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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22:12
분 류 사전2
ㆍ조회: 1011      
[조선] 정조 행장 2 (실록)
정조 대왕 행장 2

행장 1
행장 2
행장 3
행장 4
행장 5

5월에 효명전(孝明殿)에서 담제를 행하고 태묘(太廟)에 길제(吉祭)를 올린 후 영종 대왕(英宗大王)ㆍ진종 대왕(眞宗大王)을 올려모시고,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을 효종(孝宗) 묘정(廟庭)에다 배향하였다. 그리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정공(忠貞公) 최규서(崔奎瑞), 문충공(文忠公) 민진원(閔鎭遠), 문충공(文忠公) 조문명(趙文命), 충정공(忠靖公) 김재로(金在魯)는 영종(英宗) 묘정에 배향하였다. 그보다 앞서 병신년 여름에 하교하기를, "옛날 효종 대왕 당시 선정신 송 문정공은 대왕과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고 기밀에 참여하여 국가 대계를 획책했으니 바로 춘추(春秋) 대의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인정을 받았고 천재 일우로 만난 군신 사이였는데 지금까지 배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적으로도 궐전(闕典)일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영령께서도 향기로운 덕의 향내가 오를 시기를 기다리고 계셨을지 누가 알겠는가. 혹자는 본조(本朝)에서는 없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자도 있으나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가 세종(世宗) 묘정에 배향된 것이라든지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이 인종(仁宗) 묘정에 배향된 것 같은 일은 실로 우리 나라에 있어 성헌(成憲)인 것이다." 하고, 영종 부묘(袝廟) 때 그대로 거행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정부가 회권(會圈)하여 영종 묘정에 배향할 공신(功臣)으로 최규서ㆍ민진원ㆍ조문명ㆍ김재로 이 네 상신(相臣)을 선정하여 들여오니, 하교하기를, "고 상신 김창집도 대의(大義)를 앞세워 국가 정책을 결정하였으니 나라 위해 몸을 바친 충절로 보아서는 묘정에 배향되어 마땅하다. 다만 미심쩍은 점이 있다면 선조(先朝)를 생전에 섬기지 못했던 그것인데, 고 중신(重臣) 민진후(閔鎭厚)도 그가 생전에 그 왕조를 섬기지 못했었지만 역시 배향된 바 있으니 그것이 우리가 참고할 만한 근례(近例)이고, 고사(故事)로는 송(宋)의 장준(張浚)이 효종(孝宗)의 정책 수립 때 공로가 있었는데 당시 논의하는 자들은 다른 왕조 때 있었던 일이라 하여 묘정 배향에 난색을 보였지만 양만리(楊萬里)가 단독으로, 당연히 배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일이 우리가 원용할 만한 고사인 것이다." 하여, 모든 신하들 의견이 일치되었으므로 이때 와서 함께 배향의 예를 올리게 된 것이었다. 그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백관들 하례를 받고 대사면령을 내린 후 하교하기를, "부묘례가 잘 끝나고 하례 의식도 이미 거행되었다. 선왕의 자리에 앉아 선왕의 예를 행하자니 너무 조심스럽고 두렵구나. 선왕께서 50년을 두고 마음 쓰신 것이 모두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한다는 그것이었으므로 오늘 내가 계술(繼述)해야 할 일도 그보다 더한 것은 없는 것이다. 내 어찌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자식 돌보듯이 하셨던 선왕의 그 성스러운 뜻을 따르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하고, 팔도(八道)의 해묵은 적미(糴米) 10만 석을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자전(慈殿)ㆍ자궁(慈宮)에 존호를 올리고 황단(皇壇)을 배알했는데, 이때부터 삼황(三皇)의 휘신(諱辰)이면 반드시 망배례(望拜禮)를 올리고 그 예가 끝나면 명조(明朝) 사람으로서 척화(斥和)했던 신하들의 후손을 불러 접견한 후 위로도 하고 혹은 수록(收錄)도 했으며 혹은 유학이나 무술을 시험보여 시상도 하였다. 하교하기를, "음악이 치도(治道)에 관계된 바가 큰데 나는 천성이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 일찍이 종률(鍾律)의 척도를 알아보지는 못했으나 지금의 음악이 옛 음악에서 유래된 것일진대 역시 성(聲)을 듣고 그 음(音)을 찾아보고 음의 뿌리는 마음에서 찾아야 하는 그 정도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도 만약 짧은 소리를 느슨하게 바꾸고 급한 소리를 여유있는 소리로 바꾼다면 쇠세(衰世)의 음을 면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이제 3년이 지난 뒤이니 이제부터는 사방에서 날마다 들을 수 있도록 그 방법을 강구하고 우리 모든 장악관(掌樂官)들은 늘 완만한 절주를 익히고 어지러운 가락은 연주하지 말 것이며 간성(奸聲)을 멀리하고 화음(和音)을 되찾아 후인들을 일깨우고 도우려 하시던 우리 영묘(英廟)의 뜻을 뒤따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제주(濟州)라면 푸른 바다 저 밖인데 근래 흉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부황이 들었다 한다. 지금 본주 목사의 장문(狀聞)을 보니 전복을 따느라 고생하는 모습들이 눈앞에 선하다. 차라리 어공(御供)을 줄일지언정 우리 백성들을 그렇게 힘들게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연례(年例)로 전복을 바치는 일을 영원히 제감하라고 명하고는 이어 하교하기를, "이는 선왕의 유의(遺意)인 것이다." 하였다.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백관들 조참(朝參)을 받고 대고(大誥)를 선포했는데, 무릇 4개 조항으로서 민산(民産)ㆍ인재(人材)ㆍ융정(戎政)ㆍ재용(財用)에 관한 것이었다. 몇 천 마디에 달하는 누누한 설명을 하고 끝에 가서 실효를 거둘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뭇 신하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보다 앞서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대신들에게 언문 교지를 내려 사족(士族) 중에서 빈어(嬪御)를 골라 두어서 널리 후사를 구할 것을 명했었는데, 이에 대해 대신(臺臣) 박재원(朴在源)이 자전 언교 내에 곤전(坤殿)의 병환이 심해 후사를 둘 희망이 없다는 하교가 있는데 훌륭한 의원들을 맞아다가 정성을 다해 치료해볼 것을 청한 상소를 하였다. 이때에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이 빈어 간선에 응하고 있을 때라서 국영이 재원의 상소 내용에 화가 나서 공식 석상에서 욕설을 하는 등 꼭 중상을 하고야 말 기세였다. 그러나 왕은 그 충절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재원이 끝내 죄를 면할 수 있었고, 급기야 국영이 물리침을 당한 뒤에는 특별히 정경(正卿)을 주어 그 충절을 표창했었다.

대신들과 삼사(三司)가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는 청을 가지고 해를 넘겨가며 강력히 다투었는데, 왕은 제신들을 불러 인견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내가 윤허를 아끼는 것은 그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선왕의 사랑을 받던 사람이 큰 죄에 빠지게 될 경우 선왕이 그것을 모르셨다고 친다면 이는 선왕의 밝음에 손상을 주는 일이고, 선왕이 그것을 알고도 처리를 안 하셨다고 한다면 그것은 선왕의 덕에 누가 되는 일 아니겠는가. 옛날 성묘(成廟)께서는 '이 꽃이 다 피고 나면 다시는 꽃 없으니[此花開盡更無花]' 하는 시구를 외우셨는데 그때 삼사는 그에 대해 그 이상 쟁집(爭執)을 못했었다. 지금 신하들은 어쩌면 그리도 옛 신하들 같지 않다는 말인가. 비록 대의(大義) 앞에서는 사사로운 친분은 무시된다고 하지마는 그의 뿌리를 생각한다면 선왕의 골육(骨肉)이요 왕실의 지친(至親) 아닌가. 그에게 차율(次律)을 적용하는 것이 내가 바로 선왕을 저버리지 않는 길인 것이다." 하고, 그의 작호(爵號)를 삭탈하고 교동부(喬桐府)에다 안치하였었다.

가을에 공충도(公忠道) 도신이 밀계(密啓)하여, 서명완(徐命完) 등이 나라를 원망하고 흉언을 하고 다닌다고 말해 사신을 보내 사실을 조사했더니 그 흉언의 근원이 바로 한후익(韓後翼)ㆍ홍량해(洪量海)ㆍ심혁(沈) 등에게서 나온 것인데 후익은 바로 병신년7531)에 흉소(凶疏)를 투소했던 자였다. 하교하기를, "후익 상소 내에 기사(機事)니 기심(機心)이니 한 말은 그것이 바로 상대를 욕하고 꾸짖는 말투였지만 그가 언론을 맡은 직책에 있는 자였기 때문에 특별히 참고 이해를 했던 것인데 그 역적이 그렇게까지 마음먹고 있었으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으랴." 하고는, 후익을 친국했다. 양해와 혁도 역모를 했다는 승복을 받고 법에 의해 처형되었다.

