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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3 (목) 08:33
분 류 사전3
ㆍ조회: 820      
[고대] 삼국시대의 사학 (민족)


세부항목

사학
사학(삼국시대-역사적 자각과 역사기술)
사학(통일신라시대-통일기의 역사의식과 그 성과)
사학(고려-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
사학(조선 전기-객관적 역사인식과 주관적 역사체계)
사학(조선 후기-전통의 역사와 각성의 역사)
사학(과도기의 역사학)
사학(근대민족주의 사학)
사학(근대사학의 분화)
사학(광복 직후의 역사학)
사학(식민주의사학의 극복)
사학(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의 모색)
사학(참고문헌)

어느 민족이나 그 나름의 전승이 있다. 문자가 생활화된 뒤에도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문자 생활이 시작되기 이전의 경우가 많다. 그 전승은 구비(口碑)로 전달되게 마련이었다. 민족의 조상·영웅들의 행적과 계보(系譜) 등에 관한 신화·설화 등이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 뒤 국가가 이룩되고 발달하며 문자 생활이 시작되면서 종래 전승되어오던 신화·설화 또는 국가를 지배하는 왕족의 계보와 행적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은 기록만으로 역사서가 성립된다고 보지 않는다. 여기에서 역사 서술의 자료가 되는 기록을 사학사의 범주에서 도외시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과 역사서의 관계는 모호한 점이 적지 않다. 고대 사회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여기에서 고대 사회의 경우는 어떤 형식이 되었든 기록도 사학사의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한국사학사에서는 역사 편찬의 시기를 삼국시대 중기 이후로 잡는 것이 일반론이며, 이것은 이미 ≪삼국사기≫에서 거론된 바 있다.

즉, 백제에서 근초고왕 30년(375) ≪서기≫가 편찬되었고, 신라에서는 진흥왕 6년(545) ≪국사≫가 편집되었으며, 고구려에서도 영양왕 11년(600) ≪신집 新集≫을 찬수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앞서 고구려에 ≪유기 留記≫가 있었으나 편집 연대가 불분명하다. 고구려에서 누군가에 의해 국 초에 편집되었다고 전하는 ≪유기≫ 100권은, 삼국 가운데 가장 일찍이 국가를 성립한 국가답게 일종의 역사적인 기록을 이루었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유기≫·≪서기≫ 등에서 사용한 ‘기(記)’ 또는 ‘서(書)’의 뜻이 모두 기록이라는 의미이고 보면, 고구려에서 고사(古史)를 요약해서 ≪신집≫ 5권을 만들었다는 사정과 신라에서 ≪국사≫를 편집했다는 상황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서’가 기록이라는 뜻 외에 어떤 왕조의 역사인 단대사(斷代史)를 뜻하는 경우가 있고 보면, ≪국사≫에서의 사(史)와 ≪신집≫의 의의로 미루어보아서 특히 ≪유기≫는 기록으로 볼 수 있다.

물론, 당시의 삼국에서는 국가발달 사정으로 보아서 백제의 근초고왕이나 신라의 진흥왕은 고구려의 광개토왕의 위치와 비슷한 시대였다.

국내적으로는 율령적(律令的)인 통치 체제가 이루어졌고, 대외적으로도 발전을 꾀하고 있던 시기였다. 여기에서 삼국은 공통적으로 왕실과 국가에 관한 전승적인 것이 신화였든 또는 계보였든간에 일단 기록을 남겼던 것이다.

나아가서 중국적인 영향에 의해서 일종의 역사서로서도 어떤 체재를 갖출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했다. 특히, 고구려에서의 ≪유기≫가 기록의 집성이라면 ≪신집≫은 어떤 이념과 체재를 가진 역사서였을 것이고, 신라에서의 ≪국사≫는 문자 그대로 신라의 역사 편찬이었다.

오직 백제의 ≪서기≫가 석연치 않지만 근초고왕 때의 발달 상황이나 삼국의 공통적인 여건으로 보아서 단순한 기록으로서만이 아니라 어떤 성격의 역사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사학사에서 삼국시대의 역사 편찬은 4세기 무렵부터 고조되기 시작한 국가 발전과 왕권의 신장에 부응한 역사적 자각의 발로임과 동시에, 당시의 문화적 측면을 대변해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역사서는 중국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한자의 수용과 같이 전래된 중국의 기록서인 ≪상서 尙書≫는 물론, 제자서(諸子書) 그리고 역사서인 ≪사기 史記≫·≪한서 漢書≫ 등의 영향이 없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이 서로 각축하면서 국가 발전을 꾀하고 그 상황을 자랑스럽게 기록으로 남겼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토대로 자기 나라의 역사를 기술했다는 일은 당연한 결과로 삼지 않을 수 없다.

오직, 삼국 초기의 상황이 불확실해 4세기 중엽까지의 공백이 그대로 메워지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자(漢字) 사용의 문제와 관계지어보면 삼국 초기에 역사서는 없었지만 숨겨진 어떤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그리고 이와 같은 어떤 기록은 고구려 초기의 ≪유기≫와도 같은 것이 백제에도 있을 수 있고 약간 늦게 신라와 가야에도 있었음직한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추측이 허락된다면 삼국은 문자 사용과 거의 같은 무렵에 기록물이 있었을 것이고, 우리 사학사의 상한선(上限線)도 훨씬 소급될 수 있을 것이지만 상고할 여지가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하여튼 삼국시대의 각 나라들은 국가적인 사업으로 역사가 편찬된 관찬물(官撰物)을 냈고, 그들 역사서의 성격은 전승된 신화·설화 혹은 왕실의 계보 등의 기록에서 출발해서 국가와 왕실의 위엄을 선양하고 국가 발전을 과시하기 위한 의도적인 편찬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는 이른바 백제삼서(百濟三書)도 도외시할 수 없는데, ≪백제기 百濟記≫·≪백제신찬 百濟新撰≫·≪백제본기 百濟本紀≫ 등이 그것들이다.

이들은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백제의 귀족들에 의해서 일본에 전해진 백제 관계의 역사물들이 일본에서 윤색, 개필된 것이다.

이들 백제삼서는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그 면모를 짐작할 뿐, 신빙성 역시 의심되는 바가 많지만, 백제 역사 편찬의 개연성을 보충해주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백제기≫를 위례시대(慰禮時代)의 역사서, ≪백제신찬≫을 웅진시대의 사서, ≪백제본기≫를 부여시대의 역사 편찬물로 추정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인용된 백제삼서는 상당량이 신빙성을 결여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참고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학사의 본령과는 인연이 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황원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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