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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8 (목) 01:17
분 류 사전1
ㆍ조회: 12984      
[조선] 조선 시대의 정치 1 (민족)
조선(1)(정치) 조선 시대의 정치 1

세부항목

조선
조선(1)(정치) 1
조선(1)(정치) 2
조선(1)(경제) 1
조선(1)(경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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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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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사상ㆍ종교)
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1. 중앙의 정치 기구

[의정부 서사제(議政府 署事制)와 육조 직계제(六曹 直啓制)]

조선 왕조의 정치 기구는 절대 왕권과 양반 관료 사이의 권력 조화가 배려된 구조였다. 이와 같은 정치 구조는 ≪경국대전≫의 완성과 함께 정립된 것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중앙의 80여 관아 중 대부분이 그 직능에 따라 육조에 소속된 속아문이었다. 그 밖의 관아로는 최고 정책기관인 의정부를 비롯해 육조, 승정원, 사헌부ㆍ사간원ㆍ홍문관 등 삼사, 중추부, 오위도총부 등이 있었다. 그리고 특수기관으로 의금부ㆍ한성부ㆍ개성부ㆍ겸사복(兼司僕)ㆍ내금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왕족, 왕의 외척과 공신에 대한 예우기관인 종친부ㆍ충훈부ㆍ의빈부(儀賓府)ㆍ돈녕부 등이 있었다.

의정부는 백관과 서정(庶政)을 총리(總理)하는 동반의 최고 관부로서 영의정과 좌우의정의 삼정승이 수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 밑에 좌찬성(左贊成)ㆍ우찬성(右贊成), 좌참찬(左參贊)ㆍ우참찬(右參贊)이 보좌하며, 그들의 합의로 중요 국사를 의결하였다. 의정부 아래에 각 부의 행정을 관할하는 육조가 있었다. 이조는 문관의 인사, 호조는 호구와 조세, 예조는 의식ㆍ외교ㆍ학교ㆍ과거, 병조는 국방ㆍ무관의 인사, 형조는 법률ㆍ소송 및 노비 문제, 공조는 토목ㆍ영선(營繕)ㆍ공장(工匠) 등의 사무를 각각 분장하였다. 육조에는 각각 판서ㆍ참판ㆍ참의의 삼당상(三堂上)이 있고, 그 밑에 정랑(正郎)ㆍ좌랑(佐郎)의 두 낭관이 있었다. 조선 초기에는 의정부와 육조 사이에 권한 변동이 생김에 따라 의정부 서사제 또는 육조 직계제가 반복되었다.

사대부의 의견이 의정부의 의결권을 통해 반영되던 의정부 서사제(議政府 署事制), 의정부를 소외시키고 육조가 모든 정무를 왕에게 직접 고하고 왕명을 직접 집행하던 육조 직계제(六曹 直啓制)가 그것이다. 태조 때는 의정부 서사제의 대표적 시기였고, 태종ㆍ세조 때는 육조 직계제의 대표적 시기였다. 세종은 전반기에는 육조 직계제, 후기에는 의정부 서사제를 택하였다. 세종 때 승정원에 6승지 제도를 마련한 것은 의정부와 육조의 권력 균형을 위해 제도화된 것이다. 6승지제란 왕의 비서 기관인 승정원에 6인의 승지를 두어 육조와 각각 연결시킨 것이었다. 즉, 도승지는 이조, 좌승지는 병조, 우승지는 호조, 좌부승지는 예조, 우부승지는 공조, 동부승지는 형조의 사무를 각각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 시대 정치는 국왕의 학문 기관인 경연(經筵)에서 많이 논의되었다. 직제상 승지는 모두 경연 참찬관(參贊官)을 겸임했고, 이 밖에 춘추관의 수찬관(修撰官)을 겸하였다. 또 도승지는 따로 예문관 직제학과 상서원정(尙瑞院正)을 겸임하여 승지는 자연히 국정의 중요 사무에 직접ㆍ간접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언론 기관으로는 사헌부와 사간원이 있었다. 사헌부는 관료의 부정과 실정을 규찰하는 기관이고, 사간원은 국왕에 대해 간쟁하고 논박하는 기관이었다. 이 두 기관을 통칭해 대간(臺諫) 또는 양사(兩司)라 하였다. 대간은 따로 서경(署經)이라는 권한도 행사하였다. 이는 당하관 이하의 관리 임용에 있어서의 인준권, 입법에 있어서의 동의권을 말하는 것이다. 중대한 국사에 대해 왕의 뜻을 움직이려 할 때는 양사가 합계(合啓)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자 할 때는 홍문관까지 합세시켜 삼사 합계를 하는 일도 있었다. 홍문관은 문한(文翰)을 관장하는 기관인데, 이 삼사는 언론과 문필의 자유가 보장된 기관으로서 왕권의 전제와 관료의 전횡을 견제하고 있었다.

