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4 (수) 11:38
분 류 사전1
ㆍ조회: 2155      
[조선] 조선시대의 과거 2 (민족)
과거(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과거 2

관련항목 : 문과, 무과

세부항목

과거
과거(고려시대)
과거(고려 말 조선 초의 과거)
과거(조선시대) 1
과거(조선시대) 2
과거(과거제도의 개혁론)
과거(과거의 영향과 의의)
과거(근대화와 과거제도의 폐지)
과거(참고문헌)

(에서 계속)

[무과와 잡과]

(1) 무과

조선 왕조는 양반관료 체제를 갖추면서 문과와 무과를 균형 있게 실시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무과는 문과가 실시될 때마다 동시에 실시되었다. 3년에 한 번씩 보이는 식년시는 물론, 수시로 실시하는 증광시ㆍ별시ㆍ알성시ㆍ정시ㆍ관무재 등의 제과(諸科)에도 무과가 다 설치되어 실시되었다. 다만, 알성시ㆍ정시ㆍ관무재가 초시ㆍ전시 두 단계 시험에 의하여 급락을 결정한 점이, 단 한 차례의 시험으로 판가름이 나는 문과의 그것과 달랐다. 합격자 발표 의식인 방방의에 있어서도 문과와 무과를 동시에 창방(唱榜)하였다.

무과의 고시 과목은 크게 강서(講書)와 무예(武藝)의 두 종류가 있었다. 강서는 복시에만 있는 시험으로 사서오경 중의 하나, 무경칠서(武經七書) 중의 하나, ≪자치통감≫ㆍ≪역대병요 歷代兵要≫ㆍ≪장감박의 將鑑博議≫ㆍ≪소학≫ㆍ무경(武經) 중의 하나를 각각 희망대로 선택하여 ≪경국대전≫과 함께 고강하였다.

무예는 조선 전기는 목전(木箭)ㆍ철전(鐵箭)ㆍ편전(片箭)ㆍ기사(騎射)ㆍ격구(擊毬)의 6기(技)가 있었으나, 후기는 유엽전(柳葉箭)ㆍ과녁〔貫革〕ㆍ조총(鳥銃)ㆍ편추(鞭芻)를 신설하고, 기사를 기추(騎芻)로 변경하는 한편 격구를 폐지하였다. 식년시ㆍ증광시를 제외한 무과는 무예 10기와 강서를 합한 11기 중에서 1∼3기를 택하여 고시하였다.

식년무과는 식년문과와 같이 초시ㆍ복시ㆍ전시 세 단계의 시험이 있어 초시는 상식년 가을, 복시ㆍ전시는 식년 봄에 각각 거행하였다. 초시에는 원시(院試:訓鍊院試)와 향시(鄕試)가 있는데 무예로 고시하였다. 원시는 훈련원이 주관하여 70인을 뽑았고, 향시는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여 경상도 30인, 충청ㆍ전라도 각 25인, 강원ㆍ황해ㆍ영안ㆍ평안도 각 10인, 도합 120인을 뽑았다. 따라서, 무과 초시의 시취 정액은 모두 190인이었다.

≪속대전≫에 의하면, 조선 후기는 초시의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고, 각 시험장에는 2품 이상 1인, 당하관 문신 1인과 무신 2인을 시관, 감찰을 감시관으로 하였다. 복시는 초시 합격자들을 식년 봄 서울에 모아 병조와 훈련원이 주관하여 강서와 무예로 고시하여 28인을 뽑았다. 복시에는 2품 이상 문신 1인과 무신 2인, 당하관 문신 1인과 무신 2인을 시관, 양사의 각 1인을 감시관으로 하였다.

전시는 복시합격자 28인을 다시 무예(처음에는 騎擊毬ㆍ步擊毬였으나, 뒤에는 11技 중의 1, 2기)로 고시하여 등급을 정하여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을 급제시켰다. 그리고 전시의 시관은 복시와 같았으나, 의정 1인을 명관(命官)으로 한 것이 달랐다.

