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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3-28 (목) 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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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8959      
[조선] 조선 시대의 정치 2 (민족)
조선(1)(정치) 조선 시대의 정치 2

세부항목

조선
조선(1)(정치) 1
조선(1)(정치) 2
조선(1)(경제) 1
조선(1)(경제) 2
조선(1)(사회)
조선(1)(문화)
조선(1)(대외관계)
조선(1)(연구사)
조선(2)(1864년∼1910년대의 조선)
조선(2)(국제관계)
조선(2)(정치)
조선(2)(사회경제)
조선(2)(사상ㆍ종교)
조선(2)(역사적 성격)
조선(2)(연구사)
조선(2)(참고문헌)

(에서 이어짐)

4. 과거제와 학제

[과거제]

양반 관료의 등용에는 과거제가 매우 중시되었다. 과거에는 문관에 소과(小科)와 대과(혹은 문과), 무관에 무과, 기술관에 잡과가 있었다. 먼저 소과에는 유교의 경전을 시험보는 생원과(生員科)와 시(詩)ㆍ부(賦)ㆍ송(頌)ㆍ책(策) 등을 시험보는 진사과(進士科)가 있었는데, 이를 통틀어 생진과 또는 사마시(司馬試)라 하였다.

소과에는 초시(初試)와 복시(覆試, 또는 會試)가 있었다. 초시는 한성부와 각 도의 감영에서 주관하였다. 소과초시에 대행되는 것으로 서울에 승보시(陞補試)와 각 도에 공도회(公都會)가 있었다. 이들 시험에 합격한 자는 복시를 치르는데, 각 과에 100인씩 모두 200인이 뽑혔다. 합격자는 백패(白牌)라는 합격 증서를 받고, 생원ㆍ진사의 칭호와 함께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와 동시에 하급 관료가 되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 및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대과에는 생원ㆍ진사와 하급 관료가 응시하였다. 시험 과목은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 및 사장(詞章)이었다.

대과 역시 초시는 한성부와 각 도 감영에서 시행되고, 이에 대행되는 것으로 통독 (通讀)이 있었다. 대과복시에서 33인이 선발되고, 다시 전시(殿試)에서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으로 등급이 결정되었다. 대과 급제자에게는 홍패(紅牌)가 하사되었다. 갑과의 장원은 종6품, 을과는 정8품, 병과는 종9품으로 등용되었다. 기성 관료로서 장원한 자는 4등급, 을과는 2등급, 병과는 1등급씩 승진되었다.

무과에는 초시ㆍ복시ㆍ전시의 3단계가 있었다. 초시는 서울과 지방에서 각각 시행하였다. 복시는 서울에서 28인을 뽑고, 전시에서는 갑과 3인, 을과 5인, 병과 20인으로 등급이 결정되었다. 무과의 시험 과목은 궁술ㆍ창술ㆍ격구 등의 무예와 병서 및 유교 경전이 부과되었다. 무과 합격자는 선달(先達)이라 하고, 등용되는 품계는 문과의 경우와 같았다.

잡과에는 역과(譯科)ㆍ의과(醫科)ㆍ음양과(陰陽科)ㆍ율과(律科) 등 4과가 있었다. 잡과 합격자는 사역원(司譯院)ㆍ전의감(典醫監)ㆍ관상감(觀象監) 및 형조 등의 종7품 이하 기술관으로 채용되는데 모두 동반 체아직에 속하였다.

과거 중 매3년마다 자(子)ㆍ묘(卯)ㆍ오(午)ㆍ유(酉)의 해에 정기적으로 시행되는 것을 식년시(式年試)라 하였다. 임시로 시행하는 과거로는 국가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되는 증광시(增廣試), 임금이 친림하는 알성시(謁聖試)ㆍ춘당대시(春塘臺試), 절일에 시행되는 절일제(節日製) 등이 있었는데 선발 인원은 일정하지 않았다. 실제 문과 응시는 양반 자제에게만 허락되었고, 무과는 천인만을 제외하고 응시의 문을 넓혔다. 현직 관료의 문과 응시는 대과는 당하관 이하, 소과는 5품관 이하만 응시할 수 있고, 수령의 소과 응시는 금지되었다.

