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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7 (목) 14:13
분 류 사전2
ㆍ조회: 914      
[조선] 숙종 행장 3 (실록)
숙종 대왕 행장 3

(앞에서 이음)

경자년20107) 에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다 하여 진하(陳賀)하고 반교(頒敎)하였다. 6월에 왕의 환후(患候)가 더욱 무거워지니, 세자가 재차 대신(大臣)과 중신(重臣)을 보내어 종사(宗社)ㆍ산천(山川)에 기도하였다. 8일 진시(辰時)에 왕이 경덕궁(慶德宮)의 융복전(隆福殿)에서 군신(群臣)을 버리니, 춘추(春秋) 예순이었다. 이날 경성(京城)의 모예(旄倪)20108) ㆍ여대(輿儓)20109) 들까지 궐하(闕下)에 달려나와 마치 부모처럼 곡(哭)하였고, 심산 궁곡(深山窮谷)에 이르기까지 바삐 달려와서 호읍(號泣)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중궁(中宮)이 원상(院相)에게 하교하기를, '대행 대왕(大行大王)의 평일의 거룩한 덕행을 조신(朝紳)들이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오히려 다 알지 못하는 점이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정무(政務)에 수응(酬應)하시느라 누차 침식(寢食)을 폐하셨고, 하늘을 공경히 섬겨 재앙을 만나면 공구(恐懼)하셨다. 사시(四時)의 기후가 간혹 고르지 못하거나 우설(雨雪)의 절기가 만일 시기를 잃어 무릇 농사에 피해가 있으면 곧 근심이 얼굴빛에 나타났고, 날씨의 흐리고 맑음과 바람이 어느 방향에서 부는가 하는 것 등을 비록 밤중이라도 반드시 여시(女侍)로 하여금 살펴보도록 하셨다. 백성에 대한 걱정과 나라에 대한 일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여 잠시도 잊지 않아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근로하심이 시종 하루와 같아 여러 해 동안 계속 손상된 나머지 성수(聖壽)를 단축시키게 된 것이다. 상장(喪葬)의 제구(諸具)에 이르러서는 경비를 진념(軫念)하여 일찍이 조치한 바가 있었다. 모든 여러 가지 제기(祭器)는 이번에 내려 주는 은자(銀子)로 만들도록 하고, 또 이 3천 7백 금(金)은 대행 대왕께서 진휼의 자금으로 미리 준비해 두셨던 것인데, 이제 지부(地部)에 내려 국장(國葬)의 비용에 보태 쓰도록 한다. 습렴(襲殮)의 의대(衣襨)도 또한 대내(大內)에서 준비해 쓸 것이니, 만일 부족한 것이 있을 경우 해조(該曹)에서는 다만 써서 보이는 것을 기다렸다가 들여보내도록 하여 평일에 백성을 구휼하고 경비를 절약하던 지극한 뜻에 힘써 따르도록 하라. 습렴(襲殮)할 때는 대신(大臣)ㆍ예관(禮官)ㆍ승정원(承政院)ㆍ삼사(三司)에서 입시(入侍)하는 것이 예(禮)이다.' 하였다.

왕은 영명(英明)ㆍ특달(特達)ㆍ관홍(寬弘)ㆍ근검(勤儉)하였으며, 효성(孝誠)의 돈독함은 천성에서 나와 시선(視膳)할 때부터 기쁜 낯빛으로 모시는 도리를 다하였다. 사복(嗣服)하자 천승(千乘)의 존귀함으로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의 행실을 몸소 실천하여 자의(慈懿)ㆍ명성(明聖) 두 동조(東朝)20110) 를 받들어 섬겼는데, 새벽과 저녁으로 승환(承歡)하여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였다.

해마다 태묘(太廟)에 친히 향사(享祀)하고 봄ㆍ가을로 반드시 원릉(園陵)을 전알(展謁)하였다. 여러 능(陵)을 두루 참배했는데, 더러는 두세 차례에 걸쳐서 하기도 하였다.

생각건대, 우리 국가는 성신(聖神)이 계승하여 풍성한 공렬(功烈)이 드높고 빛났으며, 관덕(觀德)의 묘우(廟宇)와 숭보(崇報)의 의전(儀典)이 거의 모두 이룩되었는데도, 왕은 오히려 미진하게 여겼다. 효사(孝思)를 미루고 넓혀서 말하기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것은 존주(尊周)의 의리이니 밝히지 않을 수 없는데, 자수(字數)가 가지런하지 않은 것은 여러 묘우의 예(禮)가 마땅히 다른 점이 있어서는 안된다.' 하였다. 이에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시호(諡號)를 추가로 올렸고, 인조(仁祖)는 중흥(中興)의 대업(大業)을 이루고, 효종(孝宗)은 춘추(春秋)의 대의(大義)를 밝혔으므로, 높여서 세실(世室)로 삼았다. 단종 대왕(端宗大王)은 선위(禪位)한 이후 수백 년 동안 나라 사람들이 원통하고 억울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열성(列聖)이 어떻게 할 겨를이 없었는데, 왕이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결단을 내려 서둘러 욕의(縟儀)를 거행하니, 종묘(宗廟)의 전례(典禮)가 질서가 있게 되었고, 신(神)ㆍ인(人)이 모두 기뻐하였다. 별도로 중종(中宗)의 신비(愼妃)의 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문치(文治)를 숭상하였으며, 유교(儒敎)를 숭상하고 도학(道學)을 존중하였다. 한가로이 보내는 여가에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고, 경전(經傳)ㆍ사서(史書)와 제자 백가(諸子百家), 우리 동방(東方)의 문집(文集)까지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무릇 한 번 본 것은 평생 잊지 않았다. 날마다 세 번 경연(經筵)을 열어 부지런히 노력하며 게을리하지 않았고, 모년(暮年)에 이르러서도 자주 강관(講官)을 인접(引接)하였으며, 글에 임하여서는 이치를 분석하여 견해가 분명하고 투철하였다. 일찍이 《심경(心經)》의 '마음의 동정(動靜)'을 논하기를, '출몰(出沒)이 일정하지 않고 발동하기는 쉽지만 제어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마음 같은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동(動) 가운데 정(靜)이 있고 정(靜) 가운데 동(動)이 있다.」는 설이 있다는 것이다.' 하였다. 《주역(周易)》의 '납약(納約)'의 설을 논하기를, '이것은 대신(大臣)이 어렵고 험난한 때를 당해 마지못하여 이런 방도를 쓸 수 있는 것이며, 만일 치평(治平)한 세상에 사잇길을 통해 임금에게 결탁한다면 옳지 않다.' 하였다. 대유괘(大有卦)의 구사효(九四孝)를 논하기를, '강하고 부드러움이 중도(中道)를 얻은 연후에야 밝혀 비추고 강건하여 결단할 수 있다. 만일 혹시라도 단지 부드럽기만 하고 엄(嚴)하지 않거나 단지 엄하기만 하고 부드럽지 않다면, 어떻게 능히 그 소유한 대중을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고, 육오효(六五爻)를 논하기를, '너무 부드러우면 인심(人心)이 해이해지기 쉽다. 그러므로 반드시 위엄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 《중용(中庸)》에 이른바 「강함을 나타내고 꿋꿋하여야 고집함이 있기에 족하다.」