기타의 무과로 증광시ㆍ별시ㆍ알성시ㆍ정시ㆍ관무재ㆍ외방별과ㆍ도시(都試)ㆍ권무과(勸武科)ㆍ중시 등이 있었다. 증광무과는 고시 방법과 과목이 식년무과와 같았다. 다만, 증광무과 복시의 강서가 식년무과 복시와 달라서 무경칠서와 사서오경 중에 희망하는 하나만을 고시하였다. 그리고 국가의 경사가 겹칠 때 실시하는 대증광무과는 식년무과의 2배를 뽑았다. 별시무과는 초시와 전시의 두 단계 시험이 있었다.

초시는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각 시험장에 2품 이상 문신 1인과 무신 2인, 당하관 문신 1인과 무신 2인을 시관, 양사 각 1인을 감시관으로 하였다. 전시의 시관도 초시와 같았으나, 다만 의정 1인을 명관으로 하였다.

고시 과목은 초시나 전시 다 같이 11기 중에서 품정한 2, 3기였고, 시취액수는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리고 별시무과 초시는 처음에는 서울에서만 실시하였으나, 뒤에는 각 도에서도 실시하였다.

정시무과와 알성시무과도 고시절차와 고시과목이 별시무과와 같았다. 다만, 알성시무과의 경우 초시의 두 시험장에서 각 50인을 뽑고, 전시에서 국왕의 친림 아래 시취한 것이 달랐다. 관무재는 한량(閑良)ㆍ군관(軍官)ㆍ조관(朝官)ㆍ출신 등이 응시할 수 있었는데, 초시와 복시의 두 단계 시험이 있었다. 초시는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어 각 시험장마다 2품 이상 문관과 무관 각 1인이 시관이 되어 무예 중의 1, 2기로 고시하였다.

복시는 서울에서는 춘당대에서 국왕의 친림 아래 2품 이상의 문신 1인과 무신 2인이 참시관이 되어 무예 중의 4기로 시취하였고, 지방에서는 의정이 명관이 되어 역시 무예로 시취하였다.
관무재 복시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한 자가 한량일 경우 전시에 직부할 특전을 주고, 출신일 경우 수령이나 변장(邊將)에 임명하였으며, 군관일 경우 진급시키거나 상을 주었다.

외방별과는 평안도ㆍ함경도ㆍ강화ㆍ제주 등지에 국왕의 특지(特旨)에 의하여 열린 것으로, 중신 또는 어사를 보내어 초시 없이 무예 1, 2기로 시취하였다. 중신이 시관일 경우 급제를 주었고, 어사가 시관일 경우 전시에 직부할 자격을 주었다.

도시는 매년 춘추에 서울은 병조와 훈련원, 지방은 각 도의 병마절도사가 주관하여 군사와 동ㆍ서반 종3품 이하의 조관, 한량 중의 지원자를 대상으로 기사(騎射)와 기창(騎槍)으로 고시하는 것이었다. 그 성적이 우수한 자는 한량의 경우 전시에 직부할 자격을 주고, 출신의 경우 변장을 제수하였다.

권무과는 현종 때 무예를 권장하기 위하여 권무청(勸武廳)의 신설과 함께 실시한 시험으로, 국왕이 친림하여 시취하거나 시험관을 임명하여 시취하기도 하였다. 그 대상은 삼영(三營)의 권무군관(勸武軍官)으로서 무예 중 2, 3기로 시험하여 합격자에게는 전시에 직부할 특전을 주었다.
이 밖에도 각 군영(軍營)에 별무사도시(別武士都試)ㆍ취재(取才)ㆍ시재(試才)ㆍ시사(試射) 등의 각종 시험이 있어서, 그 합격자에게 전시에 직부할 자격을 주거나 또는 진급시키고 상을 주었다.

한편, 문과중시에 상대되는 것으로 무과중시가 당하관의 승진을 위한 시험으로 10년에 한 번씩 실시되었다. 초시와 전시의 두 단계 시험이 있었는데, 그 고시방법은 정시무과와 같았다. 다만, 초시 두 시험장에서 각각 50인씩 뽑는 것이 정시무과와 달랐다.

무과는 조선왕조가 북으로부터 여진, 남으로부터 왜의 침입을 받게 되자 크게 변질되어 대량으로 시취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명종 때의 을묘왜란, 선조 때의 여진추장 이탕개(尼蕩介)의 침입으로 무과의 시취 액수가 정액을 훨씬 넘어서고 있었지만, 대량으로 시취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이후였다.