향리 억압책으로 향리의 과거 응시에는 많은 제약이 따랐다. 또 서얼이나 재가녀(再嫁女) 자손은 소과ㆍ대과의 응시가 허용되지 않았다. 양인의 응시를 제약하는 규정은 따로 없었으나 경제 사정이나 교육 여건, 그리고 신원보증서에 해당하는 보단자(保單子)의 제출 등으로 실제 응시는 어려웠다.

과거 제도와는 별도로 특정직임에의 임용 또는 승진을 위한 취재(取才)가 있었다. 문관으로는 수령의 선임, 경아전인 녹사(錄事)ㆍ서리(書吏)의 임용을 위한 취재가 있었다. 무관의 경우는 시취(試取, 역시 취재라고도 함.)는 무과 응시자격의 부여, 무과 합격자의 임관, 해직자의 재임용, 무록군관의 급여 등을 위한 시험이었다. 이 밖에 공신이나 당상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등용하는 음서(南行이라고도 함.)의 제도도 있었다. 음서에는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 임용되는 추천(推薦)과 유공자의 자손이나 궁정의 친척 등에게 관직이 주어지는 문음(門蔭)이 있었다.

[학제]

양반 관료제 하의 학문과 교육은 주로 양반 자제를 대상으로 관료를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다. 때문에 학교는 과거 준비기관이나 다름이 없었고, 따라서 교과 내용도 유학과 한문학이었다. 양반 자제들은 7∼8세가 되면 서당에 들어가 한자와 습자를 배우고, 15∼16세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사학(四學), 지방에서는 향교(鄕校)로 진학하였다. 사학과 향교에서 수년간 수학한 자는 소과에 응시하는 것이 상례였다.

최고 학부인 성균관은 대과의 준비기관이었다. 사학이나 향교를 거쳐 소과에 합격하면 성균관에서 다시 수학해 대과를 치러 고위 관직에 나가는 것이 정규 과정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성균관에는 생원ㆍ진사가 많았지만, 사학의 생도나 공신ㆍ훈신의 자제로서 입학 시험에 합격한 자, 현직 관료 중의 지망자들도 함께 수용, 문과 응시자격을 주었다. 성균관에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을 봉사하는 문묘(文廟), 학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생도의 숙사인 동재(東齋)와 서재,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과거장인 비천당(丕闡堂) 등이 있어 성현에 대한 경모와 강학의 기능을 겸하였다.

지방의 향교도 문묘ㆍ명륜당ㆍ재 등이 있어 성균관을 축소한 형태였다. 사학과 향교는 시대에 따라 쇠미해지고 사숙(私塾)인 서당 이외에 서원이 성해졌으나 성균관은 후기까지 국립의 최고 학부로서의 권위를 유지하였다.

서원은 성현을 봉사하는 사(祠)와 후학을 교육하는 재의 기능을 갖춘 점에서 향교와 그 기능이 비슷하였다. 서원의 기원은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이 고려의 명유 안향(安珦)의 고향인 영주 순흥(順興)에 세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이 서원은 뒤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李滉)의 건의로 1550년(명종 5)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최초의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사액서원이란 조정에서 칙액(勅額)과 함께 서적ㆍ노비ㆍ토지 등이 하사된 서원을 말한다.

그 뒤 서원은 각지에 설립되어 선조 때에 124개소이던 것이 숙종 때에는 한 도에만 80∼90개소나 되는 곳도 있었다. 그리하여 서원은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사림의 근거지로 화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무과 계통의 교육은 유교 경전과 병서 등 학술 이외에 무예를 닦아야 하는데도 특별한 교육기관이 따로 없었다. 훈련원에서 군사의 시재(試才), 무예의 연마, 병서의 습득을 실시하기는 했으나 곧 과거와 직결되는 교육 기관은 아니었다. 잡과계의 교육은 각기 그것을 담당하는 관서에서 맡아 가르쳤다. 즉, 역학(譯學)은 사역원, 의학은 전의감, 천문ㆍ지리ㆍ명과(命課, 또는 占卜)는 관상감, 산학(算學)은 호조, 화학(畵學)은 도화서, 도학은 소격서(昭格署) 등에서 담당하였다.

