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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22:57
분 류 사전2
ㆍ조회: 763      
[조선] 정조 행장 3 (실록)
정조 대왕 행장 3

행장 1
행장 2
행장 3
행장 4
행장 5

10년 1월 1일 일식이 있어 감선ㆍ구언을 하고 인정문에 나아가 조참을 받았다. 그리고 경재(卿宰)와 시종(侍從)들은 앞으로 나와서 소견을 아뢰고 백관들은 써서 올리라고 명했는데 대신에서부터 위사(衛士)에 이르기까지 모두 3백 63명이 그에 응하자, 그를 다 친히 보고 비답까지 내렸었다.

조관(朝官)은 나이 80이상, 서민은 나이 90이상이면 매해 말에 서울의 경우 오부(五部)가 찾아내고, 지방인 경우는 그 지방관이 직접 방문한 후 한성부 또는 각 감영에 보고하여 알리게 하였고, 세초를 기해 가자(加資)에 관한 하비(下批)를 하면서 부인(夫人)의 봉작(封爵)도 그에 준해 하도록 하였는데, 일백 세 이상인 사람에게는 동지중추를 주고, 급제 연한이 일주갑을 넘긴 자는 대소과를 막론하고 자급 하나를 특가하는 것으로 규정을 정했으며, 한성부에 명하여 서울과 지방의 임자 없는 해골을 모두 묻어주도록 했는데 모두 37만 9백 79곳이나 되었다.

효릉(孝陵)ㆍ희릉(禧陵)을 배알하고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에게 제(祭)를 내렸다. 그리고 언제나 능원(陵園) 행행 때면 각 조(朝)의 국구(國舅)와 왕자(王子)ㆍ공주(公主)ㆍ옹주(翁主) 그리고 당시에 등용되어 군신간 의기가 상합했던 명경(名卿)들 묘에도 두루 잔을 부어 추선(追先)의 감회를 표했었다. 영우원을 배알했다.

여름에 옹막리(甕幕里)에 화재가 발생하여 가옥 3백여 호가 연소되었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하내(河內)에 화재가 났을 때 급암(汲黯)이 국가 법령에 구애 받지 않고 자기 임의로 창고를 열어 이재민 구호를 했는데 한(漢) 무제(武帝)는 그를 오히려 가상히 여겼었다. 급암은 일개 사신(使臣)이었으면서도 자기가 할 수 있는 직분을 다했었는데 하물며 윗사람이 되어 어찌 일부 일부(一夫一婦)인들 살 터전을 잃게 만들 수 있겠는가." 하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대신과 비변사 당상관을 불러 외읍에 적용하는 휼전(恤典)을 모방하여 구제해주게 했다.

영우원 배알 때 전염병이 드세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이에 하교하기를, "푸닥거리는 예부터 있어왔던 예이니 서둘러 실시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사방 교외에다 별려제(別厲祭)를 차리도록 명하고, 또 한성부에 명하여 관할 내의 방곡(坊曲)에 알려 양반 상사람 할 것 없이 자기 자력으로 약물을 준비할 수 없는 자들은 의사(醫司)가 의원을 지정하여 그로 하여금 진찰도 하고 약물도 공급하도록 하게 하고 그 결과를 아뢰게 하였다.

5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죽어 왕은 슬픈 생각에 겨를이 없는 처지였지만 그 와중에서도 날마다 유사(有司)들을 단속하여 민간의 유행병 치료에 전력하게 하였으므로 매우 많은 생명이 살아났다.

예조가 무신년 복제(服制)대로라면 자최 기년(齊衰朞年)이어야 하고, 《상례보편(喪禮補編)》대로라면 참최 삼년(斬衰三年)이어야 한다 하여 품지(稟旨)를 청하니, 하교하기를, "상제(喪制)는 당연히 《상례보편》과 수교(受敎)를 따라야 하지만 '정(正)'과 '체(體)' 그 두 글자에 매우 중대한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은 아니다.'라거나 반대로 '정이기는 하나 체가 아니다.'라고 하는 문제에 있어 오늘의 상황에서는 모두 혐의가 없지 않다. 따라서 오늘로서는 감히 수교대로 따라야 한다고 무작정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고는, 자최 기년으로 정했던 것이다.

지난번에 군신들이 최복(衰服) 차림에 백화(白靴)를 착용하자, 하교하기를, "그 가죽신이라는 것이 원래 고제(古制)가 아니어서 당(唐)이나 송(宋)이 인습하여 써오기는 했어도 이미 옛뜻은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 나라는 평상시 복장도 그들이 하는 대로 흉내내자면 그도 미처 못할 입장인데 더구나 최복이라면 그 얼마나 예를 갖추고 있는 옷인데 그 밑에 신발을 가죽신으로 착용해서 될 일인가?" 하고, 삼신으로 바꾸도록 명했었다.

문효 세자를 효창(孝昌) 묘원에다 장사하고, 사당은 문희(文禧)라고 하였다. 의열묘(義烈墓)ㆍ의소묘(懿昭墓)를 배알하고 효창에도 갔었다.

9월에는 의빈(宜嬪) 성씨(成氏)가 죽었다. 정릉(貞陵)을 배알하였다.

겨울에 자전(慈殿)이 언문으로 된 교서를 내려, 암암리에 국권을 바꿀 계획을 꾸며온 국영(國榮)의 죄악상을 열거하고 이어 5월, 9월 연이어 상변(喪變)이 났는데도 제신들이 죄인 다스리는 일을 늦추고 있는 죄를 책하였다. 이에 시임 대신 원임 대신 모두가 경재(卿宰)를 거느리고 뵙기를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고, 접빈청(接賓廳)에서는, 이담(李湛)에 대해서는 관작삭탈과 함께 적(籍)을 파버리고, 인(䄄)은 왕법(王法)으로 처단할 것을 계청했는데, 그 상소문을 불에 태워버리라고 하였고 제신들이 문을 밀치고 들어가 강력하게 청했으나 끝까지 윤허하지 않았다.

그보다 앞서 김상철(金尙喆)의 자식 김우진(金宇鎭)이 근신(近臣)으로서 상께 죄 지은 일이 있었는데 뒤에 와서 병신년 봄에 있었던 옥사(獄事)를 핑계 삼아 왕을 현혹시키고 제 죄를 숨길 계책으로 유양(揄揚)의 논을 발론하였다. 그러나 왕은 그의 정상을 미워하여 그 직을 삭탈하였고, 구선복(具善復)도 임오년7548) 에 죄 지은 일이 있었지만 오래도록 병권을 쥐고 있으면서 날이 갈수록 죄악이 익어가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양사(兩司)가 일어나, 우진이 이담을 위해 혼인을 권했다 하여 국문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얼마 후 이담의 외삼촌 송낙휴(宋樂休)가 상변하면서, 이담 스스로 자기는 김상철과는 사생을 함께하는 처지이므로 우진이 만약 죄를 당하면 독약을 먹고 자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고, 또 선복은 자기 아들 구이겸(具以謙)을 시켜 인과 담에게 음식도 제공하고 안부도 묻고 한다고도 말하였다. 이에 우진ㆍ선복을 국문했는데 우진은 지난날 정리를 생각해서 그랬다고 실토하여 특별히 사형을 감하고 제주도에다 위리 안치하도록 명했고, 선복은 인ㆍ담과 서로 사통하고 지낸 전후 정상이 모두 탄로나서 법에 의해 복주되었으며, 선복의 조카 구명겸(具明謙)은 담과 가까운 인척으로서 서로 얽혀있었다 하여 국문한 다음 법대로 처치하였다. 그리고 상철(尙喆)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삼사(三司)가 청했으나 왕은 그가 일찍이 원상(院相)을 지낸 바 있다 하여 극형을 가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또 인을 법대로 처리할 것을 백관들이 정청(庭請)까지 하였으나 왕은 그때마다 차마 못 듣겠다는 하교만을 내리면서 나흘 동안이나 문을 닫고 수라를 물리치기까지 했는데 대신 이하가 합문에 엎드려 관을 벗고 청하자 인을 감형하여 섬에다 안치할 것을 명했다. 그리하여 문관ㆍ음관ㆍ무관과 유생(儒生)에 시민(市民)들까지 번갈아가며 상소했지만 모두 따르지 않고 인과 그 아들들을 모두 강화도에 안치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그래도 대신 이하가 잇따라 소를 올려 강력한 주장을 하자, 하교하기를,

"옛날에 양 효왕(梁孝王)의 옥사7549)가 너무도 끔찍했는데 효경제(孝景帝)가 양 효왕 무(武)를 강력하게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은 전숙(田叔)의 충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오늘의 조정 신료들은 그 전숙에 대한 죄인이 아닌가. 그리고 나를 왜 그리도 경제와 같이 대해 주지 않는 것인가. 여름 가을에 겪은 일들이 마치 백년이나 지나온 것 같다. 조정에 나와서나 사석에 들어가서나 남에게 꺼림한 얼굴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 호소하는 소리들을 들으면서부터는 마음이 바람 앞의 깃발처럼 흔들려 새벽까지 잠도 못 이루고 끼니가 되어도 먹지 못해 나도 모르는 사이 흰머리가 하나하나 생겨나는 것이다. 만에 하나 내 뜻을 따라주지 않고 계속해서 소란을 피운다면 나도 나대로 미리 생각해 둔 바가 있다. 더구나 지금 섣달 그믐이 하루 이틀 밤밖에 남지 않았으니 명년 정초부터서는 번거롭고 시끄러운 것들은 싹 씻어버리고 좀 기쁘게 살 수 있도록 경들에게 거듭 바라는 것이다. 어리석은 백성들도 두루 깨우쳐 모두 편안한 안식처를 갖게 하라." 하였다.

11년 1월 자전(慈殿)께 존호를 더 올렸고, 종묘 사직이 다시 안정을 찾았다 하여 군신들이 공덕을 천양할 것을 청해오다가 이때 와서 책보(冊寶)를 올렸었다. 효창묘에 갔었고, 2월에는 건원릉ㆍ원릉을 배알했다. 경술일에 수빈(綏嬪) 박씨(朴氏)와 가례를 올렸는데 주부(主簿) 박준원(朴準源)의 딸이었고 궁호(宮號)는 가순(嘉順)으로 정했다. 지난해 겨울 자전이 언교(諺敎)를 내려 빈(嬪)을 간택하라고 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 그 예가 이루어진 것이었다.

