었지만, 기업수준으로의 보급, 창작개발에 대한 자극이 부족하다는 점과, 또한 가격면에서의 자극(특별초과 이윤과 같은 형태의)이 적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소련의 과학자들이 양적·질적인 면에서 뛰어났더라도, 이를 떠받치는 층이 너무 미약했고, 1970년대 중반에서는 국민경제 취업자의 3할이 초등교육 이하였으며, 중등·고등교육을 받은 노동자의 비율은 <미국의 1950년대 초 수준>이라고 소련 내에서 평가했듯이 중·하급의 과학기술자 층에 문제가 컸다. 체르노빌원자력발전소 사고도 이러한 중·하층 기술자 문제가 큰 요인으로 지적되었다.

<재정·금융>

소비에트연방 재정세입의 주류를 이룬 것은 거래세와 이윤공제이며, 그 밖에 개인소득세 등이 있었다. 거래세는 상품이 판매될 때 과세되는 세금이며, 주로 소비재에 부과되었다. 이윤공제는 국영기업의 이윤에서 국고에 납입되는 것을 말한다. 세입 중 이윤공제가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경제개혁의 일환으로 기업의 자주성 강화를 내세우면서 이윤 중 재정으로 공제되어 나갈 부분이 감소되는 현상을 가져왔다.

세입예산의 가장 많은 지출부문이 국민경제비였다. 이는 중요산업의 대부분이 국영기업이어서, 그 창설·확장 자금이나 경영자금의 대부분이 국가예산을 통하여 거의 독점적으로 공급되기 때문이었다. 금융기관으로는 4개의 은행(국립중앙은행·외국무역은행·투자은행·국가저금국)이 있었고, 이들 은행은 재정과 연계됨으로써 집권적인 자금배분의 기관화한 면이 강했다. 이러한 재정·금융부문에서도 개혁이 추진되어 1990년 10월 100% 외국자본으로 기업을 설립하는 것을 허용하는 외국인투자에 관한 대통령령을 공포하였다.

소련국립은행은 11월 1일부터 루블화를 66% 평가절하, 상거래환율을 미화 1달러당 1.8루불로 바꾸었다. 그러나 종식환율은 종전대로 미화 1달러당 0.6루블을 유지시켰다. 또한 11월에는 모스크바에 소련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어 시장경제전환으로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12월에는 소련중앙은행을 정부에서 독립된 기관으로 설립하는 중앙은행법이 제정되고, 또한 각종 물품의 판매 때 5%의 세금을 부과하는 부가가치세(판매세)제도가 도입되기도 하였다.

<농업>

소련의 국민경제 가운데서 농업의 비중은 점차 감소했지만 농업문제는 여전히 컸다. 네프(NEP)기의 소농을 중심으로 한 체제는 1930년의 전면적·강제적 집단화 이후 집단농장체제로 바뀌었고, 스탈린비판기에도 근본적 비판이 없이 흐루시초프 농정(1953∼64), 브레주네프 농정(1965∼82)을 거쳐 정착되었다.

흐루시초프 농정은 집단농장군(群)에 대한 정치상의 거점이기도 했던 MTS(기계·트랙터·스테이션)해체, 카자흐공화국 등에서의 처녀지개척, 콜호스(협동조합농장)의 통합 강화, 소프호스(국영농장)화의 추진, 농산물매입가격인상 등의 의욕적 정책을 펴 나갔다. 브레주네프 농정도 이러한 정책을 그대로 추진하여 콜호스·소프호스는 집단농장과 대등한 사회화경영의 담당자가 되었다. 여기에 개인부업 경영이 추가되어 소련 농업경영의 3대 유형이 형성되었다.

<상품화>된 농산물 가운데 개인부업의 비중은 축산·야채·감자 등을 중심으로 조금씩 커 나갔다. 농업에 대한 자본투자는 원래는 거의 콜호스가 스스로 했지만, 1980년대에 와서는 국가투자분 비중이 높아져, 그것이 전체의 약 2/3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소프호스화, 즉 국영농장의 비중증대는 인사면·계획면에서의 국가의 전면적 장악을 가능케 했다고는 하지만, 원래 적자투성이었던 경영으로 인해 국가재정부담을 증가시켰다.