노량진(露梁津)에서 대대적으로 군대 사열을 하면서 하교하기를, "오위(五衛)의 법도 옛날 그대로 다시 살리지 못하고, 오영(五營) 제도도 개혁을 못해 그 근본이 바로잡혀지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기껏해야 결과는 말단적인 것이나 손질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더구나 지금 열성조에서 쓰던 법에 따라 열무(閱武)의 예식을 행하려고 하면서 병조 판서를 대중군(大中軍)이라고 부르고 대중군 위에 대장군(大將軍)으로 부를 사람은 더 없으며, 또 오영의 대장들도 각 영장(營將)이라고만 하고 각 영장 이외에 삼군(三軍)을 통솔할 사람이 없으니 교습(敎習)이라 해봐야 연병장에서 조련하는 식이다. 임시(臨視)한다는 것이 결국 자장(自將)하라는 뜻인데, 당당한 천승(千乘)의 지존이 몸에다 갑옷을 두르고 주장(主將)의 일을 대신 행하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조련을 하지 않을 때는 본영(本營)이 오영도 통솔하지 않고 있다가 조련을 임시하는 날에 와서야 오영으로 하여금 병조 판서 명령대로 움직이라고 한다는 것은 위 아래가 안 맞아도 한참 안 맞는 일이다. 내 비록 군려(軍旅)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일찍이 듣건대 조두(俎豆)의 예에 있어 대소(大小)가 서로 질서를 유지하고 존비(尊卑)가 서열이 분명해야지 결코 그렇게는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모든 근거없는 예와 내리 행하는 절차를 일체 혁파하고 의절(義節)을 다시 정하도록하라." 하였다. 육신(六臣)과 사충(四忠) 및 문렬공(文烈公) 박태보(朴泰輔) 사당에다 사제(賜祭)하였는데 노량진 물가에 있는 사당들이었다. 그리고 명릉(明陵)ㆍ소령원(昭寧園)ㆍ수길원(綏吉園)을 배알하였다. 하교하기를, "녹수(錄囚)7532) 제도가 시작은 당(唐)에서 되고 완전히 갖추어지기는 송대(宋代)에 와서 되었으니 모두 5일에 한 번씩 녹수를 해왔는데, 우리 나라에서 10일에 한 번씩 기록하여 아뢰고 있는 것은 자못 옛날 제도와는 다른 것이다. 10일 동안에야 비록 잘못되는 죄수는 없다 치더라도 남모르는 억울함이 있을 경우 죄수 스스로 어디에다 말하겠는가. 이후로는 해조에서 옛날 제도 그대로 5일에 한 번씩 녹수를 하고 그리고 중들은 도성(都城) 출입을 못하도록 금하라." 하였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용도를 아끼는 일은 궁위(宮闈)에서부터 솔선해야 한다. 비록 태관(太官) 추인(酋人)7533) 이 필요로 하는 물자라도 쓸데없는 것들은 절약해야 하는데 더구나 궁위의 쓸데없는 비용이겠는가. 궁인들 공억(供億)부터 즉위 초기에 우선적으로 바로잡도록 하라. 지금 대전(大殿)에는 궁인이라는 명목이 없고 다만 오래전부터 있어온 궁인으로서 자전(慈殿)에 소속된 자들만은 아직 혁파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흉년이 들고 민생이 곤궁할 때 당연히 절약하고 줄일 방법이 있어야겠으니 호조에 물어 조치하라. 그것이 중인(中人) 1천 호(戶) 재산 정도는 될 것이다." 하였다. 계유년7534) 에 소속이 옮겨진 궁인들 공억에 대해 그를 영원히 없애기로 하였고, 이보다 앞서 원년에는 대전에도 궁인 명목을 없앴었는데 지금 와서 또 이 하교가 있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당(唐)나라 때부터 사형(死刑)을 결정할 때는 그 옥사의 내용을 충분히 갖추어서 그것을 기록하여 아뢰고, 또 결심 때는 상세하게 복심하였으며, 형 집행을 하는 날은 천자(天子)가 재계하는 마음으로 따로 있으면서 먹는 것도 소식을 하고 풍악도 울리지 않았다. 우리 나라도 해마다 섣달이면 사형 집행을 했는데 그보다 3개월 전에 상세한 복심을 거치고 복심도 반드시 3차에 걸쳐 실시했었다. 그런데 정부(政府)가 정무 처리를 직접하는 제도가 바뀌고부터는 그 권한이 형조로 이관되어 상세히 복심하는 제도가 대시(待時) 죄수에게만 적용되고 부대시(不待時) 죄수에게는 적용이 안 되고 있는데 그것이 어찌 입법(立法)의 근본 취지이겠는가. 대체로 대역 부도(大逆不道)나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들은 차라리 대신이 직접 국문에 임하고 삼사(三司)가 옥사를 안찰하므로 그런대로 상세히 복심하는 뜻이 있지만 부대시(不待時) 죄수에 있어서는 대신ㆍ삼사는 그 사실조차 살필 수가 없고 다만 일개 율관(律官)의 소견으로 어느 법조문을 적용하여 안(案)을 꾸며서 옥관(獄官)에게 올리면 옥관은 붓을 놀려 자기 서명할 자리에 서명만 근엄히 하는 식이니, 어찌하여 대시 죄수에게는 그리도 신중을 기하면서 부대시 죄수는 그리도 소홀히 다루는 것인가. 지금부터 이후로는 꼭 구전(舊典)을 따라 일단 형조가 평의한 다음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에서 다시 상세한 복심을 마친 후 비로소 등문(登聞)하도록 하라."

하였다. 소를 밀도살한 종신(宗臣) 이인(李䄄)의 집 궁노(宮奴)를 법에 의해 엄중 처벌할 것을 형조가 청하자, 하교하기를, "왕손(王孫)이 법을 어기며 소를 도살하고 금리(禁吏)를 구타한 짓들이 모두 내 낯부끄러운 일들이다. 밀도살에 대한 속전(贖錢)을 내수사로 하여금 물게 하고 왕손 집에서는 징수하지 말라." 하였다.

3년 봄에 황단(皇壇)에서 망배례를 올렸는데 어떤 사람이 단향(壇享) 때의 악장(樂章)은 당연히 명조의 구묘영송신곡(九廟迎送神曲)을 써야 하고 일무(佾舞)도 명조의 친왕국(親王國)에서 인조묘(仁祖廟)에 제사 모실 때 쓰는 일무를 써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그러자 하교하기를, "명조 악장에는 '우리 성조(聖祖)를 오시게 하사'라는 가사가 있는가 하면, 또 '우리 자손을 도우사'라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우리 나라에서 명(明)나라 천자(天子)의 제사를 모시면서 그러한 구절들을 써도 맞을런지 모르겠다. 그리고 인조묘 제의(祭儀)에는 등가(登歌)ㆍ헌가(軒架)7535) 가 없고 황단 제의에는 등가와 헌가를 단 위와 단 아래다 설치하는데 지금 일무만을 6줄에서 8줄로 늘리면 무(舞)는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악(樂)만 안 갖춰진 경우가 되니 예에 어긋난 악을 쓰는 것보다는 차라리 안 쓰고 놔두는 게 허물이 더 적을 것이다." 하였다.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그 국(局) 안에 있는 여러 능도 다 배알했다. 여름에는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교육은 오교(五敎)보다 더 큰 교육이 없는데 오교가 제대로 보급이 안 되고 있으니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 것인가? 형조가 강상죄를 처리한다는 것을 들을 때마다 언제나 깜짝 놀라고 두려운 생각이 든다. 지금부터 강상에 관계된 죄인은 비록 죽을 죄 이하라도 반드시 사실을 샅샅이 조사하여 아무 의심이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뒤에야 법률로써 단죄하여, 교육을 우선하고 형벌은 뒤로하는 내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하였다. 투서(投書)한 죄인 이진후(李鎭厚)를 친국한 뒤에 하교하기를,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고 사람을 죽이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하는 일이니 친국ㆍ정국 때 비가 오거나 혹 날씨가 더우면 초둔(草芚)이라도 쳐서 그들로 하여금 그 속에서 숨도 좀 돌리고 기운도 가라앉혀 가면서 그들 속이 시원하도록 할 말을 다 하게 하라." 하였다.

5월이 되자, 해마다 5월 13일에서 21일까지는 집무에 관한 사항을 여쭙지 말라고 명했다. 그것은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이날만 되면 혼자 따로 지내면서 마치 임오년에 일을 처음 당했을 때처럼 비통해 왔었는데 이해에 영조의 복제를 마치고 나서 비로소 이렇게 명령한 것이다.

가을에는 영릉(寧陵) 배알을 계획했는데, 이해가 성조(聖祖)7536) 가 승하한 지 일주갑(一周甲)이 되는 해이기 때문이었다. 병조 판서와 훈련 대장을 불러 하교하기를, "군사가 1백 리 밖 나들이를 하려면 그 군용(軍容)이 더욱더 질서 정연해야 할 것이다. 옛날 당 현종(唐玄宗)이 여산(驪山)에 가 강무(講武)를 하다가 군법(軍法)이 제대로 안 되어 있다 하여 병부 상서(兵部尙書) 곽원진(郭元振)을 법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 하교 역시 명장 서사(命將誓師)와 같은 뜻으로 한 것이니 각기 노력하라." 하고, 대가 앞에 있는 신전(信箭)을 가리키며 이르기를, "대리 청정 초기에 선왕께서 저것을 내게 주시고 언제나 사행(師行) 때면 저 화살을 대가 앞에다 꼭 세워두게 하셨는데, 그것은 정벌(征伐)을 단독 결정하라는 뜻이었다." 하였다. 광나루에 이르러 용주(龍舟)를 타고는 하교하기를, "임금은 이 배와 같고 백성은 저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을 대하니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그리시고 사신(詞臣)을 불러 명(銘)을 지으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 하였다.

남한 산성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병자년 일이 완연히 어제와 같은데, 날은 저물고 갈길은 멀다고 하셨던 성조의 하교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구나.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당연지사처럼 잊어가고 있고 대의(大義)에 대한 관심도 점점 희미해져 북녘 오랑캐를 피폐(皮幣)로 섬겼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있으니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아니 가슴 아픈 일인가. 이렇게 백성들의 힘이 쇠잔하고 경비가 모자라는 시기에 왜 꼭 먼 길을 가야만 하겠는가마는 또 이 기해년을 당하여 영릉(寧陵) 행차를 하지 않는다면야 그것이 어디 천리(天理)요 인정(人情)이겠는가." 하였다.