는 것은 위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역대(歷代)의 일을 논하여 말하기를, '한(漢)의 성제(成帝)가 이미 적방진(翟方進)으로 하여금 자살(自殺)하도록 하고서 또 후하게 장사(葬事)지내 주도록 하였으니,20111) 하늘에 응하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송 경공(宋景公)은 좋은 말을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1도(一度)를 옮겨갔으니,20112) 군주의 말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지난 역사를 보니 실로 소인(小人)인 줄 알지 못하고서 쓴 사람도 본래부터 있었지만, 더러는 소인인 줄 알면서 쓴 사람도 또한 있었으니, 이는 대개 사의(私意)를 제거하지 못한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군주에게 신하가, 아비에게 아들이 모두 간(諫)할 수 있는 도리가 있다. 부소(扶蘇)가 서적을 불사르고 유생(儒生)을 파묻는 것을 보고 어찌 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다행히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화(禍)는 없었을 것이니, 이것이 어찌 부소의 허물이겠는가? 혹자가 이것을 부소의 과실이라 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록 악했을지라도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장수에게 명하여 정벌하게 했다면 옳았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친정(親征)을 하지 않았다면 비록 공(功)은 없을지라도 그렇게 큰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현종(玄宗)은 세째 아들을 죽이고 자부(子婦)를 궁인(宮人)으로 맞아들였으니, 이는 태종(太宗)의 규문(閨門)이 바르지 않은 데서 연유한 것이다.' 하였다.

왕은 임어(臨御)하신 지 46년 동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조심하고 두려워 하며 한결같이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안(慰安)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하늘을 공경히 섬기려는 정성이 위로 하늘에 이르렀고 여상(如傷)20113) 의 인덕(仁德)이 아래로 백성에게 미쳤다. 나라는 남북(南北)의 경보(警報)가 없어 경내(境內)가 편안했고 백성들은 하늘과 땅의 포용해 주는 은혜에 싸여 생업(生業)에 안락하였는데, 왕은 한(漢)ㆍ당(唐)의 나라가 부유하고 백성이 많은 정치를 비루하게 여긴 나머지 개연히 삼대(三代)의 융성(隆盛)에 뜻을 두어 조처와 사업(事業)이 수신(修身)ㆍ제가(齊家)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관저(關雎)20114) 와 인지(麟趾)20115) 의 덕화(德化)가 이미 집안과 나라에 흡족하였고, 주관(周官)의 제도가 찬란히 다시 밝혀졌다. 예악(禮樂)과 문물(文物)이 열조(列祖)의 광휘(光輝)를 더하였고, 큰 계획과 큰 사업은 후사(後嗣)의 한없는 복을 열었다. 이것은 바로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신주(神州)20116) 가 육침(陸沈)20117) 되고 일월(日月)이 캄캄하게 어두워졌으나, 한 줄기의 의리(義理)가 좌해(左海)20118) 의 지역에서 어둡지 않았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날 우리 인조 대왕(仁祖大王)은 '비풍(匪風)20119) ㆍ하천(下泉)20120) '의 원통함을 안고서 '고황 백등(高皇百登)의 수치'20121) 를 남겼고, 우리 효종 대왕(孝宗大王)께서는 대지(大志)를 분발하여 장차 큰 일을 하시려 하여, '지극한 통한이 마음속에 있다.'는 하교를 내리셨으니, 귀신을 울릴 만하였다. 흉적(凶賊)을 제거하고 수치를 씻으려는 뜻은 밝기가 해와 별 같았는데, 하늘이 계획을 기약할 수가 없어 궁검(弓劍)을 갑자기 버리니, 지사(志士)의 분통이 지금까지도 하루와 같다. 그러나 고금을 통해 멸할 수 없는 춘추(春秋)의 대의(大義)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미해지자, 왕은 이것을 크게 두려워하며 분연히 한 몸으로 짊어지고 이에 갑신년20122) 이 거듭 돌아오는 날에 황도(皇都)가 함락된 일을 슬퍼하시어 금중(禁中)에 단(壇)을 설치하여 멀리 의종 황제(毅宗皇帝)를 제사하였는데, 장차 제사를 지내려는 때에 출척(怵惕)20123) ㆍ참달(慘怛)20124) 하여 참으로 천지(天地)가 무너지고 분열되는 것을 친히 보는 듯이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임진년20125) 에 재조(再造)한 은혜는 만세(萬世)토록 잊을 수 없다.'며 궁성(宮城) 북쪽 정결한 곳에 단(壇)을 설치하고, '대보단(大報壇)'이라 명명(命名)하여 해마다 태뢰(太牢)로 신종 황제(神宗皇帝)를 제사하였으며, 친히 '지감시(志感詩)'와 서문(序文)까지 지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신종 황제가 천하(天下)의 군대를 동원하여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나라가 어떻게 오늘이 있을 수 있겠는가? 황명(皇明)이 속히 망한 것은 반드시 동정(東征)에 연유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는데, 돌아보건대,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힘이 약해 이미 복수(復讎)ㆍ설치(雪恥)를 하지 못하였고, 홍광(弘光)20126) 이 남도(南渡)한 후에도 또한 막연히 그 존망(存亡)을 알지 못하니 매양 생각이 이에 미칠 때마다 늘 개탄하며 한스럽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종 황제가 선조 대왕에게 망룡의(蟒龍衣)를 하사하여 지금도 궁중에 보관되어 있는데, 때때로 꺼내 펼쳐보면 처참한 감회를 금할 수가 없다. 명(明)나라의 우리 나라에 대한 은혜가 한집안과 같은데도, 강약(强弱)의 형세에 구애되어 지금 저들을 복종해 섬기니, 천하에 어찌 이처럼 원통한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또 일찍이 제갈양(諸葛亮)의 일을 논하면서 왕이 말하기를, '제갈양이 한(漢)나라를 회복(恢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몰랐던 바 아니었으나, 그 마음을 다하였을 뿐이다. 신종 황제의 생사 육골(生死肉骨)20127) 의 은혜를 어찌 차마 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병자년20128) 부터 지금까지 6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심(人心)이 해이해져 점차 처음과 같지 않으니, 이 때문에 개탄스럽게 생각한다.' 하였다.

