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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8 (목) 00:42
분 류 사전1
ㆍ조회: 11572      
[조선] 조선 시대의 역사 개관 (민족)
조선(朝鮮) 조선 시대의 역사 개관

세부항목

조선
조선(1)(정치) 1
조선(1)(정치) 2
조선(1)(경제) 1
조선(1)(경제) 2
조선(1)(사회)
조선(1)(문화)
조선(1)(대외관계)
조선(1)(연구사)
조선(2)(1864년∼1910년대의 조선)
조선(2)(국제관계)
조선(2)(정치)
조선(2)(사회경제)
조선(2)(사상ㆍ종교)
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조선 왕조를 이룩한 주도 세력은 신흥 사대부 세력과 무장 세력이었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안으로는 농장(農莊)의 확대에 따른 사회적 모순의 증대로 백성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고, 밖으로는 이민족의 침략이 잦아 민족적 시련이 가중되었다. 이 때 이민족의 침략에 대응해 등장한 무장 이성계(李成桂)가 사회적 모순을 개혁하려는 신흥 사대부 세력과 힘을 합해 조선 왕조를 세웠다.

이에 앞서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으로 정치적 실권을 잡은 뒤, 전제 개혁으로 권문 세족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고 국가 재정과 신흥 사대부의 경제 기반을 다졌다. 그리고 이들 신진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고 신흥 사대부가 수용한 성리학을 사회 지도 이념으로 삼았다.

조선 왕조의 정치 체제는 중앙 집권적 양반 관료제였다. 여기서 중앙 집권제라는 것은 고려 시대에 비해 중앙 집권 체제가 보다 강화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예컨대 군현제가 일원화한 것은 조선 시대에 와서였다. 이에 따라 속군ㆍ속현을 없애고 중앙에서 수령을 모든 군현에 직접 파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향ㆍ소ㆍ부곡 등 특수 행정 구역도 제도상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양반 관료제는 단순히 관제상의 문ㆍ무반을 뜻하던 고려 시대의 양반 제도와는 달리, 조선 시대에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층, 곧 사대부 계층이 따로 생겼음을 의미한다. 특히 관료 임용에서도 고려 시대에는 과거보다 음서(蔭敍)의 비중이 컸으나, 조선에서는 과거를 훨씬 중시하게 되었다.

조선 왕조의 정치 기구는 형식상 문반ㆍ무반으로 양립되기는 했으나 문반 위주로 운영되었다. 즉, 최고 의결 기관인 의정부와 행정권을 가진 육조, 국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 언론 기관인 삼사 등 중앙 정부의 중요 기관은 거의 문반에 속해 있었다. 이에 비해 중추부와 오위도총부 등 일부만이 무반에 속하였다.

조선 초기의 권력 구조는 왕권의 강약에 따라 사대부의 의견이 반영되던 의정부 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되기도 하고, 왕이 의정부를 소외시키고 직접 육조를 통해 왕권을 집행하던 육조 직계제(六曹直啓制)가 되기도 하였다. 세종 때 승정원을 6승지제로 고친 것은 의정부와 육조, 그리고 임금과 신하와의 권력 균형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언론과 문필을 맡은 삼사는 왕의 전제와 행정의 전천(專擅: 권력이나 힘을 대로 부림)을 견제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한편, 무반의 최고관부는 중추부지만 실권 없는 기관이었고 오위도총부가 실질적인 최고 관부였다. 그러나 그 수장인 도총관은 문관이 겸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모든 권력은 사실상 문반에 집중되어 있었다.

초기의 중앙 권력 구조는 왕을 정점으로 하면서도 의정부의 의결권, 육조의 행정권, 언론 기관인 삼사 등이 서로 견제하여 권력의 균형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구조는 중기에 이르면서 비변사의 설치와 이조 전랑(吏曹銓郎)의 자대제(自代制)로 그 운영 방식이 달라졌다.

비변사는 중종 때부터 국방 문제를 관장하는 기관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국방 문제만이 아니라 의정부 기능인 일반 정무까지도 합좌 의결 형식으로 관장하게 되었다. 이조전랑의 자대제란 전랑의 후임 선정에 있어 왕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해 임명하게 하는 제도이다. 이는 사림의 공론을 대변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또, 이조 전랑의 삼사 임원 임명권은 삼사가 비변사에 위축되어 그 임무를 저버리게 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호 견제의 권력 구조는 18세기 초에 탕평책의 일환으로 이조전랑의 자대제가 폐지되고, 이에 따라 삼사의 견제 기능도 없어지면서 무너지게 되었다. 더욱이 비변사 대신(大臣)을 중심으로 벌열 정치화(閥閱政治化)되면서 왕권마저 약화, 마침내 세도 정치가 행해졌다.

조선 초기 양반 사회의 경제 기반을 이루고 있던 것은 과전법(科田法)이라는 토지 제도였다. 고려 말기 전제 개혁의 목적은 농장의 발달에 따라 문란해진 경제 질서를 바로잡아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고, 위로는 신진 관료의 경제 기반을 보장하며, 아래로는 도탄에 빠진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과전법의 실시로 권문 세족의 탈세지였던 농장ㆍ토지는 모두 과세지로 개편되었다. 그리고 신진 관료에게는 사전(私田)이 분배되었으며, 농민에게는 소경전(所耕田)의 소유권이 보장되었다.

