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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0-23 (목) 10:39
분 류 사전3
ㆍ조회: 1758      
[근대] 근대 사학 (민족)
사학(근대사학의 분화)

세부항목

사학
사학(삼국시대-역사적 자각과 역사기술)
사학(통일신라시대-통일기의 역사의식과 그 성과)
사학(고려-자치적인 역사와 민족의 역사)
사학(조선 전기-객관적 역사인식과 주관적 역사체계)
사학(조선 후기-전통의 역사와 각성의 역사)
사학(과도기의 역사학)
사학(근대민족주의 사학)
사학(근대사학의 분화)
사학(광복 직후의 역사학)
사학(식민주의사학의 극복)
사학(분단사학과 통일지향 사학의 모색)
사학(참고문헌)

1910년∼1920년대에 발달한 한국의 근대사학은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 사학에 대결하는 한편, 유물론을 비롯한 다양한 역사 이론과 방법론을 도입하면서 분화 현상을 겪게 된다.

국사학계에서는 이들 분화 현상을, 박은식·신채호 등의 초기 민족주의사학을 계승한 후기 민족주의사학과 사적유물론(史的唯物論)에 입각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 및 진단학회(震檀學會) 중심의 실증주의 역사학으로 정리하고 있다.

후기 민족주의사학은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문일평(文一平) 등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권덕규(權悳奎)·황의돈(黃義敦)·장도빈(張道斌) 등도 이 계열에서 논의되고 있다.

이들 중에는 국망(國亡) 후 중국에 망명해 박은식·신채호와 함께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해 민족독립 운동에 참여한 이들도 있어 역사 연구를 민족 운동의 일환으로 이해했다.

강한 민족 의식으로 무장된 이들은 일제의 타율사관에 대항해 민족주체 사관을 강력하게 주창했다.

또 그들은 박은식의 국혼 사상, 신채호의 낭가 사상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정신사관을 강조하였는데, 정인보는 ‘얼’, 안재홍은 ‘민족정기’, 문일평은 ‘조선심’을 각각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세력으로 인식했다.

양명학(陽明學)을 배경으로 한 정인보는 이건방(李建芳) 문하에서 수학한 한학자로서 일제강점 후 한 때 상해(上海)에 망명, 박은식·신채호와 교유하기도 했다.

그는 일제 식민주의 사관론자들이 한국고대사를 훼멸하는 것을 보고 분개해 ≪동아일보≫에 〈오천년간의 조선의 얼〉을 연재했는데, 뒷 날 이를 ≪조선사연구 朝鮮史硏究≫(상·하)로 간행했다.

그는 역사의 본질을 ‘얼’에서 찾으려고 했으며, 민족 정신인 “얼을 고수함으로써 민족의 발전과 독립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인보의 한국사 연구는 주로 고대사에 한정되어 있다. 그는 일제 관학자들이 부인하는 단군조선에 대해 역사적 실재성을 주장했고, 고조선을 발조선(發朝鮮)·진번조선·예맥조선·낙랑조선으로 파악하는 한편, 한반도와 만주 전역 및 중국 동해안 회수(淮水) 지역의 동이족(東夷族) 활약을 강조했다.

그의 고대사 인식은 신채호의 것을 계승·발전시키고 있는데, 한사군론이나 백제의 해상 발전설 등에서 특히 그러하다.

정인보는 한사군이 압록강 이남에 존치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 증거로 이른바 ‘낙랑출토 유물’을 들었는데, 이는 일제 어용학자들이 평양 근처에서 출토된 봉니(封泥)에 ‘낙랑’이라는 명문이 있다고 하면서 그 지역을 한군현 중의 ‘낙랑’이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론으로 제시된 명쾌한 답변이었다.

그는 또 일제 관학자들이 광개토왕비문을 들어 고대 일본의 조선진출을 강조했음에 대해, 같은 비문의 신묘년조(辛卯年條)를 새롭게 해석해 일본학자들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왜(倭) 정벌을 주장했다.

안재홍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수학 후 상해에 망명해 동제사를 통해 독립 운동에 참여했고, 귀국 후 언론·사회 활동에 투신했다. 조선일보사 사장 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등을 연재했다.

1930년대 국내에서의 민족 운동이 크게 제약받자 그는 민족 정기를 불후에 남기기 위해 국사 연구에 전심하여 ≪조선상고사감 朝鮮上古史鑑≫(상·하)를 남겼다.

이 연구에서 언어학적 방법론과 사회발전 단계설을 도입해 한국 고대사의 실체를 밝히는 한편,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있던 고대사를 바로잡는 데에 노력했다.

