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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6-13 (목) 21:43
분 류 사전1
ㆍ조회: 9633      
[조선] 조선 시대의 사회 (민족)
조선(1)(사회) 조선 시대의 사회

세부항목

조선
조선(1)(정치) 1
조선(1)(정치) 2
조선(1)(경제) 1
조선(1)(경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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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1)(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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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2)(국제관계)
조선(2)(정치)
조선(2)(사회경제)
조선(2)(사상ㆍ종교)
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1. 호구

조선 시대 호구 파악은 국가운영상 매우 중대한 과제였다. 즉, 인구보다도 역(役)의 부담자를 알아내려는 목적이 앞섰으므로 항상 정(丁)의 조사에 중점이 두어졌다. 호구 파악은 매 3년마다 하는 호적 정비를 통해 실시하였다. 호적에 기재되는 사항은 주소, 본인의 관직ㆍ성명ㆍ연령ㆍ4조(四祖), 처의 성씨와 연령, 솔거 자녀의 성명과 연령, 노비 및 고공의 성명과 연령 등이었다.

호란 오늘날 가구의 뜻인 가호를 이르기도 했고, 법제상으로는 3가(家) 외에 3정(丁)을 호로 편성했는데 신분의 고하와 역의 경중에 따라서도 달랐다. 또, 호의 등급도 인정ㆍ전결, 또는 가택의 간가수(間架數) 등에 따라 정해지기도 하였다. 호가 군역과 결부될 때는 정규병을 뜻하고, 호와 봉족을 아울러 이를 때는 호보(戶保)라 표현하기도 하였다. 한편, 구(口)는 당시 호구 통계자료에 따라 남정을 뜻하기도 하고, 남ㆍ여 정(丁)을 뜻하기도 하였다. 또, 호구는 호와 구, 또는 호구수라는 뜻 말고도 호적이나 호적단자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법제상 호의 등급은, 그 호의 정수(丁數)ㆍ가산(家産) 또는 가옥 간가수의 많고 적음에 따라 대ㆍ중ㆍ소의 3등급으로 가르는 것이 고려 말 이래 통례였다. 이후 조선 건국 초에 계정법(計丁法)에 따라 정해진 3등호제 계정계전절충법을 거쳐 계전법으로 바뀌면서 호의 등급도 대ㆍ중ㆍ소ㆍ잔(殘)ㆍ잔잔(殘殘)의 5등호제가 되었다.

한편, 자연호의 경우는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따라 수십 명에 이르는 대가족이 있는가 하면, 불과 서너 명의 소가족도 있었다. 호적 정리와 함께 5가작통법이라는 겨린〔切隣〕의 공동책임제와 호패라는 신분 증명의 패용을 아울러 실시하게 한 것도 호구 파악을 위한 제도였다. 조선의 역대 호구의 추세와 호구 자료를 통해 추정한 조선시대의 인구 규모는 위의 [표 1] 과 같다.

2. 신분 제도

조선 시대 신분 계층은 학자에 따라 달리 분류될 수도 있겠으나, 대체로 15세기에는 양반ㆍ상민ㆍ천인의 3계층으로, 16세기 이후에는 중인층의 형성으로 양반ㆍ중인ㆍ상민ㆍ천인의 4계층으로 대별된다. 15세기는 사회 신분층이 크게 개편된 시기로, 양인의 확대와 함께 지배층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었다. 양인층의 확대 시책으로는 노비의 변정(辨正), 승려의 환속, 신량역천층(身良役賤層)의 설정, 신백정(新白丁)의 양인화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집권 사대부들은 향리ㆍ서리ㆍ기술관ㆍ서얼 등이 관료로 진출하는 길을 크게 제약하였다. 그 중 주요한 것으로는 향리의 과거응시 자격의 대폭 제한, 원악향리(元惡鄕吏)의 처벌, 군현 개편에 따른 향리의 대폭적인 이동, 그리고 한품서용제 등을 들 수 있다.

