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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13 (목)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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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8738      
[조선] 조선 시대의 경제 1 (민족)
조선(1)(경제) 조선 시대의 경제 1

세부항목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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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1. 토지 제도

[과전법]

조선 시대 토지 제도는 고려 말기의 전제 개혁인 과전법이 그 근간이 되었다. 고려 말기의 전제 개혁은 농장(農莊)의 발달에 따라 문란해진 경제 질서를 바로잡아 국가 재정을 유족하게 하고, 위로는 신진 관료의 경제적 기반을 보장하며, 아래로는 도탄에 빠진 농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당시의 권문세족의 농장은 불수조(不輸租)라는 불법적 특권으로 국가에 조세를 바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농장주는 농장의 전호를 혹사하고 그 대신 국가에 져야 할 의무를 면제시켜주었다. 이와 같이 농장의 면세ㆍ면역 특권은 국가 재정을 위태롭게 하여 관료나 군사에게 땅을 나눠줄 수도 없고, 심지어 녹봉조차 제대로 줄 수가 없는 형편에 이르게 만들었다.

과전법의 시행은 이러한 농장의 탈세지를 모두 국가의 과세지로 재편성, 수조(收租)를 가능하게 하였다. 과전법에서 토지를 분급하는 주요 대상은 왕실을 비롯, 국가기관ㆍ지방 관부ㆍ공공기관ㆍ관료ㆍ한량관ㆍ향리 등이었다. 왕실에는 능침전(陵寢田)ㆍ창고전(倉庫田)ㆍ궁사전(宮司田)이 분급되고, 국가기관에는 군자전(軍資田)ㆍ녹봉전(祿俸田)ㆍ경중각사(京中各司)의 위전(位田)이, 지방 관부에는 아록전(衙祿田)ㆍ공수전(公須田)ㆍ외역전(外役田)이, 관료에게는 과전ㆍ공신전이, 한량과 이(吏)에게는 군전(軍田)이 분급되고, 일반 농민과 천인은 토지분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과전법에서 사전(私田) 재분배의 중심이 된 것은 관료에게 분급하는 과전으로서, 이는 신진사대부에게 경제적 기반을 보장해준 것이었다. 과전법으로 권문세가에게 빼앗긴 농민의 토지는 되돌려주고, 전호의 소유권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공전ㆍ사전을 막론하고 농지 1결(結)마다 10분의 1조(租)인 30두(斗)의 전조(田租)를 물리게 하여 농민들의 부담을 줄여주었다. 당시 병작반수(竝作半收)가 일반화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10분의 1조로 규정한 것은 농민의 생활 안정을 위한 것이었다.

현직ㆍ산직(散職)을 막론하고 모든 관료에게 18등급에 따라 150결에서 15결까지 과전이 분급되었다. 과전과 공신전은 모두 경기도 안으로 제한해 지방 토호화(土豪化)를 막는 동시에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 세력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으로 분급된 과전ㆍ공신전은 그 자손에게 전수되었다.

과전의 분급은 원칙적으로 1대에 한하지만, 관료의 사망 후 그 처가 재가(再嫁)하지 않는 경우에는 수신전(守信田)으로, 또 관료 부부가 구몰하고 유약한 자녀만이 남는 경우에는 휼양전(恤養田)으로 과전의 전수가 허용되었다. 이에 반해 공신전은 애초부터 세전이 인정되었다. 과전ㆍ공신전의 세습화에 따라 경기도 안의 분급 토지가 절대 부족해지자, 1417년(태종 17) 기내 사전의 3분의 1을 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의 하삼도(下三道)에 이급하였다. 이것은 과전 분급의 불균형을 시정하고, 전주의 토지 소유를 분산시키며, 국가 재정상의 필요로 군자전을 경기도 내에 확대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조처로 지방에서 사전주의 횡렴(橫斂)이 일어나고, 서울로의 쌀공급이 순조롭지 않는 폐단이 생겨났다. 때문에 1431년(세종 13) 신급전법(新給田法)에 따라 하삼도 이급 사전을 기내로 환급하였다. 이 때의 신급전법은 국왕의 강력한 간섭과 통제를 주요 골자로 한 것으로, 이로써 관료들은 과전을 균점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비해 과전의 총면적이 1만 5000결이나 감소되었으니 일종의 사전억제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전 억제는 직전법으로 계승되었다.