의금부는 국왕의 직속 사법기관으로 왕명에 따라 왕족의 범죄, 국사범이나 반란ㆍ역모 등 중대 옥사,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강상(綱常)의 죄, 중외에서 장기간 처리하지 못한 사건 등을 다루었다. 이 밖에 왕의 교서 등을 짓는 예문관, 외교문서를 짓는 승문원, 시정을 기록하고 국사를 편찬하는 춘추관, 경적(經籍)의 출판을 관장하는 교서관(校書館) 등의 4관(四館)이 있었다.

한편, 중추부와 오위도총부는 서반 최고의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기관이었다. 이 중에서 중추부는 군사상의 기밀을 관장하는 최고 관부였으나 곧 유명무실해졌다. 따라서 서반의 실질적인 최고 관부는 오위도총부였다. 그러나 그 장관인 도총관(都摠管)은 문관이 겸직하고 있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무반을 포함한 모든 권력이 문반에 집중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대 정치 권력은 국왕을 정점으로, 의정부와 육조와 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였다. 국왕은 전제적 왕권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의정부 합의제에 의한 의결권이나 대간의 간쟁ㆍ서경 등의 견제를 받았다. 반면, 의정부는 의결권을 행사하면서도 왕권의 견제를 받았으며, 육조는 행정권을 행사했지만 대간의 감찰권이 이를 견제하였다.

[비변사와 이조 전랑 자대제]

조선 초기의 정치 권력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권ㆍ의정부ㆍ육조ㆍ삼사가 서로 견제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체제였다. 그러나 중기에 이르러 비변사의 설치와 이조전랑 자대제의 실시로 중앙의 권력 운영 방식이 크게 달라졌다.

비변사는 1517년(중종 12)에 북방의 여진과 남방의 왜구 침입에 대비해 설치되었으나, 곧 폐지되었다가 1522년에 이르러 상설기관이 되었다. 임진왜란이래 비변사는 문무 고관의 합의기관으로 그 기능이 확대, 국방 문제뿐만 아니라 일반 정무까지도 간여하게 되었다. 비변사의 임원은 도제조(都提調)ㆍ제조ㆍ부제조ㆍ낭청(郎廳) 등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도제조는 전임 또는 시임(時任)의 의정이 겸임하고, 제조는 2품 이상의 국방에 밝은 재상과 이조ㆍ호조ㆍ예조ㆍ병조의 판서가 겸임하였다. 그리고 부제조는 정3품의 문신 중에서 임명되었다.

