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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3 (목) 10:24
분 류 사전3
ㆍ조회: 845      
[근대] 개화기의 사학 (민족)
사학(과도기의 역사학)

세부항목

사학
사학(삼국시대-역사적 자각과 역사기술)
사학(통일신라시대-통일기의 역사의식과 그 성과)
사학(고려-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
사학(조선 전기-객관적 역사인식과 주관적 역사체계)
사학(조선 후기-전통의 역사와 각성의 역사)
사학(과도기의 역사학)
사학(근대민족주의 사학)
사학(근대사학의 분화)
사학(광복 직후의 역사학)
사학(식민주의사학의 극복)
사학(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의 모색)
사학(참고문헌)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의한 개항은 한국인의 의식과 생활에 큰 충격과 변화를 주었다. 외세의 충격에 대응하는 자세에 따라 크게 개화(開化)와 척사위정(斥邪衛正)의 사상적 조류가 형성된다는 것은 이미 조선 말기 역사 이해의 정형처럼 되어 있는데, 이러한 사상적 변화는 기존의 역사이해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수반하고 있었다.

앞에서 이미 이 시기에 시대적 각성에 따른 역사의 재정리의 필요성이 주어졌다고 지적되었거니와, 이것은 외세의 침략과 봉건적 사회 모순에 대응하는 반침략·반봉건의 근대의식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과도기의 역사학은 개항 이후의 조선 사회와 국제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시대의식의 반영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개항 이후 외세의 침투로 민족적 자존에 대한 위협이 심화될수록, ‘왜 이렇게 되지 않으면 안 되었는가?’라는 질문은 잔존하고 있는 봉건적 모순과 무관하지 않다는 역사의식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

외세의 침략이 노골화하는 조선 말기에, 이러한 역사의식을 근거로 이에 대처하는 한국인의 태도는 의병 투쟁 등 무력 활동의 방식과 교육·언론·식산 등을 통한 민중계몽·실력배양 등 자강 운동의 방식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이중 후자의 경우 필연적으로 민족사를 각성시키는 데서 출발점을 삼고 있었다. 조선 말기의 역사 연구와 역사 교육이 일종의 자강 운동으로서의 실천적인 의미를 띠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따라서 계몽기의 역사가들은 국가 흥망의 원인과 민족 성쇠의 과정을 살펴보게 하는 역사야말로 애국심의 원천이면서 구국 운동을 전개하는 근거라고 했다.

역사는 이제 지난 날의 어떤 사실을 나열하는 단순한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고, 민족적 현실의 원인을 살펴 그것을 타개하는 인문학적 근거로 등장했다.

역사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종래의 역사학의 근거라고 할 역사관·연구 방법·서술 태도를 재검토하게 되었고, 새로운 연구 방법 등이 모색될 수밖에 없었다.

종래의 역사학은 지배자의 자기 정당성을 과시하는 수단이었고, 기껏해야 훈민적(訓民的)·교훈적인 성격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것을 담는 역사 서술의 방법도 사실을 편년체적으로 나열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종래의 과거 지향적인 역사인식 태도나 고식적인 분석 종합의 방법으로서는 당시의 급박하고, 중첩된 과제를 제대로 분석해 해결할 수 없었다. 역사학에 대한 관점의 변화가 가능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사회 발전을 인과 관계 위에서 분석, 종합하는 근대 역사학이 등장하는 것은 이같은 추세와 관련이 깊다. 역사의 대상도 지배층이 아니라 국가·민족·민중으로 변화되었으며, 주관적·순환론적인 역사인식이 객관적·발전적인 인식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이제 역사는 자신의 ‘왜 그렇게 된 것’을 냉엄하게 인과적으로 밝혀야만 했고, 그것도 무비판적으로 사료를 나열하던 방법을 지양하고 사료의 객관적 검증을 토대로 인과 관계를 발전적으로 서술하는 태도를 지녀야 했던 것이다.

조선 말기에 새로운 역사학이 태동되는 배경의 하나로서 주목해야 할 것은, 뒷날 식민주의 역사학으로 발전하는,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사 연구이다.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은 서구의 학술과 문물을 급속히 도입해 서구식 근대화에 열을 올렸다.

일본은 1877년 제국대학을 설립하고 10년 후 사학과(史學科)를 설치해 근대 역사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뒷 날 제국대학 출신의 관학자들이 한국사 연구에 종사하며 그들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이른바 식민주의 사학을 성립시키게 된다.

일본측의 한국사 연구는 대학의 학자들에 의해 본격화되기 전에, 참모본부에서 먼저 관심을 가지고 조선 침략을 위한 군사 작전의 일환으로 시작하고 있었다.

즉, 일본 참모본부는 1883년 만주에서 탁본해 온 광개토왕비문을 검토해, 고대 일본이 이미 한반도에 진출하고 있었음을 기정 사실화하는 작업을 폈던 것이다.