콜호스도 통합을 거듭하면서 관리에 있어서 국영농장과 큰 차이가 없어져, 전체로서 <농업의 국유화>라 부를 만한 상태가 되었다. 농산물 생산량은 5개년 평균으로 본다면, 제10차5개년계획까지는 계속 신장되어 오다가, 제11차(1981∼85)에서는 2억t 이하로 떨어졌다. 생산성저하에 따라 식량난이 심각해지면서, 1985년 고르바초프 정권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으로 농업개혁이 시작되었다.

1989년 4월의 <토지임대법> 제정, 1990년 2월 <토지법> 개정안이 통과되면서 국영집단농장의 토지와 농민의 농사용 토지를 종신보유 및 상속을 허용하는 일대 전환이 실시되면서, 개인의 사적소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주요 농산물은 밀·호밀·보리·귀리·사탕무 등이었고, 이들 생산량은 세계 제1위이었다. 공업원료의 확보를 위해 공업용 작물생산을 장려하였으며, 특히 중앙아시아의 면화생산량은 세계에서 가장 많았다.

[사회]

소련사회는 현대사회주의 여러 나라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사회구조의 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또한 유럽과 아시아의 중간영역에 살았던 슬라브계 민족들의 전통적인 사회생활로 다른 사회와는 다른 구조와 제도를 이루었다.

<생활>

제2차세계대전 직후까지 소련의 식량사정은 상당히 나쁜 편이었다. 그러나 1947년에는 배급제가 폐지되고, 물가인하가 단행되면서 80년대까지 식량사정, 식료품 가격은 호전된 상태가 되었으나 집단농장·국영농장의 적자경영으로 다시 악화되었다. 1953년부터 축산물의 증산정책이 채택되었으며, 고기와 유제품의 증가에 의해 국민영양의 질적 개선이 계속 추진되었다.

한편으로는 개인소득의 증대와 소비물자의 증산을 꾀하여 개인적 소비를 늘리고 국민생활 수준을 올리며, 사회적 소비시설(공원·병원·학교·가스시설 등)을 증대 완비하여 이를 무료 또는 값싼 사용료로 국민에게 이용하게 함으로써 국민 전체의 일반적 복지를 증대시키고 국민생활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노력하였다. 도시는 행정적으로 인구유입을 제한하였으나, 인구유입은 사실상 많았고, 주택사정도 심각했다. 공동주택에서도 셋방이 많았다.

주택도 기본적으로는 사유재산이 아니었으므로 값싼 임대료를 지불하면 되었으며, 상품이 되지 않았으므로 <교환>만 되는 셈이었는데, 최근에는 분양방식도 인기를 얻었다. 계약금은 비싸지만 방의 배치에 대하여 주문할 수 있으며, 사실상의 상속도 가능했다. 교육비나 문화비는 싼 편이었다. 다만 교육에서 하숙 등의 부대비용은 무시할 수 없었으며, 문화에 관해서는 이른바 레저산업이 소련의 경우 거의 없다는 점에 특징이 있었다.

선정적이고 풍기문란한 산업은 말할 나위도 없고, 서양식 술집인 <바> <카바레>, <슬롯머신(자동도박기)> <마장> <프로스포츠>, 그리고 다방마저도 표면상으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으며 (숨겨진 사회 뒷면에는 약간 있었으나), 문자 그대로 <노동자·농민>의 나라라는 느낌이 들었고, 제도상으로는 건전하게 보이는 사회였다.

<민족>

소련에는 100 이상이나 되는 민족이 있었으며, 《국민경제통계집》에 실렸던 대분류만으로도 60여 민족이 있었고, 소분류까지 넣는다면 90여 민족이나 되었다. 1989년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소련 인구 2억 8574만 중 러시아인이 1억 4516만으로 50.8%나 차지하고 있었고, 우크라이나인 4418만, 우즈베크인 1670만, 백러시아인 1004만, 카자흐인 814만, 타타르인 665만으로 되어 있다. 투르크멘인과 독일인도 각각 273만, 204만이 있었다.

민족간의 표면적인 차별문제는 없으나, 민족문제는 여러 가지로 존재했었다. 최다수를 차지하는 러시아인은 소비에트사회의 엘리트라 하여, 이른바 민족공화국 안에서도 그 나라의 얼굴인 제1서기는 그 민족공화국 출신이지만 실권은 제2서기의 직위를 차지하는 러시아인이 쥐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2서기는, 1977년 러시아 이외의 14개 공화국 중 12개 공화국에서 러시아인이었다. 소련 사회학자들의 여러 조사에 의해서도 밝혀졌듯이 고수준의 정신노동에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러시아인이 유리했다. 특히 각 공화국의 수도는 러시아어와 러시아인이 지배적이었으므로, 그 민족 출신의 사회참여가 미약했다.