[양반]

양반이란 고려 시대에는 문반과 무반을 아울러 지칭하는 말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 와서는 사회 지배층인 사대부 계층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사대부의 법제상 개념은 5품 이하의 관료인 사(士)와 4품 이상의 관료인 대부(大夫)의 통칭으로서 품계가 있는 관료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박지원이 “독서인을 사라 하고, 벼슬한 사람〔從政人〕을 대부라 한다.”고 했듯이 글공부를 하여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이나 장차 벼슬길로 나갈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 시대 양반층은 고려 시대의 문벌귀족에 비해 그 저변이 많이 넓어졌다.

양반 가문이 증가함에 따라 관료 진출에 과거가 중시된 반면, 가문을 보아 등용하던 음서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양반 자제는 출세하려면 과거를 치러야 했고, 과거를 치르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유교적 교양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여러 교육기관에서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의 학문을 열심히 닦았고, 양반이란 곧 관료로 출세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계층을 뜻하였다. 관료가 되면 국가로부터 토지와 녹봉을 받아 생활이 안정되었고, 부역의 의무를 지는 괴로움도 겪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양반이라도 문관이 요직을 독점했으므로 문관이 무관보다 지체가 높았다. 또 양반 자손이라도 서얼은 차별 대우를 받았다. 서얼에게는 문과에 응시할 자격조차 주지 않았고, 관료가 되어도 당상관에 승진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두 번 세 번 시집간 여자의 자손은 벼슬할 수도 없었다. 지역적 차별도 있어 평안도ㆍ함경도 출신은 약간의 예외를 제하고는 높은 지위에 등용하지 않았다.

서울 양반들은 북촌과 남촌에 모여 살았다. 그 중 북촌은 득세한 양반들이 사는 지역이었고, 남촌은 세도에서 밀려난 양반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었다. 지방 양반들은 흔히 동족 촌락을 이루며 각기 그 지방에서 토호 노릇을 하였다. 양반들이 사는 마을을 반촌(班村)이라 하고, 상민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민촌(民村)이라 하였다. 조선 전기의 양반은 대체로 지주이자 지식층으로서 관료층을 이루었다.

설사 벼슬하지 못했을지라도 학덕을 쌓아 선비로서의 품위를 갖추면 사회 지도층으로 존경을 받았다. 반면 양반으로 태어났어도 상민이나 다름없이 산 사람도 있고, 정국(政局) 변동으로 양반 계층에서 탈락하는 자도 있었다.

[중인]

조선 건국 초부터 집권 지배층의 자기도태 시책으로 16세기이래 향리ㆍ서리ㆍ기술관ㆍ서얼 등의 신분이 격하, 중인이라는 새 계층이 형성되었다. 중인은 양반과 상민의 중간 계층으로, 좁게는 서울의 기술관을 뜻했으나, 넓게는 서울과 지방의 하급 관리인 아전ㆍ군교, 서얼 등의 계층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었다. 중인인 서울의 기술관은 의관ㆍ역관ㆍ율관(律官)ㆍ산원(算員)ㆍ관상감원ㆍ사자원(寫字員)ㆍ화원(畵員) 등인데, 중인이라는 이름은 그들이 서울의 중부에서 살았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서리는 경아전, 지방의 서리는 향리이다. 경아전에는 녹사(錄事)ㆍ서리(書吏)가 있었다. 녹사는 종6품까지, 서리는 종7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고, 조선 초기 녹사에게는 퇴직 후 수령의 자격 시험에, 서리에게는 역승(驛丞)ㆍ도승(渡丞)의 자격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이 주어져 그들 중 상당수는 수령이나 역승ㆍ도승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5세기 말부터 그 길이 막히고 중인은 중인 계층의 신분으로 굳어졌다.

