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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3 (목) 10:53
분 류 사전3
ㆍ조회: 846      
[현대] 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 (민족)
사학(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의 모색)

세부항목

사학
사학(삼국시대-역사적 자각과 역사기술)
사학(통일신라시대-통일기의 역사의식과 그 성과)
사학(고려-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
사학(조선 전기-객관적 역사인식과 주관적 역사체계)
사학(조선 후기-전통의 역사와 각성의 역사)
사학(과도기의 역사학)
사학(근대민족주의 사학)
사학(근대사학의 분화)
사학(광복 직후의 역사학)
사학(식민주의사학의 극복)
사학(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의 모색)
사학(참고문헌)

앞에서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 과정에서 민족주의사학이 재발견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했거니와, 식민주의사학의 극복되는 분위기에서 한국사의 자주적·발전적 인식이 점증되어 간 것은 자연스러웠다.

우선 1962∼63년부터 남북한에서 활발하게 고고학적 발굴 사업이 진전되어 우리 역사의 상한선을 상향 조정할 수 있게 되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가장 괄목할 것은 남북한에서 구석기시대 문화가 발굴되었다는 점이다. 웅기 굴포리유적과 공주 석장리 유적이 60년대 중반 거의 같은 시기에 발굴되어 한반도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었다.

이것은, 1930년대 후반 동관진(潼關津) 유적에서 일부 유물이 구석시대의 것이라는 추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고려 때문에 흐지부지된 이후 한국 고고학이 세운 쾌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뒤 이어서 상원 검은모루 유적, 제천 점말동굴 유적, 제주 빌레못동굴 유적, 전곡리 유적 등이 확인되면서 한반도에는 구석기시대의 유적·유물이 많이 발굴되었고 상한선도 60만년 전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고고학적 발굴은, 종래 청동기시대의 독자적 존재 가능성을 부정해 온 학문적인 풍토를 변화시켜, 금석병용기 대신 독자적인 청동기시대를 설정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석기·청동기와 동시에 출토되는 토기를 통해 문화적 성격을 규명하고 시대구분과 민족 구성 문제를 규명하게 되었으며 아울러 고조선에 대한 역사적 성격을 천착하게 되었다.

분단시대 남북한에서 거둔 성과는 간단하게 말할 수 없다. 삼국시대 이전의 사회발전론(예를 들면, 부족 국가론과 성읍 국가론 혹은 군장 사회론 등)과 지명 이동설에 근거한 삼한(三韓)의 이해, 중세의 토지제도사 연구와 나말 여초의 사회 변동, 고려시대의 사회성격 문제와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의 등장, 실학 연구와 그와 함께 제기된 조선 후기 봉건제 해체론과 자본주의 맹아론, 근대의 기점(起點) 문제와 그와 관련된 한국사 시대구분론 등의 연구 업적들이 한국사의 내재적 발전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국사 연구의 독자적 업적들이 가시화되면서 이를 더욱 전문적 영역과 방법론으로 발전시키고자 1967년에 한국사 연구자들에 의한 ‘한국사연구회’가 조직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역사학계가 실천적 과제들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채 분단 사학의 한계를 노출하고 있을 때, 우리 사회는 산업화의 단계를 들어서는 한편 유신 체제를 맞게 되었다.
유신 체제와 제4공화국의 ‘민족적 민족주의’하에서 제국주의 역사인식으로 비판받는 문화주의 역사관과 근대주의 역사관이 이식되었다.

전자가 남한의 문화사적 정통성을 확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다면, 후자는 조국 근대화를 앞세운 제4공화국의 경제개발정책을 합리화하는 데에 관련되었다고 지적된다.

1970년대 이후의 독재 체제와 관련해 주목되는 점은, 국수주의에 가까운 민족 지상주의와 민족(주체)사관을 강력하게 내세우며 기존의 사학계를 식민주의 사학으로 매도하는 일군의 재야사학(在野史學)이 등장했다.

한편, 정부에서는 국사교과서의 국정화, 입시·관리임용 시험 및 대학 교양과정에서의 ‘국사’의 필수과목화 등을 정책화했다.

국사교육 강화 정책은 국사학을 체제 옹호에 이용하려 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는 했으나, 한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의 저변을 확대시킨 일면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사편찬위원회는 민족(주체)사관에 입각하여 1973년부터 몇 년에 걸쳐 ≪한국사≫ 25권을 완성했는데, 이는 진단학회 편찬의 ≪한국사≫(7권) 이후의 학계의 연구 업적을 총정리하는 성격도 띠고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남북한에서 괄목할만한 업적을 이룩한 것은 사회경제사학 및 그와 관련된 시대구분론이다. 북한 사학은 원래 일제 하에서 발전했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계승하여 발전한 것이다.