그러나 인구증가율은 러시아인이 저하되는 반면에 다른 민족공화국에서는 상당히 높았다. 80년도의 인구 자연증가율은 러시아연방공화국에서는 1000명에 대하여 4.9명이었으나, 발트3국과 우크라이나공화국 등을 제외한 다른 민족공화국은 이를 훨씬 웃돌아, 타지크 29명, 우즈베그 26.4명, 투르크멘 26.0명, 키르기스 21.2명, 아제르바이잔 18.2명, 아르메니아 17.2명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민족의 경우, 러시아혁명 때에 격렬한 민족독립운동과 독자적 농민운동 등이 있었던 것을 러시아인이 중심이 된 적군(赤軍)이 원정·정복했다는 불행한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뿌리깊은 반볼셰비키감정이 남아 있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자주 교육기관이라든지 공용어 사용문제에서의 분쟁과 경제개혁기의 공화국 자주결정 권한강화 등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

발트3국은 1940년에 소비에트연방에 편입되었으므로 비교적 역사가 짧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종교적 사정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민족문제로는 큰 비중을 차지하였으며, 그것은 발트3국이 1991년 말의 소독립국가연합의 발족 이전에 독립한 것으로도 잘 알 수가 있다. 또한 크림타타르처럼 스탈린시대에 강제이주를 당한 민족도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시 교외에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인이 마찬가지로 강제이주를 당하여 오늘날까지도 살고 있다.

서유럽과 마찬가지로 소련도 유대인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혁명 후 소련사회는 일종의 능력주의 사회였고, 유대인은 능력을 크게 발휘하여 <과학노동> 등 고자격 숙련분야 쪽으로의 진출이 뚜렷했다. 그런 만큼 다른 민족으로부터의 반발도 드셌으며, 분야에 따라서는 입시·취직에서의 차별이 심각한 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종교>

민족문제와 함께 소비에트사회에서 문제되어온 것이 종교였다. 혁명 전 압도적 다수가 믿어온 러시아정교를 정부가 직접 탄압하고, 많은 이슬람교 사원을 파괴하였다. 1930년대에는 교육과 선전을 통하여 종교의 영향력을 배제하면서 종교의식(부활절 등)을 묵인하는 방침으로 전환하였다. 제2차세계대전을 계기로 맺은 화친약정을 시작으로 러시아정교회는 국방헌금, 러시아 애국주의의 선전 등에 협력하는 등 우호관계를 지속시켜 왔으며 이슬람교도 이와 비슷한 형태를 취하면서 정부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동유럽의 민주화와 소련의 자유화 기운에 따라 밀려온 종교신앙의 자유 물결로 1990년 10월 포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양심과 종교단체의 자유에 관한 법>이 발효되면서, 고르바초프 집권 이후 비공식적으로 허용되어 온 종교의 자유가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1991년 9월에 독립한 발트3국도 종교문제(가톨릭교와 루터파 프로테스탄트)가 독립의 주요원인 가운데 하나였다. 러시아정교(3000만 명)와 이슬람교(2000만 명)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그 밖에 로마가톨릭·프로테스탄트·불교 등 40여 종의 종교가 있었다.

<세대>

서방측에도 어느 정도 공통되는 시각이지만, 세대의 차이는 혁명이념국가인 만큼 강하였다. 즉, 구세대는 스탈린시대에 청춘을 보낸 경직된 이데올로기세대이며, 청년층 가운데에는 전무파(戰無派)가 압도적이었다. 국방부의 캠페인은 끊임없이 실행되었고, 거기에다 무엇보다도 징병제가 있었기 때문에 세대의 격차는 더욱 심해갔다. 예컨대 도시의 젊은이는 경음악·재즈에 대한 선호성이 강하고, 독서도 노년이나 중년세대의 <전쟁물>보다 <탐험물> <연애물>로 기울었다.

<언어>

소비에트사회에 나타난 균열을 하나로 묶고 통합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실시된 것으로 러시아어의 보급을 들 수 있다. 1980년대의 발표에 따르면 <소비에트 인민의 형제적 우애와 통일 강화를 위해서는 러시아어가 중요한 역할을 다하고 있다. 1979년 조사에서 러시아어를 모어라고 표시한 사람은 1억 5350만이었는데, 그 중에서 1억 3740만이 러시아인이었고, 1630만이 다른 민족이었다.

