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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3 (목) 10:39
분 류 사전3
ㆍ조회: 1007      
[현대] 광복 직후의 사학 (민족)
사학(광복 직후의 역사학)

세부항목

사학
사학(삼국시대-역사적 자각과 역사기술)
사학(통일신라시대-통일기의 역사의식과 그 성과)
사학(고려-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
사학(조선 전기-객관적 역사인식과 주관적 역사체계)
사학(조선 후기-전통의 역사와 각성의 역사)
사학(과도기의 역사학)
사학(근대민족주의 사학)
사학(근대사학의 분화)
사학(광복 직후의 역사학)
사학(식민주의사학의 극복)
사학(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의 모색)
사학(참고문헌)

앞에서 말한 한국 역사학의 큰 흐름은 1940년대에 이르면서 거의 학문 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는 이른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의 명분으로 한국에 대해 민족 말살책을 획책하며 군국주의 체제의 말기적 증상을 드러내었다.

한국사 연구 활동은 물론 한국사 교육이 금지되었고 한국어로 된 출판·언론도 정지되었다. 그런 추세 속에서 진단학회마저도 1943년 9월 강제 해산당하고 ≪진단학보≫ 또한 제14호로 중단당했다.

일제가 전시 체제를 강화하던 1930-40년대, 한민족은 자신의 언어와 문자 및 민족 문화의 정수(精粹)인 국사마저 완전히 잃어버릴 뻔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역사학은 오직 식민주의 사학을 통해 일제 강점이 정당하다는 것과 한민족은 자주 독립할 수 없다는 것만 강조했다.

1945년 광복은 노예 상태에 빠졌던 한민족에게는 일제의 쇠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었다는 기쁨과 민족 문화를 회복·재생해야 한다는 사명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광복 직후 역사학 연구를 위한 학술 단체가 재건, 설립되었다. 광복 이튿날 조선학술원과 진단학회가 각각 출현했는데, 백남운이 위원장으로 있던 조선학술원은 1946년 8월에 회지 ≪학술≫을 간행한 바 있고, 진단학회는 47년과 49년에 ≪진단학보≫를 간행했다.

1945년 10월에 탄생한 조선과학자동맹은 ≪과학전선≫과 ≪주보 민주주의≫를 간행했으며, 이 해 12월에 설립된 조선사연구회는 ≪사해 史海≫(1948.12)를 간행했고, 역시 1945년 12월에 설립된 역사학회는 학술발표회를 개최하면서 ≪역사학연구≫(1949.5)를 간행했다.

역사학회는 그 뒤 1952년에 재창건되어 ≪역사학보≫를 간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1946년에는 경성대학의 이인영 교수를 중심으로 조선사연구회가 결성되었고 같은 해 8월에는 ≪조선사개설≫을 간행하게 되었다.

이 밖에 신석호가 중심이 되어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를 수습해 1946년 3월에 국사관(國史館)을 설립하였는데, 정부가 수립되자 1949년 3월 국사편찬위원회로 확대 개편되었다.

광복 조국의 재건은 무엇보다 각 분야에 침투해 민족 정기를 흐리게 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러한 바탕 위에서 자주적 통일 국가의 수립과 반봉건적 민주 개혁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러한 민족적·민주적 사명은 역사학에도 부과되었다. 그것은 곧 일제의 식민주의적 역사인식을 철저히 청산하고 식민주의 사학과 깊이 유착되어 있는 사대주의적·봉건적인 역사의식을 타파해 자주적·민중적 역사학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광복 후의 역사학계는, 정국의 분열이나 사회의 분열에 영향을 받은 듯, 광복 정국의 시대적 사명을 인식하지 못한 채 일제하 역사학계의 조류를 답습하면서 분열 상태를 지속했다.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한 신민족주의 사학과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 사학 및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그것이다.

광복 직후 한때 가장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한 것은 민족주의사학이었다. 그것은 일제 잔재의 청산과 새 조국의 건설을 위해서 민족 의식이 강렬하게 고양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문제가 ‘민족’의 이름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다소 소박한 의식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제 강점 하에서 제대로 출간되지 못했던 민족주의 사학 계열의 역사서를 포함해 많은 국사 관계 책들이 간행되었다.

이 때에 신채호의 ≪조선상고사≫(1948)를 비롯해 박은식의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정인보의 ≪조선사연구≫(1947),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1948), 권덕규의 ≪조선사≫(1945), 장도빈의 ≪국사강의≫(1946), 그 밖에도 황의돈의 ≪조선역사≫, 최남선의 ≪조선역사≫, 고권삼(高權三)의 ≪조선정치사≫, 이선근의 ≪조선최근세사≫, 최익한의 ≪조선사회정책사≫, 홍이섭의 ≪조선과학사≫ 등이 간행되었다.

한편, 민족주의 사학은 이념적 측면이 신민족주의 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다. 신민족주의 사학은 안재홍·손진태(孫晉泰)·이인영 등이 일제 말엽부터 구상해온 것이다.