경기도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여주(驪州)에 있는 문정공 송시열(宋時烈) 사당에 사액(賜額) 해줄 것을 청하니, 대로사(大老祠)로 사액을 하고 어제(御製)에 어필(御筆)로 된 비를 사정(祠庭)에다 세웠다. 대가가 이천(利川)을 지날 때 길 옆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에 널려있었으며, 어떤 머리 하얀 늙은이가 길을 막아서서, 우리 임금 좀 뵙기를 원한다고 아뢰자, 제신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 아직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쳐갈 만한 정사나 명령이 하나도 없었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천리를 멀다 않고 왔으니 나로서는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다." 하였다. 영릉(寧陵)과 영릉(英陵) 배알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천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윤음(綸音)을 내려 광주ㆍ이천ㆍ여주 세 고을 부로(父老)들을 개유하고, 대가가 지나는 연도의 백성들에겐 1년치 조세를 감면하였다. 광주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하교하기를, "인묘(仁廟) 갑자년에 색다른 중 각성(覺性)이라는 자를 얻어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이라 명하고 승군(僧軍)을 모집하여 각 사찰에 나누어 있게 했었는데 근년에 들어서는 그들이 조련도 잘 하려 들지 않고 힘든 역사가 있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니 일단 유사시 그들을 어떻게 믿겠는가." 하고,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그 폐단을 없애도록 명했다.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 안에서 하는 훈련과 야간에 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장사(將士)들에게 푸짐한 음식을 내렸으며, 성 안팎을 두루 둘러보고는 그곳 형편(形便)과 고적(古蹟)에 대해 낱낱이 물었다.

행행 8일 만에 비로소 환궁했는데 우레의 이변이 있어 감선(減膳)을 하고 자신을 책하는 하교를 내렸으며, 그로부터 10일 후 천둥이 또 크게 치자 감선 5일을 하고 하교하기를 "하늘이 사람과 멀리 있다던가. 바로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경(經)에도 이르기를, '하늘이 성내시면 마음가짐을 경건히 하고 감히 장난으로 실없이 여기지 말라.' 하였다. 가령 과인이 통렬히 자기 자신을 극복 책망하고 한껏 노력하고 두려워한다면 이미 성난 하늘의 마음도 다시 즐겁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재앙을 겪고서도 다만 옛모양 그대로 지내면서 구습을 씻어버리고 유신(維新)을 도모해야 하는 일을 까맣게 서로 잊어버려 나랏사람들 전체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흐리멍덩한 굴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상대국의 철검(鐵劒)이 예리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도리어 광대놀음이나 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짚더미에 불을 붙여놓고 그 위에 앉아 편안하다고 하는 꼴인 것이다. 자기 자신을 꾸짖기에 급급하다 보면 미처 왕의 잘못에까지 눈 돌릴 겨를이 없겠지만 광필(匡弼)의 책임이 있는 우리 신하들은 나의 득실에 대해 바른말을 해달라." 하였다.

처음에 홍국영(洪國榮)이 을미년7537) 이전부터 주연(胄筵)을 드나들며 특별한 총애와 신임을 받아 4년 동안에 벼슬이 재열(宰列)에 오르고 중한 병권도 두루 맡았으므로 제가 잘나 그리 된 것으로 알고 날이 갈수록 더욱 교만하고 방종하여 그 권세가 세상을 좌우할 만큼 조정 모양이 점점 문란해져 갔었다. 왕은 그의 간악상을 훤히 알고서도 은인 자중하느라 티를 내지 않았었다. 급기야 홍빈(洪嬪) 상을 당하자 국영이 스스로 세(勢)가 간 것을 알고는 이제 방향을 바꾸어 이국(移國)을 해보려고 앞장서서 주장하기를, "저사(儲嗣)를 두기 위해 빈어(嬪御)를 또다시 맞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고는, 인(䄄)의 아들 이담(李湛)을 기화(奇貨)로 삼아 그의 군호(君號)를 완풍(完豊)으로 고치고는 우리 생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홍빈의 수빈관(守嬪官)이 되었을 때에 그의 말을 들은 자는 뼈가 시렸지만 그의 위세에 눌려 길거리에서도 눈짓만 할 뿐이었다.

역적 송덕상(宋德相)은 유자라는 명칭을 가탁한 자로서 홍국영의 부름을 받고 와 모든 언행을 오직 국영 시키는 대로만 해왔는데 이때 와서 저사에 관한 일로 투소(投疏)를 하면서 그 내용에 "무슨무슨 일은 아래 있는 자가 감히 지적해서 할 말은 못되지만 그러나 성상께서도 틀림없이 생각해보신 바 있을 것입니다. 신이 숙위 장신(宿衛將臣)을 대해서도 그 일이 제일가는 일이라고 했었습니다." 한 대목이 있었다. 그가 말한 숙위 장신이란 바로 국영을 말한 것이고 그 일이란 담에 관한 일을 말한 것이었다. 이에 적들의 모사가 날이 갈수록 긴박하여 화기(禍機)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왕도 이제는 단안을 내리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그러나 그와의 관계를 끝까지 보전하고 싶었고 또 적도들의 수가 많아 그들의 흉모를 예측하기 어려운 점도 고려해서 짐짓 밖에다 선시(宣示)는 않고 조용히 앞으로 불러 그의 죄상을 세며 스스로 물러가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국영은 감히 항명(抗命)을 못하고 부신을 반납하고 나갔는데 그에게 특별히 삼자함(三字啣)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을 이장할 때 숭품(崇品)의 종신(宗臣)에게 쓰는 예를 쓰도록 명하고 아름다운 시호도 내렸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시법(諡法)이란 지극히 중대한 제도이며 더구나 충(忠)자 같은 글자는 더더욱 함부로 쓸 수 없는 글자인 것이다. 지금 홍문관이 의정한 시호를 보면 단례(斷例)로 비추어볼 때 좀 분수에 넘친다 싶은 혐의가 있잖은가." 하고, 옛 시법을 다시 수명(修明)하라고 명했다.

4년 1월에 인정문(仁政門)에서 조참(朝參)을 받고 홍낙순(洪樂純)을 삭출하였다. 낙순은 국영의 숙부였는데 국영이 물리침을 받고 물러난 뒤에도 낙순은 아직까지 상직(相職)을 거머쥐고 있으면서 그 여세를 빙자하여 나라의 실권을 움켜쥐려 하였고 국영은 또다시 들어올 기회를 넘보면서 문형(文衡)을 맡아 그것으로 최종 치사(致仕)의 발판을 삼으려고 했다. 그때는 서명선(徐命善)이 영의정이었고 그의 형 명응(命膺)이 문형을 맡고 있었는데 대신(臺臣) 이보행(李普行) 등이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탄핵하자, 하교하기를, "내가 적임자가 아닌 자에게 일을 맡겼기 때문에 실권이 아랫사람에게로 옮겨져서 죽이고 살리고 위엄을 보이고 복을 주고 하는 권한이 장차 수습할 수 없는 단계에까지 가게 되었으니 어찌 차마 나라 망하는 꼴을 앉아서 보기만 하고 그것을 바로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 일은 모두가 대신(大臣) 한 사람이 저지른 죄인 것이다." 하고, 낙순은 삭출하고, 보행은 섬에다 안치하도록 명하였다.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승하한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이조 판서 김종수(金鍾秀)가 수차(袖箚)로 홍국영의 죄를 성토했는데, 저사(儲嗣)를 널리 구하는 방법을 막았다는 죄목이었고, 삼사에서도 번갈아가며 소장을 올려 강력히 청하였으므로 국영을 전리(田里)로 방출하도록 명하였다. 그때 대각(臺閣)에서 올린 탄핵문이 날마다 공거(公車)에 쌓였는데, 왕이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인재를 고르는 데 있어서는 상대가 중인(中人) 이하일 것으로 기대해야만 할 것이다. 《명의록(明義錄)》이 만들어졌을 때 그가 곧 의리(義理)를 아는 장본인이었고 그와 사귄 사람도 나라편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을미 병신년 이후로 세상이 자주 변하여 국맥(國脈)이 적지않게 손상되었는데 지금 그 병을 고치는 방법으로서는 무엇보다도 서로 한마음으로 머리를 맞대고 아무 사심없이 서로 공경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차 상대를 공격하기만을 일삼아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는데 가령 한 사람이 다치게 되면 국맥도 그만큼 손상되는 것이니 그 얼마나 소름끼치는 일인가. 후한 말엽에 명분론(名分論)이 준엄했던 까닭에 조조(曹操)가 비록 곁을 맴돌며 한(漢)을 넘보았지만 감히 스스로 손을 대지는 못하고 핑계가 천자(天子)를 보호한다는 명목이었기에 순문약(荀文若)7538) 같이 내노라 했던 자도 역시 몸바쳐 그를 섬기지 않았던가. 지난번에 있었던 일들이 그와 다를 게 뭐겠는가. 제신들이 만약 진정과 안정을 바라는 내 뜻을 이해하고 따라주지 않는다면 앞으로 조정은 텅 비고 말 것이다. 어디 그럴 수야 있는 일인가." 하였다.

화빈(和嬪) 윤씨(尹氏)와 가례(嘉禮)를 올렸는데 판관(判官) 윤창윤(尹昌胤)의 딸이었다. 가을에는 영릉(永陵)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천둥으로 인해 구언(求言)의 윤음을 내렸었다.

5년 1월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다른 능들도 두루 배알했는데, 그해가 신축년으로 바로 영조가 세자 책봉을 받은 지 일주갑이 되는 해였기 때문이었다. 사충사(四忠祠)7539) 에 제(祭)를 내리고, 증 참의(贈參議) 김성행(金省行)에게 가증(加贈)할 것과 고 학생(學生) 서덕수(徐德修)에게 집의(執義)를 추증할 것을 명했다. 그리고 강제(講製)를 익힐 문신(文臣)을 뽑아 아뢰는 제도를 실시하도록 하고, 하교하기를, "근래 나이 젊은 문관(文官)들이 겨우 과거에 급제만 하면 책이라고는 아예 덮어버리는 풍습이 점점 고질화되어 쉽게 바로잡혀지지 않기 때문에 비록 전경(專經)이니 월과(月課)니 하는 규정들이 있기는 해도 하다말다 해 일정한 법도가 없어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다. 국가에서 권과(勸課)하는 방법이 이미 잘못되었으니 신진(新進)들이 태만한 것을 그들에게만 책임지울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하여 지금 옛 교육제도를 모방하여 인재를 만들어내는 길을 마련하려고 하는데, 독서당만으로는 너무 단조롭고 지제교는 조금 취약한 점이 있으므로 만약 문신(文臣) 당하관들 중에서 나이를 제한해서 사람을 널리 뽑아 매월 경사(經史)를 강하게 하고 열흘마다 정문(程文) 시험을 보여 근만(勤慢)에 따라 상벌을 실시하면 문풍(文風)을 진작시키는 데 있어 일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고, 의정부에 명하여, 승문원의 문신들을 참상(參上)ㆍ참외(參外) 할 것 없이 나이 37세 이하인 자들을 뽑아 아뢰고 내각(內閣)이 강제에 관한 절목을 만들어서 시행하도록 하였다.