즉 전에 없던 커다란 국난을 당하게 되자, 국가에서는 부방군(赴防軍)을 확보하는 동시에 국민의 전투 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 한 번의 무과에 수천 인을 뽑았고, 심지어는 각 도에 공명패(空名牌)를 보내어 왜적의 머리 하나를 베어오는 자에게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을 막론하고 급제를 주었다.

그리고 선조 때에서 인조 때에 이르기까지 서북 변경의 방위가 긴급해짐에 따라 유방병(留防兵)의 보충ㆍ강화가 불가피하게 되자, 종래 문과와 함께 실시되던 무과가 단독으로 실시되는 경우가 많아졌고, 또 한꺼번에 1만여 인의 합격자를 내는 일이 있게 되었다. 이처럼 많은 합격자를 내는 무과를 만과(萬科)라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왕조의 국제적 지위가 안정된 뒤에도 무과 출신의 부방의무(赴防義務)의 대가로 징수하는 물자(군량미 등)가 당시 고갈 상태에 빠져 있던 국가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기에 계속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천민들도 만과에 진출하는 자가 많아지게 되어, 결국 무과는 천시되어 사대부의 자제들이 이를 외면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과거 규칙이 문란해져 대사(代射)ㆍ대강(代講)ㆍ뇌물수수 등의 협잡이 성행되기에 이르렀다.

(2) 잡과

기술관의 등용고시로서 역과(譯科:漢學ㆍ蒙學ㆍ倭學ㆍ女眞學)ㆍ의과ㆍ음양과(陰陽科:천문학ㆍ지리학ㆍ명과학)ㆍ율과 등의 네 종류가 있었다. 잡과는 식년시와 증광시에만 설행되었으며, 초시ㆍ복시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초시는 상식년 가을 해당관청의 주관 아래 실시되었고, 복시는 식년 봄 해당관청의 제조(提調)와 예조당상(禮曹堂上)의 주관 아래 실시되었다. 잡과에서 향시가 있는 것은 역과의 한어과 뿐이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나 있는 잡과의 시취액수를 살펴보면 다음 〔표 4〕와 같다.

시험 과목은 각 과의 전공서적과 경서 및 ≪경국대전≫을 필수과목으로 하였다. 합격자에게 처음 홍패를 주었으나, 뒤에는 백패(白牌)로 바꾸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종7품 내지 종9품의 품계를 주어 해당관청의 권지(權知:試補)로서 임명하였다.

[응시 자격과 고시 절차]

(1) 응시 자격

조선 시대 법제상으로는 천인이 아니면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평민인 양인(良人)의 응시 자격을 보장한다는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응시할 수 없다고 규정한 법조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적으로는 신분에 따르는 아무런 차별이 없었다고 하기는 어렵다. 물론, 무장을 뽑는 무과나 기술관을 뽑는 잡과의 경우 천계의 혈통이 섞이지 않은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신을 뽑는 문과나 그 예비시험의 성격을 가진 생원ㆍ진사시만은 사족(士族), 즉 양반신분이 아니고는 응시하여 합격하기가 어려웠다. 양반신분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결격사유가 있는 자는 응시할 수 없었다.

① 중죄인의 자손:사직을 위태롭게 한 모반죄, 종묘ㆍ능침ㆍ궁궐을 파괴한 대역죄, 국가를 배반하고 외국과 몰래 통한 모역죄, 부모나 남편을 죽인 강상죄(綱常罪), 인신위조죄(印信僞造罪) 등 중죄인의 자손은 영세금고(永世禁錮)하여 과거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또, 증수뢰(贈受賂)를 하거나, 관물(官物)을 유용하거나, 남의 재물을 불법으로 탐낸 관리를 장리(贓吏)라 하여 처벌하고, 그 아들에게 과거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② 영불서용(永不敍用)의 죄를 지은 자:범죄를 저질러 영영 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자, 즉 현직 관료로서 범죄인에 대한 재판을 일부러 질질 끄는 자와 고문하여 치사하게 한 자, 공물(貢物)을 대납(代納)하는 자, 산사(山寺)에 올라가 말썽을 부리는 유생 등에게는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다.

③ 재가녀(再嫁女) 및 실행부녀(失行婦女)의 자손.