《대명집례(大明集禮)》를 간행(刊行)할 것을 명하고 친히 서문(序文)을 지었으며, 한인(漢人)으로서 흘러들어와 우거(寓居)하는 자는 그 자신에게는 늠료(廩料)를 주고 그 자손(子孫)은 수용(收用)하게 하였다. 또 황조(皇朝)의 성화(成化)20129) 무렵에 하사한 인적(印跡)을 괴원(槐院)의 고지(故紙) 가운데에서 얻자 왕이 말하기를, '왕위를 계승하는 날에 매양 청(淸)나라의 국보(國寶)를 쓰니, 마음이 아직까지 편안하지 않았는데, 이제 황조의 사본(賜本)은 전획(篆劃)이 어제 쓴 듯하니, 이것으로 모각(摹刻)하여 금보(金寶)를 만들어 보관해 두었다가 쓰도록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왕이 인조(仁祖)ㆍ효종(孝宗) 양조(兩祖)의 뜻을 추념(追念)하여 일생 동안 사모(思慕)하면서 차마 잠시도 잊지 못한 나머지, 또 후세 자손들로 하여금 이 금보를 받아서 왕위를 계승하며 황조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잊지 않도록 만들려 한 것이니, 그 지극한 정성과 애달파하는 뜻은 신명(神明)에 질정할 수 있고 영원히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단상(短喪)을 한 이래로 신하가 임금을 위해 최복(衰服)을 입는 제도가 폐지되고 시행되지 않았다. 그뒤 수천 년 동안 예(禮)를 좋아하는 군주가 없었던 것은 아니나, 잘못된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여 끝내 바꾸지 못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하순(下詢)하기를, '《오례의(五禮儀)》의 흉례(凶禮) 가운데의 「오모(烏帽)ㆍ흑대(黑帶)」의 제도는 민순(閔純)의 의논에 따라서 이미 개정(改正) 하였으나 단령의(團領衣)ㆍ포과모(布裹帽)는 변경하지 못하여 고제(古制)에 미진한 바 있다. 옛 제도를 회복하는 것이 옳겠는가?' 하니,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이 주자(朱子)의 '군신복(君臣服)'으로 대답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이 일은 주자의 정론(定論)이 있으니 본래 의심할 것이 없다. 과단성 있게 시행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상(大喪)이 났을 때 여러 신하들이 유교(遺敎)를 받들어 고례(古禮)대로 최복(衰服)을 입고, 시사(視事)할 때는 포모의(布帽衣)을 착용하여 한 번에 천고(千古)의 오류를 깨끗이 씻고 영원히 후세의 법으로 삼았으니, 이것은 더욱 왕의 고명(高明)하신 과단(果斷)으로서 삼대(三代)보다 훨씬 뛰어난 것이다. 어찌 한(漢)ㆍ당(唐) 무렵에 일컬어지는 명철(明哲)한 군주들이 비슷할 수가 있겠는가? 송유(宋儒) 정이(程頤)가 말하기를, '부자(夫子)가 요순(堯舜)보다 낫다는 것은 사공(事功)을 말한것이다. 요순(堯舜)은 천하(天下)를 다스렸는데 부자가 또 그 도(道)를 미루어서 만세(萬世)에 전하였으니, 요순의 도가 부자를 얻지 않았다면 또한 어디에 근거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아! 상제(喪制)는 인간의 대륜(大倫)이나 삼대(三代)의 제도가 천 년 동안 폐지되었다. 그런데 오늘에 이르러 이것을 다시 시행하여 후세의 왕자(王者)로 하여금 의거하여 법(法)으로 취하게 하였으니, 이 일로 미루어 논한다면 비록 '삼대(三代)보다 낫다.'고 말해도 될 것이다.

여러 신하들이 존시(尊諡)를 올리기를, '장문 헌무 경명 원효(章文憲武敬明元孝)'라 하고, 묘호(廟號)를 '숙종(肅宗)'이라 하였으며, 이해 10월 21일 갑인(甲寅)에 명릉(明陵) 갑좌(甲坐)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처음에 인현 왕후(仁顯王后)의 장사 때 왕이 곡장(曲墻)을 치우치게 쌓지 말고 정자각(丁字閣)도 또한 복판에 자리잡도록 하여 장릉(長陵)의 우측(右側)을 비워 둔 제도를 모방하도록 명하였는데, 이는 대개 백성의 힘을 재차 수고롭게 할 것을 미리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왕세자(王世子)가 사위(嗣位)한 지 4년 만에 훙(薨)하니, 이 분이 경종 대왕(景宗大王)이다. 숙빈(淑嬪) 최씨(崔氏)가 1남(男)을 탄생하니 바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이시다. 중궁 전하(中宮殿下)는 서씨(徐氏)로 달성 부원군(達城府院君)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이다. 명빈(榠嬪) 박씨(朴氏)는 연령군(延齡君) 이훤(李昍)을 낳았으나 일찍 졸(卒)하였다. 경종(景宗)은 청은 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따님에게 장가들었으며, 뒤에 함원 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귀(魚有龜)의 따님에게 장가들었는데, 모두 후사(後嗣)가 없다. 아! 위대하신 상제(上帝)께서 이 백성을 사랑하고 돌보아주시며 하토(下土)를 보살펴 주시어 넓고 넓은 구주(九州)20130) 가 오랑캐의 손아귀에 넘어간 지 백 년인데, 기자(箕子)의 봉강(封疆)한 구역만은 8조(八條)의 가르침이 쇠하지 않았다. 5백 년 만에 왕자(王者)가 일어날 시기20131) 를 당하여 성인(聖人)을 낳으시어 총명(聰明)ㆍ예지(睿智)한 자질을 내려주시고 강의(剛毅)ㆍ과단(果斷)의 용의(用意)로 도와주시어 왕으로 하여금 종욕(從欲)20132) 의 정치(政治)를 성취하도록 하였다면, 장차 세도(世道)를 만회(挽回)하여 옛 선왕(先王)의 왕업(王業)에 앞지를 수 있었을 터인데, 선왕께서 반드시 얻어야 할 수(壽)를 내려주지 아니하여 이 세상으로 하여금 대성(大成)의 지역에 오를 수 없도록 하였으니, 아마 하늘도 기수(氣數)의 굴신(屈伸)에는 어쩔 수 없어서 그랬던 것인가? 이는 바로 천하(天下) 만세(萬世)의 무궁한 애통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황극(皇極)의 바름을 세우고 인륜(人倫)의 어둠을 밝히니, 대경(大經)ㆍ대법(大法)이 천지에 세워져서 어긋나지 않는다. 백세(百世)를 기다려도 의혹되지 않을 것이니, 사람들의 가슴속에 스며들어 있는 심후(深厚)한 인택(仁澤)은 장차 천만 세(千萬歲)에 이르도록 더욱 더욱 드러날 것이다. 아! 거룩하도다."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1책 110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註 19888] 숭정(崇禎) 기원(紀元) 34년 신축년 : 1661 현종 2년.