여름에는 원주(原州) 사람 김동익(金東翼)ㆍ정진성(鄭鎭星)과 제천(堤川) 사람 유득겸(柳得謙) 등의 역모 사건이 발각되어 그들을 체포 국문하고 곧 사신을 원주 감영으로 보내 조사하게 하여 그 역적들 모두가 법에 의해 복주되었다. 그해 봄부터 기호(畿湖) 사이에 유언비어가 갑자기 떠돌아 촌민들이 모두 도망가 숨는 바람에 온 마을이 거의 비다시피 했다가 며칠 지나서야 안정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와서 상변한 자가 있어 알고 보니 바로 동익 등이 선동한 것이었다.

어제 비문을 함흥(咸興) 귀주동(歸州洞)에다 세웠는데 그곳은 바로 환조(桓祖)와 태조(太祖)가 살던 마을이고 정종(定宗)ㆍ태종(太宗)이 탄생했던 터로서 그해 정미년이 바로 탄생한 회갑(回甲)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왕은 일단 생각이 선조들 공렬을 천양하는 데 있어 경흥(慶興)의 적지(赤池)와 적도(赤島), 덕원(德源)의 용주리(湧珠里) 등지에다도 모두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였다.

조시위(趙時偉)를 제주도에 위리 안치하도록 명했다. 시위가 경자년 이후로 척리(戚里)를 자칭하면서 조정 일을 제멋대로 좌지 우지하고 임인년 문효 세자의 탄생 때는 큰 소리로 말하기를 "호칭 정하는 일을 그렇게 서두를 것 없다." 하기도 하여 조정 신료들이 해를 넘겨가면서 그를 국문할 것을 청해왔었는데 그때 와서 그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가을에는 명릉(明陵)과 소령원(昭寧園)을 배알하고 기임각(祈稔閣)에 나아가 수확 광경을 구경한 다음 술을 내려 농부들 노고를 치하했다. 수길원(綏吉園)을 또 배알하고 돌아오는 길에 고양(高陽)에 머물러 그곳 부로(父老)들을 불러 접견한 다음 양주(楊州)ㆍ고양 두 읍의 묵은 적곡을 특별 감면하였다. 규장각(奎章閣)이 어제(御製)를 편찬하여 올렸으며 어제 기(記)를 순안(順安)의 율원정(栗園亭)에다 걸었는데 인원 왕후(仁元王后)가 손수 심은 것이었다.

겨울에 천둥이 일어 감선ㆍ구언을 하고, 기곡제(祈穀祭)에 있어 섭행하는 의식과 기곡제도 대사(大祀)로 승격시킬 것인지의 여부를 제신들과 논의하였다. 하교하기를, "선왕조 갑오년에 희생의 품등을 더 높이라는 하교가 있었으니 성상의 그 뜻을 알 만하지 않은가. 그리고 단향 의식도 옛날에는 미비되었다가 지금 와서야 갖추어졌는데 그것은 본사(本祀) 의식만이 그랬던 것이 아니라 춘향ㆍ추향 그리고 섣달 대향(大享) 때도 서계(誓戒)에 있어 친림(親臨) 절차는 없었다. 선왕조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의 옛 제도를 따랐던 것인데 시향(時享)에 있어서도 향사 의식을 그렇게 높였다면 더구나 기곡제 같은 대제(大祭)에 있어서야 말할 게 뭐 있겠는가. 내년 봄부터는 상신(上辛)의 기곡제는 춘향ㆍ추향 및 섣달 대향 때 의식을 그대로 준용하고 서열도 대사 서열로 승격시키라." 하였다.

연행(燕行) 때의 문단(紋緞) 금령을 거듭 강조하였다.

《문원보불(文苑黼黻)》7550)이 완성되었는데 바로 이 나라 문원(文苑)의 장정(章程)이었다.

12년 1월 하교하기를, "명의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무신년 정월 을해일에 천자 위에 올라 즉위 원년 연호를 홍무(洪武)라고 했었는데 그해가 다시 돌아왔고 간지(干支)로 쳐서 이달에 마침 그날이 들었으니 어찌 그냥 넘기겠는가." 하고, 그날 두 봉실(奉室)을 배알하였다.

3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은 바로 우리 선대왕이 위무를 선양하여 병란을 평정하신 해요 달이다. 음모가 영남ㆍ호남에서 꾸며져 기전(畿甸)까지 곧바로 밀고 올라왔는데 실지(失志)한 무리들이 내응을 하고 밖에서는 부정한 도당들과 힘을 합하고 있었으므로 그때의 아슬아슬함이란 위태롭기 머리털 하나 사이였었다. 그 당시 만약 신명과 같으신 용단과 죽이지 않고도 상대를 굴복시킬 성무(聖武)로서 예의로 승리를 이끌고 그리하여 하늘과 사람의 도움을 받은 그러한 입장이 아니었던들 어떻게 그 거세고 흉측한 무리들을 수습하고 교화하여 잠시잠깐 사이 이 나라를 태산 반석 위에다 올려놓았겠는가. 그때 그날은 돌아왔건만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이 높고 물은 맑은 것일 뿐이니 그때를 추억하며 느끼는 이 소자(小子)의 마음으로서 어찌 충성과 노고에 보답으로써 옛날 나라를 편케 하셨던 분들이 받은 아름다운 천명에 대해 보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책훈(策勳)되고 순절(殉節)한 신하들 그리고 고 상신(相臣) 최규서(崔奎瑞)에게는 제물을 내리고, 고 재신(宰臣) 홍경보(洪景輔)ㆍ오광운(吳光運)에게는 시호를 추증했으며, 고 영백(嶺伯) 황선(黃璿)의 후손을 찾아 기용했었다. 그리고 또 각도에 명하여 당시 정벌에 참여했던 장사로서 현재 살아있는 자와 의를 위해 싸우다 순절한 자들을 샅샅이 찾아내어 모두 포장(褒奬)하고 수록(收錄)하도록 했으며, 고 영의정 이종성(李宗城)에게도 시호를 내리고 제주까지 내렸다.

왕은 임오년 이전의 자기 직분을 다했던 신하들을 추념하여 서지수(徐志修)ㆍ이이장(李彛章)ㆍ윤숙(尹塾)ㆍ임덕제(林德躋)ㆍ한광조(韓光肇)ㆍ조중회(趙重晦)ㆍ임성(任珹)ㆍ이원익(李元翼) 등을 모두 표장(表奬)하였다. 특히 이종성에 대하여는 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나라를 지킨 충성을 칭찬하면서 은례(恩禮)가 남달랐으며 한익모(韓翼謩)는 그 이름이 《명의록(明義錄)》에 올라 있었는데 그가 임오년에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여 그의 충절을 인정하고 죄는 씻어버렸다.

여름에는 영우원을 배알했고, 가을에는 정릉(靖陵)과 선릉(宣陵)을 배알하기 위해 대가가 서빙고(西氷庫) 나루에 머물러 있었는데 밤 사이 강물이 불어 선창이 불완전했으므로 제신들이 수레를 돌릴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선창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나 그를 맡아 관리하는 자가 따로 있고, 거가(車駕)는 이미 만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길을 떴는데 어찌 작은 물줄기 하나에 막혀서 어가를 그냥 돌릴 것인가." 하였다. 여러 장신(將臣)과 호조ㆍ공조의 판서, 도신(道臣)ㆍ수령(守令)들을 명해 힘을 합하여 과천(果川)ㆍ광주(廣州)의 백성들을 독려하게 하였는데 거기에 대가 수행 군병(軍兵)과 좌우의 구경꾼들까지도 모두 앞을 다투어 부역을 한 바람에 날이 저물기 전 역사가 끝나 대가가 강을 건넜다. 능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대가가 선창에 이르자 과천ㆍ광주의 거민들을 불러놓고 하교하기를, "어제 언덕 양편에서 구경하던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부역하는 것을 보니 민심을 알 만하다 향적(餉糴)의 첨가분을 특별히 감제해 주라." 하였다.

온릉령(溫陵令) 최창국(崔昌國)이 상소하여 중묘(中廟)에 배향된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의 출향(黜享) 문제를 대신들과 논의할 것을 청하였는데, 하교하기를, "그 세 사람의 죄는 숨기기 어려운 죄로서 역사에 기록되고 야사(野史)로도 전해지고 있으므로 그들을 아직까지 출향 않은 것을 가지고 궐전(闕典)이요 흠사(欠事)로 삼은 것은 사람 마음은 다 같다는 것을 말해주는 일이며 공론이 어떻다는 것도 알 만한 일이다. 그러나 선왕조에서도 이르시기를 '복위(復位) 이후 그 세 신하는 정식(庭食)하는 존재에 불과할 뿐이니 두려워하는 마음이야 그들 셋에게 높이높이 위에 계시는 선왕으로서야 무슨 두려움이 있을 것인가.' 하셨듯이 도량 넓고 덕이 후하신 성후(聖后)로서야 어찌 자질구레하게 그따위 일에 마음 쓰시겠는가. 그리고 사왕(嗣王)의 도리로서도 오직 그 중흥(中興)의 업적을 중히 여기고 넓은 도량 후하신 덕을 그대로 본받는 것 그것이 계술(繼述) 아니겠는가. 바다같이 넓고도 깊은 성후의 가르치심이 분명히 기주(記注)로 남아 있으니 그 셋 출향 문제는 그대로 접어두라." 하였다.

