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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3 (목) 10:53
분 류 사전3
ㆍ조회: 1259      
[현대]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 (민족)
사학(식민주의사학의 극복)

세부항목

사학
사학(삼국시대-역사적 자각과 역사기술)
사학(통일신라시대-통일기의 역사의식과 그 성과)
사학(고려-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
사학(조선 전기-객관적 역사인식과 주관적 역사체계)
사학(조선 후기-전통의 역사와 각성의 역사)
사학(과도기의 역사학)
사학(근대민족주의 사학)
사학(근대사학의 분화)
사학(광복 직후의 역사학)
사학(식민주의사학의 극복)
사학(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의 모색)
사학(참고문헌)

동서 냉전 체제하에서 일어난 6·25 동족상잔은 조국의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켰을 뿐 아니라 광복 후 한 때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던 한국사 연구에 일대 타격을 가했다.

대학교 등에서 한국사를 연구, 저술하던 사학자들이 자의적으로 연구의 장을 달리하거나, 아니면 납북되어 학문 풍토에 큰 혼란을 안겨 주었던 것이다.

종래 마르크스주의 사학에 종사하던 이들은 6.25를 전후하여 북한으로 옮겨 그 후 북한의 한국사 연구의 중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납북되어간 학인들은 그 뒤 거의 소식이 끊어진 것으로 보아 학문 활동은 더 이상 계속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납북된 인사들에는 민족주의 사학의 정인보·안재홍을 비롯해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새로운 학맥을 형성하면서 서울대학의 교수로 있었던 손진태·이인영도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흑백 논리의 강력한 재단성(裁斷性)으로 1950년대의 역사학은 전반적으로 ‘민족’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었다.

아직도 민족 문제를 역사학에 반영하지 못한 채 경색된 분위기를 유지할 수 밖에 없었던 역사학계는 6·25 전 신민족주의 사학의 손진태·이인영의 지도를 받은 바 있는 신진학자들을 중심으로 1952년 기존 학계를 비판하면서 진단학회와는 별도로 역사학회(歷史學會)를 창립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적인 움직임도 광복 후 당위적인 과제라 할 식민주의 사학을 청산하고 냉전 체제하의 분단 구조를 극복하는 학문적인 방향을 정립하는 데는 오랜 시간을 요했다.

반면, 진단학회를 중심으로 한 기존의 학계는 그들의 문헌 고증학의 학문적 성과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완성했다. 이것이 미국의 출판비 원조로 이룩된 진단학회의 ≪한국사≫(1959) 7권이었다.

≪한국사≫는 진단학회의 이병도·이상백·이선근이 중심이 되고 몇몇 소장학자들이 도와 집필된 것으로, 일제하에서 광복 후 냉전 시대에 이르는 실증주의 역사학을 총정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1960년의 4·19혁명은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여러 분야에 새로운 민족주의 운동을 가능하게 했다. 대내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혁명은 대외적으로 조국 분단을 실감케 하면서 민족적 과제로서의 통일을 인식하게 하였으며, 냉전 체제하에서 민족의 자주를 비로소 각성하도록 했다.

아울러 일제 강점의 결과로서 재래된 민족 분단이 지속되는 한, 일제의 잔재는 아직도 청산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여기서 비로소 일제 잔재 청산의 과제를 역사학에 적용하려는 의식을 갖게 되었고 그러한 역사의식이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라는 새로운 과제를 수렴하게 되었다.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라는 과제는 사회경제사학의 학맥에서 먼저 인식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세계사의 보편적 법칙을 근거로 한국사의 발전과 전개를 조망했기 때문에 일찍부터 정체성 사관의 극복에 앞장서고 있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과는 달리 남한에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론을 극복하게 되는 시도는 4.19 후 1960년대라고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은 일제의 어용 관변학자들이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안출한 사학으로서,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근간으로 하고 일선동조론 등이 가세하고 있었다.

식민주의사학의 극복이란 바로 한국사의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타파하고 자주적인 한국사를 건설하는 데에 역점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남쪽에서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하는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이다. 4.19 혁명이 일어난 후 1961년에 간행된 이기백(李基白)의 ≪국사신론 國史新論≫이 이전부터 간간히 제기되어 왔던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비판을 본격화했다.

이기백이 ≪국사신론≫의 서론에서 일제 식민주의사관(반도적 성격론·사대주의론·당파성의 문제·문화적 독창성의 문제·정체성의 이론)을 비판하고 나선 것은 사학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국사신론≫은 식민주의 사관을 타파하는 한편, 그와 음성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비판받고 있는 종래의 문헌고증 사학을 극복하면서 우리 나라 역사학을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개안(開眼)하게 했다.

식민주의사학에 대한 비판은 주로 식민주의 사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타율성이론과 정체성 이론을 근간으로 만선사관(滿鮮史觀)과 사대주의론, 당파성 등에 이르는 광범한 것이었다.

먼저 타율성 사관에 대한 비판은 이미 민족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분단고착 후 북한에서도 주체 사상이 강조되면서 대일(對日)·대중국 관계사를 자주적인 시각에서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종래 한말 일제 하의 민족주의 사학은 주로 고대사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를 통해 타율성사관을 극복하려 하였다. 북한의 사학에서도 고조선사 연구와 고대 한일관계사의 연구에서 이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다.

특히 북한 사학의 고대 조일(朝日)관계사 연구와 관련, 〈삼한 삼국의 일본열도분국론〉을 비롯해 ≪고대조일관계의 연구≫등은 주목할 만하다.