5. 군사 제도

[중앙의 군사 조직]

조선 초기의 군령기관(軍令機關)인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로, 다시 오위진무소(五衛鎭撫所)로 되었다가 1466년(세조 12)에 오위도총부가 되어 일단 정비되었다. 부대 조직도 처음의 10위(衛)에서 10사(司)로, 다시 12사로 바뀌고, 문종 때 5사가 되었다가 1457년에 오위제도가 정비되었다. 군사 기구 중 군령 계통은 중추부 계열, 오위도총부 계열, 병조 계열 등의 사이에 변동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1464년에 이르러 오위도총부가 병조의 지휘 밑에 들어가면서 병조가 군령의 최고 기관이 되고, 중추부는 실권 없는 기관으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서반으로 볼 때는 오위도총부가 실질적인 최고 관부가 되었다.

≪경국대전≫에 나타난 오위의 편제는 대체로 병종(兵種)과 지방 분담으로 구성되었다. 중앙군을 이루는 병종의 편제는 의흥위(義興衛)에 갑사(甲士)와 보충대(補充隊), 용양위(龍蚊衛)에 별시위(別侍衛)와 대졸(隊卒), 호분위(虎賁衛)에 족친위(族親衛)ㆍ친군위(親軍衛)ㆍ팽배(彭湃), 충좌위(忠佐衛)에 충의위(忠義衛)ㆍ충찬위(忠贊衛)ㆍ파적위(破敵衛), 충무위(忠武衛)에 충순위(忠順衛)ㆍ정병(正兵)ㆍ장용대(壯勇隊) 등이 소속되어 입직(入直)과 시위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편, 오위는 각기 지방의 병력을 분담, 관할하였다. 의흥위는 서울의 중부와 개성부 및 경기ㆍ강원ㆍ충청ㆍ황해도의 병력을 관할하고, 용양위는 서울의 동부와 경상도를, 호분위는 서울의 서부와 평안도를, 충좌위는 서울의 남부와 전라도, 충무위는 서울의 북부와 함경도의 병력을 각각 관할하였다. 또한, 오위의 각 위는 중ㆍ좌ㆍ우ㆍ전ㆍ후의 5부(部)로 나누어 전국의 진관(鎭管)을 망라한 지방 군사를 소속시켰다. 따라서 오위체제는 이중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중앙군을 망라한 구체적 부대 조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전국을 망라한 대열(大閱) 등 훈련 체제로서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

오위의 군계급과 정원 및 품계는 ≪경국대전≫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데, 이는 오늘날의 계급 개념과는 다른 것이었다. 즉, 상호군(上護軍, 정3품) 9인, 대호군(종3품) 14인, 호군(정4품) 12인, 부호군(종4품) 54인, 사직(司直, 정5품) 14인, 부사직(종5품) 123인, 사과(司果, 종6품) 15인, 부장(部將, 종6품) 25인, 부사과 (종6품) 176인, 사정(司正, 정7품) 5인, 부사정(종7품) 309인, 사맹(司猛, 정8품) 18인, 부사맹(종8품) 483인, 사용(司勇, 정9품) 42인, 부사용(종9품) 1,939인 등이 그것이다.

서반의 군직은 거의 서반 체아직이었다. 그것도 그나마 갑사(甲士)ㆍ별시위ㆍ족친위ㆍ친군위ㆍ충의위ㆍ충찬위 등의 병종에만 주고, 충순위ㆍ정병ㆍ파적위ㆍ보충대 등의 병종에는 주지 않았다. 팽배ㆍ대졸ㆍ장용위 등의 병종에는 서반 잡직 체아직을 주었다. 한편, 서반 체아직은 오위의 병종이 아닌 선전관ㆍ겸사복(兼司僕)ㆍ내금위(內禁衛)ㆍ취라치(吹螺赤)ㆍ태평소(太平簫)ㆍ파진군 등의 병종과 군병이 아닌 여러 잡직에도 주었다. 오위의 상하 조직과 각 지휘관은, 위(衛, 衛將)―부(部, 부장)―통(統, 통장)―여(旅, 旅帥)―대(隊, 隊正)―오(伍, 伍長)―졸(卒) 등과 같았다.

위는 5부, 부는 4통, 통은 약간의 여, 여는 5대, 대는 5오, 오는 5졸과 같이 대체로 다섯씩을 묶어 올라가는 편제로서, 이것은 진법(陣法)을 바탕으로 하는 군사 조직이었다. 그러나 오위제도는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해이해져서 정작 왜군이 침입했을 때는 무력함을 드러내었다. 때문에 왜란 중에 포수(砲手)ㆍ사수(射手)ㆍ살수(殺手) 등 삼수병(三手兵)이라는 특수 부대를 훈련, 양성하는 훈련도감(訓鍊都監)이 신설되었다. 이것은 명나라의 척계광(戚繼光)이 ≪기효신서 紀效新書≫라는 병서에서, 왜구 방어를 위해 절강군(浙江軍)의 병술로 개발한 것을 본받은 것이었다.