[직전법]

과전법에서 직전법으로 전제가 바뀐 것은 조선 건국 후 70여 년이 지난 1466년(세조 12)의 일이었다. 과전법에서 산직자까지 분급하던 토지를 직전법에서는 현직 관료에게만 분급하였다. 또 과전법에서 관료의 미망인이나 자녀 등 유족에게 주던 토지도 그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토지 분급의 결수도 과전법에서 150결 내지 15결이던 것을 직전법에서는 최고 110결, 최하 10결로 줄였다. 그 결과, 관료들은 퇴직 또는 사망 후의 생활 안정을 위해 직전세의 수렴을 가혹히 하게 되었다.

국가에서는 이에 대처해 1470년(성종 1)에 직전세의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국가가 전주를 대신해 전호로부터 조세를 직접 거두어 전주에게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직전세의 관수관급제로 전주의 직전에서의 토지 지배는 불가능해졌다. 또한 대표적 사전이라 할 직전까지도 수조(收租) 관계가 공전과 같게 되었으므로 공전ㆍ사전의 구별도 없어졌다. 그리고 명종 때에는 이 직전제마저 사실상 폐지되고 말았다.

[농장]

농장은 건국 초 한때 억제되었으나, 세종ㆍ세조 때에 점차 발달하다가 성종 때부터는 더욱 성행하였다. 고려 말기의 농장은 권력형 농장으로 불법적인 것이었다. 이에 비해, 조선 전기의 농장은 국가에 공조(公租)ㆍ공과(公課)를 부담하는 법질서 속의 토지지배 형태로 전환되었다. 농장의 성립은 국가에서 내린 사전(賜田)을 비롯, 황무지의 개간ㆍ기증ㆍ강점 또는 투탁(投托)ㆍ매득(買得)ㆍ묘위전(墓位田)의 확대 및 장리(長利) 등을 통해서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매득과 개간이었다.

농장의 기능은 문화적으로는 별장(別莊)ㆍ사당(祠堂)ㆍ서당(書堂)의 구실을, 경제적으로는 장리와 창고의 구실을 들 수 있다. 농장의 관리는 지주가 직접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관리자를 따로 두고 있었다. 농장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전호ㆍ고공(雇工)ㆍ노비 등이었는데, 전호는 인신적 예속성이 약화되고 병작이 널리 보급되었다. 우리 나라 농장은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각지에 산재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 시대 농장은 일본의 장원(莊園) 같이 불수조(不輸租) 특권이 일반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다. 더욱이 서구의 장원과 같이 독립된 통치 단위로서 영주(領主)에게 영유된 것도 아니었다.

[후기 토지 제도의 변모와 지주제의 변동]

≪경국대전≫에 정해진 토지제도 자체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편되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그 실상은 여러 가지로 변모되었다. 즉, 직전(職田)의 소멸, 궁방전(宮房田)의 설정, 관둔전(官屯田)의 확장, 민전(民田)의 탈입ㆍ투탁의 경향, 은결(隱結)의 급격한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먼저 직전제의 소멸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명종 때 실질적으로 폐지되고 말았다. 다음 궁방전은 임진왜란 이후에 설정된 것으로 1사(司)ㆍ7궁(宮)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1사는 내수사, 7궁은 수진궁(壽進宮)ㆍ명례궁(明禮宮)ㆍ어의궁(於義宮)ㆍ육상궁(毓祥宮)ㆍ용동궁(龍洞宮)ㆍ선희궁(宣禧宮)ㆍ경우궁(景祐宮) 등을 일컫는다. 이 궁방전은 갈수록 확대되었는데, 처음 절급(折給)된 토지, 궁방에서 사들인 토지, 공부세(貢賦稅)를 이부(移付)시킨 토지 등이 복잡하게 얽혀 운영상 혼란이 많았다. 때문에 ≪속대전≫에서는 관할권과 수조권을 함께 가지는 유토면세(有土免稅)와 수조권만 가지는 무토면세의 토지로 정리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군영의 둔전을 비롯, 중앙 각 사(司)와 지방 관아의 관둔전이 날로 확대되었다. 관둔전도 처음에는 절수(折受)로 설치되었으나, 숙종 때 절수의 형식에서 민전을 뽑아들이는(募入民田) 폐단을 없애기 위해 토지를 사들이는(給價買土) 정책으로 전환했지만, 억지로 사들이는 폐단이 따르기도 하였다. 특히 역둔토(驛屯土)는 사유화 양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민전의 탈입ㆍ투탁의 경향은 특히 궁방전과 관둔전에서 많이 행해졌다. 이 현상은 국고수입원인 원결(元結)을 감소시키고 면세지를 확대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토지대장인 양안(量案)에서 빼내는 은결이 급격히 증가되어갔다. 은결의 방법으로는 개량(改量)할 때 관원과 결탁해 토지 면적의 일부 혹은 전부를 빼내거나, 개간지를 황무지로 보고하거나, 신전(新田)을 보고하지 않는 것 등이었다. 후기의 토지 결수가 세종 때의 160만여 결보다 항상 밑돈 원인은 은결이 증가한 때문이었다. 후기의 토지소유 상태를 양안분석 연구에서 살펴보면, 약 10% 내외의 부농이 전체 농지의 43%를 점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후기에 농업이 발달하면서 광작하는 부농과 농촌을 버리고 떠나는 이농민으로 농민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광작이나 상업적 농업을 통해 서민 지주가 등장했는데, 이로 인해 지주ㆍ전호제에서의 신분적 예속성이 약화되었다.