[註 19889] 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19890]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19891]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19892]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9893] 갑인년 : 1674 현종 15년.
[註 19894] 연상(練祥) : 소상(小祥).
[註 19895] 조전(朝奠) : 장사에 앞서 이른 아침마다 영전(靈前)에 지내는 제사.
[註 19896]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9897] 임자년 : 1672 현종 13년.
[註 19898] 반우(返虞) : 장사를 치른 뒤에 신주(神主)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 또는 그 절차.
[註 19899] 을묘년 : 1675 숙종 원년.
[註 19900] 병진년 : 1676 숙종 2년.
[註 19901] 정사년 : 1677 숙종 3년.
[註 19902] 혜패(彗孛) : 혜성.
[註 19903] 무오년 : 1678 숙종 4년.
[註 19904] 양맥(兩麥) : 보리와 밀.
[註 19905] 기미년 : 1679 숙종 5년.
[註 19906] 전조(田租) : 전지(田地)의 조세(租稅).
[註 19907] 격쟁(擊錚) : 억울한 일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기 위하여 거둥하는 길가에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던 일.
[註 19908] 추조(秋曹) : 형조.
[註 19909] 대열(大閱) : 임금이 친히 행하는 열무(閱武).
[註 19910] 양이(量移) : 섬이나 변지(邊地)로 멀리 귀양보냈던 사람의 죄를 감등(減等)하여 내지(內地)나 가까운 곳으로 옮기는 일.
[註 19911] 갑자년 : 1684 숙종 10년.
[註 19912]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19913] 네 신하 : 홍유(洪儒)ㆍ배현경(裵玄慶)ㆍ신숭겸(申崇謙)ㆍ복지겸(卜智謙)을 말함.
[註 19914] 연곡(輦轂) : 임금이 타는 수레. 곧 서울.
[註 19915] 친병(親兵) : 임금이 친히 거느리던 군사.
[註 19916] 염파(廉頗)와 인상여(藺相如) : 중국 전국 시대 조(趙)나라의 양장(良將) 염파와 상경(上卿)인 상여는 조나라의 두 기둥이었는데, 전공(戰功)이 많았던 염파는 재상으로 있는 인상여를 불쾌하게 생각하였음. 이에 나라의 안위(安危)를 걱정한 인상여는 그를 피해 다녔는데, 이를 듣고 난 염파는 그에게 사과하고서 마침내 문경지교(刎頸之交)를 이루었음.
[註 19917] 태아(太阿) : 보검(寶劍)의 이름. 권세(權勢)를 비유한 말.
[註 19918] 단선(壇墠) : 제단(祭壇).
[註 19919] 제구(諸舅) : 여러 외숙(外叔)과 장인.
[註 19920] 「이필(李泌)이 노기(盧杞)를 논한 일」 : 당(唐)의 덕종(德宗)이 이필(李泌)과 더불어 자신이 즉위한 이후의 재상들을 논하여, “노기(盧杞)는 충직하고도 강직한 사람인데도 사람들이 그를 간사하다고 하니, 나는 그 이유를 모르겠다.” 하자, 이필이, “사람들이 그를 간사하다고 하는데도 폐하께서는 홀로 그 간사함을 모르시니, 이것이 바로 간사하기 때문입니다.”며 구체적 사례를 들어 노기의 간사함을 지적했다는 고사. 이필은 숙종(肅宗)ㆍ덕종 때의 현신. 노기는 덕종 때의 간신.
[註 19921] 매얼(媒孼) : 죄에 빠뜨림.
[註 19922] 반좌(反坐) : 남을 무고(誣告)한 사람은 무고(誣告)당한 사람이 받은 처벌과 동일한 형(刑)에 처하는 제도.
[註 19923]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9924] 퇴파(頹波) : 무너지는 물결. 즉 쇠(衰)하는 것의 비유.
[註 19925] 신유년 : 1681 숙종 7년.
[註 19926] 고적(考績) : 관리의 성적을 상고함.
[註 19927] 연역(煙役) : 민호(民戶)에 부과하는 잡역(雜役).
[註 19928] 「폐각(廢却)하고 거행하지 않는 것은 자못 예(禮)를 사랑하여 양(羊)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 《논어(論語)》 팔일편(八佾篇)에서 공자가 “너는 그 양(羊)을 아끼는가? 나는 그 예(禮)를 사랑하노라.”라고 한 데서 인용한 것임. 천자(天子)가 항상 계동(季冬)에 내세(來歲) 12월의 월삭(月朔)을 제후(諸侯)에게 반포하면, 제후가 그것을 받아 조묘(祖廟)에 보관하였다가 매월 초하루가 되면 특양(特羊)을 바치고 조묘에 고하여 시행하는 예(禮)가 있었는데, 노(魯)나라 문공(文公) 때부터 이 예는 폐지되었음. 그럼에도 유사(有司)가 양(羊)을 잡아 바치니, 자공(子貢)이 그것을 아깝게 여겨 그만두게 하고자 하였음. 이에 공자가 형식이나마 남아 옛 예의 정신이 보존되는 것을 다행히 여겨 이렇게 말한 것임.
[註 19929] 식거(植炬) : 밤에 임금의 거둥이 있을 때에 길 양쪽에 횃불을 죽 세우던 일.