문일평은, 정인보·안재홍과는 달리 고대사연구에 주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신채호가 주장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의 역사관을 역사 연구에 반영하려고 애썼다.

그가 한국사에 나타난 ‘반역아’를 굳이 연구의 대상으로 한 것이나, 국제 관계사로서 ≪한미수교50년사≫를 서술한 것은 국내·국제 관계에서 ‘아와 비아’를 주목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문일평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서 인식한 것도 신채호가 사회 발전 주체로서의 민중을 인식한 것과 같았다.

후기 민족주의사학이 고대사 분야 연구에 역점을 둔 것은,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에 의해 가장 많은 상처를 받은 분야가 한국 고대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기 민족주의사학이 방법론과 과학성에서는 일정한 한계가 없지 않았으나, 초기 민족주의사학에 비해 한층 세련된 점이 없지 않다.

특히 일제의 타율성이론 등 식민주의사학에 대항해 한국사의 실제 면모를 자주적인 관점에서 부각시키려고 한 것은 사학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러시아 혁명의 여파로 새로운 조류가 수용되면서 노동·소작쟁의 등 민중 운동이 강렬하게 대두되었고, 역사학계에는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전개되었다.

한국에서 마르크스주의 사학을 개척한 사람은 백남운(白南雲)으로, 그는 ≪조선사회경제사 朝鮮社會經濟史≫(1933)와 ≪조선봉건사회경제사 朝鮮封建社會經濟史≫(1937)를 일본어로 펴냈다.

두 저서는 한국의 고대 및 중세사를 사회경제적 발전법칙에 의해 해명한 것으로, 유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세계사적 발전 법칙에 따라 과학적으로 해명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는 당시 우리 나라의 역사를 특수한 사관으로 이해하려는 식민주의 사관과 민족주의 사관을 동시에 비판했다. 한국사가 ‘세계사적 일원론의 역사법칙’에 따라 다른 민족들과 같은 발전 과정을 걸어왔다고 주장하면서 일제의 식민주의 사학이 한국사를 타율성과 정체성으로 특수사관화했음을 폭로, 비판했다.

한편, 당시 민족주의 사학 역시 초월적·절대적인 ‘정신’을 내세우며 관념론적으로 특수화하려 한다고 비판하고 이렇게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은 곧 ‘무의식적 노예화의 길’이라고 비난했다.

1930년대부터 활동한 유물사관론자들은 백남운에 이어 이청원(李淸源)·김광진(金洸鎭)·이북만(李北滿)·박극채(朴克采)·박문규(朴文圭)·김태준(金台俊) 등이 있었다.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는 김석형(金錫亨)·박시형(朴時亨)·전석담(全錫淡)·김사억(金思億)·임건상(林建相)·김일출(金一出)·이진영(李辰永)·김한주(金漢周)와 고고학자인 도유호(都宥浩)·한흥수(韓興洙) 등이 가세했다.

이들은 사적 유물론에 의해 한국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보편적·과학적으로 해명하려고 했으며, 그러한 역사인식을 통해 현실 변혁을 모색하고자 했다.

이들의 연구는, 뒤에서 다시 보겠지만, 후쿠다 이후 일제의 정체성론자들이 주장해온 한국의 봉건제결여론(封建制缺如論)을 극복하는 한편, 이식자본주의에 의한 식민지 지배의 본질을 폭로해 현실 변혁을 위한 실천적 역사의식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들 유물사관론자들 또한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교조적 성격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사의 발전 단계를 서양사 중심 5단계 발전론의 틀에 대입함으로써 한국사의 바른 인식을 흐리게 하였고,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이라는 일종의 특수 이론에 입각해 한국사를 해명하려고 오히려 한국사의 정체성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런 연구 자세가 바로 그 한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를 해명하려 한 이들의 노력은 이렇게 방법론상으로 한계가 지적되고 있으나, 한국사 연구의 전통에서 볼 때 그 동안 방치되어온 사회경제사분야의 연구를 개척했다는 점에서도 한국사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은 광복 후 연구의 장을 달리해 북한의 역사학을 주도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이 남겼던 한국사의 타율성론과 정체성론을 비판, 극복하는 한편,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 성립의 당위성을 역사발전 단계론의 입장에서 규명하는 데도 앞장서게 되었다.

후기 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발전하던 1930년대에는 실증주의 사학이라는 학풍이 떨치게 되었다. 실증주의 사학은 랑케(Ranke,L.)의 역사학을 기초로 개별적인 역사 사실에 대한 문헌 고증을 주된 학문적 방법으로 채용했는데, 당시 일본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조류를 이루고 있었다.