지주제의 변동은 지대(地代) 형태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종래의 지대 형태이던 분반타작(分半打作)의 정률지대(定率地代)인 타조법(打租法) 외에 정액지대(定額地代)인 도조법(賭租法)이 보급되고, 일부 지역에서는 금납제도 나타났다. 타조법에서는 지주의 감독권이 영농에 작용했으나 도조법에서는 이것이 사라졌고, 금납제에 이르러서는 화폐 거래만으로 단순화한 경제 관계가 되었다.

[토지소유 관계]

종래 토지제도 연구에서 토지국유제론과 토지사유제론이 맞서 있었다. 토지국유제론은 일제강점기 이래 오랫동안 정설로 인정되어왔으나, 1960년대부터 토지사유제론이 대두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당초 토지국유제론이 제기된 것은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은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농민의 토지를 약탈하고,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선 토지제도의 기본을 토지국유제로 못박아 근대 국유지와 연결시켰다.

토지국유제론의 이론적 기반은 고려 말기 전제 개혁에서의 공전 의식과 과전법의 공전 및 사전의 개념에 있었다. 즉, 토지국유제 아래 수조권의 귀속에 따라 수조권이 국가에게 있는 것은 공전, 개인에게 있는 것은 사전이라 주장한 것이었다. 이 이론을 다시 윤색한 것이 아른바 로마법적 해석을 도입한 토지 지배의 삼양식(三樣式)이었다. 즉, 국가의 처분관리권과 전주의 수조권, 그리고 전객(佃客)의 경작권이 각각 토지 소유로 관념되나, 그 중에서 국가의 처분ㆍ관리권이 보다 상위의 소유권으로 연결된다는 것이 이론의 개요였다.

이 토지국유제론은 유물사관론자들에 의해서도 주장되었다. 그들은 ‘국가는 최고의 지주다.’라는 마르크스(Marx, K.)의 동양사회이론을 바탕으로 토지국유제론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근래 토지국유제는 하나의 표방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토지사유제임이 밝혀지고 있다. 토지사유제론을 주장하는 근거는 먼저, 토지지배 관계의 형태론적 연구로서 공전ㆍ사전ㆍ민전의 개념에 대한 반성이고, 다른 하나는 토지지배 관계의 실태로서 민전에 대한 규명을 들 수 있다. 공전과 사전의 개념은 토지국유제론자가 말하는 대로 수조 관계로서의 개념이 담겨 있기도 하지만, 이 밖에 소유 관계로서의 개념도 들어 있는 것이다.

수조 관계로서의 공전과 사전의 개념은 공전이 국가의 수조지이고 사전이 전주의 수조지라는 뜻이다. 그렇지만 소유 관계로 보면, 공전은 국유지 또는 관유지를 뜻하고 사전은 사유지를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전ㆍ사전보다는 민전의 개념과 실태를 이해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민전은 수조 관계로서는 국가나 전주의 소유지를 뜻하나, 소유 관계로서는 민유지를 뜻하는 것이다. 민전은 상속ㆍ매매할 수 있는 토지이며, 그 속에 토지 사유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민전은 평민은 물론 양반ㆍ중인ㆍ노비 등 모든 계층의 민유지였다.