손진태에 의하면 “내가 신민족주의 조선사의 저술을 기도한 것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던 때부터였다. 동학(同學) 수우(數友)와 더불어 때때로 밀회해 이에 대한 이론을 토의하고 체계를 구상하였다.”는 것이다.

신민족주의 사학은 대내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해 민족 구성원인 사회 여러 계층의 대립을 해소하고 대외적으로는 민족간의 자주와 평등을 유지한다는 안재홍의 신민족주의 이념에 기초해 발전시킨 것이다.

손진태는 광복 정국에서 노출되고 있는 민족간의 갈등과 계급간의 투쟁을 지양하고 민족 균등과 계급 균등을 이룩하기 위해 그의 신민족주의사학을 출발시켰다.

신민족주의 사학을 구상한 손진태는 광복 직후 ≪조선민족문화의 연구 朝鮮民族文化의 硏究≫(1948)와 ≪조선민족사개론≫(1948) 등을 저술해 국사학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었으나, 6·25 때 그들 대부분이 납북됨으로써 민족주의사학의 학맥(學脈)은 잠시 끊어지게 되었다.

실증주의 사학은 광복 후 새로 설립된 대학을 중심으로 뿌리내리기 시작했다. 실증주의 사학자 대부분이 일제 하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데다가 학문의 가치 중립성을 내세우며 학문 연구 자체를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광복 후 일제의 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혼란기에 쉽게 대학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이 때 이병도·김상기·이상백·유홍렬 등이 서울대학교로, 신석호가 고려대학교로 진출해 근대적 학문 방법을 내세워 후진 양성에 노력했다.

남북의 분단과 갈등으로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이 연구의 장을 달리하게 되고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거의 납북되자 문헌 고증에 충실했던 실증주의 사학은 한때 남한의 국사학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개별적 사실과 역사 지리의 고증에 치중했던 이들의 역사인식에는 인간과 사회의 삶의 문제가 결여되어 있었고, 광복 정국이 요구하는 민족적·민중적 문제에 부응하려는 진지한 고민이 부족했다.

따라서, 문헌 고증학이 풍미하던 1950년대의 한국사학계는 통일 지향의 민족적이고 사회 개혁을 위한 민주적인 고민과 실천을 갖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주의 의식은 터부시되었고 극단적인 냉전 구조 속에서 ‘민족없는 역사학’만이 한동안 존재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분단사학’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광복 후 한 때는 민족주의 사학·실증주의 사학과 더불어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광복 직후 남북, 좌우의 분열·대립이 날카롭게 시작되고 있던 시기에 역사학 분야의 학문 활동은 그들의 이념적 입지를 선점(先占)하는 문제와도 직결되었다.

광복 직후 백남운은 조선학술원과 민족문화연구소 등을 창립하는 한편 박극채(朴克采)는 조선과학자동맹을 결성해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제반 학문 활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거점을 마련했고, 다수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이 여기에 참가했다.

그들은 새사회 건설에 필요한 실천적 변혁 이론을 창출하기 위해 사회 구조의 물적 토대의 역사를 다루는 사회경제사 연구에 주력하면서, 조선시대와 일제하의 사회 구조를 해명하는 저서들을 출간했다.

전석담(全錫淡)의 ≪조선사교정 朝鮮史敎程≫≪朝鮮經濟史≫, 이능식(李能植)의 ≪근대사관연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광복 직후 남쪽에서 활동하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은 냉전 체제가 강화되고 6.25 등으로 남북 분단이 현실화됨에 따라 대부분 월북해 연구의 장을 달리하게 되었다.

한편 광복 당시에 북한에 있었던 사학자는 1939년 보성전문학교를 사임한 뒤 평양에 왔던 김광진(金洸鎭) 뿐이었고, 역사 저술로는 1946년에 함흥에서 간행된 문석준(文錫俊)의≪조선역사≫(함흥인민출판사)·≪조선사연구≫(함흥인민위원회) 정도였다.

소련 군정 하에서 각급 학교의 교재가 당장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1947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이청원(李淸源)을 위원장으로 하는 임시력사편찬위원회를 설치하고 유물사관에 입각한 역사 연구를 서둘렀다. 그 때 나온 것이≪조선력사연구론문집≫이었다.

북한이 공산주의 체제로 굳어지면서 학문도 철저히 당과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관학 체제였다. 이 때문에 1948년 북한 정부가 수립되자 내각 결정으로 조선력사편찬위원회(위원장 白南雲)를 설치하고 ≪력사제문제≫를 기관지로 간행했다. 소련의 것을 본받아 간행된 북한의 ≪력사제문제≫에 실린 초기의 논문은 초보적인 유물 변증법 수준을 넘지 못했다.

또 북한은 무엇보다 그들의 정권을 역사적으로 변호하기 위해 이 무렵 ≪조선민족해방투쟁사≫를 서둘러 간행했다. 최창익·이청원이 편집을 주도했던 이 책은 김일성(金日成)투쟁사 뿐만아니라 연안의 독립동맹(위원장 金枓奉)과 조선의용군(사령관 金武亭)의 활약도 서술되어 있어서 북한 정권의 초기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만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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