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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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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40      
[조선] 정약용 (브리)
정약용 丁若鏞 1762(영조 38) 경기 광주~1836(헌종 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 동상, 서울 남산공원

정약용 묘,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 생가,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정약용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유형원(柳馨遠)ㆍ이익(李瀷)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실용지학(實用之學)ㆍ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면서 주자 성리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봉건제도의 각종 폐해를 개혁하려는 진보적인 사회 개혁안을 제시했다.

본관은 나주(羅州). 소자는 귀농(歸農). 자는 미용(美庸)ㆍ송보(頌甫), 호는 사암(俟菴). 자호는 다산(茶山)ㆍ탁옹(翁)ㆍ태수(苔)ㆍ자하도인(紫霞道人)ㆍ철마산인(鐵馬山人). 당호(堂號)는 여유(與猶). 아버지는 진주목사(晉州牧使) 재원(載遠)이며, 어머니는 해남윤씨(海南尹氏)로 두서(斗緖)의 손녀이다. 경기도 광주시 초부면(草阜面) 마재[馬峴]에서 태어났다. 다산의 생애와 학문과정은 1801년(순조 1) 신유사옥에 따른 유배를 전후로 크게 두 시기로 구분되며 그의 사회개혁사상 역시 이에 대응되어 나타난다.

먼저 전기에 해당하는 시기는 주로 관료 생활의 시기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고 15세에 서울로 올라온 후 이가환(李家煥)과 자신의 매부인 이승훈(李承薰) 등으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했다. 이미 이때부터 이익과 같은 학자가 될 것을 결심하고 그의 제자인 이중환(李重煥)ㆍ안정복(安鼎福)의 저서를 탐독했다. 이처럼 유교 경전과 선학의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과거에 응시할 준비를 하여, 1783년(정조 7) 경의진사(經義進士)가 되었다. 이무렵 이벽(李檗)을 통하여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서양 서적을 접했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한 후 이듬해 검열이 되었으나 공서파(攻西派)의 탄핵을 받아 해미(海美)에 유배되었다가 10일 만에 풀려났다. 곧이어 지평ㆍ수찬을 지내고 1794년 경기도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ㆍ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사건(周文謨事件)에 연루되어 금정찰방(金井察方)으로 좌천되었다. 그뒤 다시 소환되어 좌부승지ㆍ병조참지ㆍ동부승지ㆍ부호군ㆍ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규장각의 편찬 사업에도 참여했다.

다산은 30대초까지는 아직 젊은 중앙 관료로서 경학 사상 등 학문 체계는 물론 사회 현실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깊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암행어사를 비롯하여 금정찰방 곡산부사(谷山府使) 등의 직무를 수행하면서 농촌 사회의 모순과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며 이를 실천해보고자 했다.

1799년 중앙 정계에 있을 때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응지진농서 應旨進農書>의 검토를 통해 토지 문제를 농업 체제 전반과 연결시켜 구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는데, 이후 기본 생산 수단인 토지 문제의 해결이 곧 사회 정치적인 문제 해결의 근본이라고 인식하고 현 농업 체제를 철저히 부정한 위에 경제적으로 평등화를 지향하는 개혁론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1799년에 저술한 <전론 田論>의 여전제(閭田制)는 이같은 논리가 가장 강렬하게 반영된 것이었다. 여전제의 내용은 토지 사유를 기반으로 하는 지주제를 부정하고 토지 국유를 원칙으로 하는 기초 위에, 향촌을 30가구의 여(閭) 단위로 재편성한 다음 여장(閭長)의 통솔하에 공동 노동을 통해 경작하고 농민의 투하 노동력을 기준으로 생산물을 분배하자는 것이었다.

이에 관련된 조세 제도 개혁책으로서 정액제(定額制)를 취하고, 역제(役制)의 경우 재편성된 향촌 제도와 관련시켜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원칙으로 하면서 호포제(戶布制)로의 개혁을 고려했다. 이러한 여전제의 보급을 위해서 여내(閭內) 농민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고 무위도식하는 선비들에게 실생활에 필요한 직업으로의 전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처럼 여전제는 농민 경제의 균산화(均産化)와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생산성 향상을 통한 사회적 부의 증대를 위해 노동력의 기능을 강조한 공동농장ㆍ협동농장적 경영론이다. 이는 종전의 한전론(限田論)ㆍ균전론(均田論) 등 토지 분배에만 초점을 맞춘 개혁론에 비해 농업 생산의 사회화 문제 등 농업 생산이나 농업 경영 전반의 변혁까지도 포괄하는 논리였다. 그러나 시행의 전제가 되는 국유화에 대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실현될 수 없었던 토지 개혁 방안이었다.