2. 재정 제도

조선 왕조의 국가 재정은 토지를 대상으로 거두어들이는 전세(田稅), 인정(人丁)을 대상으로 동원하는 신역(身役)으로서의 요역과 군역, 그리고 호(戶)를 대상으로 하는 공물이 그 대종을 이루었다. 중기 이후에는 농민의 구호곡이었던 환곡(還穀)이 재정 수입의 일부가 되기도 하였다.

[전세 제도]

조선 초기의 전세 제도는 고려 말기 과전법의 조세 규정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즉, 조(租)는 매결(結) 수확량의 10분의 1인 30두였고, 세(稅)는 유세지의 유전자(有田者)로부터 결당 2두씩을 징수하였다. 조세율은 매년 풍ㆍ흉에 따라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하였다.

이러한 과전법의 조세 규정은 1444년(세종 26)에 공법(貢法)이라는 새로운 세제로 개혁되었다. 이 세제는 처음 일부 지역에서 실험적으로 실시된 후, 세종 말에 전라도, 세조 때에 경기도ㆍ충청도ㆍ경상도, 성종 때에 황해도ㆍ강원도ㆍ평안도ㆍ영안도에 각각 시행되었다. 이 공법에서 조세는 매 결에 수확량의 20분의 1인 20두 내지 4두였다. 조세량을 정하는 기준은 전분육등법(田分六等法)과 연분구등법(年分九等法)에 따랐다. 전자는 전국의 토지를 기름지고 메마름에 따라 6등급으로 구분한 것으로 이 때에 결부제가 전면적으로 개편되었다. 후자는 매년 풍ㆍ흉에 따라 9등급으로 구분하는 방법이다.

과전법 당시의 3등전과 공법의 6등전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과전법의 상등전은 1,844평, 중등전은 2,897평, 하등전은 4,184평이고, 공법의 1등전은 2,753평, 2등전은 3,247평, 3등전은 3,932평, 4등전은 4,724평, 5등전은 6,897평, 6등전은 11,036평이었다. 그리고 연분구등법은 상상년(上上年)부터 하하년(下下年)까지 9등년으로 나누어 20두에서 4두까지로 정하였다. 연분구등의 실시 단위는 읍내와 동서남북 등 5가지 연분으로 조정되었다.

과전법의 답험손실법은 공법으로 바뀌면서 일정한 세율을 적용하는 정액수세법이 되었다. 그리고 조와 세가 통일되었으며, 10분의 1조가 20분의 1세로 반감되었다. 결부법(結負法)은 토지 면적과 그 토지에서의 수확량을 이중으로 표시하는 독특한 계량법이었다. 벼 한줌을 1파(把)라 하고, 10파를 1속(束), 10속을 1부(負), 100부를 1결이라 하였다. 따라서, 1결의 면적은 토지의 기름지고 메마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공법으로의 전세 개혁은 경차관(敬差官)의 농간 등 답험손실법의 운영상의 결함을 시정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즉, 조선 초기의 휴한법(休閑法)이 극복되고 연작법이 보급되어 농업생산력이 증가, 이로써 정액수세법이 제정된 것이다. 공법에 따른 20분의 1세의 상상년급 20두는 1결당 생산량을 400두로 보고 산정한 것이다. 또, 1결의 면적도 종전의 3등전에 비해 축소되었으므로 실지로는 하중년급 6두나 하하년급 4두의 적용이 많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4두로 고정되고 말았다.