왕이 강제에 임한 문신들에 대한 권과와 그들을 인재로 만들어내는 방법에 있어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그들에 대한 은우(恩遇)도 각신(閣臣) 다음가는 수준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신축년 선임 이후 무릇 10차에 걸쳐 선임을 했는데 지금 공경 대부(公卿大夫)인 자들 태반이 다 강제에 임했던 문신들이다. 또 하교하기를, "문강(文講)과 무강(武講), 문제(文製)와 무사(武射)는 마치 수레바퀴나 새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 된다." 하고, 선전관으로 하여금 무강ㆍ무사 시험을 문강ㆍ문제하는 문신들 예에 준하여 실시하도록 명했다.

창덕궁(昌德宮)의 도총부(都摠府)를 이문원(摛文院)으로 명명하고 어필로 편액을 썼는데, 그 원이 옛날에는 금원(禁苑)에 있던 것을 지대가 너무 깊숙하다 하여 영숙문(永肅門) 밖으로 자리를 옮긴 것으로, 이때 와서 간신들이 상차하여, 원을 옮기는 것이 편리하다고 아뢰어, 허락한 것이다. 하교하기를, "규장각에 임어하여 새롭게 정무를 볼 때 전직 각신(閣臣)들이 시강관(侍講官)ㆍ강서관(講書官) 자격으로 모두 책을 끼고 당(堂)에 올라 경의(經義)를 강설하고 치도(治道)에 대해서도 각기 소견을 개진했으며 과인의 잘못과 정사의 득실까지도 모두 거론했었는데 그들이 비록 논사(論思)의 책임자들은 아니었지만 그날 그 자리는 응지(應旨)의 자리나 다를 바 없었다. 지금도 마음속에 쌓여 있는 것이 있으면 각기 다 털어놓도록 하라." 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예수(禮數)와 의식 절차는 대략 학궁(學宮)에 임어할 때의 의식을 모방했고, 선왕조 때 임어하여 일 보시던 고사(故事)도 참고했으며 송(宋)나라 때 원(院)에 행행했던 사실들도 참작해서 아뢰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내로 돌아올 때는 홍문관도 들러 두루 임어했었는데 그것은 《논어》에서도 말했듯이 그 예를 아끼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3월 신축일에는 이문원에 행행하여 《근사록(近思錄)》의 도체편(道體篇)을 강했는데 그 때도 전임 각신들이 반을 나누어 당에 오르고 홍문관 영사(領事) 이하는 강(講)을 들었으며 강을 마치고는 음식을 내렸다. 그리고 이어 홍문관으로 행행하여 경연(經筵)의 신하들과 《심경(心經)》을 강했는데 내각과 홍문관의 신하들이 전(箋)을 올려 그 일을 축하했었다. 규장각이 건립된 지는 몇 해 되었으나 모든 제도가 제대로 마련이 되지 못했었는데 홍국영이 축출당한 후로는 조정 분위기가 깨끗해졌고 왕은 왕대로 치적을 높이기에 더욱 노력하였으므로 이제 온갖 제도가 모두 완비되었다. 그런데다 거듭 여러 각신으로 하여금 고금을 참작하여 하나하나 차근차근 수거(修擧)하도록 하여 각(閣)의 규모가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갖출 것을 다 갖추었다. 이에 교서관(校書館)을 외각(外閣)으로 삼고 본각은 내각(內閣)에다 소속시켜 제학(提學) 이하는 겸직 제도를 두었다. 그리고 강화도 어고(御庫)에 봉안되어 있던 책보(冊寶)와 서적들은 다시 각을 지어 간직해 두고 그 각을 이름하여 외규장각(外奎藏閣)이라 하였다.

《팔자백선(八子百選)》이 만들어졌는데, 이는 왕이 문장이 날이 갈수록 저하되는 것을 걱정하여 손수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에서 선발하여 간행한 것이다.

여름에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동쪽 적전(籍田)에서 보리 베는 것을 구경한 다음 노주례(勞酒禮)를 행했는데 이는 영종이 하던 고사를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면하였다. 왕은 언제나 정월이면 반드시 권농(勸農)의 윤음을 내려왔었는데 그날은 보리 수확 구경을 하고 노주례를 행했던 끝이었기에 거듭 독려를 한 것이다. 큰비가 내려 사문(四門)에다 영제(禜祭)를 행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를 둔 자로서는 가장 걱정거리가 장마와 가뭄 그리고 도둑이니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위에다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윗사람도 항상 두려움과 경계 속에서 감히 사치하고 안일한 생각을 갖지 못하는 것도 역시 그것들 때문인 것이다. 이 좋은 말은 바로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의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즘 와서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풍속이 되어 담당관이 등문(登聞)을 않고 있으니 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아, 나라 전역에 있는 백성들이 모두 나의 자식들이다. 그러나 도성 안의 백성들이 겪는 고락은 관계된 바가 더욱 중하다. 혹시 도성 안에 고달픔을 한탄하는 소리가 있는데도 내가 들어 알지 못한다면 백성들의 임금된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이어 한성부와 포도청에다 경계령을 내렸던 것이다.

8월에는 명릉(明陵)을 배알했는데, 이달이 영조가 세자로 책봉된 달인데다가 그날은 숙묘(肅廟)가 탄생한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조가 잠저(潛邸)에 있던 신축년 8월 보름날 소령원(昭寧園)을 배알하고 돌아오는 수레가 덕수천(德水川)에 당도했을 때 소를 몰고 지나가는 도둑이 있어 뒤 따르던 자가 그 사실을 알리자, 검암(黔巖)의 발장(撥將)을 명하여 소는 몰아다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고 도둑은 불문에 부쳤었는데 도성으로 돌아오자마자 후사로 세운다는 명령이 내렸었다. 그런데 이때 와서 왕이 그 날을 생각하고 느끼는 바 있어 능 배알을 마치고는 어제(御製)로 그 사실을 기록한 비(碑)를 파발의 관사 앞에다 세우고 어진(御眞)을 그려 규장각 주합루(宙合樓)에다 봉안하였다. 그리고 각신(閣臣)이 쉬는 날에도 숙직을 하면서 봉심하는 규정을 처음으로 두었는데 이는 멀리는 천장각(天章閣)에서 한 일을 모방한 것이고 가까이는 태령전(泰寧殿)의 의식을 취한 것이다.

호서(湖西) 사람 연덕윤(延德潤) 등이 송덕상(宋德相)의 억울함을 변호하려고 네 도에 통문을 보내 저들끼리 서로 선동을 일삼자, 도신(道臣)이 그 사실을 아뢰어왔고 제신들은 일제히 국청을 개설할 것을 청했다. 이에 왕은 왕부(王府)를 번거롭게 할 것까지 없다 하며 사신을 보내 사실을 조사하여 죄상에 따라 적절한 처리를 하도록 하고 덕상은 삼수(三水)로 귀양을 보냈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서북(西北) 지방은 바로 국경 지대로서 곳에 따라 문(文)으로 다스리기도 하고 무(武)를 장려하기도 해야 하는데 근래 들어서는 습속이 점점 해이하여 무는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고 모두 유명(儒名)만을 좋아하기 때문에 풍기가 시들하고 연약하여 변경 방어가 염려스러울 정도로 허술하니 내 매우 걱정되는 바이다. 그런데 가만히 그 까닭을 찾아보자면 전적으로 용사(用舍)와 지휘의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정부의 주의(注擬)를 벗어나지 않는데 있다. 대신(大臣)과 장신(將臣) 그리고 병조 판서는 서북 지방 무변(武弁)의 수용 정책에 대해 숙의하여 통합된 의견을 아뢰라." 하였다.

단군(檀君)ㆍ기자(箕子)와 삼국(三國)ㆍ고려(高麗) 시조들의 왕릉(王陵)을 개수하였다. 왕은 지난 시대 왕조들에 대해 덕 있는 이를 숭배하고 어진 이를 본받는 일이면 더욱 그를 못잊어하여 수로왕(首露王)의 능을 비롯해서 신라 여러 왕의 능에다 잔을 올리고, 삼성사(三聖祠) 제례 의식을 다시 정했으며, 온조왕(溫祚王) 사당을 숭렬전(崇烈殿)이라 이름하고, 고려 사태사(四太師)7540) 사우(祠宇)에는 사액(賜額)을 하였다.

6년 봄에 홍릉(弘陵)을 배알하고 이어 여러 능도 배알했으며, 여름에는 영우원을 배알했다. 오랫동안 가물자 왕은 정전(正殿)을 피하고 친히 우사단(雩祀壇)에 가 기우제를 지냈는데 일산을 떼어버린 보여(步輿)를 타고 단에 이르러 직접 희생과 기물을 살펴보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예복 차림으로 노상에 앉았다가 예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운종가(雲從街)에 이르러 의금부와 형조의 경미한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환궁한 뒤에도 오히려 곤룡포를 벗지 않고 난간을 의지해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윽고 과연 비가 내렸다.