특히 <전론>에서 농업 생산의 사회화 문제와 연결하여 공상(工商)을 농업에서 완전 분리시켜 독립적 사회 분업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점이 주목되는데, 이는 당시 상품 화폐 경제와 수공업 발전의 현실을 염두에 둔 견해였다. 그러나 아직까지 농업 생산에 주력하는 중농 정책(重農政策)이 견지되어 사족의 상업ㆍ공업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전개한 것은 아니었다.

이상의 사회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여 혁신적 정치 개혁론으로 제시된 것이 <원정 原政>ㆍ<원목 原牧>이다. 여기에서 그는 아래로부터의 정치 개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 <원정>에서 "토지의 균등한 분배를 왕정의 제일책으로 삼고 물화의 유통과 교환을 촉진하며 지방 생산력의 불균등 발전을 완화하고 정치적 권리를 균등하게 해야 한다"고 하여 파격적인 체제 개혁론을 주장했으며 이는 만년에 저술한 정치권력론ㆍ역성혁명론으로서의 <탕론 湯論>과 이념적 기초를 같이한다.

그는 <원목>에서 태고 이래 민(民)의 자유의사와 선거에 의해 이장(里長)ㆍ면정(面正)ㆍ주장(州長)ㆍ제후(諸候)ㆍ천자(天子) 등 각 계층의 통치자들이 발생했음을 지적하고 이들이 만약 민의 이익에 부합되는 일을 하지 않고 자기들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하여 행동하는 경우, 민은 자신들의 자유의사로써 통치자를 교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가 발생에 관한 학설을 담고 있는 것으로 자본주의 발생 초기 유럽의 사회계약설과 유사한 논리가 되며 해석에 따라서는 정치의 민주주의적 합의제, 선거제, 법치주의를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당시의 역사 발전 사실과 부합되지 않으며, 다만 극도로 부패한 봉건 사회에 대한 반기로서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이같은 정치 개혁론은 그의 사회 경제 개혁론과 함께 당시의 현실 속에서 혁명을 수반하지 않고는 실현불가능한 이상론이며 궁극적인 지향점은 밝혔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지니면서 체제 전반에 대한 개혁론으로 체계화되기는 어려웠다.

그의 학문 과정과 생애 후기는 주로 유배 생활의 시기이다.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1800년 정조가 죽은 후 정권을 장악한 벽파는 남인계의 시파를 제거하기 위해 1801년 2월 천주교도들이 청나라 신부 주문모를 끌어들이고 역모를 꾀했다는 죄명을 내세워 신유사옥을 일으켰다. 이때 이가환ㆍ이승훈ㆍ권철신(權哲身)ㆍ최필공(崔必恭)ㆍ홍교만(洪敎萬)ㆍ홍낙민(洪樂敏), 그리고 형인 약전(若銓)ㆍ약종(若鍾)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며, 2월 27일 출옥과 동시에 경상북도 포항 장기(長䰇)로 유배되었다.

그해 11월 전라남도 강진(康津)으로 이배되었는데, 그는 이곳에서의 유배 기간 동안 독서와 저술에 힘을 기울여 그의 학문 체계를 완성했다. 특히 1808년 봄부터 머무른 다산초당은 바로 다산학의 산실이었다. 1818년 이태순(李泰淳)의 상소로 유배에서 풀렸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마했다. 61세 때에는 <자찬묘지명 自撰墓誌銘>을 지어 자서전적 기록으로 정리했다.

그는 유배 생활에서 향촌 현장의 실정과 봉건 지배층의 횡포를 몸소 체험하여 사회적 모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정확한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유배의 처참한 현실 속에서 개혁의 대상인 사회와 학리(學理)를 연계하여 현실성있는 학문을 완성하고자 했다. <주례 周禮> 등 '육경사서'(六經四書)에 대한 독자적인 경학 체계의 확립과 '일표이서'(一表二書)를 중심으로 한 사회 전반에 걸친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사회 개혁론이 이때 결실을 맺었다(→ 색인 : 다산학).