이 밖에 6130만이 제2언어로서 러시아어를 자유로이 구사할 수가 있다고 대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젊은 세대일수록 러시아어가 잘 보급되어 있고, 러시아문화 수용도는 민족문화를 고집하는 구세대보다 컸다. 18세부터 2∼3년간을 보내는 징병제 군대의 군사용어가 러시아어라는 사실도 러시아어 보급에 위력을 발휘하였다.

<매스커뮤니케이션>

신문은 프라우다(당기관지, 600만∼800만 부), 이즈베스티야(정부기관지), 크라스나야 즈베즈다(국방부기관지),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공산청년동맹기관지), 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작가동맹기관지) 등 1990년 1월까지 8100여 종이 있었다. 소련최고회의는 90년 6월 언론출판의 자유와 검열폐지, 취재권리의 보호 등을 규정한 <신문법>을 채택, 소련에서의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을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통신사로는 타스(1925년 창설)와 노보스티(1961년 창설)의 2대 통신 이외에 고르바초프의 90년 7월 방송장악종식을 선언하는 대통령령의 발표 뒤에 설립된 인테르팍스통신, 발트3국의 엘타 등이 있었다. 타스통신사는 국영으로 운영되는 중앙보도기관지였으며, 노보스티는 저널리스트동맹과 작가동맹의 대표가 운영하고 있었다. 방송은 1990년 1월까지 텔레비전방송국 120개, 라디오방송국 200개, 지방방송시설 5000여 개가 있었고, 텔레비전수상기는 1억 대로 추산되었다. 잡지는 5200여 종으로 연간 37억 부가 발행되었다.

<교육>

소련에서 교육개혁을 위한 노력은 브레주네프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1984년 4월 당중앙위·각료회의의 결정에 따라 <보통교육학교 및 직업학교 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입법조치가 실시되었다. 제27차 당대회(1986년 2∼3월)의 고르바초프 서기장 연설에서도 <한 가지 방침의 일관된 교육체제 창설> <보통교육학교 및 직업학교 개혁> 등이 강조되었다. 개혁은 1986년 9월부터 실시하고, 1990년까지 매년 110억 루블의 재정지출 증가라는 예산조치도 따랐으나 1991년 말의 소련해체로 그 계속적인 추진 여부는 불투명해졌다.

소련에서는 교육체계야말로 사람들을 각 분야에서의 직종위계(職種位階)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서열>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시되고 있는 점에 이 사회의 특징이 잘 나타났다. 의무교육기간은 11년이었고, 교육비는 무료였다. 특히 정치·기술교육에 중점을 두었으며, 고등교육기관으로는 종합대학(5년제)과 단과대학(4∼6년)이 있었다. 대학 등 교육기관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필수과목으로 지정, 의무적으로 배우도록 해왔으나 1990년 2월 신학기부터 이를 필수에서 제외하고 대학 졸업시에 치르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시험도 폐지했다.

[문화]

소비에트의 문화라는 개념은 언뜻 보아 매우 명쾌한 것처럼 보이나, 그 내부의 실정은 상당히 복잡하다. 그도 그럴 것이 소비에트라는 명칭은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의 약칭이므로, 15개 공화국으로 성립되는 연방의 지도적 입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러시아연방공화국이고, 소비에트라고 칭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러시아와 그리 다를 것이 없는 해석습관이 관행처럼 되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그것은 서로 다르다 하겠으나, 문화라 하는 점에서는 그것을 허용하는 측면도 없지 않다. 가령 보통 소비에트의 문화가 15개 공화국 각각의 문화를 종합한 것이라는 견해보다는, 혁명 후의 러시아문화라는 해석습관이 강한 것도 사실이었다.