겨울에 우통례(右通禮) 우정규(禹禎圭)가 상소로 부인들 다리에 관한 폐단을 말하였으므로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그를 금지하는 것이 어떠한가를 물은 결과 제신들 모두가 금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에 윤음을 내리기를,

"선왕께서 왕위에 계시던 50년 동안 가장 큰 시정 목표로 삼으신 것이 다섯 가지 있는데 감필(減疋)ㆍ준천(濬川)ㆍ금주(禁洒)ㆍ호혼(互婚)ㆍ거체(去髢)이다. 이 가운데 위의 두 건은 벌써 시행되어 수십 년 동안 백성들이 사랑으로 돌봐주신 혜택도 입었고 물에 잠기는 걱정도 면할 수가 있었으나 아래 세 건은 잠시 시행하다가 금방 그만두었는데 그것이 물론 선왕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술은 그것이 제사를 중히 여기는 뜻도 있고 백성들 생명을 중히 여기는 뜻도 있어 금하는 것도 성덕(聖德)이요 터놓은 것도 성덕이므로 감히 다시 논의할 성질의 것이 아니고, 호혼 제도는 그 이해(利害)를 감히 딱 잘라 말할 수 없는 일이지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다리를 얹는 것으로 이는 꼭 고쳐야 하고 또 고쳐지기도 쉬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 얹는 것을 금하는 일은 그것이 바로 선왕의 뜻을 밝히고 훌륭한 사업을 이어가는 일 중의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이 나라 부녀자들이 다리 얹는 일은 일체 고쳐야 할 것이다. 이 명령이 내려진 이상 오직 시행이 있을 뿐 다시 반복은 없을 것이며 금석(金石)은 부서질지언정 이 금령은 늦춰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조정에 있는 모든 신료(臣僚)들 그 누가 감히 다리 얹는 일을 다시 거론하여 듣기 번거롭게 하겠는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그 집 가장(家長)이 벌을 받는 것으로 유사가 따로 있어 처리해나갈 것이다." 하고, 사목(事目)을 만들어 팔도에 반포하도록 명했다.

관북(關北)에 기근이 들어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이어 북관(北關)의 기민정책을 감독하게 하였다. 의열궁(義烈宮) 묘호를 고쳐 선희(宣禧)라고 하였다.

13년 봄에 영릉(永陵)ㆍ순릉(順陵)ㆍ공릉(恭陵)을 배알하고 또 장릉(長陵)을 배알한 후 하교하기를, "조상의 고향조차도 조심하고 존경하는 것인데 하물며 손때가 묻어 있는 것이겠는가. 선왕조 신해년에 본릉으로 옮겨 심은 것은 효묘(孝廟)가 손수 소나무와 삼나무를 심었던 고사를 따른 것으로서 지금 저렇게 푸른데 만약 표를 해두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알겠는가." 하고, 영종이 손수 심은 잣나무를 구리로 에워싸게 하고서 '수식(手植)' 두 글자를 새겨두었다.

그때 왕은 원침(園寢)을 옮길 뜻을 이미 결정하고 신해년에 있었던 일에 느끼는 바 있어 먼저 장릉(長陵)을 배알한 다음 홍릉(弘陵)ㆍ창릉(昌陵)ㆍ명릉(明陵)을 두루 배알했고 7월에는 영우원을 옮겨 모실 절차를 정하였다. 왕은 즉위 초부터 원침의 형국이 너무 좁고 자리도 좋지 않다 하여 계절 따라 살피러 올 때마다 근심 걱정에 싸였었고 언젠가는 또 지사(地師)를 명하여 선릉(先陵)의 표해둔 곳과 기호(畿湖)의 여러 산들을 답사하게 하였던 바 지난 기해년에 정해두었던 수원(水原)의 화산(花山)이 가장 좋은 자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와서 금성위(錦城尉) 박명원(朴明源)이 상소하여 대례(大禮)를 서둘러 거행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왕은 대신(大臣)ㆍ각신(閣臣)ㆍ예관(禮官)ㆍ종친(宗親)ㆍ의빈(儀賓) 그리고 문관ㆍ음관ㆍ무관 2품 이상을 다 불러 그 상소문을 보이자 입을 모아 이르기를, "도위(都尉)의 상소야말로 종묘 사직을 위한 한도 끝도 없는 대계(大計)이온데 감히 이의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왕은 울면서 하교하기를,

"산리(山理)가 있는지 없는지 그야 내가 어떻게 잘라 말할 수 있겠는가. 선유(先儒)들도 저기가 좋겠다 여기가 좋겠다라고 한 말들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그러한 이치가 없다고 할 수도 없겠으나 그러나 그 술인(術人)들 말만 믿고 경솔하게 영역(瑩域)을 옮긴다는 것은 필부ㆍ서인으로서도 그래서 안 될 일인데 더구나 국가의 지극히 중대한 일이겠는가. 다만 나에 있어서는 너무나 원통한 한이 수십 년을 두고 지금까지도 밤낮 마음에 맺혀 있어 부모의 장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해 흙이 피부에 닿는다는[土親膚] 이 세 글자만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 것이다. 도위가 상소문 내에다 5개 조항을 열거했는데 그것은 도위 일개인의 말이 아닌 것이다. 지금 내 뜻이 먼저 정해져 있는데 다행히도 모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으니 옮겨 모시는 일을 서둘러야겠다. 그런데 옮겨 모시자면 수원의 화산만한 곳이 없다. 신해년의 의궤(儀軌)가 있고 옛분들의 문자에도 이미 정론이 있으니 이제야 숙원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수원 그 한 곳을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 오늘까지 기다려주었으니 그것이 어디 사람 힘으로 될 일인가."

하여, 제신들이 같은 목소리로 칭하하였다. 이에 대신과 예관 그리고 서운관ㆍ장작감의 제신들을 명하여 우선 영우원 봉심부터 하게 했는데 여러 사람들 의견이 도위의 상소 내용과 꼭 들어맞았고 또 새로 지정한 수원 땅도 봉심하게 했는데 모두가 하늘이 만들어둔 길지라고 하여 이에 화산의 계좌(癸坐)7551) 바닥에다 원침을 정하고 계축년 영릉(寧陵) 천장 때와 신해년에 장릉(長陵) 천장 때의 의궤를 참고 모방하여 행하기로 하였다. 원침을 정한 후에는 또 상설(象設) 일을 계획하도록 하면서 총호사(摠護使)에게 하교하기를, "물자를 절약하기 위해 자기 어버이에게까지 절약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성인의 교훈일진대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도리는 다하여 되도록 최고로 아름답게 꾸며보고 싶다." 하고, 병풍석(屛風石)과 와첨(瓦簷) 그리고 상석(裳石) 등을 설치하기로 했다. 또 하교하기를, "내가 원침 상설에 있어 무엇이든지 최고를 쓰려고 한 것은 광릉(光陵)의 제도를 그대로 따른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 성조(聖祖)의 수교(受敎)도 있는데 만약 이 뒤의 사왕(嗣王)이 오늘의 이것을 보고서 혹시라도 제도에 벗어나는 일을 다시 한다면 그것은 나의 본의(本意)가 아니다." 하였다.

8월 병진일에 구원(舊園)을 배알하고 원침을 열 공사를 계획했으며 경신일에는 신원(新園)의 원호를 '현륭(顯隆)'이라고 정하였다. 그리고 수원의 부치(府治)를 팔달산(八達山) 아래로 이전했는데 신원(新園) 역사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행궁(行宮)을 설치했으며 과천(果川)ㆍ시흥(始興)에다도 모두 행궁 설치를 하고 사근평(肆覲坪)에는 창사(倉舍)를, 안양참(安養站)에는 발사(撥舍)를, 노량(鷺梁)에다는 진정(鎭亭)을 각각 두어 원침 배알 때 연로(輦路)가 머물 곳을 마련하였다.

임술일 구원에 가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다음 원침을 열게 된 사유를 고하고 을축일에 원침을 열었는데 왕은 그때 면복(緬服)을 입고 수도각(隧道閣)에 있으면서 너무 슬퍼 몸을 가누지 못하고 가슴이 치밀어올라 곡도 제대로 못하다가 제신들이 강력하게 청한 뒤에야 비로소 수레를 돌렸다. 어떤 의논하는 자가 본생 부모에게는 예(禮)로 보아 면복이 없는 것이라고 하자, 왕이 듣고는 울면서 이르기를, "내가 옛날 최마(衰麻)를 입어보지 못했기에 지금 추복(追服)한다는 뜻으로 이 원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보려는 것이니 예로 본들 무슨 큰 잘못이랴." 하였다.

10월 갑인일 구원에 가 현궁(玄宮)을 꺼내고 길흉 간의 의장(儀仗)이 펼쳐진 가운데 찬궁(欑宮)에다 빈소를 꾸몄는데 현궁의 체백을 모시고 나올 때 왕은 허겁지겁 울부짖으면서 걸어서 영순(靈輴) 뒤를 따랐고 빈소가 차려진 뒤에는 엎드려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새벽까지도 곡성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하여 성상의 체후가 갈수록 위태로운 상황이었지만 발인 행사 등 모든 일과 신원 역사 등을 지시하는 데는 조금도 빈틈이 없었다. 그날 왕이 울면서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옛 광중에 그렇게까지 갖가지 재해가 있었는데도 차마 28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흐르도록 현궁을 거기에다 모셔두었으니 나의 불효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제부터나 그 하늘에 사무치는 원통함이 다소라도 풀리려는지. 이제 제사 모시는 절차와 원침 주변에 갖출 것을 다 갖추어서라도 그것으로나마 작은 정성을 표해야겠다." 하면서, 말 따라 눈물이 계속 흘렀던 것이다. 그리고 빈소가 차려진 후 각종 제사와 아침ㆍ낮ㆍ밤의 궤전(饋奠)에 있어서도 그를 모두 친히 행하고 제물 올리는 일만 대행시켰는데 대체로 양암(亮陰) 의식을 취한 것이고 또 우제(虞祭)가 아니면 목욕하지 않는다는 예(禮)의 뜻도 따른 것이었다.

정사일에 상여가 떠나면서 독진(纛津)으로 강을 건넜는데 그전에는 으레 용주(龍舟)를 써왔으나 그때 처음으로 부교(浮橋)를 이용하였다. 왕이 처음에는 발인 뒤를 따를 계획이었으나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강어귀까지만 왔다가 환궁하였고 이튿날 새벽에야 뒤쫓아 출발하여 수원부(水原府)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때 상여는 이미 신원에 도착해 있었다.

기미일 신원에다 현궁을 내리고 그날 밤 원침 주변의 공역(工役) 과정을 친히 살펴본 다음 날이 밝아서 어가를 돌려 과천에서 저녁을 나고 그 이튿날 환궁했는데 빈소를 열었을 때부터 현궁을 내릴 때까지는 하늘이 맑고 겨울 날씨가 봄 같다가 대가가 돌아오자마자 큰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면서 날씨가 몹시 추워져 마치 하늘이 도운 것 같았다.