먼저 <경세유표 經世遺表>는 "나라를 경영하는 제반 제도에 대하여 현재의 실행 여부에 구애되지 않고 경(經)을 세우고 기(紀)를 나열하여 우리 구방(舊邦)을 새롭게 개혁해보려는 생각에서 저술했다"고 하여 당시 행정 기구와 법제 및 경제 제도를 대폭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이다. <경세유표>의 구성은 경전에서의 이념적 모델을 제시하고 다음으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의 변천과정을 아울러 참조하여 개혁론을 제기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목민심서 牧民心書>는 "고금의 이론을 찾아내고 간위(奸僞)를 열어젖혀 목민관에게 주어 백성 한 사람이라도 그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나의 마음씀이다"라고 하여 현 국가 체제를 인정한 위에서 목민관을 중심으로 한 향촌 통치의 운영 개선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한편 <흠흠신서 欽欽新書>는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옥사에 대해 "백성의 억울함이 없기를 바라는 뜻"에서 통치자의 인정(仁政)ㆍ덕치(德治)의 규범을 명확히 하고자 저술되었다.

제도 개혁에 있어서 <경세유표>가 전국적 범위에서 국왕ㆍ국가가 집행할 것을 모색한 데 비해 <목민심서>는 군현의 범위에서 목민관에 의해 수행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흠흠신서>는 <목민심서>의 형전(刑典) 부분을 보충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같이 일표이서는 저술 동기와 내용에서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상호 유기적인 관련 속에서 1817~22년에 기초, 완성되어 후기 개혁론의 대계를 보여주고 있다.

한편 일표이서의 개혁론은 경학 사상 체계와 상호 유기적인 관련을 가지면서 체계화되었다. 정약용은 <주례> 속에서 '호천상제'(昊天上帝)의 개념을 원용한 상제관(上帝觀)을 형성하여 전통적인 천명사상(天命思想)을 매개로 이를 군주와 연결하고 있다. 그러나 천명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바뀌어 항상 유덕(有德)한 사람에게 옮겨진다는 것이다. 덕의 유무는 민심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므로 군주권의 근원은 결국 민의에 달려 있는 것이며, 천명 그 자체가 통치권의 궁극적 근원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다산은 군주를 정점으로 한 통치 질서를 회복하여 치세(治世)의 근본을 확립하고자 했지만 그와 동시에 군주의 우월성은 민의에 의해 한계가 규정된다는 논리를 강조했다.

상제와 직결된 왕권과 상제와 직결된 민의 자주권 회복에 의해 하나의 통일된 통치 체계를 수립하려 할 때 그 모습은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으로 나타나며 사적 중간 지배층의 배제는 필수적인 사안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표이서에서 표방되는 개혁론은 전기에 비해 훨씬 온건한 것인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가 조선 후기 사회에 대한 현실을 크게 고려하면서 실현 가능한 점진적인 방안, 단계론적 시행론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경세유표>의 <전제 田制>에서는 우선 토지국유제하 농민의 개별적 점유를 원칙으로 하는 정전제(井田制)를 주장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토지 국유의 실현이 불가능한 상태를 전제하여 차선책으로 정전제에서 동시에 시행되었던 구일세제법(九一稅制法)만이라도 원용하려는 방안을 제기했다. 이는 토지 제도의 개혁보다는 국가 재정과 밀접한 조세 제도의 개혁, 일체의 중간 수탈 배제를 목적으로 한 운영의 합리화를 통해서 현안을 해결하려고 한 것으로서 점진적이고 과도기적인 개혁 방안이라 할 수 있다.

이 단계에서 다산은 사민구직(四民九職)의 직업 분화와 직업의 전문화를 강조하고 사회 분업을 통한 경제 발전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먼저 상업의 경우 농업과 완전히 분리시켜 대등하게 발전시키며 상업적 이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조세 개혁을 통해 상인들을 보호하며 해외 상업을 발전시키려 했다(→ 색인 : 이용후생학파). 이를 위해 동전의 유통을 촉진시키고 금화ㆍ은화와 같은 고액화폐의 발행으로 원격지간 교역에 이바지하고자 했다. 즉 상업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특권적 대상인은 억제하고 중소상인은 보호하는 방식을 도모했다.