그 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서울과 경기 지방의 경비 강화를 위해 총융청(摠戎廳)을 두어 남양ㆍ수원ㆍ장단 등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고, 경기 안의 속오군(束伍軍) 중 용맹한 자를 뽑아 이 군영에 배속시켰다. 그리고 인조 초에 남한산성을 쌓고 1626년(인조 4) 그 안에 수어청(守禦廳)을 신설, 광주(廣州)와 그 인근의 여러 진을 경비하게 하였다. 1652년(효종 3)에는 어영청(禦營廳)을 신설, 총포병과 기병(騎兵)을 주로 하는 부대를 편성하였다. 또, 1682년(숙종 8)에는 도성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해 금위영(禁衛營)을 신설하였다. 이상의 훈련도감을 비롯해 총융청ㆍ수어청ㆍ어영청ㆍ금위영을 5군영(五軍營)이라 하고, 주로 서울과 경기 지방의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즉, 중앙의 오위군제가 후기에 이르러 오군영제로 바뀐 것이다.

[지방의 군사 조직]

지방의 군제는 진관체제(鎭官體制)였다. 즉, 각 도의 병마절도사와 수군절도사가 있는 곳을 주진(主鎭)이라 하고, 그 아래에 몇 개의 거진(巨鎭)을 두었다. 그리고 그곳에 절제사 및 첨절제사를 두어 각각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거진 아래의 제진(諸鎭)은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ㆍ만호(萬戶)ㆍ절제도위(節制都尉)가 이를 관장하였다.

병마절도사는 약칭으로 병사(兵使)라 하며, 경기도ㆍ강원도에는 각 1인을 두어 관찰사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충청도ㆍ전라도ㆍ황해도ㆍ평안도에는 각 2인을 두어 그 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또 하나는 전임의 병사를 두었다. 경상도ㆍ함경도에는 각 3인을 두어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 2인은 전임 병사를 두었다. 수군절도사는 약칭으로 수사(水使)라 하며, 강원도와 황해도에 각 1인을 두어 관찰사에게 겸임시켰다. 평안도에는 2인, 함경도에는 3인의 수사를 두었는데, 그 중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는 병사가 겸임하였다.

경기도와 충청도에는 각 2인, 경상도와 전라도에는 각 3인의 수사를 두었는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임하고, 나머지는 전임 수사를 두었다. 관찰사가 겸임한 병사를 겸병사(兼兵使)라 하였다. 관찰사와 병사와의 관계는 직품이 함께 종2품이었으나, 관찰사는 행정권ㆍ사법권을 가지고 있으며, 흔히 직품 이상의 고관이 임명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자연히 겸병사는 단병사보다 우위였다. 수사의 경우는, 수사의 직품이 정3품으로 관찰사보다 낮았으므로 관찰사가 겸임하는 수사에 비해 단수사의 지위는 더욱 낮았다. 거진의 절제사ㆍ첨절제사나 제진의 동첨절제사ㆍ만호ㆍ절제도위 등은 거의 각 지방 수령이 겸임하였다.

중종 때 이래로 해이된 진관 체제를 보강하는 방안으로 제승방략(制勝方略)이라는 분군법(分軍法)이 시행되었다. 이것은 유사시에 각 고을의 수령이 소속 군사를 이끌고 본진을 떠나 배정된 방어 지역으로 가서 싸우는 제도이다.

[군역 제도]

조선 시대의 병종은 특권층 자제에게 특전을 주어 편성된 병종, 무예의 시취(試取)로 선발된 직업 군인, 양인의 의무 병역 등으로 크게 분류된다. 특권층 자제의 병종은 왕실의 먼 친척, 대신의 자제, 공신의 자손 등으로 구성된 족친위ㆍ충의위ㆍ충찬위ㆍ충순위 등으로서 처음부터 군사력을 기대하지 않은 것이었다.