왕이 친히 지문(誌文)을 쓰고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지문이란 후세에 전하기 위한 것인데 차마 쓰지 못할 것을 쓰고, 차마 말할 수 없는 것도 말을 했다. 그 이유는 양궁(兩宮)7552) 의 사랑과 효성을 밝히고 그리하여 이 소자(小子)의 마음을 홀가분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를 유궁(幽宮)에 간직하여 백세 후의 참고가 되게 하리라." 하였다. 그리고 내탕전(內帑錢) 십만 꿰미를 내려 수원의 치소(治所)를 옮기고 집 짓고 하는 데 쓰도록 했으며, 이어 수원 백성들에게 유시하기를,

"이 화산은 그전부터 영기가 모여진 곳으로서 원침을 정하기로 결의하고 드디어 옮겨 모시는 일을 마쳤으니 이 고을은 바로 나의 묘가 있는 고을이며 너희들은 바로 이 고을 백성들이다. 나는 앞으로 너희들을 내 식구처럼 여기고 먹을 것도 넉넉하게 하고 가산도 풍족하게 해주어 너희들로 하여금 생활의 안정을 누리고 생업을 즐기도록 하여 내가 할 책임을 다하고 내 마음도 여유있게 가지리라. 보통 행차하는 연로가에도 은택이 베풀어지는 것인데 하물며 이 고을 이 백성들이겠느냐. 원침 부근의 면리(面里)와 그곳에서 옮겨간 백성들은 앞으로 십년 동안 복호(復戶)하고, 읍 전체의 면리는 일년 동안 복호할 것이며, 온천 행행의 행차를 두 번씩이나 본 부로(父老)들은 조관(朝官)인 경우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이면 가자(加資)하고, 수원 관내의 유자와 무인에 대하여는 내년 봄 전성(展省) 때 과거시험을 보일 예정이니 너희들도 내가 너희들을 무마하려고 하는 이 충심과 지성을 이해하고 한마음으로 힘을 합쳐 원침을 잘 보호하고 영원토록 변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왕이 원침 옮겨 모시는 일을 하려면서 내사(內司) 관원을 강화도로 보내 인(䄄)을 불러들여 남 모르게 성 안에까지 들어왔었는데 조정 신료들은 까맣게 모르는 사실이었다. 이윽고 자전(慈殿)이 누차에 걸쳐 언교(諺敎)를 내려 제신들을 책망했으므로 대신 이하가 청대를 했는데 만나는 것을 불허하였고 문을 밀치고 들어갔어도 접견을 하지 않았다. 자전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인을 그 배소로 다시 압송하도록 하였으며 여러 대신들이 금부의 당상관과 포도 대장으로 하여금 자전이 시킨 대로 받들어 거행하도록 했는데 왕은 그 즉시 수레를 챙기라 하여 돈화문(敦化門) 밖까지 이르렀다. 이에 재신들은 죽기를 작정하고 수레를 잡고 늘어졌기 때문에 수레가 더 이상 가지를 못하고 부득이 대내로 돌아왔다. 그해부터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제신들은 아무도 모르게 인을 서울로 불러들이기도 하고 뜻밖에 대가가 친히 가서 그를 만나보기도 하면서 별영(別營)ㆍ태창(太倉) 남영(南營)ㆍ북영(北營) 등 여러 곳을 행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을 일체 비밀에 부치고 군대를 시켜 호위했기 때문에 문을 밀치고 들어갈 수도 없었고 뜰에 가서 간하려 해도 전달이 되지 않았다. 왕은 원래 도량이 넓고 선(善)이라면 금방 따랐지만 유독 그 일에 있어서만은 일체 권도를 썼던 것이다. 그리고 늘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그를 두고 이른바 주공(周公)의 과실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공의 심정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면 내 마음도 이해를 할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제신들이 인의 문제에 대해 언급하는 자가 있으면 왕은 곧 화를 내고 꾸짖었으며 대성(臺省)에다 금방(禁榜)을 걸어두고 그 문제라면 말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말할 책임이 있는 자에게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이 어찌 치세(治世)의 일이겠는가. 나도 마지못해 하는 일이다. 시간을 두고 조정 분위기가 다소 안정이 되면 그때는 하나도 숨길 것 없이 문호를 활짝 열 것이니 그동안은 억지로 쟁집하지 말라." 하였다.

양녕 대군(讓寧大君) 사당에 사액(賜額)을 내려 지덕(至德)이라고 하고, 효령 대군(孝寧大君)에게는 사제(賜祭)를 하였다. 왕은 언제나 국가 초기의 우수했던 일족들을 생각하여 진안 대군(鎭安大君) 무덤 앞에도 비를 세우고, 의안 대군(宜安大君) 묘에도 수호하는 사람을 두었으며, 단종(端宗) 때의 다섯 종신(宗臣)에게는 단(壇)을 쌓고 제사까지 지냈다.

14년 봄에 왕이 병석에 누워 한 달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원상회복이 되었는데 이때 제신들이 경하할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뜻밖의 재변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했다가 병이 들어 어버이에게 걱정을 끼쳐드렸으니 자신을 나무라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감히 무슨 하례를 받을 것인가." 하였다.

동북(東北)면과 양서(兩西)에 기근이 들어 유민(流民)들이 서울까지 들어오자 왕은 조묘를 배알하고 연(輦)을 운종가(雲從街)에다 세워두고는 유민들을 불러 위로한 다음 식량과 옷가지를 내려주고 선전관(宣傳官)을 나누어 보내 각기 본도에 가서 죽은 자는 안장해주고 도신(道臣)과 수령들에게 죄를 내리도록 하고 이어 각도에 경계를 내려 안집(安集)시키고 무마하는 정책을 강구하게 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주위 산들을 두루 살펴본 다음 독성 산성(禿城山城)으로 가 경진년7553) 온천 행행 때 구경 나왔던 부로(父老)들을 불러 접견하고는 쌀을 내려주었다. 문묘(文廟)를 배알하고 이어 계성사(啓聖祠)에다 술잔을 올렸는데 그해가 공부자(孔夫子)와 주부자(朱夫子)가 태어났던 해였기 때문이었다.

황단(皇壇)에 망배(望拜)를 올리고 중국인 아병(牙兵)을 불러 접견한 다음 하교하기를, "이 나라로 모시고 돌아왔던 중국 사람들에 대해 효종(孝宗)께서는 궁궐 밑에서 붙여 살게 했으며 왕위에 오르신 뒤에는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가구수대로 식량을 공급해주게 하고 뒤이어 곧 훈련원 아병으로 편입시켜 어업(漁業)에 종사하며 살아가게 했었는데 요즘 와서 풍습이 그전만 못하여 심지어는 열무장(閱武場) 안에서 가왜초(假倭哨) 노릇을 하게까지 하고 있으니 중국 천신(薦紳)의 후예들인 그들로서 어떻게 그리도 누추한 일들을 할 것인가. 너무 한심스럽고 애석한 일이다. 오늘이 바로 황단에 망배하는 날이어서 옛 성군에 대한 그리운 감회를 풀래야 풀 길이 없는데 바로잡았으면 좋을 일까지 날짜를 끌 이유가 뭐 있겠는가." 하고, 중국인들에 대해 아병이라는 이름 대신에 용호영(龍虎營)의 금려(禁旅), 진무영(鎭撫營)의 의려(義旅)ㆍ장려(壯旅)들처럼 한려(漢旅)로 호칭을 고쳤다. 그리고 30명으로 인원수를 정해 제향 때 신탑(神榻)을 받드는 일 또는 제찬 차리고 걷고 하는 일을 맡게 하여 충의(忠義)가 하는 일을 대신하게 하고, 또 황단을 수직하는 관(官)도 중국인 자손들이 맡도록 정하여 한려끼리 돌아가며 하게끔 절목(節目)을 만들어 준행하게 하였다.

의소(懿昭)의 묘를 배알하였다.

6월 정묘일에 사자가 탄생하여 호칭을 원자(元子)로 정하고 백관들 하례를 받았는데, 중외의 신서(臣庶)들에게 유시하기를,

"지금 내가 하늘이 내리신 복을 받고 말없이 도우시는 조종(祖宗)의 덕분으로 경술년 계미월 정묘일에 원자가 탄생하였는데 이해는 바로 성현(聖賢)이 나시던 해이며, 이날은 또 자궁(慈宮)께 수(壽)를 비는 날이기도 하다. 게다가 궂은비마저도 활짝 개여 햇살이 그림 같고 오색 무지개가 종묘 우물에 뻗어 있으며 신비로운 빛이 궁궐 숲에 둘러 있으니 이 어찌 하늘이 주신 기쁨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원자 울음소리가 품안에서 나오자마자 어린이 늙은이 할 것 없이 어깨가 부딪치고 발에 차이면서 뛰어나와 거리를 메워서 있는 그 좋아하는 빛이라든지 춤이라도 추는 모양이 자기 집안의 경사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정도이니 이는 사람들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에게는 하늘의 복을 누릴 만한 덕도 인심을 얻을 만한 선정도 없는데 나 한 사람의 기쁨에 대해 하늘이 기뻐해 주시고 사람들이 기뻐해주니 내 장차 무엇으로 하늘에 보답하고 사람들에게 보답하겠는가.

상제가 이 나라를 돌보사 우리에게 조윤(祚胤)을 주셨으니, 오늘로부터 국가 운명이 다시 계속될 것이며, 오늘로부터 조종의 공덕이 다시 유지될 것이며, 주(周)나라 본지(本支)의 시7554)도 오늘을 시작으로 읊어질 것이며, 한(漢)나라 반석(磐石) 노래7555)도 오늘을 시작으로 퍼질 것이다. 위로 자전과 자궁께서 애타게 바라시던 마음을 풀어드렸고, 아래로 신서(臣庶)들이 우러러 기다리던 숙원을 이루어준데다가 생년 생일까지 성인이 태어나신 해 또는 자궁의 수를 비는 경사스러운 날과 맞아떨어져 우리가 만년 억년 끝이 없으리라는 것을 미리 보여준 셈이 되었으니, 난들 어찌 하늘에 보답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하늘에 보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에게 보답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내 한 번만 베푸는 것이 아니고 자주 베풀 것이니 그를 담당하고 있는 신(臣)은 재용이 떨어져간다고 말하지 말라. 사람들 마음이 화합하면 하늘 마음도 화합하여 비올 때 비오고 볕날 때 볕나 만물이 풍성하고 시절도 풍년이 드는 법이다. 더구나 경술년이라면 예부터 풍년 든 해가 많지 않았던가."