사적유물론을 중심으로 한 그들의 사회경제사연구는 한국사의 전체적인 발전상을 체계화하는 시대구분론으로 연결되었다.

시대구분론은 역사발전 단계에서 북한 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학문을 정치에 예속시키고 있는 북한의 정치적 요구와도 직접적 관계를 맺으며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1956년 ≪조선통사≫(상·하)를 간행하기 시작한 북한 사학계는 1962년 ≪조선통사≫의 개정판을 내면서 시대구분론을 공식적으로 정리했다. 즉, 고조선을 노예제 사회로, 삼국에서 1866년까지를 농노제 사회로, 그 뒤 1945년까지를 자본주의 사회에 상응하는 식민지반봉건사회로, 그 이후를 사회주의 사회로의 발전기로 각각 규정했다.

그 뒤 1979∼1982년에 걸쳐 ‘주체사관’에 입각, 한국사의 전체계를 정리해 33권의 ≪조선전사≫가 간행되었다. 주목할 것은 ≪조선전사≫에 들어서서 종래의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분기점을 변화했다는 것이다.

≪조선전사≫에 의하면, 원시사회는 기원전 60만년 내지 40만년 전에서 기원전 10세기까지로 보되, 기원전 5천년까지는 구석기시대, 기원전 2천년까지를 신석기시대, 기원전 1천년까지를 청동기시대로 잡았다.

고대사회는 기원전 10세기에서 기원 후 1세기까지로 잡았는데, 이 때 노예제 사회인 고대국가로서 고조선·부여·진국이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중세사회는 기원 후 2세기부터 1860년대까지로 잡았는데, 이 때 중세 봉건국가로서 고구려·백제·신라가 출현하고 발해·고려·조선을 거쳐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 단계가 태동하는 것으로 정리했다.

근대사회는 1860년대에서 1926년의 ‘타도제국주의동맹’에 이르기까지로 잡았는데, 이 때는 반침략·반봉건의 부르조아 민족운동기로서 개화·갑신정변·갑오개혁·애국문화운동·3.1운동으로 진전되며, 민중이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이 있었다고 한다.

현대사회는 1926년부터 현재까지로 잡고, 그 기간을 김일성 중심의 무장항일 투쟁사와 사회주의 건설사로서 메꾸었던 것이다.

이렇게 광복 후 남북의 역사학은 식민주의 사학의 극복이라는 공통된 명제를 두고 그 중요한 요소라 할 정체성론과 타율성론을 타파하는 등 독립된 민족이 건설해야 할 역사학을 수립하기에 나름대로 노력했다.

그러나 남북의 역사학은 역사학의 기본 임무에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고,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역사관이나 방법론, 시대구분론과 시대사 및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 등에서 시각을 달리하는 부분이 많았다.

가장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은 독립운동사를 비롯한 민족운동사 부분이었다. 남북한의 근·현대사는 그야말로 현격한 차이를 보였던 것이다. 여기에서 남북의 분단이 분단사학을 재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10·26으로 유신정권이 무너지고 제5공화국에 이르자, 한국사 연구는 자주·민주·통일의 민족적 과제와 연결, 학문적·실천적 움직임을 다양하게 전개할 수 있게 되었다.

1980년대에 이르러 한국사 연구는 사회 변화의 역동성에 힘입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대별·분야별 연구 활동을 위한 학회의 결성이 활발했다. 한국고대사연구회·한국근현대사연구회·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한국사상사학회·한국역사연구회·한국교회사연구소·역사문제연구소 등이 1980년대에 창립되었으며, 이 밖에도 많은 연구기관들이 학문의 분야와 학문 활동 지역을 중심으로 창립되었다.

이 중 대부분은 학술지를 간행하면서 연구 발표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이들 연구 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공동 연구는 종래의 연구 형태를 크게 변화시키고 있다.

둘째, 역사학의 실천성이 요구되면서, 군부독재 정권에 대한 민주화 운동과 자주 통일 지향의 민족 운동이 그 운동적 기반인 민중을 발견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서술하는 민중사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민중에 대한 역사적·사회과학적 인식으로서는 ≪한국민중론≫(1984)에 이어 ≪한국민중사≫(Ⅰ·Ⅱ, 1986)가 간행되어 한때 민중사학이 본격화되는 듯했다.

셋째, 종래 터부시되던 연구 영역으로서 일제시대사와 광복전후사 및 최근의 역사가 이제 ‘거리낌없이’ 역사연구의 객관적 대상으로서 도마 위에 올려지게 되었다.

광복 후 지금까지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못했던 분위기가 일제시대사는 물론, 그 후의 시대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신 체제와 제5공화국의 독재 체제와 싸운 세대들이 그 힘을 축적해 종래 터부시하던 연구 영역을 타파하게 되었다. 이 또한 실천적 운동력이 연구 세력화했기 때문이다.