무예시취로 뽑은 갑사ㆍ별시위 등의 병종은 최고 정예군으로서 서울의 시위와 평안도ㆍ함경도의 변경 수비를 담당하는 기간 병력이었다. 여기에는 무예에 뛰어난 양반 자제도 많이 소속되어 있었다. 팽배ㆍ대졸ㆍ장용위 등도 시취로 뽑힌 병종이지만, 처음에는 양인층의 병종이다가 나중에는 천인층의 병종으로 변하였다.

양인의 의무 병역에는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이 있었고 전체 병력의 8할을 차지하였다. 양인의 의무 병역은 16세에서 60세에 이르는 정남(丁男)이 그 대상인데, 직접 병역 의무를 지는 자를 호수(戶首) 또는 정군(正軍)이라 하였다. 그리고 호수가 군역을 수행하는 데 경비를 뒷바라지하는 자를 봉족(奉足) 또는 보인(保人)이라 하였다. 당시 군역에 필요한 재정 부담은 군역자 각자가 자변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봉족제는 고려의 양호제 (養戶制)를 계승한 것으로, 1464년(세조 10) 보법(保法)으로 개편되었다. 봉족제에서 호(戶) 단위이던 것이 보법에서는 인정(人丁) 단위로 개편되어 2인의 정남, 즉 2정이 1보(保)로서 군호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봉족제는 호 단위였으므로 유력자는 한 가호 안에 수십 명의 솔정(率丁)을 가지는 폐단이 있었다. 보법으로의 개편은 이러한 은익솔정을 추쇄(推刷)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각 호의 솔정을 모두 군역 대상으로 편성하고 말았다. 또, 보법의 시행으로 노자(奴子)도 반정(半丁)으로 치고, 보인의 보포(保布)는 매월 포 1필 이하로 규제하였다. 그러나 보법은 호와 유리된 것이어서 뒷날 군역제도 붕괴의 요인이 되었고, 보포도 규제 이상으로 수탈당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더욱이 보인으로 정군을 대립(代立)시키는 경우도 많아, 부강한 호수 대신 빈약한 보인만이 군역을 담당하게 되어 군역제도의 기반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원래 군역의 부과는 요역과는 별도였다. 그러나 성종 이후 군역의 요역화 현상이 나타나고 방군수포(放軍收布)가 성행하면서 군역제도가 더욱 문란해졌다. 조선 후기에는 의무 병역 제도가 무너져 점차 모병제(募兵制)로 바뀌어졌고, 지방에서는 사노비까지 징발해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6. 사법 제도

[사법 기관과 형벌]

조선 시대는 행정과 사법이 분명히 구분되지 않아 관제 상 그 한계가 모호하였다. 중앙에서는 형조ㆍ의금부ㆍ한성부ㆍ사헌부ㆍ장례원(掌隷院) 등이 각각 사법권을 행사했고, 지방에서는 관찰사와 수령이 각각 그 관할 구역 안의 사법권을 가졌다. 그러나 본연의 의미로의 사법기관은 형조와 의금부뿐이었다. 형조는 사법의 감독 기관인 동시에 복심(覆審)의 재판기관이기도 하였다. 의금부는 왕명을 받아 특수 범죄를 다루는 특별 재판 기관으로서, 왕족의 범죄, 국사범ㆍ반역ㆍ모역 등 큰 옥사, 강상(綱常)의 죄, 오래 판결하지 못한 사건, 사헌부가 탄핵한 사건 등을 다루었다.