지방 관아의 서리는 향리 또는 외아전이라 하고, 국역(國役)의 특수 형태인 향역을 부담하는 유역인(有役人)으로 파악되었다. 세종 말에는 인리위전(人吏位田)을 폐해 향리에게 토지 분급이 중지되었다. 뿐만 아니라 당초부터 녹봉이 지급되지 않아 지방 관아에서 일정한 삭료(朔料)가 지급될 뿐이었다. 일률적으로 향리라 해도 그 내부에는 신분적 차등이 있었다. 즉 호장층ㆍ육방층ㆍ색리층이 있어, 호장층은 지방 행정의 고문역을 맡고, 육방층은 지방 행정의 실무, 색리층은 향역 중 천역을 맡았다.

군교는 중앙에서는 궁중의 사역을 맡는 액례(掖隷)와 각 군영의 ‘군영소속’이 있고, 지방에는 군교라는 직역이 있었다. 군교는 향리와 함께 이교(吏校)라고 합칭되기도 하지만, 향리는 군교보다 그 지체가 조금 높은 것으로 여겨졌다.

서얼은 중인과 같은 신분적 처우를 받았으므로 중서(中庶)라고 합칭되었다. 서얼은 문과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동반직 등용을 금했고, 간혹 서방직에 등용되어도 한품서용의 규제를 받았다.

중인은 대개 기술이나 행정의 실무를 담당했으므로 실속이 있고 나름대로의 행세할 수도 있었다. 예컨대, 역관이 사신을 수행해 무역의 이득을 본다든지, 지방 향리가 수령을 조종해 세도를 부린다든지 하는 따위이다. 한편, 중인의 기술 교육은 그 업무를 관장하는 관서에서 맡아 하였다. 이들 중 과거의 잡과에 합격되면 체아직으로서 관직에 나갔으나, 한품서용으로 당하관에 그쳤다.

[상민]

상민은 농민의 상층부와 약간의 상공인이 이에 포함되어 있었다. 상민은 백성ㆍ양인(良人)ㆍ평민ㆍ서인(庶人)ㆍ상인(常人) 등 여러 이칭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상민과 천인의 구별이 뚜렷해, 전기에는 상민에게 군역의 의무가 있었으나 천인에게는 그 의무가 없었다. 상민은 법제적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며, 의복ㆍ가옥ㆍ일상 거동 등에서 관직이 없는 양반과 비슷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비록 상민에게 과거 응시의 길이 열려 있다고는 하나, 경제적ㆍ사회적 여건으로 진출은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농민의 신분 구성은 크게 상민층과 천민층으로 이루어졌다. 농민은 국가에서 토지를 분급하지는 않았으나,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도 있고, 자작 겸 소작농도 있으며, 전호라는 단순 소작농도 있었다. 조선 전기에는 토지를 소유한 농민이 7할이었으나 후기에는 토지 없는 농민이 7할로 역전되었다. 자작 농민은 국가에 전세를 물고, 소작농인 전호는 전주에게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에 따라 수확량의 2분의 1을 전조(田租)로 바쳤다. 상민은 16세에서 60세까지의 남자는 정남(丁男)이라 하여 요역과 군역의 의무를 부담하였다.

토목 공사나 잡역에 동원되는 요역은 법으로 1년에 6일간이었지만, 사실상 수시로 징발되었다. 군역은 상민의 의무 병역으로서 입속하던 병종은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이었다. 복무 형태는 두 가지로서, 하나는 정군으로 당번 입역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봉족(奉足)으로서 정군의 재정적 뒷바라지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농민에게는 또 공물이라 하는 지방 토산물의 공납 의무가 있었다. 농민에게 있어서 공납은 전세보다 무거운 부담이었다. 지방 장관이 국왕에게 바치던 진상도 결국은 농민들의 부담이었다.

양인과 천인 사이에 신량역천의 계층이 있었다. 초기에는 양인확대 시책에 따라 종래 천인으로 간주되어왔지만, 양ㆍ천이 불분명했던 간ㆍ척, 양반의 비첩산(婢妾産), 천남(賤男)과 양녀(良女) 사이의 소생, 고려의 판단백성(判斷百姓) 등이 신량역천으로 설정되었다. 후기에는 조례(早隷)ㆍ일수(日守)ㆍ나장(羅將)ㆍ조군(漕軍)ㆍ수군ㆍ봉수군ㆍ역보(驛保) 등을 칠반천역(七般賤役)이라 하였다. 이들은 신분상으로는 양인이면서 직업이나 부과된 역이 천역인 계층이다.