민족주의 사학이나 마르크스주의 사학이 다분히 주관적이고 교설적인 성격이 강함에 비해, 이들은 랑케의 “주관적인 판단없이 역사적 사실을 원래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한국사 연구에 임했다.

이 학풍에 속한 대표적인 학자들로서 이병도(李丙燾)·김상기(金庠基)·이상백(李相佰)·이선근(李瑄根)·이홍직(李弘稙)·신석호(申奭鎬)·유홍렬(柳洪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일본의 와세다대학이나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및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의 사학과 등 일제의 고등교육 기관에서 근대 사학을 수련받았던 사학도들이었다.

이들은 대학 교육에서 이미 일본인 조선학 연구가들을 스승으로 했기 때문에, 스승들이 표방했던 가치 중립적인 문헌고증 사학의 방법론을 수용했다.

‘가치중립적’이라는 명분 하에 진행된 역사학 연구는 결과적으로 식민지적 상황을 의식해야 하는 역사학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민족 문제를 의도적으로 배제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문헌고증 중심의 실증주의 사학은 “사료에 대한 주관적 해석을 배격한다는 명분 아래 역사 연구에 있어서 사관과 이론을 배제하고 합리적인 사료 비판과 해석만을 강조하는”, 말하자면 ‘민족문제 인식부재의 역사학’이었기 때문이다.

역사인식의 대상이어야 할 민족 문제를 일정하게 배제하고 있던 실증주의 사학은 개별적인 사실이나 역사지리의 문헌 고증에 노력을 기울였다. 이병도는, 일제의 식민주의사학이 정치적인 요구와 학문적 호기심으로 한국의 고대사와 만선지리(滿鮮地理)에 집중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일제의 탄압 밑에 민족의 역사가 짓밟혀가는 수난 속에서 자기 나라의 역사를 밝혀야겠다는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또 특히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 우리의 주체성을 찾으려고”, “필시 고대사 연구에는 역사·지리의 연구가 기초적이고 선결적인 것을 느끼고 종래 학자들 사이에 취송(聚訟)이 분분한 삼한사군(三韓四郡)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사·지리의 고증을 중심으로 한 고대사 연구는 식민주의 사학에 대한 대결 의식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임나일본부연구〉 등 이홍직의 한국고대사 연구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1934년 당시 한국학 전반에 종사하는 한국인 학자들과 함께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조직했다. 여기에는 국어·국문학자들과 민속·인류학자들도 참여했고, 역사학자들로서는 문일평같은 민족주의 사학자와 박문규(朴文圭)같은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도 참가했다.

진단학회는 표면상으로 ‘조선 및 인근 문화의 연구를 목적’으로 했으나, 내심으로는 ‘일인에 대한 학술적 또는 민족적 항쟁’을 위해 조직되었고, 따라서 ≪진단학보≫의 간행도 연 4회로 하여 일본인들의 ≪청구학총 靑丘學叢≫을 앞지르고 있었다.

실증주의 사학은 이렇게 연구자의 주관성을 배제하고 학문의 객관성을 제고하는 등 학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한 역사학을 추구했기 때문에 역사학의 방법론인 문헌 고증을 심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러한 방법론에 입각해 일제 어용학자들과 대결할 수 있는 학자를 식민지하에서 배출했다는 점에서 사학사상 일정한 의미를 가진다.

이 점은 국사 연구를 독립 운동의 방편으로 하였던 민족주의 사학이나 역사 연구를 이데올로기 혹은 프롤레타리아 운동과 연관시켰던 마르크스주의 사학과도 구별된다.

그러나 실증주의 사학자들은 학문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명분으로 일제의 식민지 체제를 묵시적으로 용납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 등 총독부의 식민통치 기구에 종사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일제 관학자들의 식민주의사학 구축에 협력하게 되었다.

이같은 평가는, 그들이 일제 강점하에서 한국인으로서 한국사를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 자체가 민족적 자부심과 일제에의 저항 의식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동정적 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식민주의사학자들과 “똑같은 역사관·연구 방법·한국사 인식 체계를 가지고 연구를 하는 한” 그와 같은 학문적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형식 논리에서 연역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젊은 학자들에 의해 실증주의 사학이 “본질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기구 내 철저히 체제화 된 채 반식민주의 역사학과는 거리가 먼 식민주의 역사학의 아류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지적은 다소 성급한 결론인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세대의 비판적인 시각을 예고하고 있어서 앞으로 그에 대한 냉엄한 사학사적 검토를 요청하고 있다.

<이만열>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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