19세기 말의 일본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고대사에 국한되어 있었다. 일본은 한국 진출의 역사적 근거를 고대 한일 관계에서 찾았다.

옛날 신화시대부터 한국이 그들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고대사 인식과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등의 역사관을 한국 진출의 명분과 침략의 정당성을 제공하는 구실로 삼은 것이다.

초기에는 그러한 관점에서 하야시(林泰輔)의 ≪조선사 朝鮮史≫(1892)와 요시다(吉田東伍)의 ≪일한고사단 日韓古史斷≫(1893) 등이 출간되었다. 이같은 일본의 조선사 관계 책자들은 뒷날 현채(玄采)와 김택영(金澤榮)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고대사 연구에서 시작된 일본인의 한국사 연구는 1894년(고종 31)의 청일전쟁 후 점차 근대사·사회경제사 분야의 연구로 전환했다.

그들의 한국 진출이 침략의 명분을 찾는 단계에서 강점을 위한 실질적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제는 그들의 한국사연구도 이러한 변화에 보조를 맞추었던 것이다.

1902년 한국을 방문한 후쿠다(福田德三)은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에서 처음으로 한국사의 ‘정체성론(停滯性論)’을 주장했고, 그 뒤 일본 여러 학자들이 같은 주장을 되풀이하게 되었는데, 경성제국대학 교수가 되었던 시카타(四方博)도 그 대표적인 학자다.

정체성론은 한국사가 왕조의 변화 등 정치적인 변동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는 제대로 발전하지 않고 정체되었다는 주장이다. 한국사의 정체성이론이 주창될 20세기 초에는 역시 일본인 어용학자들에 의해 한국사의 ‘타율성론(他律性論)’이 수립되었다.

타율성론은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동경(東京)지사 안에 설립된 만선지리역사조사실에서 주장한 만선사관(滿鮮史觀)에 기초해 성립된 것으로, 한국사가 한국인의 자율적인 판단에 의해 전개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외세에 의해 타율적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정체성 사관과 타율성 사관은 식민주의 사학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는데, 두 이론은 모두 일본의 한국 침략과 지배를 한국사를 통해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한국의 근대 역사학은 이같이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 말기에 새로운 역사학이 태동하는 한편, 근대민족주의사학이 성립된 것은 앞에서 말한 일제 어용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이 미친 영향과 자극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말기 과도기의 역사학은 전문적인 역사 연구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교육·계몽 운동에 종사하던 인사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처음에는 실학시대의 박지원(朴趾源)·정약용·김정희(金正喜)의 사상을 연구하거나 그들의 저술을 복간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이 때 복간된 것은 ≪연암집 燕巖集≫과 ≪목민심서≫·≪흠흠신서 欽欽新書≫·≪아언각비 雅言覺非≫와, 장지연(張志淵)이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我邦疆域考≫를 증보·개정하여 출간한 ≪대한강역고 大韓疆域考≫ 등이 있다.

또 조선 말기의 사회 변동과 외세의 압력이 지식인들의 역사의식을 자극시켜 몇몇 저서들을 출간하게 되었다. 통사류로서는 정교(鄭喬)·최경환(崔景煥)의 ≪대동역사 大東歷史≫와 김택영(金澤榮)의 ≪역사집략 歷史輯略≫, 일본인 하야시의 ≪조선사≫와 ≪조선근세사 朝鮮近世史≫를 번역·편집하여 만든 현채의 ≪동국사략≫등을 들 수 있고, 당대사(當代史)의 성격을 띤 것으로 황현(黃玹)의 ≪매천야록≫, 정교의 ≪대한계년사 大韓季年史≫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대동역사≫는 처음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자주적인 한국사를 가르쳐 역사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해 저술된 것으로, 독립협회가 해체된 지 8년 만에 출간되었다.

1905년 ≪역사집략≫을 출간한 김택영은 그 전에 ≪동국역대사략≫과 ≪동사집략≫ 편찬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이 책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집략≫은 ≪일본서기≫ 등에 나타나는 고대 일본의 한국 침략과 경영을 그대로 옮기는 등, 일본의 주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이 시기 지식인들은 역사 체재 수립에 고민했다. 현채가 하야시(林泰輔)의 것을 편역해 ≪동국사략≫을 간행한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체제분립(體制分立)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반성을 ≪동국사략≫의 편역에 담으려 했다.

한편 ≪동국사략≫은 ≪조선사≫가 지녔던 식민주의 사관적인 요소를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수정할 수 있었다. ≪조선사≫와 달리 현채는 단군을 역사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사군문제(四郡問題)와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및 임진왜란 등에서 하야시의 ≪조선사≫와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조선 말기 과도기의 사학은 반봉건·반외세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민족의식을 기반으로 한 계몽주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역사연구 방법론이나 역사 서술면에서는 근대적인 단계에 이르렀다고 볼 수 없었다. 과도기의 사학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를 거치면서 근대민족주의 사학으로 정진하게 되었다.

<이만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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