[천인]

사회 계층 중 최하층인 천인의 대다수는 노비였다. 노비는 상전이 누구냐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구별되었다. 공노비는 공천이라고도 하여 왕실이나 국가기관에 예속된 노비를 이르고, 사천이라고도 하는 사노비는 개인 노비였다. 같은 노비라도 사노비는 공노비보다 더 천시되었다.
노비는 다시 독립된 가호를 가지고 따로 살림을 하는 외거노비와 상전의 집안에서 기거하는 솔거노비로 구분되었다. 외거노비는 솔거노비보다 사회적ㆍ경제적으로 조건이 좋은 편이었다.

공노비는 또 의무 부담의 내용에 따라, 서울이나 지방 관아에 일정 기간 입역(立役)하는 선상노비(選上奴婢)와 노비 신공(身貢)으로 신포(身布)를 사섬시에 바치는 납공노비(納貢奴婢)로 구분되었다. 납공노비는 선상노비에 비해 의무 부담이 조금 가벼운 편이었다. 사노비도 그들의 상전에게 노역을 제공하거나 신공을 바쳤다. 노비 소생은 아버지의 신분이 어떻든 간에 고려시대 이래 적용되어온 수모법(隨母法)에 따라 상전 소유의 노비가 되었다. 다만 종친의 2품 이상의 첩자손이나 적자손이 없는 양반의 첩자손 승중자(承重者)에게는 종부법(從父法)을 적용하였다. 때문에 노비 신분이 상승하는 길은 거의 막혀 있는 실정이었다.

노비는 재산으로 간주되어 토지나 가옥처럼 매매, 증여, 상속되었다. 상전은 노비를 마음대로 형벌할 수 있었고, 관아의 허가를 얻으면 죽일 수도 있었다. 노비는 모반죄를 제외한 상전의 어떤 범죄도 관아에 고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만일, 노비가 상전을 고발하면 강상을 어긴 것으로 인정되어 교살죄(絞殺罪)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노비 중에는 토지나 가옥뿐만 아니라 다른 노비까지 소유한 자도 있었는데, 이는 법률로도 인정되었다. 특히 농장(農莊)을 관리하는 간복(幹僕)은 대단한 재산과 권세를 누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노비 중에는 공장으로 수공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고, 상업에 종사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비는 마치 서구 농노처럼 상전의 토지에 묶여 그것을 경작함으로써 연명하였다.

천민에는 노비 말고도 재인(才人)ㆍ백정ㆍ무당ㆍ창기(娼妓) 등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백정이 가장 천시되었다. 백정은 고려시대에는 화척(禾尺)이라 하여 극도로 천대받다가 세종 초에 백정이라 개칭되고 사회적 대우도 다소 개선되었다. 재인ㆍ백정은 원래 이민족(異民族)으로 특수 집단을 이루고 유기(柳器)제조나 가축 도살 등 특수 직종에 종사하였다. 그들이 전통적인 유목 생활의 유습에서 농경민으로 전환하게 된 것은 조선 중기 이후의 일이다. 재인은 광대라고도 하여 음악을 직업으로 하였다. 그 계보는 백정과 구별이 있었던 것 같으나, 조선시대에는 동일시되었다. 단골은 남자는 박수, 여자는 무당이라 하여 민속 신앙에 종사했으며, 재인과 혼인하는 일이 많았다.

[후기 신분제의 변동]

조선 중기에 이르러 양반중심 사회에 신분제의 변동이 일어났다. 즉, 계속 정권에 참여한 양반인 벌열과 정권에서 소외되어 지방에 토착 기반을 가진 향반(鄕班), 향반 중에서도 가세가 몰락한 잔반(殘班) 등으로 양반층이 분화되었다. 이 중 향반은 벌열에 비해 지위가 떨어졌으며, 잔반은 대부분 소작농이 되었는데 그 수는 점차 늘어갔다.