하고, 이어 대사(大赦)를 했는데 그때 풀려난 자가 모두 1천 1백 54명이었고, 서울 외지 할 것 없이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이상, 사서(士庶)는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는 모두 가자(加資)를 했는데 그 수가 2만 5천 8백 10명에 달했으며, 1백 세 노인에게는 쌀과 육류를 내리고 각도의 해묵은 적곡 중 병신년 봄 이전의 문부에 마감 정리된 양만큼 모두 줄이거나 면제해주는 일을 단행했으며, 결세(結稅)ㆍ어세(漁稅)ㆍ염세(鹽稅)ㆍ장세(場稅)ㆍ사세(寺稅) 등 당연히 조세 항목에 들어있는 것들도 그 수를 감제(減除)하였다.

그리고 경연 신료에게 하교하기를, "자궁의 하교에 '내가 그전에는 생일이 돌아와도 반가운 생각이 없었는데 명년부터는 그날이면 음식 차려 잔치도 하고 즐기기도 해야겠다.' 하셨다. 내가 40년간이나 자궁을 모셔오면서 한 가지도 자궁 마음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없었는데 이번에 하교를 받고 나니 이제 자궁 뵈올 면목이 조금 서는 듯하다." 하였다.

가을에는 주교(舟橋) 제도를 정하였다. 왕이 원침을 옮겨 모시고는 해마다 한 차례씩 전성(展省)할 예정을 세우고 강을 건널 때 용주(龍舟)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한 점이 많다 하여 주교로 바꿔보도록 묘당(廟堂)에 명하여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올리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상의 마음에 안 맞아서 상이 직접 생각을 짜내 《주교지남(舟橋指南)》을 만들고 그대로 실시했다.

그해에 큰 풍년이 들었는데, 감로(甘露)가 내렸다고 말하는 연신(筵臣)이 있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으로서는 풍년이 들면 그것이 최상의 상서이지 그 외의 다른 상서들은 바랄게 없는 것이다. 더구나 금년에는 큰 경사까지 겹치지 않았는가." 하고, 도형(徒刑)ㆍ유형(流刑)에 처해진 자의 처첩(妻妾)이 유배지로 가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율문(律文)에 의해 허가해주도록 명했는데 그 역시 그해의 특별 은총이었다.

겨울에 건원릉(健元陵)과 목릉(穆陵) 원릉(元陵)을 배알했고, 《무예도보(武藝圖譜)》가 완성되었다. 경모궁(景慕宮) 대리 청정 당시 척계광(戚繼光)의 곤봉(棍棒) 등 6기(六技)에다 죽장창(竹長槍) 등 12기(十二技)를 더 보태 그것이 바로 18기(十八技)였는데, 왕이 거기에다 또 기창(騎槍) 등 4기(四技)를 더 늘리고 원도보(原圖譜)와 속도보(續圖譜)를 합쳐 인쇄하여 쓰도록 명했다.

15년 봄에 비변사에 명하여 원침 행행 때의 정례(定例)를 만들게 하고 정례 당상관을 차출하여 매 행행 때마다 그 일을 맡아 거행하게 하였다. 현륭원(顯隆園)을 배알하고, 각 궁방(宮房)이 도서(圖署)를 남발하여 외읍(外邑)을 야금야금 침탈하는 폐단을 금하게 하면서 하교하기를,

"임진년 이후로 토지와 토지 사이의 한계가 흐려져 주객(主客)을 구분하기 어려운 틈을 타 호우(豪右)들이 그를 독차지했기 때문에 공전(公田)이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리하여 고 재상 유성룡(柳成龍)이 절수(折受) 제도를 창안했던 것이지만 그로부터 2백 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는 토지 사이의 경계가 이미 그어져 있으니 절수라는 명칭을 아직도 그대로 쓰고 있는 그 자체가 이미 무의미한 것이다. 따라서 속세(屬稅)의 법과 함께 중간에 다 포기했어야 했는데 절수라는 이름만 붙이면 금방 면세(面稅)를 해왔던 그 제도에 대해 늘 개운찮은 생각이 있어왔던 터다. 지금 궁방들이 도서를 남발하는 그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그 나머지야 알 만한 일이 아닌가. 지금 새로 발족한 장영(壯營)이라고 거기에는 이익을 추구하는 무리도 없고 멋대로 팔아먹는 일도 없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지금부터서는 엄한 단속을 재삼 강조하여 궁방이고 영문(營門)이고 아문(衙門)ㆍ조신(朝臣) 할 것 없이 별도로 하사받은 토지라고 하더라도 그 절급(折給)한 공문서에 만약 재가 인장이 찍혀있지 않으면 수령이 순영(巡營)에 보고하여 그 즉시 장문(狀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장릉(莊陵)에 배식단(配食壇)을 세웠다. 왕은 항상 단종조 제신들에 대해 시대를 초월한 감회가 있어 어가가 노량(露梁)을 지날 때면 곧 육신사(六臣祠)에다 제물을 내리곤 하였다. 경기도 유생들이 상언(上言)하여,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도 그 충효와 절의가 육신들과 다를 바 없다고 주장하면서 창절사(彰節祠)에다 추향(追享)할 것을 청해 왔는데,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일전에도 노량을 지나다가 육신사가 나오기에 수레를 멈추고 탄식도 하고 행전(行殿)에서 밤을 지새우며 일어나는 감회를 금할 길이 없어 촛불을 밝히게 하고 유제(侑祭)의 글월을 입으로 부르며 쓰게도 했었다. 육신이야 물론 더없이 훌륭하지만 금성(錦城)ㆍ화의 같은 이들도 종실 속에서 그와 같은 절의가 나왔다는 것 그 얼마나 더욱 장한가. 그 두 사람 외에도 사육신(死六臣) 못지않은 이들이 많으니 지금 추배(追配) 때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사실 절의를 장려하고 충절을 포양하는 국가 정령에 부합되는 일이다. 내각과 홍문관으로 하여금 다방면으로 고찰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그때 영월부(寧越府)에 화재가 있어 불탄 민가 사이에 자규루(子規樓) 옛 터가 발견되었는데 바로 단종이 기거하던 곳이었다. 도신이 그 사실을 알려오자, 왕이 이르기를, "일이 마치 뭐가 느껴져서 그리된 것 같구나." 하고, 이에 장릉 백성(柏城) 밖에다 단을 쌓아 당시 순의(殉義)한 제신들을 추배하고 봄 가을로 제사를 올리도록 명했는데, 정단(正壇)에 32인, 별단(別壇)에 1백 98인, 사실이 분명치 않은 자 8인, 연좌당한 자 1백 90인이었고 이어 배식록(配食錄)을 만들었던 것이다.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즉위 초부터 마음에 늘 잊혀지지 않는 것이 바로 균역(均役)에 관한 이해(利害) 문제와 사노(寺奴)에 관한 폐단인데, 균역에 있어서는 감포(減布)7556) 정책이 바로 만세까지 미칠 혜택인데도 그를 맡아 관리하는 신하가 왕의 의도대로 잘 집행을 못했던 것이다. 선왕(先王)께서는 늘 주장하시기를, 어염세(魚鹽稅)는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나 다름 없고 선무포(選武布)7557)는 결과적으로 백성을 속이는 일이라고 하셨으므로 나도 선왕의 뒤를 이어 그것을 바로잡고 개혁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수요를 대체시킬 만한 재원이 없어 당장 논의는 못하고 있어도 내가 장영(壯營)을 신설한 것은 나대로의 뜻이 있어서 한 일로 단시일에 무슨 효과를 기대하기란 사실 어려운 실정이다. 그러나 사노 문제는 지금 백성들 뼈에 사무치는 폐단으로 노비에 관한 법보다 더한 것이 없어 선두안(宣頭案)을 볼 때마다 언제나 마치 내 몸에 병이 있는 듯이 느껴진다. 쇄관(刷官) 제도는 아주 없애서 폐단이 다소나마 바로잡혀지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각도에서는 찾아내는 일을 여전히 하고 있어 그 병은 고칠 약이 없다. 말하는 자들 중에 혹자는, 금년부터 시작하여 신해년에 제정한 법7558)을 다소 수정해서 쓰는 것이 옳다고 하고, 혹자는 기한이 만료되기를 기다려 양민이 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또 과거 응시의 길을 열어주어 스스로 그 신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혹자는 보충대법(補充隊法)을 만드는 것이 옳다고 하며, 혹자는 그 읍에서 신공(身貢)을 받아 균역청(均役廳)으로 하여금 그 대신 값을 주고 사서 쓰게 하는 것이 옳다고도 하고 있는데, 그 모두가 다 미봉책에 불과한 말들이고 일단 그 폐단을 바로잡으려면 그 이름을 없애버리는 길밖에 없다. 그러나 기자(箕子) 이래로 이미 정해진 명분을 하루아침에 싹 없앨 수도 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사천(私賤)들이 덩달아 너도나도 본받을 염려도 있다. 그렇다면 사노 폐단은 끝내 바로잡을 수 없는 문제란 말인가." 하고, 이어 널리 각도에 자문을 구하라고 명했으나 결국 정론을 못 찾고 말았다.

여름에 홍수가 나서 한성부가 집들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기고 했다고 아뢰자, 각신(閣臣)과 옥당ㆍ사관 등을 오부(五部)ㆍ사교(四郊)ㆍ팔강(八江) 등지로 나누어 보내 위로하게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그 일은 비변사 낭관들이 할 일이로되 특별히 그대들을 보내는 이유는 어리석은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에서 잊지 않고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하였다.

가을에 각도에 명하여 납육(臘肉)을 호서(湖西)의 예대로 경청(京廳)이 공물로 환산해서 바치도록 하였다. 과거에는 경영(京營)에 엽치군(獵稚軍)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옛날의 응사계(鷹師契)이다. 사냥을 나갈 때면 언제나 그 사냥꾼들이 열씩 백씩 무리를 지어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산으로 들로 쏘다니고 마을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가끔은 서로 죽이고 하는 변고까지 있었으므로 왕은 그 폐단 때문에 꿩사냥을 하지 말고 대신 값으로 바치도록 명했던 것인데 이때 와서는 또 멧돼지나 노루사냥도 꿩사냥과 다를 바 없다 하여 그것 역시 공물로 환산하여 하도록 명했다.

