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8 (화) 20:09
분 류 사전3
ㆍ조회: 458      
[조선] 조선전기-자주적 과학 전통 (민족)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세부항목

과학
과학(한국과학 전통의 형성)
과학(통일신라)
과학(고려의 과학과 기술)
과학(자주적 과학 전통)
과학(실학자의 과학기술)
과학(서구 과학기술의 수용)
과학(광복 이후)
과학(참고문헌)

1.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전

우리는 중국의 전통적 거대과학(巨大科學)의 그늘에서 그 나름의 창조적 발전을 여러 분야에서 이룩하였다. 이러한 창조성은 조선시대에 더욱 커갔다. 특히, 조선시대 초기에 있어서의 자주적 문화창조의 기운과 의욕적인 노력은 이 새 왕조의 과학기술 발전에 강한 추진력이 되었다.

1403년(태종 3) 태종은 대신들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계미청동활자(癸未靑銅活字)의 주조를 강행하였다. 그러나 계미자로 인쇄한 책들은 현존하는 몇 가지 고려 목판본들보다 좋은 인본(印本)이라고 할 수는 없다. 또, 인쇄의 능률에 있어서도 한 가지 책만을 인쇄할 때와 비교한다면 오히려 뒤떨어진다. 그리고 소요되는 경비와 노동력도 별로 나을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업은 다음 임금인 세종에 의하여 훌륭하게 계승됨으로써, 조선식 활판인쇄기술은 크게 발전하고 완성의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것은 동아시아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일이다.

1434년(세종 16)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와 그 인쇄기 개량으로 일단 완성된 조선식 금속활자인쇄술은, 인쇄를 전담한 중앙관서인 주자소(鑄字所)를 중심으로 하여 계승됨으로써 정부에 의한 순조로운 발전이 계속되었다.

조선 500년간 25회에 이르는 금속활자의 주조가 있었고, 중국과 일본에도 영향을 준 조선식 청동활자 인쇄술은, 태종이 1402년에 말한 것처럼 ‘천하의 서적을 모두 인쇄’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중국에서 사 오는 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태종의 신념이었다. 그것은 ‘백년지대계’를 성취하기 위한 거시적 정책의 실현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을 세종이 이어받지 않았다면, 고려시대의 금속활자 인쇄와 같이 널리 보급되지 못한 채 실패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그것을 강력히 추진하여 개량하고 완성시켰다. 15세기의 조선 금속활자본이 같은 시대 어느 지역의 인본보다 깨끗한 것은, 그 기술 수준이 높았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조선에서 청동활자 인쇄술의 발전은 중국에서는 거의 내버려졌던 기술이 우리 나라에서는 적지 않은 노력에 의하여 과학과 문명에 크게 이바지한 예의 하나로 들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2. 하늘의 과학

이러한 발전적 업적은 우리 과학의 황금시대라고 불리는 세종대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조선 초기에 설립된 대간의대(大簡儀臺)라고 불린 경복궁의 천문대에는 간의(簡儀)·수운혼천의(水運渾天儀)·혼상(渾象)·규표·정방안(正方案: 방위지시표) 및 각종 해시계 등이 마련되고, 자격루(自擊漏)라고 불리는 자동시보 물시계와 옥루(玉漏)라고 불리는 천상시계(天象時計) 등의 장치가 부설되어 있었다.

7년이나 걸려 완성한 이들 천문관측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세종은 수학자·천문학자·기술자를 명나라에 보내어 중국의 제도를 연구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받아들인 것은 원나라의 곽수경의 제도를 중심으로 하는 의기였다. 그러나 그것들은 대부분 조선식으로 개량되었다.

이 천문관측소는 원나라의 관성대(觀星臺) 이후 동아시아에서 가장 훌륭한 시설이었다. 16세기 초 명나라 사신이 이 천문대를 보여 달라고 하였을 때, 조선은 발을 드리우고 떨어진 곳에서 보여 주었다고 한다.