도제조ㆍ제조ㆍ부제조는 모두 정3품 통정대부 이상의 당상관이었으므로 이를 통칭해 ‘비변사 당상’이라 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 특히 국방 문제에 밝은 3인을 뽑아서 상임위원격인 유사당상(有司堂上)을 삼아 비변사에서 군사 기밀을 처리하게 하였다. 그 밑에서 실무를 담당한 낭청은 12인의 당하관이었다. 비변사의 기능이 확대되자 자연히 의정부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비변사의 강화는 상대적으로 왕권의 약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변사에 의한 문무 고관의 합의제는 고종 초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부 최고기관으로서의 의정부의 권위는 형식상으로나마 갑오경장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묘당(廟堂)이라는 이름으로 의정부와 비변사가 합칭되었다. 비변사는 의정부의 3정승과 육조의 6판서 등이 합좌해 모든 정사를 의결, 처리하였다. 그리고 삼사는 비변사에 대한 견제 기능을 계속 가졌다. 삼사 관원의 임명권은 이조 전랑에게 부여했는데, 이는 삼사가 비변사의 권능에 위축되어 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는 폐단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조전랑의 경질은 왕권의 제약도 없이 전임자가 후임자를 천거하는 자대제로 이루어졌다. 이는 이 시기에 발달한 서원(書院) 중심으로 사림(士林)들의 공론을 반영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변사의 합의제와 이조전랑 자대제에 의한 상호 견제의 권력 구조도 영조 때 탕평책(蕩平策)의 일환으로 이조 전랑 자대제가 혁파되면서 삼사의 견제 기능은 유명무실해졌다. 이에 따라 중앙의 권력 운영 방식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삼사의 견제 기능이 없어지자 비변사의 대신 중심 정치는 자연히 벌열 정치의 성향을 띠게 되고, 이를 견제하던 왕권마저 약화되자 마침내 파행적인 외척들의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2. 지방의 통치 조직

[관찰사와 수령]

지방 통치를 위해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 300여 고을에 부(府)ㆍ대도호부(大都護府)ㆍ목(牧)ㆍ도호부ㆍ군ㆍ현을 두어, 각각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각 도에는 관찰사 또는 감사라 하는 방백(方伯)을 파견하였다. 또 각 고을에는 부윤ㆍ대도후부사ㆍ목사ㆍ도호부사ㆍ군수ㆍ현령ㆍ현감 등의 수령을 파견해 다스렸다.

각 고을의 차등은 취락의 대소, 인구의 다과, 전결(田結)의 광협 등을 고려해 결정되었다. 고려시대까지 있어온 속현, 천민 집단인 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 등의 특수 구역은 태종 때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제도로서는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실제 고을의 관할 구역 중 비지(飛地, 또는 越境地)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의 상당수는 향ㆍ소ㆍ부곡의 유흔이었다.

개성부는 유수(留守)라는 경관직이 다스린 중앙직할 지구였다. 후기에는 광주(廣州)ㆍ강화ㆍ수원에도 유수를 두어, 개성과 함께 4도(四都)라 하였다. 관찰사는 도내의 각 수령을 감독할 임무를 띠고 행정ㆍ사법뿐만 아니라 병마절도사ㆍ수군절도사도 겸했으므로 군사권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때문에 관찰사는 출신지에 임명하지 않았고, 임기도 1년으로 짧게 제한, 그 지방에 세력을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본래 관찰사의 주임무는 관내의 각 고을을 순회, 감독하는 일이었으므로 순찰사(巡察使)까지 겸하였다. 관찰사의 보좌관에는 도사(都事)ㆍ판관(判官) 등이 있었다. 도사는 관할 수령의 부정 규찰 및 과시(科試)를 관장했고, 판관은 관찰사가 겸직하는 주ㆍ부의 행정을 담당하였다.

각 고을의 수령은 고을의 차등에 따라 종2품에서 종6품까지 위계차가 있었는데, 모두 행정권ㆍ사법권 이외에 첨절제사(僉節制使) 이하의 군사권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수령의 임기는 3년이고, 역시 출신지에는 임명되지 않았다. 수령의 임무는 대개 농업의 장려, 호구의 확보, 교육의 진흥, 군정(軍政)의 수비(修備), 부역, 사송(詞訟) 및 향리의 지휘ㆍ감독 등으로 요약된다. 수령에 대한 관찰사의 근무 평정은 4등급으로 중앙에 보고되었다. 이를 전최(殿最)라 하는데, 그 성적은 승진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당상관으로 승진하려면 반드시 수령을 역임해야 했으므로 수령의 근무 평정은 당상관 진출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한편, 관찰사나 수령의 부정, 토호의 불법, 민생의 상황 등을 살피기 위해 중앙에서 행대감찰 (行臺監察)을 지방에 파견하는 일이 많았다. 이른바 암행어사는 뒤에 이것이 제도화된 것이다.