1653년(효종 4)에는 종래에 사용하던 수등이척(隨等異尺: 등급에 따라 자를 달리함.)의 법을 폐하고 균일한 양전척(量田尺)을 사용해 환산하는 전제상정소준수조획(田制詳定所遵守條劃)이 발표되었다. 이 때의 양전척은 세종 때의 일등전척(一等田尺)을 기준으로 실적(實積)을 역비례로 산출, 1등전은 100부, 2등전은 85부 1파, 3등전은 70부 1속 1파, 4등전은 57부 7파, 5등전은 40부, 6등전은 25부로 삼았다. 다시 말하면, 종래 먼저 토지의 등급을 정한 뒤에 해당한 양전척으로 측량하던 것을, 이제는 모두 1등 양전척만으로 측량해 전제상정소준수조획 준정결부(准定結負)라는 환산표에 따라 각 등전의 결수를 산출해내는 방법으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후기에 1결당 전세 4두라는 것은 명색일 뿐, 실제로는 갖가지 명목으로 훨씬 많은 양을 징수 당하였다. 훈련도감이 신설된 이후, 삼수병(三手兵)을 양성하는 비용이라는 명목의 삼수미로 2두 2승(升), 공물의 전세화에 따른 대동미로 12두, 균역법의 결작(結作)으로 2두, 이 밖에 전세의 부가세로 가승(加升)ㆍ곡상(斛上)ㆍ창역가(倉役價)ㆍ이가(二價)ㆍ작지(作紙)ㆍ공인역가미(貢人役價米) 등이 그것이었다. 그리하여 ≪속대전≫에 궁방전ㆍ아문둔전 등의 면세전에 1결당 수세액을 23두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1결당 수세액은 23두 가량인 것으로 짐작된다. 정약용(丁若鏞)이 제시한 강진군의 사례를 보면, 세의 종목이 44개에 달하며, 국가에서 거두는 종목이 12개로 23두 내지 24두, 선급(船給)이 3개 종목으로 2두 2승, 읍징(邑徵)이 28개 종목으로 30두 내지 37두로 되어 있어, 1결당의 실제 부담은 55두 내지 63두나 되었다.

[역 役]

국가가 백성에게 부과하는 역은 일시적인 요역과 항구적인 국역(國役)으로 구분된다. 요역은 지방 관아에서 동원하는 경우와 중앙의 명령으로 동원하는 경우가 있었다. 지방의 요역은 전결 8결에 1부(夫)씩 1년에 6일 이내를 원칙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복호(復戶)라 하여 요역의 면제를 큰 특전으로 농간을 부리기도 하였다. 때문에 과중한 요역에 시달리다 못해 유리하는 자도 많았다.

지방의 요역으로 성곽ㆍ공해(公力)ㆍ도로ㆍ제방 등의 수축ㆍ영선(營繕), 공물(公物)의 운반, 그 밖의 잡역에 동원되었다. 중앙의 요역으로는 도성의 축조, 산릉(山陵)의 조영 등에 지방에서 많은 민정(民丁)이 징발되었다. 이와 같은 요역에는 식량이나 기구 등을 자변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항구적인 역이라 할 국역은 신역(身役) 혹은 직역(職役)이라 할 수 있는데, 그 신분에 따라 양역과 천역의 구별이 있고, 그 역종도 군정(軍丁)ㆍ이교(吏校)ㆍ노비 등 다양하였다. 그리고 공장(工匠)이나 간척(干尺) 등은 그들이 생산하는 물품을 공납하여 국역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역과 신분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역은 신분을 규정하고 신분은 곧 역을 규정하였다. 역은 정(丁)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초기에는 호(戶)를 매개로 한 정이라는 관념이 짙었다.

조선 초기의 편호법(編戶法)은 1392년(태조 1)에 재정한 계정법(計丁法)에 따라 3등호제를 시행하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에 인정(人丁)과 토지를 함께 산정하는 계정계전절충법(計丁計田折衷法)으로 바뀌고, 다시 1435년(세종 17)에는 계전법에 따른 5등호제로 바뀌었다.

≪경국대전≫에 전8결 출1부(田八結出一夫)라는 규정은 첫째 전결만을 대상으로 했고, 둘째 1호의 토지가 8결에 미달일 때는 여러 호가 합해서 1부를 내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는 호를 매개로 한 정이라 할 수 있다.