실제로 혁명 전의 러시아제국도 오늘날 소비에트연방 각 공화국의 대부분을 그 지배하에 두고 있었으며, 그들 지방의 문화를 전혀 반영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따라서, 소비에트문화를 말할 때에는 우선 전통적 러시아문화에 대하여 말함은 당연할 것이다. 러시아문화를 생각할 때 우선 무엇보다도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 독특한 풍토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누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은 광대한 자연일 것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평선의 경치, 울창한 나무숲, 유유히 흐르는 큰 강, 또는 혹독한 자연 등, 이러한 자연환경이 러시아인에게 미친 유형무형의 영향은 러시아문화에 진하게 반영되어 있다. 겉보기에는 둔중하게 보이는 국민성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격렬하게 타오르고 매우 적극적인 행동으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이른바 러시아이원론이라는 것도 러시아의 자연과 밀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상은 혁명 전의 러시아에 대한 것이지만, 그것은 오늘의 소비에트에도 이어지고 있다. 소비에트시대가 되자, 그러한 러시아적인 것 외에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가미되었다. 그것이 문화적 측면에서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개개 분야에서 언급되지만, 제일 큰 차이는 일찍이 러시아 문화의 등뼈로 인식되어 있던 러시아정교가 소비에트시대에 이르러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박해 또는 탄압받은 점이다.

그러나 지금도 농촌지역에서 러시아정교는 커다란 힘을 유지하고 있으며, 교회에서도 제2차세계대전 후의 해빙 이후 상당한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이 러시아정교를 기반으로 하는 러시아인 신앙에 뒷받침된 박애정신은 러시아어로 <도브로타(dobrota)>라고 표현되는 선량함에 의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국민성>

혁명 전의 러시아인은 러시아정교를 기반으로 하는 종교생활이 그 중심에 있었으나, 혁명 후에는 그러한 기반이 없어지고 가정생활과 부모자식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력에 의하여 1년의 생활이 정해져 있던 농촌에서는 이른바 콜호스에서의 생활로 처음 얼마 동안은 혼란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거기에서는 연령적인 격차가 없어서, 80세 노인도 25세의 젊은이도 똑같은 임금수준이었는데, 그것은 경제적인 면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영향을 미쳤다.

부모자식 관계에서 교회에 다니는 어머니와 그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자식들 사이에서는 으레 다툼이 일어났다. 국가권력에 의한 교회파괴라는 배경 가운데서 이러한 부모자식 간의 분쟁이 일어남으로써, 화목한 가족관계는 달라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가정생활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결혼에도 이런 경향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혁명 후에는 성의 해방으로 모든 분야에서 남녀평등권이 일반화되었으므로, 자유연애와 이혼이 많아 졌다. 결국 전통적인 러시아의 결혼제도는 쇠퇴하고, 최근의 이혼율은 미국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높다. 고등교육 기관에서는 여자가 차지하는 수가 남자를 능가할 만큼 되었고, 그 결과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일하는 여성인력이 매우 많아졌다. 심지어 증기기관차에서 석탄을 퍼넣는 기관 조수와 같은 중노동에까지 여자들이 진출하였다.

결혼한 남녀의 거의 대부분이 맞벌이를 함에 따라서 자식들에 대한 가정교육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소리가 1960년대부터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부부 맞벌이노동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경제적으로 뒷받침된 여가를 적극적으로 즐기는 경향도 나타났으며, 여름휴가를 가족동반으로 흑해 해안 같은 곳에서 보내는 등, 혁명 전에는 일반 서민에게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도 했다.

스포츠는 국가적으로 많은 힘을 기울였고, 각종 스포츠클럽이 시민을 위하여 개방되어 있었다. 올림픽대회에서의 소련선수단의 활약상은 유명했거니와, 그러한 선수들도 학생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스포츠클럽의 회원이었다. 한편 일반 서민 중에는 이른바 마이홈형의 여유있는 안정된 생활을 지향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이와 같은 경향은 소련문화 전반에 갖가지 의미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으며, 소련이 해체되고 소독립국가연합이 출범한 뒤에도 당분간의 경제위기에서 벗어나면 계속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시설>

소비에트 국가 건설의 이상 가운데에는 문화를 널리 일반대중의 것으로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러므로 1920년 이후 국가는 박물관·극장·공원 등을 정비하는 데 힘을 다해왔다. 특히 모스크바의 붉은광장에 면해 우뚝 선 역사박물관을 비롯한 각지의 박물관을 정비하는 데는 물심 양면을 통한 국가적 원조가 있었다. 물론 여기는 소비에트 건국의 큰 뜻을 국민에게 알린다는 주된 목표가 있었으며, 그러므로 정권교체 때마다 전시품이 바뀐다는 변칙적인 상황도 생겼다.