경복궁 천문대의 완성과 천문의기(天文儀器)의 제작은 그 이후의 관측활동을 더 한층 정비된 것으로 하였다. 서운관 관리의 의무인 관측규정은, 그 과학성에 있어서 현대 천문기상대의 그것에 비하여 결코 뒤지지 않는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17세기 관측일지의 유물에 의하면, 관측과 기록 및 보고가 규정대로 시행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상현상으로 여겨지는 천변은 기록과 함께 그림으로도 나타내었는데, 예를 들면 1664년 10월 8일의 관측일지에 보이는 혜성의 관측기록과 정확한 그림을 보고 조선 말 그것을 발견한 일본인 천문학자 와다(和田雄治)는 ‘세계 천문학사상 무쌍의 보물’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1664∼1669년에 걸쳐 제작한 혼천시계(渾天時計)의 장치는 중국의 전통적인 수운식(水運式) 시계장치의 원리를 서양식에 응용하여, 그것들의 장점을 조화시킨 특징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혼천의에는 규형(窺衡) 대신 1일 1회전 하는 지구의를 가설하여 실내용 혼천시계에 알맞은 것으로 개량하였다.

니담(Needham,J.)은 이 천문시계를 높이 평가하여 “세계의 유명한 과학박물관에는 그 모조품을 반드시 전시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근대적 과학으로서의 기상학은 조선 초기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법을 발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우량계(雨量計)의 발명이 그것이다. 1441∼1442년에 걸쳐 측우기와 수표(水標)라고 이름하는 강우량의 측정기를 발명하여 강우량의 수량적 측정법이 완성되었다.

이러한 우량계의 발명은 강우시기가 7, 8월에 치우친 우리 나라의 자연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그것을 극복하려고 애쓴 조선 과학자의 노력의 결실이었다. 그들은 땅 속에 스며든 빗물의 깊이를 재던, 그때까지의 부정확한 측정법의 불합리성을 개량하여, 빗물을 일정한 그릇에 받아 측정하는 과학적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서운관의 과학자와 관리들은 각 도와 군·현에서 측정한 전국의 강우량을 통계적으로 집계하는 일을, 조선이 서구식 측후소를 세운 20세기 초까지 400년 이상이나 앞서 계속하였다.

우량계에 의한 강우량의 측정은 중국에서도 행해진 듯하지만, 그것은 한정된 지역과 시기에 따라서 측정한 것으로, 조선에서와 같이 전국적으로 수백 년 간이나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측정기 제작의 발상도 오직 조선의 독자적인 것이었다. 조선의 기상학은 측우기의 발명과 함께 농업기상학으로 뻗어났고, 강우량의 과학적 측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다.

3. 조선 초의 기술

세종 때의 과학적 업적은 과학기술의 모든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고려청자는 조선에 이르러 특징 있는 분청사기(粉靑沙器)를 거쳐 백자(白磁)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그것들도 조선 초부터 고려의 자기와는 형식과 성질이 아주 다른, 이른바 조선자기로 변모하고 있다.

청화백자(靑華白磁)는 세종 때 중국에서 처음으로 수입하였고, 15세기 중엽부터는 조선에서도 만들 수 있게 된 자기인데, 그 기형(器形)과 청화문양의 주제는 중국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조선의 백자는 세종 중기부터 질적·양적으로도 중국 것과 어깨를 겨루게 되었다.

조선 초기 군사기술에서도 조선의 특색이 강하게 나타났다. 조선식 화포와 거북선의 출현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화포는 중국의 영향에 의하여 고려 말부터 실용화되었는데, 세종 때 이르러 중국 양식에서 완전히 벗어나 조선식으로 규격화하여 그 전면적 개주(改鑄)가 이루어져 화포의 성능이 뚜렷이 높아진 결과였다.

1430년 화포방사군, 즉 포병을 전국적으로 배치하였으며, 그 제도는 더욱 발전하여 화포군의 새 병과를 마련하였다. 1448년(세종 30)에 편찬, 간행한 ≪총통등록 銃筒謄錄≫은 개주한 화포들의 주조법과 화약사용법 등을 상세히 기록, 정확한 규격을 그림으로 표시한 책인데, 조선 화포제조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주목할 만한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세종 때 화포기술의 발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다음 왕대에 나타난 화차는 동시에 다수의 로켓을 발사하는 일종의 장갑차였다.