북한사학의 고대 한일관계사 연구는 바로 일본 열도의 고대 국가 형성이 삼한 삼국 세력의 진출에 의한 것임을 입증하려는 최초의 역작들이었다.

주목되는 점은 1960년대에 이르러, 북한 사학에서 대외 민족주체성을 강조하면서, 신채호 등 민족주의 사학의 고대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신채호·정인보의 고대사 인식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민족주의 사학을 비과학적 특수사관이라고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으나, 민족 주체성이라는 명제 하에서 북한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민족주의 사학에 접근해갔던 것이다.

4·19 이후 고양된 민족주의 사상은 사학계에 식민주의 사관에 대한 비판을 가열시키는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는 일제 하의 민족주의 사학을 재인식하도록 분위기를 몰아갔다. 한말 일제 하의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와 박은식 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이러한 추세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들의 유고(遺稿)들이 전집 형태로 정리, 출간되었고 이들에 대한 사학사적 검토가 이루어졌다. 신채호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결적인 성격을 띠면서도 문헌고증의 방법론을 중시해 한국고대사 인식에서 특출한 연구 성과를 드러냈다.

그의 역사학 이론이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고대사 인식은 그 뒤 한국사의 주체적이고 강건한 역사상을 심는 데에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이와 함께 한국 고대사의 주체적인 인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1960년대부터 남북한에서 발굴되기 시작한 고고학적 성과와 고대사 인식의 인류학적 접근 등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이로써 한국사는 구석기시대를 영역으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한편 민족주의 사학 계열인 박은식의 ≪통사 痛史≫와 ≪혈사 血史≫도 근현대사에 접근하기 위해 꼭 거쳐야 할 업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식민주의 사학의 정체성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은 북한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북한 사학의 주류인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우선 사회경제사 연구에 주력하면서 한국 사회경제의 발전 단계를 세계의 보편적인 역사 발전의 틀에 따라 규명하려고 노력해 왔다.

북한 사학의 연구의 성과는 ‘시대구분론’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역사 발전의 단계를 ‘시대구분론’에 의해 설정하고 그 틀에 맞춰 사회 발전의 제 단계를 설명해 왔다.

그들이 설정해 놓은 시대구분론은 경제와 사회의 발전 단계를 종합한 것으로, 세계사가 원시 공산사회, 고대 노예제사회, 중세 봉건제사회, 근대 자본주의사회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론에 따르면, 20세기 초의 한국사의 발전 단계는 아직 중세 봉건제 단계에도 미치지 못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정체성론에 의하면 한국사는 아직 자본주의 단계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북한의 사회주의 국가 건설은 정체성론을 그냥 두고서는 논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북한 역사학은 정체성론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그들의 사회주의 정권 출현의 정당성을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 사학이 정체성론 극복에 매달리게 된 것은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성격에 기인한 바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회주의 정권 출현의 역사적 필연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사학의 시대구분론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한편, 분단시대의 남한 사학계에서도 사회경제사학을 발전시켜 최근 민중사학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발전했다. 일제 때 사회경제사를 연구하던 마르크스주의사학자들이 6·25를 전후해 연구의 장을 달리한 뒤 남한에서는 한동안 문헌 고증학의 독무대가 되어 사회경제사 연구가 부진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 초 전국역사학대회 등을 통해 실학 연구를 본격화하면서 조선 후기 봉건체제 해체론과 자본주의 맹아론이 함께 논의되었다.

이 때 논의된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적 발전 단계는, 농업 분야에서는 농업 기술의 변화로 대농경영과 상업적 농업이 가능해졌으며, 상업 분야에서는 화폐의 전국적인 유통과 조세의 금납화, 장시(場市)의 발전과 지역 상권(商圈)의 형성, 도고(都庫)상인의 발달과 거대한 상업 자본이 형성되었다.

수공업 분야에서는 장인들이 국가적 지배에서 벗어나고 매뉴팩쳐 단계의 산업화가 이루어졌으며, 광업에서는 자본과 기술이 분리되고 19세기초에는 수천 명을 고용하는 광산이 생기게 되었다.

신분 제도와 관련해서는 납속책(納粟策) 등으로 교지(敎旨)가 남발되고 호적과 족보를 통해 양인(良人)화 현상이 빈발하면서 신분제의 붕괴 현상이 가속화되었다.

이같이 사회경제사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이를 종합하는 의도에서 1967년 한국경제사학회가 중심이 되어 ‘한국사의 시대구분 문제’의 심포지엄을 가졌고, 뒤이어 그것을 정리해 ≪한국사시대구분론≫(1970)이라는 책자를 간행했다.

이 책자에는 사회경제 사학자들의 견해만 수용된 것이 아니고 다른 각도에서 한국사의 시대구분을 고민하는 분들의 견해도 반영되어 있어서 시대구분을 보는 다양한 기준들이 제시되었다.

예를 들면 사회 발전단계·민족의 성장 과정·지배 세력의 변화 등에 의한 한국사의 시대구분들이 제시되어 있어서, 북한처럼 토론을 통해 하나로 정리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다양한 견해들이 최초로 토론의 장을 마련하게 된 것은 그 뒤 이 방면의 연구를 위해서 퍽 유익했고 이러한 연구 과정을 통해 정체성론은 이론적으로 극복되어 갔다.

<이만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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