한편, 중인 계층에도 신분상의 변화가 이루어졌고, 적서 차별도 조금은 개선되어 규장각(奎章閣)의 요직인 검서관(檢書官)에 서얼 출신이 임명되기도 하였다. 역관들은 청나라를 내왕하면서 견문도 넓히고 사무역으로 부를 축적해 사회적 지위를 높여갔다. 의관은 전문적 기능으로, 서리들은 행정 능력이나 문학적 소양으로 새로운 사회적 위치를 주장해갔다.

상민의 대부분을 차지한 농민도 계층 분화가 일어났다. 농민 중의 일부는 농업 기술의 발달, 농업경영 방법의 개선, 상업 농업의 발전 등으로 부농이 되거나 서민 지주가 되기도 하였다. 또, 납속책(納粟策)으로 공명첩(空名帖)을 사서 신분을 높여 군역을 면제받기도 하였다.

노비제도도 무너졌다. 임진왜란 때 노비문서가 불타버린 데다 국가에서 군사적ㆍ재정적 이유로 신분상의 제약을 점차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즉, 속오군(束伍軍) 등 군에 편성한 후 무술 시험을 통해 양인이 되기도 하고, 2대 이상 양역(良役)에 종사했다 하여 양인 신분을 얻기도 하였다. 또, 전란 때 군공을 세우거나 혹은 납속으로 양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마침내 1801년(순조 1) 공노비를 해방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관노비는 그대로 남아 있었고 사노비는 그 대상이 아니었으므로, 노비제도 자체는 그대로 지속되었다. 이후 이것이 완전히 혁파된 것은 갑오경장 때 이르러서였다.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동으로 양반호가 현저히 증가한 반면, 노비호는 격감되었다. 노비에서 상민으로, 상민에서 양반으로 신분 상승이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신분 상승을 가능하게 한 방법으로는 납속책ㆍ신분모칭(身分冒稱)ㆍ대구속신(代口贖身)ㆍ노비종모법 등이 있었다.

3. 가족 제도

조선 시대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는 가족이었다. 가장은 대내적으로 가족공동체를 지휘, 통솔하고 대외적으로 가족을 대표하였다. 가족 집단은 가부장의 권위로 유지되었으므로, 민간에서의 계약은 가장의 의지로 행해졌고, 관청에서 내리는 명령도 가장을 상대로 하였다. 또, 조상의 제사를 주재하는 일, 가정을 관리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일, 자녀의 교육과 혼인에 관한 일 등이 모두 가장권으로 집약되었다.

가장과 가족 성원과의 관계는 효도와 정렬 등 유교적 윤리 덕목으로 맺어져 있었다. 조선시대 친족의 단위는 가(家)만이 아니라 그보다 큰 문중(門中)이었다. 문중이란 부계의 일족 분파로서 이를 종족(宗族)이라 하고, 종족 집단에서의 통제 규범을 종법(宗法)이라 하였다. 조선 초기에 주자의 ≪가례≫가 유행되면서 의식도 유교식으로 정착되어갔다. 이에 따라 종족 집단이 점차 조직화해 종중에는 종회가 생기고, 종중 재산이 형성되었다. 아울러 종족의 공동 이익이나 상호 부조를 위한 종계(宗契)가 운영되었다.

16세기부터 족보가 널리 유행, 종족 관념을 더욱 굳게 하였다. 또, 가족제도와 지연을 결부시킨 집단으로 동족 촌락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친족 집단은 종족에 비해 그 범위가 좁아 4대조를 공동 조상으로 삼는 동고조(同高祖) 8촌의 집단이었다. 그것은 종족 안의 한 분파를 뜻하는 것으로, 제사에서도 4대봉사가 통례화하고, 복상(服喪)의 한계도 남자의 경우 8촌친까지였으며, 족징(族徵)의 한계도 8촌의 범위였다. 따라서, 친족은 사회 구성의 기본 단위인 가족이 확대된 것이고, 또 종족은 친족 집단의 연장으로서 각기 사회 구성의 단위가 되었다.