예컨대 혁명 당시에 적군(赤軍) 사령관이었던 L.트로츠키에 대해서는 어떤 역사박물관에서도 그 모습을 전시하지 않았었다. N.흐루시초프 실각 후 흐루시초프상(像)은 극단적이라 할 만큼 말소되어 왔다. 스탈린비판 후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즉 객관적 역사관은 정치와 결탁한 권력자의 의사에 적합한 역사관으로 바뀌었다. 이와는 반대로 공원은 이데올로기와는 관계가 없기 때문에 각지에서 많이 건설되었으며, 모스크바의 고리키공원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훌륭한 시설을 과시하였다.

역사적 건조물 보호 관리에 관해서는 갖가지 뒤얽힌 얘기가 있다. 혁명 후 러시아정교회는 탄압을 받고 파괴되었는데, 오늘의 시각에서 본다면 돌이킬 수 없는 문화적 손실이라 하겠다. 예컨대 모스크바의 중심부에 있던 구세주대성당 자리에다 풀(수영장)을 만들어 놓은 것은 애석한 일이었다. 그러나 크렘린 안의 여러 교회는 수리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해놓음으로써, 모스크바의 상징이 되었다.

해빙 이후에는 블라디미르·노브고로트·프스코프·자고르스크·키예프 등지에서 종래 방치되어 황폐해져 있던 정교회당을 수리하여 본래대로 해놓고 역사적 건조물로 보호하였다. 연극과 극장을 좋아하는 러시아인들을 위하여 새로운 극장도 계속 지었지만, 레닌그라드의 옛 마린스키극장, 또는 모스크바의 볼쇼이극장·예술극장 등 혁명 전부터 이름났던 극장도 혁명 전에 뒤지지 않게 화려한 무대를 보여주었다.

<예술>

소련의 1920년대라면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혁신적인 예술이 꽃핀 시기였다. 그때에는 혁명이 내건 진보적인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형식 속에서 구현되고 있는 듯이 보였다. 특히 영화는 대중 계몽 수단으로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도움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연극도 또한 이른바 애지테이팅프로파간다(선동선전)연극이라는 측면도 있어서 넓은 활동의 장소를 제공받았다.

그러나 예술극장에서도 혁명 후 약 10년간은 A.P.체호프의 연극을 상연할 수 없었던 시기도 있었다. 체호프의 희곡이 소시민적이라고 하는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문학은 20년대는 <카페의 시대>라고 불릴 만큼 모스크바를 비롯한 여러 고장에서 문학카페가 출현하였고, 시인들이 자기가 지은 시를 낭독하기도 하고 얄팍한 시집을 널리 팔고 다니기도 하였다.

프롤레타리아를 위해서는 고유의 <계급문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종파적 견해를 품고 있던 프롤레토쿠리토(프롤레타리아문학교육단체)운동이 일어나, 종래의 인텔리겐치아(지식계급) 출신 작가들을 압박했으며, 애지프로적(애지테이팅프로파간다적)인 낮은 차원의 문학이 횡행하였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결국 그 성급함과 좁은 종파적 경향 때문에 거의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그리고 소비에트 당국도 그것을 자각한 나머지 결국 인텔리겐치아 보호를 위해 나서게 되었고, <소극적으로 혁명을 받아들인 작가들>인 이른바 동반작가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생겨난 새로운 문학은 1930년대 초기에 얼마간의 성과를 보여주기는 했으나, 1937∼38년의 대대적 숙청이 회오리칠 무렵부터는 다시 그 활기를 잃었다.

그러나 독일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역설적으로 일종의 자유가 되살아나 우수한 전쟁문학 작품이 나타났다. 제2차세계대전 뒤 냉전이 시작되어, 소비에트에서는 코스모폴리타니즘(세계동포주의) 비판이 일어나 주로 유대계 작가가 많이 숙청되었다. 1953년 3월에 스탈린이 죽자 소비에트문화계에는 해빙이 찾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 초기에는 이른바 제4세대라고 칭하는 젊은 작가들이 배출됨으로써 1920년대에 이어지는 제2의 소비에트 르네상스를 맞이하였고, 소비에트의 창조적 인텔리겐치아들은 미래에 대한 밝은 기대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 기대도 1968년 8월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로 인하여 무너져 버렸다. 제2차세계대전 뒤의 해빙은 또한 A.I.솔제니친이라는 위대한 작가를 등장시켰지만, 그도 결국 《수용소군도(收容所群島)》를 파리에서 출간하였기 때문에 <국가권력에 의한 개인국외추방> 처분을 받기에 이르렀다. 혁명 직후 지식인 망명이 있었던 것처럼 그를 추방하는 것을 계기로 많은 소비에트문학계의 활동가들이 서유럽으로 망명했다. 따라서 오늘날 소비에트문화를 생각할 경우, 본국 소비에트뿐만이 아니라 서방측에서 활약하는 소비에트문화인들의 예술합동도 포괄하여 이해해야 할 것이다.