[향리(鄕吏)와 토관(土官)]

관찰사와 수령 밑에는 중앙의 육조 체제를 본떠 육방(六房)을 두고 지방 행정의 실무를 담당하게 했는데, 그것이 향리이다. 향리는 아전(衙前)이라고도 하였다. 비록 신분은 낮았으나 수령과 백성의 중간에 위치해 그 세력은 대단하였다. 지방의 중요 사무는 호장(戶長)과 이방ㆍ형방이 관장했으며, 이들을 일명 삼공형(三公兄)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관청의 기강이 엄해 향리의 부정 부패가 적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 기강이 해이해지면서 향리가 수령과 결탁, 마음대로 사욕을 채웠다. 사실상 토지나 녹봉을 주지 않은 제도상의 결함이 부정 부패의 요인이었다. 게다가 수령들은 대개 사무에 어둡고 임기가 짧았으므로 고정직인 향리가 지방 행정의 실권을 쥐고 튼튼한 토착세력으로 자리잡은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정약용(丁若鏞)은 이러한 수령과 향리와의 관계를 ‘강류부전석(江流不轉石)’이라고 비유하였다. ‘수령은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데 향리는 구르지 않는 돌과 같다.’는 뜻이다. 수령은 행정 이외에 군직을 겸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행정적 속료(屬僚)인 이서(吏胥) 외에 군사 속료인 군교(軍校)ㆍ사령(使令) 등이 있었다.

한편, 특정 지역에 토관의 제도가 있었다. 토관을 둔 곳은 평양과 영흥을 비롯, 육진(六鎭)과 경성ㆍ영변ㆍ의주ㆍ강계 등 주로 평안도와 함경도였다. 그 밖의 지역으로는 제주도가 있는 정도였다. 토관은 그 지방의 토착인 중에서 군사적ㆍ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이 임명되었다. 이러한 토관 제도는 중앙 정부가 그 지방의 유력자를 포섭, 안으로는 지방 행정의 효율화와 군사적 방어 조직의 강화 등 변진의 충실을 기하는 한편, 밖으로는 야인(野人)과의 연결을 방지하려는 회유책의 일환이었다. 세조 때에는 경주ㆍ전주ㆍ개성 등 후방 내륙에도 토관을 둔 적이 있었으나, 곧 폐지되었다. 토관직은 특별직으로서 동반과 서반으로 나누어 정5품에서 종9품까지 임명되었다. 이러한 토관 제도는 중기에 접어들면서 폐지되고 토관직이 없었던 다른 6도와 같이 향리로 대체되었다.

[면리제 面里制]

조선 시대에 나타난 지방 사회 구성의 새로운 모습은 면리제의 확립이었다. 즉, 군ㆍ현 밑에 면 또는 사(社, 함경도에 많음)ㆍ방(坊, 평안도에 많음)이 있고, 면 아래에 이ㆍ촌이 있었다. 중앙에서 파견되는 수령은 군ㆍ현에 그치므로 면 이하는 지방자치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 정부측과 지방 자치측과는 서로 다른 처지에 있었다. 즉, 정부가 수령을 통해 중앙 집권적으로 통제하려한 데 비해, 지방의 사족(士族)은 자치적 재량을 요망한 것이다. 고려 말기 이래로 지방 사족들이 각 지방에 유향소(留鄕所)를 둔 것은 그러한 요구의 발로였다.