가족제도와 관련된 예법으로 혼인ㆍ상장(喪葬)ㆍ제사가 있다. 이러한 예법은 양반가에서 엄격히 준행되었고, 서민 사회에서는 훨씬 가볍게 다루어졌다. 혼인에 있어서는 고려 말기 이래 금해오던 동성혼이 더욱 엄격히 금지되었고, 외척과의 혼인도 6촌 이상으로 정해졌다. 혼인 연령은 ≪경국대전≫에 남자 15세 이상, 여자 14세 이상이라 하였다. 재혼은 남자의 경우 처가 사망한 뒤 3년이 넘어야 했고, 여자의 재혼은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태종 때 서얼금고법(庶孽禁錮法)이 제정되어 적ㆍ서 차별이 심하였다.

가부장적 가족제도 아래 여자의 지위는 남자보다 낮아서, 사회적 활동은 제한되고, 법률적 행위는 반드시 남편이나 가장의 허락이 있어야 하였다. 여필종부라 하여 순종은 여성의 미덕으로 삼았고, 정절은 부녀의 생명보다도 중히 여겼다. 상장은, 상복의 양태에 따라 참최(斬衰)ㆍ제최(齊衰)ㆍ대공(大功)ㆍ소공ㆍ시마(買麻)의 오복제도(五服制度)였다.

복상 기간은 3년(27개월)ㆍ기년(12개월)ㆍ대공(9개월)ㆍ소공(6개월)ㆍ시마(3개월)로 구분되었다. 남자는 본종의 8촌친까지, 외친은 4촌친까지, 처친은 처부모와 여서(女淚) 및 2촌친의 외손까지를 한계로 하였다. 여자는 부족 (夫族)에 7촌친까지, 친가의 5촌친까지를 한계로 하였다. 부모상은 3년상이지만 이것은 사대부의 경우고, 일반 서민은 100일을 원칙으로 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반상의 구분 없이 3년상이 되어버렸다. 제사도 원래 6품 이상의 관료는 3대까지, 7품 이하는 2대까지, 서민은 부모 1대에 한했으나 뒤에는 상하 없이 4대봉사가 일반화되었다.

제사는 적장자가 주관하는 것이 원칙이나, 적장자에 후사가 없으면 차자가 받들고, 차자도 무후하면 양첩자(良妾子), 그도 후사가 없으면 입후(立後)라 하여 종족 안에서 양자를 들여 봉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후기에는 서자도 무시하고 적자에게 후사가 없으면 곧바로 양자를 들여 대를 이었다. 가계와 혈통은 매우 중요시되었으므로 봉사와 입후 또한 중히 여겼다. 재산 상속은 종법에 따라 자녀에게 고루 분배했으나, 제사 주재자의 계승이라는 의미에서 적장자에게 분배된 비율이 높았다.

4. 향촌

조선 시대 지방 사회의 구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면리제(面里制)의 확립이었다. 고려시대에서 이(里)란 개경(開京)의 하부 편제의 단위 이름이다가, 말기에 이르러 지방의 자연촌도 이(里)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이장ㆍ이정의 제도가 행정 체제의 말단을 이루게 되었다. 자연촌이 이로 체계화한 배경은 자연촌의 규모가 커진 자체적 성장, 그 상부 구조의 약화, 집약 농업으로 농업 기술이 발달한 데 따른 공동체적 질서의 변모 등을 들 수 있다.

이 지역을 수령이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해 적당히 통괄한 구획이 면이었다. 조선시대 면리제의 운영에는 상반된 측면이 있었다. 하나는 중앙집권적 측면으로, 수령이 이를 직접 통제하기 위해 면 단위로 지방의 유력층인 유향품관(留鄕品官)을 권농관ㆍ군적감고(軍籍監考) 등으로 삼아 수령의 행정을 협조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지적(在地的) 성향을 가지고 면 혹은 군현 단위의 자치를 요구한 것인데, 각 지방에 유향소(留鄕所)가 세워진 것은 그 까닭이다.