궁인(宮人) 이씨(李氏)에게 수칙(守則)이라는 작첩과 정렬(貞烈)이라는 호를 내리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을 표하여 '수칙 이씨지가(守則李氏之家)'라고 하였다. 이씨는 그전에 경모궁(景慕宮)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여인으로서 늙어 머리가 희도록 초막집을 그대로 지키며 사람들과도 접촉을 하지 않았는데 그 소식을 들은 왕이 느끼는 바 있어 표이(表異)의 은전을 특별히 베풀었던 것이다.

사릉(思陵)을 배알하고 어진(御眞)을 베껴왔는데 선왕조 때부터 10년마다 한 번씩 베끼던 고사대로 한 것으로서 한 장은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경모궁의 망묘루(望廟樓)에다 봉안하고, 한 장은 현륭원 재실(齋室)에다 봉안하였으니, 아침 저녁 정성(定省)의 뜻을 담은 것이다. 뒤에 화령전(華寧殿)에다 봉안하고는 각신(閣臣)에게 이르기를, "열성조가 다 휘호(徽號)가 있는데 영릉(英陵)과 효묘(孝廟) 두 조(朝)만은 휘호를 받지 않으셨다. 내 어찌 감히 두 조의 성절(盛節)을 뒤따를 수 있겠는가마는 신축년 표제(標題) 때부터 제신들이 많은 말들을 했었는데 이제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리고 또 연월(年月)만으로 표제한 일은 또 열성조에는 전례가 없었던 일이기도 하다." 하였다.

겨울에 호남의 도신(道臣)이 윤지충(尹持忠)ㆍ권상연(權尙然)이 자기 아비가 죽었는데 제사도 모시지 않고 사판(祠版)을 불태워버렸다고 아뢰었다. 그 당시 일종의 사도(邪徒)들이 서양(西洋)의 야소(耶蘇) 교리에 젖어들어 연경 책방에서 책을 구입하여 저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익히고 하였는데, 그는 하늘을 속이고 귀신을 홀대하고 임금도 어버이도 다 버리고 윤기(倫紀)를 송두리째 무시하고 명분(名分)이 뒤범벅된 교리로서 어리석은 백성들을 유혹하고 저들끼리 당여(黨與)를 결성하는 등 경기 지역과 양호(兩湖) 사이에서 나날이 번성 일로에 있었다. 그중의 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ㆍ이승훈(李承薰)ㆍ권일신(權日身) 등이 더욱 두드러진 자들이었으며 최필공(崔必恭)ㆍ이존창(李存昌)도 밑바닥 층에서는 가장 깊이 빠져있는 자들이었다. 유사가 그들을 잡아두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형을 가하여 가지런하게 만드는 것은 덕으로 인도함만 못한 것이다. 내 장차 그 서적은 불태워버리고 그들은 다시 사람으로 만들겠다." 하고는, 서울과 외지를 막론하고 집에 서양 서적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모두 관에 자수하도록 명하여 책은 모아 불태우고 가환ㆍ약용ㆍ승훈 등은 견책하여 저들 스스로 새로운 길을 찾게 했으며 일신과 필공은 형조로 송치하고 존창은 호옥(湖獄)에다 가두는 등 형을 가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여 되도록 감화(感化)를 기했던 것이다. 그런데 왕이 그 도계(道啓)를 보고나서는 깜짝 놀라 이르기를, "이렇게까지 패역 무도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지충ㆍ상연에게 모두 대벽(大辟)을 적용하라." 하고, 또 하교하기를, "영의 강한 기운이 쇠퇴하면 음의 재앙이 고개를 들듯이 사설(邪說)이 퍼지는 원인은 정학(正學)이 밝지 않아서인 것이다." 하고, 묘당(廟堂)과 각도에 명하여 경(經)에 밝고 행실이 올바른 선비들을 각기 천거하도록 하였으며, 또 명(明)나라 말 청(淸)나라 초기에 유행했던 패관 소설[稗官小品] 종류를 단속하고, 연경에 가서 서적 구입을 못하도록 금법을 거듭 엄히 했다. 그리고 영남 선비들이 사학에 물들지 않은 것은 바로 선정(先正)들의 유풍(遺風) 때문이라 하여 옥산(玉山)ㆍ도산(陶山) 등 서원(書院)에 제를 내리기도 하였다.

《악통(樂通)》이 완성되었다. 왕은 주자가 인정한 채원정(蔡元定)의 《율려신서(律呂新書)》가 미처 관현(管絃)에 올려지지 못한 것을 늘 한스럽게 여겨 그를 다시 손질해서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장용영(壯勇營)을 신설하였다. 그보다 앞서 임인년 봄에 숙종조(肅宗朝) 고사를 본따 무예(武藝) 출신 및 일찍이 영의 교위를 지냈던 자 30명을 선발하여 번(番)을 나누어 명정전(明政殿) 남쪽 행랑채에 숙직하게 하고, 을사년에 와서 그를 장용위(壯勇衛)라 칭했으며, 또 척계광(戚繼光)의 남군(南軍) 제도를 모방하여 5개 사(司)에 25초(哨)를 두고 그해에 금려(禁旅)의 1번 50명을 감하여 장용위로 옮겼다. 그리고 액외 내금위(額外內禁衛) 규정을 준용하여 액외 장용위(額外壯勇衛)를 두고 10명은 사부(士夫)로 충원했으며, 또 선기대(善騎隊) 3초를 두어 훈련 도감의 경기 지역 승호군(陞戶軍)을 그것에 이속시켰다. 기마병ㆍ보병 합하여 경향(京鄕)의 군대가 3천 4백 50명이었는데 병조의 별부료 병방(別付料兵房) 규정을 준용하여 병방을 두고 군무(軍務)를 맡아보게 하고는 그를 이름하여 장용영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백성으로부터 많은 조세를 거두어들이던 내수사 장토(庄土)를 없애고 양서(兩西)에는 둔전(屯田)을 두었으며 내외를 막론하고 필요 이상의 경비와 필요 이상의 인원을 줄이고 내탕의 돈을 출자하여 곡식을 각도에다 쌓아두고 병영의 용도에 쓰도록 했다. 그리고 또 제조(提調)를 두어 일찍이 호혜당(戶惠堂)7559) 을 지낸 사람을 골라 임명하였다.

16년 1월에 현륭원을 배알하고 2월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했다. 규장각(奎章閣)에 대제학을 두어 문형(文衡) 권내의 사람 중에서 왕지(王旨)를 받아 내각에 추천 임명하도록 했으며, 현직 제학(提學)이 재상 제수를 받으면 자연 올라가 대제학이 되고, 과거 직각(直閣)을 지낸 사람이면 전형 없이 자리가 나는 대로 곧바로 추천이 가능하며 대교(待敎)를 지낸 사람은 역시 남상(南床)7560) 으로 곧바로 추천이 되도록 규정을 정했다.

여름에 윤구종(尹九宗)을 친국하였다. 구종이 혜릉(惠陵) 앞을 지나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았던 일이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하교하기를, "내가 선왕(先王)의 입장이라고 생각할 때 비록 재일(齋日)을 당했지만 친국을 않을 수 없다." 하였는데, 그가 공초를 바쳤는데 진술 내용이 패역 무도하여 지레 죽고 말았었다.

영남 유생 이우(李瑀) 등이 막중한 일임을 빙자하여 의리(義理)를 구현한다는 구실로 임오년 일을 상소로 진술하였다. 왕은 그들을 불러 경(經)과 권(權)의 한계에 관해 개유하고 연본(筵本)을 가지고 돌아가 그 지방 인사들에게도 알리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영남 유생들 상소 이후로 장주(章奏)가 쉴새없이 올라오고 관학 유생들까지도 장주를 올려 기어이 관철하려고 하였으므로 왕이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준엄한 하교를 내려 제신들이 합문 밖에서 관을 벗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그 어느해 일에 대해서는 감히 한 번도 분명하고 속시원한 말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과연 원수를 숨겨두고 원한을 잊어서 한 일이겠는가? 옛날 선왕께서 갑신년 2월 20일에 대신 이하 제신들을 진전(眞殿) 문 밖에다 부르시고 어필로 손수 쓰신 구주 문자(口奏文字)7561) 를 반포하시며 이르기를 '만약 아무해의 일을 들먹이는 자가 있으면 구(耉)ㆍ휘(輝)ㆍ경(鏡)ㆍ몽(夢)7562) 에게 적용했던 법으로 처단할 것이다.' 하시고, 또 이르시기를 '이렇게 해야지만 네가 드러내지 못한 죽은 네 아비의 뜻을 밝힐 수 있을 것이고, 원통하고 애석한 내 마음도 설명할 길이 있을 것이며, 세신(世臣)들도 너의 본심과 아울러 네 아비의 뜻을 알게 될 것이다.' 하셨다. 그리고 대신 이하 제신들을 또 재전(齋殿)으로 불러 종통(宗統)을 바로잡는 일에 대한 윤음을 내리셨던 것이다. 그 당시 사실들은 모두 내가 병신년에 상소한 이후 세초(洗草)해 버렸지만 윤음과 진전에 올렸던 구주 문자(口奏文字)는 여전히 사고(史庫)와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남아 있다. 그리고 내가 그후 전석(前席)에서 다짐을 했었는데 만약 선왕이 승하하신 후 이제는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 하여 갑신년에 했던 대답을 모두 번복해버리면 그게 어디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있는 이 섬기듯 해야 하는 도리이겠는가. 뿐만 아니라 당시 하교 시의 '통석(慟惜)' 그 두 글자는 바로 지난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뜻이니 내 그를 폐부에 새겨두었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억제하려 해도 억제할 수 없는 것이 그 슬픔이요 막아버리려 해도 막아지지 않는 것이 감정이라서 부자간 천륜으로 볼 때 그 원수가 저기 있어 앉으나 서나 눈에 걸리었다. 그리하여 우선 임시 권도로 을미년 주토(誅討) 때 내가 직접 그 일을 대신 맡았는데 이는 꼭 선왕이 자리에 계실 때 하려고 해서였던 것이고, 그 이듬해 병신년 봄에는 내가 대리 청정을 하면서 눈물 어린 진정소를 올려 천지간 망극한 은총을 받고 차마 볼 수 없는 당시 기록들을 모두 세초(洗草)해 버리라는 특명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때 성상께서는 하교하기를 '그렇게 하는 것이 사자대(思子臺)ㆍ망자궁(望子宮)7563) 보다 훨씬 더 낫고 나도 이제 지하에 가면 볼 낯이 있겠다.' 하시고, 이어 백관으로 하여금 하례를 올리도록 했으며 호(號)를 주신다는 윤음과 함께 어제의 유서(諭書)와 어필로 된 은인(銀印)을 내리셨다. 그리고 나에게 묘(墓)를 전성하도록 명하셨는데 이상이 대체적인 선왕의 본뜻이었던 것이다.