초기에는 중앙의 통제력이 강해 유향소가 두 차례나 혁파되었다가 복립되기도 하였다. 즉, 1410년(태종 10)에 혁파된 유향소는 1428년(세종 10)에 복구되었으나,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전국적으로 모두 폐지되었고, 그 이후 1471년(성종 2)에 다시 복구되었다. 유향소의 후신인 향소는 향청(鄕廳)이라고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지방 양반 중에서 덕망 있는 자를 뽑아 좌수(座首)라 하고, 그 밑에 여러 명의 별감(別監)을 두었는데, 임기는 대개 2년이었다. 향소 역시 육방으로 나누어, 좌수가 이방과 병방을 맡고, 좌별감이 호방과 예방을, 우별감이 형방과 공방을 각각 분담하는 것이 통례였다. 향소의 기능은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이 제도가 가장 발달한 곳은 영남이었다. 그 중에서도 안동은 중앙의 요직을 역임한 자가 향임을 맡는 풍속이 있었다.

한편, 중앙 정부는 현직 관료에게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경재소(京在所) 제도를 활용하게 하기도 하였다. 경재소는 경향간의 연락으로 지방 일을 주선하는 동시에 향소와 함께 수령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경재소에는 서울에 있는 그 지방 출신의 현직 관료가 배속되었으나, 뒤에는 그 지방과 연고를 가진 서울의 유력자가 맡기도 하였다.

이 밖에 향리 한 사람을 서울에 상주시켜 지방 관아의 일을 맡게 했는데, 이를 경저리(京邸吏, 혹은 京主人)라고 하였다. 경재소가 품관(品官)에 의해 운영된 데 비해 경저리는 향리였으므로 신분상 큰 차이가 있었다. 경저리의 주요 임무는 그 지방의 공물 상납과 지방의 노비를 가려 뽑아 중앙 관아에 바치는 선상노(選上奴)의 충립(充立) 등이었다. 경저리에 대해서 감영에 파견된 고을의 향리를 영저리(營邸吏, 혹은 營主人)라고 하였다.

한편, 유향소가 부활해 제도로서 공인된 임무는 풍속의 규제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군현 안의 각종 징세인 조(租)ㆍ용(庸)ㆍ조(調)의 배정과 주관 등의 일에 수령을 보좌하는 일을 맡았다. 따라서 초기 이래 면ㆍ이(里까)지 중앙 집권적으로 통제하고자 한 원래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향소의 기능을 뒷받침해주는 지방 자치 규율로 향약(鄕約)있었다. 향약의 기원은 송나라의 남전여씨향약(藍田呂氏鄕約)인데, 주자(朱子)의 증손남전여씨향약(增損藍田呂氏鄕約)이 들어와서 중종 때 조광조(趙光祖)에 의해 처음 시행되었다. 그 뒤 이황(李滉)의 예안향약((禮安鄕約), 이이(李珥)의 서원(西原) 및 해주(海州) 향약 등이 행해지면서 전국에 파급되었다. 향약의 4대 강령인 이른바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잘못은 서로 규제하며(過失相規), 예속은 서로 교환하며(禮俗相交), 어려움은 서로 돕자(患難相恤)는 것은 유교의 도덕규범을 지방 자치규범으로 적용한 것이었다. 향약은 고을 단위로 행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범위를 좁혀 동계(洞契)로 시행하기도 하였다.

1603년(선조 36)에 경재소가 혁파되면서 지방 사회의 질서에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이 조처는 중앙 관료의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권을 배제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지방 사림이 지방자치권을 장악하자 향소와 서원 사이에 향권을 다투는 이른바 향전(鄕戰)이 벌어져 마침내 서원이 사림의 구심 기관이 되었다.

조선 초기의 면리제는 방위면제(方位面制)였고, 후기에 이르러 보다 정비, 발달되었다. 면에는 면장이 있어 행정을 집행했는데, 면임(面任)ㆍ풍헌(風憲)ㆍ약정(約正)ㆍ방수(坊首) 등 다양한 호칭으로 불렸다. 면 밑에는 이ㆍ초ㆍ동이 있는데, 그 장도 이정(里正)ㆍ동수 (洞首) 등 여러 가지 호칭이 있었다. 또, 이 이하에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조직이 행해지기도 하였다.