가을에는 권홍징(權泓徵)ㆍ송덕상(宋德相)ㆍ송환억(宋煥億)ㆍ문인방(文仁邦)ㆍ백천식(白天湜)ㆍ이경래(李京來)를 친국하고 해서(海西)에 사신을 보내 신형하(申亨夏)ㆍ박서집(朴瑞集) 등을 조사하여 사실을 밝히게 했다.
권홍징은 흉서(凶書)를 투서한 자이고, 형하와 서집은 덕상을 두둔하면서 음흉하고 끔찍한 저의를 가지고 글을 써서 서로 돌리는 자들이었으며, 인방ㆍ천식ㆍ경래 등은 요사한 글과 말로 서로 붕당을 결성하고 유언을 만들어내면서 난리를 일으킬 음모를 꾸민 자들로서 그들끼리는 부서(部署)가 이미 정해진 상태였고 그들 모두는 덕상을 유일한 의지로 삼고 있었다. 차근차근 친국을 받고 사실을 토로한 다음 홍징ㆍ인방ㆍ천식ㆍ경래는 법에 의해 주륙을 당하고, 덕상은 지레 죽었으며 환억은 먼 섬에 위리 안치되고, 형하 등은 각기 정상을 참작하여 정배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러한 옥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고 연루자도 점점 늘어났으며 각도에서 밀계(密啓)하는 글들이 길에 이어져 있었다. 왕은 이러한 일들이 결국 죄없는 백성들에게 화가 미치리라는 것을 깊이 우려한 나머지 윤음을 내려 국영ㆍ덕상 등의 범죄상을 포고하고 그 말미에다 이르기를,

"오늘 역옥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급선무로 삼아야 할 것은 진정과 안정[鎭安] 두 글자이다. 그 무리들을 다 찾아내고 숨겨진 내용까지 다 들추어내어 모조리 죽여없애고야 말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내가 듣고 싶어 하는 바가 아니다. 요즘 병영이나 곤수들에게서 올라온 것들이 아뢰지 않아도 될 것을 아뢴 경우가 간혹 있는데 집에다 비결 따위를 간직해둘 경우 그에 따른 처벌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서울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어리석은 백성들이야 그것이 무슨 문서인지조차 모를 것은 이상할 게 없는 일 아니겠는가. 만약 그 켸켸묵은 종이 한 조각까지 요언(妖言)이요 불궤(不軌)로 규정을 한다면 그 얼마나 불쌍하고 동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외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내 비록 눈으로 직접 볼 수는 없으나 그러나 역졸(驛卒)들의 왕래가 많아 도로가 시끄럽고 추적이다 체포다 하여 마을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다 또 고을마다 돌면서 정탐(偵探)을 하고 우연한 말 한마디까지 적발을 한다면 그것은 결코 국가의 본의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인심이 흔들려 안정을 송두리째 잃을 염려도 있으니 너희 크고 작은 신료들은 반드시 상대를 깨우치는 방법과 용서하는 마음을 강구하고 갖도록 각자 명심하고 서로 권면하고 격려하라. 비록 제방도 무너지게 해서는 안 되지만 혹시라도 함정이 넓어지게 말 것이며 차라리 죄인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오직 함께 새로워지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백성을 맡아 다스리기 6년이 되도록 정교가 확립되지 않아 악한 자가 선한 자로 변했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고 죄에 걸리는 자만 날이 갈수록 많아져 감옥이 빌 만큼 교화가 이뤄질 희망은 안 보이고 수레에서 내려 울 일7541) 만 늘 있으니 내 거듭 부끄럽고 한탄스러운 바이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근일에 역적들이 비결 쪽지를 가지고 백성을 현혹시킬 수 있었던 것은 정학(正學)이 밝지 아니한 소치이다." 하였다. 이에 유술을 숭상하고 도를 중히 여긴다[崇儒重道]는 윤음을 내려, 이조에서는 문학(問學)의 선비들을 골라 뽑게 하고, 각도의 방백(方伯)들에게는 경(經)에 밝고 행실이 얌전한 자들을 추천하도록 명했으며, 소현(紹賢)ㆍ화양(華陽) 두 서원에 사제(賜祭)하였다.

왕은 초기부터 유술 숭상을 급선무로 삼아 문묘(文廟)에 배향된 국조 제현(諸賢)들을 모두 표장(表章)하고 혹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도 했으며, 혹은 그들 유문(遺文)에 대해 친히 제(題)를 쓰기도 했고, 또 혹 그들 자손을 녹용(錄用)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들 문하의 여러 유생들까지도 모두 은총을 베풀었다.

경기ㆍ호서ㆍ영남에 기근이 들자 윤음을 내려 백성들을 위로하고 타이르는 한편 구휼 정책을 강구하도록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도하 백성들 생활 방편이 오로지 기호(畿湖)에 달려 있는데 기호 지방이 흉년이라 하여 내 오래 전부터 도하 백성들 걱정을 해왔던 터이다. 우리 나라 발매(發賣) 제도는 바로 한(漢)나라 때 진대(振貸)와 같은 것이니 한성부 진휼청으로 하여금 미리 호구를 조사하여 쌀 발매 정책을 정확히 세워두게 하라." 하였다.

9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가 탄생했는데 의빈(宜嬪) 성씨(成氏) 소생이었다. 영우원을 배알하고, 겨울에는 《국조보감(國朝寶鑑)》이 완성되었다. 당초 세조(世祖) 정축년7542) 에 대제학(大提學) 신숙주(申叔舟)에게 명하여 태조(太祖)ㆍ태종(太宗)ㆍ세종(世宗)ㆍ문종(文宗) 이상 4대의 보감을 찬술하도록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국조보감》이 된 것이다. 그로부터 이후로 계속된 왕조가 이 4조의 뒤를 이어 속성(續成)을 시도했으나 미처 손을 못 대고 있다가 숙종(肅宗) 경신년7543) 에 와서야 공조 참판(工曹參判) 이단하(李端夏)가 《선묘보감(宣廟寶鑑)》을 편찬하고, 영조(英祖) 경술년7544) 에는 대제학 이덕수(李德壽)가 《숙묘보감(肅廟寶鑑)》을 편찬해 올렸었다. 그러나 여러 국조의 보감이 하나의 통일 체제로 이루어지지는 못했었는데 신축년 가을에 와서 《영종실록(英宗實錄)》이 완성되자, 왕이 대신ㆍ각신들에게 말하기를,

"선왕의 50년에 걸친 훌륭한 덕과 위대한 사업은 역사에도 이루 다 기록 못할 것들이지만 실록은 석실(石室) 금궤(金櫃)에 깊이깊이 비장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고 오직 이 보감이라는 것이 비사(秘史)와는 조금 성질이 다르니 체제는 비록 편년체(編年體)를 쓰더라도 되도록 유양(揄揚)하는 쪽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지금 실록이 편성되었으니 이제부터 보감을 엮는 일을 시작한다면 나 개인에 있어서도 선왕의 교훈을 빛내고 공업을 천양하는 도리에 있어 유감됨이 없지 않겠는가."

하였는데, 제신들이 같은 목소리로 찬성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조 때 이루어진 보감 외에는 선조ㆍ숙종 두 국조의 보감이 있을 뿐 그 밖의 12국조는 아직까지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지금 그 모두를 함께 편집하여 이상 세 국조의 보감 및 영묘 보감(英廟寶鑑)을 합쳐 한 책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전해지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각 국조 실록들을 강화도에서 모셔오게 하고, 또 12명의 사신(詞臣)을 차출하여 편찬을 각기 분담하도록 했으며, 또 전임 대제학 이복원(李福源)ㆍ서명응(徐命膺) 등에게는 교정을 맡겨 무릇 7개월에 걸친 작업 끝에 보감이 완성을 보았는데 총 68권으로 된 책을 활자로 인쇄하였다. 제신들이 전문(箋文)을 갖추어 올리자, 왕은 법전(法殿)에 나아가 친히 받고는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고사(故事)에도 매 실(室)마다에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주(周)나라가 종묘에 보기(寶器)를 진열해둔 일, 또는 송(宋)나라가 궁전에다 옥첩(玉牒)을 간직했던 일들을 모방하여 입묘(入廟)할 때 반드시 그것들을 다 봉안해 왔었다. 이 보감도 그 내용이 선왕의 공덕을 들추어내 후손들에게 복을 물려준 내용인즉 사실 서서(西序)의 대훈(大訓)7545) 과 그 규모가 같다. 비록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완염(琬琰)이나 제도를 소명하는 새장(璽章) 같은 것으로도 오히려 그 소중함을 비유할 수 없는 물건이다. 다만 그동안 제도가 잘 갖추어지지 못하여 성대한 예를 행하는 데 부족한 바가 있었기에 3백여 년을 두고 아직 궐전(闕典)으로 남아있었던 것이지만 열조(列朝)의 보감이 찬란하게 다 이루어진 오늘에 있어서야 어찌 감히 그를 경건히 비궁(閟宮)에다 바치고 그것을 이 나라 고유의 예로 삼아 우리 자손 만세에까지 영원한 교훈으로 남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이에 책보(冊寶) 올리는 의식 절차를 참고 모방하여 보감을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다 친히 올리고 각 실에도 따로따로 두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윤음을 내려 대소 신료의 의견을 물어 영종(英宗)을 높여 세실(世室)로 삼고 원자(元子) 호칭을 정한 다음 백관들로부터 하례를 받고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견휼(蠲恤)의 정령을 내렸으며 이어 대사면령을 중외에 내려 죄수 3천여 명을 석방시켰다.