[註 19930] 빈풍(豳風) : 《시경(詩經)》 국풍(國風)의 하나, 주로 농업(農業)의 근로(勤勞)에 대해 서술하였음. 뒤에 송(宋)의 조맹부(趙孟頫)가 빈풍도(豳風圖)를 그린 일이 있음. 주로 농촌 생활의 괴로움을 나타내는 그림의 주제로 사용되었음.
[註 19931] 임술년 : 1682 숙종 8년.
[註 19932] 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19933] 무신년 : 1668 현종 9년.
[註 19934] 장보(章甫) : 선비.
[註 19935] 경인년 : 1650 효종 원년.
[註 19936] 호종(扈從) : 어가(御駕)를 모시어 좇음.
[註 19937] 견기(見幾) : 조짐을 보임.
[註 19938] 애일(愛日) : 세월이 가는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는 뜻으로, 효자가 부모를 장구(長久)하게 모시고자 하는 마음.
[註 19939] 일기(日記) : 승정원 일기.
[註 19940] 을해년 : 1635 인조 13년.
[註 19941]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19942] 포보(砲保) : 군보(軍保)의 하나. 포군(砲軍) 네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군역(軍役)에 복무하고, 세 사람은 그 보(保)로 쌀이나 베를 바치던 일.
[註 19943] 채화(綵花) : 비단 조각으로 만든 가화(假花).
[註 19944] 내국(內局) : 내의원(內醫院).
[註 19945] 계해년 : 1683 숙종 9년.
[註 19946] 적지(赤地) : 흉년이 들어 거둘 것이 없게 된 땅.
[註 19947] 재숙(齋宿) : 재소(齋所)에서 밤을 지냄.
[註 19948] 서명(西銘) : 송(宋)나라의 장재(張載)가 지은 인도(仁道)의 원리를 밝힌 명(銘), 서재(書齋)의 서쪽 창(窓)에 걸어 두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
[註 19949] 갑자년 : 1684 숙종 10년.
[註 19950] 항양(桁楊) : 형구(刑具).
[註 19951] 도독(荼毒) : 심한 고통. 곧 부모(父母)의 상(喪).
[註 19952] 을축년 : 1685 숙종 11년.
[註 19953] 운대(雲臺) : 관상감(觀象監).
[註 19954] 민충단(愍忠壇) : 임진 왜란(壬辰倭亂) 때에 명(明)나라 군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죽은 것을 가엾이 여겨 그들의 혼을 제사지내던 곳. 홍제원(弘濟院) 근처에 있었음.
[註 19955]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19956] 신유년 : 1681 숙종 7년.
[註 19957] 병인년 : 1686 숙종 12년.
[註 19958] 무오년 : 1618 광해군 10년.
[註 19959] 삼명일(三名日) : 조선조 때의 세 명절(名節). 곧 임금의 생일(生日)ㆍ설[正月一日]ㆍ동지(冬至). 삼명절(三名節).
[註 19960]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9961] 정묘년 : 1687 숙종 13년.
[註 19962] 미앙궁(未央宮)의 재앙 : 미앙궁은 한(漢) 고조(高祖) 때 장안(長安)에 지은 궁전. 고조가 장안에 없는 동안 소하(蕭何)가 지은 것인데, 고조가 “천하가 아직 어지러운데 왜 이렇게 화려한 궁전을 짓느냐?”고 하자, 소하가 “천자(天子)는 궁실이 장대하고 아름답지 못하면 위엄이 없다.”고 대답하였음. 미앙궁이 빌미가 되어 무제(武帝) 때 궁궐을 사치스레 짓게 되었는데, 그뒤 성제(成帝) 때 일식(日食)이 일어난 날 미앙궁에 지진이 일어난 변고가 생겼음.
[註 19963] 세태(稅太) : 전세(田稅)로 바치는 콩.
[註 19964] 공홍(公洪) : 충청도.
[註 19965] 강양(江襄) : 강원도.
[註 19966]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19967] 징속(徵贖) : 속전(贖錢)을 징수함.
[註 19968] 일죄(一罪) : 사형(死刑).
[註 19969]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9970] 주필(駐蹕) : 임금이 나들이하는 도중에 거가(車駕)를 잠시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는 일.
[註 19971] 온왕(溫王) :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
[註 19972]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19973] 수용(睟容) : 임금의 화상.
[註 19974] 묘사(廟社) : 종묘와 사직.
[註 19975] 소유(所由) : 사헌부의 이속(吏屬).
[註 19976] 여백공(呂伯恭) : 남송(南宋)의 유학자 여조겸(呂祖謙).
[註 19977]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19978] 경오년 : 1690 숙종 16년.
[註 19979]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19980] 증미(拯米) : 물에서 건져 낸 젖은 쌀.
[註 19981] 신미년 : 1691 숙종 17년.
[註 19982] 반유(泮儒) : 성균관 학생.
[註 19983] 무안왕(武安王) : 촉한(蜀漢)의 용장(勇將) 관우(關羽).
[註 19984] 중사(中使) : 내시(內侍).
[註 19985] 판삽(版鍤) : 판(版)은 흙을 양쪽에서 끼고 쌓는 데 쓰는 판대기. 삽(鍤)은 흙을 파는 데 쓰는 가래 따위. 모두 담이나 성 따위를 쌓는 데 쓰는 도구.
[註 19986] 송제(宋帝)가 서쪽으로 원정한 장졸(將卒)들을 걱정한 정도일 뿐이겠는가?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한기(韓琦)ㆍ범중엄(范仲淹) 등 중신(重臣)을 보내어 서하(西夏)의 침범을 막게 했을 때 장졸(將卒)들을 걱정했다는 고사(故事).
[註 19987] 석뇌(錫賚) : 하사품(下賜品).
[註 19988] 투료 음하(投醪飮河) : 한 병의 술을 강물에 던져 군사들로 하여금 받아 마시게 한다는 뜻으로, 사졸(士卒)과 더불어 고락(苦樂)을 같이함을 이름.
[註 19989] 전손(顓孫) :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
[註 19990] 호공(胡公) : 호안국(胡安國).
[註 19991] 임신년 : 1692 숙종 18년.
[註 19992] 군석(君奭) :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 문왕(文王)의 아들. 무왕(武王)의 아우. 성왕(成王)을 도와 주나라의 기초를 만들고, 산동 반도(山東半島)의 이족(夷族)을 정벌하여 동방(東方) 경로(經路)의 사업을 이룩했음. 소공(召公).