다음으로 수공업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기술도입론을 강조했다. <목민심서>에서는 지방 차원에서 민간 직물업에 관련된 기술 도입을 역설했고 <경세유표>에서는 토목 공사 기술 등을 국가 차원의 제도 개혁을 통해 적극 도입하고자 했다. 이는 그의 중앙 관제 개혁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즉 기술 도입의 주체인 국가 기구가 강력하게 민간 산업을 보호ㆍ통제하고 기간 산업을 관장함으로써 대상인의 횡포에서 중소 수공업자를 보호하려 했다.

국영 광산론 역시 천연의 부에 대한 특권층의 자의적 이용을 배제하여 국가 통제하에 두며 그 이익을 공전(公田) 매입에 돌림으로써 전체적으로 소농민의 이익이 되게 하는 방안이었다. 이밖에 도량형의 전국적 통일, 물화 유통을 촉진하기 위한 교통 수단의 정비를 제안했다. 이는 18세기말과 19세기초 유통 경제의 발전 과정을 염두에 둔 논리일 뿐만 아니라 그의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그가 제기한 개혁론의 철학적 기초에는 주자학과 대비되는 면모가 있었다. 첫째, 주자학이 천인합일(天人合一)에 기초하여 인간과 자연 사이에 일리(一理)로서의 태극이 관통하고 있음을 주장한 데 비해 다산은 천도(天道)와 인간 세계를 분리하여 각각 존재의 법칙과 당위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주자학의 계급성과 불평등한 인간관을 비난하고 인간 세계의 질서는 변화 가능한 것으로 여기며 요순 3대의 제도에서 그 규범을 찾으려고 했다. 한편 그는 천인 분리를 상정하면서도 절대적인 인격적 주재자로서의 천의 존재를 별도로 언급했다. 이때 천은 모든 인간과 개별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인간은 모두 존엄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했다.

둘째, 기질에 따른 인간성의 차등설을 비판하고 우수한 능력자는 특정 신분에서만 배출되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의 능력주의는 신분제에 입각한 국가의 교육, 과거, 인사제도에 대한 개혁론으로 연결되었다. 셋째, 욕망관[人心道心說]에서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되 적절한 통제가 병행되어야 함을 말했다. 무제한적으로 욕구를 인정하는 것은 특권층의 입장과 통하는 것이라 본 그는 인간이 기본적으로 외적 환경에 좌우된다고 보아 구체적인 사회 제도의 정비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는 주관적 심성 문제에 치중한다거나 도덕적인 호소에 의한 해결 방안을 내세우는 주자학과 대별되는 주장이다.

그는 전통적 관념론에 몰두하지 않고 다양한 경험론적 세계관을 지향했다. 이에 따라 천문ㆍ기상ㆍ지리ㆍ물리 등 제반 자연 현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규명하고자 했다. 그의 자연과학 사상의 기초는 우주관에서 비롯되는데, 전통적인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논박하고 서학과 지리학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원설(地圓說)에 관해 논증했다. 물리학적인 현상의 본질을 규명하는 데에도 관심을 기울여 볼록 렌즈가 태양광선을 초점에 집중시켜 물건을 태우는 원리, 프리즘의 원리를 이용한 사진기 효과 등을 밝혀냈다.

또한 종두법(種痘法)의 실시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종두심법요지 種痘深法要旨>를 저술했고, 각종 약초의 명칭ㆍ효능ㆍ산지ㆍ형태 등을 조사 검토하여 생물학적인 연구 성과를 내기도 했다. 이러한 기초과학에 대한 관심은 구체적인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기술 개발로 연결되어 농기계, 관개 수리 시설 및 도량형기를 발명하고 정비했다. 또한 한강의 배다리[舟橋]를 설계하고, 화성의 축조시 거중기ㆍ고륜(鼓輪)ㆍ활차(滑車) 등의 건설 기계를 창안했다. 이와 함께 <기예론 技藝論>에서는 방직기술ㆍ의학ㆍ백공(百工) 기술을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으며 <원정>에서는 수리관개사업ㆍ식수(植樹)ㆍ목축ㆍ수렵ㆍ채광기술 및 의학을 깊이 연구해야 농민들이 풍족하게 살 수 있다는 과학 정책론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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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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