7년 1월 조참(朝參)을 앞두고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공경 백집사(公卿百執事)들이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하나의 풍습이 되어버렸다. 한 해 벽두의 조참은 즉위한 맨 처음과 다를 바 없고 더구나 지금 보감도 올렸고 원자 호칭도 정해졌으니 위로 선왕의 뜻을 잘 계술(繼述)하는 방법에 있어서나 아래로 자손들에게 좋은 교훈을 남김에 있어서나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그대들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내일 문간에 들어설 때 대신(大臣) 삼사(三司)는 물론 서료(庶僚)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좋은 교훈 좋은 설계가 될 만한 의견들을 각기 개진하라." 하였다. 제신들이 제각기 소회를 개진하자, 그를 다 받아들이고, 경기ㆍ호서ㆍ영남 3도의 도신(道臣)들에게 유시를 내렸으며, 또 내탕(內帑)의 전초(錢椒)를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면서 이르기를, "흉년을 당하여 기민을 진휼한 일이 옛부터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꼭 익주(益州)의 기근을 다스린 한기(韓琦)와 청주(靑州)의 수재를 구제한 부필(富弼)을 들먹인 까닭은 그들이 오직 하나의 '성(誠)'으로 철두철미하게 백성들을 돌봤기 때문이다. 우리도 있는 정성을 다해 송(宋)의 한기ㆍ부필만이 아름다운 이름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각도에서 효열(孝烈)을 뽑아 아뢰자, 하교하기를, "신하에 있어서는 충(忠)이요 자식에 있어서는 효(孝)이며 부인에 있어서는 열(烈)인데 그것은 시골 마을의 필부 서민들조차도 해내기 어려운 일인데 더구나 제왕(帝王)의 집안이겠는가. 우리 화순 귀주(和順貴主) 같은 사람은 탁월하다고 할 만하다. 옛부터 제왕의 집안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일인데 오직 우리 가문에 그러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이 나라 정신(貞信)을 대변하는 증거일 뿐만 아니라 우리 집안 가범(家範)에 있어서도 얼마나 빛나는 일인가." 하고, 이어 그 문(門)을 열녀문으로 정표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정순 대비(貞純大妃)ㆍ경모궁(景慕宮)ㆍ혜경궁(惠慶宮)에 존호를 더 올렸는데 그는 자손에게 많은 복을 주었다는 뜻를 표한 것이었다.

대신과 예관(禮官)이 입대를 요구하여 아뢰기를, "우리 성상께서 자리에 오르신 지 7년이 되도록 공덕을 나타내는 존호 올리는 예를 아직도 거행하지 못하여 온 나라 신민들이 답답하게 여기고 있으니 공경히 송축하기를 감히 청하는 바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그 말을 들으니 내 마음이 배나 더 슬퍼지는구나. 경들이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바로 나의 불효한 죄를 더 보태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라를 맡고 있는 대신들에게 미쁨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뜻도 되어 내 매우 부끄럽다. 나의 지금 이 말은 사실 내 진심에서 나온 말이니 경들은 내 마음을 체득하고 이해해 주기 바라는 바이다." 하였다. 제신들이 누누이 청했지만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각신(閣臣) 정지검(鄭志儉)이 상차하여 청하기를, "송(宋)의 홍매(洪邁)가, 그날그날 보고 들은 성어(聖語)를 기록하여 수주관(修注官)에게로 보내게 하자고 했던 고사(故事)를 본따 경연(經筵)에 오를 때마다 성어를 유심히 들어뒀다가 물러나와서 기록하고 한 해가 끝날 무렵이면 그것을 다시 증정(證正)하여 《정관정요(貞觀政要)》와 《주자어류(朱子語類)》의 예처럼 본각(本閣)에다 간직해 두는 것을 법제화하소서." 하여, 그대로 따랐는데 그것이 바로 《일득록(日得錄)》이 되었다. 그후 내각에다 유시하기를, "《일득록》을 만든 이유는 대개 근래 기주관(記注官)의 기록이 틀린 데가 많기 때문에, 가령 경의 문답(經義問答) 내용이나 시정(時政)에 관한 의견 교환 같은 것은 근신(近臣)들이 신진(新進)들보다는 이해가 더 깊으므로 꼭 송나라 고사대로 본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관성(觀省)의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만약 너무 지나치게 좋은 점만 강조하여 포장(鋪張)만 한다면 그 기록을 본 후인들이 지금을 두고 뭐라고 하겠는가? 그 점을 각신들이 알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여름에 날이 가물어 감선(減膳)을 하고 또 구언(求言)도 했다가 이튿날 비가 내려 예조가 복선(復膳)할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약간 내린 것도 다행은 다행이나 한 자쯤 내려주길 바라는 마음이어서 금방 복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수성(修省)의 자세를 어찌 비가 좀 온다 하여 흐트러뜨릴 수 있겠는가. 도움을 바라던 나머지라서 좋은 말을 듣고 싶으니 제신들은 그 뜻에 부응하여 나의 마음을 펴낸 그 유시가 형식에 불과한 일개 공문서로 끝나버리지 말게 하라." 하여, 경재(卿宰) 이하 그 뜻에 따라 소를 올린 사람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가을에는 건원릉(健元陵)ㆍ원릉(元陵)을 배알했으며, 영희전(永禧殿)을 개수했다. 그에 즈음하여 하교하기를, "옛날 선왕조 때는 종묘ㆍ궁전을 개수하게 되면 언제나 의관을 정제하고 이안청(移安廳) 앞에 나와 계시다가 다시 원위치에 봉안을 하고서야 비로소 소차(小次)로 들어가시곤 했는데 그는 이 소자(小子)가 그때마다 흠앙(欽仰)했던 바다. 그런데 지금 내가 어찌 감히 스스로 안일을 취하여 하시던 대로 계승할 생각을 안 해서야 되겠는가." 하고, 곧 개수 장소로 나가 몸소 공역를 감독했으며 밤이 되기 전에 공사가 끝나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하교하기를, "옥(獄)이라면 다 신중을 기하는 것이 제왕(帝王)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인데 나는 사리 판단을 원활히 못 해 한 죄안을 심의 결정할 때마다 전도 착란을 일으키기 일쑤다. 모든 관직 제수나 재정 출납 또는 강제(講製) 초록 발췌 등에 있어서도 모두 장부를 두어 기록하고 있는데 더구나 형옥(刑獄) 처리 관계에 있어 어찌 이미 끝난 사안이라 하여 다시 두고두고 연구 검토를 안 해서야 될 일인가. 지금 이후로는 의금부와 형조의 결옥안(決獄案) 중에서 긴요한 부분은 초록해 두었다가 그달 말에 가서 기록해 아뢰고 매년 계삭(季朔)에는 그것을 책자로 만들어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언젠가 내원(內苑)의 와린평(臥麟坪)을 지나다가 한 토실(土室)을 가리키며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저것이 옛날 이른바 북사옥(北寺獄)이라는 것으로 궁중에서 죄지은 자들을 가두었고 저 옥에도 형구(刑具)가 있다. 나는 궁중과 부중(府中)이 일체라고 생각되어 죄인은 모두 유사(有司)에게 맡겨 법에 의해 처리하도록 하고 토실은 이용 않기로 했기에 지금은 저 터만 있는 것이다." 하였다.

대사성 민종현(閔鍾顯)이 상소하여, 선비들을 선발 입재(入齋)시킬 것을 관ㆍ각ㆍ묘당의 신들과 논의할 것을 청하자, 비답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후 과거(科擧) 문제에 대해 의견을 수렴한 결과, 대소과(大小科) 제도를 고치자는 것, 생획과(栍畫科) 정원을 늘리자는 것, 원점과(圓點科)를 부활시키자는 것 등이었는데 그 모두를 보류한 채 아직도 짤막한 비답 하나 내리지 않고 있는 까닭은 그럭저럭 지내면서 변통을 안 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모든 폐단이 법 때문이 아니고 바로 인재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되어서이다. 법이야 현행의 법이 조종조에서 만든 금과 옥조가 아닌가. 인재만 얻어 맡긴다면야 유교(儒敎)가 진흥되지 않고 사풍(士風)이 진작되지 않는 것을 걱정할게 뭐겠는가. 구경재(九經齋)를 다시 설치할 것도 없고, 연영원(延英院)을 모방할 필요도 없으며, 성균관 유생이니 사학 유생이니를 따져 구별할 것도 없는 것이다. 오직 '득인(得人)' 그 두 글자가 폐단을 바로잡는 데 있어 가장 급선무이니 경들은 각별히 인재 찾기에 힘쓰라." 하였다.

그해에 6개 도(道)가 기근이 들었는데 왕은 그것을 크게 걱정하여 날마다 담당 신하를 불러 접견하고 황정(荒政)을 강구하였다. 그때가 또 마침 탄신(誕辰)이었는데 왕은 하교하기를,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인데 외지의 곤수(閫守)와 목백(牧伯)들이 모두 전문을 올려 축하를 표하고 있지만 내가 마음 조이고 있는 것이 우리 백성들 문제뿐이다. 백성들은 지금 신음 중에 있어 그 아픔이 바로 내 아픔과 같은데 축하는 무슨 축하란 말인가." 하고, 각도에 윤음을 내려 도신들로 하여금 별도로 대비책을 강구하도록 경계하였다. 또 영동(嶺東)의 9개 군이 다른 곳에 비해 더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사신을 보내 선유(宣諭)하는 한편 포항(浦項) 창고의 곡식을 옮겨다 구제하게 하기도 했으며, 향축(香祝)을 내려 바다 등지에 제사를 올리어 일이 잘 되도록 빌게 하기도 하였다. 겨울에 하교하기를, "흉년이 들면 부황나고 의지할 곳 없는 우리 백성들 어느 누가 왕정(王政)의 구제 대상이 아니겠는가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호소할 곳 없고 가장 불쌍한 것들이 어린것들이다. 심지어 길가에 버려진 것들을 거리에 그대로 방치해두어 죄 없이 죽고 마는데 그것이 어찌 천지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이겠는가. 광제원(廣濟院)이니 육영사(育嬰社)니 하는 좋은 제도들이 있어도 예와 지금이라는 시대의 차이 때문에 하루아침에 그를 다 그대로 거행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도 서울은 팔방(八方)의 표준이 되는 곳이니 우선 여기서부터 그 제도 비슷한 것을 시행함으로써 각 지방이 차근차근 본받도록 하는 것이 실로 인정(仁政)의 시작에 합당할 것이다." 하고, 이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만들어 그를 인쇄해서 중외에 반포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매 월말이면, 몇 명씩이나 수양(收養)하고 있으며 또 그렇게 실시하고 있는 곳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울러 아뢰라고 하였다.