[註 19993] 조송(趙宋) : 조광윤(趙匡胤)이 세운 송(宋)나라.
[註 19994] 문지(門地) : 문벌.
[註 19995] 제순(帝舜)이 노래를 지어 칙명한 것 : 《서경(書經)》 익직(益稷)의, “하늘의 명을 받들어 어느 때이건 힘쓰고 무슨 일이건 빌미를 살펴야 한다.”, “신하들이 즐거우면 임금은 흥성하고 모든 관리들도 화락할 것이로다.”고 한 노래에서 나온 말로, 이 노래는 순제(舜帝)가 지었다고 함. 즉 순제가 신하들에게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갖고 정사에 힘쓸 것을 당부한 것임.
[註 19996]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방울을 매달아 놓고 간언(諫言)을 구한 것 : 우왕(禹王)이 방울을 울려서 직언(直言)을 구하게 한 일. 우왕이 말하기를 “과인(寡人)에게 일을 지시할 사람은 방울을 울리라.”고 한 고사(故事).
[註 19997]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것 : 상림 육책(桑林六責)을 말한 것으로, 은(殷)나라의 성탕(成湯)이 7년 동안 큰 가뭄이 계속되었을 때에 비를 빌기 위하여 상림에서 여섯 가지 일을 가지고 스스로 책망하였는데, 즉, “제가 정치에 절제가 없이 문란해졌기 때문입니까? 백성들이 직업을 잃고 곤궁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까? 제 궁전이 너무 화려하기 때문입니까? 여알(女謁)이 성하여 정치가 공정하지 못한 때문입니까? 뇌물이 성하여 정도(正道)를 해치고 있기 때문입니까? 참소하는 말로 인하여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기 때문입니까?” 하였다는 고사(故事).
[註 19998] 중종(中宗) : 상(商) 태무(太戊)의 묘호(廟號).
[註 19999] 상상(祥桑)을 없앤 것 : 상(祥)은 요괴(妖怪)스러움, 상(桑)은 뽕나무. 은(殷)나라 태무(太戊)가 제위(帝位)에 오르고 이척(伊陟)이 정승이 되었는데, 상상(祥桑)이 조정에 나서 하루아침에 아름드리가 되자, 태무가 두려워하여 이척에게 원인을 물었음. 이척이 '요사함은 덕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니, 주상께서는 덕을 닦으소서.' 하였음. 이에 태무가 그 말을 따라 행하여 덕정(德政)을 펴니, 상상이 말라 죽었다는 고사.
[註 20000]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친 것 : 주문왕(周文王)이 마른 해골을 장사지내 준 것을 말함. 《신서(新序)》에 “문왕은 어질어서 은택이 고골(枯骨)에까지 미쳤으니 더구나 산사람에 대해서이겠는가?”라고 하였음.
[註 20001] 무왕(武王)이 단서(丹書)로 계칙을 받은 것 : 주무왕(周武王)이 즉위할 무렵에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풍도(酆都)에 날아와 문왕의 침실 지겟문 위에 놓았는데, 그 글에 “게으름을 이긴 이는 길하고 게으름에 진 이는 멸하니라. 의(義)를 지키고자 하는 이는 순(順)하고 의를 누르고자 하는 이는 흉(凶)하니라……”는 등의 경계하는 말이 있었음.
[註 20002] 호호(皡皡) : 여유 만만하고 침착한 모양.
[註 20003] 회양(懷襄) : 홍수.
[註 20004] 엄사(渰死) : 익사.
[註 20005] 계유년 : 1693 숙종 19년.
[註 20006] 정묘년 : 1687 숙종 13년.
[註 20007] 소미(小米) : 좁쌀.
[註 20008] 경덕궁(敬德宮) : 태조(太祖)의 즉위 전 사저(私邸). 개성(開城) 소재.
[註 20009] 갑술년 : 1694 숙종 20년.
[註 20010]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20011] 신유년 : 1681 숙종 7년.
[註 20012] 단련(鍛鍊) : 없는 죄를 교묘하게 꾸며냄.
[註 20013]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20014] 곤픽(悃愊) : 진실하고 정성스러움.
[註 20015] 환발(渙發) : 임금의 명령을 천하에 널리 선포함.
[註 20016] 회태(回泰) : 태(泰)는 《주역(周易)》의 괘명(卦名)인데, 상곤ㆍ하건(上坤下乾)으로 천지(天地)가 화합하여 만물(萬物)을 태평으로 인도하는 상(象)임. 곧 천지의 기운이 막혔던 비괘(否卦)에서 화합의 태괘(泰卦)로 돌아온다는 뜻임.
[註 20017] 정성(定省) : 조석(朝夕)의 안부를 물음.
[註 20018] 투저(投杼) :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을 세 번 듣고 비로서 의아(疑訝)하여 짜던 베틀의 북을 내던지고 일어났다는 고사(故事). 전(轉)하여 참언(讒言)을 믿는 일.
[註 20019] 불휘(不諱) : 숨기지 않고 간(諫)함.
[註 20020]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20021] 대고(大誥) : 대도(大道)로써 천하에 고하는 글.
[註 20022] 고비(皐比) : 범가죽.
[註 20023]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註 20024] 악무목(岳武穆) : 악비(惡飛).
[註 20025] 원묘(原廟) : 으뜸되는 종묘(宗廟).
[註 20026] 병자년 : 1696 숙종 22년.
[註 20027] 축말(逐末) : 상업(商業).
[註 20028] 정축년 : 1697 숙종 23년.
[註 20029] 서토(西土) : 평안도.
[註 20030] 북관(北關) : 함경도.
[註 20031]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註 20032] 계사년 : 1593 선조 26년.
[註 20033] 갑오년 : 1594 선조 27년.
[註 20034] 무인년 : 1698 숙종 24년.
[註 20035] 제주(題主) : 신주(神主)에 글자를 씀.
[註 20036] 전염병이 아주 극성을 떨어 사망자가 계속 생기는데도 혼자 남아서 떠나지 않은 사람 : 진(晉)나라 무제(武帝) 연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는데, 유곤(庾袞)이란 사람의 두 형이 모두 죽고 바로 위의 형인 유비(庾毗)도 위태롭게 되었음. 부모와 여러 아우들은 감염을 피해 비의 곁을 떠나 자리를 옮겼지만 곤(袞)만은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간호했는데, 전염병이 사라진 후에 사람들이 와서 보니 비의 병은 나았고 곤은 감염되지 않았으므로 부모들이 “이상하다. 이 사람이여! 남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했으니, ……전염병의 감염되지 않았음을 비로서 알겠다.” 하였다는 고사.