조선 초기의 전함으로 유명한 거북선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걸쳐 격심하였던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조선이 그 백병전술에 대비하여 만든 것이며, 고려의 돌격전함의 착상을 발전시켜 만들어 낸 조선 특유의 전선이다.

거북선은 15세기 초에 건조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다포장(多砲裝) 중장갑의 연해용(沿海用) 돌격전선으로 뛰어난 기능과 기동력으로 효과적인 전술을 펴 일본 수군과의 해전에서 대승을 이룩하였다.

세종 때에는 건축에서도 우리 고유의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고려시대에 들여온 중국의 건축양식, 즉 주심포(柱心包)와 다포(多包)의 두 양식을 서로 절충 또는 변화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은 양식의 변모는 시공상의 편의나 가구법(架構法)의 합리화와 장식적 의장(意匠)의 융합 등이 원인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두 양식 사이의 가장 뚜렷한 기본적 상위점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들 두 양식 외 우리의 목조건축 양식에는 익공양식(翼慊樣式)과 두조건(斗組建)이 있다.

종이의 경우도 조선종이는 희고 질긴 질 좋은 종이로서 중국에서도 귀한 것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종이는 문화의 매체로서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인쇄술의 발전과 함께 종이의 질을 개량하는 데 힘썼다. 조선에서 금속활자 인쇄가 가장 발전한 것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질 좋은 종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15세기의 여러 나라 책들을 비교해 보면 조선종이가 좋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종이를 뜨는 법과 지록형(紙懶型)의 조선식 발이 특히 두드러진다고 지적하고 있다.
조선종이는 백추지(白偵紙)로서 중국에 알려져 있었다. 17세기 중국의 유명한 기술서인 ≪천공개물≫에는 “조선의 백추지는 어떤 재료로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쓰여 있어, 그 제조법이 중국과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4. 지리학과 지도

중국과학의 변형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창조는, 지리학에서도 찾아볼 수가 있다. 1402년에 그린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는 14세기 중국에서 그린 〈성교광피도 聲敎廣被圖〉와 〈역대제왕혼일강리도 歷代帝王混一疆理圖〉를 바탕으로 하고, 거기에 한반도와 일본을 덧붙여 고쳐 그린 것이다.

이 세계지도는 중화적 세계관(中華的世界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으나, 유럽과 아프리카지역과 극동을 포함하는, 그 당시의 가장 새로운 지리학 지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니담에 의하면, 이 세계지도는 1375년에 그린 색다른 〈카탈란지도〉보다 확실히 우수한 것이라고 한다. 1471년에 출간한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는 일본에서 보다 일찍 출간한, 일본지도를 포함하는 일본지지(日本地誌)이다.

우리 지도는 고려시대까지 그 지형이 대체로 정돈되어 있었는데, 세종 때 이르러 전국적으로 실지 측량에 의한 지도의 제작을 시작하여 한층 정확한 조선지도를 완성하였다. 지금 일본의 나이카쿠문고(內閣文庫)에 보존되어 있는 15세기 전반의 조선지도는, 그 당시에 제작한 세계 어느 지도에도 뒤지지 않는다.

또, 15세기에 편찬된 조선의 지리지(地理誌)는 그 당시 중국 지리지의 모델 가운데 하나였던 ≪방여승람 方輿勝覽≫과는 형식과 구성이 다른 조선식 인문지리지이다. 그것은 현지에서의 직접 조사와 문헌의 연구를 바탕으로 하여 체계를 세운 것이다.

1422년 (세종 14) 1월에 착수하여 7년 만에 완성한 ≪신찬팔도지리지 新撰八道地理志≫는 22년 뒤 ≪세종실록≫이 편찬되면서, 그 속에 ≪세종실록≫ 지리지로 개정하여 증보되었다. ≪세종실록≫ 148∼155권 사이에 수록된 이 팔도지리지는 자연과 인문의 두 부문에 걸친 방대하고 조직적인 지리지이다.