8년 1월 조참(朝參)을 앞두고 왕이 문신 중에서 선발되어 대직(臺職)을 맡은 자들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이 새로 대직을 맡았으니 언론이나 풍기 제재에 있어 틀림없이 볼 만한 것들이 많이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뿐만 아니라 선발을 받은 문신이라면 남다른 은례(恩禮)와 청고한 지망(地望)이 경악(經幄)에 뒤질 것이 없으니 내 우선 그대들에게서 직언 당론(直言讜論)을 듣고 싶은 것이다. 간관(諫官)이란 직책은 마치 조양(朝陽)의 봉이요 전상(殿上)의 호랑이여서 백관들 모두가 다리를 떠는 바이니 그 직책에 있으면서 말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옛날부터 대각을 욕되게 한다는 벌이 있었다. 그대들이 추천 물망에 오르자마자 기회가 또 마침 연방(延訪) 시기이니 그대들은 모름지기 각자 숨김없이 바른말을 하라."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태학 유생들을 불러 강을 하게 하고는 식당(食堂)을 개설하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정자(程子)가 승사(僧舍)의 회식(會食) 광경을 보고는, 삼대(三代)의 위의(威儀)가 있다고 감탄한 일이 있는데 하물며 태학의 식당이겠는가. 질서 지켜 나오고 나이대로 앉아 있는 모습이 질서정연하여 참으로 볼 만하다. 내 그래서 제생(諸生)들과 함께 있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부추나물에 소금국이 비록 박하기는 해도 내주(內廚)의 진수 성찬보다 맛은 더 좋으니 경들도 각기 한번 배불리 먹어 보라." 하였다. 원점(圓點)에 관한 법을 검토했으며, 묘당(廟堂)과 이조의 신하들로 하여금 초야에 묻혀 있는 뛰어난 인재들을 천거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그리고 재앙을 입은 각도에 윤음을 내리고 별도의 진휼할 물자를 하사하기로 하였다.

지진이 일자, 하교하기를, "지난달에는 혜성이 나타나더니 오늘 새벽에는 또 지진 소리가 들리니 이야말로 군신 상하가 모두 정신을 가다듬고 분발 노력하여 수성(修省)의 도를 다할 때가 아니겠는가. 아, 백천 가지 병폐는 다 언로(言路)가 막혀 있기 때문인데 구언(求言)의 기회를 간혹 마련해 봐도 입바른 말은 들을 수가 없고 다만 남의 비밀을 들춰내는 풍조만 일고 있으니 이는 구언이 오히려 말을 않은 것보다 더 심한 피해가 있는 것이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바로 나 자신의 허물이나 시정(時政)의 폐단에 관한 것이니 내일 빈연(賓筵)에서는 삼사(三司)가 각기 광구(匡救)에 관한 말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건원릉ㆍ원릉을 배알하고, 오부(五部)의 기민들을 뽑아 값을 내려서 쌀을 지급해 주었는데 대체로 2만여 호(戶)에 달했다. 또 도하(都下)에 돈이 말랐던 관계로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빈대(賓對)를 실시할 때 공시(貢市)의 사람들을 직접 불러 여러 가지 폐단에 관해 물은 다음 하교하기를, "작년에 6개 도가 흉년이 들었던 관계로 중외를 막론하고 먹고 살기 어려우리라는 것은 눈에 선하다. 더구나 왕도(王都)는 팔도의 본거지로서 자기 힘으로 씨부리고 수확하는 길도 없는데다 조적(糶糴)의 혜택마저도 없으니 이 흉년을 당해 모두가 곤경에 빠질 수밖에 또 있겠는가. 옛날 선왕조 때는 언제나 도하의 백성들을 진념하여 돌봐주시고 조세나 환곡을 정지하거나 감면해 주곤 했는데 그 후덕하신 뜻을 이 소자(小子) 평일에 늘 보고 느껴왔던 터이다. 지금 내가 문에 나와 묻고 있는 것도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한 것이다." 하고는, 각영(各營) 각사(各司)의 돈 15만 꿰미를 이자 없이 구전(口錢)도 떼지 말고 공시 백성들에게 대차해주도록 명했다.

대빈(大嬪)의 묘를 수리하고 하교하기를, "선왕조에서는 대빈궁의 시사(時祀) 절사(節祀) 때 늘 경건하고 조심스럽게 묘를 수봉하곤 했는데 내 어찌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경옥(京獄)의 검험(檢驗) 규정이 지방 각도에 비해 소략한 점이 많다 하여 비변사에 명해 검험 규정을 다시 강정해서 형조와 한성부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가을에 역적 김하재(金夏材)가 소매 속에 흉서(凶書)를 넣고 입궐하여 전향 승지(傳香承旨)에게 보였는데 그 흉서 내용은 경몽(鏡夢)ㆍ운해(雲海)도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서 경연 신료들이 분해서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 정도로 치를 떨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일제히 국청을 열어 사실을 밝힐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는데 급기야 하재(夏材)가 법에 의해 베임을 당하고 나자, 경연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세상에 무슨 하재가 둘씩이나 있겠는가? 그 자가 재열(宰列)에도 드나들었고 전임(銓任)도 맡은 때가 있었으니 그와 서신 왕래했던 사람이 있었던 것이야 이상할 게 없는 일이다. 그 모두를 불태워버리라." 하였다.

8월에 문효 세자(文孝世子)를 책봉하고 영릉 배알 길에 나섰다. 대가가 월산 대군(月山大君) 사당을 지날 때 하교하기를, "듣자니 대군의 강사(江舍)가 그 자손들이 흩어져 사는 바람에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풍월정(風月亭) 현판만 아직 남아 있다는데 선릉(宣陵)과 지극히 우애했던 일이 지금까지도 전송되고 있는 터에 하사 집 하나도 대를 이어 지키지 못한대서야 그 어찌 잘못된 일이 아니겠는가. 호조가 값을 변상하고 되찾도록 하라." 하였다. 진전(眞殿)을 배알하고 인정전에서 조참을 행하면서 뜰에 있는 제신들에게 유시하기를, "금년 이날이 바로 우리 선왕께서 왕위에 오르신 회갑(回甲) 날이다. 이 문은 선왕께서 납시던 문이요, 이 조정은 선왕으로부터 물려받은 조정이다. 이날 이 의식이 어찌 관첨(觀瞻)을 위한 것이겠는가. 이 공고한 기반과 영광스런 경사가 뿌리 있게 전래되었음을 보이기 위한 것이다. 지금 이 뜰에 나와 있는 제신들도 옛날 선왕을 섬기던 사람 아닌 자 누가 있겠는가. 혹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다면 그는 바로 그대 조부가 우리 선왕을 모시고 대대로 충정(忠貞)을 바쳐 그것을 자손인 그대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우리 어찌 기쁨과 슬픔을 함께 하면서 서로 도와 다스려나가야 되지 않겠는가. 선왕의 덕을 천양하고 업을 이어가며 길이 후손들을 복되게 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고, 서로 공경하고 협동하고 정백(精白)한 마음으로 왕실을 돕는 일은 신하들이 할 일이다. 아, 그대들이여, 각기 맡은 바 직무에 충실하여 나 한 사람을 떳떳하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 하였다.

사대신(四大臣)과 삼장신(三將臣)ㆍ사절도(四節度) 그리고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齊), 증 판서(贈判書) 이정숙(李廷熽)에게 제를 내리고, 증 판서 조성복(趙聖復), 증 참판 김성행(金省行)은 정려(旌閭)를 했으며, 고 상신(故相臣) 정호(鄭澔)ㆍ민진원(閔鎭遠), 고 판서(故判書) 이만성(李晩成)의 손자를 임용하였다. 하교하기를, "학성군(鶴城君)은 그가 갑술생(甲戌生)인데 내 그를 볼 때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든다. 옛날 이날에는 시위(侍衛)로 참여했었는데 금년 오늘에는 또 보검(寶劒)으로 시위하고 있으니 어찌 그를 표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특별히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잔치와 풍악을 내렸다.

9월에 친히 태묘(太廟)에 제사를 올리고 영종 대왕(英宗大王)ㆍ정성 왕후(貞聖王后)ㆍ정순 대비(貞純大妃)ㆍ경모궁(景慕宮)ㆍ혜경궁(惠慶宮)에 존호를 올렸으며, 인정전에 나아가 백관의 하례를 받은 후 중외에 대사면령을 내리고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였다.

천둥이 일자 하교하기를, "밤에 번쩍번쩍 꽝꽝하는 소리를 들었는데 비록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인자하신 하늘이 그렇게 분명한 경고의 뜻을 보이셨으니, 자신을 반성하고 살펴볼 때 그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옛날에도 10월에 천둥이 일면 감선을 했었다. 그런데 10월 절후(節候)가 26일에 이미 들어 있어 달은 9월이라도 9월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고, 3일을 감선했고 삼사(三司)의 신하들은 각기 교지에 응하여 글월을 올렸다.

겨울에, 각신(閣臣)들로 하여금 《일성록(日省錄)》을 편수하라고 명했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하룻동안 한 일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겼는데 그때 와서 기거주(起居注) 기록이 착오와 누락이 많다 하여 별도로 편수하도록 명하고 증자(曾子)의 일삼성(日三省) 뜻을 따 《일성록》 이라고 명명하였다.