[註 20037]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註 20038] 난로(鑾輅) : 임금의 수레.
[註 20039] 경진년 : 1700 숙종 26년.
[註 20040] 신사년 : 1701 숙종 27년.
[註 20041] 친히 낙양(洛陽)의 감옥에 나아가 판결해 내보낸 것이 많았다. : 서기 70년에 초왕(楚王) 유영(劉英)이 방사(方士)와 역모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이에 옥사(獄事)는 몇 해를 끌며 수천 명이 연루되었음. 명제(明帝)가 워낙 노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의 억울함을 해명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시어사(侍御史) 한랑(寒郞)이 자신의 억울함을 글로 써서 명제에게 올리니, 명제가 이에 의심이 풀려 한랑을 석방하고, 이틀 뒤 낙양옥(洛陽獄)에 가서 죄수들의 기록을 검토한 뒤 10여 명을 석방했음. 그리고 나서 큰 비가 내리자 마황후(馬皇后)의 권고로 초나라의 감옥에 넘쳐나던 죄수들의 형(刑)을 감해 주었다는 고사.
[註 20042] 시수(時囚) : 그 당시에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
[註 20043] 녹수(錄囚) : 수금(囚禁)된 죄인에 대하여 그 죄상ㆍ신분ㆍ성명ㆍ처결 상황을 살피는 것.
[註 20044] 역종(逆宗) : 종친 중에서 나온 역적.
[註 20045] 임오년 : 1702 숙종 28년.
[註 20046] 계미년 : 1703 숙종 29년.
[註 20047] 선무사(宣武祠) : 임진 왜란 때의 명장(明將) 형개(刑玠)와 양호(楊鎬)를 제향(祭享)한 사당. 선조(宣祖) 31년(1598)에 세웠음.
[註 20048]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註 20049]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註 20050] 염희(恬憘) : 맡은 사무를 게을리함.
[註 20051]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註 20052]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20053] 병술년 : 1706 숙종 32년.
[註 20054] 무인년 : 1698 숙종 24년.
[註 20055] 정해년 : 1707 숙종 33년.
[註 20056] 마진(麻疹) : 홍역(紅役).
[註 20057]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20058]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20059] 변수(駢首) : 머리를 서로 나란히 함.
[註 20060] 정(鄭)의 양소(良霄)가 집에 굴(窟)을 파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는 그 몸을 망쳤으니 : 정(鄭)나라 대부 양소(良霄)는 술을 좋아하여 지하실을 지어놓고 술을 마셨는데, 정사(政事)를 폐할 지경이었음. 이에 형제간이었던 자석(子晳)이 불을 질러 공격하니, 양소는 그제서야 술이 깨어 허(許)나라로 달아났는데, 곧 죽음을 당하였음. 《춘추좌전(春秋左傳)》 양공(襄公) 30년 7월조에 나오는 일임.
[註 20061] 소자(小子) : 젊은 사람.
[註 20062] 유정(有正) : 관청의 장(長).
[註 20063] 유사(有事) : 일을 맡아 보는 관리.
[註 20064] 무자년 : 1708 숙종 34년.
[註 20065] 당(唐)의 선종(宣宗)은 이행언(李行言)의 이름을 대궐의 기둥에 써붙여 놓았다. : 당(唐)나라 선종(宣宗)이 사냥을 나갔다가 농부에게서 그곳의 현령(縣令) 이행언(李行言)이 정치를 잘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환궁한 뒤 침전(寢殿) 기둥에다 그의 이름을 적어두고는 뒤에 높은 벼슬에 제수하였다는 고사(故事).
[註 20066] 송(宋)의 인종(仁宗)은 밤에 구운 양고기가 생각이 나도 주림을 참고 먹지 않았는데 : 송(宋)나라 인종(仁宗)이 어느날 밤에 배가 고파서 구운 양고기 생각이 났으나, 참고 준비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선부(膳夫)가 이후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항상 양을 잡아둘까 염려했기 때문임.
[註 20067] 기축년 : 1709 숙종 35년.
[註 20068] 척장군(戚將軍) : 척계광(戚繼光).
[註 20069] 활법(活法) : 활용하여 응용하는 방법.
[註 20070] 경인년 : 1701 숙종 36년.
[註 20071] 승국(勝國) : 전조(前朝).
[註 20072] 신묘년 : 1711 숙종 37년.
[註 20073] 신묘년 : 1711 숙종 37년.
[註 20074] 임진년 : 1712 숙종 38년.
[註 20075] 방악(方岳) : 방악(方嶽)과 같음. 곧 동악(東岳) 태산(泰山), 남악(南岳) 형산(衡山), 서악(西岳) 화산(華山), 북악(北岳) 항산(恒山)의 사악(四岳)으로서, 사방의 제후(諸侯)를 통괄하는 사람인데, 흔히 각도(各道)의 도신(道臣)이란 뜻으로 쓰임.
[註 20076] 출척 유명(黜陟幽明) : 유(幽)는 혼암(昏暗)한 관리, 명(明)은 명철(明哲)한 관리. 즉 혼암한 관리는 내쫓고 명철한 관리는 승진시킴을 말함.
[註 20077] 효부(孝婦)가 원한을 품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 : 옛날 제(齊)나라의 효부(孝婦)에게 억울한 죄를 뒤집어 씌어 죽인 고을 원의 그릇된 처사(處事)에 하늘이 노하여 3년 동안 비를 내리지 않았다는 고사(故事).
[註 20078] 연신(燕臣)이 통곡(慟哭)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다. : 추연(鄒衍)이 충성을 다해 연(燕)나라 혜왕(惠王)을 섬겼는데도 왕이 참소하는 말을 듣고 옥에 가두자, 원통함을 못이겨 하늘을 우러러 통곡했더니, 5월에 하늘이 서리를 내렸다는 고사(故事).
[註 20079]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註 20080] 계사년 : 1593 선조 26년.
[註 20081] 연곡(輦轂) : 서울.
[註 20082] 계사년 : 1713 숙종 39년.
[註 20083] 유양(揄揚) : 칭찬하여 치켜 세움.
[註 20084] 금액(禁掖) : 궁중(宮中).
[註 20085] 정성(鄭聲) : 춘추 시대(春秋時代) 정(鄭)나라의 가요(歌謠)가 음란하고 외설적인 데서 온 말. 음란하고 야비한 소리의 가락.