병신ㆍ정유 이후로 자주 일어난 역옥(逆獄)들이 따지고 보면 모두가 그해 그 사건 때문에 일어난 것들이지만 나의 집념은 바로 겉으로는 정사에서 형적(形迹)을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는 내 할 도리를 하면서 조용한 가운데 다스릴 자는 다스리고 하여 위로 성은(聖恩)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아래로 내 이마에 땀이나 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나에 대해 북면(北面)을 하고 있는 조정 신료들로서 지금 이 시점에 나더러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내 본분을 다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는 을미년 이전 주토를 당한 자들처럼 난적(亂賊)이요 역신(逆臣)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30년 한 서린 마음으로 어떻게 차마 그 왕언(王言)을 말하며 그 장주(章奏)를 볼 것인가.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그 사실은 점점 묻혀져 결국 차마 들출 수 없다는 것 때문에 후생들이 그 막중한 사실을 전혀 모르게 될 듯하여 영남 유생들이 왔을 때 불러서 접견하고 비답도 내렸는데 그것은 우선 그들을 효유(曉諭)해야겠다는 급급한 생각에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 뜻을 짐작하는 자는 그 비답을 보고 틀림없이 슬피 울었을 것이고 우매한 자들은 그 소식을 듣고는 두려워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신자(臣子)들이 어찌 차마 그 사건을 놓고 그것을 개인적인 원한을 풀고 협잡질을 할 계기로 삼기 위해 은연중 임금이 원수를 숨겨주고 원한을 잊고 있는 것처럼 책임을 위에다 돌리면서 감히 그들을 징토(懲討)한다는 데 가탁하여 공석 사석을 가리지 않고 다반사처럼 지껄이고 다닐 것인가. 그렇게 되면 조선 천하에 이른바 임금이란 자는 과연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그 사실을 어떻게 밝히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경들은 그 방법을 생각해보라." 하여, 그 하교를 계기로 중외가 모두 왕의 의중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하교하기를, "지금의 남단(南壇)은 바로 옛날 하늘에 제사하던 환단(圜壇)이다. 이 땅에 이 나라를 단군(檀君)이 처음 세우셨는데 역사에 의하면 그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무더기를 쌓고 하늘에 제를 올렸다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국(大國)으로부터 분봉(分封)을 받지 않았어도 참람된 데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가 원래 혐의가 있는 일이면 그를 분명히 하는 데 엄했기 때문에 광묘(光廟) 이후로 '환단'을 고쳐 '남단'으로 불러왔다. 대체로 군ㆍ국ㆍ주ㆍ현(郡國州縣)이 각기 풍사(風師)ㆍ우사(雨師)에 제 올리는 곳으로서 경건한 마음으로 조촐하게 모시는 정성이야 환단이거나 남단이거나 그 이름이 다르다 하여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그것이 문헌상으로 빠져 있고 담당자들은 그들대로 인습에만 젖어왔기에 현재 행하고 있는 의식은 도리어 채소만으로 간단히 차리는 농잠(農蠶) 제사만도 못한 실정이니 그를 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대신과 논의하여 올바르게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가을에 광릉(光陵)을 배알하고 조관(朝官)은 나이 70세, 사서인은 나이 80세로서 지난 병진년과 을해년 선왕의 행행 광경을 구경하고 지금의 행행까지 본 자에게는 모두 한 자급씩 더해주고 나이 1백 세가 된 자에게는 쌀과 고기를 더 얹어주었으며 백성들에게는 그해의 향곡(餉穀)과 적곡(糴穀)에 있어 모비(耗費)분을 특별히 견감하였다.

17년 정월 초하룻날 선원전(璿源殿)에 잔을 올렸다. 왕은 즉위한 이후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반드시 진전(眞殿) 배알을 해왔었는데, 그날은 영종의 나이 만 1백 세가 되는 날이라 하여 대신(大臣)ㆍ경재(卿宰)ㆍ시종(侍從) 모두 반열에 참여하도록 명하고 예를 마친 후에는 지난 병신년 이전에 본 품계에 있었던 아경(亞卿)ㆍ하대부(下大夫)에겐 모두 한 급씩 가자하고 경외(京外)의 백세 노인들에게는 가자와 함께 쌀과 비단을 내렸다.

하교하기를, "초하룻날 아침에 묘궁(廟宮) 배알을 하고 나니 나도 선왕과 똑같은 마음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 행여 먹을 것을 대줄까 바라는 저 삼방(三方)의 백성들을 생각할 때 굶주려 구렁을 메우지나 않았는지? 밤낮으로 생각하는 마음 어느 때라고 간절하지 않겠는가마는 올해 배알 끝에 그날의 그 마음은 더욱 간절한 바 있다." 하고, 홍화문(弘化門)에다 연(輦)을 멈추고 수계(隨計)의 관리를 불러 접견했는데 하나는 그 문이 바로 선왕조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던 문이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내탕에서 내린 진휼한 물자를 우선 지방관들에게 배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이어 내탕의 돈과 후추를 삼남(三南)으로 나누어 보내 진휼 물자에 보태게 하였다.

연신(筵臣)에게 말하기를, "그전의 명인 석학들이 모두 내수사(內需司)를 없애야 한다고 말들 했는데 실지로 살펴보면 우리 나라 내수사는 당나라 때 덕종(德宗)과 현종(玄宗)이 사용(私用)하던 경림고(瓊林庫)ㆍ대영고(大盈庫)와는 다르다. 궁중의 1년 치 씀씀이가 각기 일정한 수량이 정해져 있는데 지금 만약 내수사를 없애고 탁지부에다 맡긴다면 탁지부로서는 어떻게 운영해나갈 방법이 없을 것이다.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되도록 절약하여 1년 쓰고 난 나머지를 다른 창고 하나에다 별도로 저장하고 그 이름을 보민고(保民庫)라 하여 수재나 한해에 대비하게 하고 있는데 전후로 나간 진휼 물자도 다 거기에서 나간 것이다." 하였다.

현륭원을 배알하고 수원부(水原府)를 화성(華城)이라 이름했으며, 부사(府使)를 승격시켜 유수 겸 장용 외사(留守兼壯勇外使)라고 하고, 판관(判官)을 두어 보좌하게 하였다. 장용영(壯勇營)의 병방(兵房)을 장용사(壯勇使)로 고치고, 문첩(文牒)에는 대장(大將)이라는 칭호를 써 마치 어영사(御營使)를 칭하여 어영 대장(御營大將)이라고 하듯 했으며, 또 도제조를 두어 마치 경리영(經理營) 도제조를 삼공(三公)이 으레 겸임하듯 하는 식으로 했다. 그리고 호위 대장(扈衛大將)도 같은 청(廳)으로 소속시켜서 내영 외영 제도를 비로소 완비하였다.

3월에 숙선 옹주(淑善翁主)가 태어났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면서 시임ㆍ원임의 각신(閣臣)과 각신의 자제들 그리고 승지ㆍ사관 등을 불러 39명 수를 채웠는데, 그것은 그해가 계축년이고 그달이 모춘(暮春)이었기 때문에 난정(蘭亭)의 계모임을 모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제신들을 명해 내원의 볼 만한 곳을 마음껏 구경하게 하고 이어 술과 음식을 내려 각기 흐르는 물가에 와 마시고 읊게 했다가 밤이 되어서야 파했는데 그를 두고, 태평성대의 성대한 일이었다고 한때 전송하였었다.

그때는 경사가 거듭 겹치고 조야(朝野)가 안정된 시기였다. 왕은 화기를 불러들이고 국가 운명을 장구히 하자면 백성들의 답답증을 풀어주고 막혀있는 것을 터주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하고 이에 양전(兩銓)에 명령을 내려 일대 회탕(恢蕩) 정책을 펴도록 하고 혹은 중비(中批)를 내리기도 하였으므로 가끔은 몇 10년씩 묵혀 있다가 비로소 갓을 털고 일어선 자도 있었다.

가을에 빈연(賓筵)에 나아가 대신 이하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내 그 아무해 일에 대해서는 모두가 차마 말못할 것들이기에 감히 말하지도 않지마는 금등(金縢) 한 가지 일만은 경들에게 말 한마디 해두고 싶었는데 너무 슬프고 원통해서 아직 말을 꺼내지 못했다. 선왕께서 언젠가 휘령전(徽寧殿)에 납시어 사관(史官)도 물리치고 어서(御書)로 된 문자 하나를 신위(神位) 밑 요 속에다 넣어두셨는데 병신년에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세상에 알릴 때 비로소 꺼내보았었다. 경들도 한번 보라." 하고는, 금등 등본(謄本) 두 구절을 꺼내보였는데, 영조가 경모궁(景慕宮)의 죽음을 뒤늦게 슬퍼하여 쓴 어제였었다. 이에 왕도 울었고 제신들도 다 눈물을 흘렸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지역 내의 여러 능들도 두루 배알했다.