그러나 과전법은 세조 때 직전법(職田法)으로 바뀌고, 성종 때에는 직전세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가 시행되었다. 이는 건국 초 이래의 사전억압 정책의 일환이었지만, 명종 때에 이르러서는 직전제마저 폐지되고 말았다. 조선 후기의 토지 제도는 뚜렷한 개편은 없었지만, 여러 양상으로 변모해갔다. 궁방전(宮房田)의 설정, 관둔전(官屯田)의 확장, 민전(民田)의 탈입(奪入)과 투탁(投托), 은결(隱結)의 격증 등이 그것이다.

당시의 토지 소유 관계에 대한 학계의 동향은 종래 토지 국유제론이 지배적이었으나 1960년대부터 토지 사유제론으로 기울게 되었다. 즉, 그동안의 연구에 힘입어 공전ㆍ사전ㆍ민전에 대한 복합적인 개념이 정립되었고, 민전은 민유지로서 상속과 매매가 이루어졌음이 밝혀진 것이다.

조선 시대 가장 중요한 산업은 토지를 경작하는 농업이었다. 조선 초기 농업에서 주목되는 것은 개간의 확대와 농업 기술의 발달이다. 개간 사업은 주로 연해 지방과 후진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농업 기술로는 시비(施肥) 방법의 발달에 따라 농지를 휴한(休閑)시키지 않고 연작하는 방법이 보급된 것을 들 수 있다. 또, 논농사에서는 건경법(乾耕法)이 개발되고, 밭농사에서는 윤작법이 성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은 고려 말기 이래 신흥 사대부에 의해 중국의 강남 농법(江南農法)이 수용된 데 연유한다.

조선 후기에 와서는 농업 기술이 더욱 발달해 논농사는 직파법(直播法)에서 이앙법(移秧法)으로, 밭농사는 농종법(壟種法)에서 견종법(腔種法)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농업 기술의 발달은 노동력을 절감시켰을 뿐만 아니라, 논에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가능하게 하여 생산량을 증대시켰다. 농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지주제에 변동을 가져오게 되어, 농민 중에서 광작(廣作)하거나 상업적 영농으로 부농이 되기도 하고 서민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서민 지주의 등장은 지주제ㆍ전호제(佃戶制)에 있어 신분적 예속성의 약화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지주제의 변동은 지대의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즉 이에 따라 종래의 타조제(打租制) 외에 도조제(賭租制)나 금납제가 행해지게 되었다.

조선 시대의 농민은 신분상 상민층과 천민층으로 구성되었는데, 대다수가 상민층에 속하였다. 상민층 농민으로서 자작농은 국가에 대해 전세 외에 지방 특산물인 공물(貢物), 군역과 요역(法役) 등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소작 농민인 전호(佃戶)는 전세 대신 전조(田租)를 지주에게 바쳤다. 농민의 토지 소유 상태를 보면, 조선 초기에는 토지 소유 농민이 7할이던 것이 후기에는 토지를 가지지 않는 농민이 7할로 반전되었다. 후기에는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 재정을 충족시키기 위해 대동법(大同法)과 균역법(均役法) 등을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상공업이 발달하였다. 상업 활동은 서울의 난전(亂廛), 지방의 장시(場市), 그리고 경향의 도고(都賈)들이 중심이었다. 서울의 상업은 전기에는 어용 상점인 시전(市廛)이 독점했으나 후기에는 이에 맞선 난전 세력이 등장하였다. 지방의 장시는 16세기 초부터 형성되기 시작,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적으로 1,000여 개소나 개설되었다. 대동법 실시 이후에는 공인(貢人)이 상업 자본을 형성, 도고상인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경강상인(京江商人)과 송상(松商)은 전국적 규모로 활동하였다. 조선 시대의 공업은 모두 수공업이었다.

초기의 관장제(官匠制) 수공업은 16세기 초부터 무너지고, 후기에는 특수 분야를 제외한 대부분의 수공업이 사장제(私匠制)로 바뀌었다. 특히, 대동법 실시 후로 수공업계는 전반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선 후기 상공업의 발달로 17세기 말에는 화폐가 전국적으로 유통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는 사회적 신분 질서가 엄격하였다. 15세기에는 양반ㆍ상민ㆍ천인으로 구분되었으나, 16세기 초에 중인층이 형성되면서 양반ㆍ중인ㆍ상민ㆍ천인의 네 계층으로 구분되었다. 양반은 고려 시대에는 문반과 무반을 함께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던 것이 조선 시대에 와서는 사회의 지배층인 사대부 계층을 뜻하게 되었다. 사대부란 “독서인은 사(士)요, 종정(從政)은 대부(大夫)라.”한 것처럼 글을 읽고 과거에 급제, 정치에 참여하던 계층이었다. 중인은 좁은 뜻으로는 서울의 기술관을 가리켰으나, 넓은 뜻으로는 서울과 지방의 경아전(京衙前)ㆍ아전ㆍ군교(軍校) 및 서얼(庶孽) 등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상민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국가에 조세ㆍ군역ㆍ요역 및 공물 등을 바치는 의무가 지워졌다. 원래 농민은 상민과 천인으로 구별되었는데, 이는 법제상으로도 분명히 구분되었다. 또, 상민과 천인의 중간에는 신량역천(身良役賤)이라는 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상민이면서도 직업이나 주어진 임무가 천한 계층으로서, 조선 초기에 양인 확대 시책의 일환으로 창출된 것이었다. 천인은 그 대부분이 노비로 이루어졌다. 전기의 노비는 대다수가 농노와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후기에는 다만 봉건적 예속민으로 신분적 지위가 다소 향상되어갔다.