한성부는 서울의 일반 행정과 함께 경찰 업무를 맡는 동시에 전국적으로 토지ㆍ가옥ㆍ묘지 등의 소송을 담당하였다. 형조ㆍ의금부ㆍ한성부를 통틀어 삼법사(三法司)라 하였다. 사헌부는 규찰과 탄핵 등 감찰 업무를 맡았고, 장례원은 노비에 관한 문서와 소송을 맡았다. 감옥으로는 전옥서(典獄署)가 있고, 경찰로는 중앙에 포도청(捕盜廳), 지방에 진영장(鎭營將)이 겸하는 토포사(討捕使)가 있었다. 그리고 위법자를 직접 체포, 구금할 수 있는 기관을 직수아문(直囚衙門)이라 하였다. 즉, 병조ㆍ형조ㆍ한성부ㆍ사헌부ㆍ승정원ㆍ장례원ㆍ종부시 (宗簿寺)ㆍ관찰사ㆍ수령은 피의자를 직수할 수 있고, 그 밖의 각 사(司)나 각 군문(軍門)은 형조에 통고한 뒤에 구금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형벌은 ≪대명률 大明律≫에 따라 사(死)ㆍ유(流)ㆍ도(徒)ㆍ장(杖)ㆍ태(笞) 등의 5종이 있었다. 사형에는 교(絞)와 참(斬) 외에 사약(賜藥)이라는 독살, 육시(戮屍)ㆍ능지(凌遲)라는 사체 절단 등 극히 잔인한 방법도 있었다. 유형은 유배지의 원근으로 형의 경중을 구분하는데 정치범에 많이 적용하였다. 유형에는 배(配)ㆍ찬(竄)ㆍ적(謫)ㆍ유(流)ㆍ방(放)ㆍ천(遷)ㆍ사(徙) 등 용어가 있어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유배지로는 육지에서 먼 섬이나 북경(北境)ㆍ남해안 등이 보통인데 때로는 경기 등 가까운 곳으로 정해지기도 하였다. 도형(徒刑)은 먼 곳에 있는 염장(鹽場)ㆍ철소(鐵所) 등에 보내 중노동에 복역시키는 것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별로 많지 않았던 듯하다. 장형에는 60도(度)부터 70ㆍ80ㆍ90ㆍ100도의 구분이 있고, 태형에는 10도부터 20ㆍ30ㆍ40ㆍ50도까지 있어 정해진 도수를 때린 뒤 방면하였다.

[법률과 소송]

형벌은 ≪경국대전≫ 형전조(刑典條)에 따랐으나, 이는 ≪대명률≫을 참고해 제정한 것이므로 원칙적으로 ≪대명률≫의 내용과 대동소이하였다. 형사 소송에 있어 각 아문은 태 이하의 죄를 직결할 수 있고, 형조와 관찰사는 유 이하의 죄를 직단(直斷)할 수 있되 그 이상의 중죄는 각각 상급기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였다. 사형은 서울이나 지방을 막론하고 의정부에 보고해 형조가 재심한 뒤 다시 국왕에게 보고하고, 의금부에서 3심(三審)하는 절차를 밟았다.

재판에 불복이 있을 때, 절박한 사건이면 즉시 다른 기관에 갱소(更訴)할 수 있었다. 일반 사건은 그 재판을 담당한 관리가 바뀐 뒤 2년 이내에 갱소할 수 있었다. 이 갱소는 중앙은 주장관(主掌官)에게, 지방은 관찰사에게 상소하였다. 만일 거기서도 불복이 있으면 의금부의 신문고(申聞鼓)를 쳐서 국왕에게 직소할 수 있었다. 장(杖) 이상의 범죄는 수금(囚禁: 구속)하되 신분에 따라 구속 절차에 경중이 있었다. 단죄(斷罪)의 증거로는 피의자의 자백을 가장 중시하였다. 자백을 받기 위해서는 신체적 고문이 공인되었다. 서민 및 도죄(盜罪) 이외의 고문은 상사의 지휘를 받아서 하였다. 살인사건은 ≪무원록 無寃錄≫을 전거로 검시(檢屍)하였다.

범죄 심리에는 죄질의 경중에 따라 결옥일한(決獄日限)이라는 기한의 제한이 있었다. 즉, 사형 등 대사에는 30일, 도(徒)나 유(流) 등 중사에는 20일, 장(杖)이나 태(笞) 등 소사에는 10일을 일한으로 하였다. 민사는 일정한 성문 규정이 드물었으므로 대개 관습에 따랐고, 분규의 해결도 대개 행정관의 재량에 맡기는 일이 많았다. 친족 등 가족제도에 관한 일은 유교의 예법이 그 기초가 되었다. 상속은 봉사(奉祀)의 계승을 중시해 ‘입후(立後)’의 관습과 법규가 발달하였다.

물건의 등기, 토지ㆍ가사(家舍) 및 노비의 매매는 100일 이내, 상속은 1년 이내에 하도록 되어 있었다. 민사의 소송은 원고와 피고가 각각 증빙문서를 제출하고, 쌍방이 재판정에 함께 출두해 구두로 변론하되 그 기한을 정하였다. 판결의 확정 과정에서 동일 사건을 다른 기관으로 옮기면서 세 차례까지 소(訴)를 올릴 수 있으나, 송사(訟事) 중 2차 패소한 것은 다시 소를 올릴 수 없었다.

<이재룡>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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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