<언론·출판의 자유>

소비에트 건국의 중요한 의미인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는 제2차세계대전 후에 동유럽에서 그 동조국을 얻기에 이르렀지만, 1956년의 헝가리의거,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 등에서 볼 수 있었던 바와 같이 반드시 정치·경제·문화면에서 그 우월성이 실제로 입증되지는 못하였다. 도리어 문화면에서는 이데올로기를 앞에 내세우는 것이 이데올로기를 위해 도리어 마이너스가 된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언론·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 못한 사회라는 점이었다.

헌법 조문상으로는 언뜻 보아 보장되어 있는 듯이 보이나, 사실 그것은 커다란 제약을 받고 있었으며, 검열이라는 형태로 문화의 각 부문에서 그 창작이 조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해빙 이후로 계속 밀려들어온 서유럽의 자유화 바람 덕분에, 스탈린시대의 공포를 경험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각종의 지하문서를 만들어 유포시켜 나갔다. 이는 소비에트 역사상 처음 있는 일로, 한 편의 시에서 시작되어 단편·중편·장편에까지 미쳤고, 더욱이 단지 문학뿐 아니라 사회과학·자연과학적인 면에 이르기까지 확장세를 보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방관만 하고 있던 당국도 차차 그 문제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여, 그러한 활동가들을 체포·투옥하였다. 이는 또한 소비에트의 인권운동과도 얽혀 있으며, 아카데미회원인 A.D.사하로프 박사 같은 인물까지도 참가하게 되어, 국제적으로도 이러한 움직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K.체르넨코가 죽은 뒤 M.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등장함에 따른 새로운 해빙무드를 맞이하였다. 1986년 문화관계검열폐지의 발표 이후 B.L.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해금을 시작으로, 87년 반체제인사들의 작품출간 및 전시가 허용되었다. M.샤갈의 작품이 전시되었으며, 1988년 N.부하린의 작품 등 금서 3500여 종의 서적이 해금된 데 이어 1989년 솔제니친 작품이 해금되었다. 1990년 6월 7일 언론·출판의 자유와 검열폐지, 취재권리의 보호 등을 규정한 <신문법>을 채택하여, 소련에서의 언론·출판에 대한 검열은 공식적으로 폐지되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 러시아(소련)의 관계는 180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졌다. 그 이전 1246년에는 고려인이 몽골의 수도 카라코룸에서 러시아인과 만난 적이 있으며, 조선시대 효종 때에는 청(淸)나라의 요청에 따라 2번에 걸친 나선정벌(羅禪征伐)이 있었다. 1800년대 이후의 양국관계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3기로 나누게 된다.

제1기는 1860년부터 조선·러시아수호조약을 맺고 한반도에서 러시아가 거점을 확보하게 된 1884년까지이고, 제2기는 1884년부터 청일전쟁이 끝나 한반도에서 일본과 직접 대결하게 되는 1894년까지이고, 제3기는 1894년부터 러일전쟁에서 패하여 조선에서 물러나는 1905년까지이다. 그리고 1905년 이후 광복이 될 때까지는 양국의 관계는 사실상 단절된 상태에 있었다. 러시아가 조선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쏟게 된 계기는 베이징조약(1860년)으로 약 40만평방마일이나 되는 연해주지역을 획득함으로써 국경을 서로 맞대게 된 때부터였다.

그 무렵 러시아의 주요 관심은 조선 영내에서 해군 함정을 위한 부동항을 빌려쓰는 데에 있었다. 1864년, 5명의 러시아인이 경흥(慶興)으로 찾아와 통상을 요구하였고, 66년에 러시아군함이 원산만(元山灣)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영국을 비롯한 열강을 두려워한 나머지 철수하였으며, 이후 러시아는 한반도 침투에 신중을 기하기 시작하였고, 그 기선을 일본과 미국에게 빼앗겼다.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기본 노선은 이른바 제3기 기간 중에 시베리아철도를 착공함으로써 크게 바뀌게 되었다.