④ 서얼(庶孽):태종 때 만들어진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에 의하여 양반의 첩자손은 영원히 금고되어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53년(명종 8) 양첩(良妾)의 자손에 한하여 손자 때부터 문과와 무과 응시 자격을 주었고, 1625년(인조 3)부터는 천첩(賤妾) 자손도 증손자 때부터 응시가 가능하였다.

그리고 문과 응시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나, 다음의 경우 응시에 제한을 받았다.

① 원적(原籍)에 없는 자:향시는 시관의 상피인을 제외하고는 타도인의 응시를 금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 원적을 속이고 타도의 향시에 응시하는 자가 있게 되자, 1744년(영조 20) 원적에 없는 타도인이 향시에 응시하였을 경우 3식년 동안 응시자격을 박탈하였다.

② 도목(都目)에 없는 자:임진왜란 이후 쇠퇴해진 관학의 재건을 위하여 1651년(효종 2) 도목제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서울과 지방의 유생을 ≪소학≫ㆍ≪가례≫ㆍ사서 중 1서를 고강하여 조 이상을 뽑아 사학 또는 향교에 분속시켜 면역의 특전을 주는 한편, 청금록(靑衿錄)이나 유안(儒案)에 들어 있지 않은 자에게는 과거응시를 금하는 것이었다. 즉, 과거 때가 되면 서울은 4관원(四館員), 지방은 수령이 학교의 재적생 일람표인 도목을 작성하여 각 시소(試所)에 보냈는데, 시소에서는 도목에 실려 있는 자에 한하여 녹명을 허용하였다.

③ 유벌(儒罰)을 받은 자:조선시대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유생에 대하여 조정에서 과거응시를 제한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성균관 유생들이 자치기구인 재회(齋會)를 열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한 자에게 제적 등의 유벌을 주는 일이 있었다. 이러한 유벌을 받은 자는 그것이 풀리기 전까지 과거응시에 제약을 받았다.

④ 기복(朞服) 이상의 상을 당한 자:부모의 상을 당하거나, 승중손(承重孫)이 조부모의 상을 당한 자는 3년상(만 2년 3개월)이 끝날 때까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초시 합격자가 상을 당하였을 경우 거주지 수령의 공문을 받아 예조에 제출하면 다음의 복시에 바로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이를 진시(陳試)라 하였다.

⑤ 현직 관료와 종친(宗親):국초 소과는 참하관 이하, 대과는 당하관 이하에게 응시 자격을 주었으나, 1472년(성종 3) 이후부터 소과는 정5품 통덕랑(通德郎) 이하, 대과는 정3품 당하관인 통훈대부(通訓大夫) 이하에게 응시 자격을 주었다. 그리고 종친에게도 국초 과거응시를 허용하였으나, 1471년부터는 금하였다.

(2) 고시 절차

단 한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는 알성시ㆍ정시ㆍ춘당대시 등을 제외한 과거시험의 수험생은 시험 전에 녹명소에 녹명을 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복시의 경우 녹명 전 조흘강이라 하여 4관원(四館員)이 소과는 ≪소학≫ㆍ≪가례≫, 대과는 ≪경국대전≫ㆍ≪가례≫를 임문고강하였다. 전자를 학례강, 후자를 전례강이라 하였는데, 이에 합격해야만 녹명할 수 있었다.

수험생들은 녹명소에 먼저 자신의 성명ㆍ본관ㆍ거주와 부ㆍ조ㆍ증조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의 관직ㆍ성명ㆍ본관을 기록한 4조단자(四祖單子)와 6품 이상의 조관(朝官)이 서압(署押:手決을 둠)한 일종의 신원보증서인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하여야 하였다.

이를 접수한 녹명관은 수험생의 결격사유가 없음을 확인한 다음 녹명책에 기입하고 명지(名紙, 試紙:시험지)에 답인(踏印)한 뒤 시험장소를 배정하여 주었다. 명지는 시험 전 수험생들이 각각 구입해야 하였는데, 품질이 하하품(下下品)인 도련지(棘鍊紙)이어야만 되었다.

수험생은 시험지 머리에 본인의 관직ㆍ성명ㆍ연령ㆍ본관ㆍ거주, 부ㆍ조ㆍ증조의 관직과 성명 및 외조의 관직ㆍ성명ㆍ본관을 다섯 줄로 쓴 다음 그 위를 종이로 붙여 봉하였다. 이를 피봉(皮封) 또는 비봉(煉封)이라 하였다. 이처럼 누구의 시험지인지 알아볼 수 없게 이름을 가리는 것을 봉미법(封彌法)이라 하였다.