고려 시대에는 대개 지방의 유력자인 중소지주층이 그 고장의 자치권을 누려 중앙집권과의 마찰이 없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중소지주층이 대개 관료신분층으로 전환, 중앙집권적인 통제와 재지 세력에 의한 자치라는 양면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초기에는 중앙집권적 힘이 우위였다. 따라서 자의적으로 세워진 유향소가 혁파되기도 하고, 복설되어 제도로 공인되던 단계에서는 수령의 보조 임무만이 부여되었다. 또, 중앙의 현직 관료에게 연고지의 유향소를 통제하게 하는 경재소제도가 생기기도 하였다.

유향소의 명목상 임무는 향풍(鄕風)의 규제 등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군현 안의 전세ㆍ역ㆍ공물 등을 배정, 주관하는 일에 수령의 보조 역할을 하였다. 이와 같이 유향소가 지방 행정에 참여하게 된 것은 이(里)의 직접적인 지배를 추구하던 중앙집권적인 의도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조선 시대 향촌은 중국 송ㆍ명 때 자연촌을 직접 지배하던 보갑제(保甲制)나 이갑제 (里甲制)와는 달랐다. 도리어 중기 이후에는 유향소의 후신인 향소 내지 향청의 향임(鄕任) 주도 아래 면에는 면임, 이에는 이임이 두어지면서 향임이 대표가 되어 수령의 관권과 접합하는 체제로 정착되어갔다.

지방 통제의 구조에서 수령과 향청과 경재소 등이 서로 얽혀진 것은 세 계열이 모두 양반 신분으로서 지방 사회에 대한 지배권이 분배되고 분산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구조적으로 수령과 유향소와의 결탁이 이루어졌는가 하면, 중앙의 권신(權臣)들은 경재소를 이용, 사적으로 특정 지방을 직접 장악하는 경향도 나타났다. 때문에 지방 사회의 질서 확립을 위한 수단으로서 향약이 주목을 끌게 되었다.

향약 보급은 사림파 계열에서 주장된 것이었다. 15세기 말부터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대두한 사림파는 훈신(勳臣)이나 척신(戚臣) 계열과는 달리, 대개 지방에 생활 기반을 가진 계열들로서 새로운 성리학적 정치 질서를 추구했는데, 그 한 방법으로 향약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사림파가 정치적 주도권을 잡게 되자 1603년(선조 36)에 경재소제도는 혁파되고 말았다. 이로써 중앙의 현직 관료가 지방 사회를 지배하던 구조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로써 사림은 서원을 중심으로 향권을 주도하는 한편, 자연촌에 향약을 실시해 지방의 지배 질서를 확립해갔다.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걸쳐 사회적ㆍ경제적 변동으로 지방 사회의 구조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16, 17세기는 사족(士族)의 향촌자치제였으나 18세기에는 사족 외에 소농민 경제의 발전으로 신향(新鄕)이 등장했으며, 이들 신향이 18세기 후반부터 향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세기 사족의 향촌지배력이 상실되고 국가가 농민에 대한 직접 지배를 강화하면서 민란이 야기되었다.

그런데 지방 사회의 하부 구조를 이해해야 할 것으로 촌락제(村落祭)와 동족 촌락의 문제가 있다. 촌락제는 이(里)로 된 자연촌의 질서를 위해 행해진 행사로, 고려 때의 향도(香徒)에서 유래된 것이다. 향도는 고려 중기까지는 군ㆍ현 단위의 불교적 행사였으나, 고려 말기에는 규모가 이 단위로 축소되고, 신앙 대상도 자연촌의 수호신으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16, 17세기 향약의 실시는 이가 그 단위로서 촌락제의 대상만을 유교적인 것으로 교체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17세기 후반부터 자연촌 내부에 동성동본의 동족 촌락이 이루어지기 시작, 부계 중심의 혈연 의식이 고착되었다.

<이재룡>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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