국역의 경우에도 건국 초부터 군역(軍役) 등의 역이 있는 자에게 호 단위로 의무를 지웠고, 군역을 비롯해 천역에 이르기까지 조호(助戶, 봉족)를 공정(公定)하였다. 이러한 법제적인 호는 대개 3정을 1호로 삼았다. 국역에 당번 의무를 지는 자를 호수(戶首) 또는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호수가 당번의 의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경비를 뒷바라지하는 자를 봉족 혹은 보인이라 하는데, 호수와 봉족의 관계는 원래 아들ㆍ사위ㆍ아우ㆍ조카ㆍ족친(族親)이나 겨린〔切隣〕으로 충당, 공동 책임을 지게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에게 책임을 지우기도 했고, 쇠잔한 가호는 3개의 자연호를 1개의 법제적인 호로 간주하기도 하였다. 봉족제는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으로 개편되었다. 즉, 2정을 1보로 삼고, 봉족 대신 보라는 이름을 쓰고, 호 대신에 정을 기준으로 삼았다. 보법에서는 노복도 조정(助丁)의 반으로 환산했고, 보인의 재정적 부담을 매월 포 1필 이하로 규제하였다. 때문에 양역이나 천역을 막론하고 그 입역(立役) 대신 포로 대납하는 일이 많아졌다.

양역인 군역에 있어서는 입역자의 비용을 봉족 또는 보인이 부담해 보포(保布)를 냈고, 차츰 입역 의무자조차 군포로 입역을 대신하였다. 그리고 명종 때부터는 군포를 국가 세입으로 수납하였다. 천역에 있어서도 입역 노비에게 봉족을 정해주고, 외거노비(外居奴婢)는 신공(身貢)을 상전에게 바쳐 독립호를 영위할 수 있었다. 사노비(私奴婢)도 상전에게 역 내지 신공을 바쳤다. 그러나 양반은 원칙적으로 역의 의무가 지워지지 않았다.

조선 전기에는 양반으로 구성된 군대와 양인으로 구성된 군대가 구분되었다. 그러나 후기에 양반으로 구성된 군대는 거의 없어지고, 양인만이 군포를 바쳤으므로 이를 양역(良役)이라 하였다. 그러나 1년에 군포 2필을 내는 것은 농민에게 무거운 부담이었다. 당시 포 2필은 쌀 12두에 해당했고, 풍년에는 20두 값이었다. 군포의 징수 과정에서 어린이에게 부과하는 황구첨정(黃口簽丁)이나 죽은 자에게 부과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 등 많은 폐단이 있었다. 그리하여 양인 중 부강한 자는 면역의 길을 찾게 되었고, 빈한한 자는 토호의 양호(養戶)로 투탁하거나 도망하였다.

숙종 때 이르러 양역의 폐단이 논의되어 양역이정청(良役釐整廳)이 설치되고, 양역사정절목(良役査正節目)이 제정되기도 했으나 확고한 대책은 없었다. 그 후 1750년(영조 26)에 균역법(均役法)이 실시되어 종래 2필의 군포를 1필로 줄여 받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따른 국가 재정의 부족액은 여러 방안으로 보충하였다. 즉, 종래 궁방이 점유하던 어장세ㆍ염세ㆍ선박세 등을 정부에 귀속시키고, 새로이 전 1결당 결작(結作)이라는 이름으로 2두씩 징수하게 하였다. 또, 선무군관(選武軍官) 시험의 불합격자에게 군관포를 징수하는 한편, 은결을 적발해 조세를 징수, 균역청 경비로 충당하였다. 그런데 균역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왕실과 양반관료층과의 대립이 있었다.

그리하여 왕실은 궁방이 독점하던 어장세ㆍ염세ㆍ선박세 등의 이권을 양보하고, 양반관료층은 결작과 군관포의 신설 등을 양보함으로써 균역법이 성립되었다. 그렇다고 균역법으로 역이 균등해진 것은 아니었다. 양반은 여전히 군포 징수의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농민들의 부담이 다소 가벼워진 효과는 거둔 셈이었다.

[공물]

공물은 호를 대상으로 부과하였다. 즉, 각 주ㆍ현을 단위로 백성이 공납할 토산의 현물을 배정하고, 주ㆍ현에서는 배정된 공물을 다시 각 민호에 배정하였다. 공물은 중앙 각 사(司)에서만이 아니라 감영ㆍ병영ㆍ수영 및 각 주ㆍ현에서도 현물을 징수하였다. 공물의 분정은 대개 지방관에게 맡겨지고, 향리가 그 실무를 맡아보았다. 하지만 종류가 잡다해 분정에 공정을 기하기가 어려웠다. 공물은 현물을 민호에게 부과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민정(民丁)을 동원해 요역으로 조달하는 경우도 있고, 현물의 대가로 미(米)ㆍ포(布) 등을 부과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한 관아에서 직접 공물을 마련하는 관비(官備) 공물도 있었다.