3. 양반 관료제

[유품(流品)]

조선 시대의 관료 조직은 문반과 무반의 양반 체제로 이루어졌고 상하 계급이 엄격하였다. 관료의 등급은 품(品) 또는 유품이라 하여 크게 9품이 있었다. 각 품에는 정(正)과 종(從)의 구별이 있어 정1품에서 종9품까지 18품으로 되어 있었다. 다시 정1품에서 종6품까지는 상하의 계(階)가 있었으므로 관료의 등급은 모두 30품계로 구분되었다. 문관 4품 이상은 대부(大夫), 5품 이하는 낭(郎)이다. 무관 2품 이상은 문관이 겸직하고, 3ㆍ4품은 장군, 5ㆍ6품은 교위(校尉), 7품 이하는 부위(副尉)라 하였다.

한편, 모든 관직을 크게 4등급으로 가르기도 하는데, 당상관과 당하관, 참상관(參上官)과 참하관이 그것이다. 당상관은 정3품 중 문관의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 무관의 절충장군(折衝將軍) 이상의 고급 관료이다. 당하관은 정3품 중 문관의 통훈대부(通訓大夫), 무관의 어모장군(禦侮將軍) 이하의 관료를 말한다. 그리고 정5품∼종6품을 참상관, 정7품 이하를 참하관이라 하였다. 참하에서 참상으로 오르는 것을 승륙(陞六)이라 하여 승진의 한 관문이 되었다.

당상관은 고급 관료로서 인사권ㆍ포폄권(褒貶權)ㆍ군사권 등 여러 특권을 가지고 중요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지위였다. 고려 귀족 사회가 불과 10여 인의 재추(宰樞)에 의해 국정이 의결된 데 비해 조선의 양반 관료는 많은 당상관에게 여러 특권을 부여하였다. 또 참상 이상이라야 지방 수령이 될 수 있었고, 수령의 역임은 당상관 승진의 필수 조건이기도 하였다.

관직의 명칭은 계(階)ㆍ사(司)ㆍ직(職)의 순으로 나타냈다. 관직에는 정해진 품계가 있지만, 품계와 직임이 일치하지 않은 경우를 위해 행수법(行守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즉, 품계가 높고 직임이 낮으면(階高職卑) 행(行), 그 반대로 품계가 낮고 직임이 높으면(階卑職高) 수(守)라 하였다. 문관의 인사는 이조에서, 무관의 인사는 병조에서 맡았으므로 이조와 병조를 합해 전조(銓曹)라 하였다. 관료의 근무 평정에 따라 승진ㆍ전보ㆍ퇴임 등 인사 행정을 했는데, 이를 도목정사(都目政事)라 하며 매년 6월과 12월에 시행하였다.

두 전조에서는 후보자 3인씩을 전형해 국왕에게 천거하는데, 이를 삼망(三望)이라 하였다. 그리고 국왕이 그 중에서 적격자를 결정하는 것을 낙점(落點) 또는 비하(批下)라고 하였다. 관료의 임명에는 이 밖에도 서경이라는 절차가 있었다. 즉, 전조에서 해당자의 친족ㆍ외족ㆍ처족 등 3족의 부ㆍ조ㆍ증조ㆍ외조 등 4조(四祖)를 대간(臺諫)에게 보내어 3족의 4조에 하자가 없음을 확인받은 후에야 직첩이 발급되는 절차였다.

[양반 관료제의 특징]

조선 시대 양반 관료제의 몇 가지 특징을 들면 다음과 같다. 인재 등용에서의 과거 중시, 엄격한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 문관 우위, 당상관의 겸직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특권 부여, 관직 구조의 다양성 등이다.

그 중 첫째로 꼽을 수 있는 것이 과거의 중시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비해 음서가 줄어든 대신, 과거제가 강화되었다. 이것은 소수 문벌의 귀족 관료사회가 아니라 폭넓은 양반층의 관료사회를 지향했음을 뜻한다.