시험 당일 새벽 수험생들이 모이면 입문관(入門官)이 녹명책을 보고 호명하여 입장시켰다. 이때 책을 가지고 들어가다 발각되면 1식년 또는 2식년 동안 과거응시의 자격이 박탈당하였다. 수험생의 입장이 끝나면 그들을 여섯자 간격으로 떼어 앉히고 시험장을 폐쇄하였다. 그리고 시관들이 이른 새벽 의논하여 정한 시험 문제가 게시되면 수험생들의 답안 작성이 시작된다.

답안지 작성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주의사항을 지켜야 하였다.

① 생원ㆍ진사시와 전시의 시권(試卷)은 반드시 해서로 쓸 것.

② 노장(老莊)ㆍ불가(佛家)의 문자를 쓰거나 순자(荀子)ㆍ음양서ㆍ패설(稗說)을 인용하지 말 것.

③ 색목(色目:朋黨)을 언급하지 말 것.

④ 국휘(國諱:국왕이나 역대왕의 이름)를 범하지 말 것,

⑤ 신기하고 기괴한 문자를 쓰지 말 것.

⑥ 특히, 책문은 시험 문제를 옮겨쓰고 초ㆍ중ㆍ종단(初中終段)의 허두(虛頭)에 ‘신복독(臣伏讀)’의 세 글자를 써야 하였는데, 게시된 시험 문제와 자획이 다르거나 한 자라도 빠뜨리면 안 되었다.

시험 도중 예조좌랑이 시험지를 거두어 예조인(禮曹印)을 찍은 뒤 돌려주었는데, 혼란을 자아낸다는 이유로 1713년(숙종 39)부터는 시험지를 거둔 뒤 찍었으며, 그나마 영조 때는 회시 시험지만 찍도록 하였다. 답안지는 식년시ㆍ증광시ㆍ별시에서는 인정(人定:밤 9시)까지 제출하게 하고, 당일로 합격자 발표를 하는 알성시ㆍ정시ㆍ춘당대시의 경우 처음에는 2시간, 뒤에는 3시간 동안에 작성, 제출하도록 하였다.

수권소(修卷所)에서는 제출된 순서대로 답안지를 100장씩 묶어 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시험지의 피봉과 제문(製文)을 분할하여 제문을 서리(書吏)에게 붉은 글씨로 베끼게 하였는데, 이를 역서(易書)라 하였다.

역서는 문과 중 식년시ㆍ증광시ㆍ별시에서만 하고, 친림과인 알성시ㆍ정시ㆍ춘당대시 및 생원ㆍ진사시에서는 하지 않았다. 역서가 끝나면 본초(本草:본시험지)와 주초(朱草:붉은 글씨로 베낀 답안지)를 대조하여 틀린 곳이 없나를 확인하고 주초만 시관에게 넘겨 준다.

시관은 주초를 가지고 채점하여 과(科:갑ㆍ을ㆍ병과)와 차(次:제1인ㆍ제2인ㆍ제3인)를 정한다. 합격된 시험지는 본초와 주초를 일일이 대조하였다. 합격자 명단은 국왕에게 보고한 뒤 발표하였다. 생원ㆍ진사시와 잡과는 합격이라 하였고, 문ㆍ무과는 급제 또는 출신(出身)이라 하였다.

합격자 발표인 방방 때 창방의라는 의식이 거행되었는데, 문과ㆍ무과 창방의는 보통 근정전에서 실시되어 급제자에게 합격증서인 홍패가 주어진다. 이어 국왕으로부터 어사화(御賜花:帽花)와 개(蓋:日傘) 및 주과(酒果)를 하사받았다. 생원ㆍ진사시 합격자에게는 예조에서 백패를 주고 모화(帽花)와 주과를 하사하였다. 또, 문과ㆍ무과 급제자들에게는 은영연(恩榮宴)이라 하여 조정에서 축하연을 베풀어 주었다.