공물의 부담은 전세나 역보다도 무거웠고, 또 부과나 징수 과정에서 불합리한 점이 많았다. 그것은 일단 배정되면 감면이 어려웠고, 당초에 배정된 토산물이 뒷날에는 생산되지 않은 것도 있었으며, 애초부터 실지로는 생산되지 않는 물건이 배정되는 경우조차 있었다. 공물의 종류에는 천연 산물이 있는가 하면 가공품도 있어 그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해마다 내는 상공(常貢) 외에 필요에 따라 수시로 징수하는 별공(別貢)도 허다했고, 공물 외에 토산의 현물을 바치는 진상(進上)이라는 것도 있었다.

공물은 납세의 일종으로서 주ㆍ현 단위로 1년에 한번 내지만, 진상은 납세라기보다 외신(外臣)이 국왕에게 바치는 예물이었다. 즉, 궁중에서 쓰일 물품을 각 도 단위로 감사와 병사ㆍ수사가 매달 한번씩 상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물과 마찬가지의 의무적 부담이었고, 각 주ㆍ현에 분정되었으므로 민호의 부담이라는 점에서는 공물과 다름이 없었다. 때문에 조선 후기 대동법의 실시는 공물의 전세화(田稅化)로서 재정제도의 일대 개혁이었다.

공물의 수납 과정에서 청납업자들이 모리를 일삼던 방납(防納)과 이서(吏胥)들이 농간을 부리던 점퇴(點退)의 폐단은 일찍이 조광조(趙光祖)와 이이(李珥) 등에 의해서 지적되었다. 특히 이이는 그 대안으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을 제안하기도 하였다.

대동법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이원익(李元翼)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 실시하기 시작한 뒤 17세기 중에 강원도ㆍ충청도ㆍ전라도ㆍ경상도에 확대되었고, 1708년(숙종 34)에는 황해도에까지 실시되었다. 이로써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 실시되기까지 무려 100년이나 걸렸는데, 이는 이 법의 실시를 극력 반대한 세력 때문이었다.

한편, 대동법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었으며, 대동미라 하여 전 1결당 쌀 12두씩, 혹은 그에 상당하는 포(布)ㆍ전(錢)을 바치게 하였다. 대동미는 상납미와 유치미(留置米)로 나누어, 봄에 내는 상납미는 중앙의 재정에, 가을에 내는 유치미는 지방 재정에 충당되었다. 대동법은 전결을 기준으로 공납을 징수했으므로 농민들의 부담이 그 이전보다 가벼워졌다. 실제로 선혜청이라는 명칭은 농민에게 은혜를 베푸는 관청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공인에게 상업자본을 형성하게 하여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공인의 주문을 받아 상품을 생산하는 수공업을 발달시키는 사회적 변화를 가져왔다.

[환곡]

환곡도 중기 이후에는 국가의 세입 재원이 되었다. 환곡 또는 환상(還上)라는 제도는 본디 춘궁기에 국가가 관곡인 의창곡(義倉穀)을 농민에게 대여했다가 추수 뒤에 회수하는 제도였다. 즉, 진휼(賑恤)과 동시에 관곡을 신곡으로 교체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1423년(세종 5) 1석(石)에 3승의 모곡(耗穀)을 받는 고리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명종 때에는 모곡이 1할에까지 이르고, 회록법(會錄法)이라는 제도로까지 발전하였다. 회록법이란 모곡 1두 5홉 중 10분의 9는 지방 관아의 수입이 되고, 나머지 10분의 1인 1승 5홉은 호조의 장부에 올려 국가의 회계에 넣는 제도인데, 뒤에는 3분모(分耗)회록에까지 이르렀다. 이와 같이 환곡은 지방 관아와 중앙 정부의 재원이 되면서부터 굶주린 백성의 구휼이라는 본래 목적에서 벗어나 농민을 수탈하는 수단이 되어버렸다. 조선 후기에 크게 문제가 된 ‘삼정(三政) 문란’이란 곧 전정(田政)ㆍ군정(軍政)ㆍ환곡 등 국가 재정의 3대시정의 문란을 뜻하는 것이었다.

(에 계속)

<이재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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