[註 20086] 갑오년 : 1714 숙종 40년.
[註 20087] 을미년 : 1715 숙종 41년.
[註 20088]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註 20089] 계복(啓覆) : 조선조 때 임금에게 상주하여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던 일. 이는 승정원(承政院)에서 추분(秋分) 후에 곧 계품하여 9월ㆍ10월 중 날짜를 정해서 시행하였고, 죄인을 사형할 때에는 12월에 집행하였음.
[註 20090] 경폐(徑斃) : 형(刑)의 집행 전에 죽는 것.
[註 20091]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20092] 행재(行在) : 임금이 궁을 떠나 임시로 머무는 곳.
[註 20093] 유개(流丐) : 떠돌이 거지.
[註 20094] 병신년 : 1716 숙종 42년.
[註 20095] 사기(四紀) : 1기(紀)는 12년.
[註 20096] 중신(中身) : 마흔 살이 지난 나이.
[註 20097] 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20098] 병신년 : 1714 숙종 40년.
[註 20099] 무술년 : 1718 숙종 44년.
[註 20100] 번연(蕃衍) : 자손이 늘어서 많이 퍼짐.
[註 20101] 분양(汾陽) : 당(唐) 현종(玄宗) 때의 장수 곽자의(郭子義)를 말함.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흔히 곽분양(郭汾陽)이라 부름.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功)을 세웠음. 아들 여덞에 사위 일곱 명이 모두 조정에서 귀현(貴顯)하였고, 손자 수십 명은 다 알아보지 못하여 문안 때면 턱만 끄덕일 뿐이었다고 함. 인신(人臣)으로서의 영화와 자손의 번성함을 이야기할 때 흔히 예로 드는 인물임.
[註 20102]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20103] 유사(瘦死) : 옥중(獄中)에서 병으로 죽음.
[註 20104] 대벽(大辟) : 사형(死刑).
[註 20105] 기해년 : 1719 숙종 45년.
[註 20106] 사롱(紗籠) : 현판(縣板)에 먼지가 앉지 못하게 덮어 씌우는 사포(紗布).
[註 20107]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20108] 모예(旄倪) : 노인(老人)과 소아(小兒).
[註 20109] 여대(輿儓) : 하인(下人).
[註 20110] 동조(東朝) : 대비(大妃).
[註 20111] 한(漢)의 성제(成帝)가 이미 적방진(翟方進)으로 하여금 자살(自殺)하도록 하고서 또 후하게 장사(葬事)지내 주도록 하였으니, : 적방진(翟方進)은 한(漢) 성제(成帝) 때의 승상(丞相). 유학(儒學)에 통달하여 당시에 이름이 났음. 기원전 70년에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범하는 성변(星變)이 일어나자 성제가 이에 해소하기 위해 승상인 적방진을 자살하게 하고 뒤에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음.
[註 20112] 송 경공(宋景公)은 좋은 말을 하자 형혹성(熒惑星)이 1도(一度)를 옮겨갔으니, : 송(宋)나라 경공(景公) 때에 형혹성(熒惑星)이 심성(心星)을 침범하니, 경공이 이를 근심하여 사성(司星) 자위(子韋)를 불러 물었는데, 경공이 자위와 더불어 말하면서 덕(德)있는 말 세 가지를 하였더니, 자위가 “하늘이 반드시 인군(人君)께 세 가지 상(賞)을 내려서 오늘 저녁에 마땅히 형혹성이 삼사(三舍:사는 30리)를 옮겨 갈 것입니다.” 하였는데, 과연 이날 저녁에 형혹성이 30리를 옮겨 갔다고 하는 고사.
[註 20113] 여상(如傷) : 백성을 다친 사람 보듯 함.
[註 20114] 관저(關雎) : 《시경(詩經)》 주남(周南)의 편명(篇名)으로, 후비(后妃)의 덕(德)이 있는 숙녀(淑女)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시임.
[註 20115] 인지(麟趾) : 《시경(詩經)》 주남의 편명으로, 왕비가 임금의 자손을 번창하게 하는 것을 말함.
[註 20116] 신주(神州) : 중국(中國).
[註 20117] 육침(陸沈) : 나라가 외적(外敵)의 침입으로 망함.
[註 20118] 좌해(左海) : 우리 나라.
[註 20119] 비풍(匪風) : 《시경(詩經)》 회풍(檜風)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왕실(王室)이 쇠미(衰微)한 것을 보고 현인(賢人)이 근심하고 탄식하며 지은 시(詩)임.
[註 20120] 하천(下泉) : 《시경》 조풍(曹風)의 편명(篇名). 주(周)나라 왕실이 쇠퇴함에 따라서 소국(小國)이 전혀 왕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여러 가지로 곤경을 겪게 되자 거기에 감회가 있어 지은 시임.
[註 20121] '고황 백등(高皇百登)의 수치' : 백등(白登)은 산명(山名). 산서성(山西省) 대동현(大同縣) 동쪽에 있음. 한(漢)의 고조(高祖) 즉 고황(高皇)이 흉노를 공격하다가 이곳에서 7일 동안 포위당한 일을 말함.
[註 20122]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註 20123] 출척(怵惕) : 두려워 마음이 편하지 않음.
[註 20124] 참달(慘怛) : 마음이 아프고 슬픔.
[註 20125]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註 20126] 홍광(弘光) : 명(明)나라 말엽 복왕(福王) 주유숭(朱由崧)의 연호(年號:1645). 경사(京師)가 함락된 뒤 남경(南京)으로 가서 홍광제(弘光帝)라 칭하였음.
[註 20127] 생사 육골(生死肉骨) : 죽은 사람을 살려서 그 백골에 살을 붙인다는 뜻으로, 매우 깊은 은혜를 말함.
[註 20128]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20129] 성화(成化) : 명(明) 헌종(憲宗)의 연호.
[註 20130] 구주(九州) : 중국(中國).
[註 20131] 5백 년 만에 왕자(王者)가 일어날 시기 : 《맹자(孟子)》에 “5백 년 만에 제왕(帝王)이 한 번 일어난다.”는 말이 있음.
[註 20132] 종욕(從欲) : 《논어(論語)》 위정편(爲政篇)의 “70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좇아서 했지만, 법도에 벗어남이 없다.”에서 나온 말로 70세를 가리킴.

출전 : 숙종실록 부록 숙종 대왕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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