그 다음날 문과ㆍ무과 급제자들은 모두 문과 장원의 집에 모여 그 인솔하에 예궐(詣闕)하여 국왕에게 사은례를 올렸고(생원ㆍ진사시 합격자는 생원 장원집에 모였다), 그 다음날 무과 장원의 집에 모여 그 인솔하에 문묘(文廟)에 가서 알성례(謁聖禮)를 행하였다(생원ㆍ진사시 합격자는 진사 장원집에 모였다). 또, 시관을 초대하여 은문연(恩門宴)을 열기도 하였다. 대과ㆍ소과를 막론하고 일종의 시가행진인 유가가 3∼5일간 허락되었다. 그리고 지방 출신의 신급제자들을 위한 영친의(榮親儀)가 있어서 그들이 고향에 내려가는 날 그곳 수령과 향리들의 환영을 받고 유가하였다.

한편, 예문관에서는 신급제자의 합격 순위에 따라 성명ㆍ본관ㆍ거주 및 부친의 관직과 이름 등을 적은 문과ㆍ무과방목(龍虎榜目이라고도 함)을 만들어 중외에 반포하였다. 소과의 그것은 사마방목이라 하였다. 동방(同榜:합격동기생)은 동년(同年)이라 하여 형제와 같이 친하게 지냈다. 한편, 조선시대 5자등과(五子登科)의 경우 그 부모가 살아 있으면 세미(歲米) 20석을 주고, 죽었으면 벼슬을 내려주는 것이 관례였다.

급제자는 등급에 따라 품계를 받았는데, 품계 없이 등과한 경우 갑과 제1인에게는 종6품, 제2ㆍ3인에게는 정7품, 을과에게는 정8품, 병과에게는 정9품의 품계를 주었다. 그리고 갑과에게만 즉시 실직(實職)을 주고, 나머지는 문과의 경우 4관에, 무과의 경우 훈련원과 별시위(別侍衛)에 권지로서 분속시켰다가 실직에 임용하였다. 품계를 가지고 등과한 경우, 갑과 제1인은 4계급, 제2ㆍ3인은 3계급, 을과는 2계급, 병과는 1계급을 각각 승진시켜 주었다(이러한 경우 승진 한계는 정3품 당하관까지이다).

[과거의 폐단]

국가 사회를 이끌어 나갈 인재를 등용하는 시험인 과거를 공정하게 운영한다는 것은 국가기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왕조도 국초부터 과거의 부정을 엄격히 단속하여 과거를 비교적 공정히 운영하여 나갔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과거의 운영도 엄격, 공정하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폐단이 싹트기 시작하였다.

(1) 수종(隨從)의 폐

시험장에는 잡인의 접근을 엄금하고, 만약 함부로 들어오는 자가 있으면 붙잡아 수군(水軍)으로 삼았는데, 임진왜란 이후 시험장의 단속이 소홀해지자 서울의 권세 있는 양반자제들이 시험지를 베끼는 사람, 또는 서책을 가진 사람 등의 수종인을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의 각종 과거에는 수험생들이 많은 수종인들을 데리고 들어갔기 때문에, 입문자의 수가 많아서 큰 혼란이 일어나 밟혀 죽거나 다치는 등의 사고가 잇따랐다. 이에 수종인을 붙잡으면 데리고 온 유생과 함께 형조에 보내어 수군으로 삼는 등의 엄벌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2) 조정(早呈)의 폐

응시자 수의 증가로 시관들이 시간에 쫓겨 허두 몇 줄만 읽거나 또는 일찍 낸 시험지만을 과차(科次)하는 폐풍이 생겼다. 이것은 수험생들로 하여금 시험지를 서로 먼저 내려고 다투게 하는 폐풍을 낳았다. 이리하여 혹은 글 잘 짓는 사람 4, 5인을 데리고 들어가 상ㆍ하단을 나누어 제술하게 하여 합쳐서 빨리 냈고, 심지어는 수권소의 군졸을 매수하여 자기의 시험지를 빨리 낸 시험지책 속에 넣게 하는 폐풍까지도 나타났다. 이에 영조 때는 수권관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시험지를 내지 못하게 하였고, 정조 때는 제술의 시한을 시험 문제 출제 후 3시간까지로 정하는 등의 시정책을 강구하기도 하였다.

(3) 협서(挾書)

시험장 안에서 책이나 문서를 가진 자가 발견되면 2식년 동안 과거응시의 제한을 받게 되어 있었으나, 효종 이후 이 금지조항도 해이해져서 수험생들이 공공연히 책을 가지고 들어가 보고 쓰는 경우가 생겼다.