겨울에 대신 이하 제신들이 자전(慈殿)과 자궁(慈宮) 그리고 경모궁에 대해 유양(揄揚)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고 또 왕에게도 존호 올릴 것을 청하자, 자궁께 여쭈어보고 결정하겠다는 뜻으로 비답을 내리고 그 말미에 이르기를,

"내게도 존호를 올리겠다고 하니 경들이 임방(林放)만 못할 줄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존호 올리는 제도가 비록 삼대(三代) 이후에 비롯된 제도이나 그동안 명철한 임금들이 모두 그 일을 행하고 그 제도를 더 다듬고 손질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위로 하늘의 사랑에 보답하고 아래로 뭇 백성들 뜻을 따라 태평성대의 아름다운 현상을 더 돋보이게 해주는 방편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대로의 전장(典章)이 있어 나도 일찍이 선왕께 정성을 다해 빌고 간청하자 그 겸손하신 선왕께서도 애써 당신 뜻을 굽히고 따라주신 일이 있었다. 나라고 어찌 감히 유별나게 많은 사람들 뜻을 어기고 물리치기야 하겠는가마는 내 말을 듣고도 내 뜻을 거스른다면 그는 결코 인인(仁人) 군자(君子)가 차마 할 일이 못 되는 것이다. 예(禮)가 원래 인정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의리에 의하여 예가 제재될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숭봉(崇奉)은 내가 말하는 숭봉과는 다르다. 내 감히 최고의 의리를 부질없이 경전(經傳)에 그냥 기록되어 있게만 해서 앞으로 천년 이후에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자가 있다면 나를 이해하고 내 마음을 체득하여 나로 하여금 내 초지(初志)를 이루게 하리라. 나의 초지라면 오직 '장순(將順)' 그 두 글자뿐이다." 하였다.

18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에 인정전에 나아가 자전의 오순(五旬)과 자궁의 육순(六順)을 축하하고 이어 조관은 70세 이상, 사서인은 80세 이상 자와 80이 못 되었어도 부부가 해로하고 있는 자는 모두 1계(階)씩 올려주도록 명했는데 도합 7만 5천 1백 45명이나 되었다.

현륭원을 배알하고 돌아와 또 경모궁을 배알했는데, 바로 장헌 세자(莊獻世子) 탄신이었다. 그해 그날은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궁(宮)과 원(園)을 연거푸 배알하고 도에 지나치도록 슬퍼했는데 제신들의 강력한 청에 의하여 그 이튿날에야 비로소 환궁했다.

삼경(三經)ㆍ사서(四書)를 새로 인쇄하여 관각(館閣)ㆍ사고(史庫)ㆍ태학(太學)에 각기 나누어 두게 하고 또 주합루(宙合樓)에다도 두도록 명하고는 각신에게 이르기를, "잘 지키도록 하라. 옛날 영릉(寧陵)에다는 《심경(心經)》을 순장했었고 병신년 산릉(山陵) 때는 《소학(小學)》을 순장 했었는데 나도 장차 그대로 따르리라." 하였다.

5월에 재거(齋居)하면서 윤음을 내리기를,

"탕(湯)은 간하는 말이면 거스르지 않고 따르는 덕이 있었고, 순(舜)은 누구도 당할 수 없는 넓은 도량이 있어 천고를 두고 헤아려봐도 오직 그 두 성인(聖人)이 있었을 뿐이다. 아,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몇 번이고 자꾸 하시던 그 말씀이 꼭 어젯밤에 들은 듯하다. 늘 말씀하시기를 '내가 허물이 있거나 없거나 남들이 다 보고 있는 것이다. 내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은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너무 지나치게 들추어내더라도 나는 그를 개의치 않겠다.' 하고는 그 말을 대전 벽에다 써 걸어두시고 문호를 활짝 열으셨으니 그 도량의 큼이야말로 바로 하늘과 땅 그것이었다. 그런데 조정 신료들은 나삼(羅蔘)에 관한 그 한 가지만을 가지고 그리도 크고 넓으신 도량에 대해 찬양을 하려고 하였으니 그는 표주박 하나로 바다를 헤아리려는 격이다.

아, 경진ㆍ신사 두 해에 있었던 일들을 어찌 차마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진신(縉紳)ㆍ장보(章甫)들이 바르고 극한적인 간언을 많이 하였으나 한 사람에게도 죄를 내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 모두에게 일일이 비답까지 하셨다. 경연 석상에서 무언가 아뢴 자가 있었을 때도 이르시기를 '남의 신하라면 당연히 서지수(徐志修) 같이 청대하여 면전에서 사실을 아뢰는 것이 옳은 일이다.' 하고 그에게 전석(田錫)이 초고 불태운 것7564)은 잘못이며 주창(周昌)처럼 대들면서 대답하기는7565) 어려운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그가 최후에 한 말 한마디는 듣기 매우 거북한 망언이었지만 내 그에게 죄를 내리지 않았다.' 하였다. 그때 그 연신(筵臣)은 황공한 마음에 땀을 흘리며 물러가 그 사실을 그의 가승(家乘)에다 기록해 두었는데 그후 선왕은 또 곧 구언(求言)의 성지를 내려 그로 하여금 할 말을 다 하도록 하였다. 나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그것을 띠에다 쓰고 폐부에 새겨 그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른바 재작년에 올리지 못하고 말았다는 상소는 그 내용이 공적으로 공분(公憤)을 내포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사적으로 개인 감정을 풀어보자는 것이었는가? 거기에 만약 조금이라도 사(私)가 끼어 있었다면 그 짓을 차마 하는 자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깨끗이 맑은 하늘에 무지개를 드리우려고 하는 것은 그게 무슨 심통이란 말인가. 재계하는 마음으로 밤을 지새우고 앉아서 아침이 되도록까지 촛불을 밝히고 눈물을 섞어가며 여기에 내 속마음을 쏟아놓았는데 행여 이 기록이 아름다운 성덕을 드러내는 데 다소라도 도움이 된다면 나 소자로서도 장차 지하에 돌아가 뵈올 면목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어찌 내년 봄 옥책(玉冊)에다 빛나는 호를 올릴 때의 의문(儀文)에다 비할 것인가." 하였다.

오래 가물어 기우제를 올리고 하교하기를, "아래로 정사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항양(恒暘)7566)의 허물이 되어 그 징험이 가뭄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래 언로(言路)가 막혀 있는 것이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극에 도달하면 다시 원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진대 무릇 논사(論思) 언책(言責)의 자리에 있는 자들은 말할 만한 일이 있으면 숨김없이 다 말하여 내 마음의 선한 단서를 확충시키도록 하라. 말이란 꼭 적절해야지만 상대를 감동시킬 수 있는 것이다." 하고 '몽둥이 하나로 치면 한 줄기 몽둥이 자국이 나고, 손바닥으로 후려치면 손바닥만큼 붉은 자국이 남는.'7567) .' 하는 구절을 삼사와 제신이 듣게 외워주었다.

가을에는 왕이 앓고 있는 부스럼이 오래도록 낫지 않고 게다가 또 가뭄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왕은 걱정이 되어 대신, 육경과 비변사 제신들을 묘당에 모이게 하여 가뭄에 대처할 방법을 강구하게 했으며 중외에 명하여 널리 직언(直言)을 구했고, 또 삼남(三南) 도신들에게 유시를 내려 숨어 있는 인재 발굴과 함께 억울한 사정이 있는가도 살피게 하였다.

명릉(明陵)을 배알했다. 《인서록(人瑞錄)》이 만들어졌다. 왕이 그해에 큰 경사가 있었다 하여 자전과 자궁에게 하례를 올리고 중외에 많은 은총을 내린 다음 육경(六卿) 이상의 기로신을 불러 그 의의와 범례를 지정해주고는 그에 따라 경외의 은총 입은 노인들을 차례로 엮어 한 권의 책으로 만들라고 하고 이름을 《인서록》이라 하여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인쇄 반포하게 하였다.

겨울에는 화성(華城)의 성 쌓던 일을 정지시켰다. 계축년부터 쌓기 시작하여 공사가 거의 끝나가고 있었는데 그때 와서 6도에 기근이 들자 왕은 누차 공사를 정지시키려 했으나 제신들 주장은, 성 쌓는 일이 재정을 축내는 일도 아니고 백성을 병들게 만드는 일도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하교하기를, "성을 쌓는 것도 소중함을 위해서이며 정지시키는 것도 역시 소중함을 위해서인 것이다. 지금 삼남과 경기 지역이 가을을 맞고서도 믿고 의지할 곳 없는 신세가 되었고 서북 지방 역시 어려운 실정이어서 자전과 자궁에 올리던 것들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처지인데 성 쌓는 일이 아무리 중하다지만 같은 중한 것이라도 정도의 차이가 있는 법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것은 정지하면서 저것은 정지를 안 할 것인가. 한 나라의 재화(財貨)는 일정한 양이 있어서 농사지을 백성들의 해를 이어갈 양식 아니면 기민을 먹일 호구할 거리밖에 안 되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너희들 농사와 기민 먹이는 일 다 놔두고 우리 성 쌓는 일에만 종사하라.' 한다면 그것이 사리에 닿을 일인가.

혹자는 말하기를, 흉년에 토목 공사를 하면 오히려 주휼(賙恤)까지 겸하는 일이 된다고 하면서 주자(朱子)가 남강(南康)에서 했던 일과 범희문(范希文)이 절서(浙西)에서 한 일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일개 군이나 일개 진(鎭)에서 시행할 정책일 뿐이지 나야 한 나라를 맡아 다스리는 임금으로서 나라 전체의 백성이 모두 내 적자(赤子)들인데 그 수많은 부황난 백성들로 하여금 농사도 장사도 말고 오직 성 하나 쌓는 곳에 붙어서 일하고 먹으라고 한다면 살린대야 몇 사람이나 살리겠는가. 지금 해야 할 일로서는 모든 정신을 구황 정책 그 한 일에만 집중시켜야 한다." 하고, 이어 화성부에 윤음을 내려 그 역사를 정지하게 하였다가 을묘년에 가서야 성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각 지방에 큰 기근이 들고 삼남(三南)은 더했는데 왕은 각신과 승지들을 나누어 보내 위로의 윤음을 내리고 배에다 곡식을 싣고 가 탐라(耽羅) 백성들을 먹이게 하였다. 왕은 탐라가 먼 바다 속에 있는 땅이라 하여 더욱 먼 곳을 회유하는 생각으로 흉년 소식만 들으면 언제나 다른 지방에 우선해서 진휼하였고 배가 갈 때는 반드시 제문(祭文)을 친히 지어 해신(海神)에 제사하도록 하였다.

《주서백선(朱書百選)》이 만들어졌다. 왕이 주자서(朱子書)를 가장 좋아하여 《어류(語類)》와 《대전(大全)》에서 뽑아 《선통(選統)》ㆍ《회영(會英)》ㆍ《회선(會選)》 등의 책을 만들고 또 서독(書牘)에서 뽑아 묶어 《백선(百選)》을 만들어 활자로 간행하였다.

(계속)

출전 : 정조실록 부록 정조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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