즉,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 착공으로 위험을 느낀 일본은 청나라에 대한 개전을 서두르게 되었고, 따라서 랴오둥반도[遼東半島]를 차지하자, 러시아는 갑자기 강경한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 조인 후 6일 만에 대일3국간섭을 하였다(1895. 4. 23). 이에 따라 일본은 러시아 등의 열강에 굴복,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 되돌려 주었다. 그 무렵 조선에서 노골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일본을 기피하는 정책을 쓰게 되자, 이에 일본은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민비(閔妃)를 시해하는 을미사변(1895. 10. 8)을 일으켰다.

그 결과 조선 내의 거센 반발과 국제적 압력에 부닥치게 되었고, 이어서 아관파천(俄館播遷:1896. 2. 11∼97. 2. 20)으로 인하여 일본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아관파천시기에 러시아는 조선의 군사·재정에 관한 대부분의 권익을 장악하였지만, 한반도 자체에 대해서는 만주 방위를 위한 완충지대 역할밖에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일본과는 균형을 유지하면서 자기네 거점을 마련한 뒤, 친위대와 군사훈련을 관장하고 재정 고위직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한편 그들은 조선 사절에게 약속했던 <차관 제공>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조선으로부터의 불신을 사게 되었고, 고종의 환궁은 러시아에 대한 실망을 표시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후 그들은 교묘한 수법으로 또다시 약세를 강세로 되돌려 놓았다. 한편, 의화단난(義和團亂)을 계기로 러시아는 만주를 점령, 베이징교섭을 통하여 만주를 보호령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한반도 중립화안까지 일본에게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추세는 영국에게 자극을 주어 1902년 1월의 영일동맹을 낳게 하였고, 약세에 놓이게 된 러시아는 초강경자세로 돌변, 만주로부터의 철병은 했으나, 조선에 대하여 <압록강 삼림이권이용>을 통고해 왔고, 이어서 용암포(龍巖浦) 점령을 단행하였다. 이를 계기로 러일전쟁이 터졌고, 러시아는 패전한 뒤의 포츠머스조약에 의해 일본에게 <한반도에 대한 보호>만을 승인했으나, 이는 한반도에서 대일견제력 상실을 뜻할 뿐만 아니라, 결국 일본의 한국 지배로까지 이어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자, 북위38도선을 경계로 그 이북은 소련군이 점령하고, 그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였다. 북한을 소련의 세력 속에 편대시키려는 야심은 공산주의 팽창정책의 일환으로써 48년 9월 9일 김일성(金日成)을 수상으로 하는 공산정권이 소련의 원조로 수립되었다. 6·25 당시 소련은 북한에게 상당한 군사적 원조를 보냈으며, UN군의 반격으로 북한이 몰리게 되자, 소련은 중국 공산군의 참전을 권유하였고, 그래도 전선이 교착되자 1951년 6월 휴전을 제의, 1953년 7월 휴전협정이 맺어졌다.

북한은 70년대에 중국과 소련 사이의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중립적 입장에서 이익을 얻으려는 태도, 즉 <자주노선>이란 것을 추구하였다. 소련은 이런 <눈치외교>를 배척, <주체사상>도 비난하였다. 한국과 소련의 관계는 북한의 공산정권 수립 등 분단의 책임문제에 소련이 개입되어 있다는 이유로 처음부터 적대관계로 출발하였다. 닉슨행정부의 세계정책이 바뀌고 소련·중국의 관계도 바뀌자, 한국도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에 대해 새로운 자세를 취하였고, 소련도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는데, 1973년부터는 대한민국 여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소련입국을 허용하였고 양국간에는 무역계약도 맺어지기 시작, 다양한 형태의 문화교류가 펼쳐졌다.

1983년 9월 1일, KAL기가 소련 영공을 침입했다는 이유로 이를 격추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양국간의 관계 개선 움직임은 이어졌으며 86년에는 체육부장관이 방한하였다.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는 788명의 선수단이 참가하였고 예술단도 내한하였다. 서울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양국의 외교관계가 증대되었고, 1988년에는 영사업무를 취급하는 무역사무소를 상호 개설하였다. 90년에는 두 차례의 한·소 정상회담을 개최하였으며,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였다. → 소독립국가연합

<윤길진>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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