둘째, 신분에 따른 한품 서용의 제도이다. 양반은 당상관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기술관과 서얼은 당하관까지, 향리와 토관은 참상관까지, 그리고 잡직은 참하관까지 밖에는 더 승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첩자손에 대한 한품서용 규제가 엄격하였다. 문ㆍ무 2품 이상의 양첩(良妾)자손은 정3품까지, 천첩자손은 정5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6품 이상의 양첩자손은 정4품까지, 천첩자손은 정6품까지, 그리고 7품 이하와 무관직자의 양첩자손은 정5품까지, 천첩자손 및 천인으로서 양인이 된 자는 정7품까지, 양첩자의 천첩자손은 정8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셋째, 명목상 양반 자제였으면서도 문관 우위를 취한 것은 문치주의라는 유교 정치의 방향에 따른 것이다. 무관직도 고위직은 문관이 겸직하였다. 군령(軍令)의 최고 관부인 병조가 동반직이었음은 물론, 서반의 최고 관부인 오위도총부의 도총관도 문관이 겸임하였다. 지방에서도 각 도의 관찰사가 그 도의 병마절도사ㆍ수군절도사를 겸하였다. 또 수령도 해당 고을의 병력을 지휘하는 무관직을 겸하고 있었다.

넷째, 조선 시대 관료제의 또 한 특징은 광범한 겸임제이다. 당상관은 중요 관부의 요직을 맡는 한편, 도제조ㆍ제조 등의 직함으로 여러 속아문(屬衙門)의 장을 겸임하였다. 이러한 겸임제는 여러 관부 간의 직무상 연계성과 함께 인건비의 절감이라는 실리도 있었으나 정치 권력의 소수 집중이라는 결과도 가져왔다. 이 밖에 고급 관료에게 내린 사후의 시호(諡號)와 증직이 있다. 시호는 종친과 실직 2품 이상의 문무관에게 주었다. 증직은 명유(名儒)ㆍ절신(節臣)과 왕실의 사친(私親)에게 품직을 추증하고, 종친과 2품관 이상은 3대를 추증하되 부모는 기신(己身)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각 1등씩 낮추어 추증하였다.

다섯째, 조선 시대의 관직 구조에는 다양성이 있었다. 즉 관직에 실직(實職)과 산직(散職)이 있고, 실직에는 다시 녹관(祿官)과 무록관이 있으며, 녹관에는 다시 정직(正職)과 체아직(遞兒職)이 있었다. 체아직이란 정해진 녹봉이 없이 계절마다 근무 성적을 평가, 서로 높고 낮음을 바꾸어가며 녹봉을 주는 관직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동반에는 1,779직과(職徑)가 있고 서반에는 3, 826직과가 있어 모두 5, 605직과였다. 이를 다시 분류해보면, 동반에는 정직이 1, 579, 무록관이 95, 체아직이 105직과였고, 서반에는 정직이 821, 체아직이 3, 005직과였다. 동반의 정직과 무록관은 양반 신분, 체아직은 기술관과 환관이 임명되었다. 서반의 정직은 양반 신분, 체아직은 그 직과의 7할이 군병(軍兵)에게 주어졌다.

이 밖에 공신적장(功臣嫡長)ㆍ습독관(習讀官)ㆍ의원(醫員) 등 다양한 대상자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서반 체아직은 중기 이후 점차 양반관료층의 대기 발령 또는 예비 관직과 같은 성격으로 바뀌었다. 이 밖에도 잡직이 있었다. 동반 잡직 144인은 공장(工匠)ㆍ마원(馬員)ㆍ악사(樂師)ㆍ액례(掖隷)ㆍ화원(畵員) 등 거의 천류에게 주어졌다. 서반 잡직 1,607인도 팽배(彭排)ㆍ대졸(隊卒)ㆍ파진군(破陣軍) 등 천인화한 사람으로 구성된 병종(兵種)의 군사에게 주어졌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조선 시대의 관직 구조는 동반직과 서반직의 양반 위주이기는 하나, 중인과 양인까지도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잡직에는 양인과 천인이, 토관직에는 평안도ㆍ함경도의 토착 유력자까지 관직을 받을 수 있는 다양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계속)

<이재룡>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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