조선 후기에는 농업 경제의 변화에 따라 농민층이 내재적으로 성장한 데다가 구조적 모순으로 지배층이 흔들리면서 신분제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양반은 벌열ㆍ향반ㆍ잔반(殘班) 등으로 세분되었고, 중인도 전문적 직업성이나 행정 능력 등 여러 요인으로 신분적 지위가 달라졌다. 상민도 지주ㆍ부농ㆍ빈민ㆍ전호 등으로 계층 분화가 이루어져, 평민 중에는 족보를 위조하거나 호적에 양반으로 위장해 양반 노릇을 하는 자의 수가 늘어갔다. 이에 따라 상민과 천인의 신분적 장벽도 서서히 무너져갔다. 1801년(순조 1)에는 공노비(公奴婢)를 해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변동은 신분 구조를 크게 바꾸어, 17세기 말에는 전체 인구의 1할에 불과했던 양반의 구성 비율이 19세기 중엽에는 7할까지 뛰어올랐다.

조선 시대의 문화 현상 중 가장 뚜렷한 업적은 훈민정음의 창제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목적을, 그 서문에서는 민족적 자각과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라 했으나, 역사적 배경으로 보면 훈민 정책의 일환이었다. 즉, 조선 왕조는 농업 기술의 지도ㆍ보급과 유교 윤리의 권장에 중점을 두어 백성을 교화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세종은 농민 교화의 방법으로써 훈민정음을 창제할 필요를 절감한 것이었다. 훈민정음의 창제로 우리 민족은 비로소 우리 글자를 가지게 되었고, 명실상부한 민족 문화의 터전을 가지게 되었다.

이 밖에도 조선 전기 과학 기술면에서는 인쇄술의 발달, 측우기의 발명, ≪동의보감≫의 저술 등 수준 높은 업적을 들 수 있다. 인쇄술에서는 1234년(고종 21)에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를 발명했지만, 1403년(태종 3)의 계미자(癸未字)도 서양의 금속활자 발명보다 5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세종이 측우기를 발명한 것은 1442년(세종 24)이었다. 이는 서양의 그것보다 약 100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또 선조 때 허준(許浚)이 지은 ≪동의보감≫은 우리 나라에서는 물론, 동양의 한의학 및 본초학상 특기할만한 쾌사로 꼽힌다.

조선 시대 철학적 지도 이념은 성리학이었다. 성리학은 16세기 이후 유교적인 교화 정책의 이론적 근거를 이룬 학문으로서 우주의 근원, 사물의 법칙, 인간의 본질 및 윤리 문제 등을 체계화하여 크게 발달하였다.

후기에는 실학 사상이 일어났다. 이것은 내재적인 자각과 비판 및 서양의 과학적ㆍ합리적 사상이 결합되어 이룩된 것이었다. 이 시기 실학 사상의 특징은 민족 의식과 근대 지향 의식이 바탕을 이룬 점이었다. 즉, 종래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민족 의식을 자각하게 되었고, 실학자들이 주장한 토지 제도의 개혁, 상공업의 진흥, 대외 무역의 권장, 중세적 계급성의 타파 등은 근대를 지향하는 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실학 사상은 뒤에 개화 사상으로 이어졌고, 일제 강점기에서는 근대화를 전제로 한 민족 운동으로 계승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문학을 비롯한 각종 예술에 서민적이면서 한국적인 특색이 나타났다. 문학 면에서는 시조ㆍ가사ㆍ소설 등 한글 작품이 쏟아져 나왔고, 광대들은 극가(劇歌) 형식의 판소리를 즐겨 불러 대중적 놀이마당으로 등장하였다.

한문학도 종래 유교적 사대부 문학에서 서민적 취향으로 변해갔다. 박지원(朴趾源)의 자유분방한 문체, 가식적인 양반 풍자 소설 등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특히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서당이 보급되어 교육의 기회가 넓어지면서 양반 아닌 학자 문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그림에서도 한국적 산수화와 풍경화가 나타났고, 서민의 애환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내는 풍속화가 많이 그려져서 양반 문화 일변도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한편, 천주교가 전파되고, 이에 대립적인 동학이 일어나 평등 사상을 기초로 한 서민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재룡>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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