(4) 차술(借述)

시험장에서 남의 제술을 빌리는 차술이나 남을 위하여 제술해 주는 대술(代述)은 엄히 금해서 이를 어기는 자는 장(杖) 100에 도(徒) 3년의 형을 주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시험장의 단속이 허술해지자 서울의 권세 있는 양반자제들이 글 잘하는 사람 4, 5인을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 각각 제술하게 하여 잘 된 것을 골라 제출하거나, 혹은 글 잘하는 사람이 시험장 밖에서 제술하여 시험장의 서리나 군졸의 손을 빌려 수험생에게 전하게 하였으며, 또 수험생이 시험장을 빠져 나가 집에서 제술하여 오는 경우도 많았다.

이에 영조 때 면시법(面試法)을 실시하여 발표 다음날 대과와 소과의 합격자를 발표 다음날 전정에 모아 각기 지은 글귀를 암송시켜, 암송하지 못하면 차술한 것으로 간주하여 합격취소를 시켰다. 그리고 차술ㆍ대술의 형벌을 강화하여 조정의 관료나 생원ㆍ진사이면 변방에 충군(充軍)하고, 유학이면 수군으로 삼았다.

(5) 혁제(赫蹄)

시관과 수험생이 짜고 부정 합격을 꾀하는 것으로서, 그 방법도 시관이 수험생에게 시험 문제를 미리 가르쳐 주어 집에서 지어 오게 하는 방법, 몇 개의 글자를 암표(暗標)로 정하여 수험생으로 하여금 시험지에 암표를 쓰게 하는 방법, 수험생이 자기가 제출한 답안에 허두의 문구를 적어서 시험장 안의 서리나 하인의 손을 빌려 시관에게 전하는 방법, 봉미관(封彌官)의 서리를 매수하여 답안지의 자호(字號)를 알아 내어 시관에게 알리는 방법 등이 있었다.

(6) 역서용간(易書用奸)

세도가의 자제들이 자기가 잘 아는 서리를 등록관(謄錄官)이나 봉미관의 서리로 보내어 역서할 때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시험지를 잘 고치게 하는 방법이다.

(7) 절과(竊科)

과거의 부정 중에서 가장 악질적인 것으로 봉미관 및 서리를 매수하여 감합(勘合:채점시 시권은 수험생과 4조의 이름 등을 적은 피봉과 제술한 답안지를 분할하였는데, 채점이 끝나면 합격한 답안지와 그 답안지의 피봉을 골라내어 붙이는 것)할 때 자기의 피봉을 합격 답안지에 붙이게 하여 합격을 꾀한 것이다. 이처럼 남의 합격을 도둑질하는 것이었기에 이를 절과라 하였으며, 또한 적과(賊科)라고도 하였다.

이상과 같은 과거의 병폐는 쌓이고 쌓여서 숙종 때 두 차례의 큰 과옥(科獄)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향시에서의 부정은 더욱 커져 심할 경우 수험생들이 작당하여 시험장을 습격하고 시관을 구타하는 등의 난동이 일어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조좌호>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조선] 문과 (민족)
아래글 [조선] 조선시대의 과거 1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3000 사전1 [알림] 이후의 내용은 '한국사 사전 2'에 이어집니다. 이창호 2010-07-05 2036
2999 사전1 [조선] 김우명의 졸기 (숙종실록) 이창호 2002-11-03 2414
2998 사전1 [조선] 김우명 (한메) 이창호 2002-11-03 2052
2997 사전1 [조선] 김우명 (두산) 이창호 2002-11-03 2003
2996 사전1 [조선] 김우명 (민족) 이창호 2002-11-03 2024
2995 사전1 [조선] 김육의 졸기 (효종실록) 이창호 2002-11-03 2074
2994 사전1 [조선] 김육 (한메) 이창호 2002-11-03 2039
2993 사전1 [조선] 김육 (두산) 이창호 2002-11-03 2167
2992 사전1 [조선] 김육 (민족) 이창호 2002-11-03 2547
2991 사전1 [조선] 회니시비-송시열과 윤증 (김갑동) 이창호 2002-11-03 3258
1234567891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