9년 1월 사단(社壇)에다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단향(壇享)은 옛날로 치면 바로 방구(方邱)7546) 이다. 질그릇 바가지를 쓰고 형기(鉶器)에 국을 담아 땅바닥을 쓸고 제사를 올리면 그 영령이 넓은 바다와 같아 어디고 없는 곳이 없으므로 주ㆍ부ㆍ군ㆍ현을 막론하고 사직(社稷)에 관한 책임은 다 있는 법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보면 여러 도의 사단이 황폐한 곳이 많아 단의 담들이 무너지고 살문[箭門]이 쓰러지고 했는데도 수재(守宰)들이 그를 성황당 등 다른 단들이나 똑같이 보아 정성들여 제사 모시는 막중한 곳을 나무하고 꼴 먹이는 장으로 묵혀버렸다고 하니 제사도 의식대로 모시지 않고 제물도 정결할 리 없으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다. 수령이라면 그 직책 중에서 민사(民社)를 관리하는 일이 대단히 중요한 일인데 거기에 정성을 쏟지 않는다면 그 나머지야 볼게 뭐가 있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각읍에 경계의 공문을 보내 사단을 다시 수리하고 그곳을 지키는 교졸(校卒)을 둘 것이며, 표를 세워 경계를 정하여 잡인들이 못 드나들도록 각별히 금지하고, 매 월초 월말에 영문(營門)에다 그 현황을 보고하면 영문에서는 그것을 다시 예조에 보고하여 근만(勤慢)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되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양호(兩湖)의 수운(水運)이 시간이 많이 걸려 기한을 넘기기 일쑤이고 걸핏하면 또 물에 잠기곤 하여 경비는 점점 바닥이 나가고 그 지방의 거주민에게 끼치는 폐단도 많았다. 왕은 그를 걱정하여 대신 이하 제신들 의견을 물어 한강의 배를 대오로 짜는 제도를 만들게 하였다. 그리하여 4개 진(鎭)의 별장(別將)들로 하여금 각기 관할을 정해 따로따로 맡아서 거리의 원근에 따라 소요되는 기일을 정하고, 안배된 물량을 다시 운반하여 각 창고에다 나누어 저장하게 함으로써 우선 어려운 인력 동원비를 줄이고 이어 호송에 관한 법규까지 정하게 하는 등 비변사로 하여금 그에 따른 세부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도에 명해 의승(義僧)들의 교구(矯捄) 방안을 각별 강구하여 시행하게도 하였다.

태릉(太陵)ㆍ강릉(康陵)을 배알하였다.

전 현감 김이용(金履容)이 상변하여 이율(李瑮)ㆍ양형(梁衡)ㆍ홍복영(洪福榮)ㆍ문양해(文洋海)ㆍ주형채(朱亨采)ㆍ김두공(金斗恭) 등을 친국했는데, 복영은 홍낙순(洪樂純)의 자식으로서 국영(國榮)ㆍ낙순의 죄가 탄로나자 복영이 국가에 대한 원한을 품고 불궤(不軌)를 저지를 생각으로 이율ㆍ양형ㆍ문양해 등과 짜고 비결에 가탁하여 거짓말을 퍼뜨리고 영남 하동(河東) 땅을 근거지로 돈을 모으고 집을 짓고서 불일간 거사를 하려고 모반 준비가 완료 상태에 있었다. 그들이 국청에서 신문을 당하게 되자 그들은 귀신을 끌어다 대고 성명도 없는 것들을 끌어대면서 그 옥사를 갈팡질팡하게 만들려고 하였고, 각도에서는 도신(道臣)ㆍ수신(帥臣)의 밀계(密啓)가 하루에 너댓 차례씩 올라왔는데 이때 상이 하교하기를,

"병신ㆍ정유년 이래로 난역(亂逆)이 늘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국가에 죄 지은 무리들이 난리가 일어나고 화환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터무니없는 말로 허풍을 치며 사람들 마음을 현혹시키는 것으로 요사스럽고 사리에 당치도 않은 허다한 말들이 각지에 전파되고 있으나 그들의 진짜 소굴은 지금도 그대로 있는 것이다. 지리산ㆍ묘향산이 그 둘레가 비록 넓고 멀다고 해도 만약에 진짜 문양해 공초대로 그 속에 선원(仙苑)이 있고 이인(異人)이 있다면 몇 개 읍의 교졸(校卒)을 동원해서 깊은 골짝에서 정상까지 빗질을 하다 싶이 뒤졌는데도 마을 하나 없고 사람 발자국 하나 없단 말인가. 부질없이 죄 없는 백성들만 겁을 먹고 떠들썩하게 되어 열 집 되는 마을에 일곱 여덟 집이 다 비게 만들었다. 설사 불량한 무리들이 혹 딴 뜻을 먹고 있다고 해도 그것쯤이야 소추(小醜)에 불과하지 평민들하고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 비록 대궐 속에 깊이 앉아 있어 자세히 듣지는 못했으나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어찌 침식(寢食)을 달게 여길 수 있겠는가. 빨리 각도로 하여금 모든 수포(搜捕)와 규찰(糾察)에 관한 일은 그 일체를 정지하여 우리 백성들이 마음놓고 생업을 즐기면서 각기 윗사람을 친히 여기고 어른을 위해 죽을 마음이 있게 하라." 하였다.

역적들이 다 법에 의해 처형되었는데 김두공(金斗恭)은 김하재(金夏材) 조카로서 처음에는 상변한답시고 국정에서 하재의 흉서를 외우던 자였는데 결국 사실을 자백하고 복주되었다.

여름에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고 하교하기를, "남쪽에는 관아를 두고, 북쪽에는 환시를 두어 그 한계가 대단히 엄하여 한 번이라도 그 한계를 넘어섰다 하면 그를 규제하는 국가의 법이 있었으니, 열성조에서 그들을 심하게 억제하여 수문(守門) 전령(傳令) 이외에는 조정(朝政)에 일체 간여하지 못하게 했었다. 우리 선왕조 때는 또 환시(宦寺)에 대해 더욱 엄한 규제를 했었는데 내가 즉위한 이후 꼭 그대로 할 생각이었다. 특히 궁중에 있으면서 가까이 좌우에서 모셔온 자들이 불순한 무리들과 온갖 방법으로 결탁하여 대내(大內)를 넘보기 위해 어두운 밤에 왕래하는가 하면 좋은 벼슬자리를 얻으려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곤 했는데, 지금도 홍계희(洪啓禧)ㆍ김상로(金尙魯) 등 충절을 바친다는 무리들이 역적을 모의했던 일을 생각하면 생각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머리털이 치솟는다. 그로부터 역옥(逆獄)이 한 번 일어나면 뒤이어 곧 환옥(宦獄)도 한 번 일어나곤 했는데 전후 그 국옥(鞫獄) 때마다 나는 되도록 너그럽게 처리하려고 했지만 그 사건에 환관이 관련되어 있으면 그는 조금도 용서치 않았었다. 더구나 무신인 경우 그 활동범위에 있어 엄한 한계를 두어야 할 것이 문신에 비해 훨씬 더한데, 요즘 들어보면 중일제(中日製) 시장(試場)이나 구궁(舊宮) 터에서 기율이 문란하기가 그보다 더할 수 없어 활 쏘다 말고 웃고 떠들고 한다 하니 그 몹쓸 습관이 그대로 점점 자라가게 내버려둬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병조의 장은 각청의 무사들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상세하게 타일러서 깨닫고 무서워할 줄을 알게 하라." 하였다.

7월 1일 일식이 있었는데 서울과 외방에 유시를 내려 구식(救食) 제도를 재정비하게 하였다. 그 전에는 각 관아에서 잘못된 전례만을 답습하여 그날 입직한 낭관만 구식에 참여해 왔었는데 지금 와서 옛 법을 다시 살려 장관(長官)이 행사하게 하였고 이어 구식 도구도 재정비하였던 것이다.

명릉(明陵)과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했다. 《대전통편(大典通編)》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경제(經制) 서적으로는 세종(世宗) 때 《육전등록(六典謄錄)》을 시작으로 하여 세조(世祖) 때는 《육전》을 절충해서 《경국대전(經國大典)》을 만들었고, 성종(成宗) 때는 《속록(續錄)》, 중종(中宗) 때 《후속록(後續錄)》, 숙종(肅宗) 때 《집록통고(輯錄通考)》, 영조(英祖) 때는 《속대전(續大典)》을 만들었는데 이때 와서 대신(臺臣)들 말이, 즉위 이후 받은 교령(敎令)으로서 장래 영식(令式)이 될 만한 것이면 그를 유별로 모아 책을 만들어서 시행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왕이 이에 이르기를, "《속대전》은 갑자년7547) 에 만들어진 것이고 선왕의 교령은 갑자년 이후 것도 많지만 어떻게 감히 근대 것만 전폭적으로 취하고 전대의 것은 소홀히 다룰 것인가. 그 뿐 아니라 원전(原典)ㆍ속전(續典)이 각기 따로따로 있으면 참고하기에도 불편한 점이 있으니 원전과 속전 및 옛 교령 지금 교령을 모두 합해 한 책으로 만드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두서너 경재(卿宰)가 그 일을 맡아하고 대신(大臣)이 모두를 총괄하게 하였는데, 책이 완성되자 이름을 《대전통편》이라 하고 중외 각지에 나누어 보냈다. 그리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대전통편》에 새로 더 넣은 조항은 나로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한 것으로 사율(死律)에 관한 사항은 감히 일개 조도 더 넣지 않았다." 하였다.

진장각(珍藏閣)에 나아가 황조(皇朝)의 어필(御筆)과 어화(御畵) 그리고 열성조의 어제(御製)ㆍ어필ㆍ어화ㆍ고명(誥命) 두루마리들을 열람하다가 영종조에서 편찬한 《갱장록(羹墻錄)》을 발견하고는 하교하기를, "열성조의 치법(治法) 정모(政謨)가 모두 이 속에 들어있다. 보감(寶鑑)은 체제가 편년체(編年體)이고 이 녹(錄)은 부류별로 모아놓은 것이어서 내용은 같은 내용이지만 열람하기 편리하기로는 녹이 더 긴요하니 이도 속성(續成)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 내각의 제신들에게 명하여 지문(誌文)ㆍ행장(行狀)ㆍ보감ㆍ실록(實錄) 및 정원일기(政院日記) 등에서 뽑아 부류 별로 편찬하여 장차 주연(胄筵)강의 때 참고 자료가 되도록 하게 하였다.

《병학통(兵學通)》이 완성되었다. 우리 나라 군제(軍制)는 오로지 《병학지남(兵學指南)》 만을 적용해 왔는데, 왕이 너무 소루한 것을 걱정하여 새로 조련에 관한 정식(程式) 등을 부류대로 모으고 또 강(綱)과 목(目)을 따로 세워 한 질의 책을 만들어 인쇄 반포하였다.

네 국조(國朝)의 어제ㆍ어필비를 서울 동남방에 위치한 관왕묘(關王廟) 안에다 세웠다.

(계속)

출전 : 정조실록 부록 정조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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