넷째, 남북한의 역사학이 만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측에서 보면 북한 사학의 성과를 선별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아직은 활발하게 수용되지는 않지만, 1988년 7·7선언으로 분야에 따라서는 상당한 수준까지 논의, 수용되고 있다. 거기에 비해 남한 학계의 연구 업적이 북한 학계에 어느 정도까지 수용되느냐의 문제는 미지수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 '문민정권'과 '국민의 정부'가 집권해 학문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신장되었고 따라서 국사학도 자료 발굴과 연구의 활성화로 새로운 도약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할 것이다.

각종 국역 자료들과 독립운동 자료들, 문집류의 간행 등이 국사학을 포함한 국학의 발전에 큰 힘이 되고 있으며, 연구의 다변화를 모색하게 되었다.

90년대에도 여러 연구회 학회 및 연구소가 설립, 연구 발표와 학술지 간행을 통해 학술활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이들 기관(연구회·학회·연구소)들 중에는 90년대의 추세에 맞춰 그 명칭을 ‘연구회’에서 ‘학회’로 변경하기도 했다.

학문의 분야도 정치사를 비롯해 경제사회사·문화예술사·종교사상사·지방사·대외관계사·군사(軍史)·민속사·사학사(史學史)·인물사 등 여러 분야에서 깊이 있는 연구들이 속속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남한 학계가 이 같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북한 학계는 70년대 유일 체계가 수립된 이래 북한 체제에 부응하는 몇몇 특수한 분야(예를 들면 단군 등)를 제외하고는 침체 상태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한국 사학은 그 동안 남북의 분단이 가장 심하게 노출되었던 분야로서 앞으로 민족 사의 정립을 위해 분단 상황에서 연구된 내용을 서로 수렴해 통일시대의 국사학을 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남한이 민족주의 사학과 실증주의 사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데 비해 북한이 마르크스주의 사학을 수용했기 때문에, 아직은 연구의 시각에 큰 편차를 보였을 뿐 아니라 중점 연구의 대상과 해석에도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통일시대의 한국 사학은 통일된 하나의 견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통일시대의 사학을 지향하기 위해 남북한 사학은 그 동안 편차를 보이고 있는 부분에 대해 다음 몇 가지를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역사 연구의 골간인 시대구분에서 남한 학계는 북한 학계의 토론을 거친 통일된 시대구분론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구석기시대의 상한선을 40만년 내지 60만년으로 잡은 것은 남한의 제천 점말동굴의 것과 비슷하지만, 평양의 ‘만달사람’이나 평남 덕천의 ‘승리산 사람’을 민족의 선인으로 보고 민족의 본토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남한 학계가 동의하지 않는다. 최근의 단군유골 발굴도 남한 학계에서 동의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청동기시대의 상한선을 기원전 2,000년대를 넘기는 것도 남한 한계와 차이가 있다. 또 고대국가로서 고조선이 과연 노예제 국가인가 하는 문제와 고대의 하한선을 고조선 말기로 보는 문제, 이어서 삼국시대의 출현을 중세의 시작으로 보는 문제들이 남한 학계가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중세의 설정과 관련, 그 중간의 시대구분을 말하고 있긴 하지만 중세를 기원 1, 2세기에서 1860년대까지로 보는 것은 한 시대가 너무 길어 한국 사회의 내재적 발전을 담을 수 있을지도 우려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자본주의가 태동했다는 주장은 남한 학계의 1960∼70년대의 연구 성과와 비슷하지만, 근대의 출발을 1860년대로 보고 한국 사회의 내재적 발전보다는 반침략을 강조하는 북한 학계의 인식은 남한 학계에서 조선 후기에서 1890년대설 등 다양하게 주장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현대를 광복 후로 보았으나, 유일주체 사상이 확립되면서 1926년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 년도로 바꾼 것은 정치력이 역사학까지도 지배하는 단적인 예로 간주된다.

남북 사학연구에서 가장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은 독립운동사 혹은 민족운동사 부분으로서, 남한 사학계가 중국 관내와 동북삼성의 독립 운동은 물론 러시아와 미주의 것까지도 포괄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북한은 북만주 지역의 무장 항일운동 외에는 수용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통일시대의 한국사 인식을 위해서는 남북한이 획일성을 지양하고 다양한 방법론과 사관을 통해 연구의 활성화를 기해야 할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발굴 보고와 문헌 자료의 교환, 연구 성과물의 교환·공유 및 토론 등이 필요할 것이라 본다.

남북한 양측은 역사의 이념과 연구 방법 및 연구 대상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서, 서로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한계가 주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민족통일을 포기하지 않는 한, 민족사 연구를 위한 자료와 연구 업적을 수용하고 공유하는 노력은 끈기 있게 지속되어야 할 것이다.

<이만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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