조선의 지리지는 그 뒤 15세기 후반 〈조선전도 朝鮮全圖〉와 각 도의 지도를 덧붙여 한층 더 정비된 인문지리지가 되었다. 1478년(성종 9)에 완성한 양성지(梁誠之)의 ≪팔도지리지≫는 조선 초기 지리지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발전적 저서임에 틀림없으나, 출간되지 못하고 ≪동국여지승람≫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동국여지승람≫은 15세기에 출간된 우리 나라 지리지 가운데 가장 정확하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지리책이다.

5. 의학과 농업기술

의학분야에서는 우리 나라 의약학의 체계화와 동양의학의 집대성이 특히 주목된다. 고려 말기에 시작된 우리 나라 의약에 의한 독자적 처방의 체계화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다.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에 걸쳐 ≪향약제생집성방 鄕藥濟生集成方≫과 ≪향약본초 鄕藥本草≫가 편찬되어 우리 나라 의약에 관한 의학적·본초학적 지식이 정리되었다.

이들을 하나로 요약하고, 의약학적 연구를 더해서 체계를 세운 것이 1433년에 완성한 ≪향약집성방≫이다. 거기에는 703종의 한국산 의약이 나와 있다. 이것은 의약학의 중국 의존에서의 탈피로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들 연구와 병행하여 이룩한 것이 ≪의방유취 醫方類聚≫의 편찬이다.

1445년에 완성한 이 의학대백과사전은 우리 나라와 중국의 의서 153종을 집대성한 것으로, 15세기 최대의 의서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의방유취≫에는 조선의 개성이 별로 나타나 있지 않았다.

조선의학의 개성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로부터 1세기반 뒤에 쓰인 또 하나의 의학대백과사전인 ≪동의보감≫이었다. 1596년에 시작하여 1610년에 완성된 이 의서는 그 서명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의, 즉 조선의사 또는 조선의학의 보감이었다. 1,420종의 의약을 포함하는 이 의서는 저자 허준(許浚)의 의학사상이 강하게 나타나 있는 점에서 ≪의방유취≫와 다르다.

≪동의보감≫과 ≪의방유취≫는 일본과 중국에서도 간행되어 그 나라 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동의보감≫이 널리 읽히고 있으며, 중국의 현대의학 속에 계속 살아남아 있다.

농업기술도 세종대에 큰 발전을 보았다. 당시 우리 나라의 농업기술은 주로 중국의 농서(農書)를 교과서로 하여 전개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농서와 실제의 농법, 그리고 한반도의 남부와 북부 사이에 차질을 빚게 하였다.

이에 대한 해소 방법은, 조선의 농법을 더욱 앞선 기술에 의하여 개량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쓰인 것이 1429년에 완성된 ≪농사직설 農事直說≫이다. 각 지방의 농법을 널리 조사하여 그 가운데 가장 현실적이고도 발달된 기술을 요약한 것이다.

≪농사직설≫에 의한 새 기술의 보급은 조선의 농업을 유기기술적(有機技術的)인 집약경작의 실현에로 나아가게 하였고, 수전(水田) 경작기술과 작물 가꾸는 기술을 향상시켜 집약재배농업의 실행이 전국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그 뒤 이 농서는 조선농업의 기본교과서로서 중국농서에 우선하였다.

<전상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근대] 최창익 (브리)
아래글 [현대] 북한-전망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58 사전3 [도시] 도시-참고문헌 (브리) 이창호 2003-12-19 460
57 사전3 [근대] 최창익 (한메) 이창호 2003-10-05 460
56 사전3 [근대] 간도 참고문헌 (민족) 이창호 2003-03-22 459
55 사전3 [조선] 조선전기-자주적 과학 전통 (민족) 이창호 2003-10-28 458
54 사전3 [근대] 최창익 (브리) 이창호 2003-10-05 458
53 사전3 [현대] 북한-전망 (민족) 이창호 2003-11-30 455
52 사전3 [근대] 1910년대의 독립운동 이창호 2003-08-24 455
51 사전3 [근대/현대] 독도 참고문헌 (민족) 이창호 2003-03-23 455
50 사전3 [알림] 한국사 사전 2를 만듭니다. 이창호 2010-07-01 454
49 사전3 [사학] 사학 참고문헌 (민족) 이창호 2003-10-23 452
1,,,291292293294295296297298299300,,,303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